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우츠노미야 전투의 히지카타 토시조 by 노다 마사코

너희가 막말을 아느냐 | 2008/02/22 20:51

컴퓨터가 또 말썽이라 홧김에 Under the Violet Moon은 보신전쟁(戊辰戦争) 연구 블로그로 이행했습니다. 거짓말이지만. 반만.
진짜를 논하자면 홧김에 다소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있음. 뭔지는 저어기 Z님이나 S님은 아실 터인즉 말 안 하겠다. 정말 할지 안 할지 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하여간 그 심히 원대한(...) 계획의 일부. 네가 정말 하코다테 신선조의 팬이라면 부장님을 파라! 파는 거다!!!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블로그에서 볼 건 번역(인지 해석)뿐이다! 삽질해라! 박박!
이하는 카와데쇼보신샤(河出書房新社)에서 출판한 문예별책 <히지카타 토시조~신선조의 조직자(土方歳三~新選組の組織者)>에서 발췌한 것이다. 퍼 가실 분, 당연히 없죠?


<히지카타 토시조~신선조의 조직자> 본문 176page~181page


우츠노미야 전투의 히지카타 토시조(宇都宮戦の土方歳三)


노다 마사코(野田雅子)


신정부군이 돌연 나가레야마(流山)를 포위할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미련없이 할복하려 하는 곤도를 필사적으로 설득해 투항시킨 것은 토시조의 일생일대의 도박이었다. 코시가야(越谷)로 연행되는 곤도와 동행한 대사 노무라 리사부로(野村利三郎)도, 직후 구명탄원서를 지참시켜 이타바시(板橋)의 토산도 진무총독부(東山道鎮撫総督府)로 파견한 소마 카즈에(相馬主計)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이묘코지(大名小路)의 사카이 히다노카미(酒井飛騨守) 저택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토시조의 흉중에는 초조함과 후회가 교차하고 있었다.
코시가야에서 이타바시로 이송된 곤도는 약속대로 막신(幕臣) 오오쿠보 야마토(大久保大和)로 행세했고, 카츠(勝)와 오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가 쓴 구명탄원서가 효과를 십분 발휘했어야 했다. 설마 이타바시에 주둔한 사츠마번병(薩摩藩兵) 중에, 옛 신선조 대사이자 고대사당(高台寺党=어릉위사御陵衛士. 이토 카시타로의 일파)이기도 했던 카노 미치노스케(加納道之助)가 끼여 있으리라고는, 토시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카노가 오오쿠보 야마토는 곧 곤도 이사미라 증언한 순간에 토시조는 도박에서 패배했다.
신정부군이 에도성에 무혈 입성한 4월 11일(1868년 5월 3일), 토시조는 신선조 대사 6명과 함께 에도를 떠났다. 나가레야마에서 곤도가 자진 투항하였을 때, 주력 부대와 부상자는 한 발 앞서 아이즈(会津)로 출발하였다.
최후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한 구 막부제대(旧幕府諸隊) 2천여 명은, 이치카와(市川)의 코우노다이(鴻ノ台)로 속속 모여들었다. 토시조 일행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곤도의 일이 끝까지 마음에 걸렸으리라.
4월 11일은, 전날 밤부터 비가 내렸다. 코우노다이의 숙영지에 들어선 토시조와, 이타바시의 옥에 갇힌 곤도는 어둠 속에서 같은 빗소리를 들었을까. 한 사람은 사지를 탈출하였고, 한 사람은 사지로 향하려 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12일 아침, 이치카와의 대림원(大林院)에서 작전회의가 열렸다. 오랜 토론 끝에 2천 수백에 달하는 탈주군의 조직이 재편성되었다. 병력을 막부육군 전습(伝習) 제 1대대와 제 2대대, 보병 7연대를 각각 중추로 삼은 3군으로 나누고, 육군보병부교(奉行)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가 전군의 총독으로, 토시조가 그 참모로 취임하였다.
