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맞아 나 자신을 축하하기 위해(....) 그간 미루고 또 미뤄왔던 손오 모에의 근원인 사이트 오서견문(呉書見聞, 마스터 손포코そんぽこ님)의 손책전(孫策伝) 일괄 번역에 나섰다. 모에심에 눈이 빙글 돌아간 결과이므로 당연히 배째고 등따고 장 꺼내서 이단줄넘기질 중임. 문제가 되면 싸그리 지울 예정이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강조색은 절대 내가 넣은 거 아님.
이런 퀄리티를 퍼 가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지만 하여간 쿄고쿠도의 저주 7대치는 준비해 두겠음.
현재 진수가 저술하고 배송지가 주석을 단 정사삼국지 오서의 토역전(討逆伝)도 번역 준비 중. 오오 무모하다.
제 1장. 영민활달(英邁闊達)
보다시피 손포코 님이 좀 심하게 손책 팬이다. (너무 심해서 처음엔 여성인 줄 알았음;) S와 같이 모에와 망상으로만 사는 허접 팬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임. 그치만 저게 모두 콩깍지가 아니라 실제 정사가 그렇다는 데 어쩔 것이야;
손책. 자는 백부(伯符). 지금부터 살펴볼 손책전은, 손책이 강동을 평정코자 거병했을 때부터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을 때까지의 약 6~7년간을 다룬 기술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사망 당시 손책의 나이는 스물 여섯(※ 만으로는 스물 다섯). 역사적으로도 이토록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인물로써 이만한 업적을 쌓아올린 케이스는 지극히 드물어, 손책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걸출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지요. (손책을 따라간 건 아니겠지만, 손오의 중진에는 주유나 여몽을 비롯해 천수를 못 다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걸 감안해도 손책은 이례적인 경우에 속하죠)
손책전의 서두는 손책이 독립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손책은 부친 손견의 고향이기도 한 부춘(富春 : 장강의 남쪽, 회계군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태어난 해는 175년. 손견이 허창(許昌)의 난을 진압한 직후입니다. 그 후 손견은 황건 토벌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면서 가족을 서(舒 : 장강 북쪽 기슭에 위치. 노강군 소속)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손책은 약 10세. 배송지(裴松之)의 주에 따르면 손견은 주준(朱儁) 막하에 종군할 때 가족을 수춘(寿春 : 장강 북쪽 기슭에 위치. 당시 양주[揚州]의 주도[州都])에 두었으며, 이후에 주유의 제안으로 서에 이주했다고도 합니다. 하여간 손책은 열 살 무렵에 주유와 만난 셈이 됩니다. 손책과 주유의 사이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형제에 가까웠다고 하는군요. 배송지의 주에서도 '두 사람의 우정은 금속마저도 끊을 만큼 강고하였다(단금지교)'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유의 본가는 대위(大尉, 최고위인 삼공 중 하나)를 배출했던 명문으로, 손책의 가족에게 자택 한 채를 내주고 서로 가깝게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가족끼리도 친밀했다는 뜻이겠지요.
두 사람은 이미 이 무렵부터 비범함을 전면적으로 발휘하여, 명망이 높은 인물들과 교우를 맺어 그 평판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 둘을 뭉뚱그려 칭하기를 '영민활달'이라 하니, 눈에 확 뜨이는 용모에 자타공인의 좋은 남자로, 기품이 있고 무언가 타인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던 거겠죠. 진수(陳寿)는 본문에서 손책의 사람됨을 평가하기를, 수려한 외모에 담소를 즐기며, 활달한 성격으로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므로 사인(士人)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손책을 만나본 자는 누구나 성심성의껏 따르고 목숨을 걸기를 주저치 않았다 합니다.
