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와 무식과 무대포의 3중주에 의한 삼국지 SS.
무려 손책이 여자입니다. (爆) 그래요 나는 과거 베르바라에 열광했던 여자 실은 성별역전 무지 좋아하는 여자
SS 두 개를 동시 진행하다 유혹을 못 이기고 이것부터 먼저 후딱 써 버렸음. 남자 버전과는 많은 부분에서 설정이 다릅니다. 역사 왜곡은 너그럽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직 팔릴 낯짝이 있으므로 (있는 거냣) 가림.
SIDE A-11. 글쎄(さぁ)
고백합니다. 무지 즐거웠습니다. OTL
실은 처음에 반쯤 썼다가 개그도 시리어스도 아닌 어정쩡한 물건이 되어 (니가 늘 그렇지 뭘...) 홧김에 다 지워버렸음. 써도 써도 당최 끝이 나질 않아 도피하고 싶은 생각도 굴뚝 같았는데 이걸 클리어 못하면 앞으로 죽도 밥도 안 될 성 싶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스토리가 파탄나도 부디 그러려니 해주삼. 수정할 기력 읎따.
주유는 성별을 떠나서 손책이라는 존재 자체에 극도로 집착했을 거라 생각함. 그런 이야길 하고 싶었다.
손책 일이라면 신혼의 아내도 뒷전 집안도 뒷전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 뒷전. 물론 세간의 상식도 뒷전.
내용물이 어쨌건 성인 남녀가 한 침상에 들어가 있으면 세상이 뭐라 생각할지는 안중에도 없음. 바보니까 할 수 없다.
남자 쪽이 좀 더 밝;히고 - 색기도 이쪽이 우월함; - 머리카락 색이 다른 것만 제외하면 남자건 여자건 소패왕에 대한 S의 기본적 이미지는 동일하다. 악동이 그대로 몸만 쑤욱 자란 악마. 눈빛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을 뺨치는 고양이과 맹수. 남자면 나쁜 놈이고 여자면 나쁜 년임.
그럼 굳이 역사를 왜곡해 가며 여자로 만든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마음 속의 쬐끄만 짐승(그 이름은 개연성)이 월월컹컹대고 있으나 닥쳐랏 우민. 성적 접촉의 가능성마저 철저히 배제된 관계는 물론 男男도 좋으나 男女 쪽이 훨씬 위험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래도 똑같은 침상에서 뒹굴 땐 男男보다야 男女가 주위에서 사는 의심이 더 많지 않겠나. (그래! 난 샤토브리앙의 <르네>에 군침 좔좔 흘렸던 년이다! 억압 에로티카 만세!!)
...그냥 베르바라 로망이라고 하지 그래? ;;;
그나저나 한국어에도 綺麗에 대응하는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어휘가 빈약해서 모를 뿐이라면 좀 슬픔; 왜 이 나라엔 변변한 동의어 사전도 없는 거냣!!
혹여 '아름답다'와 '예쁘다'의 중간쯤에 있는 적절한 단어를 아시는 분은 제보 바랍니다. 양쪽 모두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실은 君에 해당하는 2인칭이 더 절실하다;)
덤. 난향(蘭香)은 여러 가지로 초 난감한 순정만화 강동의 새벽(江東の暁)에서 쌔벼온 설정. 오빠와 그 친우의 얼굴에 불 나는 연애질 사이에 끼여 손해보는 전형적 여동생 포지션;의 아가씨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말 꼬랑지에 빨간 끈을 묶어놓으면 '발길질을 하므로 접근하지 마시오 위험' 이라는 의미라던가.
"푸핫!!!"
연못에서 뭍으로 기어오른 주유는 쿨럭거리며 삼킨 물을 토해냈다. 왠지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액땜이라 어거지로라도 믿고 싶어지는 재액의 연속이더니 결국 마무리는 성대한 추락이었다.