지휘해야 할 신선조는 아이즈에 있고, 수하에는 불과 여섯 명. 더구나 토시조는 본디 백성 출신의 검객이었다. 그럼에도 전군 참모라는 중책에 임명된 것은, 교토에서 명성을 떨친 신선조 부장의 직함도 그렇거니와, 도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에서 실전을 경험한 토시조의 경력을 좌중이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토시조는 아이즈 번사 아키즈키 노보리노스케(秋月登之介)가 지휘하는 선봉군의 참모를 겸하여, 이후 아키즈키와 전습 제 1대, 타치미 칸자부로(立見鑑三郎)가 지휘하는 쿠와나(桑名) 번사대 88명, 신선조 6명을 포함하는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게 되었다. 중군과 후군의 지휘는 각각 오오토리와 막신 코메다 케이자부로(米田圭三郎)가 맡았다. 선봉군과 중・후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선봉군은 미쯔카이도(水海道)를, 중・후군은 닛코 가도(日光街道)를 따라 북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토시조를 비롯한 선봉군은 당일 바로 진군을 개시하였다.
전습대는 도박사(博徒), 마부(馬丁), 소방수(火消し) 등 성정이 거친 자들을 모병하여 프랑스식 군사 훈련을 실시한 부대로, 최신식의 샤스포 총으로 무장하여 당시 막부군에서는 최강의 부대로 이름이 높았다. 지휘관 아키즈키는 번주(藩主) 마쯔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가 상경할 당시 오늘날의 경호원에 해당하는 선비갑사(先備甲士)로써 수행하였고, 도바 후시미 전투 후 번주가 귀번(帰藩)하자 동지 몇 명과 함께 형식 상 탈번하여 막군에 투신하였다. 본디는 쿠와나 번사이다. 비록 경력은 제각각이나 일가친척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선봉군은 결속력도 강하고 사기도 높았다.
15일에는 토네(利根)강을 도하해 미쯔카이도에 들어섰고, 16일에는 소도무라(宗道村)에서 숙영했다. 북쪽으로 3킬로미터 지점에는 봉록 1만 석의 시모츠마번(下妻藩)이 있고, 더 북쪽에는 2만 석의 시모다테번(下館藩)이 있었다. 토시조 일행은 각 번에게 출병을 요청했다. 시모츠마번이 번사 10명과 보졸(歩卒) 10여 명을 지원하기로 동의하자, 토시조는 이백 오십의 병사를 이끌고 출발하여 17일 아침 시모다테에 도착했다. 번주 이시카와 와카사노카미(若狭守=후사카네総管)는 와카도시요리(若年寄=로쥬老中를 보좌하고 하타모토旗本와 고케닌御家人을 통괄하는 막부의 주요직)와 육군부교를 역임한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 가를 섬긴 신하)였으므로, 토시조는 이시카와 와카사노카미가 총독 오오토리 케이스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장 자격으로 탈주군에 참여하기를 내심 기대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모다테번은 예전 신정부군의 강압에 못 이겨 군자금 천 냥을 헌납한 일이 있어, 즉시 탈주군을 토벌하라는 서장을 받은 후였다. 때문에 출병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했다. 토시조는 번의 중신들과 수 차례 회담을 벌였으나, 이들은 그때마다 어려움을 호소하며 끈질기게 출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은 물자를 지원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아, 시모다테번은 금 5백 냥, 쌀 백 석, 된장, 단무지, 땔감 및 석탄 등을 공출하였다.
형세를 살피며 미적거리기만 하는 각 번의 태도에 토시조는 분통을 터뜨렸으리라. 그러나 영지와 영민을 지켜야 하는 만큼 각 번 역시 필사적이었다. 아키즈키 군은 우에노무라(上野村) 방면을 거쳐 시모다테에서 토시조와 합류해, 이후 시모다테에서 전군이 숙영하였다.
이날 이타바시에서는 사츠마의 아리마 토우타(有馬藤太)가 곤도를 면회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리마는 곤도를 나가레야마에서 코시가야까지 연행한 장본인으로, 그 와중에 곤도의 인물됨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훗날 그가 회상한 바에 의하면, 헤어지면서 곤도는 차분한 모습으로 <내 신병은 그대에게 맡기겠소, 모쪼록 잘 부탁하리다>라 말했다 한다. 아리마에게서 탈주군의 동향을 조금이나마 들었을까. 나가레야마에서 탈출한 토시조는, 아이즈로 향했거나, 아니면 탈주군에 가담했을 터──여기서 죽어봤자 개죽음이라며 격하게 항의하던 토시조의 모습을 곤도는 몇 번이고 곱씹었으리라. 자신은 이미 명운이 다했지만, 맹우는 앞으로도 싸움을 계속할 것이었다. 