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언.

읽거나 혹은 죽거나 | 2005/08/26 22:39

히스토리언 1권 읽다 집어던졌음. 뭐가 어째? 『푸코의 진자』에 비견될 만한 자악푸움? 어허허.. 시뇨르 에코, 세상에 유명세를 어쩌다 이런 식으로 치르고 계십니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름값 차암 떨어졌구나. 다빈치 코드 때도 뻑하면 푸코의 진자 운운해서 빡돌기 직전이었는데 이제는 팩션 이름 단 놈이면 무조건 푸코의 진자를 들먹이는구나. 에라이 다 죽어라 이 자식들아.

지적 스릴러 좋아하신다. 블라드 체페슈에 대한 저 정도 지식은 우리 집 구석에 박혀 있는 책 두 권만 들춰봐도 다 나온다. 지금은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입하기 바로 전 단계라서 내 이 방대한 지식 다 피로 못해 보였다고? 진입만 하는데 한 권을 다 까먹냐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내 쿄고쿠 나쯔히코에 익어 장광설로 60페이지 까먹고 본편 들어가는데 웬만한 추리소설 중편 분량이 걸리는 책에는 익숙해진 슬픈(....) 몸이다. 오냐 그건 봐 주마. 그런데 왜 이렇게 이야기 전개에 뜬금이 없냐?
푸코의 진자 읽을 땐 골은 깨졌을지 몰라도 최소한 거의 막판까지 등장 인물과 함께 작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췄다. 사사사사사사실일지도....? ;;; 하고 진땀 삐질삐질 흘리며 진짜로 믿을 뻔했었단 말이다. 실컷 사람 농락해 놓고 종장에 가서 더욱 단순하고 진실미 팍팍 넘치는 해설로 상황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리며 갑자기 만사가 바보스러워져 넋을 쫙 뺀 독자에게 혀를 메롱 내미는 작가의 교묘함과 심술궂음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드라큘라가 아직도 살아 있대~요' 라고 느닷없이 폴짝폴짝 뛰어봤자 아무리 애써도 반응은 ....그게 뭐? ;;; 다. 이건 소재 선택에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 지난 근 1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드라큘라에 생명력을 부여해 왔더랬다. 인외마경의 괴물 중에 드라큘라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도 달리 있던가. 헌데 이제 와서 블라드 체페슈가 살아 있다고 난리 블루스를 추어봤자 걔 언제는 죽었던가? 하는 덜덜미적지근한 반응밖에 안 나온다. 명색이 팩션이라면 여기서 갖고 있는 온갖 테크닉은 다 동원해 어떻게든 이야기에 진정성을 부여해도 모자랄 판에 전개는 절라리 강인하고 납득도 안 가고 이야기의 강약강약약 조절은 눈물나게 형편없으니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냐. 게다가 일단 1권의 최대 주요 인물이어야 할 주인공의 아버지부터 진실한 고뇌의 그림자는 엇다 팔아먹고 아무리 봐도 폼만 댑다 잡고 있는 꼴이니 캐릭터는 볼 거 없이 짜증나게 얄팍해서 도대체 어디에 감정이입을 해야 할지도 막막하고 막판의 되도 않는 액션에는 비웃음만 삐직삐직 새더라. 작가도 좀 겸연쩍었는지 마치 헐리우드 영화를 보는 기분이라고 내레이터 입을 빌어서 한 마디 하고 있는데 기분이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 맞다. 그것도 아마게돈 계열 블록버스터.
요즘은 이런 책이 200억 달러에 판권이 나가는 거냐. 내 결국 시데를 보게 만든(...) 고양이도 죽이는 그 비러머글 호기심에 져서 2권 3권도 대충 들춰볼지는 모르되 이걸 내 돈 주고 사면 사람이 아니다. 안 그래도 요즘 씨잘데기 없이 시데 땜에 골이 아파 죽겠는데 웬 별 거지 같은 게 머릴 다 어지럽힐세 그려.

어제 죽이게 상태 좋은 양장본 개미(베르나르 베르베르) 세 권을 헌책방에서 딱 8,000원 주고 집어오는 횡재를 했는데 그거나 읽어야겠다. 아니면 머리 깨지는 거 감수하고 푸코의 진자나 다시 볼란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시뇨르 에코.


