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금한 금쪼가리.

일상의 잡동사니 | 2006/01/27 13:28

젠장, 지금 기분이 좀 찝찝합니다. 고로 말도 험악합니다.


어제 집에 들어갔더니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인간극장이나 뭐 그런 종류의 다큐멘터리다. 슬쩍 보니 제목이 '금쪽같은 승용이'다. 시작부터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치밀어올라온다. 아니나다를까, 딸 일곱 밑으로 아들새끼 하나랜다. 아빠고 엄마고 할아버지 할머니라 해도 믿을 정도로 팍삭 삭았다.
뭐 거기까지만 해도 좋다 이거다. 헌데 할머니께 보고 드릴 겸 해서 잠시 꾸물대고 있었더니 이 승용이라는 애새끼가, 바로 윗누나(아마도 중학생)가 안 쓰고 안 먹어가면서 찔끔찔끔 모아놓은 비상금을 슬쩍 가져다 지 농구공을 사 버렸다. 그리고는 집에 와서 친구가 준 거라고 속이 빤한 거짓말을 나불댄다. 엄마가 빗자루를 들고 때리려 하니 - 그나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 두려움없이 천 원 건다 - 당장에 아버지란 사람이 굴러나와 애를 끼고 말.그.대.로. 빙빙 돌면서 뭐 그럴 수도 있고 사내애들은 공도 차면서 놀아야 한다고 지껄인다.

한 마디로 재수없다.

금쪽같아? 금쪽같은 거 좋아하신다. 정 사내애들이 공 차고 놀아야 한다면 당신 지갑에서 나온 돈으로 사줘라. 왜 막내딸의 알량한 비상금을 알겨가게 냅두는 거냐. 노는 건 노는 거고 도둑질은 도둑질이다. 이럴 때 매 들지 않으면 당신의 금쪽같은 애새끼가 나중에 어떤 꼬락서니 될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냐? 물론 그 잘나빠진 금쪼가리가 시궁창에 처박히는 꼴 유쾌하게 봐줄 용의는 있다. 난 성질 더럽고 비뚤어졌거든.

딸애는 결국 속이 상해서 방에 들어가 버렸다. 아직 한참 어린 게 훌쩍훌쩍 울면서 항상 동생만 챙겨서 섭섭하다고 하는데 참 보기가 안 됐더라. 젠장, 딸년은 사람도 아니냐. 사소한 문제 아니냐고? 애들은 부모의 사소한 무관심에 상처받고 비뚤어지고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그리고 저게 사소한 문제냐? 독자 있는 집에서 막내딸애가 받는 용돈이래야 빤하다. 그 빤한 용돈에서 어렵게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비상금을 훔쳐가선 야단도 안 맞고 슬쩍 넘어가고는 누나들이 볶아대니까 그제야 뭐 돈 갖구 울구 그래 어쩌고 지랄하는 놈 앞날이야 불보듯 환하다. 저런 쉐이가 나중에 커서 부모에게 주먹질 하고 집안 살림 거덜내고 집문서 뽑아간다. 그렇게 키워서 좋냐? 좋냐? 아 참 좋기도 하겠다.
이 프로그램 제작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딴 거지같은 걸 전국 방송으로 때리는 거냐. 이거 보고 감동받으라고? 무슨 수로? 요즘 세상에도 이렇게 전근대적으로 사는 가족이 있으니 비웃으라는 거냐? 아니면 요즘 우먼 파워가 쪼금 세질 듯하니 아들은 역시 좋은 거다 어화둥둥 내 새끼 잘 키워보자 캠페인하는 거냐? 어느 쪽이든 열라게 재수없다.

