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오랜만에 추억에 잠기다.

보거나 혹은 죽거나 | 2005/11/07 10:04

일요일 하루 X TV판을 돌려보며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음. (.........)
으아아아아아 이거 왜 이렇게 웃기냐아아아아아아아아

내가 X와 조우한 것은 아직 파릇파릇한 중딩이었을 무렵, 4권까지 발매된 해적판을 별다른 생각없이 대여점에서 뽑아드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어느 봄날의 하루였다. 그 빌어먹을 작품에 훌~러덩 빠져 어찌저찌 알게 된 용산에 출입하다 국내에서 나오지 않은 5권부터 8권까지 원판으로 좌라락 꽂혀 있는 꼴에 눈이 번쩍 뜨여 일본어도 못하는 주제에 몽땅 다 사 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면서 일본어와 덤으로 이 바닥 인생이 시작되었으니 어찌 이가 득득 갈리지 않으랴. (그렇다. 난 X로 일본어의 기초를 닦았다. 문장이 쉽고 명확하고 속어가 없고 한자가 많아 생초보에겐 진정 왓다인 교재였다. 그 점에 있어선 오오카와 나나세에게 감사한다) 아무튼 그런 까닭에 S의 머릿속에서 X는 항상 4권과 그 이후로 나누어진다. 공교롭게도 카무이의 성격이 무지하게 개차반같고 표독하고 더러웠던 게 4권까지였다. 그리고 X가 가장 재미있었던 것도 4권까지였다. ....설마 해적판 출판사는 이걸 예견하고 거기까지만 내고 손 턴 것인가;;;
에- 또, 아무튼, 스즈켄 보이스에 눈멀어(...) 새삼스럽게 X TV판을 돌려보자니, 우리 주인공의 성격이 흐물흐물해지면서 X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는 해도 역시 첫사랑은 첫사랑, 저 애가 제대로 말하고 뛰어다니고 성질 부리고 때려부수는 걸 보고 있자니 참 대견하달까 뭐랄까, 어쩐지 여러 가지로 심경이 막 복잡해진다. 내가 한때 널 얼마나 예뻐했었던가 말이지.

X TV판이 세상에 풀려나왔을 때, 어디선가 '2권까지는 분명히 걸작이었던 X의 기세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스태프의 처절한 노력이 돋보이는 - 그러다가 원작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어긋남의 미학>을 잃어버린; - 작품'이라 평했는데, 과연 그렇다. 구성도 연출도 괜찮고, 훨씬 현실적으로 리디자인되어 있는 건 좋은데, 그것이 어째 코믹스로 접해서 알고 있는 X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마구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이야에서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는 광경을 볼 때의 어이어이;;; 한 느낌과 비슷하다. 소위 갓 쓰고 자전거 타고 빨래방망이로 홈런 날리는 기분(....).
그 대표적인 예가 청승가증(...)의 표상으로서 당시 X를 사랑하는 소녀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던 모노 코토리다. 원작의 그 유명한 옥상 신, 나한테 상관하지 말라며 틱틱대는 카무이에게 쇼크 먹고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하늘하늘 우아-_-한 포즈로 계단을 달려내려가다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는, 웬만한 순정만화의 뻘짓을 다 모아놓은 그 대목이 애니에서는 아니 저것이 뭘 잘못 먹고 승질이야? 는 표정으로 이마에 힘줄 빠직하여 문을 걷어차고 내려가는 장면으로 어레인지된 것을 보고 역시 코토리에게 온갖 짜증은 다 느끼고 있던 S는 주먹을 불끈 쥐며 굿잡!! 을 외쳤다. 좋다. 좋은데 말이지, 문제는, 이렇게 씩씩하고 튼튼하고 빠릿한 보통의 16세 소녀인 코토리는 '몽견의 자질을 타고나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고 친오빠에게 찔려 죽어 날개 달고 승천할 운명'이라는 기본 설정과 당장에 정면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이 코토리는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비상하는 꼴이 지이이이인짜로 끔찍하게 안 어울렸다;)
까놓고 말해 극중에서 코토리의 존재 이유는 두 남자 사이에 격렬한 갈등을 조성하는 도구로서의 기능뿐이다. 즉 저 아가씬 일종의 맥거핀이란 얘긴데, 모두가 알다시피 맥거핀에게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인 현실적인 개성이 부여되면 당연히 스토리가 삐걱삐걱 비명을 지른다. 오히려 원작의 '심장이 약한 청순가련 미소녀'라는 요즘 세상엔 천연기념물 지정받아 마땅한 멸종 위기종 설정이 비현실적이고 구름 위에 뜬 듯하고 애매모호~한 것이 언제 치워 버려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엄청난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오오카와 나나세는 여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인가.