손책이 부친 손견보다 앞선 요소 중의 하나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손견에게 매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손견 역시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정보, 황개, 한당, 조무, 주치 등의 인재를 막하에 끌어 모았으니까요. 다만 손책은 부친보다 10년이나 일찍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유를 비롯하여 여범, 장소, 장굉, 주태, 장흠, 진무, 동습, 여몽, 태사자 등등등등등 오의 주춧돌이 된 인재를 극히 짧은 시간 내에 장악하였습니다. 이는, 손책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등용한 까닭도 있지만(실제로 손책의 요청을 거부하고 위로 건너간 인물도 있고요), 그들이 손책에게서 목숨을 걸 주군의 자질과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조조는 사람 수집이 취미라고 일컬어질 만큼 인재를 열성껏 모은 걸로 유명하지만, 손책은 그 조조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거나 오히려 웃도는 페이스로 인재 수집에 성공하고 있죠. (손권의 경우 인재수집능력은 조조보다 떨어지는 대신, 인재활용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손책은 오 주변의 각지를 전전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영웅으로서의 풍모를 보여 손견의 후계자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웅의 시대는 너무나도 빨리 막을 내리게 됩니다. 부친 손견이 형주에서 어이없이 전사한 것입니다. 당시 손책은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손책전의 서두는 손책이 독립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손책은 부친 손견의 고향이기도 한 부춘(富春 : 장강의 남쪽, 회계군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태어난 해는 175년. 손견이 허창(許昌)의 난을 진압한 직후입니다. 그 후 손견은 황건 토벌을 위해 의병을 일으키면서 가족을 서(舒 : 장강 북쪽 기슭에 위치. 노강군 소속)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손책은 약 10세. 배송지(裴松之)의 주에 따르면 손견은 주준(朱儁) 막하에 종군할 때 가족을 수춘(寿春 : 장강 북쪽 기슭에 위치. 당시 양주[揚州]의 주도[州都])에 두었으며, 이후에 주유의 제안으로 서에 이주했다고도 합니다. 하여간 손책은 열 살 무렵에 주유와 만난 셈이 됩니다. 손책과 주유의 사이는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형제에 가까웠다고 하는군요. 배송지의 주에서도 '두 사람의 우정은 금속마저도 끊을 만큼 강고하였다(단금지교)'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유의 본가는 대위(大尉, 최고위인 삼공 중 하나)를 배출했던 명문으로, 손책의 가족에게 자택 한 채를 내주고 서로 가깝게 교류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가족끼리도 친밀했다는 뜻이겠지요.
두 사람은 이미 이 무렵부터 비범함을 전면적으로 발휘하여, 명망이 높은 인물들과 교우를 맺어 그 평판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 둘을 뭉뚱그려 칭하기를 '영민활달'이라 하니, 눈에 확 뜨이는 용모에 자타공인의 좋은 남자로, 기품이 있고 무언가 타인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던 거겠죠. 진수(陳寿)는 본문에서 손책의 사람됨을 평가하기를, 수려한 외모에 담소를 즐기며, 활달한 성격으로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므로 사인(士人)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손책을 만나본 자는 누구나 성심성의껏 따르고 목숨을 걸기를 주저치 않았다 합니다.
손책이 부친 손견보다 앞선 요소 중의 하나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들 수 있습니다. 물론 손견에게 매력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손견 역시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정보, 황개, 한당, 조무, 주치 등의 인재를 막하에 끌어 모았으니까요. 다만 손책은 부친보다 10년이나 일찍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유를 비롯하여 여범, 장소, 장굉, 주태, 장흠, 진무, 동습, 여몽, 태사자 등등등등등 오의 주춧돌이 된 인재를 극히 짧은 시간 내에 장악하였습니다. 이는, 손책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인재를 등용한 까닭도 있지만(실제로 손책의 요청을 거부하고 위로 건너간 인물도 있고요), 그들이 손책에게서 목숨을 걸 주군의 자질과 가능성을 보지 못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조조는 사람 수집이 취미라고 일컬어질 만큼 인재를 열성껏 모은 걸로 유명하지만, 손책은 그 조조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거나 오히려 웃도는 페이스로 인재 수집에 성공하고 있죠. (손권의 경우 인재수집능력은 조조보다 떨어지는 대신, 인재활용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손책은 오 주변의 각지를 전전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영웅으로서의 풍모를 보여 손견의 후계자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웅의 시대는 너무나도 빨리 막을 내리게 됩니다. 부친 손견이 형주에서 어이없이 전사한 것입니다. 당시 손책은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보다시피 손포코 님이 좀 심하게 손책 팬이다. (너무 심해서 처음엔 여성인 줄 알았음;) S와 같이 모에와 망상으로만 사는 허접 팬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임. 그치만 저게 모두 콩깍지가 아니라 실제 정사가 그렇다는 데 어쩔 것이야;
제 2장. 부친 사후
나는! 손책이! 손견군에 종군했었다고! 멋대로! 믿을 테다!! (오에 관한 한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드는 연의지만 그거 하나는 무지 좋았단 말이다) 건 그렇고 어떤 식으로든 사이 좋은 아빠와 아들이었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손견/손책 부자. 오정후의 작위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는 데서 아주 골수 파더콤의 냄새가 풀풀 남.
