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가 씨에 대한 부글부글 끓는 (사실은 심하게 부당한 거 맞는;) 분노에서 유발된 '알고 보니 이런 남자였다' 프로젝트 No. 1. 망가뜨리는 게 목적이므로 태클은 접수하지 않습니다. 하셔도 모른 척합니다;
근데 H양... 정말로 제목 안 지어줄 거냐....!? OTL
* 여성향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카가/하야토 베이스입니다.
* 노멀 지지파와 애브노멀 지지파 양쪽에 쥐약;일 수 있습니다.
* 카가 씨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심각하게 한심;하므로 정통파 팬들이 혹여 계시다면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심할수록 애정도는 높아지는 관리인입니다만;)
* 쓴 인간의 SIN에 관한 지극히 개인적인 주절거림과 잡상이 베이스에 깔려 있으므로 사전에 그쪽을 한 번쯤 참조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요? ;;;;
* 늘 그렇지만 많은 걸 바라시면 관리인 슬픕니다;
... and less.
한 번 폼잡고 해보고 싶었던 괜한 주석.
(註 1) 침대에서 늘 내려오던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내려오면 그날 종일 재수가 없다는 미신.
(註 2) '아침 만들어주겠다 했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허리 잡고 웃더라'는 예의 닭살과 염장 만땅의 드라마 CD RAINY NIGHT의 네타.
(註 3) 블리드 카가표 블렌드 만데린 반 자바 로브스타 반이란 살인적인 커피의 출전은 미즈모리 렌의 동인지 <휴일~OFF~>. 실제로도 쓰기가 웬만한 약은 감히 근접도 못하는 수준이라고. -_-;; 물론 인터뷰에서 이 커피를 '숨도 쉬지 않고 15분을 줄창 성토한' 사람은 하야토.
(註 4) '여자들은 왜 정해놓고~길을 건널까?' 는 '닭은 왜 길을 건널까?' 라는 매우 클래식한 썰렁 농담에서 파생된 맥널리 시리즈에서의 네타. 병아리를 뜻하는 Chicks에는 처녀애들이란 의미도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꽤 센스 있는 말장난인 셈. 이봐요, 건너지 말아요 아야 씨... OTL
1. 빠릿하고 여유 있는 아가씨를 사랑하는 관리인의 취향이 심하게 반영됐으므로 아야 스탠포드의 성격이 실제의 드라마 CD와는 상당 부분 차이날 수 있다. 얽어서 얘길 복잡하게 만들 바에는 여왕님보다 이 아가씨를 선호하는 편. 첫째로 아야 씨 쪽이 훨씬 다루기 쉽고, 둘째로 안 그래도 남자복 절라 없으신 여왕님한테 애물단지 3호를 안겨줘서 뭘 어쩔 거냐 싶으므로; (물론 애물단지 1호는 신죠, 2호는 나구모이다) 친구로 됐다, 친구로.
2. 난 아직 카가 씨의 SIN에서의 악행(...)을 용서 못하고 있음. 후, 후후후후후후..... -_-+++ (부당하다는 걸 아는 이성과 분노하는 감성은 별개임. 아무렴)
3. 쓰고 싶었던 대목을 앞에서 다 써 버려서 뒤로 갈수록 날림이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다... 누가 내게 문재를!! (털푸덕)
그리고 제목에 대해선 일절 쯧코미를 반사하겠음;
4.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될 텐데'. 그 말이 정답이지만 쉽게 될 것 같으면 아무도 이 고생 안 함;
5. 어쩌다 보니 이런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역시 침대에서 일 치르며 딴 인간 찾는 놈은 그 잘나빠진 입을 미싱으로 드르륵 박아버려야 한다는 게 S의 평소 지론임; (....하지만 이 점에선 H모 군도 한 개도 나을 게 없음. 이 민폐 인간들;;;)
6. 지금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는 건 몽땅 꿀꿀하기론 돼지 멱 따는 소리보다 더 지독한 물건들 뿐. 좀 발랄한 네타가 하늘에서 떨어져 주지 않으려나? OTL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요.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살풋이 웃었던 것 같다.
희뿌연 안개가 덜 걷힌 머리 안쪽에서 가끔은 게으름 좀 부려보자며 빽빽대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따스한 햇살이 눈꺼풀을 살살 간지럽히는 감촉에 열심히 개기다가 결국 지고 만 카가는 상당히 침착하지 못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발코니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로 보아 아직 9시 반 경. 천상 늘어져 잘 팔자는 못 되는 모양이다.
한숨 한 번 쉬고 상반신을 힘차게 일으켰다가 우겍, 짧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이마를 짚었다. 뎅뎅뎅뎅뎅뎅. 세상의 종이란 종을 몽땅 한 곳에 우겨넣고 빙빙 돌며 커다란 망치로 사정없이 두들겨패면 딱 이런 느낌이리라. 두개골이 징징 울린다. 어제의 캘러미티 서바이벌 레이스에서 가뿐히 우승한 기념으로 뒷풀이에서 앗싸 좋다고 마셔댄 결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흥분한 크루들에게 둘러싸여 일배일배부일배, 마시고 죽어보자 설쳐대는 거야 레이스가 끝난 후의 의례적인 행사지만, 바다 건너 한국 출신이라는 크루가 얼큰하게 꼭지 돌아 잡히는 대로 들이부어 만든 2000cc짜리 폭탄주 연속 원샷은 역시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나둘셋 하나둘셋. 마음속으로 오십까지 헤아리며 심호흡을 하고 - 이거 라마즈 호흡이잖아! 라며 괜히 셀프 태클도 좀 걸어보고 - 조금 가라앉은 머리를 추스르며 담요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와 바닥을 밟고 나서야 오른쪽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에 퍼뜩 생각이 미쳤지만, 금세 아무렴 어떠냐 싶어져 바닥에 무질서하게 널부러진 오만가지 물체 중에서 아마 어제 아침에 되는 대로 벗어던졌을 헐렁한 카디건을 집어들어 맞지 싶은 방향으로 대충 팔을 꿰었다.
