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에서 신나게 노닥거리다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덤으로 지난 주에 아무리 정신이 없었기로서니 사포 SS를 하/나/밖에 쓰지 않은 게으른 자신에게 강렬한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S입니다.
...서, 설마 미즈모리의 핑크빛 허그허그에로에로러브러브오라가 앵스트 노선을 거부하고 있는 건가!!! ;;;;
하여간 아직 쓰지도 않은(....) 본편의 아마도 외전. (내일 이글루스가 망하더라도 오늘 나는 한 개의 이하 생략!)
SIDE A-23. 온기(温もり)
"애는 카가 씨가 낳는 거겠죠~? (생글생글)" 은 지벨 님의 오마쥬 되겠습니다. (오마쥬씩이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망상하는 것은 독자의 권한임을 믿습니다. 와하하하하하하핫.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란 결코 비유가 아니었음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입술을 피 나도록 깨물며 죽는 게 오히려 편할 것 같은 끔찍한 동통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그저, 머리가 텅 비어버려서───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더라면. 불가능한 줄 뼈저리게 알고 있는 가정만을 수백 수천 번 되풀이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널 몰랐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마지막으로 잡은 손은 예전의 온기는 간 곳 없이 소름끼치게 차갑기만 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는 이렇게나 싸늘했던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였다.
"─괜찮으세요?"
"........하야...토.....?"
"예, 저예요. 뭔가 심하게 가위──엣!?"
덮치다시피 낚아채 으스러지도록 꼬옥 끌어안았다. 상대가 짤막하게 숨넘어가는 비명을 토하며 미미한 저항을 보이거나 말거나 상관 않고 껴안은 양팔에 한층 힘을 싣는다. 당장이라도 품안에서 으깨질 듯 파르르 떨리는 가늘고 여린 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날 만큼 따스한 온기였다.
"......아.... 아파요 카가 씨....! 아프다니까....! .....카가 씨? ..카가 씨... 왜 그러세요?"
"시끄러... 가만 좀 있어라. 모처럼 이렇게 좋은 꿈인데, 좀 즐긴다고 벌 받진 않을 거 아냐... 먼저 내 무의식에 건배."
잠시 인터벌이 있었다.
"...왜 꿈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네가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제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시는 이유는 뭐죠."
"그야, 넌──......"
말문이 막혔다.
....그 다음은?
막 눈 뜬 순간에는 분명히 알았던 사실이, 마치 목구멍에 걸리기라도 한 듯 빙빙 맴돌기만 할 뿐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난 대체 뭘 알고 있었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백만을 남기고 지워지는 기억을 카가는 속수무책으로 곱씹었다.
"─카가 씨?"
".............에 또."
"예?"
".....잊어버렸어."
하야토는 주저없이 탁자 위의 얼음물잔을 집어 카가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우왓 차가워!!!! 꼭두새벽부터 까불래 너 맞고 싶냐 하야토!!!"
버럭 고함지르고 다음 순간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떠나간 버스였다.