교훈 : 세상은 일장일단.

(여담 하나. 처음 방영됐을 때, TV판에서도 청승가증[....]인 줄만 알고 있었던 나는 예고편의 보이쉬-한 목소리를 듣고 힉겁하여 이와오 준코 상을 돌려다오!! 고 시위했었다;;;)

아무렴 어떠냐! 나는 스즈켄 보이스를 듣기 위해 X를 돌렸다. 애니를 비평하는 능력에 버거운 일을 하려고 본 게 아니다. 그리고 목소리는 차아아아암 좋으셨다. 얼싸 좋고.
토모 군을 마음의 전당에 고이고이 모시고 있으며 앞으로도 평생 토모 군을 제일로 치리라 굳게 다짐하고 있는 S로선 좀 분한 노릇이나, '시로 카무이'에게 세키 토모카즈란 성우는 안 어울려도 안 어울려도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었다. 눈 질끈 감고(....) 선입견을 모조리 머리에서 쓸어내고 들으면 어마어마한 미성이 맞는데 불행히도 그 곱디 고운 목소리가 캐릭터와 정면으로 사중 충돌이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토모 군이 당시에 CLAMP 팬들에게 얼마나 욕을 댑다 먹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우하하하하하하 (먼 눈)
지금은 토모 군 만만세를 외치는 나도 실은 극장판 때문에 애초엔 토모 군 무지무지 미워했었다;; (뽀록나는 흑역사) 도몬 카슈-반 파넬-고(진 겟타)-히다카 켄-신도 슈이치-미야타 이치로-소마 쿄-아니자와 메이토-사가라 소스케의 줄 연타 맞지 않았으면 아마 세키 토모카즈가 얼마나 대단한 성운지 평생 모르고 넘어갔을 게다. 음, 약간 억울하다.
(그러나 "유즈리하!!" 엔 진짜 허리가 녹았다. 저런 목소리로 내 이름 불러주면 인성이야 어이 됐든 평생 쫓아간다)

아무튼 그 2분마다 사람 하나 죽어나가기로 악명 높은(....) X 극장판의 데미지가 얼마나 컸던지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피눈물을 뿌리며 세상에 시로 카무이를 재현할 수 있는 성우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속단을 내리고 만사를 포기해 버렸다. 그 때의 속단이 몇 년을 질질 끌어 X TV판이 나왔을 때도 나는 '하~ 누가 저 앨 할 수 있겠어?' 의 기분으로 1화만 대충 훑어보고 주저없이 치워 버렸던 것이다. 물론 애정이 저어기 허공 저 멀리멀리로 몽땅 증발해 버린지 오래인 탓도 있었지만.
그런데 그로부터 또 하세월이 흘러 신 아스카(라고 쓰고 '우리 애기'라고 읽음) 모에의 부작용으로 스즈켄에게까지 뼈가 녹은 S, 스즈의 초기 목소리 들어보자 우하우하♡ 의 가벼운 기분으로 스파이럴에 이어 X TV판까지 돌렸다가 그만 히껍 굳어버렸다.

어. 울. 린. 다!!! ;;;;

예상을 한참 초월하여 내가 알았고 풋풋했던 소녀 시절(먼 얘기다...) 온 마음과 첫사랑을 들어다 바친 시로 카무이란 캐릭터에게 저스트 피트로 들어맞는 스즈켄 보이스. 이럴 수가. 이렇게 어울려도 되는 건가. 부들부들 떨면서 백기를 드는 S. 그냥 아저씨가 짱드세요(.....). 세상은 넓었다. 아주 넓었다. 누구냐, 캐스팅 담당. 당신 굿잡이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한동안은 X TV판을 돌려보며 데굴데굴 구를 것으로 예상된다.


덤 하나. 그 동안 스즈켄과 에로베(응? ;)와 하즈키짱(틀렷!!)이 엄청 커 버린 탓에 성우진이 한 백 배쯤 비싸 보인다.