하지만 희한한 일이다. 항상 침대 왼쪽에서 자는 게 몸에 밴 습관이었는데, 억병으로 취해서 좌우고 앞뒤고 분간이 안 갔다 하면 말은 되지만. 사실은 어젯밤에 무슨 수로 용케 길 안 잃고 집까지 왔는지도 영 깜깜한 판이다. 그러고 보니 취재 차 찾아왔다가 꼼짝없이 크루들에게 붙들려 술판에 강제로 꼽사리 끼이게 된 금발의 사진기자는 호텔까지 무사히 돌아갔을지,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빠릿빠릿한 여자니까 필시 별 일은 없었겠으나, 약간 걱정은 되었다. 음, 역시 앞으론 술은 좀 자제하는 게 좋을지도.
────예에 예, 주당이시라는 건 자~알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드세요! 술에 절겠어요!
퉁명스러워지려 부단히 노력은 하지만 채 숨기지 못한 걱정이 파문을 일으키는 그 눈이 보고 싶어서, 한 잔 마실 술을 굳이 석 잔 마셨던 시절도 있었다. 유난히 선명한 녀석의 목소리는, 오늘 아침의 꿈 때문일까. 이대로는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질 것 같아, 손만 뻗으면 닿도록 방치해 둔 나이트테이블 위의 럭키 스트라이크를 한 개피 뽑아물고 지포로 불을 붙이고─이제는 완전히 정착한 흑발을 무심히 쓸어올렸다.
갓 미국에 건너갔을 때 팍삭 삭은 울룩불룩 코카서스들의 틈바구니에 껴 동안이라 얕보이고 비웃음 사는 데 진력이 나 - 물론 그 족족 국지성 폭우를 동반한 가차없는 응분의 처벌을 가하기는 했지만 쓰린 가슴은 쓰린 가슴이었다 - 홧김에 어디 한 번 막나가 보자고 파격에도 정도가 있는 형광 그린의 염색약을 홀랑 뒤집어쓴 게 그 시초,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후 괴이하다느니 망측하다느니 별별 구박을 다 받아가며 너희들은 짖어라 나는 씹는다의 배째라 근성으로 꿋꿋하게 강산 하나 변할 세월 내내 유지해 온 헤어스타일이었지만, 그것도 2년 전까지의 이야기다.
온갖 공을 다 들여가며 각 잡던 머리를 미련없이 잘라버리고 본래의 흑발로 시카고에 돌아온 그를 보고, 면식 좀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심지어는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 모양이 됐느냐고 눈물 콧물 다 짜가며 엉엉 우는 오버스런 인간까지 있었지만, 조신한 흑발도 꽤나 어울리더라는 현실 앞에서 모두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마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기왕이면 카가 죠타로라는 이름에도 빨리 익숙해져 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는 쓰게 웃었다.
──블리드 카가는 2년 전 그날 죽었다.
녀석이 더 이상 그가 알던 생기 넘치는 꼬마가 아니게 됐을 때, 이미.
카가는 하얀 담배 연기가 천장을 향해 고리를 그리며 솟아오르는 광경을 한동안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효했다.
"으아악~너 뭐하는 거냐 카가 죠타로!! 아침나절부터 아주 궁상을 떨어라 떨어!!!! 에잇, 일단은 밥부터 먹..."
말은 거기서 끊겼다.
물컹.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기세좋게 등 뒤를 짚은 손에 있을 수 없는 감촉의 물체가 잡혔던 것이다.
"............................."
무거운 침묵이 방 전체를 꽈직꽈직 내리눌렀다.
빠지직 굳은 얼굴이 굳다 못해 멋지게 쩌저적 갈라터지는 가운데 개그 터치의 러블리한 식은땀 부대가 줄을 이어 이마와 뒤통수에 종종종종 매달린다. 이 감촉은... 설마, 설마, 설마!!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모조리 다 찾아가며 조심조심 몸을 돌려보니.
벗은 하얀 어깨를 담요 위로 드러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거기에 있었다.
"#$##(#$**!!#)%$*(%&@!*#$&#@*$&!#@*$&@#(~~~~~~~~!!!!!!!"
곧이어, 인류의 언어보다 오히려 포효에 근접한 비명소리가 아침 공기를 뒤흔들었다.
"........응?"
웬만한 일은 뱃심 좋게 코로 무시하는 소위 '털난 염통'의 블리드 카가에게서 때아닌 아침부터 뻑적지근한 비명을 뽑아낸 장본인은 그제야 잠이 깼는지 가느다란 팔을 쭈욱 뻗으며 나른한 하품을 토해내고, 담요로 하얀 가슴을 수줍게 가리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채로 꽁꽁 얼어붙은 청년에게 다소 짓궂은 미소를 던졌다.
"후후후, 안녕 카가 씨. 좋은 아침."
"아.... 아야짱!! ;;;;"
빛이 반짝반짝 날 듯한 윤기가 자르르 감도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고 있는 여성은 당연히 호텔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민완의 사진기자, 아야 스탠포드 바로 그녀였다. 하고 싶은 말은 수천 가지이나 소리는 안 나오고 그저 온 몸으로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는 오라만을 절절하게 방출하는 카가를 향해 아야는 한층 더 상쾌한 미소를 아낌없이 흩뿌렸다.
"어머 카가 씨, 눈치없기는.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 들어서 할 일이라면 하나밖에 더 있어?"