"아하하하, 까불지 말라고요? 그건 제가 할 말이네요. ─카가 씨야말로 웃기지 말아요!! 바로 어젯밤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뭔 짓을 했는지 보아하니 다─아 까먹고 망각의 저편이신 모양인데 유감스럽지만 제 뇌세포는 알콜로 절지 않았거든요! 구데리안 씨랑 입씨름이 붙더니 그예 파티장 술의 60퍼센트를 둘이서 작살내고 새파랗게 질려선 비실비실 기어코 제 쪽으로 오시더니만 남의 어깨를 잡아비틀면서 대뜸 외친다는 말이 글쎄 뭐,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미소시루를 만들어 달라고요? 카가 씨 주제에 왜 정석을 고대로 밟느냐고 해야 할지 할 말이 그래 옛날 고리짝에 과거의 유물이 된 프로포즈 전용 대사뿐이냐고 딴지 걸어줘야 할지 나 미소시루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 왜 이러냐고 항의해야 할지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그냥 머리를 후려쳐야 할지 잠시 망설였더니 보라죠, 딱 비극의 히로인 포즈로 바닥에 풀썩 쓰러져 조명까지 받아가며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넌 내 몸만이 목적이었던 거냐!! 어쩌라고요. 세상에 뻔뻔해도 유분수지, 미성년자의 동정을 홀랑 접수한 게 누군데! 오사무 형은 꼬인 혀로 길길이 날뛰지 부쯔홀츠 씨는 막아보겠다고 죽어라 매달리지 구데리안 씨는 덩달아 울지, 신죠 씨는 덩달아 울면서 미키 씨한테 매달리다 스패너로 얻어맞고 침몰하지 아야 씨랑 클레어 씨는 재미들려 온갖 야유는 다 해대지 교코 씨까지 술에 절어선 남자라면 남자답게 저지른 일을 인정하고 우리 드라이버를 책임지라고 짤짤 흔들어대지 하이넬 씨마저 어깨에 손 얹고 사나이답게 현실을 받아들이라잖아요 글쎄! 정말 저더러 뭘 어쩌라고요! 모두가 둘러서서 에●게리온 최종화 풍으로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갈채 보내는 와중에 카가 씨는 아스카랑 손을 굳게 맞잡고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 다짐이나 하고 있지 란돌은 눈물 한 번이라도 뽑는 날엔 초상 칠 줄 알라고 뭔지 모를 소릴 하면서 을러대지, 일순 진심으로 살의가 솟구쳐서 이 사람 식칼로 쑤시고 나도 확 죽어버릴까 생각했더라도 누가 절 탓할 수 있겠어요 아니 없죠! 혼자 만족한 얼굴로 팔자좋게 곯아떨어진 카가 씨를 아내의 의무랍시고 다들 작당해서 떠넘겼을 땐 그냥 이 부근에 내팽개치고 도망가려다 결국 마음 고쳐먹고 9cm는 더 크고 13kg은 더 나가고 납덩이 따위 저리 가라게 무거운 사람을 질질 끌다시피 댁까지 모시고 와서 코트랑 신발 벗기고 침대에 밀어넣고 이불 덮어주고 새벽같이 일어나 물 받아놓고 깨우러 와서 심지어 해장국 끓일 준비까지 하고 있는 저한테! 눈 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넌 여기 있을 리 없으니까 이건 꿈이다아!? 아 예 그러시겠죠 꿈이시겠죠. 언덕 위의 하얀 교회에서 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고 어서 오세요 목욕부터 하실래요 식사 먼저 하실래요 아니면 저로 하시겠어요♡의 달달한 신혼 생활을 보내다 카가 씨 똑 닮은 딸도 하나 생겨서 내 천(川)자로 나란히 잠도 자고 학교에도 보내고 수업 참관도 안 빼먹고 운동회도 보러 가다 어느 샌가 이렇게 훌쩍 자라서 좋은 남자 만나 시집도 가고 손자도 봐서 재롱을 즐기며 파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사이좋게 금슬 좋게 천년만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 리가 있겠어요 우리가! 물론 애는 카가 씨가 낳는 거겠죠~? 예? 예? 예~~?"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이 미처 덜 깨 저지른 실수였사오니 너그럽게 보아 넘기시면 무척 기쁘겠거니와 제발 그렇게 웃지만 마라 내가 이렇게 빈다! ;;;"
생글생글 미소를 얼굴에 쩔꺼덕 붙이고 대본 두 페이지는 그냥 먹고 들어갈 대사를 숨 한 번 안 쉬고 달달달달달달달 읊어대는 하야토는 진짜로 살떨리게 무서웠다.
"하아, 반성하셨으면 씻고 오세요. 해장국은 끓여드릴 테니까."
"옛써!"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답게 쏜살같이 침대에서 튀어나갔다.
