祝!! 화조풍월 편 드디어 애니화!! (키드 니이이이이임)
이 페이스라면 탐정 코시엔이나 토이치 파파도 연내로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랄까 얼렁 내놔라. 크르렁.
....근데 그걸 기념한답시고 이걸 백업하는 YOU는 제정신이냐....? ;;;;
(묵직한 시리어스밖에 없단 말이다! 어쩔 수 없다구!) <- 필사적인 변명
이하는 과거 코난교의 제 2교주셨고 지금도 열렬한 팬인 토오노 사쿠라코(遠野桜子) 님(사이트명 BLUE KINGDOM)의 걸작 중 하나인 <환상 채팅(幻想チャット)>. 배째고 등따기는 과거에 이미 했으므로, 문제 되면 지워버릴 요량으로 만만하다는 말만 남기도록 하겠다. 물론 무단으로 퍼가시면 밉습니다.
그나저나 옛날 번역은 진짜로 근 창작일세...;;;
...and less.
지금도 때때로 꿈을 꾼다.
바닥을 딛고 선, 내 눈앞을 가로막은 두 개의 다리.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바람에 실어보낸, 하얀 재.
그리고 나는, 뛰쳐 일어난다.
│ 환상 채팅 │
4월 25일 12 : 23
신이치> 여어, 살아 있냐.
카이토> 덕분에. 벌써 한낮이네.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신이치> 빵. 좀만 있다가 연구실 갈 거고.
카이토> 또∼오! 또 그런다!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고, 밥 먹을 땐 밥만 먹어야지!
신이치> 시간은 금이래지.
카이토> 금보다 몸이 더 소중해.
신이치> 몸보다 시간이 더 소중하고.
카이토> 시간보다 신이치가 더 소중하고.
신이치> 지금이 딱 고비란 말이다. 매듭만 지으면 만포장으로 먹을 거야.
카이토> 잔뜩 우겨 넣지만 말고, 이것저것 골고루 잘 먹어야 돼!
신이치> 예에 예.
카이토> 그래, 오늘은 무슨 빵이야? 야키소바? 핫도그? 카레?
신이치> 기분은 멜론 빵. 다 팔리고 없으면 찐빵.
카이토> 무릎 꿇고 빌게 제발 밥다운 걸 먹어.
신이치> 우유도 살 거야.
카이토> .......너한테 당장 밥을 지어 주고 싶은 욕구가 통렬하게 끓어오르는구나.
신이치> 멋진 순환이군.
카이토> 뭐가?
신이치> 내가 연구를 성공시키면 진수성찬이 푸짐하게 얻어걸린단 말이잖아. 그러니까 밥을 좀 내팽개치고 연구에 매달려도 그만큼 대가는 보장된다 이거 아니냐.
카이토> 하나도 안 멋져.
신이치> 그러냐?
카이토> 당연하지.
신이치> 그런 건가.
카이토> 진짜, 무리하면 안 돼. 신이치의 눈꺼풀부터 손대야 하는 건 정말 싫다구.
신이치> 눈꺼풀?
카이토> 눈을 감기려고.
신이치> 그래 네 농담 많이 신랄하다.
카이토> 농담 아냐.
신이치> 더 나빠.
카이토> 신이치.
카이토> 신이치?
신이치> 알았어.
카이토> 정말?
신이치> 알았다니까. 무리는 안 하고 노력만 하지.
카이토> 요만큼도 믿음이 안 가.
신이치> 시끄러워. 내가 알았다는데 주절주절 말이 많
"쿠도?"
캠퍼스.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있던 신이치는 문득 얼굴을 들었다. 같은 스터디 그룹의 키시마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다. 그 외에도 낯익은 얼굴이 두 명 더. 뭉쳐서 놀러가기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다. 오늘 오후 수업은 휴강이니까.
"총알같이 뛰어 나가길래 어디 가나 했더만, 이런 데서 채팅 삼매야?"
"오 뭐야 뭐, 에로팅이냐 공개미팅이냐? ..........치고는 화면 한 번 되게도 썰렁하다 야."
저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려 목을 길게 뺀다. 쓰게 웃고, 신이치는 노트북을 닫았다.
"아냐, 바보들아."
"그나저나 엄청 고물이구먼. 어느 세월에 산 거야 대체."
신이치의 무릎 위에 놓인 새까만 노트북을 도이가 둥근 얼굴에 쓴웃음을 짓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무게는 제법 나가는 기종이다.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고, 신이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분명, 일리는 있다.
"나는 타고나길 물건을 아껴 쓰는 체질이라."
"그래도 무겁잖아? 옛날 건 집에다 두고 쓰고, 좀 더 가벼운 걸 사면 될 텐데."
"돈도 아껴 쓰는 체질이야."
익살스럽게 한 마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이치도 박자를 맞춰 함께 미소를 띄운다. 겨우 숨을 돌린 키시마가 문득 고개를 갸웃한다.
"그치만 쿠도가 채팅이라. 뭔가 많이 의외다?"
가방을 잠그다 말고, 흘낏 시선을 준다.
"그래?"
"그래. 얼굴도 안 보이는 상대랑 얘기하고 그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말하고, 키시마는 약간 곤란한 듯이 웃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신이치는 몸을 일으켜 바지를 툭툭 털어 냈다.
"얼굴은 보여."
"에?"
어안이벙벙해진 키시마의 뒤에서, 마야마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아, 화상 채팅 말이지? 요즘 제법 유행하잖아."
"아니야."
짧게 끊고, 신이치는 아주 잠깐, 시선을 내리깔았다.
"문자에서 얼굴도 보이고, 목소리도 들려."
순식간에 조용해진 클래스메이트들을 향해 빙긋이 웃어보인다.
"뭐, 그런 셈이지."
".....그래도."
그 미소로 조금쯤은 안도한 듯한 얼굴이 되어, 도이는 깍지끼고 있던 팔을 풀어 허리에 대었다.
