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본적으로 '나 이외'의 제 3자의 번역은 결코 신뢰하지 않기로 하고 있다.
웬 오만!? 이라는 비난이 사방에서 쏟아질 것 같은데(...) 물론 이건 내가 엄청 잘났고 외국어에 굉장한 재능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다. 그딴 소리 했다간 맞아죽어도 쌉지요 -_-;;; 나 역시 경애하고 존경해 마지 않는 번역자는 산더미처럼 많다. (대표적인 예 : 김소형 님)
다만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 해도 번역자의 주관이 아주 개입이 안 될 수는 없는 만큼 - 그래서 <제 2의 창작>인 거고 -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내 쪽의 해석과 심각하게 어긋나 버려 아니야! 이게 아니란 말이야!! 하고 절규하는 사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까닭이다. (외국어 공부해서 알아서 읽으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긴 하다;) 특히 한국어와 문법 구조가 너무 비슷한 나머지 일정 레벨을 넘으면 이제부턴 미묘한 뉘앙스와의 피터지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는 일본어는 이런 일이 굉장히 잦다.
한 예로 나는 손안의 책에서 나온 <우부메의 여름> 번역본을 무진장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언젠가도 툴툴댔듯이 '괴인 부문에서 쿄고쿠도가 동(東)의 요코즈나라면 에노키즈는 서(西)의 요코즈나라 할 수 있다' 라는 이 참으로 개쪽팔리면서도 입가는 헤죽헤죽 웃게 되는(...) 상대론이 '쿄고쿠도나 에노키즈나 방향은 다르지만 괴인이긴 마찬가지다' 라는 평범한 문장으로 교체된 것만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하고 싶지도 않다. 이 별 거 아닐 성 싶은 문장이 실은 훗날의 추젠지와 에노키즈의 면면히 이어지는 공동 폭주 전선으로까지 연결되는 결정적인 키워드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또 다른 예로 웬만한 동인지 따위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뜨끈뜨끈 대사가 난무하는(아차, 정신나간 오피셜 대열에서 빼먹었다...;) 베르세르크를 보자. 그리피스(님)의 <오로지 너만이 내게 꿈을 잊게 해 주었다>는 말씀을 기억하시는지?
'주었다' 라는 조동사를 사용한 이 문장은 흡사 가츠가 그리피스에게 버거운 꿈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찰나의 <안식>으로 기능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멀고 먼 꿈을 향해 버겁건 말건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달려온 그리피스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내내 고개를 갸웃했더니 원문이 <俺に夢を忘れさせた>인 걸 후에야 알고 무릎을 쳤다. 그럼 저 번역은 문법상으로는 뭐 그렇게 틀리진 않았지만 문맥상으로는 완전히 잘못되었다.
저 말이 내포한 뉘앙스는 오히려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희생시켜 온 나를 한눈 팔게 만든 건 단지 너 하나뿐이었다, 즉 너만이 (흔들려서는 결코 안되는) 날 뒤흔들었다 쪽이다. 완전히 반대잖아! 좀 더 행간을 파면 더 이상 다른 곳에 시선을 앗기지 않기 위해 차라리 널 잃는 고통을 감수해 버리겠다는 의미로까지 확장 해석이 가능하다. 그 직후에 그리피스가 (가츠를 포함한) 동지 전부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맹세의 말을 입에 올린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말이지... 쩌비.
내가 번역판이 있건 없건 비싸건 말건 최소한 일본 서적은 무조건 원서로 사쳐들이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특히 시간/역량/자료 조사의 부족이 3박자로 겹쳐 번역이 수이 아슷흐랄하다 하다 못해 별들을 넘고 넘어 이스칸달까지 가 버리기 십상인 만화라면 더더욱. 실은 비위가 약해서 틀린 게 너무나 뻔한 한국어는 애초에 시야에 넣지를 못한다..;; 서울문화사의 그 무수한 뻘짓에 이미 질릴대로 질렸지만 얼마 전에 피스메이커 쿠로가네의 어이가 삼천만 광년 저편으로 내빼버릴 한국판을 보고 내 갈 길은 심히 옳았음을 확신했던 참인데.
