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읽거나 혹은 죽거나 | 2012/03/26 12:12

For a long, long while Haydon hesitated, then did not answer. But the answer was written there all the same, in the sudden emptying of his eyes, in the shadow of guilt that crossed his thin face. He came to warn you, Smiley thought; because he loved you. To warn you; just as he came to tell me that Control was mad, but couldn't find me because I was in Berlin. Jim was watching your back for you right till the end.

나는 이 대목을 보려고 그 사투를 벌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래도 끈질지게 물고 늘어져 팅테솔스 원서를 읽었구나 싶어졌다. 영국놈들은 하나같이 악마의 씨종내기들이지 말입니다.


1. 결국 일에 치여 팅테솔스 영화는 보러 가지 못한 김에 영화의 서술구조가 모옵시 복잡하니 원작부터 읽는 것이 네가 이로우리라 충고에 솔깃하여 열린책들부터 기웃거리다 악명자자한 롱 타임 노 시(....)에 기가 질리고 코가 막혀 응24의 카트에 우선 우겨넣고 봤던 번역판을 삼만 광년 저편으로 내동댕이친 후 대략 3초 정도 망설이고 원서를 집어들었다. 인간은 무식하면 존핸 용감한 법입지요 네.
쓰는 어휘 자체는 비교적 단순한데 배치와 구조가 드럽게 희한해서 미친듯이 헤깔리는 르 카레 영감탱이의 문장에 입안으로 저주를 중얼중얼 퍼부으며 이쯤 되면 반쯤 오기로 오고가는 지하철 안에서 꾸역꾸역 읽어나가길 약 한 달째, 나는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다. 내 근성에 오렌지 주스로 건배. 하지만 The Honourable Schooloby와 Smiley's People도 있죠. 넌 안돼 임마.

2. 팅테솔스의 최종적인 교훈 1 : 일이 지나치게 잘 풀릴 땐 제발 의심 좀 하고 봐라. 특히 니가 MI6 소속이라면 더더욱. 최종적인 교훈 2 : 스파이는 생각 많은 인간 특히 예술가가 해먹을 직업이 못됩니다(....). 누구 님 말씀마따나 헤이든이 익명게시판에 서방제국주의는 졸라 엿같다고 욕을 싸지르며 살 수 있었다면 모두가 훨씬 행복했을 텐데.

3. 원작 다 읽고 영화판을 봤더니 어찌나 알아먹기 쉽도록 재조립을 해놨던지 닥치고 엎드려 백팔배를 올렸습니다. 스파이물 좀 읽어봤다는 독자의 (뻔하디 뻔한;) 전개 예상과 시원한 카운터펀치에 대한 두근두근한 기대를 인정사정없이 덤덤하게 쳐즈려밟고 가버리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정직하고 친절하고 스마일리가 한 백만 배쯤 신랄하다. 솔직히 활주로 시퀀스는 졸라 무서웠어요. 게리 올드먼이 시커먼 오라를 뿜으면서 무자비하게 타박을 날려대면 에스터하이즈가 아니라 에스터하이즈 할아버지가 와도 징징 울 수밖에 없지 말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각본가의 숨길 수 없는 끔찍한 노고를 기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Rest in Peace, 브리짓 오코너 씨. 좋은 곳에 가세요.

4. 걸핏하면 쳐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드립;은 고사하고 헤이든이 바이섹슈얼임을 사방천지에 공개하고 다니는데다 빌 헤이든과 짐 프리도가 연인 사이였다는 걸 대놓고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마일리마저 속사정을 너무너무 잘 알고 있어서 살짝 힉겁했음. 배경이 1973년인데 헤이든 괜찮았음!? 내가 알기로 영국은 1967년에야 '21세 이상 성인 남성들의 동성애'를 법률적으로 인정;하는 희대의 개그를 쳤을 텐데!? 아 참 우리의 아서왕이자 브라이언인 채프먼도 당시의 오픈리 게이였죠. 하긴 시대가 변하니 법률도 우스꽝스럽게나마 바뀌었겠지만.

5. 아 불쌍한 짐 프리도.
영화판은 위의 저 무덤덤해서 더 마음 아픈 문장을 배우들의 연기가 벌충하고 있다. 마크 스트롱의 짙은 애정이 담긴 절절한 눈빛을 보고 났더니 아놔 쌍욕이 절로 튀어나옵디다. 야이 헤이든 시발색히야 니가 콜린 퍼스면 다냐 다야 니가 어떻게 프리도한테 이럴 수 있어!?
La Mer를 깔면서 스마일리 옹의 '왕의 귀환'(...)으로 끝나는 영화판 엔딩은 서정적이고 애틋하고 훌륭했지만. 하지만! 프리도를 서스굿 학교로 돌려보내라! 영화에선 점보하고도 관계가 깨진 채로 걍 끝나버렸잖아! 가엾은 프리도에게 몇 안 남은 위안을 이렇게 앗아가기냐! ㅠㅠ

6. The last illusion of the illusionless man. 카를라가 '사랑'에 부여한 정의.
하지만 그 illusion이 결국 헤이든의 발목을 잡았고 최종적으로는 카를라를 굴복시켰음을 생각해보면 뭐 이런 아이러니가 다 있나.

7. 퍼시 앨러라인이 너무 꼴보기 싫어서 - 늘 하는 말이지만 나는 바보는 질색이다. 생각 좀 하고 살라고 이 영감태기야 - 한 대 걷어차주고 싶었으나 스마일리 옹이 Return of the King을 찍으셨으므로 오케이오케이노-프라블럼. 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스마일리는 영화판에선 게리 올드먼 옹이고 BBC판에선 알렉 기네스 경(!)이다. 얼라리? 서커스 손해본 거 없네? <<

8. 다음은 The Honourable Schoolboy에 도전합니다.
이 캐스팅으로 카를라 3부작을 다 찍겠다는 용감한 기획은 쌍수 들고 환영이지만, 그런데 HS의 주인공인 제리 웨스터바이는 샘 콜린스와 하나로 묶여버렸잖아? 더 이상 기자가 아니지 않아? 스토리라인 괜찮은 건가? 大丈夫だ、問題ない。이 무적의 개그대사를 날린 놈이 그 말 하고 2분만에 맞아죽었다는 엄연한 사실 따윈 눈을 감겠습니다.

9. 팅테솔스 완독한 기념이랍시고 뭔가 바보짓을 꾸미는 중. 내가 뻘짓에 살지 않으면 누가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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