"엄밀하겐, 상상할 수 있다는 거겠지? 반대편에서 뭔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턱이 없잖아."
"그럼그럼. 꾸미고 뻥 치는 거야 누워서 떡먹기인 세계 아니냐."
마야마도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마음만 먹으면 성격은 물론, 성별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점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드는 패거리도 꽤나 많을 것이다. '타인'을 연기하는 쾌감을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은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어차피 가상 세계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꾸밀 필요가 없는데. 괜찮아."
어간에 깔린 희미한 비판의 어조를 눈치채, 애매하게 웃고, 신이치는 가방 위로 노트북을 살짝 만져 보았다.
<이곳>은 결코 거짓과 허구의 세계가 될 수 없으니까.
"아, 혹시 그거냐? 불특정다수의 생판 남이 아니라 친구 상대야?"
"차라리 전화 쪽이 빠르지 않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제각기 떠들어대는 친구들 사이로 능숙하게 빠져나온다.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몸을 돌려,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미안. 교수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
제 말만 하고,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신이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키시마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매번 있는 일이라곤 하지만.
"수업도 다 끝났는데, 그걸론 모자라 교수랑 맨투맨으로 공부하러 가십니까....."
못 말릴 녀석. 투덜대는 키시마의 옆에서, 실소를 머금은 마야마가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린다.
"어제 오늘 일이야, 늘상 캡 진지하게 수업 듣고 있잖아. 난 뭐 장학금이라도 받는 줄 알았다구."
감탄하는 건지 질린 건지, 한 중간쯤 되는 어조로 마야마가 평가를 내리자, 그렇게 말야, 도이도 한숨을 섞어 맞장구를 친다. 무슨 수업이건 간에 신이치가 자리 잡는 곳은 항상 맨 앞줄. 그것도 중앙이다. 딴전을 피우기는커녕, 교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조리 받아 적으려는 작정인지 칠판과 노트 외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칫 한 글자라도 놓치면 죽어 버릴 것 같아 불안해지기까지 하는 진지한 자세. 요즘 애들이 어쩌고 불평이 많은 어른들의 눈앞에 여봐란 듯이 내밀고 싶어지는 모습이다. 그야 자기네들의 모습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겠지만.
"그보다 말야."
키시마가 생각난 듯 미간을 모은다.
"쿠도를 보고 있으면, 그 뭐지, 그냥 성실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보단, 꼭 있잖아, 뭔가에 막 쫓기고 있는 놈 같단 말야. 부모님이 병으로 죽어간다던가, 아님 자기가 불치병에 걸려 있다던가."
"날치길 잡는다고 2층에서 뛰어내린 게 누군데? 불치병은 웬 놈의."
마야마가 어깨를 움츠려 보인다. 이틀 전, 우체국에 용건이 있다면서 웬일로 함께 어울려 중심가에 나간 신이치가, 밥을 먹다 말고 느닷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마침 베어 물고 있던 죄로 애꿎게 바닥에 추락한 포테이토의 지저분한 잔해를 떠올리고, 마야마는 한숨을 쉬었다. 포테이토나 떨어뜨리고 말아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야 그렇지만."
키시마가 쓰게 웃었다. 하긴, 불치병 환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발이 빠를 리가 없다.
"무슨 병이라면 재생 의학을 왜 전공하겠냐. 미분화 간세포니 핵 이식이니 연구해서 도움이 될 턱이 없잖아."
도이가 입을 삐죽였다.
"사실은 한쪽 눈이 의안이어서 안구를 만들어 내려 한다거나!"
"............의안으로 그 눈빛? 인류의 과학 기술이 어느 틈에 거기까지 발전했대."
"그것도 그렇다."
마야마의 의견이 너무나도 정당하여, 키시마는 가볍게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했다. 문답무용의 설득력이 있는 발언이다. 보기만 해도 생체 기능이 깡그리 정지될 것 같은 그 어마어마한 안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의안이 실제로 있다면야, 돈을 주고라도 구경하고 싶다.
쿠도 신이치 불치병설도 쿠도 신이치 의안설도 전부 논박되어 그걸로 끝. 교문으로 느긋하게 발길을 옮긴다.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오후 수업 아니면 서클 때문에 느지막히 찾아드는 것일 게다.
"아, 그렇지 그렇지."
안면이 있는 여학생과 스쳐지나가며 서로 웃고 손을 흔들던 마야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미분화 간세포라고 하니까 말인데, 요전에 제란이랑 로지슨 바이오메드가 공동으로 발표한 거 봤냐?"
"아아, 인간 배아를 단시간에 배양한다던가 뭔가 하는 그거."
"굉장하지. UN 협약쯤 깡그리 무시."
이 대목에서 휘파람을 멋지게 불어보이려다 실패한 도이의 머리를 가볍게 때려주고, 키시마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어떤 식으로 실용화가 되건, 일단 연구해 보고 싶어 죽으려고 하는 부류라니까, 학자들이란. <순수한 탐구심>으로 이글이글 타는 작자들이잖아. 연구만 하고 클론은 안 만듭니다, 뭐 그런 거지."
"뒷골목에서 무지 좋아할 법한 이야기 아냐. 잘만 하면 장기 매매보다 더 돈 될 것 같구."
"말 잘했다 너. 머릿속 텅 비고 숨만 쉬는 산 인형을 주머니 두둑한 변태들한테 팔아 넘긴다든지."
"야, 그거 그럴 듯한데. 부자님네들은 흔히 그런 걸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삼는대지, 들인 돈은 너끈하게 회수하겠어."
"이봐 이봐..........."
머리 뒤에서 양손을 깍지끼고 떠들어대는 마야마와 열심히 맞방아를 찧어대는 도이의 이야기가 점입가경이 되어 가는 꼴에 질려, 키시마는 어깨를 추욱 떨어뜨렸다. 어쨌건 그 길의 학문을 닦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그딴 화제를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지껄여도 되는 것인가. 신이치처럼 착실한 학생은 못 될지언정.