등 뒤에서 거친 욕설과 텀벙거리는 물소리가 요란히 일어, 주유는 누군가에게 저주를 받지 않았나 하는 심각한 의혹을 잠시 접어두고 그를 잡아주려다 사이좋게 떨어진 친우에게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무사해, 백...."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추락의 충격으로 반쯤 찢어지고 물에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옷 밑으로,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반 치나마 틀림없이 봉긋하게 솟아 있는 가슴.
찢어진 겉옷을 훌렁 벗어부치고 툴툴대며 물을 짜낸다기보다는 오히려 함부로 쥐어 비틀고 있던, 바로 5분 전까지 같은 성별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친우가 인간의 본능으로 가슴팍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주유를 째려보았다.
"뭐야 공근, 여자 가슴 처음 보냐?"
주유는 졸도하고 싶어졌다.
Without Any Good Reason
갑주를 떼어내고 침의 한 장만 두른 무방비한 등은 최전선에서 노련하게 장병을 지휘하는 총대장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망각할 만큼은 미덥지 못했지만, 아무리 단련해봤자 타고난 골격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빨간 끈으로 대충 틀어올린 연갈색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예상 외로 하얗고 가늘었다.
목도를 팔꿈치치기로 부러뜨리고 뇌천 내려찍기로 식인 호랑이를 일격에 침몰시키고 옆구리 힘만으로 거한의 머리를 짓이기는 강동의 소패왕이 실은 한 줌도 안 될 성 싶은 여자였다는 걸 알면 편히 눈을 감지 못할 자들이 수천은 되리라고, 주유는 침상에 걸터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친우 겸 누님 겸 주군의 목덜미에 시선을 못박고 막연히 그런 걸 생각했다.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당돌하게 발이 날아왔다.
거침없는 발길질에 침의 밑으로 드러난 반은 소년 같고 반은 소녀 같은 늘씬한 다리가 조금은, 눈부셔서. 거기에 문득 시선을 빼앗겨 버린 자신에게 한숨을 쏟았더니 이번에는 발꿈치로 찍고 빙글빙글 돌려댄다.
"날씨도 개떡 같은데 이건 또 웬 죽상이냐. 보는 인간 짜증나게스리. 당장 얼굴 못 펴? 아?"
"....백부, 시비는 어지간히 걸고 그 버릇 나쁜 발이나 저리 치워. 나야말로 짜증난다."
"오 공근, 너 진짜로 많─이 컸다? 감히 이 하늘 같은 누님께 개기고, 말야!"
"잠깐, 뭐 하는... 와, 하지 마! 손─백─부─!!"
시시한 주거니받거니도, 가벼운 몸싸움도, 그리고 문득 그녀에게 시선을 앗기는 것도.
늘 있는 일상의 일부분이다.
이 시대, 주군과 침식을 함께 하는 것은 그 신하에게는 무엇보다 큰 영광이자 명예를 뜻한다. 현 손책군에서 그 기쁨은 고스란히 주유의 몫이었다. 철 든 이후로 타인과 같이 자 본 적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주유의 팔을 놓칠세라 꽈악 붙들고 "이거다 싶은 사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꼬셔라─이거야말로 무가(武家)의 기본이라고" 라 주장하는 손책에게 말려들어가 얼떨결에 같이 침상을 사용한 게 처음 만난 12세 때, 두 해가 지나고 친우의 성별을 안 순간에 뒤로 돌아 미친듯이 내뺐어야 했지만 지금 와서 여자로 대접하면 썰어버리겠다는 손책의 협박(과 치켜든 칼)을 감당치 못하고 꺾인 후로 이럭저럭 10여 년, 이제는 거의 습관에 가까운 행위라 하여도 무방하도록 오랫동안 지속된 일이다. 사적 자리에서 자(字)만으로 부르고 말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주공근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과거 손견 휘하의 사천왕 중에서도 유난히 까탈스런 시어머니격인 정공(정보)을 비롯하여 손책군의 잔소리 전담인 장소와 장굉이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아도, 가신들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돌려돌려 진언을 올려도, 무장들이 주군 독점이 웬말이냐 치사하다 비겁하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들고 일어나도, 그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는, 그들 둘이 강동 제일의 미인 자매로 명망 높은 이교(二喬)를 각자 아내로 맞은 지금에 와서도.