미련없이 품안에서 빠져나가는 온기가 많이 아쉬웠지만.
알맞은 온도로 데워진 목욕물에 푹 잠겨서 노골노골하게 잘 풀어진 후 수건으로 대충 부비작거리며 휘청대는 발걸음으로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있었다.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뒷모습.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접근해 뒤에서 꼬옥 끌어안고 이번엔 어깨에 머리를 푹 파묻었다. 흠뻑 젖은 길다란 머리카락이 처덕처덕 휘감겨 드는 감촉이 소름끼쳤는지 하야토가 히엑, 인지 우겍, 인지 모를 비명을 질렀다.
"카가 씨, 간지러워요. 축축해. 기분 나빠! 엘라스틴 머릿결이면 다예요 좀 말리고 오세요 떨어져요 방해돼!"
"참아."
"....오늘따라 좀 이상하시네. 하긴 카가 씨가 이상한 거야 디폴트지만."
"이 자식, 부엌 바닥에서 범해버린다."
"만년발정기."
"그 만년발정기한테 당하면서 좋다고 울고 불고 매달리는 놈은 뭘까나."
".....카가 씨?"
평소라면 버럭 화를 내고도 남았을 대사인데, 숙취와는 다른 이유로 목소리에 영 패기가 없는 걸 눈치채였나 보다. 어떻게 좀 돌아보려고 열심히 바둥바둥 애쓰는 녀석을 180도 빙글 돌려세워 이번엔 정면에서 껴안았다. 귓불에 살짝 입술을 댄 것만으로 짧게 숨을 들이키며 한순간 파르륵 얼어붙었다 곧 스륵 힘이 빠져나가는 감촉에 조금은 유쾌해졌다. 갈색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고 쿡쿡 웃는다. ...아, 샴푸 향기.
버둥거리기를 깔쌈히 포기해 버린 하야토가 딱 우는 아이 달래는 요령으로 등을 톡톡 두드려주어도 과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카가 씨."
"응?"
"꿈자리가 그렇게 사나우셨어요?"
"아마도."
"......왜 가정형."
"생각이 안 나... 이젠 뭔가, 니가 있었다는 것밖에 모르겠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숨이 막히고 내장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일과 흡사했던 그 무시무시한 통증의 기억만이 생생해서. 인간은 좋은 꿈이면 '좋은 꿈 꿨다' 라고, 악몽이면 '현실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 위해 꿈을 꾼다던가. 그럼 난 명백히 후자겠지─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던 까닭에, 하야토가 불쑥 내뱉은 말에 미처 방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거, 정말로 꿈이었을까요?"
".....뭐?"
불의에 힘을 잃은 팔에서 살짝 몸을 빼간 하야토가 카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한 눈빛으로.
"여기 있는 제 쪽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세요?"
"그.게. 단순히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꾼 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냐고요?"
"─예? 카가 씨."
무거운 침묵이 부엌에 내려앉았다.
맞부딪히는 시선의 싸움에서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의외로 하야토였다.
"농담이었어요. ....농담이니까 제발 버림받은 강아지 닮은 처량한 눈길로 쳐다보지 마세요. 안 어울려서 무서워요! ;;;"
".....엣... 아, 아아, 그래...."
여전히 약간 방심 상태인 카가를 조금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다, 하야토는 한숨을 폭 쉬고 성큼 다가섰다.
평균보다 조금 작고 가늘고─아주 따뜻한 양손이 뺨을 포옥 감쌌다.
펄쩍 뛰어오르는 추태는 용케 자제하고 내려다 본 9cm 아래에서 녀석이 살포시 웃었다.
"꿈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요. 저, 여기 있어요. 제대로 여기 있어요. 아무 데도 안 가고, 여기 있어요. 카가 씨가 가라고 쫓아내셔도 절대 안 가요. ─그걸론 부족하세요?"