"장기 매매가 없어지는 거야 반가운 일이지만, 몸뚱아리 사고 파는 것보다 니네들 발상이 훨씬 악질이잖아. 큰일날 소리는 작작 하라구."
"큰일날 일일수록 불타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왜."
"못 말려......"
마야마가 기죽지도 않고 낄낄 웃어대는 통에, 키시마도 따라서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래도 말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은 내버려두고, 도이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대체 어떤 작자가, 도대체 어쩔 작정으로 연구하고 있는 걸까나......"
요란스럽게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비비며,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요시다 씨 댁인가요?』
이름을 대기도 전에 귓전에 닿은 차분한 음색의 질문. 신이치는 웃고 벽에 몸을 기댔다. 근 한 달만에 듣는 목소리다.
"아아, 나야."
『안녕. 지금, 괜찮겠어?』
"내가 물을 말이야. 괜찮겠냐?"
『일도 재미있고, 지낼 만 해.』
아귀가 맞지 않는 대답.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중전화에서 걸고 있을 테고, 더구나 일본어를 아는 것은 물론, 입술의 움직임까지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길거리에 그리 쉬이 굴러다닐 리가 없을 텐데도. 지나치다 싶도록 조심성 많은 것이 꼭 그녀답다. 물론, 그에 대해 한 마디 했다가는 당신 쪽이 조심성이라고는 1미크론도 없으니 그래 보이는 것뿐이라고 반론이 백 마디는 날아오겠지만.
『생일 축하해. 선물은 잘 도착했어?』
"그저께. 논문은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고."
시선을 조금 위에 두고, 내용을 머릿속으로 차근히 되짚어본다. 형광등이 지이잉,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올리며 깜박거렸다. 슬슬 바꿔 낄 때가 된 모양이다.
"그렇지, 요전에 발표한 거 봤어. 그쯤이야 넌 벌써 옛날에 해냈었지? 이 <성과>는 아직 비밀인 거야?"
수화기 너머, 다른 나라의 하늘 아래에서 아이가 조금 우스워진 듯 쿡쿡거렸다.
『그거, 내가 만든 거야.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걸 줘 봤자 시시할 뿐이고. 마음에 들었을까 몰라』
"과연 하이바라 여사. 여타 연구원 제군이 다발로 뭉쳐서 몇 년을 격투해도 네 뇌세포의 반이나 쫓아갈까."
광희난무하며 성공을 자축하는 연구원들이 그 뒷편에서 훤히 보일 듯했던 기자 회견을 머릿속에 다시금 그려본다.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결과를 발표하던 양사(兩社)의 사장들. 설마 그 <성공>의 수십 보 앞을 가고 있는 연구원이 바로 휘하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그래, 다행이네. 부서지진 않았고?』
"무사해. 푸느라고 죽도록 고생했다 어이. 그만큼 꽁꽁 싸맸으니 원. 박사님은 손톱까지 부러뜨렸다고."
마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대소동을 피우던 박사를 떠올리고, 신이치는 키득키득 웃었다.
박사가 손톱이 부러지는 재난까지 겪으면서 가까스로 끄집어낸 배양액과 핵의 샘플은 바로 발 밑, 지하에 설치된 장치 내부에 신주 모시듯 곱게 안치되어 있다. 아이가 보내준 정보를 토대로, 박사가 <발명가>의 자존심을 걸고 만들어 낸 것이다.
수화기를 건너 아이의 조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그쪽도, 허둥대는 박사를 문득 상상해 본 것이리라.
『요즘은 어때?』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다소 밝은 어조로 아이가 물어왔다.
『몸은 괜찮아?』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신이치는 수건에서 손을 떼었다.
"특별히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핫토리도 그렇대고. 어차피 그 녀석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는걸."
가벼이 대꾸하고, 웃었다. 아이는 때로 걱정이 너무 많다.
『응. 그래도, 감기를 얕보면 큰 코 다쳐. 더 큰 병이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지.』
"나도 알아."
아이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살짝 웃고, 신이치는 기대 있던 벽에서 떨어져나와 전화기에 시선을 주었다.
"너도 조심해."
『그래.』
아이가 짧게 대답한다.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꾸 속에 숨어 있는 것. 신이치는 새삼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또 전화할게. 정말, 몸 조심해야 해. 안부 전해 줘.』
"아아, 고마워. 박사님이랑, 다른 녀석들한테도 잘 있다고 얘기해 줄게."
『잘 자.』
"너도.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해라."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또다시 깜박이는 형광등을 흘끗 올려다보고, 신이치는 느릿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핏 시선을 준 2층 층계참의 창 밖 하늘에, 보일 듯 보일 듯 가느다란 달이 걸려 있다.
꼬리를 끌며 흐르는 자그마한 별. 신이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새까만 비가 쏟아진 것은, 별이 흘러 떨어지던, 달이 없는 밤.
"확인해 봐서 뭘 어쩌자고?"
"아니, 그치만........."
어이없어 하는 신이치를 앞에 두고, 카이토는 말끝을 흐렸다.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빌딩.
옥상을 둘러친 철책 바로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카이토. 그 뒤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신이치가 쓴웃음을 띄웠다.
"아니면, 뭐야? 이제 와서, 사실은 나도 영원히 살고 싶었네 어쩌네 하지는 마셔."
"원래부터 흥미 없습니다."
반쯤 야유하는 기분으로 신이치가 한 마디 던지자, 카이토는 골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뉴스 화면을 띄워 '업데이트' 버튼을 클릭하고, 신이치는 피식 웃었다.
"하기사, 결과를 알려면 먹고 나서도 몇 년은 끈질기게 기다려야 하고."
"그―을―쎄―나는 먹을 마음 같은 거 없다니까요오........."