동오에서도 손꼽히는 유력자인 토후 교윤(喬潤)이 꽃도 수줍어 고개를 숙이고 달도 부끄러워 얼굴을 돌린다는 아름다운 용모에 재기 풍부하고 시서화에도 능하여 수많은 구혼자들을 애태운 장중보옥의 두 영애─교소엽(喬昭燁)과 교경패(喬瓊牌)를, 명실상부한 강동의 패자로 부상한 손백부와 자타 공인의 오른팔인 주공근의 정처로 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온 것은 넉 달 전이었다.
잔소리 전담 중 누군가 보는 날엔 불을 뿜으며 격노할 칠칠치 못한 폼으로 장의자에 늘어져 발을 까닥이던 손책은 주유가 서신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기세좋게 퉁기듯 일어나 내가 거물 되긴 된 모양이라며 배를 잡고 웃고는, 너무 웃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면서 그대로 진행시키도록 지시했다.
주군이 손일문의 장남 아닌 장녀라는 비밀을 최소한 바늘 하나 찔러박을 틈도 없는 위업을 달성하는 그날까지는 어떻게든 사수하고자 힘을 다 해온 중신들이 기겁하여 말리고 나섰으나, 어차피 기반을 다지기 위해 누군가 유력한 터줏대감을 구워삶아 귀하신 따님을 얻어낼 일로 골치가 지끈거리던 참에 강동 제일 미녀가 둘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고 우겨대는 손책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최후의 희망으로 (강제) 발탁된 주유가 교윤은 그렇다 치고, 그 당사자는 대체 어찌할 거냐고 지적했을 때, 손책은 오래 전 여자 가슴 처음 보냐고 부당하게 친우를 구박하던 그 순간과 한 치 다르지 않은 뻔뻔함으로 명쾌히도 대답했다. 밝혀야지. 당연한 거 아냐. 평생 데리고 살 여자한테 뭔 수로 숨겨. 황당하기 짝이 없는 답변에 아연해진 주유가 말을 잃자, 손책은 자신보다 살짝 높은 위치의 어깨에 손을 퐁 얹고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낄낄대고 웃었다. 유쾌할 때는 항상 그렇듯, 목젖을 가릉가릉 울리는 고양이과의 맹수와도 흡사한 웃음소리였다.
"뭐, 일이 잘못되어서 내가 퇴짜를 맞더라도 넌 보나마나 무사 통과할 텐데 밑져야 본전이라구. 세상 어느 배부른 여자가 감히 주공근의 아내가 되길 거부하겠냐?"
그 말에 발끈하여 반박하려 했지만, 손가락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어깨에 파고들어와 주유는 일순 흠칫했다.
귓전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지근거리에서, 그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혼인, 해 줄 거지? ──날 위해서."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의 양자대면에서, 손책은 정말로 얼굴에 철판 깔고 대교, 즉 소엽에게 당당히도 자신이 여자임을 밝혀버렸다. 정작 주유는 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아내감인 소교─경패와 정원에서 싯귀로 탐색전을 벌이느라 현장에는 없었으나, 교소엽은 반 시진도 채 되기 전에 손책에게 큰 절을 올리며 정처로 삼아주기를 스스로 청하였다고 했다. 어디선가 말이 새어나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분개하는 교윤을 설득하여 항복시킨 사람도 소엽이었다.
