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에도 없는 프라모델에 시달리고 있다가 기분 전환 겸사겸사 해서 본디의 나와바리;로 돌아왔습니다 S입니다.
덤으로 이 블로그에서 볼거리는 오로지 번역뿐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으므로, 이하는 10만 히트 기념 차로 몇 년 전부터 한다 한다 말만 되풀이했던 에노쿄 신자들의 바이블이자 내가 탐정님께 꼴라당 넘어가 그 앞에 오체투지하고 밟아주세요를 외치게 된 결정적 계기인 <누리보토케의 연회:연회의 결말(塗仏の宴 宴の始末)>의 문제의 대목이다. (사실은 백기도연대도 땡겼지만 질이야 어쨌건 일단 라이센스가 나와 있으므로 우선은 뒤로 돌렸다) 본 대목은 어째 한 줄 한 줄이 모조리 에노쿄에 탐정님 만세인지라 좀 길지만 모에를 전염시키고 싶은 꿍심 하나로 눈 질끈 감고 몽땅 번역했다.
상당히 치명적인 천기누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나는 조만간 누리보토케의 연회를 원서로 읽을 예정이다! 혹은 손안의 책에서 내줄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겠다! 는 분은 못 본 척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네타바레는 인생의 스파이스라고 여기시는 분만 과감하게 열어주십시오.
번역 질에 대해선 아무런 태클도 받지 않습니다.
...and less.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하나, 추젠지 아키히코의 속내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 에노키즈 레이지로. 아 정말 미치겠다.
그리고 추젠지는 훗날 쟈미의 물방울에서 이때 에노상이 들들 볶아댄 일을 같은 수법으로 멋지게 보복(?)했고 말이지. 이 구제불능의 중년 부부 같으니.
그 외 쓸데없는 코멘트는 생략하겠다. 하여간 나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에노쿄 이외를 주장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시빌라이즈드 따위는 애저녁에 포기했음)
「그 말 그대─로!」
장지문이 벼락치듯 요란스럽게 열렸다.
툇마루에는, 양팔과 양다리를 한껏 벌린 그림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기세도 좋게 문을 열어젖뜨린 자세 그대로였다.
「아──엣」
「에, 에, 에노」
「에노키즈 씨──」
「그래! 내가 납셨다. 그 멍청한 면상들 치우지 못해!」
단정한 조형. 놀랍도록 커다란 눈. 다갈색을 띤 눈동자. 동양인답지 않은 새하얀 피부. 빛에 비추면 연갈색으로마저 보이는 머리카락──.
탐정・에노키즈 레이지로의 등장이었다.
추젠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습니다. 당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딴 식으로 등장하는 겁니까. 애꿎은 장지만 상하겠어요」
「흥. 원래 탐정이란 그런 거다!」
「그럼 죽어도 되고 싶지 않군요」
「되려 발버둥친다고 될 수 있지도 않아! 그보다 이 꼬락서니는 뭐야!」
「에, 에노키즈 씨, 여, 여태껏──」
마스다가 허둥대며 물어왔다.
「흥! 뭐어가 여태껏이냐. 너희들은 바보다! 어이 쿄고쿠! 대체 뭐냐. 새대가리와 바보멍텅구리와 코케시 낯짝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 이런 놈들이 주역을 맡을 수 있을 리가 없잖나 바보 같으니! 백년은 일러. 셋을 합해서 삼백 년은 이르다!」
에노키즈는 목소리도 우렁차게 선언하고, 장지문도 닫지 않은 채 성큼성큼 들어와 야아 유키짱, 오랜만이에요, 라고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유키에는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마스오카는 잠시 어안이벙벙해져 있었지만, 곧 몸을 부르르 떨며 제정신을 되찾고 한층 번개불에 콩궈먹는 속도로 말을 뱉어내었다.
「에──에노키즈 군, 자네는 여전히 무신경하고 상식 없는 사내로군. 이 분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알고나 있는 겐가」
「흥. 유키짱의 코앞에서 실컷 세키 군을 욕한 사람이 무슨 말입니까. 기왕 하려거든 원숭이라던가 바보라던가 좀 더 간단히 해요. 그쪽이라면 유키짱도 익숙하니까」
「익숙하다니, 자네 말이야!」
「나랑 쿄고쿠는 유키짱 앞에서 이미 수억 번도 더 그 원숭일 원숭이라 했으니 문제될 거 하나 없습니다. 그다지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은 변호사가 툭 튀어나와서 생활능력이 없다느니 자기실현성이 딸린다느니 자폐적이라느니 사교성이 부족하다느니 발음이 불분명하다느니 건망증이 심하다느니 기름기가 번질거린다느니 떠들어대는 편이 훨씬 기분 나빠요!」
「나, 나는 기름기가 번질거린다고는 하지 않았어!」
「당신도 가방끈만 길었지 이해력은 바닥을 기는 사람이군요. 안됐지만 기름기가 번질거린다는 말만은 괜찮아요! 나도 하는 말이거든」
에노키즈는 크게 웃어젖혔다.
참다 못한 마스다가 끼여들었다.
「에──에노키즈 씨! 좀 자제하세요」
「자제해야 할 놈은 너다 바보멍텅구리. 잘 생각해 봐, 이 사람은 유키짱이다. 원숭이건 기름기가 돌건 자기 남편 일이니까 네가 머리를 디밀 군번이 아니야. 뭐니뭐니 해도 그건 원숭이라서 우리에 들어가 있어도 문제없어! 바깥에 있어봤자 우리에 갇힌 거나 마찬가지니!」
「너, 너무하시지 않나요 대장」
「너무해? 그런 말을 듣고도 남을 놈인데 낸들 어쩌란 말이냐. 이 사람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에노키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키에의 머리 위 언저리를 보았다.
「뭐──정나미가 떨어지려면 지금이 딱 적시긴 한데──아니라면 또 그놈의 뒷바라질 해야 할 테니 유키짱도 마음 단단히 먹어요. 어차피 세키 군은 얻어맞건 걷어채이건 망가지지 않아. 원래부터 망가져 있거든요」
유키에는 에노키즈에게로 몸을 돌리고, 딱 한 마디, 예──라고 말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아오키가 앉은 자리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에노키즈 군. 자네도 세키구치 군의 건으로는 전혀 손쓸 필요가 없다고 할 셈인가?」
마스오카가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기껏 원숭이 주제에 살인은 무슨! 소매치기라면 혹여 몰라도, 필경 하지 않았어요. 소~매치기가~어쩌다 시모~다에서~」
장난치고 있다.