김이 샌 것 같은, 어쩐지 흐리멍덩한 어조로 카이토가 투덜거렸다. 손안에 쥐어진 자그마한 돌. <빅 쥬얼>이라는 거창한 호칭치고는 꽤나 치사한 사이즈다. 물론 원석은 상당한 크기였겠지만, 이리저리 떠도는 사이에 여러 번 깎이고 다듬어져서 이렇게 됐을 것이다.
존재 여부부터 의심스러웠던 환상의 보석은, 마침내 손으로 직접 느낄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의심스러울 만큼, 터무니없이 진부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치만."
보석을 꼭 움켜쥐고, 카이토는 다소 멍한 듯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보고 싶은걸."
이유를 밝히는 대신 짤막한 말마디만을 입에 올리고, 카이토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일단 한 번 흘려 버리면, 이 녀석도 평범한 돌이 될 테고. 판도라가 이러고저러고 법석을 떠는 바보 같은 작자들도 없어질 테고."
보석을 공중에 던졌다가 익숙한 동작으로 나꿔채는 카이토를 보며, 신이치는 웃었다.
그것 또한 분명 사실이지만, 아마도, 처음으로 꺼낸 말이 이유의 전부.
카이토는 보고 싶은 것뿐이다. 모든 일의 대단원을. 끝을 맞는 그 순간을.
"어이, 슬슬 오려는 모양인데."
화면에 뜬 최신 정보를 언뜻 일별하고, 신이치는 말을 걸었다.
꼬리를 길게 끌며 떨어지는 혜성. 「KID」의 막을 내릴 빛.
"오케이―."
얼핏 가볍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희미한 긴장이 녹아들어 있다. 몸을 곧게 펴는 카이토. 신이치는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커튼 콜에 나가려는 배우만 같아서. 최후의 인사. 가슴을 한껏 펴고, 관객에게, 배역에게, 모든 것에게, 작별을 던지는 것이다.
"엇차."
하늘에 출현한 한 줄기 빛. 신이치는 인터넷의 접속을 끊었다. 혼자 있도록 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신이치를 부른 이상, 역시 함께 보아 주길 기대했으리라. 위대한 예술가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보는 단 하나뿐인 관객이 되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
노트북을 덮으려는데, 문득 고막을 때리는 바람을 예리하게 가르는 소리, 두 번.
"뭐......."
다음 순간 터져나가는 듯한 폭발음이 사방에 진동하여, 신이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숙인 머리 위에, 무릎에 얹은 노트북의 까만 키보드 위에, 손에, 무언가가 투둑투둑 떨어져 내린다.
마치, 새까만 빗줄기처럼.
"아............."
끈적끈적한 고형물이 얼굴을 따라 흐르고, 살짝 열린 입 끝에서부터 철맛이 퍼져나간다.
가까스로 들어본 눈에 비친 것은, 분해한 마네킹과 흡사한, 두 개의 다리. 그것뿐이었다.
양 다리가 상반신을 잃었음을 겨우 눈치챈 듯 묘하도록 뒤늦게 옆으로 풀썩 쓰러졌을 때, 신이치의 목에서도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살점과 뇌수가 산산이 흩어진 키보드 위로, 이젠 흔해빠진 회색 돌이 되고 만 빅 쥬얼이 자그마한 물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탄환은 체내에 잔류하는 재킷 할로우 포인트 계열의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몸 안에서 폭발하도록 <개량>을 거친.
그들을 끝까지 우롱한 괴도에게, 최후의 인사를 고하기 위한.
노트북은, 거의 두 달간 내팽개쳐 두었다. 켜 보기는커녕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그랬을 것이다. 메일만 마음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바로 그 전날 아침에 받은 메일.
읽으려고 하던 참에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와, 보기도 전에 그냥 닫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카이토가 보낸 마지막 메일. 마지막이 되어 버린 메일.
그러나 피가 굳어 단단히 들러붙은 노트북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을 때 화면에 비친 것은, 늘 보던 월페이퍼도, 일렬로 쭉 늘어선 아이콘들도 아니었다.
그저 새하얗기만 한.
'망가진 건가.'
자조하듯이 웃고, 신이치가 전원 스위치에 손을 댔을 때,
카ㅇ
새하얀 화면에 문자가 뜨기 시작했다.
카이토
".............엣............."
카이토>
'이건.........'
카이토> 안녕, 명탐정.
카이토> ............신이치.
그것이, 시작이었다.
수건을 뒤집어 쓴 그대로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며, 신이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겹겹이 쌓인 수십 권의 책. 바다를 건너오는 정보를 읽기 위해 체득한 지식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것들을 한옆으로 주욱 밀쳐놓고, 가방 속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정면에, 내려놓는다.
그의 세포는 남아 있지 않다. 산산조각 난 몸은 씻겨나갔고, 쓰러진 다리는 재가 되어 바람에 실렸다.
바다로, 대지로.
카이토의 파편은, 이 세상 어딘가에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수건을 걷고, 신이치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젖어서 후줄근해진 머리카락.
그를, 꼭 닮은.
'하지만, 내가 있으니까.'
생김새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어차피 누구한테선가 세포를 채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세포를 배양하고. 자신의 클론을 완성하면 될 일.
『머리엔 파마든 뭐든 해 주마. 대신 불평은 접수 안 해.』
그렇게 <말했을> 때, <타협할게요>라는 문자에서는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었다.
몸이 완성되면 의식을 이식한다. 원리는 나노테크노. 생물에 이식할 수 있는 정보. 언제쯤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나, 가능성은 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시간도 충분하다.
'괜찮아.'
이식하여, 살아나서, 살고, 살아 나가면서. '죽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면 된다.
사람의 세포를 다루는 기술은 삶에 대한 해명이자, 동시에 죽음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살아 있는 의식. 환상 같고, 거짓말만 같은 존재.
삼켜 버린 금속성의 맛. 고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몸.
눈앞에 펼쳐진, 무한의 시간.