가신들 절반이 머리를 싸쥐고 무언가를 포기한 절반이 얼싸 신난다고 북치고 장구치는 가운데 혼인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연회석에서 주유는 또다른 한 쌍에게 때때로 눈길을 던졌다. 손책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가끔씩 무언가의 농담에 숨죽여 웃는 소엽은 꾸밈없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날 이후로도, 그 기묘한 '부부'는 이상하리만치 사이가 좋았다.
틈을 보아 정말로 백부의 정처가 되어 괜찮으시겠느냐 주유가 넌지시 물었을 때 소엽은 단지 조용히 미소했다. 여자고 남자고를 떠나 이 분이야말로 내 운명이라고 직감했으며, 붙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리라 여겼을 뿐이라고 하였다. 본인이 좋다는데 어쩌겠나 싶었다.
진심 어린 축사를 건넨 손권이 잠시 머뭇거리다 흡사 충동적으로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주유의 마음은 평온했다.
"저는 틀림없이 공근 님이.... 죄송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상냥한 성품의 동생은 서둘러 끝을 흐렸지만, 입속으로 삼켜진 나머지 부분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님이 누군가와 혼인한다면 그 상대는 틀림없이 공근 님일 줄로만 알았다고.
교경패. 작고 가냘프고, 화사하면서 부드러운 그의 정처.
세상 모든 남자가 부러워해 마지 않을 아내와의 신혼 생활은 그러나 두 달도 못 가서 삐걱이기 시작했다.
혼인 후 세 번째로 달 보며 밤새 술이나 푸자는 손책의 호출에 응한 날, 경패는 드디어 분통을 터뜨렸다.
── 그 분과는 혼인을 언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모두가 입을 모아 공근 님과 백부 님은 범상치 않은 사이시라 하옵니다.
── 사실이십니까.
── 어째서 아무 말도 해주시지 않으십니까.
── 그렇다면 어이하여 그 분 아닌 저와 혼인하셨는지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호소하는 아내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혼인 언약 운운이라면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단단히 오른 손견이 등짝을 마구 두들기며 자네라면 저 선머슴아를 믿고 맡겨도 좋다고 껄껄 웃은 게 전부였다고. 4년 전, 손책이 드디어 원술의 막하를 벗어나 결사의 장강 도하를 감행하고 몇 번인가의 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린 뒤, 가까스로 짬을 내어 막하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열었던 연회의 밤, 대부분이 녹아떨어지고 더워 죽겠다는 둥 사내놈들의 땀냄새로 질식하겠다는 둥 투덜대는 손책에게 팔꿈치를 잡혀 끌려나온 연못가에서 청혼한 적도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중원에서도 이름 높은 명문 주일문의 당주로써 지금 이상으로 손책의 패업에 공헌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그때, 손책은 아주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스르륵 웃으면서 내뱉었다.
── 주공근, 그렇게 우리 관계에 흙탕물을 끼얹고 싶은 게냐?
필경 평생 잊기 힘들 싸늘한 조소로 야유당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무슨 이유로 흐느끼는 아내를 앞에 두고 단지 침묵을 지켰는지는 주유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성 이전에 단금지교의 친우, 친우 이전에 전생애를 걸어 마땅한 주군.
그에게 손백부는 항상 그런 대상이었다.
누님의 응징에 반항하는 의제(義弟)를 함부로 짓밟기도 질렸는지, 어느 틈엔가 반 강제로 제 무릎을 베개로 내주고 윤기 있는 흑발을 들뜬 손놀림으로 꼬았다 풀었다 갖고 놀기에 열중하는 손책을, 주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머리와 목이 편치 못한 무릎베개는 난생 처음이었지만 굳이 비키고 싶지는 않았다.
형제 자매 8명 중에서 한때 동오 절강미로 손꼽혔던 어머니 오부인을 가장 빼닮은 얼굴은 가까이서 자세히 뜯어보면 놀랍도록 섬세한 조형을 하고 있지만, 결코 미녀로 분류될 성질의 생김새는 아니다. 아직 그들이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어렸을 무렵, 종종 남장 소녀로 오인당한 쪽은 오히려 주유였다. (허리가 끊어져라 폭소하는 손책을 몇 번 걷어찼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로서는 선이 가늘고 여자로서는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외모는 언뜻 악동 티를 덜 벗은 팔팔한 소년을 연상시켰다.