"...................................."
그야, 하나밖에 없긴 하죠.
아야 스탠포드는 넋이 홀랑 빠진 블리드 카가 - 굳이 본인 주장을 존중하자면 카가 죠타로 - 라는 금쪽같은 레어 영상을 10%의 감동과 90%의 흥미진진함을 품고 즐거이 바라보았다. 손 닿는 곳에 카메라가 없는 것이 못내 유감이다.
아아 어쩌면 이 남자, 의외로 놀리는 재미가 투철할지도♥ 하지만 상황 파악이 너무 안 되어도 여러 가지로 곤란하므로, 그녀는 좀 더 즐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할 정보를 약간 아쉬운 기분으로 제공했다.
"기억 안 나? 당신이 붙들었잖아. 가지 말라고."
"....내가?"
"응. 꼭 구호품 받은 전쟁고아처럼 반 필사적으로 엉겨붙어서 도저히 떼어낼 수가 있어야지. 솔직히 나 좀 많이 창피했다고? ─그렇지. 당신, 나중에 그레이 씨한테 좀 많이 쪼일지도 몰라~후훗."
"...........내가.........?"
블리드 카가, 현재 망연자실 중. 로딩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성 싶다.
그야, 수도사도 아닌데 한창 끓을 나이의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물론 다 하고 살았다. 구데리안이나 스고 오사무처럼 절조를 사전에서 싹싹 지워버리고 이 여자 저 여자 잡히는 대로 놀아나지까진 않았을지언정, 이 바닥에서 염문 빈도로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인물이다. 물론 접근하는 여자도 많았고 거자불추내자불거였고 ONE NIGHT STAND의 횟수 따윈 애저녁에 세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멀쩡한 정신으로 쌍방의 합의 하에 한 일이었지, 만취한 심신상실 상태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블리드 카가건 카가 죠타로건, 비교적 대형 사고는 치지 않고 살아왔다 자부하는 28년 인생에서 욕조에 물 받아놓고 머리 박고 싶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야짱~왜 의자로 후려쳐주지 않은 거야...."
거창한 빗금과 비애가 양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은, 세상의 불행은 혼자 다 짊어졌소이다 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그 OTL 포즈는 꿈많은 팬에게는 좀 심하게 보여줄 수 없는 많이 한심한 광경이긴 했다. 남자는 다 짐승이라느니 정신이 들 때까지 죽도록 패줬어도 좋았다느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뭐라뭐라 계속 중얼대는 그에게, 아야는 대답 대신 쿡쿡 웃기만 했다.
마음에 둔 남자가 팔을 잡으면서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단호히 뿌리칠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대체 몇이나 될까. 적어도 그녀는 독하게 마음먹고 밀어낼 수 있는 여자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설령, 그가 그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도 몹시 익숙한 이름이었다.
모터스포츠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살아서 신화가 되고 있는 한 청년의.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야는 의외의 광경에 새파란 눈을 둥글게 떴다. 식탁 위에 반쯤 차려진 두 사람 몫의 간편한 아침 식사.
우렁각시가 왔다간 게 아닌 바에야 카운터 뒤에서 서성대고 있는 카가의 소행이리라.
"어머, 아침까지 다 대접해 주고, 서비스 좋네."
"아... 뭐. 이 정도야..."
꽤 많이 찔리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신경 쓰지 말라고 일단 다독여는 줬지만 역시 양심이 멀쩡한 사람으로서 속이 따끔따끔한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나저나, 담배를 비스듬히 문 채로 프라이팬을 한 손에 들고 익숙하게 달걀 프라이를 뒤집고 있는, 대충 하나로 올려묶은 짧은 흑발에 넉넉한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귀여운 에이프런을 두른 20대 후반 청년이라니 거 참 나름대로 엄청 로망에 그림이 되는 광경이긴 한데.
"......근데 말야 카가 씨."
"아?"
"당신, 진짜 안 어울려."
"시끄럿!!"
──그것도 저 남자의 성격을 모를 때나 가능한 이야기.
드물게 보는 시뻘개진 얼굴로 버럭대는 카가를 향해 아야는 배를 잡고 유쾌하게 웃어주었다.
'그, 그치만, 푸핫, 카가 씨가 그런 모습으로 부엌에 선다니, 아핫, 왠지 이상해요~푸훗... 아하하하하하!!!!'
아침 만들어주겠다 했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다 종래엔 허리가 끊어져라 웃던 녀석이 있었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자, 여기 커피."
"고마워."
희뿌연 김이 솔솔 올라오는 하얀 머그컵을 양손으로 포옥 감싸안고 아침의 행복감을 만끽해 본다. 정작 그 내용물은 항상 짙은 블랙으로 마셨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먹다가 분명히 토했을 끔찍하게 쓴 맛의 시커먼 액체였지만. 이것이 바로 일부에서 드높은 악명을 자랑하는 - 몇 년 전의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숨도 쉬지 않고 15분을 줄창 성토하던 - 만데린과 로브스타를 반반씩 섞은 블리드 카가표 블렌드 일명 '차라리-약탕을-마시고-말지-인간의-미각이냐-우웩' 커피인가. 아야는 다소 감개무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 하나 까닥 않고 커피를 빙자한 약탕을 음미하고 있는 식탁 건너편의 비(非)인간을 한 번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음... 역시 다시 봐도 제법 그림이라니까....'