덤 둘. 최종화에서 진 나이스 타이밍에 부활하여 나이스하게 기사님 해 주시는 스바루에게 배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9화에서도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 부적을 휘휘휘휘휙 날려대는데 웃다 죽었음. 세짱한테 그런 것만 배우지 마라 총각...
(그리고 안 죽었으면서 죽은 척하지 마라;)
(9화의 부제 : '소라타와 아라시의 스바루 찾아 삼만리' [爆])

덤 셋. 초기엔 아라시가 소라타에게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무한대) 아깝다고 왈왈댔었다. 얼굴만으로 사람을 판단했던 철없는 중딩녀를 용서해라 소라타.... 넌 좋은 남자다!! (크윽) 최종화에서 고야산을 찾은 아라시가 종 안쪽에 새겨놓은 '내가 반한 여자가 무지무지 미인이기를!' 이란 소라타의 낙서를 미소지으며 어루만지는 광경 앞에 얼마나 만감이 교차하던지. 목적이 숨은 그림 찾기 + 허리 꺾고 폭소하기(....)가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츠바사>는, 다른 세계나마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소라타 아라시 부부(!)를 보여준 것으로 내겐 그 가치를 다했다. 거기서라도 평생 잘 살아라, 제발.

덤 넷. 범죄 커플(쿠사나기-유즈리하)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시대는 미중년과 소녀. (응?)

덤 다섯. 아오키가 모리모리라서 웃다 기절함. 킹 오브 세메의 목소리로 사람 좋은 안경 아저씨를 연기해봤자;

덤 여섯. 근데 저렇게 끝나도 되는 거야? 세상 구하고 산화하면 다인 거야? 응? 응? 응?

덤 일곱. X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그 사실.

윗도리 기장이 짧은 가쿠란은 결단코 邪道다!!!!

이런 가쿠란의 미학을 모르는 여자들 같으니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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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same 2005/11/07 10:52
X연재 중단..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흩뿌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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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자 2005/11/07 11:26
저도 TV판 엑스는 카무이 - 스즈무라 켄이치 목소리가 너무 어울려서, 단지 그 이유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신진 성우들 발탁'이라고 한참 떠들어댔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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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령 2005/11/08 15:21
안녕하세요오-비령이라고 합니다아-; 그동안 건담시드데스티니 관련 포스트를 찾아 이리로 흘러들어와서는 몰래몰래 스토킹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물밖으로 나왔습니다아; 용서해주세요;
X는-그 분량이 너무 방대해서 조금조금씩밖에 빌려서 못봤었죠(그것도 한 6개월 간격) X TV판도 보고는 싶은데...(한숨)
소라타X아라시,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라타 같은 남편 한명만 있었더라면(씨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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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照帝 2005/11/09 15:00
...하지만 그게 너무 길어져도...
(엄한것 생각하고 코피 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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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11/10 09:38
sesame님 / 애니에서 괜찮게 결론을 냈으니까 말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1999년은 이미 하옛날에 지나갔습니다... OTL

살아가자 님 / 너무 잘 어울려서 허걱했지 뭡니까. 세상은 넓어요.
그때의 신진 성우 3인조가 그 사이 엄청 컸습니다.. (笑)

비령 님 / 어서 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해도, jorebi님 사이트에서 성함은 몇 번 뵌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는지요? 양지로 나와주신 것만 해도 기쁩니다 ^^ 저도 본질이 스토커(...)이므로 미안해 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도 자주 놀러와 주세요 ^^
X 본편은 몰라도 TV판은 보실 가치가 있습니다. 소라타아라시는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죠 (씨익)

天照帝님 / 무슨 망상 하셨습니까. 밝히세요. 궁금합니다! 大丈腐의 이름을 걸고 밝혀주세요! (번쩍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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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照帝 2005/11/10 14:37
...혹시 아실랑가 모르겠습니다만 보케떡대수안경총각응원단장이 나오는 마**리 씨의 단편만화 때문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손가락으로는 타이핑이 가능합... (뭔 소리냐)
(...그러고 보니까 저건 Y도 아니고 아예 모호물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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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11/16 11:08
天照帝님 / 으으으으음, 알 듯 말 듯 모를 듯 짐작갈 듯 합니다! (너야말로 뭔 소리냐)
과연 大丈腐의 왕도를 가시는 天照帝님, 취향의 폭이 넓으시군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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