무예를 즐겨 남장을 하고 언니 뒤를 기를 쓰고 따라다녔던 여동생 난향(蘭香)마저 말괄량이 티를 벗고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이, 정작 손책의 체내 시계는 열세 살 어디쯤에서 멎어버린 것 같았다. 키만은 7척 5촌(172.5cm)까지 쑥쑥 자랄 동안 있어야 마땅할 2차 성징은 전부 뒤에 남겨졌다. 마치 성별을 갖기를 육체가 거부하듯 스물 넷이 되도록 끝내 초경조차 맞지 않은 그녀에겐 여성 특유의 곡선미와 부드러움이 극단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불필요한 근육이 전혀 붙지 않은 늘씬하면서 탄탄한 소년 같은 몸은 분명 매력적이다. 매력적이지만 그뿐으로, 결코 어떠한 종류의 욕구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성장을 비켜나가 어른의 욕망에 무관심한 주인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함의를 일절 배제하는 결벽하기까지 한 균형미는 매혹적인 여인을 마주한 남자의 충동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안을 수 있는 여자도 아니거니와 이성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대부분이 아내와 첩을 거느린 무장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이 주군과 침식을 같이 할 권리를 우리에게도 양보하라고 아우성칠 수 있다. 그들이 마음 깊이 경애하는 대상은 손일문의 '장녀'가 아닌 손책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므로. 잘은 알 수 없고 때로 기괴하지만 황홀하게 아름다운 무성(無性)의 생물을 경배하듯 그들은 그녀를 숭배하고 있다. 소엽이 선택의 순간에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단호히 말했던 대로, 손책은 성별 운운 이상의 무엇이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수많은 것을 무슨 수로 평범한 남녀 사이의 틀에 끼워넣겠느냐 대놓고 조소했던 손책이 옳았다. 10여 년 전 연못에 추락했던 그 순간, 아주 잠시 곤혹스러웠던 그날 이후로, 친우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손책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않은 경패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횡포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경패. 좋게 말해 대범하고 솔직히 말해 거칠고 제멋대로이고, 그 기개와 역량이 역발산의 패왕 항우를 빼닮았다 하여 소패왕으로까지 칭해지는 친우와는 정반대의 가냘프고 화사한 여인.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모든 남자들의 이상적인 아내감. 틀림없이 순수히 한 남자로서 정성을 다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녀를 자꾸 소홀히 하게 되는지 그 자신 종종 자괴감에 빠지고는 하지만, 자괴감에 빠질 뿐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외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꼬았다 풀기를 반복하더니 그예 (쓸데없이) 진지하게 남의 머리카락으로 실뜨개를 하고 있는 (실례다) 손책을 저지할 기력도 별반 일지 않아, 주유는 얇은 침의 한 장으로 가로막힌 전혀 부드럽지 못한 무릎베개에 치댄 채로 문득 입을 열었다.
"백부."
"아~? 왜 불러, 공근."
"우린 이제 각자 처를 두었지."
"응."
"그런데 신혼의 아내가 있는 사람을 밤이면 밤마다 자꾸 불러내도 되는 거냐?"
꼬박꼬박 응하는 너는 뭔데, 라고 반박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어째서지? 를 얼굴에 가득 박고 고개를 갸웃거려 주유는 하마터면 탈력할 뻔했다.
"글쎄다.... 진짜 왜냐?"
"....질문한 사람은 나야. 내게 반문해서 어쩌나."
그러게 말야, 하며 냐하핫 웃고는 손책은 태연자약하게 한 문장을 덧붙였고, 순식간에 귀까지 달아오른 주유는 홧김에 친우의 팔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가 당장에 세 배 강도로 걷어차였다.
