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란 좋은 것이다.

읽거나 혹은 죽거나 | 2005/11/24 12:20

1.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한 줄 감상 : 번역은 중요하다.

흠흠. 각설하고, 인간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정말 그렇더라.
쉽게 말해 성경에 쓰인 대로 따라가면 만사 OK인 성서근본주의란 사실 시한폭탄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그게 정말 신의 말씀이냐 아니냐를 갖고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평행선을 달릴 게 뻔한 토론은 저리 치워두고, 문제는 그거다. 진짜 원본이 어땠는진 아무도 모르거든.
상대는 수천 년은 까맣게 묵은 책이다. 인쇄술이 발달 못한 시절엔 책 한 권 옮기려면 무조건 죽어라고 필사할 수밖에 없는데 아시다시피 인간의 눈과 손이라는 건 참 믿을 게 못 된다. 머리로는 '님'을 생각하며 손은 '놈'을 쓰는가 하면 '동정'이 '몽정'으로 보이는 일 따윈 비일비재다. 원본의 저자가 좀 악필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왜곡의 참사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같은 언어로 옮길 때도 이 모양인데 하물며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는... 말을 말자.
안 그래도 이미 작게는 '낙타가 바늘귀' 운운부터('낙타'와 '밧줄'을 혼동했다는 이론과 예루살렘 성벽에 낙타가 부비적거리며 가까스로 통과할 만한 크기의 일명 '바늘귀'라 불리는 문이 있었다는 이론 등 말 참 많다;) 크게는 '동정녀'까지 수천 가지의 오역 시비에 휘말려 있는 성경이다. 무식 혹은 실수로 인한 비교적 단순한 오역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번역이 '제 2의 창작'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번역자의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원작자의 의도와는 기묘하게 엇나간 문장이 수두룩하리라.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히브리어/그리스어가 라틴어로 옮겨졌다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등 문화도 딴판이요 때로는 언어 체계조차 다른 수천 가지 언어로 번역됐는데 그 와중에 어찌 에러가 나지 않고 배기겠는가. 저자이신 헬미니악 신부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그리스어 단어가 흠정역 성서 등에선 아예 남색 혹은 남창으로 콱 못박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정도에 해당되는 그리스어가 '불쾌한' 혹은 '부정한' 같이 척 봐도 딴판인 단어로 번역되는 따위의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다. 자 그럼 영어가 한국어로 옮겨질 땐 또 무슨 사단이 있었으려나.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진정 신의 말씀의 원본인가? 낸들 아냐 -_-
성서가 쓰여진 것은 수천 년 전의 까마득한 옛날이다. 사고방식도 풍습도 21세기를 사는 우리와는 저어기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놀러온 외계인만큼이나 딴판이다. 그 시절엔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취급하는 것은 오로지 동성끼리의 성교 그 자체였다. 더구나 실제의 성서는 동성간의 성교를 두고도 이러쿵저러쿵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그저 유대인에게 있어서 '부정한 것' 즉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 정도로 보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르는 기준도 현대인으로서는 실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자, 이래도 당신은 21세기를 사는 동성애자들에게 케케묵은 수천 년 전의 잣대, 그나마도 알고 봤더니 스스로는 전혀 도덕론을 운운하지 않는 중립적 잣대를 들이대며 성서에서 동성애는 사악하고 더러운 것이라 하였으니 니네들은 전부 지옥불에 떨어질 거라 주장할 건가? 응? 안 됐지만 번짓수가 애초에 틀렸다. 정 동성애가 꼴보기 싫거든 근거는 딴 데 가서 찾아라. 성서는 그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가 진정 사랑의 종교를 표방한다면 하느님을 믿는 데 이성애건 동성애건 도대체 뭔 상관이냐는 신부님의 주장이야말로 마땅하다. 언젠가 샐리 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은 하느님의 창조물을 어찌 함부로 부정타 하는가?' 가 마음에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 요즘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 강추.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그 당시의 상황과 번역 상의 문제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성서근본주의를 논하며 구절 구절을 충실히도 따라가면 '남의 피를 받지 말라'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해도 수혈을 안 받는 모씨들과 오십보백보지 뭔가. 여호와의 증인 비웃었나? 이단이라 했나? 아서라 관둬라. 도토리 키재기다.


