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IRA.

보거나 혹은 죽거나 | 2005/12/16 15:05

어제 산 클라시커 최신간에 오오토모의 AKIRA가 당당히 한 자리 차지하고 있기에 오랜만에 추억이 되살아나 고이 보관해 둔 극장판을 꺼내 돌렸다.
그리고 새삼 애니판의 전율스런 삐리릭띠리릭함에 몸을 떨었음. 젠장 요즘 추억의 물건과 자폭 주간인가;;

(오역도 아니고 아예 창작 수준인 자막은 기냥 단칼에 무시해 주는 센스. 이럴 땐 일본어 배우길 진짜 잘 했다 생각한다)

사실 극장판 AKIRA는 원작을 고려하지 않고 보면 상당한 수작이다. 돈 엄청 발라가며 집심해서 만든 티가 더덕더덕 난다구. 원작이 하도 작화빨 연출빨 스토리빨 모든 것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무한대) 위대하고 훌륭하고 뛰어난 걸작 중의 초대형 걸작이라 아우라에 먹혀 버렸다 뿐이지. 2000페이지를 두 시간에 구겨넣겠다는 당최 제정신의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미친 발상을 대체 누가 했지? 오오토모 자신이 -_-;;;
아무튼 원작과 애니를 비교해 보면 당연지사로 모든 면에서 원작이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지만, 딱 한 가지, 따악 한 가지만은 꼭 극장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게 있다.

스토리의 주축 중 하나인 가네다와 데츠오의 관계가 훨씬 섬세하고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원작에서 이 둘의 대립은 거의 저 새끼 재수없으니 죽이겠다(...)의 단순무식한 수준이었지만, 극장판에서는 러닝타임 때문에 아예 스토리의 무게중심을 얘네들 쪽으로 완전히 옮겨다놓은 까닭인지 훨씬 짧은 주제에 관계성 하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해졌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면 끝까지 구해주라고, 어릴 때 텃세 부리는 고아원 애들에게 두들겨 맞고 울고 있는 데츠오에게 장난감을 찾아다 준 후로 보호자의 의무감에서 어딜 가도 데츠오만은 죽어라고 챙겨대는 가네다와 가네다에게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망 있고 잘난 친구에 대한 미칠 듯한 열등감과 남자로서의 자존심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데츠오의 미묘한 관계는 지인짜로 죽여주게 재미있음. 여기선 데츠오의 각성도 폭주도, 사실 키워드는 전부 가네다이다. 데츠오가 능력에 막 눈을 뜨려고 할 때 꾸었던 꿈을 기억하는가? 땅이 붕괴하고 건물이 붕괴하고 마침내 자신의 몸까지도 무너져내려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청하는데 정작 가네다는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는 악몽. 데츠오에게 가네다는 그런 존재였다. 언제나 앞서 달리던 바이크와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지만 잡을 수 없고 항상 뒷모습만을 보아야 하는 존재.
그래서 자신에게 나라 하나쯤은 홀랑 말아먹을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고 데츠오는 광희에 몸을 떤다. 나서 처음으로 친구를 앞지를 수 있고 내려다볼 수 있고 언제나 도움만 받던 자신이 글쎄 보호자인 양 처신할 수 있다는데 아 누군들 미치지 않겠나, 당연히 좋아서 우워우워 날뛰지. 놈이 힘에 먹힌 건 그래서다. 우월감 만만의 썩소를 짓고 "이제부터는 내가 널 도와주마" 어쩌고 지껄이는 폼을 봐라. (결말을 아는 나는 그저 끌끌끌;;이었다) 피보호자로 여겨온 친구의 갑작스런 변모에 당연히 가네다는 당혹한다. 처음에는 그저 당혹하는 정도였지만 데츠오가 야마가타를 죽이는 뷁스런 사건에 직면하고 녀석은 확실히 깨닫는다. 소꿉친구가 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힘을 얻었고 그 힘에 취해서 결코 넘어서는 안됐을 선을 넘고 멀리멀리로 가 버렸다는 것을. 바이크에 타고 폭주하는 와중에 눈물을 뿜으며 절절히 외치는 "바보 자식──!!!!" 은 그런 이유. 까짓 꼴난 레이저포 하나 들고 데츠오에게 도전한 대략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도 여기서는 단순히 빡돌아서 저지른 미친 짓이 아니라 분명한 동기가 성립된다. 이제까지 저 인간을 내가 여얼심히 따라댕기며 돌봐왔으니 돌아버린 쉐이 끝장도 마무리도 자기 손으로 짓겠다는 보호자의 논리. 어 눈물난다;;

근데 무려 임프린팅 요소까지 결합한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도 적응 못하는 데츠오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사람이 누구냔 말이지;) 이 징하디 징한 보호자-피보호자 관계는 그렇게 쉽사리 부서질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거라. 결국 인간 하나에 담기기에는 너무나 거대했던 힘이 폭주하여 몸이 징글징글하게 부풀어오를 때, 아키라가 뿜어내는 찬연한 빛에 빨려들어갈 때, 데츠오는 결국 꿈속에서처럼 가네다에게 손을 뻗으며 구원을 애걸하는 비명을 지른다. 압사할 뻔하다가 간신히 빠져나오고도 친구가 부른다고 말리는 다카시를 내팽개치고 죽자사자 달려가는 가네다도 어지간하다만; 아무튼 데츠오는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으로 훨씬, 훨-씬 가네다에게 의존하고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막판에 기껏 복구됐던 도쿄를 집어삼키는 빛 속에 끌려들어간 - 사실은 데츠오가 엉겨붙었다; - 가네다가 엿본 데츠오의 기억 속이 끝부터 끝까지 온통 가네다와의 추억-_-;;;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광경만 봐도 명백하지. 명색이 애인인 카오리는 낄 자리가 없음. 대체 왜 나왔니 너;;; (떡이 되게 얻어맞고 나중엔 눌려죽으려고... 아 젠장 비참하다;)