'그래도.'
그래도.
어서.
좀 더, 빨리.
한시라도, 1초라도 빨리.
어서.
그리고 신이치는 천천히 새까만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넣고,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하얀 화면에 문자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신이치> 여어, 살아 있냐.
바닥을 딛고 선, 내 눈앞을 가로막은 두 개의 다리.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바람에 실어보낸, 하얀 재.
그리고 나는, 뛰쳐 일어난다.
│ 환상 채팅 │
4월 25일 12 : 23
신이치> 여어, 살아 있냐.
카이토> 덕분에. 벌써 한낮이네. 오늘 점심 메뉴는 뭐야?
신이치> 빵. 좀만 있다가 연구실 갈 거고.
카이토> 또∼오! 또 그런다!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고, 밥 먹을 땐 밥만 먹어야지!
신이치> 시간은 금이래지.
카이토> 금보다 몸이 더 소중해.
신이치> 몸보다 시간이 더 소중하고.
카이토> 시간보다 신이치가 더 소중하고.
신이치> 지금이 딱 고비란 말이다. 매듭만 지으면 만포장으로 먹을 거야.
카이토> 잔뜩 우겨 넣지만 말고, 이것저것 골고루 잘 먹어야 돼!
신이치> 예에 예.
카이토> 그래, 오늘은 무슨 빵이야? 야키소바? 핫도그? 카레?
신이치> 기분은 멜론 빵. 다 팔리고 없으면 찐빵.
카이토> 무릎 꿇고 빌게 제발 밥다운 걸 먹어.
신이치> 우유도 살 거야.
카이토> .......너한테 당장 밥을 지어 주고 싶은 욕구가 통렬하게 끓어오르는구나.
신이치> 멋진 순환이군.
카이토> 뭐가?
신이치> 내가 연구를 성공시키면 진수성찬이 푸짐하게 얻어걸린단 말이잖아. 그러니까 밥을 좀 내팽개치고 연구에 매달려도 그만큼 대가는 보장된다 이거 아니냐.
카이토> 하나도 안 멋져.
신이치> 그러냐?
카이토> 당연하지.
신이치> 그런 건가.
카이토> 진짜, 무리하면 안 돼. 신이치의 눈꺼풀부터 손대야 하는 건 정말 싫다구.
신이치> 눈꺼풀?
카이토> 눈을 감기려고.
신이치> 그래 네 농담 많이 신랄하다.
카이토> 농담 아냐.
신이치> 더 나빠.
카이토> 신이치.
카이토> 신이치?
신이치> 알았어.
카이토> 정말?
신이치> 알았다니까. 무리는 안 하고 노력만 하지.
카이토> 요만큼도 믿음이 안 가.
신이치> 시끄러워. 내가 알았다는데 주절주절 말이 많
"쿠도?"
캠퍼스.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있던 신이치는 문득 얼굴을 들었다. 같은 스터디 그룹의 키시마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다. 그 외에도 낯익은 얼굴이 두 명 더. 뭉쳐서 놀러가기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다. 오늘 오후 수업은 휴강이니까.
"총알같이 뛰어 나가길래 어디 가나 했더만, 이런 데서 채팅 삼매야?"
"오 뭐야 뭐, 에로팅이냐 공개미팅이냐? ..........치고는 화면 한 번 되게도 썰렁하다 야."
저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려 목을 길게 뺀다. 쓰게 웃고, 신이치는 노트북을 닫았다.
"아냐, 바보들아."
"그나저나 엄청 고물이구먼. 어느 세월에 산 거야 대체."
신이치의 무릎 위에 놓인 새까만 노트북을 도이가 둥근 얼굴에 쓴웃음을 짓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무게는 제법 나가는 기종이다.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고, 신이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분명, 일리는 있다.
"나는 타고나길 물건을 아껴 쓰는 체질이라."
"그래도 무겁잖아? 옛날 건 집에다 두고 쓰고, 좀 더 가벼운 걸 사면 될 텐데."
"돈도 아껴 쓰는 체질이야."
익살스럽게 한 마디.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이치도 박자를 맞춰 함께 미소를 띄운다. 겨우 숨을 돌린 키시마가 문득 고개를 갸웃한다.
"그치만 쿠도가 채팅이라. 뭔가 많이 의외다?"
가방을 잠그다 말고, 흘낏 시선을 준다.
"그래?"
"그래. 얼굴도 안 보이는 상대랑 얘기하고 그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말하고, 키시마는 약간 곤란한 듯이 웃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신이치는 몸을 일으켜 바지를 툭툭 털어 냈다.
"얼굴은 보여."
"에?"
어안이벙벙해진 키시마의 뒤에서, 마야마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아, 화상 채팅 말이지? 요즘 제법 유행하잖아."
"아니야."
짧게 끊고, 신이치는 아주 잠깐, 시선을 내리깔았다.
"문자에서 얼굴도 보이고, 목소리도 들려."
순식간에 조용해진 클래스메이트들을 향해 빙긋이 웃어보인다.
"뭐, 그런 셈이지."
".....그래도."
그 미소로 조금쯤은 안도한 듯한 얼굴이 되어, 도이는 깍지끼고 있던 팔을 풀어 허리에 대었다.
"엄밀하겐, 상상할 수 있다는 거겠지? 반대편에서 뭔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턱이 없잖아."
"그럼그럼. 꾸미고 뻥 치는 거야 누워서 떡먹기인 세계 아니냐."
마야마도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마음만 먹으면 성격은 물론, 성별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점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드는 패거리도 꽤나 많을 것이다. '타인'을 연기하는 쾌감을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은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어차피 가상 세계는 가상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꾸밀 필요가 없는데. 괜찮아."
어간에 깔린 희미한 비판의 어조를 눈치채, 애매하게 웃고, 신이치는 가방 위로 노트북을 살짝 만져 보았다.