2.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

P2와 오푸스데이와 (시뇨르 에코가 수도 없이 언급하신 그 단체들) 빌더버그와 펠로우십과 겔렌 조직과 기타 등등. 아따 세상에 참 비밀 조직도 많다. 밑도 끝도 없는 음모론을 배제하고 존재 가능성이 꽤 높은 조직들만 열거해 보면 하나같이 돈 있고 힘 있고 빽 있는 우익 단체.... 어허허허허허허. (아니 뭐 당연한가) 이 책을 믿는다면 미국에서 카톨릭 단체가 눈에 불 켜고 열라리 설쳐대시는 모양인데 까닥하면 태평양 건너에서 신권 정치의 새 막이 열릴 날도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진짜 싫다;;;

그나저나 여기서 아주아주 자연스럽게 ".....왜 성역(생크츄어리♥)이 없나?" 라고 생각해 버린 당신은 저의 동지.
(어느 저널리스트가 용케도 끌어모은 자료와 억측으로 쓴 성역폭로기를 부아악 잡아뜯으며 격노하다 미국 대통령에게 - 이런 폭로성 글을 쓰는 건 항상 미국인으로 정해져 있다 [어째서] - 핫라인으로 이놈의 책 당장 발금시켜라, 안 하면 목을 따버리겠다고 을러매는 어딘가의 교황님과 책을 훌훌 넘겨보며 한 줄마다 허리잡고 끊어져라 웃어대는 참으로 태평하신 어딘가의 차기 교황과 제 부덕의 소치로 여신님이 이런 모독을 받게 했다며 목숨으로 사죄하겠답시고 당장 목을 매달려 설쳐대는 약간 피해망상끼의 어딘가의 차기 교황 보좌관이 줄줄이 떠오른다. 아아 오염된 두뇌여)


덤 하나. 다윗과 사울과 요나단과 미갈의 개판 오분전(...) 아침 드라마는 잠시 제쳐두고(물론 그쪽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룻과 나오미의 관계에 군침 좔좔 흘렸던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다. 훗. (적어도 나는 룻이 보아스와 결혼했을 때 몹시 분개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닛 그렇게 화끈한 고백을 날려놓더니 시어머니는 어쩌라고! 버럭!!)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거기거기, 감동적이고 윤리적인(...이라고 쓰고 '닭살 돋는' 이라 읽는다) 이야기만 좌르륵 모아 청소년 권장 도서를 엮었던 모씨, 당신 눈엔 사랑한다는 말만 살짝 비껴갔지 절절하고 절절하고 또 절절하기 그지 없는 이 장대한 고백이 단순히 사이좋은 고부관계로밖에 안 보입디까...? 응? (이성애자들의 결혼식에서 맹세의 말로도 자주 쓰인댄다. 어어 뜨겁다;)

덤 둘. 확실히 개역판 성경은 자주 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공동판 성경에는 품위가 없다!
(위의 저게 더 좋은가,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하며 룻이 말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이게 더 좋은가?)

덤 셋. 필사본이라 해서 생각났는데 아시모프 영감의 발랄한 단편 중에 그런 게 있었다. 계시를 받은 모세가 아론이 필기구를 들고 대기하는 가운데 100억 년의 우주 역사를 몽땅 구술하려는 찰나 아론이 네 목은 쉬고 내 팔은 떨어져나가고 파피루스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떽떽대는 통에 할 수 없이 가진 파피루스에 맞춰 엿새에 꽁꽁 꾸겨넣었다는 심히 쌈박한 이야기였다. 영감님, 당신 최고요.

덤 넷. 글쎄, 아는 만큼 보인다니까.
잘 모르면 입 닥치고 가만히 있는 게 수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실감 중. 으아아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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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mic71 2005/11/24 16:46
'수' 라고 하셔서 잠깐 헤맸습니다. 이젠 제 머릿속에서 말도 오락가락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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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닌 2005/11/24 16:49
저도 수라고 하셔서 잠깐 딴 생각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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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tiker 2005/11/24 20:54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감상문 잘 읽었습니다^^ 그 책 재미있었지요.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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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lls 2005/11/25 10:06
독서란 좋은 거지- 아, 저 책은 나도 읽고 싶었는데.
요즘 독서활동이 거의 전무해서 스스로 좌절 중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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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11/30 08:37
rumic71님, 제닌 님 / 어째서 그런 방향으로 일치하시는 겁니까! 에이, 반성들 하십시오!!

kritiker님 / 생각나는 대로 갈겨놓은 거라서 횡설수설입니다만 ^^ 오랜만에 진짜 좋은 책이었어요-

Hylls짱 / 어느 책이든 읽어랏! 독서 라이프를 즐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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