많이 양보해서 오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던 - 그녀도 처음 직접 봤을 때는 정신 상태를 의심했었다 - 그 괴이하게 튀는 헤어스타일로도 죽지 않았던 얼굴이다. 차분한 흑발이 된 지금은 한층 조형의 단정함이 눈길을 끈다. 그 위에 나이를 먹을수록 관록이 차근차근 쌓여가는 남자로서 아주 바람직한 타입. 능력 있겠다 성격도..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화끈하니 그만하면 괜찮겠다, 염문은 많지만 이렇다 할 사귀는 여자도 없겠다 (2년 전까지 꽤 소문이 무성했던 AOI의 오너와는 결국 쌈박한 친구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했다) 목매는 여자가 줄을 설 만도 하다.
'하긴 나도 그 중의 하나지만?'
이 남자가 사실 대책없는 구제불능의 바보란 것까지 알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를까나.
여자들은 왜 정해놓고 바보멍청이 같은 남자에게 빠질까요? ─글쎄, 병아리는 왜 굳이 길을 건널까? 마음속으로 선문답을 종알거리며 아야는 불쑥 입을 열었다.
"카가 씨."
"응?"
"하나 물어봐도 돼?"
"뭐얼."
"당신도 슬슬 정착해도 될 나이잖아."
"하아?"
"나랑 결혼 안 할래?"
"푸흡!!!!"
뿜었다.
아야는 예상한 대로의 사태를 여유 있게 클래식한 종이 신문으로 막아냈다. 의외로 기습 공격에 약하다더니 정말이었다.
식탁 위에 엎어져 한 10초 정도 쿨럭거리던 카가가 비슬비슬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야짱... 내가 죽일 놈이니까 차라리 그냥 호되게 패주라. 농담에도 정도가 있지, 심장에 나빠!"
"어머 너무해라. 순진한 처녀의 진심 어린 프로포즈를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하다니, 언제부터 이리 박정한 남자가 됐을까 이이는. 어젯밤에 그토록 정성들여 사랑해 줄 때는 언제고, 훌쩍♥"
"아~야~짱~~~~~!!!"
진심은 진심이었다.
다만 받아주지 않을 줄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남자의 심장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으니까.
이 사람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문제의 청년이 조금 부러워져 버려서. 약간의 심술끼를 담아 건너편에서 투덜투덜중얼중얼궁시렁대며 죽어라고 커피만 홀짝대는 남자를 다시 넘겨다보았다.
"있지 카가 씨."
"아?"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예에 예, 이번엔 또 뭡니까요."
"정말 하야토 군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푸헉!!!"
또 뿜었다.
그리고 아야 스탠포드는 재방어 성공. 오오 찬란히 빛나는 방어율 100%.
다만 상대는 이번에야말로 타격이 너무 심했던지 3분이 넘도록 쿨럭거리고 있었다.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을 무렵, 알아서 퉁기듯 벌떡 일어나더니 사래가 단단히 들린 나머지 눈물까지 좀 그렁대는 눈으로 항의의 파이어 브레스를 요란히도 뿜어낸다.
"쿠...쿨럭...쿨럭쿨럭, 아야짱~~~!! 갑자기 뭘 묻는 거야!!"
"그치마안~수많은 CF팬들 - 음성적인 팬도 - 이 눈에 불을 켜고 궁금해 하는 화제인거얼~특집 기사도 몇 번이나 떴었다고요? 블리드 카가와 카자미 하야토는 정말 친구일 뿐인가! 라던가♥"
"왜 그딴 걸 궁금해 하는데! 왜! 게다가 전혀 상관없잖아 지금하곤!!"
"어머, 하룻밤 같이 보낸 사이에 그 정도도 대답 못해 줘?"
".........큭."
비장의 카드는 무난하게 먹혀들었다.
자알 익은 토마토 부럽지 않게 시뻘개진 얼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던 눈이 마침내 아야를 찌릿 노려보더니 가히 씹어먹을 듯한 어조로 울컥 내뱉다시피 한 마디가 날아들었다.
"─없었어."
".......에~정말~?"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 의외네 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둥둥 떠다니는 배경에 약간 발끈했다.
"아 정말 없었어! 아.무.것.도!!"
눈 딱 감고 선을 넘어버릴까 생각하기는 수십 수백 번.
하지만 그 절묘한 거리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소중하고 소중하면 오히려 손 한 번 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그래, 없었다니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어렴풋이 후회하고 있다.
차라리 강제로라도 안아버렸더라면.
녀석을 영영 놓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카가 씨? 여보세요─?"
아야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왓 미안; 잠깐 생각이 트립을... 근데 아~야~짱~~~?"
"응?"
"이 아가씨가 왜 쓸데없는 건 묻고 그러시나~응~~?!"
"우후후후, 왜일까요?"
"우와! 그 웃음이 수상해!!"
"호호호호♥"
"에잇, 식기 전에 얼른 먹기나 하라구! 젠장!"
아야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안 가르쳐 줘.
──당신이 어젯밤에 누구를 그토록 찾았는지.
누구에게 숨도 안 쉬고 욕지거리를 했는지도.
하여튼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될 텐데 말야. 남자들이란.
말해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뭐, 이 정도 심술은 용서되겠지?'
──나, 속없이 착한 여자는 못 되거든.
발코니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빛 속에서 간간이 찌푸린 얼굴로 쓰디쓴 커피를 홀짝여가며 토스트를 잘근거리는 상대의 모습에서 언뜻 기시감을 느꼈다.
아아, 그랬었지.
오늘 아침의 꿈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라, 아침 만들어주신 거예요?
────아~아 하지만 정말 몇 번 봐도 안 어울려요 그 앞치마... 우왓! 폭력 반대!
────오늘은 노른자 무사하네요. ...예에 예, 인간은 발전하는 법이죠. 특히 카가 씨는. 알아요 알아.
────우와! 뭐예요 이거 정말 커피!?
────이렇게 쓴 걸 무슨 수로 마셔요!?