헌데 왜 하필 손권이 아닌 넷째 손광에게 던져줬는지는 의문이다. (손광의 출생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손권이 당시 10살이었으므로 많아봤자 서너 살 가량 되었으리라 짐작됨) 나한테 필요없는 건 권이에게도 필요없다는 건가? 아니면 형님이 사양하신 걸 내가 받을 수 없다고 손권이 물리쳤나? 예라이 이러니까 내가 이 사람이 평생에 제대로 사랑한 건 아버지와 바로 아랫동생뿐일 거라 확신하지 별 수 없는 거라구!! 난 나쁘지 않다!
부친 손견 전사. 이 소식을 손책은 어디에서 들었을까요? 손견전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손견의 사후, 손견의 조카(이복형제의 아들)인 손분(孫賁)이 숙부의 군단을 이끌고 원술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손책은 손견군에는 종군하지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손책전을 읽어보아도 손견이 가족과 함께 한 것은 장사태수에 임명되기 이전까지로, 장사(長沙)에는 단신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빈번하게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는 형주 남부에 가족을 동반하기란 너무나도 위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손견이 장사태수가 된 것은 187년. 다시 말해 손책은 손견이 서거한 191년까지 5년 가까이 부친과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손책은 양주의 서에서 주유와 함께 부친의 사망을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손책이 손견군에 종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그러나 실제로는, 손분은 손견의 시신조차 인수하지 않고 얼른 원술의 막하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손견의 유골은, 그에게 천거된 은공을 잊지 않은 환개(桓階)가 위험을 돌보지 않고 유표와 협상하여 인수한 후 아들인 손책에게 전하였습니다. 유골을 전해 받은 손책은 곡아(曲阿)에 부친을 장사지냅니다. 손책은 어떠한 심정으로 유골을 인수하였을까요. 나름대로 그 당시의 손책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기술이 주에 실려 있습니다. 손책은 부친의 사후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오정후(鳥程侯)의 작위를, 마치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동생 손광(孫匡)에게 양보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에서 위패를 내동댕이친 사건이었습니다. 손책도 당시의 노부나가와 비슷한 심경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찌하여 부친은 죽어야만 했는가. 부친은 천하에 이름을 떨칠 영웅이 아니었던가. 왜 이런 곳에서 쓰러져야만 했는가, 하고.
손책은 장례식을 마치자 장강을 건너 강도(江都)로 이주합니다. 이제 주유와 재회하는 것은 손책이 강동제압전에 나섰을 때가 되지요. 양주(揚州)보다는 오히려 서주(徐州)에 가까운 강도(江都)로 거처를 옮긴 손책은, 무슨 까닭인지 서주목 도겸(陶謙)에게 눈엣가시처럼 미움을 삽니다. 그것도 미움을 산다고 간단히 표현할 수준을 한참 넘어선 모양으로, 손책은 모친에게까지 도겸의 박해가 미칠 것을 저어해 모친은 곡아로 보내고, 자신은 단양태수인 숙부 오경(呉景)에게 의탁합니다. 주목인 도겸이 당시 무관(無冠)의 일개 청년이었을 손책을 그렇게까지 박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 시기의 손책은 어디까지나 원술 진영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데 기인합니다. 부친 손견은 원술 진영의 맹장이었던 만큼 그 아들인 손책도 같은 카테고리에 들 수밖에 없었죠. 더구나 원술은 이 무렵 수춘에 거점을 두고, 서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도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영토에 원술과 관계가 깊은 손일문이 머무르는 것은 철저히 경계해야 할 일이었겠지요.
