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자 권한의 범주에 대한 짧은 생각.

Still not a translation | 2007/01/25 18:38

존경하는 kazusato님의 최신 포스팅을 읽다가 문득 생각한 것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기 번역본에서의 '열렬한 향기'라는 번역에 받은 감명과 더불어 언어의 풍부함과 다면성이 살해당하는 현실을 슬퍼하시는 글이었는데, 그분의 의견에 공감함과 동시에, 이건 수우우우운전히,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로서는 烈しい香り를 뒤에서 받는 단어가 향기라 해서 '짙은 향기'로 번역하는 쪽이 오히려 오역이라고 생각함.

香り를 수식하는 단어로 烈しい는 일본어에서도 안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혹시 아니면 어떡하나 싶어서 확인도 해 봤다) 근데 굳이 선택한 걸 보면 그게 소위 작가의 의도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安房守를 캡 고집스럽게 阿波守로 틀리고 있는(...) 야마오카 선생이라 한들 설마 濃い를 烈しい로 잘못 썼을 리야 없고. 더구나 야마오카 선생은 하필이면 흔히 쓰이는 激しい도 아닌 烈しい를 골랐다. 사나울 렬 자. 저 글자를 볼 때마다 내가 연상하는 것은 치열하면서도 굳세고, 격렬하고 사납고 불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무엇인가다. 이에야스는 첫사랑의 여인을 회상하면서 烈しい香り라는 말을 했다. 격동의 시대를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한 남자의 가슴에 유독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상처자국처럼 선명하게 선명하게 아로새겨진 여인을 위한 그토록 생생한 표현. 그 짧은 한 마디만으로 심장을 아릿하게 직격하는 작가의 놀라운 힘.
그걸, 아 하느님 맙소사, 고작해야 '짙은 향기'로 옮긴 번역본의 밍밍함이라니.

(나는 결코 번역의 대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지만 나라면 그 말을 '치열한 향기'라고 옮겼을 것이다. ['열렬한 향기'도 무진장 좋지만 그 표현이 내 머리에 떠올랐을지는, 글쎄...;;;] '짙은 향기'와 이쪽 중에서 누가 더 야마오카 선생의 생각에 부합한다고 보는가?)

일찌기 안정효 씨는 비정상적으로 짧은 문장은 작가가 일부러 스타카토 끊듯 끊은 건데 그걸 이상해 뵌다고 멋대로 붙이면 못 쓴다는 둥 번역이라는 이름의 완전재창작(...)을 경고하며 악악댔지만, 언어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권리를 마음껏 향유하는 작가의 표현은 자국의 언어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게 내 기본적인 신념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새 번역본에서의 '짙은 향기'란 번역은, 그 무시기냐, 오 헨리의 무무무한 단편에 나오는 '그는 놋쇠의 요새를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라는 통통 튀는 표현을 '그는 타구에 침을 뱉었다' 로 옮기는 것만큼이나 원작에 대한 엄청난 테러란 얘기다. Do you understand?
필경 향기면 무조건 짙거나 은은한 거라고 생각했을 당신 번역자, 원산폭격하며 반성하시오.

(그러니까 누가 뭐래도 네로 울프 시리즈는 진짜로 저 모양이다. 맹세컨대 나는 약간 단어를 천박하게 골랐을 뿐이다...쿨럭커헉;)

하여간 烈しい香り는 최근의 일본문학에서는 俺とお前はいつの日にか一緒に死ねるような気がする에 유일하게 필적하는 심장직격탄이었다. 야마오카 선생에게 만세삼창. 아 정말 이 빠돌이들은 건강에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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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lls 2007/01/27 09:59
...역주 붙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홈즈와 왓슨의 대사가 '젊어짐'을 빌미로 무참하게 뜯어 고쳐진 것에 머리 쥐어뜯고 절규하며 동감하기. -_-; (모 언니님 왈 : ...이 대사는 홈즈와 왓슨이 아니라 셜록과 존이 해야할 것 같아...) 그때의 30대는 지금의 30대가 아니고, 그네들은 둘만 있어도 서로를 소개해줄 상대가 나타나기까지는 말 한마디 안 붙인다는 조크의 괴퍅한 영국신사란 말이다아아아아앗!!!!!!

.....맥락을 벗어나서 미안하오 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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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7/01/30 10:04
번역자 권한의 범주에 대한 건 맞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게.
그건 나도 진짜 혀를 찼다... 한국 최초의 완역판이란 건 좋지만 고칠 게 따로 있지. 옷에 불이 붙어 있어도 중간에 소개해 줄 사람이 없으면 절대로 말문을 안 트는 새침스런(뭣) 영국 신사들이란 말이야 저 친구들은!!
하지만 그나마 '너'가 안 된게 어디냐. 먼 눈. (밀리언셀러 클럽판 벤슨 살인사건의 악몽이 문득 떠올랐다. 아드드드득)

뭐 그 셜로키언 시리즈는 오로지 역주를 읽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경 끊기로 했다. 마음 편하게 가지자 허니. (정 못마땅하면 원판을 읽는다는 최종병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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