"...........무슨 버전이야 이건?"
"세끼 밥보다 카가 씨가 좋은 사랑에 눈 먼 버전 카자미 하야토."
"바보냐..."
"헤에, 그 바보의 헛소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당신은 대체 무슨 종자신지?"
"닥쳐 임마."
"사랑에 눈 먼 버전이라서 이런 대출혈 서비스도 가능하답니다."
"아?"
뺨에서 스륵 손이 떨어지더니 이번엔 귓가에 나지막한 소근거림이 닿았다.
".....오늘,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퍼펙트로 먹혔다.
"우와아."
그 짧은 감탄사 하나 내뱉는데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한 한동안의 헛기침이 선행해야 했지만, 어쨌든 말은 무사히 나왔다.
"근래 들어본 놈 중에서 제일 뻑적지근하게 허리에 오는 작업 대사였다."
"웃... 놀리시기예요!? 남은 창피해 죽겠는데!"
"아니, 진심."
불평이 대량으로 종알종알 쏟아지기 전에 전부 삼켜버렸다.
입술을 혀 끝으로 주르륵 핥는 걸로 마무리했더니 한참 상승한 분당 호흡수를 억제하느라 무진 노력한 끝에 냅다 항의를 퍼붓는다.
"...느끼해! 진짜 느끼해! 무슨 버전이에요 이건?"
"어덜트 24금 버전 블리드 카가."
"이런 바보."
"그 바보에게 당하면서 좋다고 허덕이는 넌 대체 무슨 종자고?"
".....그냥 땅파게 내버려둘걸! 방심하고 삽질하고 풀 죽은 카가 씨 무지 귀여웠는데!"
"천만의 말씀. 귀여움으로 널 따라가려면 난 아직 수행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지~"
"얄미운 마이페이스 카가 씨 완전 부활!?"
"자, 이제 그만 입은 다물까?"
".............아."
잊어버려.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돌아보지 마. 기억해내지 않아도 돼. 전부, 잊어버려.
꿈이건 현실이건 미래건 설령 과거였더라도, 이 순간만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지금은.
지금만은.
입술을 피 나도록 깨물며 죽는 게 오히려 편할 것 같은 끔찍한 동통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그저, 머리가 텅 비어버려서───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었더라면. 불가능한 줄 뼈저리게 알고 있는 가정만을 수백 수천 번 되풀이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널 몰랐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마지막으로 잡은 손은 예전의 온기는 간 곳 없이 소름끼치게 차갑기만 했다.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는 이렇게나 싸늘했던가.
식은땀에 흠뻑 젖어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커다란 갈색 눈동자였다.
"─괜찮으세요?"
"........하야...토.....?"
"예, 저예요. 뭔가 심하게 가위──엣!?"
덮치다시피 낚아채 으스러지도록 꼬옥 끌어안았다. 상대가 짤막하게 숨넘어가는 비명을 토하며 미미한 저항을 보이거나 말거나 상관 않고 껴안은 양팔에 한층 힘을 싣는다. 당장이라도 품안에서 으깨질 듯 파르르 떨리는 가늘고 여린 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날 만큼 따스한 온기였다.
"......아.... 아파요 카가 씨....! 아프다니까....! .....카가 씨? ..카가 씨... 왜 그러세요?"
"시끄러... 가만 좀 있어라. 모처럼 이렇게 좋은 꿈인데, 좀 즐긴다고 벌 받진 않을 거 아냐... 먼저 내 무의식에 건배."
잠시 인터벌이 있었다.
"...왜 꿈이라고 생각하시는데요?"
"네가 여기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제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시는 이유는 뭐죠."
"그야, 넌──......"
말문이 막혔다.
....그 다음은?
막 눈 뜬 순간에는 분명히 알았던 사실이, 마치 목구멍에 걸리기라도 한 듯 빙빙 맴돌기만 할 뿐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난 대체 뭘 알고 있었지...?