마스오카는 노골적으로 혐오의 빛을 보였다.
「대, 대체 뭘 하는 겐가. 농짓거리를 할 때가 따로 있지. 그──그렇지만 추젠지 군, 나는 도저히 모르겠네. 이게 정말 함정이라면, 대체 무슨 수법을 썼단 말인가. 목격자는 산더미처럼 많아. 트릭인가. 아니면──」
트릭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마스오카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탐정은 흰눈으로 변호사를 보며,
「원숭이는 두 마리다!」
라고 커다랗게 말했다.
「세, 세키구치 군이──둘이라고?」
마스오카는 점점 더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맞아요. 그러니 내버려두면 싫어도 세키는 나오는 거겠지? 안 그러냐 쿄고쿠!」
추젠지는 팔짱을 끼고, 아아──그래요, 라고 짧게 대꾸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에노키즈는 추젠지의 불퉁스런 표정을 곁눈질했다.
「그 경우──두 번째 원숭이가 붙잡히고?」
「뭐 그렇죠」
「과연」
에노키즈는 드물게도 억눌린 어조로 받고,
「어느 쪽이건──너만 괴롭게 된단 말이군」
그렇게 말했다.
추젠지는 험악한 눈초리로 에노키즈를 노려보았다.
「잘도 아는군요」
「탐정을 허투루 보면 못 쓴다. 나는 간파했어」
「그럼 내버려둬요」
「남의 손을 빌지 않아도 정도가 있다, 책방 주인」
「당신이야말로──언제부터 남을 알뜰히 보살폈다고 이럽니까」
추젠지는 핏발 선 날카로운 눈으로 탐정을 보았다.
에노키즈는 색소가 옅은 눈동자로 고서점 주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우린 하나도 모르겠어요 대장──토리구치가 말했다.
「두 분만 아시지 말고 여기도 신경써 주세요」
에노키즈는 다시금 흰눈을 했다.
「네놈들은 평생 가도 종복에서 승격하긴 글렀다! 세 놈 모여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쿄고쿠도 쿄고쿠다. 교육은 제대로 시켜라. 종복의 기본은 절대복종이다」
이런 종자를 둔 기억은 없다고 추젠지가 응수했다.
토리구치는 다다미 위에 손을 짚었다.
「종자건 노예건 뭐든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린 지금 갈피를 못 잡고 있단 말예요. 그죠 마스다 군. 아오키 씨도 그렇잖아요!」
에노키즈는 서탁을 쾅 내리쳤다.
「종복들이 시끄럽다. 귀찮으니 설명해」
추젠지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안 하는군. 정말──이대로 좋은 거냐」
「좋다고──했습니다」
「에노키즈 씨! 아신다면 설명해 주세요!」
마스다가 외쳤다.
에노키즈는 추젠지에게 눈길을 못박은 채로 말했다.
「이 녀석은, 누가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지 않는 종자 아니랄까 봐 또 입 다물고 참고만 있을 작정이다. 바보라고」
「참아요?」
「네놈들 같은 종복은 모르겠지만 나는 탐정이라 이미 눈치챘다.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라. 내가 자진해 설명하기란 전대미문의 사건이니까. 네놈들은 한 세기를 풍미할 순간을 맞이한 행운아들이다. 원숭이를 생포한 이 꼴사납기 짝이 없는 작전은 여기 있는 수다쟁이의 입을 닥치게 하려 준비된──이를테면 못된 장난이다!」
「못된 장난?」
「그게 무슨 뜻인가요 추젠지 씨!」
「설명하는 사람은 난데 왜 쿄고쿠한테 묻나 토리짱! 잘 들어, 이 녀석만 잠자코 있으면, 다시 말해 사건에 손대지만 않으면, 원숭이는 우리에서 나올 수 있어! 그걸 바라면 입 다물고 있으란 이야기다. 덤으로 대신 잡히게 될 원숭이는 이 녀석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게 되니까, 그 점에선 못된 장난이지. 안 그러냐?」
「아아. 당신 말대로──못된 장난이지요」
추젠지는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게 에노키즈 군──마스오카가 말했다.
「서, 설마 추젠지 군, 오리사쿠 아카네 살인 사건은. 혹여 자네를 표적으로 하는 일종의 협박 행위였던가?」
협박──토리구치가 외마디처럼 말했다. 추젠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관은 있어──.
하지만 하나로 뭉뚱그리지 말게──.
그런 것이었다. 역시, 이 일은, 이 사건은.
──추젠지의 사건이었나.
아오키는 완고한 고서점 주인을 보았다.
「말씀대로입니다, 마스오카 씨」
추젠지의 무거운 입이 가까스로 열렸다.
「오리사쿠 아카네 씨가 살해당한 이유는 제가 그녀에게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세키구치가 범인으로 몰린 건 제 지인이기 때문이고요. 이건──게임에 간섭하지 말라고, 제게 경고하는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유키에가 고개를 들었다.
「사, 사부님, 그럼 역시 사부님은──」
「토리구치 군, 마스다 군, 그리고 아오키 군──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게임이 이루어지고 있네. 물밑에서 지극히 오랜 세월을 거쳐, 원만하고도 착실하게 진행되어 온 게임이야. 그 사실을 눈치챌 자가 있다면──아마도 일본에서는 나 한 사람뿐이겠지. 나는 물론 거기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어. 간섭하기는커녕 여태껏 잊고 있었지. 진지하게 여겨본 적도 없었고. 헌데──」
추젠지는 토리구치를 보았다.