────제가 아니라 카가 씨 미각이 이상한 거라고요!
────아아~못 살겠네! 이 사람 진짜 제멋대로야!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요.
분명, 그랬던 순간이 있기도 했었다.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요.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해 살풋이 웃었던 것 같다.
희뿌연 안개가 덜 걷힌 머리 안쪽에서 가끔은 게으름 좀 부려보자며 빽빽대는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따스한 햇살이 눈꺼풀을 살살 간지럽히는 감촉에 열심히 개기다가 결국 지고 만 카가는 상당히 침착하지 못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발코니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로 보아 아직 9시 반 경. 천상 늘어져 잘 팔자는 못 되는 모양이다.
한숨 한 번 쉬고 상반신을 힘차게 일으켰다가 우겍, 짧은 신음성을 토해내며 이마를 짚었다. 뎅뎅뎅뎅뎅뎅. 세상의 종이란 종을 몽땅 한 곳에 우겨넣고 빙빙 돌며 커다란 망치로 사정없이 두들겨패면 딱 이런 느낌이리라. 두개골이 징징 울린다. 어제의 캘러미티 서바이벌 레이스에서 가뿐히 우승한 기념으로 뒷풀이에서 앗싸 좋다고 마셔댄 결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흥분한 크루들에게 둘러싸여 일배일배부일배, 마시고 죽어보자 설쳐대는 거야 레이스가 끝난 후의 의례적인 행사지만, 바다 건너 한국 출신이라는 크루가 얼큰하게 꼭지 돌아 잡히는 대로 들이부어 만든 2000cc짜리 폭탄주 연속 원샷은 역시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나둘셋 하나둘셋. 마음속으로 오십까지 헤아리며 심호흡을 하고 - 이거 라마즈 호흡이잖아! 라며 괜히 셀프 태클도 좀 걸어보고 - 조금 가라앉은 머리를 추스르며 담요에서 꾸물꾸물 기어나와 바닥을 밟고 나서야 오른쪽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에 퍼뜩 생각이 미쳤지만, 금세 아무렴 어떠냐 싶어져 바닥에 무질서하게 널부러진 오만가지 물체 중에서 아마 어제 아침에 되는 대로 벗어던졌을 헐렁한 카디건을 집어들어 맞지 싶은 방향으로 대충 팔을 꿰었다.
하지만 희한한 일이다. 항상 침대 왼쪽에서 자는 게 몸에 밴 습관이었는데, 억병으로 취해서 좌우고 앞뒤고 분간이 안 갔다 하면 말은 되지만. 사실은 어젯밤에 무슨 수로 용케 길 안 잃고 집까지 왔는지도 영 깜깜한 판이다. 그러고 보니 취재 차 찾아왔다가 꼼짝없이 크루들에게 붙들려 술판에 강제로 꼽사리 끼이게 된 금발의 사진기자는 호텔까지 무사히 돌아갔을지, 가냘픈 외모와는 달리 빠릿빠릿한 여자니까 필시 별 일은 없었겠으나, 약간 걱정은 되었다. 음, 역시 앞으론 술은 좀 자제하는 게 좋을지도.
────예에 예, 주당이시라는 건 자~알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드세요! 술에 절겠어요!
퉁명스러워지려 부단히 노력은 하지만 채 숨기지 못한 걱정이 파문을 일으키는 그 눈이 보고 싶어서, 한 잔 마실 술을 굳이 석 잔 마셨던 시절도 있었다. 유난히 선명한 녀석의 목소리는, 오늘 아침의 꿈 때문일까. 이대로는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질 것 같아, 손만 뻗으면 닿도록 방치해 둔 나이트테이블 위의 럭키 스트라이크를 한 개피 뽑아물고 지포로 불을 붙이고─이제는 완전히 정착한 흑발을 무심히 쓸어올렸다.
갓 미국에 건너갔을 때 팍삭 삭은 울룩불룩 코카서스들의 틈바구니에 껴 동안이라 얕보이고 비웃음 사는 데 진력이 나 - 물론 그 족족 국지성 폭우를 동반한 가차없는 응분의 처벌을 가하기는 했지만 쓰린 가슴은 쓰린 가슴이었다 - 홧김에 어디 한 번 막나가 보자고 파격에도 정도가 있는 형광 그린의 염색약을 홀랑 뒤집어쓴 게 그 시초,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후 괴이하다느니 망측하다느니 별별 구박을 다 받아가며 너희들은 짖어라 나는 씹는다의 배째라 근성으로 꿋꿋하게 강산 하나 변할 세월 내내 유지해 온 헤어스타일이었지만, 그것도 2년 전까지의 이야기다.
온갖 공을 다 들여가며 각 잡던 머리를 미련없이 잘라버리고 본래의 흑발로 시카고에 돌아온 그를 보고, 면식 좀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심지어는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 모양이 됐느냐고 눈물 콧물 다 짜가며 엉엉 우는 오버스런 인간까지 있었지만, 조신한 흑발도 꽤나 어울리더라는 현실 앞에서 모두 속도의 차이는 있으나마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기왕이면 카가 죠타로라는 이름에도 빨리 익숙해져 주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는 쓰게 웃었다.
──블리드 카가는 2년 전 그날 죽었다.
녀석이 더 이상 그가 알던 생기 넘치는 꼬마가 아니게 됐을 때, 이미.
카가는 하얀 담배 연기가 천장을 향해 고리를 그리며 솟아오르는 광경을 한동안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포효했다.
"으아악~너 뭐하는 거냐 카가 죠타로!! 아침나절부터 아주 궁상을 떨어라 떨어!!!! 에잇, 일단은 밥부터 먹..."
말은 거기서 끊겼다.