토시가 내 몫까지 싸우고 있다──그렇게 생각하면, 나가레야마에서 토시조의 주장을 받아들여 투항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장수는 근사하게 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곤도는 무사도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4월 18일(1868년 5월 10일). 아침 일찍 시모다테를 뜬 선봉군은, 모오카(真岡)에서 점심을 먹고 키누강(鬼怒川)을 도하했다. 저녁 무렵 타데누마(蓼沼)에 숙영했다. 토시조와 아키즈키를 비롯한 간부들과 200명의 병사는 만복사(満福寺)에 머물렀다. 우츠노미야 성(宇都宮城)은 바로 목전이었다. 우츠노미야성에는 4월 7일(1868년 4월 29일)부터 신정부군이 주둔해 있었다. 나가레야마를 포위해 곤도를 연행한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16~17일, 오오토리의 중・후군은 오야마(小山) 방면에서 신정부군과 거듭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패주한 신정부군은 에도로 사자를 급파하는 한편, 우츠노미야 근방의 각 번에게도 출병을 요청했으나, 18일의 시점에서 우츠노미야 성을 지키는 병력은 히코네(彦根), 이와무라(岩村), 스자카(須坂)의 각 번병으로 구성된 신정부군과 우츠노미야번병을 다 합쳐도 오백여 명에 불과했다.
타데누마 만복사 본당의, 학문소(学問所)라 불리는 다다미 여덟 칸의 방에서 아키즈키, 토시조, 타치미 등은 다음 날 아침으로 예정된 우츠노미야 진격을 두고 작전회의를 열었다. 히라마츠구치(平松口)에는 이미 적의 수비병이 주둔해 있었으므로, 이른 새벽 히라마츠구치를 우회하는 진로를 택해 공격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작전 논의와 더불어, 오야마에서 오오토리군과 맞선 적군에 카사마(笠間)번병이 다수 참전했다는 소식에 대한 격렬한 성토가 이어졌다.
카사마 번주 마키노 엣츄노카미 사다나오(牧野越中守真直)는 겐지(元治) 원년(1864)부터 도바 후시미 전투가 터지기 전까지 최후의 오사카 성주 대리(大阪城代)를 역임하였다. 신선조 국장 및 부장과는 여러 차례 함께 오사카성에 등성하였으므로, 아마도 토시조는 마키노 엣츄노카미와 안면을 트고 지냈으리라. 시모다테 번주 이시카와 와카사노카미도, 마키노 엣츄노카미도, 응당 구 막부군과 공동 전선을 펴야 할 입장의 인물이었다. 그러한 카사마번이 구 막부군에 등을 돌린 것이다. 이날, 토시조 일행은 카사마 번사 다카자키 우에몬(高崎右衛門)이라는 자를 통해, 번의 중역들에게 전장으로 출두하도록 으름장을 놓았다. 오사카 성에서 면담했을 무렵의 곤도를 떠올리면서, 토시조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로 치를 떨었으리라. 그 분노는 반드시 우츠노미야 성을 탈취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이어졌다.
19일 아침, 타데누마의 선봉군은 진군을 개시했다. 오사카베무라(刑部村)의 성원사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우츠노미야를 향해 성원사 가도(成願寺街道) 외길을 따라 북상하였다.
선두에는 <동조대권현(東照大権現)>(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호神号)의 깃발이 나부끼고, 프랑스식 진군 나팔이 울려퍼졌다.
천여 명에 달하는 선봉군은, 신정부군의 예상을 뒤엎고 오오츠카(大塚) 방면에서 성의 동남쪽을 노렸다. 오전 11시 경, 야나세무라(簗瀬村) 근방에 출현한 선봉군은 예정대로 세 갈래로 나뉘어 진군하였다. 선봉에서 타치미가 이끄는 쿠와나 번대와 토시조가 지휘하는 전습반대(半隊)가 적과 충돌했다. 최신식 샤스포총에 의한 일제 사격과 민가에 지른 불로 적군의 예기가 꺾인 틈을 놓치지 않고, 야나세바시(簗瀬橋)를 돌파해 성 바로 밑까지 육박했다. 아키즈키가 이끄는 중군 전습반대는 선회해서 북상, 정문을 공격했다. 민가에 지른 불은 때마침 불어닥친 동남풍에 실려 눈 깜짝할 사이에 크게 번졌다. 우츠노미야 성은 본디 토호쿠의 다테 가를 가상의 적으로 삼아 건설한 까닭에, 북측은 견고하지만 남동쪽은 둑이 낮고 대나무 숲이 많았다. 해자도 비어 있었다. 수비군의 주력부대는 당연히 동남쪽에 몰려 있었다. 야나세바시를 돌파한 선봉군은 시모카와하라 문(下川原門) 앞까지 쇄도하여 격전에 돌입하였다. 정오 무렵 시카누마(鹿沼)을 향해 진군하고 있던 오오토리의 중・후군은 하늘을 뒤덮은 검은 연기를 목격하고, 우츠노미야에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았다.
우츠노미야번병도 성문을 열고 도창갑사대(刀槍甲士隊)를 내보내, 시모카와하라 문 앞에서 일대 백병전이 벌어졌다. <보신전쟁견문약기(戊辰戦争見聞略記)>는 전한다.