「──세간은 좁아. 나는 알게 모르게 그 일부에 관여하고 말았네」
「화선고(華仙姑)──사건입니까」
「그래. 올해 초 나는 가토 마미코 씨의 사건에 발을 들였어.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조선방(条仙房)의?」
「아츠코가 기도회의 습격을 받은 진짜 이유는, 필경 아츠코가 내 동생이었기 때문일세. 기사를 쓴 게 다른 사람이었으면 기도회는 아무런 행동도 일으키지 않았겠지. 니라야마(韮山)를 조사하러 간 게 세키구치가 아니었다면──아마도 그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했던가, 가더라도 기억이 지워지는 선에서 끝났을 거야. 오리사쿠 아카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유키에 씨, 세키구치가 체포된 것은 저 때문이라고──할 수도 있습니다」
추젠지는 서탁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유키에에게 시선을 주며, 그렇게 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내가 가만히 있으면 세키구치 군은 틀림없이 기소당하지 않고 끝나. 아츠코도 무사히 돌아올 테지. 대신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세키구치 군이 기소될 가능성이 높네. 기소되는 날에는 십에 팔구는 유죄일세. 아츠코의 목숨도 보장받을 수 없어. 아츠코뿐만이 아니야. 여기 있는 전원이 위험할지도 몰라. 그러니──」
닥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추젠지는 말했다.
「게임이란 뭔가요」
토리구치가 힘없이 물었다.
「육군의 지하시설과 관련된 게임인가요?」
추젠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불사의 생물인가 뭔가인가요?」
대답이 없다.
「아니면 헤비토(戸人) 마을의 주민참살사건에 관련된 건가요? 그 말도 해서는 안됩니까──」
안된다네──추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섭섭합니다 사부님. 전──사부님을 의심하기까지 했었다구요. 너무하세요」
섭섭합니다 키바 선배님──.
아오키도 그때 같은 말을 했었다.
마스오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그럼 오리사쿠 아카네 살인 사건은──본보기인가. 섣불리 움직이면 이렇게 된다는 견본인 건가 추젠지 군」
「아뇨──탐정의 말대로, 못된 장난입니다」
오리사쿠 아카네가 살해당한 건──.
오리사쿠 아카네이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적은──적은 누굽니까!」
토리구치는 그래도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오구니인가요. 아니면 이와타 준요인가요. 기도회, 아니면 조선방──아니지──잠깐만요, 그놈들은 전부 이어져 있었습니까? 적대하는 게 아니라?」
「자네들이 알 필요는 없어.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말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부님이 행동에 못 나서시면 저희라도 나서야지요! 그죠 마스다 군,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면 사내도 아니라고요!」
추젠지는 고통을 애써 억누르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노키즈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봐 쿄고쿠. 이놈들은 네 생각보다 훨씬 바보다. 움직이지 말라고 아무리 잔소리해봤자 소용없어.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게 할 작정이었으면 그럴싸한 거짓말로 얼버무렸어야지. 이 바보 3인조쯤이야 누워서 떡먹기로 속였을 녀석이」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야 생각이 미쳤어요──」
적당한 말로 대강 둘러댔어야 했는데──추젠지는 말했다.
그렇다.
추젠지의 재량이라면 아오키와 마스다와 토리구치를 속여서 무마시키는 일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손쉬웠을 터.
그러나──토리구치의 경우 추젠지의 언동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오키 역시 막연하나마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스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즉, 뒤집어 말해서 추젠지가 그들 세 사람을 믿어주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신뢰관계도 뭣도 없는 상대였더라면 추젠지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교묘한 말재주로 대충대충 넘어갔을 테니까──.
토리구치가 처량한 눈길로 아오키를 바라보았다. 그도 깨달았으리라. 다시 말해 그들 세 사람은 추젠지의 신뢰를 배신한 셈이었다. 때문에 추젠지는 그토록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이다.
아오키는 고개를 떨구었다.
「재미없어」
에노키즈는, 지금까지 줄곧 재미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낸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담배를 문 채 서탁에 팔꿈치를 얹고, 추젠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봐 쿄고쿠. 네가 달고 있는 그 귀신 같은 눈은 옹잇구멍이지. 여기에 앉은 게 누구냐──」
에노키즈는 스스로의 코끝을 가리켰다.
「──탐정이다」
「알아요」
「나는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진 않는 책방 주인이랑은 달라」
「무슨──말이 하고 싶습니까」
「물론 돌다리를 두드리다 추락하는 세키나 돌다리를 박살내는 바보 슈하고도 달라. 돌다리 따위 두드릴 필요도 없이 건너뛴다. 그게 탐정이다」
「날 부추길 작정입니까」
「가끔은 부추겨지는 입장이 되어 봐」
「하지만──나는, 직접 간접을 불문하고, 내 행위로 인해 희생자가 나오는 것이 내키지 않습니다」
「치사해」
「아아 치사하고 말고요. 치사하지 않고선──이 위치는 괴롭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치사하지 않다고 여겨본 적이 없어요. 난 치사합니다」
아오키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건에서 추젠지의 위치는, 비유하자면 악대에서 지휘자의 그것과 흡사하다고──아오키는 계속 그리 여겨왔었다. 지휘봉 하나에 모두는 움직이고 멈춘다. 따라서, 모든 사건에 있어 추젠지가 딛고 선 장소는 최강의 위치라고 아오키는 믿고 있었다.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흥, 자랑하지 마라──에노키즈가 말했다.
「치사한 게 어디 너뿐이냐. 다들 똑같아. 그리고 종복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어림없다. 쿄고쿠 너──이대로 두는 건 싫지」
「내버려두면 더 이상 주변에 피해는 입히지 않아요」
「하지만 네가 싫잖아」
「그러니──」
「됐으니까 네 얘기를 해」
끼여들 수가 없었다. 토리구치도 마스다도 침묵하고 있었다.
에노키즈가 추젠지를 힐문하는 광경이란, 적어도 세 사람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오키는 깨달았다. 이제까지 추젠지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동원되어 수많은 언어를 풀어놓았다. 아니, 풀어놓도록 줄곧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을 했던 적도 스스로의 심정을 토로한 적도 없지 않았떤가.
아오키는──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밖에 말하지 못하는데.
추젠지는 심사숙고한 후에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에 한해──내가 관여하지만 않으면 사망자는 나오지 않아. 하지만 일단 간섭하면 틀림없이 내 주변의 사람들──다시 말해 자네들과 자네들 주변의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돼. 그래서──」
오리사쿠 아카네는 어떻게 되나. 마스오카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희생자가 되지 않았나. 그녀는, 그 게임인지 뭔지의 희생자가 아닌가?」
「그 일은──그 일이야말로, 저의 부주의한 간섭에 대한 견제이자 보복입니다. 아카네 씨는 우리와 가까운 인물은 아닌 대신, 제게 있어선 그 나름대로 살해당할 의미가 있었던 사람이었던 셈이지요. 한편으로, 물밑에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게임 쪽은──제가 아는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종류의 게임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규약이 설정된 게임이었습니다. 게임 자체에서 살인사건이 파생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사실 사건다운 사건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궁지에 처한 사람도 없습니다. 놈들은 완벽하게 규칙을 준수하고 있어요. 범죄성은 전무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추젠지 씨──마스다가 말했다.