물컹.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려 기세좋게 등 뒤를 짚은 손에 있을 수 없는 감촉의 물체가 잡혔던 것이다.
"............................."
무거운 침묵이 방 전체를 꽈직꽈직 내리눌렀다.
빠지직 굳은 얼굴이 굳다 못해 멋지게 쩌저적 갈라터지는 가운데 개그 터치의 러블리한 식은땀 부대가 줄을 이어 이마와 뒤통수에 종종종종 매달린다. 이 감촉은... 설마, 설마, 설마!!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을 모조리 다 찾아가며 조심조심 몸을 돌려보니.
벗은 하얀 어깨를 담요 위로 드러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금발의 여성이 거기에 있었다.
"#$##(#$**!!#)%$*(%&@!*#$&#@*$&!#@*$&@#(~~~~~~~~!!!!!!!"
곧이어, 인류의 언어보다 오히려 포효에 근접한 비명소리가 아침 공기를 뒤흔들었다.
"........응?"
웬만한 일은 뱃심 좋게 코로 무시하는 소위 '털난 염통'의 블리드 카가에게서 때아닌 아침부터 뻑적지근한 비명을 뽑아낸 장본인은 그제야 잠이 깼는지 가느다란 팔을 쭈욱 뻗으며 나른한 하품을 토해내고, 담요로 하얀 가슴을 수줍게 가리며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채로 꽁꽁 얼어붙은 청년에게 다소 짓궂은 미소를 던졌다.
"후후후, 안녕 카가 씨. 좋은 아침."
"아.... 아야짱!! ;;;;"
빛이 반짝반짝 날 듯한 윤기가 자르르 감도는 얼굴로 상큼하게 웃고 있는 여성은 당연히 호텔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민완의 사진기자, 아야 스탠포드 바로 그녀였다. 하고 싶은 말은 수천 가지이나 소리는 안 나오고 그저 온 몸으로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는 오라만을 절절하게 방출하는 카가를 향해 아야는 한층 더 상쾌한 미소를 아낌없이 흩뿌렸다.
"어머 카가 씨, 눈치없기는.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 들어서 할 일이라면 하나밖에 더 있어?"
"...................................."
그야, 하나밖에 없긴 하죠.
아야 스탠포드는 넋이 홀랑 빠진 블리드 카가 - 굳이 본인 주장을 존중하자면 카가 죠타로 - 라는 금쪽같은 레어 영상을 10%의 감동과 90%의 흥미진진함을 품고 즐거이 바라보았다. 손 닿는 곳에 카메라가 없는 것이 못내 유감이다.
아아 어쩌면 이 남자, 의외로 놀리는 재미가 투철할지도♥ 하지만 상황 파악이 너무 안 되어도 여러 가지로 곤란하므로, 그녀는 좀 더 즐기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할 정보를 약간 아쉬운 기분으로 제공했다.
"기억 안 나? 당신이 붙들었잖아. 가지 말라고."
"....내가?"
"응. 꼭 구호품 받은 전쟁고아처럼 반 필사적으로 엉겨붙어서 도저히 떼어낼 수가 있어야지. 솔직히 나 좀 많이 창피했다고? ─그렇지. 당신, 나중에 그레이 씨한테 좀 많이 쪼일지도 몰라~후훗."
"...........내가.........?"
블리드 카가, 현재 망연자실 중. 로딩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성 싶다.
그야, 수도사도 아닌데 한창 끓을 나이의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물론 다 하고 살았다. 구데리안이나 스고 오사무처럼 절조를 사전에서 싹싹 지워버리고 이 여자 저 여자 잡히는 대로 놀아나지까진 않았을지언정, 이 바닥에서 염문 빈도로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인물이다. 물론 접근하는 여자도 많았고 거자불추내자불거였고 ONE NIGHT STAND의 횟수 따윈 애저녁에 세는 걸 포기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멀쩡한 정신으로 쌍방의 합의 하에 한 일이었지, 만취한 심신상실 상태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단 말이다!!
블리드 카가건 카가 죠타로건, 비교적 대형 사고는 치지 않고 살아왔다 자부하는 28년 인생에서 욕조에 물 받아놓고 머리 박고 싶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야짱~왜 의자로 후려쳐주지 않은 거야...."
거창한 빗금과 비애가 양어깨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은, 세상의 불행은 혼자 다 짊어졌소이다 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그 OTL 포즈는 꿈많은 팬에게는 좀 심하게 보여줄 수 없는 많이 한심한 광경이긴 했다. 남자는 다 짐승이라느니 정신이 들 때까지 죽도록 패줬어도 좋았다느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뭐라뭐라 계속 중얼대는 그에게, 아야는 대답 대신 쿡쿡 웃기만 했다.
마음에 둔 남자가 팔을 잡으면서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단호히 뿌리칠 수 있는 여자가 세상에 대체 몇이나 될까. 적어도 그녀는 독하게 마음먹고 밀어낼 수 있는 여자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설령, 그가 그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도 몹시 익숙한 이름이었다.
모터스포츠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살아서 신화가 되고 있는 한 청년의.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야는 의외의 광경에 새파란 눈을 둥글게 떴다. 식탁 위에 반쯤 차려진 두 사람 몫의 간편한 아침 식사.
우렁각시가 왔다간 게 아닌 바에야 카운터 뒤에서 서성대고 있는 카가의 소행이리라.
"어머, 아침까지 다 대접해 주고, 서비스 좋네."
"아... 뭐. 이 정도야..."