(오키타 주제에 부장님께 반말을 까다니!! 부장 갈구는 걸 나날의 양식으로 삼는 은혼 오키타도 최소한 경어는 쓴다!! -_-+++)
정신이 후달릴 것 같은 번역들이 난무하는 슬픈 한국 번역계에서 은혼 번역판은 진짜로 훌륭한 축에 속한다. 아니, 내 콩깍지가 아니라! 호칭이 무조건 성 아니면 이름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건 - 근데 왜 다카스기는 성이 아니라 '신스케'로 통일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 내심 아주 성질나지만(아니 독자의 지적 수준을 뭘로 보는 거얏!?), 소라치의 그 무지막지한 대사빨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어로 살려보려는 불타오르는 집념에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넘어 정말로 고개 숙여 경배라도 올리고 싶을 지경이다.
다만 전봉기(錢俸機) 에피소드는 막판에 가서 '전봉기와 선풍기는 일본어로 발음이 같다' 는 주석을 달아 전체적인 균형을 망가뜨리는 대신 원판에서도 그랬다시피 한자를 대충 꿰어맞춰서 한국어로도 같은 발음이 되게 살짝 바꿔주는 편이 결과가 훨씬 부드러웠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였다면 아마 <선풍기(宣豊機)>로 개명시켰겠지. '돈을 찍어내 풍요로움(豊)을 베푸니(宣) 얼씨구 좋다 차차차한 기계'(....). 그래야 긴상의 "헷갈리는 이름 붙이지 말란 말이다아아아아아!!!" 라는 절규도 살고.
아 이거야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호니까 대충 눈감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은혼의 번역판에는 딱 하나 엄청나게 치명적인 실수가 존재한다.
키 포인트는 데라카도 츠우의 데뷔곡이자 히트곡, <お前の母ちゃん何人だ>. 국내에서는 '니네 엄마 몇 명이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곡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예전부터 '니네 엄마 몇 명이냐' 가 대체 독설이 될 수 있는지 좀 의아하긴 했지만 은혼이 본디 좀 불합리한 대사 및 상황으로 뒤범벅된 물건이라 이 노랜 필시 <오감도> 계열(....)이려니 하여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이번에 은혼에 제대로 발리면서(소라치 놈...) 그만 깨닫고야 말았다.
지금 당장 근처에 점프 페스타가 있는 이는 엔딩을 자세히 들어보고 원판이 있는 이는 책을 펼쳐보시라. 何人의 독음이 なんにん이 아니라 なんじん이다.
─다시 말해서 저 何人은 '몇 명'이 아니라 '니네 엄마 뭐하는 인종이냐' 란 의미인 것이다!!
(더구나 그 앞의 가사가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お前それでも人間か)'인 걸 생각하면 이쪽이 한결 부드럽게 연결이 된다)
즉 이 노랜 실은 일본식으로 순화된 SON OF BITCH였다는 얘기(....).
하긴 그래야지 싱글 2탄이 <니네 아빠 XXX>, 싱글 3탄이 <니네 오빠 히키코모리>;인 츠우짱답지. 절레절레.
별 걸 다 꼬투리 잡는다는 자괴감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엄청 잘 나가주다가 이런 사소한 데서 삐끗해 버리면 원래 개판이었던 놈보다 더 눈에 뜨이는 법이다. 백지에 딱 한 방울 떨어진 시커먼 잉크방울은 눈에 확 뜨이고 어마어마한 오점으로 보이는 원리.
뭐,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더욱 잘해주길 바랄 뿐.
덤. 좀 더 정확히는 야 이 색휘야 너 사실 인류 아니지? 라고 갈구는 노래임. (깔깔깔)
그 노래의 진의가 궁금하다.
Still not a translation | 2007/05/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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