인식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공백만을 남기고 지워지는 기억을 카가는 속수무책으로 곱씹었다.
"─카가 씨?"
".............에 또."
"예?"
".....잊어버렸어."
하야토는 주저없이 탁자 위의 얼음물잔을 집어 카가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우왓 차가워!!!! 꼭두새벽부터 까불래 너 맞고 싶냐 하야토!!!"
버럭 고함지르고 다음 순간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떠나간 버스였다.
"아하하하, 까불지 말라고요? 그건 제가 할 말이네요. ─카가 씨야말로 웃기지 말아요!! 바로 어젯밤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뭔 짓을 했는지 보아하니 다─아 까먹고 망각의 저편이신 모양인데 유감스럽지만 제 뇌세포는 알콜로 절지 않았거든요! 구데리안 씨랑 입씨름이 붙더니 그예 파티장 술의 60퍼센트를 둘이서 작살내고 새파랗게 질려선 비실비실 기어코 제 쪽으로 오시더니만 남의 어깨를 잡아비틀면서 대뜸 외친다는 말이 글쎄 뭐, 나한테 시집와서 평생 미소시루를 만들어 달라고요? 카가 씨 주제에 왜 정석을 고대로 밟느냐고 해야 할지 할 말이 그래 옛날 고리짝에 과거의 유물이 된 프로포즈 전용 대사뿐이냐고 딴지 걸어줘야 할지 나 미소시루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 왜 이러냐고 항의해야 할지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그냥 머리를 후려쳐야 할지 잠시 망설였더니 보라죠, 딱 비극의 히로인 포즈로 바닥에 풀썩 쓰러져 조명까지 받아가며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넌 내 몸만이 목적이었던 거냐!! 어쩌라고요. 세상에 뻔뻔해도 유분수지, 미성년자의 동정을 홀랑 접수한 게 누군데! 오사무 형은 꼬인 혀로 길길이 날뛰지 부쯔홀츠 씨는 막아보겠다고 죽어라 매달리지 구데리안 씨는 덩달아 울지, 신죠 씨는 덩달아 울면서 미키 씨한테 매달리다 스패너로 얻어맞고 침몰하지 아야 씨랑 클레어 씨는 재미들려 온갖 야유는 다 해대지 교코 씨까지 술에 절어선 남자라면 남자답게 저지른 일을 인정하고 우리 드라이버를 책임지라고 짤짤 흔들어대지 하이넬 씨마저 어깨에 손 얹고 사나이답게 현실을 받아들이라잖아요 글쎄! 정말 저더러 뭘 어쩌라고요! 모두가 둘러서서 에●게리온 최종화 풍으로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갈채 보내는 와중에 카가 씨는 아스카랑 손을 굳게 맞잡고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 다짐이나 하고 있지 란돌은 눈물 한 번이라도 뽑는 날엔 초상 칠 줄 알라고 뭔지 모를 소릴 하면서 을러대지, 일순 진심으로 살의가 솟구쳐서 이 사람 식칼로 쑤시고 나도 확 죽어버릴까 생각했더라도 누가 절 탓할 수 있겠어요 아니 없죠! 혼자 만족한 얼굴로 팔자좋게 곯아떨어진 카가 씨를 아내의 의무랍시고 다들 작당해서 떠넘겼을 땐 그냥 이 부근에 내팽개치고 도망가려다 결국 마음 고쳐먹고 9cm는 더 크고 13kg은 더 나가고 납덩이 따위 저리 가라게 무거운 사람을 질질 끌다시피 댁까지 모시고 와서 코트랑 신발 벗기고 침대에 밀어넣고 이불 덮어주고 새벽같이 일어나 물 받아놓고 깨우러 와서 심지어 해장국 끓일 준비까지 하고 있는 저한테! 