<이곳>은 결코 거짓과 허구의 세계가 될 수 없으니까.
"아, 혹시 그거냐? 불특정다수의 생판 남이 아니라 친구 상대야?"
"차라리 전화 쪽이 빠르지 않아―?"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제각기 떠들어대는 친구들 사이로 능숙하게 빠져나온다.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몸을 돌려,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미안. 교수랑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간다."
제 말만 하고, 건물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신이치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키시마는 머리를 북북 긁었다.
매번 있는 일이라곤 하지만.
"수업도 다 끝났는데, 그걸론 모자라 교수랑 맨투맨으로 공부하러 가십니까....."
못 말릴 녀석. 투덜대는 키시마의 옆에서, 실소를 머금은 마야마가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린다.
"어제 오늘 일이야, 늘상 캡 진지하게 수업 듣고 있잖아. 난 뭐 장학금이라도 받는 줄 알았다구."
감탄하는 건지 질린 건지, 한 중간쯤 되는 어조로 마야마가 평가를 내리자, 그렇게 말야, 도이도 한숨을 섞어 맞장구를 친다. 무슨 수업이건 간에 신이치가 자리 잡는 곳은 항상 맨 앞줄. 그것도 중앙이다. 딴전을 피우기는커녕, 교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조리 받아 적으려는 작정인지 칠판과 노트 외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는다. 자칫 한 글자라도 놓치면 죽어 버릴 것 같아 불안해지기까지 하는 진지한 자세. 요즘 애들이 어쩌고 불평이 많은 어른들의 눈앞에 여봐란 듯이 내밀고 싶어지는 모습이다. 그야 자기네들의 모습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겠지만.
"그보다 말야."
키시마가 생각난 듯 미간을 모은다.
"쿠도를 보고 있으면, 그 뭐지, 그냥 성실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보단, 꼭 있잖아, 뭔가에 막 쫓기고 있는 놈 같단 말야. 부모님이 병으로 죽어간다던가, 아님 자기가 불치병에 걸려 있다던가."
"날치길 잡는다고 2층에서 뛰어내린 게 누군데? 불치병은 웬 놈의."
마야마가 어깨를 움츠려 보인다. 이틀 전, 우체국에 용건이 있다면서 웬일로 함께 어울려 중심가에 나간 신이치가, 밥을 먹다 말고 느닷없이 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던 것이다.
마침 베어 물고 있던 죄로 애꿎게 바닥에 추락한 포테이토의 지저분한 잔해를 떠올리고, 마야마는 한숨을 쉬었다. 포테이토나 떨어뜨리고 말아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왔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야 그렇지만."
키시마가 쓰게 웃었다. 하긴, 불치병 환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발이 빠를 리가 없다.
"무슨 병이라면 재생 의학을 왜 전공하겠냐. 미분화 간세포니 핵 이식이니 연구해서 도움이 될 턱이 없잖아."
도이가 입을 삐죽였다.
"사실은 한쪽 눈이 의안이어서 안구를 만들어 내려 한다거나!"
"............의안으로 그 눈빛? 인류의 과학 기술이 어느 틈에 거기까지 발전했대."
"그것도 그렇다."
마야마의 의견이 너무나도 정당하여, 키시마는 가볍게 양손을 들어 항복을 표했다. 문답무용의 설득력이 있는 발언이다. 보기만 해도 생체 기능이 깡그리 정지될 것 같은 그 어마어마한 안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의안이 실제로 있다면야, 돈을 주고라도 구경하고 싶다.
쿠도 신이치 불치병설도 쿠도 신이치 의안설도 전부 논박되어 그걸로 끝. 교문으로 느긋하게 발길을 옮긴다.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오후 수업 아니면 서클 때문에 느지막히 찾아드는 것일 게다.
"아, 그렇지 그렇지."
안면이 있는 여학생과 스쳐지나가며 서로 웃고 손을 흔들던 마야마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미분화 간세포라고 하니까 말인데, 요전에 제란이랑 로지슨 바이오메드가 공동으로 발표한 거 봤냐?"
"아아, 인간 배아를 단시간에 배양한다던가 뭔가 하는 그거."
"굉장하지. UN 협약쯤 깡그리 무시."
이 대목에서 휘파람을 멋지게 불어보이려다 실패한 도이의 머리를 가볍게 때려주고, 키시마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어떤 식으로 실용화가 되건, 일단 연구해 보고 싶어 죽으려고 하는 부류라니까, 학자들이란. <순수한 탐구심>으로 이글이글 타는 작자들이잖아. 연구만 하고 클론은 안 만듭니다, 뭐 그런 거지."
"뒷골목에서 무지 좋아할 법한 이야기 아냐. 잘만 하면 장기 매매보다 더 돈 될 것 같구."
"말 잘했다 너. 머릿속 텅 비고 숨만 쉬는 산 인형을 주머니 두둑한 변태들한테 팔아 넘긴다든지."
"야, 그거 그럴 듯한데. 부자님네들은 흔히 그런 걸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삼는대지, 들인 돈은 너끈하게 회수하겠어."
"이봐 이봐..........."
머리 뒤에서 양손을 깍지끼고 떠들어대는 마야마와 열심히 맞방아를 찧어대는 도이의 이야기가 점입가경이 되어 가는 꼴에 질려, 키시마는 어깨를 추욱 떨어뜨렸다. 어쨌건 그 길의 학문을 닦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그딴 화제를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지껄여도 되는 것인가. 신이치처럼 착실한 학생은 못 될지언정.
"장기 매매가 없어지는 거야 반가운 일이지만, 몸뚱아리 사고 파는 것보다 니네들 발상이 훨씬 악질이잖아. 큰일날 소리는 작작 하라구."
"큰일날 일일수록 불타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왜."
"못 말려......"
마야마가 기죽지도 않고 낄낄 웃어대는 통에, 키시마도 따라서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그래도 말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은 내버려두고, 도이는,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대체 어떤 작자가, 도대체 어쩔 작정으로 연구하고 있는 걸까나......"