포격전으로 그치지 않고, 너나할 것 없이 칼을 뽑고 창을 들어 분전하니, 실로 말로만 듣던 옛날의 합전과도 같았다.

총격전으로 막을 올린 전투였지만, 적이 코앞이 되자 자연스럽게 칼과 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토시조가 병사를 벤 것도 이때였다.

(전략) 히지카타 토시조는 보병이 후퇴함을 보고, 진격을 명령하며 도주하는 자를 베어넘겼다. 이에 보병은 고무되어 또다시 분전했으나, 히지카타가 피 묻은 칼을 거두고 유유히 물러나자, 보병도 그를 따라 물러났다.

토시조가 벤 병사는 아마도 전습대사였을지 모른다. 서양식 훈련을 받아 사격에는 자신이 있어도, 무사 출신도 아니거니와 검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백병전을 감당하지 못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병사 하나의 공포는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승패를 가르는 한 순간을 토시조는 놓치지 않았다.
오후 2시를 넘었을 무렵 시모카와하라 문이 뚫렸다. 토시조를 비롯한 선봉군은 성 안으로 쇄도하였다. 북측에서 진격을 시도한 아키즈키의 중・후군도 성 안으로 돌입하여, 오히려 적에게 몰리는 꼴이 된 신정부군에서는 성 밖으로 탈출하는 자와 철퇴하는 각 번의 원군이 속출하였다.
우츠노미야번의 중신 아가타 다케노리(県勇紀)는 신정부군의 카가와(香川)와 협의한 끝에, 증원부대를 기다려 사흘 후에 성을 탈환하기로 약조하고 이날 저녁 무렵 스스로 니노마루(二ノ丸)에 불을 지르고 성을 포기했다. 이로써 우츠노미야 성은 막부군의 손에 떨어졌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쉴새없이 타오르는 성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선봉군은 오사카베와 타데누마로 귀환해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뜻대로 싸워 거둔 승리였다. 도바 후시미 전투 이후 계속된 쓰디쓴 패배를 여기서 비로소 씻어냈던 것이다. 제 손으로 탈취한 성이, 홍련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 기분 좋은 도취 끝에, 묵직한 우울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곤도는 지금 어찌하고 있을까──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토시조는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취하지 못했다.
다음날인 20일, 오오토리 전군이 우츠노미야 성에 입성했다. 카사마번의 중역들에게 출두를 요청한 것은 18일.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데 분통을 터뜨린 토시조는, 아키즈키와 함께 20일자로 한 통의 서간을 보냈다. 서간은 토시조의 변명(変名) 나이토 하야토(内藤隼人) 명의로 작성되었다.

삼가 편지 올립니다. 지난 18일, 귀번의 다카자키 우에몬이라는 자를 통해 중역 한 명이 지급 출두해 주실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 후 소식이 없어 재차 통보드립니다. 21일까지 우츠노미야로 출두해 주십시오. 금번에도 소식이 없을 경우, 이때까지의 귀번의 행위를 보아 무력 행사도 불사하겠습니다. 엣츄노카미께 조속히 상소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20일 오전

도쿠가와 육군대 아키즈키 노보리노스케
나이토 하야토

  마키노 엣츄노카미 님 휘하 중역진께


(<보신전쟁전사(戊辰戦争全史)> 수록 <나이토 하야토>의 서간에서 발췌)

