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 VS 新.

일상의 잡동사니 | 2005/12/02 18:05

悠悠 님의 질적인 차이 vs. 스타일의 차이를 읽다 문득 생각난 게 있어 재 트랙백했습니다.
(정작 悠悠 님의 좋은 글과는 상관없는 삼천포로 빠지고 있습니다;) (<-삼천포 병도 심각함)

소수의 열성 팬들 사이에서 전용되던 비교적 코어한 작품, 장르 혹은 인물이 크게 대중화되어 소위 메이저로 승격할 경우, 팬워크도 좀 더 일반에 가까운 취향으로 확장되면서 기존 팬들과 새로 형성된 팬들 사이에 감정적 어긋남은 고사하고 때로는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충돌이 일어나는 건 아주 흔한 일입니다. 가까운 예로 봉신연의도 기존 팬들과 애니화 이후의 팬들이 어느 게시판에선가 죽어라고 싸웠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고, 오래 전부터 안나 파퀸의 팬이셨던 유명한 모 님께서 최근의 안나 파퀸 팬들은 한결같이 엑스맨을 보고 몰려온 호르몬 왕성한 틴에이저들이라 오히려 안나의 역과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줄었다고 한탄하시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마이너 팬들 중에는 문제의 작품이 메이저가 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분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당연하지요. 이제까지 음지에 묻혀 있었던 수작이 햇빛 밑으로 나와 널리 사랑받는 것은 분명히 팬으로서 매우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빛이 비칠 때 항상 그림자가 있는 법이죠. 메이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일반 대중에게 보다 가깝고 받아들여지기 쉬운 형태(즉, 쉽고 친절한 형태)로 어레인지됨을 의미합니다. 그 어레인지의 과정에서 초창기의 팬들을 그토록 매료시켰던 고유의 특성, 혹은 분위기, 혹은 아우라, 그 외 기타 등등은 자연히 마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데도 기존 팬들이 질색팔색을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케이트 윈슬렛의 초창기 팬들이 타이타닉에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클레어 데인즈의 팬들이 로미오+줄리엣을 얼마나 고깝게 보는지는 S보다 영화에 훨씬 밝으신 분들이 더욱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근데 둘 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이었습니다그려;) (<-레오가 싫어서 타이타닉도 안 본 여자) 아니, 더 쉬운 예가 있군요. 분명 하가렌이 메이저가 되고 팬층이 넓어진 건 애니 때문이었지만, 하가렌 원작 팬분들이 애니렌에 죽어라고 학을 떼던 걸 생각해 보세요.

또 하나 더. 듀나 님의 글을 읽으면서 깨달은 겁니다만, 이러한 소수의 열성 팬들은 연령층은 다양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비슷한 성향과 감성을 가졌으며 비교적 수가 적기 때문에 자연히 그룹 내의 밀착감과 연대감도 높아집니다. 한 마디로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삼삼한 기분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고 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라고 하지 않습니까. 헌데 메이저가 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면, 감성도 성향도 천차만별인 새로운 팬들이 뚝 터지듯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이제까지의 소속감이고 뭐고 한숨에 박살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될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만, 메이저화 이후의 팬층은 감각적인 요소에 치중하는 틴에이저들(우리 식으로 말하면 중고딩이라고나 할까요;)이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만약 기존 팬이 지성과 논리에 의거해 문제의 대상을 긍정하는 부류라면 예, 대형 참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요약하자면 새로운 팬들에게 기존 팬은 스노비즘과 아집에 가득 찬 노땅꼴통이고, 기존 팬에게 새로운 팬들은 뭣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가 다 몰려와 깽판치는 거죠.