요란스럽게 울려퍼지는 전화벨 소리.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대충 비비며,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요시다 씨 댁인가요?』
이름을 대기도 전에 귓전에 닿은 차분한 음색의 질문. 신이치는 웃고 벽에 몸을 기댔다. 근 한 달만에 듣는 목소리다.
"아아, 나야."
『안녕. 지금, 괜찮겠어?』
"내가 물을 말이야. 괜찮겠냐?"
『일도 재미있고, 지낼 만 해.』
아귀가 맞지 않는 대답.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중전화에서 걸고 있을 테고, 더구나 일본어를 아는 것은 물론, 입술의 움직임까지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길거리에 그리 쉬이 굴러다닐 리가 없을 텐데도. 지나치다 싶도록 조심성 많은 것이 꼭 그녀답다. 물론, 그에 대해 한 마디 했다가는 당신 쪽이 조심성이라고는 1미크론도 없으니 그래 보이는 것뿐이라고 반론이 백 마디는 날아오겠지만.
『생일 축하해. 선물은 잘 도착했어?』
"그저께. 논문은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고."
시선을 조금 위에 두고, 내용을 머릿속으로 차근히 되짚어본다. 형광등이 지이잉,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올리며 깜박거렸다. 슬슬 바꿔 낄 때가 된 모양이다.
"그렇지, 요전에 발표한 거 봤어. 그쯤이야 넌 벌써 옛날에 해냈었지? 이 <성과>는 아직 비밀인 거야?"
수화기 너머, 다른 나라의 하늘 아래에서 아이가 조금 우스워진 듯 쿡쿡거렸다.
『그거, 내가 만든 거야.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은 걸 줘 봤자 시시할 뿐이고. 마음에 들었을까 몰라』
"과연 하이바라 여사. 여타 연구원 제군이 다발로 뭉쳐서 몇 년을 격투해도 네 뇌세포의 반이나 쫓아갈까."
광희난무하며 성공을 자축하는 연구원들이 그 뒷편에서 훤히 보일 듯했던 기자 회견을 머릿속에 다시금 그려본다.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결과를 발표하던 양사(兩社)의 사장들. 설마 그 <성공>의 수십 보 앞을 가고 있는 연구원이 바로 휘하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그래, 다행이네. 부서지진 않았고?』
"무사해. 푸느라고 죽도록 고생했다 어이. 그만큼 꽁꽁 싸맸으니 원. 박사님은 손톱까지 부러뜨렸다고."
마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대소동을 피우던 박사를 떠올리고, 신이치는 키득키득 웃었다.
박사가 손톱이 부러지는 재난까지 겪으면서 가까스로 끄집어낸 배양액과 핵의 샘플은 바로 발 밑, 지하에 설치된 장치 내부에 신주 모시듯 곱게 안치되어 있다. 아이가 보내준 정보를 토대로, 박사가 <발명가>의 자존심을 걸고 만들어 낸 것이다.
수화기를 건너 아이의 조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그쪽도, 허둥대는 박사를 문득 상상해 본 것이리라.
『요즘은 어때?』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다소 밝은 어조로 아이가 물어왔다.
『몸은 괜찮아?』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차리고, 신이치는 수건에서 손을 떼었다.
"특별히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핫토리도 그렇대고. 어차피 그 녀석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는걸."
가벼이 대꾸하고, 웃었다. 아이는 때로 걱정이 너무 많다.
『응. 그래도, 감기를 얕보면 큰 코 다쳐. 더 큰 병이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지.』
"나도 알아."
아이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살짝 웃고, 신이치는 기대 있던 벽에서 떨어져나와 전화기에 시선을 주었다.
"너도 조심해."
『그래.』
아이가 짧게 대답한다.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꾸 속에 숨어 있는 것. 신이치는 새삼 수화기를 고쳐 잡았다.
『......또 전화할게. 정말, 몸 조심해야 해. 안부 전해 줘.』
"아아, 고마워. 박사님이랑, 다른 녀석들한테도 잘 있다고 얘기해 줄게."
『잘 자.』
"너도. 오늘 하루도 열심히 해라."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또다시 깜박이는 형광등을 흘끗 올려다보고, 신이치는 느릿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핏 시선을 준 2층 층계참의 창 밖 하늘에, 보일 듯 보일 듯 가느다란 달이 걸려 있다.
꼬리를 끌며 흐르는 자그마한 별. 신이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새까만 비가 쏟아진 것은, 별이 흘러 떨어지던, 달이 없는 밤.
"확인해 봐서 뭘 어쩌자고?"
"아니, 그치만........."
어이없어 하는 신이치를 앞에 두고, 카이토는 말끝을 흐렸다. 이 부근에서는 가장 높은 빌딩.
옥상을 둘러친 철책 바로 앞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카이토. 그 뒤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신이치가 쓴웃음을 띄웠다.
"아니면, 뭐야? 이제 와서, 사실은 나도 영원히 살고 싶었네 어쩌네 하지는 마셔."
"원래부터 흥미 없습니다."
반쯤 야유하는 기분으로 신이치가 한 마디 던지자, 카이토는 골난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뉴스 화면을 띄워 '업데이트' 버튼을 클릭하고, 신이치는 피식 웃었다.
"하기사, 결과를 알려면 먹고 나서도 몇 년은 끈질기게 기다려야 하고."
"그―을―쎄―나는 먹을 마음 같은 거 없다니까요오........."
김이 샌 것 같은, 어쩐지 흐리멍덩한 어조로 카이토가 투덜거렸다. 손안에 쥐어진 자그마한 돌. <빅 쥬얼>이라는 거창한 호칭치고는 꽤나 치사한 사이즈다. 물론 원석은 상당한 크기였겠지만, 이리저리 떠도는 사이에 여러 번 깎이고 다듬어져서 이렇게 됐을 것이다.