「건방진 소릴 해서 죄송하지만, 지금 추젠지 씨가 하신 말씀에는 약간 잘못이 있어요. 지금 생각났는데요」
「잘못?」
「예. 실은 저도 토리구치 씨한테 들었어요. 가토 씨──말입니다」
아아. 토리구치가 주먹을 휘저었다.
「가토 마미코 씨의──」
가토──그렇게 되풀이하고, 추젠지는 마스다를 주시했다.
「추젠지 씨는 오리사쿠 아카네 이외의 피해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렇지만──가토 마미코 씨의 아기는 죽었어요. 그 아이는──게임 자체의 피해자가 아닌가요」
추젠지의 표정이 변했다.
「가토 마미코 씨의──아기인가」
일거에 핏기가 가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추젠지는 맹렬한 속도로 사고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그랬군──」
마스다 군이 말한 대로라고 추젠지는 중얼거렸다.
「──정말 그래. 게임의 구조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네. 분명히 마스다 군이 말한 대로, 게임 자체가 피해자를 낳았어. 그럼, 이 게임은──무효다!」
추젠지가 스윽 일어났다.
「하는 거냐」
하는 거지──에노키즈가 못을 박았다.
추젠지는 탐정을 보았다.
에노키즈는 날카로운 표정 그대로, 그걸로 됐다고 말하며 입끝만으로 웃었다.
「그보다 당신은──어디에 있었습니까」
「니라인지 나랏님인지 하는 거기」
마스다가 에엣! 하고 경악했다.
「에, 에노키즈 씨, 그치만 에노키즈 씨가 실종되었을 무렵엔, 아직 전혀──」
「어이 바보멍텅구리. 내가 네놈들과 똑같은 수준인 줄 아나. 나는 만능이다. 하여간 네놈들이 쓸모없으니 이 바보 같은 서점 주인이 늘 고생한단 말이다! 이 녀석은 만들고 부수기는 잘해도 추진력은 없어. 내가 자리 좀 비우면 한 발짝도 전진 못하지 않나 이 무능 3인조! 없어봐야 깨닫는 에노키즈의 은혜란 격언을 가슴 속에 꾹 박아둬라!」
토리구치가 우헤에, 하고 신음했다.
에노키즈의 말이 옳았다.
아오키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가슴마저 뻐근했다.
아오키는 자신이라는 하찮은 개념을 지키기에 바빠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겨우 며칠간 의식이 끊어진 정도로 흔들리는 자아는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애써서 지켜야 할 가치는 없다. 그런데도 아오키는, 그저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만을 바란 나머지 아츠코를 의심했다. 손이 닿는 곳에 있었는데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자기 자신만 생각했었다.
아오키는 분했고, 허무했고,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 사건이 아니야.
추젠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추젠지는 우뚝 서서 에노키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에노 상, 당신──봤습니까」
「봤어」
「몇 명이었죠?」
「한 명」
「남자였습니까──여자였습니까?」
「남자였다」
「그랬나요──」
추젠지는 무언가의 말을 삼켰다.
「토리구치 군──」
「왜, 왜 그러세요──」
「누리보토케를 기억하나」
「예──물론입니다」
「이 게임은 누리보토케와 흡사하네.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진정한 의미는 소실되고, 표면만이 의미도 없는 깊이를 획득해, 그 자리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어. 이미 본말은 전도되었고 때문에 붙잡아서 밝혀낸다 해도 언제나 역전이 발생하지. 형태를 쉼없이 바꾸고 있어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허나──정체를 알고 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네. 시시껍절한 게임의 진의를 아는 사람은 주최자뿐이고, 그 주최자는 불가침이야. 플레이어는 심판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어. 진의를 모르니 관객도 진행을 방해할 수 없어. 속고 있는 건 속이고 있는 쪽일세──」
이 사건은 누리보토케의 연회와도 같다고 추젠지는 말했다.
토리구치의, 마스다의, 그리고 아오키의 어깨에 긴장이 실렸다.
아오키는──그럼에도 다소는 안도하였다.
「반격할 방법은──있는 거겠죠?」
「수단은──있지만 승산은 없네」
「이런 겁쟁이 같으니, 진작에 죽는 소리부터 내뱉기냐. 걱정하지 마라. 이 에노키즈 레이지로가 네 편이다. 그리고 앗짱이라면 저기 줄지어 앉은 바보 트리오가 목숨 걸고 지켜낼 테고. 안 그러냐 거기의 바보 3인조!」
에노키즈가 손가락을 뻗었다.
아오키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토리구치도, 마스다도 몸을 굳혔다.
「거 봐라. 종복이란 이리 쓰라고 있는 거다. 명령하면 복종할 뿐이다. 이렇게 부려먹어 주길 이놈들도 간절히 바라고 있어. 너는 마음을 너무 써준다고!」
에노키즈는 추젠지를 올려다보았다.
「자, 어떡할 테냐!」
「서둘지 말아요」
「선수필승이라 했어. 격투다! 폭렬 이즈다!」
「아뇨──기왕이면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뭐야. 아직도 돌다리를 두드리고 있나! 그런 건 때려눕히는 게 제일이다! 섬멸 외에 길은 없어!」
「먼저──떨궈야지요. 하지만 병대가 필요합니다」
「모으면 돼. 카와신이라도 불러」
「다만──세키구치는 나오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요」
추젠지는 그렇게 말했다. 이어서 유키에를 보았다.
「유키에 씨──」
아오키의 자리에서는 유키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에노키즈는 유키에를 일별하고,
「유키짱은 진작에 각오하고 있어. 그리고──치즈 씨도 말야」
그렇게 말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툇마루에 추젠지의 처가 앉아 있었다. 추젠지는 아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른손으로 턱을 짚고 토코노마를 향했다.
「유키에 씨와 함께 당분간 교토에 가 있어 주지 않겠소──」
분명 교토에는 아내의 친정이 있었을 터였다.
아내는 부드럽게 몸을 일으키며, 고양이도 데려가겠어요──라고 말했다.
