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거미였군요」
졌습니다, 쿄고쿠 나쯔히코 씨.
크리에이터도 아닌 S가 이토록 처절한 패배감을 느껴보기도 오랜만입니다. 단지 역전된 구성만으로 사람을 여기까지 전율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우부메의 여름 후에도, 망량의 상자를 완독한 후에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한 애상 같은 것이 오래도록 감돌았지만, 죠로구모의 도리는 그것과는 또 다른, 전율과 함께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을 S에게 남겼습니다. 후유증은 꽤 오래 갈 것 같군요.
프롤로그의 대화는 처음으로 이 책을 잡은 독자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습니다. 대명사로 일관하고 있는 두 남녀의 애매모호한 담론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봤자 남자가 누군지는 명백합니다만) 무려 1380페이지에 달하는 숨가쁘게 긴 소설과 함께 끝까지 달려온 사람만이, 마지막에서 마침내 진실을 알고──일견 애매모호한 대화의 진의는 그제서야 읽는 이의 머리를 강타합니다.
치명적인 천기누설이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추젠지 아키히코는 왜 오리사쿠 아카네를 용서해야만 했을까요.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았다 할지언정 그녀는 무려 열 다섯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중의 네 명은 추젠지의 눈 앞에서 처참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누리보토케의 연회에서 추젠지는 말했습니다. ──직접과 간접을 불문하고, 내가 취한 행위로 인해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프롤로그에서 아카네가 지적했듯이, 그는 사실 시무룩한 표정과 밉살맞은 독설에 가려진 대책없는 휴머니스트입니다. 뒤로 가면 갈수록 사람이 좋은 것에도 한도가 있다며 한숨이 터져나오리만치, 상냥한 근본이야말로 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사람 여럿 눈 앞에서 죽어나가고, 그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끔찍한 소모를 겪었는지는 미도리가 살해당하고 오리사쿠 가로 왔을 때 이미 눈밑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를 용서했습니다.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녀를 코너로 몰아넣은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런 '사소한 사실'은 하등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끈덕지지만 추젠지 아키히코, 쿄고쿠도의 역할은 '제령'이지 '사건 해결'이 아니니까요. 이제까진 제령에 사건 해결이 덤으로 따라왔을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이토나 미마사카 교수도 법에 저촉될 만한 행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추젠지는 전자는 저주하고──후자는 있는대로 몰아세웠었죠. (미마사카는 몰아세우는 게 통할 남자는 아니었습니다만) 대화를 반추해 보면 아카네는 분명 크게 흔들렸습니다. 거기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어째서일까요.
그건, 오리사쿠 아카네가 추젠지 아키히코와 동류였기 때문일 겁니다.
영혼의 반신. 거울의 영상. 아니마. 소울메이트. 표현은 뭐든지 좋습니다.
자신은 결코 움직이지 않은 채 교묘한 화술로 상대방을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얽어매어 자발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그녀의 수법이야말로 추젠지의 최대의 무기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아카네야말로 '언어'로서 사람에게 내리는 저주가 얼마나 본인에게 많은 것을 강요하고 잃어버리게 하는지, 그 무기가 어떤 날을 세우고 되돌아와서 어떤 상처를 남기고 어떤 고뇌를 드리우는지, '같은 시선'─다시 말해 추젠지 아키히코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단죄할 수 없었던 거겠지요.
거울에 비친 자신과도 같은 그녀를.
그렇습니까──남자는 말했다.
「허나──이대로 여기에서 이와나가히메가 되어, 평생 묘를 지키면서 사는 것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도 상냥한 말을 들려주시니까──」
당신은 오해를 사시는 거예요──여자는 말을 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끝말은 봄의 돌풍에 묻혀 흩어지고, 남자는 듣지 못한 채 짐작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무수한 벚꽃잎 속에서.
현재 S의 마음 속에서는 죠로구모의 도리와 망량의 상자가 쿄고쿠도 시리즈의 1위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라스트의 서글픈 여운은 망량의 상자, 전율과 오래 남는 뒷맛은 죠로구모의 도리, 등골이 서늘한 클라이맥스의 박력은 망량의 상자,
음흉한 웃음을 참기 힘든 전개(!?) 서브 캐릭터의 개성과 호감도는 죠로구모의 도리. 하나 고르기 참 힘들군요;;;
덤. 새삼스럽지만 에노키즈 레이지로는 좋은 남자입니다. 엄청나게 바보 맞지만 좋은 남자도 맞습니다. 당신 최고야...!! (부들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