존재 여부부터 의심스러웠던 환상의 보석은, 마침내 손으로 직접 느낄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의심스러울 만큼, 터무니없이 진부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치만."
보석을 꼭 움켜쥐고, 카이토는 다소 멍한 듯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보고 싶은걸."
이유를 밝히는 대신 짤막한 말마디만을 입에 올리고, 카이토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일단 한 번 흘려 버리면, 이 녀석도 평범한 돌이 될 테고. 판도라가 이러고저러고 법석을 떠는 바보 같은 작자들도 없어질 테고."
보석을 공중에 던졌다가 익숙한 동작으로 나꿔채는 카이토를 보며, 신이치는 웃었다.
그것 또한 분명 사실이지만, 아마도, 처음으로 꺼낸 말이 이유의 전부.
카이토는 보고 싶은 것뿐이다. 모든 일의 대단원을. 끝을 맞는 그 순간을.
"어이, 슬슬 오려는 모양인데."
화면에 뜬 최신 정보를 언뜻 일별하고, 신이치는 말을 걸었다.
꼬리를 길게 끌며 떨어지는 혜성. 「KID」의 막을 내릴 빛.
"오케이―."
얼핏 가볍게만 들리는 목소리에, 희미한 긴장이 녹아들어 있다. 몸을 곧게 펴는 카이토. 신이치는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커튼 콜에 나가려는 배우만 같아서. 최후의 인사. 가슴을 한껏 펴고, 관객에게, 배역에게, 모든 것에게, 작별을 던지는 것이다.
"엇차."
하늘에 출현한 한 줄기 빛. 신이치는 인터넷의 접속을 끊었다. 혼자 있도록 해 주는 게 도리가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신이치를 부른 이상, 역시 함께 보아 주길 기대했으리라. 위대한 예술가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보는 단 하나뿐인 관객이 되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다.
노트북을 덮으려는데, 문득 고막을 때리는 바람을 예리하게 가르는 소리, 두 번.
"뭐......."
다음 순간 터져나가는 듯한 폭발음이 사방에 진동하여, 신이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숙인 머리 위에, 무릎에 얹은 노트북의 까만 키보드 위에, 손에, 무언가가 투둑투둑 떨어져 내린다.
마치, 새까만 빗줄기처럼.
"아............."
끈적끈적한 고형물이 얼굴을 따라 흐르고, 살짝 열린 입 끝에서부터 철맛이 퍼져나간다.
가까스로 들어본 눈에 비친 것은, 분해한 마네킹과 흡사한, 두 개의 다리. 그것뿐이었다.
양 다리가 상반신을 잃었음을 겨우 눈치챈 듯 묘하도록 뒤늦게 옆으로 풀썩 쓰러졌을 때, 신이치의 목에서도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살점과 뇌수가 산산이 흩어진 키보드 위로, 이젠 흔해빠진 회색 돌이 되고 만 빅 쥬얼이 자그마한 물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탄환은 체내에 잔류하는 재킷 할로우 포인트 계열의 물건이었던 모양이다. 몸 안에서 폭발하도록 <개량>을 거친.
그들을 끝까지 우롱한 괴도에게, 최후의 인사를 고하기 위한.
노트북은, 거의 두 달간 내팽개쳐 두었다. 켜 보기는커녕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그랬을 것이다. 메일만 마음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바로 그 전날 아침에 받은 메일.
읽으려고 하던 참에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와, 보기도 전에 그냥 닫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카이토가 보낸 마지막 메일. 마지막이 되어 버린 메일.
그러나 피가 굳어 단단히 들러붙은 노트북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을 때 화면에 비친 것은, 늘 보던 월페이퍼도, 일렬로 쭉 늘어선 아이콘들도 아니었다.
그저 새하얗기만 한.
'망가진 건가.'
자조하듯이 웃고, 신이치가 전원 스위치에 손을 댔을 때,
카ㅇ
새하얀 화면에 문자가 뜨기 시작했다.
카이토
".............엣............."
카이토>
'이건.........'
카이토> 안녕, 명탐정.
카이토> ............신이치.
그것이, 시작이었다.
수건을 뒤집어 쓴 그대로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올리며, 신이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겹겹이 쌓인 수십 권의 책. 바다를 건너오는 정보를 읽기 위해 체득한 지식들.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것들을 한옆으로 주욱 밀쳐놓고, 가방 속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정면에, 내려놓는다.
그의 세포는 남아 있지 않다. 산산조각 난 몸은 씻겨나갔고, 쓰러진 다리는 재가 되어 바람에 실렸다.
바다로, 대지로.
카이토의 파편은, 이 세상 어딘가에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수건을 걷고, 신이치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젖어서 후줄근해진 머리카락.
그를, 꼭 닮은.
'하지만, 내가 있으니까.'
생김새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지만, 어차피 누구한테선가 세포를 채취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세포를 배양하고. 자신의 클론을 완성하면 될 일.
『머리엔 파마든 뭐든 해 주마. 대신 불평은 접수 안 해.』
그렇게 <말했을> 때, <타협할게요>라는 문자에서는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었다.
몸이 완성되면 의식을 이식한다. 원리는 나노테크노. 생물에 이식할 수 있는 정보. 언제쯤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나, 가능성은 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시간도 충분하다.
'괜찮아.'
이식하여, 살아나서, 살고, 살아 나가면서. '죽을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면 된다.
사람의 세포를 다루는 기술은 삶에 대한 해명이자, 동시에 죽음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살아 있는 의식. 환상 같고, 거짓말만 같은 존재.
삼켜 버린 금속성의 맛. 고등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몸.
눈앞에 펼쳐진, 무한의 시간.
'그래도.'
그래도.
어서.
좀 더, 빨리.
한시라도, 1초라도 빨리.
어서.
그리고 신이치는 천천히 새까만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넣고,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하얀 화면에 문자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신이치> 여어, 살아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