에노키즈도 벌떡 일어났다.
「하하하하, 결국 넘어왔구나 추젠지. 지긋지긋하게 오래 알았지만 널 꼬드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려건 좋지만 그 얄궂은 노친네한텐 내가 시원하게 한 방 먹이겠어!」
탐정은 그렇게 선언했다.
아오키는 추젠지의 등을 보고 있었다.
장지문이 벼락치듯 요란스럽게 열렸다.
툇마루에는, 양팔과 양다리를 한껏 벌린 그림자가 버티고 서 있었다.
기세도 좋게 문을 열어젖뜨린 자세 그대로였다.
「아──엣」
「에, 에, 에노」
「에노키즈 씨──」
「그래! 내가 납셨다. 그 멍청한 면상들 치우지 못해!」
단정한 조형. 놀랍도록 커다란 눈. 다갈색을 띤 눈동자. 동양인답지 않은 새하얀 피부. 빛에 비추면 연갈색으로마저 보이는 머리카락──.
탐정・에노키즈 레이지로의 등장이었다.
추젠지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시끄럽습니다. 당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딴 식으로 등장하는 겁니까. 애꿎은 장지만 상하겠어요」
「흥. 원래 탐정이란 그런 거다!」
「그럼 죽어도 되고 싶지 않군요」
「되려 발버둥친다고 될 수 있지도 않아! 그보다 이 꼬락서니는 뭐야!」
「에, 에노키즈 씨, 여, 여태껏──」
마스다가 허둥대며 물어왔다.
「흥! 뭐어가 여태껏이냐. 너희들은 바보다! 어이 쿄고쿠! 대체 뭐냐. 새대가리와 바보멍텅구리와 코케시 낯짝이 한 자리에 모여 있어! 이런 놈들이 주역을 맡을 수 있을 리가 없잖나 바보 같으니! 백년은 일러. 셋을 합해서 삼백 년은 이르다!」
에노키즈는 목소리도 우렁차게 선언하고, 장지문도 닫지 않은 채 성큼성큼 들어와 야아 유키짱, 오랜만이에요, 라고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유키에는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마스오카는 잠시 어안이벙벙해져 있었지만, 곧 몸을 부르르 떨며 제정신을 되찾고 한층 번개불에 콩궈먹는 속도로 말을 뱉어내었다.
「에──에노키즈 군, 자네는 여전히 무신경하고 상식 없는 사내로군. 이 분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알고나 있는 겐가」
「흥. 유키짱의 코앞에서 실컷 세키 군을 욕한 사람이 무슨 말입니까. 기왕 하려거든 원숭이라던가 바보라던가 좀 더 간단히 해요. 그쪽이라면 유키짱도 익숙하니까」
「익숙하다니, 자네 말이야!」
「나랑 쿄고쿠는 유키짱 앞에서 이미 수억 번도 더 그 원숭일 원숭이라 했으니 문제될 거 하나 없습니다. 그다지 오래 알고 지내지도 않은 변호사가 툭 튀어나와서 생활능력이 없다느니 자기실현성이 딸린다느니 자폐적이라느니 사교성이 부족하다느니 발음이 불분명하다느니 건망증이 심하다느니 기름기가 번질거린다느니 떠들어대는 편이 훨씬 기분 나빠요!」
「나, 나는 기름기가 번질거린다고는 하지 않았어!」
「당신도 가방끈만 길었지 이해력은 바닥을 기는 사람이군요. 안됐지만 기름기가 번질거린다는 말만은 괜찮아요! 나도 하는 말이거든」
에노키즈는 크게 웃어젖혔다.
참다 못한 마스다가 끼여들었다.
「에──에노키즈 씨! 좀 자제하세요」
「자제해야 할 놈은 너다 바보멍텅구리. 잘 생각해 봐, 이 사람은 유키짱이다. 원숭이건 기름기가 돌건 자기 남편 일이니까 네가 머리를 디밀 군번이 아니야. 뭐니뭐니 해도 그건 원숭이라서 우리에 들어가 있어도 문제없어! 바깥에 있어봤자 우리에 갇힌 거나 마찬가지니!」
「너, 너무하시지 않나요 대장」
「너무해? 그런 말을 듣고도 남을 놈인데 낸들 어쩌란 말이냐. 이 사람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에노키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유키에의 머리 위 언저리를 보았다.
「뭐──정나미가 떨어지려면 지금이 딱 적시긴 한데──아니라면 또 그놈의 뒷바라질 해야 할 테니 유키짱도 마음 단단히 먹어요. 어차피 세키 군은 얻어맞건 걷어채이건 망가지지 않아. 원래부터 망가져 있거든요」
유키에는 에노키즈에게로 몸을 돌리고, 딱 한 마디, 예──라고 말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아오키가 앉은 자리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에노키즈 군. 자네도 세키구치 군의 건으로는 전혀 손쓸 필요가 없다고 할 셈인가?」
마스오카가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로 따지고 들었다.
「기껏 원숭이 주제에 살인은 무슨! 소매치기라면 혹여 몰라도, 필경 하지 않았어요. 소~매치기가~어쩌다 시모~다에서~」
장난치고 있다.
마스오카는 노골적으로 혐오의 빛을 보였다.
「대, 대체 뭘 하는 겐가. 농짓거리를 할 때가 따로 있지. 그──그렇지만 추젠지 군, 나는 도저히 모르겠네. 이게 정말 함정이라면, 대체 무슨 수법을 썼단 말인가. 목격자는 산더미처럼 많아. 트릭인가. 아니면──」
트릭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마스오카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탐정은 흰눈으로 변호사를 보며,
「원숭이는 두 마리다!」
라고 커다랗게 말했다.
「세, 세키구치 군이──둘이라고?」
마스오카는 점점 더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맞아요. 그러니 내버려두면 싫어도 세키는 나오는 거겠지? 안 그러냐 쿄고쿠!」
추젠지는 팔짱을 끼고, 아아──그래요, 라고 짧게 대꾸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에노키즈는 추젠지의 불퉁스런 표정을 곁눈질했다.
「그 경우──두 번째 원숭이가 붙잡히고?」
「뭐 그렇죠」
「과연」
에노키즈는 드물게도 억눌린 어조로 받고,
「어느 쪽이건──너만 괴롭게 된단 말이군」
그렇게 말했다.