도겸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인물이었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어느 쪽인가 하면 거친 무관(武官)에 속했을 뿐더러, 서주의 도적들과 손을 잡거나 장소가 천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는 사람이다 보니 아예 이 김에 손일문을 말살할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신변에 위험을 느낀 손책은 단양태수인 오경을 찾아 강도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분은 손견의 시신조차 인수하지 않고 얼른 원술의 막하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손견의 유골은, 그에게 천거된 은공을 잊지 않은 환개(桓階)가 위험을 돌보지 않고 유표와 협상하여 인수한 후 아들인 손책에게 전하였습니다. 유골을 전해 받은 손책은 곡아(曲阿)에 부친을 장사지냅니다. 손책은 어떠한 심정으로 유골을 인수하였을까요. 나름대로 그 당시의 손책의 속내를 엿볼 수 있는 기술이 주에 실려 있습니다. 손책은 부친의 사후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오정후(鳥程侯)의 작위를, 마치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동생 손광(孫匡)에게 양보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 필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오다 노부나가가 부친 노부히데의 장례식에서 위패를 내동댕이친 사건이었습니다. 손책도 당시의 노부나가와 비슷한 심경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찌하여 부친은 죽어야만 했는가. 부친은 천하에 이름을 떨칠 영웅이 아니었던가. 왜 이런 곳에서 쓰러져야만 했는가, 하고.
손책은 장례식을 마치자 장강을 건너 강도(江都)로 이주합니다. 이제 주유와 재회하는 것은 손책이 강동제압전에 나섰을 때가 되지요. 양주(揚州)보다는 오히려 서주(徐州)에 가까운 강도(江都)로 거처를 옮긴 손책은, 무슨 까닭인지 서주목 도겸(陶謙)에게 눈엣가시처럼 미움을 삽니다. 그것도 미움을 산다고 간단히 표현할 수준을 한참 넘어선 모양으로, 손책은 모친에게까지 도겸의 박해가 미칠 것을 저어해 모친은 곡아로 보내고, 자신은 단양태수인 숙부 오경(呉景)에게 의탁합니다. 주목인 도겸이 당시 무관(無冠)의 일개 청년이었을 손책을 그렇게까지 박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 시기의 손책은 어디까지나 원술 진영의 일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데 기인합니다. 부친 손견은 원술 진영의 맹장이었던 만큼 그 아들인 손책도 같은 카테고리에 들 수밖에 없었죠. 더구나 원술은 이 무렵 수춘에 거점을 두고, 서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도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영토에 원술과 관계가 깊은 손일문이 머무르는 것은 철저히 경계해야 할 일이었겠지요.
도겸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인물이었더라면 또 모르겠지만, 어느 쪽인가 하면 거친 무관(武官)에 속했을 뿐더러, 서주의 도적들과 손을 잡거나 장소가 천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금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는 사람이다 보니 아예 이 김에 손일문을 말살할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신변에 위험을 느낀 손책은 단양태수인 오경을 찾아 강도를 떠나게 됩니다.
나는! 손책이! 손견군에 종군했었다고! 멋대로! 믿을 테다!! (오에 관한 한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드는 연의지만 그거 하나는 무지 좋았단 말이다) 건 그렇고 어떤 식으로든 사이 좋은 아빠와 아들이었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손견/손책 부자. 오정후의 작위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는 데서 아주 골수 파더콤의 냄새가 풀풀 남.
헌데 왜 하필 손권이 아닌 넷째 손광에게 던져줬는지는 의문이다. (손광의 출생연도는 정확치 않지만 손권이 당시 10살이었으므로 많아봤자 서너 살 가량 되었으리라 짐작됨) 나한테 필요없는 건 권이에게도 필요없다는 건가? 아니면 형님이 사양하신 걸 내가 받을 수 없다고 손권이 물리쳤나? 예라이 이러니까 내가 이 사람이 평생에 제대로 사랑한 건 아버지와 바로 아랫동생뿐일 거라 확신하지 별 수 없는 거라구!! 난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