트랙백한 悠悠 님의 말씀대로 스타일의 변화 = 질적 하락으로 단정지어 버리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입니다. 비록 친구 죽여 쌤쌤 논리와 참으로 헛헛하신 불살 교리가 멋지고 근사한 인도주의의 극치로 받아들여지는 요즘 세태가 관자놀이에 사거리 마크를 동동 띄우는 것은 사실이나 가치관은 변하는 거고 변해서 당연한 겁니다. 과거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된다면 그건 정체고 오히려 퇴보니까요. 한 30년쯤 후에는 다시 지성 쪽으로 추의 궤적이 돌아가 감각을 우선시하던 이 시대를 참으로 천박한 세대였다고 논할지 어떻게 압니까? (웃음)
하여튼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대에게 초창기의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는 悠悠 님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현재의 흐름이 아무리 열통터지더라도 말이죠) 제일 좋은 건 역시 구 팬층과 신 팬층이 적절하게 충돌하면서 가끔 불꽃도 좀 튀기고,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휘청하며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대상을 더욱 사랑하고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겠죠.

자, 여기까지 정론. 인간으로서의 매우 정직한 본심(....)을 까놓겠습니다. (이를테면 다테마에와 혼네?)
S의 경우 만약 기존 팬과 신 팬층, 마이너 VS 메이저가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질 때, 심정적으로는 항상 기존 팬들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스노비즘이라 간단히 치부해 버리면 뭐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스노비즘이 꼭 나쁜 건 아니고(듀나 님의 <시네 스노비즘>을 읽어주세요), 더구나 S는 잘 쓴 글을 좋아하고, 설득력 있는 논지를 좋아하고, 무엇보다 진지한 팬을 사랑하거든요. 설령 내가 딱히 관심을 품지 않은 대상이라도, 단순히 아드레날린의 분비에서 오는 일차적인 헐떡임에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을 사랑하고, 몰두하고, 고찰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고 밟을 건 적절하게 밟아준다는 포스가 철철철철철 흘러넘치는 팬워크에는 가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시데에 관한 lizhen님과 리린 님의 글을 흥미진진하게 읽다 시데에 스스로 뛰어드는 자방을 한 멍청이가 바로 여기 있지 않습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는 초창기부터 있었던 팬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S로서는 안나 파퀸의 섹스어필이나 로그가 엑스맨 다음 시리즈에서 얼마나 파워업될지 떠들어대는 애들보다 파퀸의 배우로서의 장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사람 쪽이 훨씬 감정이입하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솔직히 터놓고 말해, 이 바닥에서 정 싫으면 그냥 초연하게 무시하면 될 걸 뭐 그리 에너지가 남아돌아 남의 취향을 갖고 되도 않을 싸움을 걸어 일을 크게 벌리는 건 대개 신 팬층에 속하는 낄 데 안 낄 데 못 가리는 초중고딩들이거든요... (그런 걸 너무 많이 봤음; 뭐 미꾸라지 한 마리가 멀쩡한 연못[= 신 팬층]을 죄 흐리는 예시로 훌륭하다 생각합니다만) 남의 일이지만 맞춤법도 엉망이요 뭔 말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소릴 찌질대는 꼴을 볼작시면 저게 내 동생일시 당장 변기에 거꾸로 처박았다 싶어지는 게 소년소녀를 애호하나 현실의 10대에는 진절머리를 내는 페도포비아의 정직한 심정. 인간이니까요.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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悠悠 2005/12/04 12:27
상호트랙백이란 항상 가슴 뛰는 일이라 정말 즐거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새로운 팬이 늘어나는 것은 기존팬들에게는 그저 재앙같은 일이긴 한 것 같아요. 저변이 넓어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향유하는 인구층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더 안좋은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저도 다테마에와 혼네가 있어서, 혼네라면 역시 KISARA님과 같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어요! 커플링든 뭐든 떠나서, 진지한 글에는 정말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수정/삭제 댓글
KISARA 2005/12/05 21:18
悠悠 님 / 저도 즐거웠습니다. 트랙백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 삶을 살다 悠悠 님과 첫체험(...)을 하고 보니 너무 좋네요 ^^ 정말이지 사랑해 주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은데 꼭 좋지도 않은 게 미묘한 팬심이지요.

오 동지님.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딱히 좋아하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사랑의 포스가 절절 넘쳐흐르는 진지한 글은 읽는 보람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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