눈 뜨자마자 한다는 말이! 넌 여기 있을 리 없으니까 이건 꿈이다아!? 아 예 그러시겠죠 꿈이시겠죠. 언덕 위의 하얀 교회에서 식을 올리고 신혼여행도 가고 어서 오세요 목욕부터 하실래요 식사 먼저 하실래요 아니면 저로 하시겠어요♡의 달달한 신혼 생활을 보내다 카가 씨 똑 닮은 딸도 하나 생겨서 내 천(川)자로 나란히 잠도 자고 학교에도 보내고 수업 참관도 안 빼먹고 운동회도 보러 가다 어느 샌가 이렇게 훌쩍 자라서 좋은 남자 만나 시집도 가고 손자도 봐서 재롱을 즐기며 파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사이좋게 금슬 좋게 천년만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 리가 있겠어요 우리가! 물론 애는 카가 씨가 낳는 거겠죠~? 예? 예? 예~~?"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잠이 미처 덜 깨 저지른 실수였사오니 너그럽게 보아 넘기시면 무척 기쁘겠거니와 제발 그렇게 웃지만 마라 내가 이렇게 빈다! ;;;"
생글생글 미소를 얼굴에 쩔꺼덕 붙이고 대본 두 페이지는 그냥 먹고 들어갈 대사를 숨 한 번 안 쉬고 달달달달달달달 읊어대는 하야토는 진짜로 살떨리게 무서웠다.
"하아, 반성하셨으면 씻고 오세요. 해장국은 끓여드릴 테니까."
"옛써!"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답게 쏜살같이 침대에서 튀어나갔다.
미련없이 품안에서 빠져나가는 온기가 많이 아쉬웠지만.
알맞은 온도로 데워진 목욕물에 푹 잠겨서 노골노골하게 잘 풀어진 후 수건으로 대충 부비작거리며 휘청대는 발걸음으로 부엌을 들여다보았다.
있었다.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뒷모습.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접근해 뒤에서 꼬옥 끌어안고 이번엔 어깨에 머리를 푹 파묻었다. 흠뻑 젖은 길다란 머리카락이 처덕처덕 휘감겨 드는 감촉이 소름끼쳤는지 하야토가 히엑, 인지 우겍, 인지 모를 비명을 질렀다.
"카가 씨, 간지러워요. 축축해. 기분 나빠! 엘라스틴 머릿결이면 다예요 좀 말리고 오세요 떨어져요 방해돼!"
"참아."
"....오늘따라 좀 이상하시네. 하긴 카가 씨가 이상한 거야 디폴트지만."
"이 자식, 부엌 바닥에서 범해버린다."
"만년발정기."
"그 만년발정기한테 당하면서 좋다고 울고 불고 매달리는 놈은 뭘까나."
".....카가 씨?"
평소라면 버럭 화를 내고도 남았을 대사인데, 숙취와는 다른 이유로 목소리에 영 패기가 없는 걸 눈치채였나 보다. 어떻게 좀 돌아보려고 열심히 바둥바둥 애쓰는 녀석을 180도 빙글 돌려세워 이번엔 정면에서 껴안았다. 귓불에 살짝 입술을 댄 것만으로 짧게 숨을 들이키며 한순간 파르륵 얼어붙었다 곧 스륵 힘이 빠져나가는 감촉에 조금은 유쾌해졌다. 갈색 머리카락에 고개를 묻고 쿡쿡 웃는다. ...아, 샴푸 향기.
버둥거리기를 깔쌈히 포기해 버린 하야토가 딱 우는 아이 달래는 요령으로 등을 톡톡 두드려주어도 과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카가 씨."
"응?"
"꿈자리가 그렇게 사나우셨어요?"
"아마도."
"......왜 가정형."