나는 진짜로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내 아버지는 3대 독자시고 나는 무남독녀다. 친가 쪽으로는 친척도 거의 없다. 즉 우리 집은, 저어기 유림들 말씀을 빌리자면 '내 대에서 끊긴다'. 주위에서 아들 하나 낳으라고 성화가 무섭게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런 상황에서 흔히 난리법석을 떠는 주체인 할머니와 아버지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으셨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어머니는 내 밑으로 또 하나를 뱄다 결국 유산하셨다. 그런 사정도 좀 있었으리라 지금에 와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 분들의 굳은 믿음 덕분에 나는 소위 손 귀한 집에서 딸로 태어났다는 알량한 죄 하나로 무수한 여자들이 받는 설움은 전혀 모르고 자랐다. 가끔 한 발만 잘못 엇나갔으면, 내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만큼 깨이신 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머니와 내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 상상을 해 보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내가 억세게 운이 좋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할머니와 아버지의 태도가 정답인 게 맞다.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대우를 운 좋고 훌륭하다 기뻐해야 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성들이 CEO와 판검사와 장관 자리를 휩쓸고 여성의 시대가 도래한다며 난리법석을 떨고 일부는 미리부터 겁을 먹고 세상이 더럽게 굴러가는 건 전부 여자 탓이라 나발을 불어대는 와중에, 세상 한 구석에선 여전히 딸이라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아들을 못 낳아 노예 취급을 당하고 - 아주 약간의 생물학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겠지만 아들 못 낳는 건 Y염색체 제공 안 해주는 남편 책임이다. 낯이 두꺼워도 정도가 있지 - 지참금 좀 적게 가져왔다고 가스버너에 처박혀 살해당하고 단지 먹고 살려 목숨 걸고 막일을 나간 끝에 결국 잡혀 못 볼 꼴 다 보고 사형까지 당한다. 하아, 여성상위시대애? 개그하냐 지금?
젠장, 우리가 갈 길은 아직도 까마득히 멀고 여성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다.


덤 하나. 아침 식탁에서 거품을 뿜는 열변이 오고 간 끝에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니, 여자가 없었으면 지네들이 태어날 수나 있었나?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그건 말이죠 할머니, 아아주 간단해요. 못 잡아먹어 발광하는 쉐이들에겐 절 낳아준 어머니는 '어머니'지 결코 '여자'가 아니거든요. 그딴 썩은 머리통 단 작자들은 세상 여자들을 '성스러운 어머니'와 '조져도 싼 창녀'로 딱 양분하고 지 마음에 좀 안 들고 지 사고방식에 안 맞으면 전부 후자로 치부한답니다. 세상 참 단순무식하게 살아서 좋겠어요. 후후후.

덤 둘. .......민족의 명절이 코 앞인데 나는 이 무슨........ (먼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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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루 2006/01/27 22:30
저도 집안 사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글을 읽다보니 돌아가는 시추에이션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지는 군요. (훗) 그 아이, 금쪽같다더니 싹수도 아주 선연한 황금빛이네요 그려. =_= 남의 홈에 이렇게 가시 돋힌 말 남기기 그렇지만, 정말이지 용서가 안 됩니다. 아마도 방송도, 저 집안꼴 보고 끝내주게 추하니 이딴 거 절대로 따라하지 말라는 뜻에서 방송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싶네요. 훌륭한 부모님을 두신 것이 정말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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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isimo 2006/01/28 05:24
저희 아버지께선 형제가 셋이지만, 그 중에서 아들은 제 동생 딱 하나지요.. 하지만 식구들 전부 그런 것에 개의치않고 낳은 자식 잘 키우자- 라는 모토라 큰어머니께서도, 작은 어머니께서도 그런 고생을 안 하셨다는 것과, 집안 전체가 제 동생을 감싸도는 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해요. (그리고 그렇게 당연해야 할 태도에 감사해야한다는 사회현실이 씁쓸하고요) 그 다큐멘터리를 보질 못했으니 "이렇게 살지 말아라"라는 의도를 가진 다큐였는지, 아니면 PD가 개념상실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민족의 명절이 코앞이라도 바른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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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itiker 2006/01/28 08:37
저희 집도 그런 점에선 다른 데보단 편해요. 뭐 제가 태어났을 때 돌아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제 남동생 태어나니까 축의금 싸들고 왔다더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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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02/01 17:36
한루 님 / 금쪽이 아니라 싯누런 싹수였나 봅니다 (한숨) 정말 저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복이지 싶습니다. 절대로 따라하지 말라는 뜻에서 방송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닐 가능성이 90퍼센트라는 게 또 한숨만 나옵니다.

verisimo님 / 왠지 PD가 개념상실이라는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서 말이죠;;; verisimo님께서도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셨군요. 사실은 그게 당연한 건데 말입니다.

kritiker님 / 거 참 속보이는 축의금이네요;; 아들딸 구별 말자는 캠페인이 나온 게 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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