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일상의 잡동사니 | 2005/12/16 09:22

아아, 난 정말 영웅의 전락이란 테마가 싫단 말이지.
그게 어떤 인간이든, 사람 여럿 잡은 인간말종이 아닌 다음에야 이제까지 애써 쌓아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지고 붕괴하고 초라하게 몰락하고 마는 광경은 가능하면 좀 안 보고 싶었다. 마음이 약한 탓인지 가슴이 아릿해서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상황을 봐서는 9회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 역전극이 별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슬픈 일이다. 슬픈 나머지, 이젠 웃음만이 나오려 한다.

나는 그저 한국에도 드디어 대단한 과학자 좀 났나부다며 택없이 좋아하던 평범한 일반시민이었고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주절대다 얼굴에 불나는 경험을 톡톡히 하느니 잠자코 지켜보는 게 최선임을 뼈저리게 실감한 후로는 입 닥치고 일이 돌아가는 사태를 관망해 왔다. 그리고 일이 이 지경까지 몰린 지금, 난 그 사람에게 말로 못 다할 연민을 느낀다.
어쩌면 한국에서 과학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그의 불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든지 쉽게 열광하고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떠받들고 무슨 흠이라도 드러날라치면 팔은 안으로 굽기를 주장하며 거의 광적으로 싸고 돌다 종래엔 쉽게 망각하고 마는 이 나라에서.

그러나 그건 그거, 이건 이거.

"하여튼 삼성부터 쥐고 흔들어놓으니 뭐가 될 리가 있나. 우리나라는 좀 될 것 같으면 밑에서 흔드는 거 하난 잘 한단 말야. 황우석이 같은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아니 아버지, 그럼 왜 이런 나라에서 애초에 책 잡힐 짓을 해서 골 때리는 사태를 자초하는데요!?"

샐리 님의 말씀대로 이해와 용납은 다른 것이다. 암은.


안 그래도 예전부터 환경 열악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꼼짝없이 후폭풍까지 뒤집어쓸 이공계를 생각하면 문외한이나마 진짜로 속이 답답하다. 황랩 연구원들과 학생들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휘유.


* 정녕 이 나라가 남 뒷다리 잡기를 즐겨하는 나라라면 알면서 책 잡힐 짓을 저지른 쪽이 빙신 맞다. 세상에 안 들키는 일이 있는 줄 아나. 높은 자리 앉으려면 누가 댑다 걸고 넘어질 때 상쾌하게 우하하하 이 쉐이가 어서 까불어, 오냐 원하는 대로 당장 뒤집어보자, 암것도 안 나오면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라고 당당히 개길 수 있을 만큼은 뒤구린 거 없어야 한다. 바늘 하나도 못 들어가게 완벽하면 대체 누가 깐죽대겠냐고.
억울해? 불공평해? 인간인데 어떻게 잘못 하나 없을 수 있냐고? 아 헌데 그게 현실인 걸 어떡하나. 게다가 이건 책 잡힌다는 표현 정도로 끝날 수준도 아니구먼. 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거냐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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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in 2005/12/16 11:46
그나마 이번 사건이 외부에서의 공격이 아니라 국내의 자정작용으로 일어났다는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정말 황우석 박사의 업적이 허황한 것이었다 판명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우리 생명공학계 전체에 대한 의심(혹은 비하)로 이어지지만은 않길 바랍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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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12/17 08:33
Josephin님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예,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른 채 황교수 만세만 부르고 있다 훗~~날에 외국에서 일 터져 국제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망신을 당하느니 지금 국내에서 터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 중입니다; (그래도 망신은 망신입니다만;)
의심과 비하로 이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다행이겠는데, 미꾸라지 한 마리는 못바닥을 능히 흐린답니다. 불행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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