"생각이 안 나... 이젠 뭔가, 니가 있었다는 것밖에 모르겠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숨이 막히고 내장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일과 흡사했던 그 무시무시한 통증의 기억만이 생생해서. 인간은 좋은 꿈이면 '좋은 꿈 꿨다' 라고, 악몽이면 '현실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 위해 꿈을 꾼다던가. 그럼 난 명백히 후자겠지─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던 까닭에, 하야토가 불쑥 내뱉은 말에 미처 방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거, 정말로 꿈이었을까요?"
".....뭐?"
불의에 힘을 잃은 팔에서 살짝 몸을 빼간 하야토가 카가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한 눈빛으로.
"여기 있는 제 쪽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으세요?"
"그.게. 단순히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꾼 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냐고요?"
"─예? 카가 씨."
무거운 침묵이 부엌에 내려앉았다.
맞부딪히는 시선의 싸움에서 먼저 눈을 돌린 사람은 의외로 하야토였다.
"농담이었어요. ....농담이니까 제발 버림받은 강아지 닮은 처량한 눈길로 쳐다보지 마세요. 안 어울려서 무서워요! ;;;"
".....엣... 아, 아아, 그래...."
여전히 약간 방심 상태인 카가를 조금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다, 하야토는 한숨을 폭 쉬고 성큼 다가섰다.
평균보다 조금 작고 가늘고─아주 따뜻한 양손이 뺨을 포옥 감쌌다.
펄쩍 뛰어오르는 추태는 용케 자제하고 내려다 본 9cm 아래에서 녀석이 살포시 웃었다.
"꿈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요. 저, 여기 있어요. 제대로 여기 있어요. 아무 데도 안 가고, 여기 있어요. 카가 씨가 가라고 쫓아내셔도 절대 안 가요. ─그걸론 부족하세요?"
"...........무슨 버전이야 이건?"
"세끼 밥보다 카가 씨가 좋은 사랑에 눈 먼 버전 카자미 하야토."
"바보냐..."
"헤에, 그 바보의 헛소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당신은 대체 무슨 종자신지?"
"닥쳐 임마."
"사랑에 눈 먼 버전이라서 이런 대출혈 서비스도 가능하답니다."
"아?"
뺨에서 스륵 손이 떨어지더니 이번엔 귓가에 나지막한 소근거림이 닿았다.
".....오늘,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퍼펙트로 먹혔다.
"우와아."
그 짧은 감탄사 하나 내뱉는데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한 한동안의 헛기침이 선행해야 했지만, 어쨌든 말은 무사히 나왔다.
"근래 들어본 놈 중에서 제일 뻑적지근하게 허리에 오는 작업 대사였다."
"웃... 놀리시기예요!? 남은 창피해 죽겠는데!"
"아니, 진심."
불평이 대량으로 종알종알 쏟아지기 전에 전부 삼켜버렸다.
입술을 혀 끝으로 주르륵 핥는 걸로 마무리했더니 한참 상승한 분당 호흡수를 억제하느라 무진 노력한 끝에 냅다 항의를 퍼붓는다.
"...느끼해! 진짜 느끼해! 무슨 버전이에요 이건?"
"어덜트 24금 버전 블리드 카가."
"이런 바보."
"그 바보에게 당하면서 좋다고 허덕이는 넌 대체 무슨 종자고?"
".....그냥 땅파게 내버려둘걸! 방심하고 삽질하고 풀 죽은 카가 씨 무지 귀여웠는데!"
"천만의 말씀. 귀여움으로 널 따라가려면 난 아직 수행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지~"
"얄미운 마이페이스 카가 씨 완전 부활!?"
"자, 이제 그만 입은 다물까?"
".............아."
잊어버려.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돌아보지 마. 기억해내지 않아도 돼. 전부, 잊어버려.
꿈이건 현실이건 미래건 설령 과거였더라도, 이 순간만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지금은.
지금만은.
"애는 카가 씨가 낳는 거겠죠~? (생글생글)" 은 지벨 님의 오마쥬 되겠습니다. (오마쥬씩이나;)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망상하는 것은 독자의 권한임을 믿습니다. 와하하하하하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