꽤 많이 찔리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신경 쓰지 말라고 일단 다독여는 줬지만 역시 양심이 멀쩡한 사람으로서 속이 따끔따끔한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나저나, 담배를 비스듬히 문 채로 프라이팬을 한 손에 들고 익숙하게 달걀 프라이를 뒤집고 있는, 대충 하나로 올려묶은 짧은 흑발에 넉넉한 회색 카디건을 걸치고 귀여운 에이프런을 두른 20대 후반 청년이라니 거 참 나름대로 엄청 로망에 그림이 되는 광경이긴 한데.
"......근데 말야 카가 씨."
"아?"
"당신, 진짜 안 어울려."
"시끄럿!!"
──그것도 저 남자의 성격을 모를 때나 가능한 이야기.
드물게 보는 시뻘개진 얼굴로 버럭대는 카가를 향해 아야는 배를 잡고 유쾌하게 웃어주었다.
'그, 그치만, 푸핫, 카가 씨가 그런 모습으로 부엌에 선다니, 아핫, 왠지 이상해요~푸훗... 아하하하하하!!!!'
아침 만들어주겠다 했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다 종래엔 허리가 끊어져라 웃던 녀석이 있었다.
벌써 8년 전 일이다.
"자, 여기 커피."
"고마워."
희뿌연 김이 솔솔 올라오는 하얀 머그컵을 양손으로 포옥 감싸안고 아침의 행복감을 만끽해 본다. 정작 그 내용물은 항상 짙은 블랙으로 마셨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먹다가 분명히 토했을 끔찍하게 쓴 맛의 시커먼 액체였지만. 이것이 바로 일부에서 드높은 악명을 자랑하는 - 몇 년 전의 인터뷰에서 누군가가 숨도 쉬지 않고 15분을 줄창 성토하던 - 만데린과 로브스타를 반반씩 섞은 블리드 카가표 블렌드 일명 '차라리-약탕을-마시고-말지-인간의-미각이냐-우웩' 커피인가. 아야는 다소 감개무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 하나 까닥 않고 커피를 빙자한 약탕을 음미하고 있는 식탁 건너편의 비(非)인간을 한 번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음... 역시 다시 봐도 제법 그림이라니까....'
많이 양보해서 오묘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던 - 그녀도 처음 직접 봤을 때는 정신 상태를 의심했었다 - 그 괴이하게 튀는 헤어스타일로도 죽지 않았던 얼굴이다. 차분한 흑발이 된 지금은 한층 조형의 단정함이 눈길을 끈다. 그 위에 나이를 먹을수록 관록이 차근차근 쌓여가는 남자로서 아주 바람직한 타입. 능력 있겠다 성격도..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화끈하니 그만하면 괜찮겠다, 염문은 많지만 이렇다 할 사귀는 여자도 없겠다 (2년 전까지 꽤 소문이 무성했던 AOI의 오너와는 결국 쌈박한 친구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했다) 목매는 여자가 줄을 설 만도 하다.
'하긴 나도 그 중의 하나지만?'
이 남자가 사실 대책없는 구제불능의 바보란 것까지 알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를까나.
여자들은 왜 정해놓고 바보멍청이 같은 남자에게 빠질까요? ─글쎄, 병아리는 왜 굳이 길을 건널까? 마음속으로 선문답을 종알거리며 아야는 불쑥 입을 열었다.
"카가 씨."
"응?"
"하나 물어봐도 돼?"
"뭐얼."
"당신도 슬슬 정착해도 될 나이잖아."
"하아?"
"나랑 결혼 안 할래?"
"푸흡!!!!"
뿜었다.
아야는 예상한 대로의 사태를 여유 있게 클래식한 종이 신문으로 막아냈다. 의외로 기습 공격에 약하다더니 정말이었다.
식탁 위에 엎어져 한 10초 정도 쿨럭거리던 카가가 비슬비슬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야짱... 내가 죽일 놈이니까 차라리 그냥 호되게 패주라. 농담에도 정도가 있지, 심장에 나빠!"
"어머 너무해라. 순진한 처녀의 진심 어린 프로포즈를 질 나쁜 농담으로 치부하다니, 언제부터 이리 박정한 남자가 됐을까 이이는. 어젯밤에 그토록 정성들여 사랑해 줄 때는 언제고, 훌쩍♥"
"아~야~짱~~~~~!!!"
진심은 진심이었다.
다만 받아주지 않을 줄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남자의 심장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으니까.
이 사람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문제의 청년이 조금 부러워져 버려서. 약간의 심술끼를 담아 건너편에서 투덜투덜중얼중얼궁시렁대며 죽어라고 커피만 홀짝대는 남자를 다시 넘겨다보았다.
"있지 카가 씨."
"아?"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
"예에 예, 이번엔 또 뭡니까요."
"정말 하야토 군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푸헉!!!"
또 뿜었다.
그리고 아야 스탠포드는 재방어 성공. 오오 찬란히 빛나는 방어율 100%.
다만 상대는 이번에야말로 타격이 너무 심했던지 3분이 넘도록 쿨럭거리고 있었다.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을 무렵, 알아서 퉁기듯 벌떡 일어나더니 사래가 단단히 들린 나머지 눈물까지 좀 그렁대는 눈으로 항의의 파이어 브레스를 요란히도 뿜어낸다.
"쿠...쿨럭...쿨럭쿨럭, 아야짱~~~!! 갑자기 뭘 묻는 거야!!"
"그치마안~수많은 CF팬들 - 음성적인 팬도 - 이 눈에 불을 켜고 궁금해 하는 화제인거얼~특집 기사도 몇 번이나 떴었다고요? 블리드 카가와 카자미 하야토는 정말 친구일 뿐인가! 라던가♥"
"왜 그딴 걸 궁금해 하는데! 왜! 게다가 전혀 상관없잖아 지금하곤!!"
"어머, 하룻밤 같이 보낸 사이에 그 정도도 대답 못해 줘?"