해설하고 자시고도 없이 명백한 협박이다. 배신자 마키노 엣츄노카미를 향한 토시조의 분노는 그토록 커서, 이어서 야스즈카(安塚) 전투가 터지지 않았다면 정말로 카사마번을 공격했으리라. 카사마번은 이 서간을 묵살했다. 기한인 21일 밤, 오오토리 군은 미부(壬生) 침공을 두고 꼬박 하루를 작전 회의로 지샌 끝에 미부로 진격을 개시했다. 신정부군 소속 선견대(先遣隊=정찰대)는 이미 미부성에서 야스즈카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으므로, 오오토리 군이 당초 예정했던 대로 선제공격의 기회는 잡지 못했다. 전투는 마쿠타(幕田)와 야스즈카 사이의 스가타 강(姿川)에 놓인 요도바시(淀橋) 부근에서 터졌다. 비와 안개와 바람이 겹친 악천후에 진군 경로를 잘못 잡는 실수까지 겹쳐, 결국 열 대여섯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 일흔 여덟이라는 결과만을 남기고 22일 정오 무렵 패주했다. 부상자 중에는 정공대(靖共隊)의 나가쿠라(=나가쿠라 신파치)도 끼여 있었다. 곤도와 결별한 후 나가쿠라는 하라다(=하라다 사노스케)와 정공대를 조직했으나, 결국에는 토시조가 전군 참모로 취임한 탈주군에 가담해 있었다. 하라다는 탈주군에 합류하고 얼마 있지 않아 정공대에서도 탈퇴해 홀로 에도로 돌아갔다. 하라다가 정공대에 무언가의 불만을 품었는지, 아니면 토시조가 참모로 있는 탈주군에 편입된 것이 못내 불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야스즈카 전투에서 나가쿠라는 선진에, 쿠와나 번사와 신선조는 중진에 있었다. 빗속에서 진흙투성이가 된 채 불편한 심정으로 재회했는지도 모른다.
23일, 우츠노미야 탈환에 나선 신정부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성하로 적이 육박했다는 제 1보가 들어온 것은 오전 8시 경, 탈주군이 전날의 야스즈카 전투에서 비에 젖은 총화기를 손질하고 있을 때였다. 남서쪽에 있는 타키오(滝尾) 신사 부근에서,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와 오오야마 야스케(大山弥助)가 지휘하는 사츠마번병을 중심으로 하는 2백여 명이 리쿠도구치(六道口)를 노리고 진격해왔다. 토시조는 쿠와나 번대와 행동을 같이 했던 듯, 성 밖으로 나와 북쪽의 후타라산(二荒山) 신사 및 하치만 산(八幡山) 근처에 포진했다. 오전 11시 전후, 성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와 쿠와나 번대의 절반은 정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 남서쪽에서 공격하는 적의 방어선상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토시조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으로 여겨진다.
「9점에 히지카타, 아키즈키 양 공(両公)이 부상당했다」(<시마다 카이 일기島田魁日記>에서)
즉, 토시조는 정오 경에 발을 다쳐 어쩔 수 없이 전선에서 이탈해야 했다.
신정부군은 탈주군의 반격에 부딪혀 일단 리쿠도구치까지 퇴각하였다. 그 사이 토시조와, 역시 부상당한 아키즈키는 이마이치(今市)로 후송된 것으로 여겨진다. 병력을 증강한 신정부군이 재차 공격해왔다. 신선조 대사 6명은 격전에서 살아남아, 저녁 무렵 오오토리 군이 전군 퇴각을 결의한 후, 토시조가 있는 이마이치로 향했다.
"그 병졸의 일은 실로 유감일세. 이곳 닛코에 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지 않겠나." 24일 아침, 이마이치 본진에서, 닛코에서 불러들인 센닌도신(千人同心)이자 소꿉친구이기도 한 히지카타 유타로(土方勇太郎)에게, 토시조가 눈물을 비치며 부탁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소꿉친구에게 토로한 심정에서 토시조의 꾸밈없는 모습이 엿보인다. 병졸을 벤 경위를 이야기하며 흘린 눈물은, 토시조가 흉중에 묻어두었던 또다른 고뇌까지 불러일으켰으리라.
곤도를 결국 구하지 못하고 헛되이 싸움만을 계속하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도 비슷한 격정이었다. 동시에 치밀어오르는 그리움을 토시조는 끝내 삭이지 못했을 것이다.
유타로와 면담한 후, 토시조는 6명의 신선조 대사 및 역시 부상당한 아키즈키 등과 함께 아이즈 와카마츠(会津若松)를 바라고 이마이치를 출발하였다.
그 다음날인 4월 25일(1868년 5월 17일), 곤도는 이타바시의 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참고 문헌──<보신전쟁전사>(기쿠치 아키라菊池明・이토 세이로伊東成郎 편. 신진부츠오우라이샤新人物往来社 간행)

언제나 그렇지만 이름과 지명과 역직명이 말썽이다. 끄으으으응. 뭐 본인용이니까 괜찮을라나; (야)
아 그래 그딴 건 다 좋다. 다 좋은데, 제발 과부질 좀 고만해요 부장님!! orz
(저놈의 고릴라 뭐가 좋아서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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