추젠지는 험악한 눈초리로 에노키즈를 노려보았다.
「잘도 아는군요」
「탐정을 허투루 보면 못 쓴다. 나는 간파했어」
「그럼 내버려둬요」
「남의 손을 빌지 않아도 정도가 있다, 책방 주인」
「당신이야말로──언제부터 남을 알뜰히 보살폈다고 이럽니까」
추젠지는 핏발 선 날카로운 눈으로 탐정을 보았다.
에노키즈는 색소가 옅은 눈동자로 고서점 주인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우린 하나도 모르겠어요 대장──토리구치가 말했다.
「두 분만 아시지 말고 여기도 신경써 주세요」
에노키즈는 다시금 흰눈을 했다.
「네놈들은 평생 가도 종복에서 승격하긴 글렀다! 세 놈 모여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쿄고쿠도 쿄고쿠다. 교육은 제대로 시켜라. 종복의 기본은 절대복종이다」
이런 종자를 둔 기억은 없다고 추젠지가 응수했다.
토리구치는 다다미 위에 손을 짚었다.
「종자건 노예건 뭐든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린 지금 갈피를 못 잡고 있단 말예요. 그죠 마스다 군. 아오키 씨도 그렇잖아요!」
에노키즈는 서탁을 쾅 내리쳤다.
「종복들이 시끄럽다. 귀찮으니 설명해」
추젠지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다.
「안 하는군. 정말──이대로 좋은 거냐」
「좋다고──했습니다」
「에노키즈 씨! 아신다면 설명해 주세요!」
마스다가 외쳤다.
에노키즈는 추젠지에게 눈길을 못박은 채로 말했다.
「이 녀석은, 누가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지 않는 종자 아니랄까 봐 또 입 다물고 참고만 있을 작정이다. 바보라고」
「참아요?」
「네놈들 같은 종복은 모르겠지만 나는 탐정이라 이미 눈치챘다. 귓구멍 후비고 잘 들어라. 내가 자진해 설명하기란 전대미문의 사건이니까. 네놈들은 한 세기를 풍미할 순간을 맞이한 행운아들이다. 원숭이를 생포한 이 꼴사납기 짝이 없는 작전은 여기 있는 수다쟁이의 입을 닥치게 하려 준비된──이를테면 못된 장난이다!」
「못된 장난?」
「그게 무슨 뜻인가요 추젠지 씨!」
「설명하는 사람은 난데 왜 쿄고쿠한테 묻나 토리짱! 잘 들어, 이 녀석만 잠자코 있으면, 다시 말해 사건에 손대지만 않으면, 원숭이는 우리에서 나올 수 있어! 그걸 바라면 입 다물고 있으란 이야기다. 덤으로 대신 잡히게 될 원숭이는 이 녀석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게 되니까, 그 점에선 못된 장난이지. 안 그러냐?」
「아아. 당신 말대로──못된 장난이지요」
추젠지는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게 에노키즈 군──마스오카가 말했다.
「서, 설마 추젠지 군, 오리사쿠 아카네 살인 사건은. 혹여 자네를 표적으로 하는 일종의 협박 행위였던가?」
협박──토리구치가 외마디처럼 말했다. 추젠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관은 있어──.
하지만 하나로 뭉뚱그리지 말게──.
그런 것이었다. 역시, 이 일은, 이 사건은.
──추젠지의 사건이었나.
아오키는 완고한 고서점 주인을 보았다.
「말씀대로입니다, 마스오카 씨」
추젠지의 무거운 입이 가까스로 열렸다.
「오리사쿠 아카네 씨가 살해당한 이유는 제가 그녀에게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세키구치가 범인으로 몰린 건 제 지인이기 때문이고요. 이건──게임에 간섭하지 말라고, 제게 경고하는 명확한 메시지입니다」
유키에가 고개를 들었다.
「사, 사부님, 그럼 역시 사부님은──」
「토리구치 군, 마스다 군, 그리고 아오키 군──지금, 우리 주변에서는 어떤 게임이 이루어지고 있네. 물밑에서 지극히 오랜 세월을 거쳐, 원만하고도 착실하게 진행되어 온 게임이야. 그 사실을 눈치챌 자가 있다면──아마도 일본에서는 나 한 사람뿐이겠지. 나는 물론 거기에 간섭할 마음은 없었어. 간섭하기는커녕 여태껏 잊고 있었지. 진지하게 여겨본 적도 없었고. 헌데──」
추젠지는 토리구치를 보았다.
「──세간은 좁아. 나는 알게 모르게 그 일부에 관여하고 말았네」
「화선고(華仙姑)──사건입니까」
「그래. 올해 초 나는 가토 마미코 씨의 사건에 발을 들였어.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조선방(条仙房)의?」
「아츠코가 기도회의 습격을 받은 진짜 이유는, 필경 아츠코가 내 동생이었기 때문일세. 기사를 쓴 게 다른 사람이었으면 기도회는 아무런 행동도 일으키지 않았겠지. 니라야마(韮山)를 조사하러 간 게 세키구치가 아니었다면──아마도 그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했던가, 가더라도 기억이 지워지는 선에서 끝났을 거야. 오리사쿠 아카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유키에 씨, 세키구치가 체포된 것은 저 때문이라고──할 수도 있습니다」
추젠지는 서탁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유키에에게 시선을 주며, 그렇게 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내가 가만히 있으면 세키구치 군은 틀림없이 기소당하지 않고 끝나. 아츠코도 무사히 돌아올 테지. 대신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세키구치 군이 기소될 가능성이 높네. 기소되는 날에는 십에 팔구는 유죄일세. 아츠코의 목숨도 보장받을 수 없어. 아츠코뿐만이 아니야. 여기 있는 전원이 위험할지도 몰라. 그러니──」
닥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추젠지는 말했다.
「게임이란 뭔가요」
토리구치가 힘없이 물었다.
「육군의 지하시설과 관련된 게임인가요?」
추젠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불사의 생물인가 뭔가인가요?」
대답이 없다.
「아니면 헤비토(戸人) 마을의 주민참살사건에 관련된 건가요? 그 말도 해서는 안됩니까──」
안된다네──추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섭섭합니다 사부님. 전──사부님을 의심하기까지 했었다구요. 너무하세요」
섭섭합니다 키바 선배님──.