".........큭."
비장의 카드는 무난하게 먹혀들었다.
자알 익은 토마토 부럽지 않게 시뻘개진 얼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매던 눈이 마침내 아야를 찌릿 노려보더니 가히 씹어먹을 듯한 어조로 울컥 내뱉다시피 한 마디가 날아들었다.
"─없었어."
".......에~정말~?"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 의외네 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둥둥 떠다니는 배경에 약간 발끈했다.
"아 정말 없었어! 아.무.것.도!!"
눈 딱 감고 선을 넘어버릴까 생각하기는 수십 수백 번.
하지만 그 절묘한 거리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소중하고 소중하면 오히려 손 한 번 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그래, 없었다니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어렴풋이 후회하고 있다.
차라리 강제로라도 안아버렸더라면.
녀석을 영영 놓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카가 씨? 여보세요─?"
아야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왓 미안; 잠깐 생각이 트립을... 근데 아~야~짱~~~?"
"응?"
"이 아가씨가 왜 쓸데없는 건 묻고 그러시나~응~~?!"
"우후후후, 왜일까요?"
"우와! 그 웃음이 수상해!!"
"호호호호♥"
"에잇, 식기 전에 얼른 먹기나 하라구! 젠장!"
아야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안 가르쳐 줘.
──당신이 어젯밤에 누구를 그토록 찾았는지.
누구에게 숨도 안 쉬고 욕지거리를 했는지도.
하여튼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될 텐데 말야. 남자들이란.
말해 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뭐, 이 정도 심술은 용서되겠지?'
──나, 속없이 착한 여자는 못 되거든.
발코니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빛 속에서 간간이 찌푸린 얼굴로 쓰디쓴 커피를 홀짝여가며 토스트를 잘근거리는 상대의 모습에서 언뜻 기시감을 느꼈다.
아아, 그랬었지.
오늘 아침의 꿈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라, 아침 만들어주신 거예요?
────아~아 하지만 정말 몇 번 봐도 안 어울려요 그 앞치마... 우왓! 폭력 반대!
────오늘은 노른자 무사하네요. ...예에 예, 인간은 발전하는 법이죠. 특히 카가 씨는. 알아요 알아.
────우와! 뭐예요 이거 정말 커피!?
────이렇게 쓴 걸 무슨 수로 마셔요!?
────제가 아니라 카가 씨 미각이 이상한 거라고요!
────아아~못 살겠네! 이 사람 진짜 제멋대로야!
────...그런 점도, 좋아하지만요.
분명, 그랬던 순간이 있기도 했었다.
한 번 폼잡고 해보고 싶었던 괜한 주석.
(註 1) 침대에서 늘 내려오던 쪽이 아니라 반대쪽으로 내려오면 그날 종일 재수가 없다는 미신.
(註 2) '아침 만들어주겠다 했더니 고마워하기는커녕 허리 잡고 웃더라'는 예의 닭살과 염장 만땅의 드라마 CD RAINY NIGHT의 네타.
(註 3) 블리드 카가표 블렌드 만데린 반 자바 로브스타 반이란 살인적인 커피의 출전은 미즈모리 렌의 동인지 <휴일~OFF~>. 실제로도 쓰기가 웬만한 약은 감히 근접도 못하는 수준이라고. -_-;; 물론 인터뷰에서 이 커피를 '숨도 쉬지 않고 15분을 줄창 성토한' 사람은 하야토.
(註 4) '여자들은 왜 정해놓고~길을 건널까?' 는 '닭은 왜 길을 건널까?' 라는 매우 클래식한 썰렁 농담에서 파생된 맥널리 시리즈에서의 네타. 병아리를 뜻하는 Chicks에는 처녀애들이란 의미도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꽤 센스 있는 말장난인 셈. 이봐요, 건너지 말아요 아야 씨... OTL
1. 빠릿하고 여유 있는 아가씨를 사랑하는 관리인의 취향이 심하게 반영됐으므로 아야 스탠포드의 성격이 실제의 드라마 CD와는 상당 부분 차이날 수 있다. 얽어서 얘길 복잡하게 만들 바에는 여왕님보다 이 아가씨를 선호하는 편. 첫째로 아야 씨 쪽이 훨씬 다루기 쉽고, 둘째로 안 그래도 남자복 절라 없으신 여왕님한테 애물단지 3호를 안겨줘서 뭘 어쩔 거냐 싶으므로; (물론 애물단지 1호는 신죠, 2호는 나구모이다) 친구로 됐다, 친구로.
2. 난 아직 카가 씨의 SIN에서의 악행(...)을 용서 못하고 있음. 후, 후후후후후후..... -_-+++ (부당하다는 걸 아는 이성과 분노하는 감성은 별개임. 아무렴)
3. 쓰고 싶었던 대목을 앞에서 다 써 버려서 뒤로 갈수록 날림이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다... 누가 내게 문재를!! (털푸덕)
그리고 제목에 대해선 일절 쯧코미를 반사하겠음;
4.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러 가면 될 텐데'. 그 말이 정답이지만 쉽게 될 것 같으면 아무도 이 고생 안 함;
5. 어쩌다 보니 이런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역시 침대에서 일 치르며 딴 인간 찾는 놈은 그 잘나빠진 입을 미싱으로 드르륵 박아버려야 한다는 게 S의 평소 지론임; (....하지만 이 점에선 H모 군도 한 개도 나을 게 없음. 이 민폐 인간들;;;)
6. 지금 머릿속을 빙빙 맴돌고 있는 건 몽땅 꿀꿀하기론 돼지 멱 따는 소리보다 더 지독한 물건들 뿐. 좀 발랄한 네타가 하늘에서 떨어져 주지 않으려나?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