덤. 내가 집어온 책만 그런지 몰라도 대략 207페이지부터 225페이지까지 제본 순서가 엉망진창이다. 세상에 용서할 수 없는 게 세 가지 있는데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틀린 맞춤법과 사전 한 번만 들춰봤어도 피할 수 있었을 오역과 제본이 개발새발인 책이다. 이렇게 만들고도 8,900원이나 받아처먹었냐. 지옥에서 반성해라 이 인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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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2005/08/26 22:58
아... 이와아키의 만화 제목은 히스토리에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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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zusato 2005/08/27 00:00
확실히 요즘은 개나소나(...) 에코를 붙들고 넘어지는 추세지요. 그래도 다빈치 코드가 재밌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 앞에서 차마 「그 내용 전부를 푸코의 진자에서는 한 단락으로 요약했다네」같은 얘기는 못하겠더군요;;;. 진짜 에코의 책들을 읽어보고 그런 광고문구를 다는 건지 아니면 걍 유명하니까 아무렇게나 갖다붙이는지 모를 일입니다. (게다가, 다빈치 코드고 뭐고 전부 책 몇권 뒤져보면 나오는 지식들을 엄청 대단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으니 더더욱 기가 차지요. 성당기사단도 하도 우려먹혀 이제는 지겨울 정도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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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照帝 2005/08/27 00:14
크아아아아악;
어떤 놈들이 또 시뇨르 에코를 욕보였단 말입니까아아아아;
(그런 건 다빈치 코드만으로 충분하고도 떡을 치는구만! 아아 내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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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lls 2005/08/27 09:52
제대로 폭주하는구나. 응, 그런데 나도 그 날개의 광고에는 혀를 찼어. ...갖다붙이면 다 푸코의 진자래냐...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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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움 2005/08/27 20:52
처음 뵙겠습니다! 겨움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망량의 상자를 읽고 관련 포스팅을 찾으며 방황하던 중, KISARA님의 블로그를 보고 가뭄에 내린 단비를 맞는 심정이 되었답니다. 그 뒤로 들러 글만 읽고 갔는데, 오늘 굉장히 공감가는 포스팅이라 답글 남깁니다.
저도 히스토리언- 1권도 다 못 읽고 때려치웠답니다ㅠ_ㅠ 광고도 엄청 거창하고 책도 뭔가 고급스럽게 생겼고 또 각 서점 베스트셀러 진입이라고 써 있길래 우와~ 하고 봤다가 피를 토했어요. 빌려 본 주제에 신경질 내긴 미안했지만요.(다빈치 코드는 그래도 끝까지 읽을만큼 재미는 있었는데;)

아무튼 나만 재미없었나...라면서 암울해 있었는데 가려운데를 긁어주시는 포스팅에 감정이 고양되서, 슬쩍 글 남기고 갑니다.
에에; 그리고 하는 김에, 링크신고도 같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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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09/05 15:03
조나단 님 / 히스토리'언'입니다, 이 책은 (웃음)

kazusato님 / 시뇨르 에코가 무슨 죄라고 유명세를 이런 식으로 치르셔야 하는 겁니까...!! 다빈치 코드요? 저처럼 까다롭게 따지지 않으시는 어머니께서 2권까지 읽고 구성이 거지같다고 집어던지신 걸 보면 말 다했지요 뭘. 인기가 있건 말건 상관없지만 자꾸 푸코의 진자 운운하는 건 진짜 용서가 안 됩니다.
...읽어보지도 않고 유명하니까 갖다붙인다는 게 만 점 걸겠습니다.;

天照帝님 / 유명하고 잘 쓴 글이란 게 죄가 되는 세상입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영원히 저한테 찍혔습니다 -_-

Hylls짱 / 와하하하하 분노의 오라가 느껴지는가!! 블로그란 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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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5/09/05 15:05
겨움 님 / 처음 뵙겠습니다. 그간 계속 찾아주시고 계셨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링크도 감사합니다. (엄청 늦었지만;)
남들이 다 재미있다고 열변을 토해도 내가 싫으면 그건 싫은 겁니다. 저의 글이 가려운 데를 긁어드렸다면 다행이군요 (웃음)
이런 블로그지만 모쪼록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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