자 정직한 한 마디. 여기서 썩소를 금할 수 있으면 내가 동인녀일까. 절대 아니지!!!! (으하하하하하하하하)

....실은 애니의 삐리릭띠리릭함에 발심해서 눈에 불을 켜고 원작도 찾아봤더니 미칠 듯이 초건전이어서 울었다는 뒷얘기가 있다;; 제길... 이 건전한 원작에서 어떻게 저런 띠리리띠리리가 나올 수 있는 거냐아....


덤 1. 무수한 메카 중에서 S의 첫사랑이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가네다의 바이크는 여전히 멋졌다. 로우시트 타입이라는 것도 취향 직격. 바이크가 멋지다 보니 탄 인간까지 막 멋져보여요 꺄아꺄아.
그러나 역시 옛날 보물섬 권두 컬러 기사에 실렸던 일러스트를 따라갈 수 있는 장면은 없구먼. (가네다 쇼타로가 무려 '미소년'스러웠음-_-;;;;; 응? 추억은 미화되는 거라고? ;;;;)

덤 2. 키 퍼슨인 꼬맹이 셋의 연기가 가위 재난급이다. 캐릭터가 애들이라고 성우도 애들을 갖다 쓴 거냐 설마!? 살의가 부글부글 일다 못해 슬픔. 그냥 슬프다. -_-;;;;

덤 3. 난 사실 데츠오보다 가네다가 더 무섭다. 저놈이 무려 레이저포 하나 달랑 끼고 군대도 못 막은 데츠오와 막상막하의 혈투를 벌였던 놈이다. 정면에서 맨몸으로 바이크에 돌격하여 밟고 점프해 날아차기로 라이더의 목을 돌려놓은 놈이다. 랩에 잠입할 때 맨손으로 오토자이로에 매달려 온갖 활극은 다 벌이고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살아남은 놈이다. 끔찍스럽게 부풀어오르는(웩;) 데츠오에게 꿀떡 삼켜지고도 카오리가 눌려죽을 동안 레이저포 난사로 잘도 빠져나온 놈이다. SOL이 발사됐을 때 두 다리로 달려서 붕괴를 피해 내빼는 데 성공한 놈이다.

.....이 자식에게 데츠오 같은 능력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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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zusato 2005/12/16 15:13
.....삐리리띠리리한 영상매체에 눈이 홱 돌아가 원작으로 거슬러올라갔더니(원작! 원작을 보자!!!;) 그놈의 원작이 죽어라 초건전이라 땅바닥 긁는 건 동인녀의 운명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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氷雪 2005/12/16 18:21
아아... 근데 원작도 필터(-_-)로 보면 꽤 .. (퍽퍽퍽) 뭐... 사실 극장판 보고나서 봐서 필터 가동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웃음. 여하간 그쪽도 참으로... 무무무- 한게... 데츠오의 행동원리가 너무 가네다에 기준을 두고 있어서 보는 이쪽이 몸둘바를 모르겠더군요. 후. 아, 근데 저도 사실 가네다가 더 대단해 보여요. 아무 초능력도 없으면서(정말 없는걸까? -_-; ) 하는 짓 보면 슈퍼맨이 따로 없는 점이..; 저러니 데츠오가 초능력이 생긴 후에도 어딘지 모르게 열등감에 시달린거 아니겠어요. 자기는 힘에 먹혔는데 재는 힘이 없어도 여전히 쌩? 잘 날라다니는 히어로.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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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12/17 08:40
kazusato님 / 오우 이런. 안 그래도 저 '불건전한 영상매체에 초건전한 원작'을 쓰면서 하얀 거탑과 호죠 도키무네에 얽힌 kazusato님의 쓰라린 절규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폭소) 싱크로라고 멋대로 여겨도 괜찮을지요. 아니면 그저 절대동인권의 영향일 뿐입니까;

氷雪님 / 극장판 보기 전에 원작을 미리 봤으면 썩은 생각은 요만큼도 머리에 침투 안 했을 거라는 데 한 표 던집니다. 엄포스의 총애를 받은 두툼한 필터를 통해 보면 왜곡되지 않는 것이 어이 있겠습니까... 후후후후;; 원작에서의 두 마리는 아주 현실적이긴 합니다만 관계성이 너무 얄팍해서 뭐 그저 그렇더라고요. 극장판이 좀 띠리리삐리리하고 뜨끈뜨끈하고 따땃했어야지 말이죠. (폭소)
그렇죠! 가네다야말로 정말 무서운 놈이라니까요! 레이저포 끼고 휭휭 날아다는데 아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진짜 일반인은 저런 거 못합니다앗; 힘을 얻고도 결국 가네다를 이기지 못하는 데츠오가 진심으로 불쌍해지는 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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