아오키도 그때 같은 말을 했었다.
마스오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그럼 오리사쿠 아카네 살인 사건은──본보기인가. 섣불리 움직이면 이렇게 된다는 견본인 건가 추젠지 군」
「아뇨──탐정의 말대로, 못된 장난입니다」
오리사쿠 아카네가 살해당한 건──.
오리사쿠 아카네이기 때문이다──.
──그랬구나.
「적은──적은 누굽니까!」
토리구치는 그래도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오구니인가요. 아니면 이와타 준요인가요. 기도회, 아니면 조선방──아니지──잠깐만요, 그놈들은 전부 이어져 있었습니까? 적대하는 게 아니라?」
「자네들이 알 필요는 없어. 쓸데없는 관심 갖지 말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부님이 행동에 못 나서시면 저희라도 나서야지요! 그죠 마스다 군, 불의를 보고도 모른 척하면 사내도 아니라고요!」
추젠지는 고통을 애써 억누르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에노키즈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봐 쿄고쿠. 이놈들은 네 생각보다 훨씬 바보다. 움직이지 말라고 아무리 잔소리해봤자 소용없어.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게 할 작정이었으면 그럴싸한 거짓말로 얼버무렸어야지. 이 바보 3인조쯤이야 누워서 떡먹기로 속였을 녀석이」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야 생각이 미쳤어요──」
적당한 말로 대강 둘러댔어야 했는데──추젠지는 말했다.
그렇다.
추젠지의 재량이라면 아오키와 마스다와 토리구치를 속여서 무마시키는 일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손쉬웠을 터.
그러나──토리구치의 경우 추젠지의 언동에 의심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오키 역시 막연하나마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마스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즉, 뒤집어 말해서 추젠지가 그들 세 사람을 믿어주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던가.
신뢰관계도 뭣도 없는 상대였더라면 추젠지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교묘한 말재주로 대충대충 넘어갔을 테니까──.
토리구치가 처량한 눈길로 아오키를 바라보았다. 그도 깨달았으리라. 다시 말해 그들 세 사람은 추젠지의 신뢰를 배신한 셈이었다. 때문에 추젠지는 그토록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이다.
아오키는 고개를 떨구었다.
「재미없어」
에노키즈는, 지금까지 줄곧 재미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낸 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담배를 문 채 서탁에 팔꿈치를 얹고, 추젠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봐 쿄고쿠. 네가 달고 있는 그 귀신 같은 눈은 옹잇구멍이지. 여기에 앉은 게 누구냐──」
에노키즈는 스스로의 코끝을 가리켰다.
「──탐정이다」
「알아요」
「나는 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진 않는 책방 주인이랑은 달라」
「무슨──말이 하고 싶습니까」
「물론 돌다리를 두드리다 추락하는 세키나 돌다리를 박살내는 바보 슈하고도 달라. 돌다리 따위 두드릴 필요도 없이 건너뛴다. 그게 탐정이다」
「날 부추길 작정입니까」
「가끔은 부추겨지는 입장이 되어 봐」
「하지만──나는, 직접 간접을 불문하고, 내 행위로 인해 희생자가 나오는 것이 내키지 않습니다」
「치사해」
「아아 치사하고 말고요. 치사하지 않고선──이 위치는 괴롭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치사하지 않다고 여겨본 적이 없어요. 난 치사합니다」
아오키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건에서 추젠지의 위치는, 비유하자면 악대에서 지휘자의 그것과 흡사하다고──아오키는 계속 그리 여겨왔었다. 지휘봉 하나에 모두는 움직이고 멈춘다. 따라서, 모든 사건에 있어 추젠지가 딛고 선 장소는 최강의 위치라고 아오키는 믿고 있었다.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흥, 자랑하지 마라──에노키즈가 말했다.
「치사한 게 어디 너뿐이냐. 다들 똑같아. 그리고 종복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어림없다. 쿄고쿠 너──이대로 두는 건 싫지」
「내버려두면 더 이상 주변에 피해는 입히지 않아요」
「하지만 네가 싫잖아」
「그러니──」
「됐으니까 네 얘기를 해」
끼여들 수가 없었다. 토리구치도 마스다도 침묵하고 있었다.
에노키즈가 추젠지를 힐문하는 광경이란, 적어도 세 사람의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오키는 깨달았다. 이제까지 추젠지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동원되어 수많은 언어를 풀어놓았다. 아니, 풀어놓도록 줄곧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을 했던 적도 스스로의 심정을 토로한 적도 없지 않았떤가.
아오키는──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생각밖에 말하지 못하는데.
추젠지는 심사숙고한 후에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에 한해──내가 관여하지만 않으면 사망자는 나오지 않아. 하지만 일단 간섭하면 틀림없이 내 주변의 사람들──다시 말해 자네들과 자네들 주변의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돼. 그래서──」
오리사쿠 아카네는 어떻게 되나. 마스오카가 말했다.
「그녀는 이미 희생자가 되지 않았나. 그녀는, 그 게임인지 뭔지의 희생자가 아닌가?」
「그 일은──그 일이야말로, 저의 부주의한 간섭에 대한 견제이자 보복입니다. 아카네 씨는 우리와 가까운 인물은 아닌 대신, 제게 있어선 그 나름대로 살해당할 의미가 있었던 사람이었던 셈이지요. 한편으로, 물밑에서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게임 쪽은──제가 아는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종류의 게임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규약이 설정된 게임이었습니다. 게임 자체에서 살인사건이 파생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사실 사건다운 사건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궁지에 처한 사람도 없습니다. 놈들은 완벽하게 규칙을 준수하고 있어요. 범죄성은 전무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추젠지 씨──마스다가 말했다.
「건방진 소릴 해서 죄송하지만, 지금 추젠지 씨가 하신 말씀에는 약간 잘못이 있어요. 지금 생각났는데요」
「잘못?」
「예. 실은 저도 토리구치 씨한테 들었어요. 가토 씨──말입니다」
아아. 토리구치가 주먹을 휘저었다.
「가토 마미코 씨의──」
가토──그렇게 되풀이하고, 추젠지는 마스다를 주시했다.
「추젠지 씨는 오리사쿠 아카네 이외의 피해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렇지만──가토 마미코 씨의 아기는 죽었어요. 그 아이는──게임 자체의 피해자가 아닌가요」
추젠지의 표정이 변했다.
