신들의 사회 혹은 젤라즈니에 대한 포효

읽거나 혹은 죽거나 | 2005/05/11 19:56

한 줄 감상 : 대관절 내가 뭘 그리 <정치적으로 반듯>했다고 이 근사한 책에 마음 놓고 부비부비할 수 없는 게냐...!

칼리가 싫습니다. 같은 여자로서 몇 되지도 않는 여성 캐릭터의 필두를 대박 짜증나는 년이라고 욕하기 싫은데 더럽게 짜증납니다. 경애해 마지않는 모님께서 로저 젤라즈니의 글은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행간에서 펄펄 묻어나는 white male의 냄새가 기분 망친다고 투덜대실 땐 흘려들었습니다. 인간, 지가 겪어봐야 실감도 하는 법입니다.
생각도 쪼잔하지, 현실 인식 능력도 부족하지, 능력 없지, 아무튼 하는 짓 하나하나가 그냥 보는 사람 속을 발랑 뒤집어놓기 딱 좋습니다. 뚜렷한 자기 주관도 없으면서 순전히 샘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브라흐만 직을 수락했을 때, 니리티가 코앞까지 닥쳐든 와중에 다시 여자가 되고 싶다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는 그냥 한 대씩 패주고 싶었습니다만, 어떻게 이놈의 신권주의를 뒤엎고 하늘을 조잘낼까 하는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한 샘을 붙들고 나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하늘을 떠난 거냐고 집요하게 물을 때는 오히려 칼리에 대한 짜증보다도 '남자가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 바쳐 매진할 때 여자는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한다'는 지독히 오래 묵은 편견이 노골적으로 묻어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작가에 대한 악감이 앞서더군요. 아주 뱃속 불편해 죽겠습니다.
부잉을 던지자면 옛날에 고리짝 된 여성의 남근동경설(이런, 진짜 명칭이 뭐였죠? ;;;) 냄새가 풀풀 나는 선대 브라흐만(마들레느)의 설정도 기분 더럽기는 마찬가지고, 거기 샘! "모든 레즈비언이 당신을 부러워할 거야" 는 또 뭐고, '여신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여자에 불과했고, 야마의 도움을 받아서 싸워야만 했던 것이다'(대충 비슷....) 어쩌고저쩌고 나불대는 타라카도 한 대 맞아 쌉니다. 온갖 신들이 떼거지로 우글우글 몰려나오는 가운데 안 그래도 모자란 여신 중 그나마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상황에 휩쓸려 가는, 심지어 반군에 일단 가담은 해놓고도 재판정에서조차 쿠베라의 종범으로 간주되어 탁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것에 그친 라트리란 건 정말 눈물 날 일입니다.
명색이 히로인을 요따위로밖에 설정 못하겠으면 차라리 여자를 빼달란 말이오 젤라즈니 영감; 남자 온리의 땀내 물씬물씬한 스토리 쪽이 훨씬 기분은 덜 더럽겠소 우어어어어어어 (그러나 white male의 글에서 여자가 빠질 리가 없지-_-;;;;)

아니 좋다구요. 정말입니다. 여자 문제만 좀 어거지로 잊으면 내용도 설정도 인물도 그야말로 모에모에. 명색이 불타 주제에 사기(詐欺)의 도를 터득하고 있는 샘은 저놈의 레즈비언 운운 발언만 빼면 '세상에서 제일 뻔뻔한 기억상실증 환자'(H양) 코윈과 더불어 여러 가지로 꽤 마음에 드는 주인공이었고, '구속자'의 빠돌이 티를 너무 내는 타라카도 나름대로 귀여웠고(너무 허무하게 죽었어요... 우에에에에. 하여튼 남자들이란 쓸데없는 데 목숨 걸다 지옥 간다니까;), 쿠베라는 원래 좋아하는 타입이고요. 유쾌하고 머리 좋고 현명하고 참견 잘 하는 방관자 같은 거 너무 좋습니다. 야마는... 마 됐심니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은 순정남으로 못 봐줄 것도 없지만 내 뜻에 따르라~며 한참 연상인 마누라를 달달 볶아대다 이혼 한 번 당했다고 대박 삐져서 촉진주의 쪽으로 홀랑 돌아서는 남자 따위 이쪽에서 사절일세. 있는 대로 개폼잡고 '하늘에 대한 나의 증오는 깊소' 라며 나불댈 때는 배 잡고 마음껏 비웃어 드렸습니다. 마지막에 병아리 눈물만큼 감동 좀 줬다고 그게 만회될 것 같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소.

「신들의 사회」의 점수가 깎인다면 순전히 저 야마-칼리 민폐짜증커플 때문일 겁니다(특히 칼리). 젠장! 나도 '이렇게 근사한 SF는 난생 처음 읽어봐요~꺄아~>_<' 라며 방방 뛰어보고 싶다구!!
(「타이거! 타이거!」에 이어 「신들의 사회」까지. 헉, 나는 이런 데서 마이너 체질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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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mic71 2005/05/11 17:46
'남자들이란 쓸데없는 데 목숨 걸다 지옥 간다'는 명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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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2005/05/13 02:29
제대로 된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면 젤라즈니에 몰입하기 힘들다고들 하길래... 스스로의 여성관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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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05/17 11:09
rumic71님 / 그저 먼눈이옵니다.

조나단 님 / 지금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읽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열이 오릅니다. 젤라즈니이이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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