「가토 마미코 씨의──아기인가」
일거에 핏기가 가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추젠지는 맹렬한 속도로 사고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그랬군──」
마스다 군이 말한 대로라고 추젠지는 중얼거렸다.
「──정말 그래. 게임의 구조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네. 분명히 마스다 군이 말한 대로, 게임 자체가 피해자를 낳았어. 그럼, 이 게임은──무효다!」
추젠지가 스윽 일어났다.
「하는 거냐」
하는 거지──에노키즈가 못을 박았다.
추젠지는 탐정을 보았다.
에노키즈는 날카로운 표정 그대로, 그걸로 됐다고 말하며 입끝만으로 웃었다.
「그보다 당신은──어디에 있었습니까」
「니라인지 나랏님인지 하는 거기」
마스다가 에엣! 하고 경악했다.
「에, 에노키즈 씨, 그치만 에노키즈 씨가 실종되었을 무렵엔, 아직 전혀──」
「어이 바보멍텅구리. 내가 네놈들과 똑같은 수준인 줄 아나. 나는 만능이다. 하여간 네놈들이 쓸모없으니 이 바보 같은 서점 주인이 늘 고생한단 말이다! 이 녀석은 만들고 부수기는 잘해도 추진력은 없어. 내가 자리 좀 비우면 한 발짝도 전진 못하지 않나 이 무능 3인조! 없어봐야 깨닫는 에노키즈의 은혜란 격언을 가슴 속에 꾹 박아둬라!」
토리구치가 우헤에, 하고 신음했다.
에노키즈의 말이 옳았다.
아오키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워 가슴마저 뻐근했다.
아오키는 자신이라는 하찮은 개념을 지키기에 바빠 무엇 하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
겨우 며칠간 의식이 끊어진 정도로 흔들리는 자아는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애써서 지켜야 할 가치는 없다. 그런데도 아오키는, 그저 자신이 자신으로 있기만을 바란 나머지 아츠코를 의심했다. 손이 닿는 곳에 있었는데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자기 자신만 생각했었다.
아오키는 분했고, 허무했고,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 사건이 아니야.
추젠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추젠지는 우뚝 서서 에노키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에노 상, 당신──봤습니까」
「봤어」
「몇 명이었죠?」
「한 명」
「남자였습니까──여자였습니까?」
「남자였다」
「그랬나요──」
추젠지는 무언가의 말을 삼켰다.
「토리구치 군──」
「왜, 왜 그러세요──」
「누리보토케를 기억하나」
「예──물론입니다」
「이 게임은 누리보토케와 흡사하네.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진정한 의미는 소실되고, 표면만이 의미도 없는 깊이를 획득해, 그 자리에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어. 이미 본말은 전도되었고 때문에 붙잡아서 밝혀낸다 해도 언제나 역전이 발생하지. 형태를 쉼없이 바꾸고 있어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허나──정체를 알고 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이네. 시시껍절한 게임의 진의를 아는 사람은 주최자뿐이고, 그 주최자는 불가침이야. 플레이어는 심판에게 이러쿵저러쿵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어. 진의를 모르니 관객도 진행을 방해할 수 없어. 속고 있는 건 속이고 있는 쪽일세──」
이 사건은 누리보토케의 연회와도 같다고 추젠지는 말했다.
토리구치의, 마스다의, 그리고 아오키의 어깨에 긴장이 실렸다.
아오키는──그럼에도 다소는 안도하였다.
「반격할 방법은──있는 거겠죠?」
「수단은──있지만 승산은 없네」
「이런 겁쟁이 같으니, 진작에 죽는 소리부터 내뱉기냐. 걱정하지 마라. 이 에노키즈 레이지로가 네 편이다. 그리고 앗짱이라면 저기 줄지어 앉은 바보 트리오가 목숨 걸고 지켜낼 테고. 안 그러냐 거기의 바보 3인조!」
에노키즈가 손가락을 뻗었다.
아오키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토리구치도, 마스다도 몸을 굳혔다.
「거 봐라. 종복이란 이리 쓰라고 있는 거다. 명령하면 복종할 뿐이다. 이렇게 부려먹어 주길 이놈들도 간절히 바라고 있어. 너는 마음을 너무 써준다고!」
에노키즈는 추젠지를 올려다보았다.
「자, 어떡할 테냐!」
「서둘지 말아요」
「선수필승이라 했어. 격투다! 폭렬 이즈다!」
「아뇨──기왕이면 내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뭐야. 아직도 돌다리를 두드리고 있나! 그런 건 때려눕히는 게 제일이다! 섬멸 외에 길은 없어!」
「먼저──떨궈야지요. 하지만 병대가 필요합니다」
「모으면 돼. 카와신이라도 불러」
「다만──세키구치는 나오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요」
추젠지는 그렇게 말했다. 이어서 유키에를 보았다.
「유키에 씨──」
아오키의 자리에서는 유키에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에노키즈는 유키에를 일별하고,
「유키짱은 진작에 각오하고 있어. 그리고──치즈 씨도 말야」
그렇게 말했다. 시선을 돌려보니, 툇마루에 추젠지의 처가 앉아 있었다. 추젠지는 아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른손으로 턱을 짚고 토코노마를 향했다.
「유키에 씨와 함께 당분간 교토에 가 있어 주지 않겠소──」
분명 교토에는 아내의 친정이 있었을 터였다.
아내는 부드럽게 몸을 일으키며, 고양이도 데려가겠어요──라고 말했다.
에노키즈도 벌떡 일어났다.
「하하하하, 결국 넘어왔구나 추젠지. 지긋지긋하게 오래 알았지만 널 꼬드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려건 좋지만 그 얄궂은 노친네한텐 내가 시원하게 한 방 먹이겠어!」
탐정은 그렇게 선언했다.
아오키는 추젠지의 등을 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하나, 추젠지 아키히코의 속내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 에노키즈 레이지로. 아 정말 미치겠다.
그리고 추젠지는 훗날 쟈미의 물방울에서 이때 에노상이 들들 볶아댄 일을 같은 수법으로 멋지게 보복(?)했고 말이지. 이 구제불능의 중년 부부 같으니.
그 외 쓸데없는 코멘트는 생략하겠다. 하여간 나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에노쿄 이외를 주장하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시빌라이즈드 따위는 애저녁에 포기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