이성 이전에 단금지교의 친우, 친우 이전에 전생애를 걸어 마땅한 주군.
이성으로 사랑했던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
그러나.
"그럼, 공근에 대한 내 열렬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해 두지."
각자 짝을 찾아간 지금도, 손책은 여전히 때때로 주유를 불러내 같은 침상에서 뒹굴며 천하를 논하고 시시껄렁한 입씨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무릎을 베개로 내주고 윤기 있는 흑발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주유는 가타부타 말없이 그에 응해 탈력하고 곤란해 하고 화내고 일일이 딴지를 걸고 도중에 형편없이 흐트러지는 손책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정돈해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오는 불의의 습격에 당황해서 쩔쩔매고, 그걸로 만족하곤 한다.
어떤 의미이든, 주유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은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손책 하나뿐이다.
연못에서 뭍으로 기어오른 주유는 쿨럭거리며 삼킨 물을 토해냈다. 왠지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액땜이라 어거지로라도 믿고 싶어지는 재액의 연속이더니 결국 마무리는 성대한 추락이었다.
등 뒤에서 거친 욕설과 텀벙거리는 물소리가 요란히 일어, 주유는 누군가에게 저주를 받지 않았나 하는 심각한 의혹을 잠시 접어두고 그를 잡아주려다 사이좋게 떨어진 친우에게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무사해, 백...."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추락의 충격으로 반쯤 찢어지고 물에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옷 밑으로,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나 반 치나마 틀림없이 봉긋하게 솟아 있는 가슴.
찢어진 겉옷을 훌렁 벗어부치고 툴툴대며 물을 짜낸다기보다는 오히려 함부로 쥐어 비틀고 있던, 바로 5분 전까지 같은 성별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친우가 인간의 본능으로 가슴팍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주유를 째려보았다.
"뭐야 공근, 여자 가슴 처음 보냐?"
주유는 졸도하고 싶어졌다.
갑주를 떼어내고 침의 한 장만 두른 무방비한 등은 최전선에서 노련하게 장병을 지휘하는 총대장이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망각할 만큼은 미덥지 못했지만, 아무리 단련해봤자 타고난 골격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빨간 끈으로 대충 틀어올린 연갈색 머리카락 밑으로 드러난 목덜미가 예상 외로 하얗고 가늘었다.
목도를 팔꿈치치기로 부러뜨리고 뇌천 내려찍기로 식인 호랑이를 일격에 침몰시키고 옆구리 힘만으로 거한의 머리를 짓이기는 강동의 소패왕이 실은 한 줌도 안 될 성 싶은 여자였다는 걸 알면 편히 눈을 감지 못할 자들이 수천은 되리라고, 주유는 침상에 걸터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친우 겸 누님 겸 주군의 목덜미에 시선을 못박고 막연히 그런 걸 생각했다.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더니 당돌하게 발이 날아왔다.
거침없는 발길질에 침의 밑으로 드러난 반은 소년 같고 반은 소녀 같은 늘씬한 다리가 조금은, 눈부셔서. 거기에 문득 시선을 빼앗겨 버린 자신에게 한숨을 쏟았더니 이번에는 발꿈치로 찍고 빙글빙글 돌려댄다.
"날씨도 개떡 같은데 이건 또 웬 죽상이냐. 보는 인간 짜증나게스리. 당장 얼굴 못 펴? 아?"
"....백부, 시비는 어지간히 걸고 그 버릇 나쁜 발이나 저리 치워. 나야말로 짜증난다."
"오 공근, 너 진짜로 많─이 컸다? 감히 이 하늘 같은 누님께 개기고, 말야!"
"잠깐, 뭐 하는... 와, 하지 마! 손─백─부─!!"
시시한 주거니받거니도, 가벼운 몸싸움도, 그리고 문득 그녀에게 시선을 앗기는 것도.
늘 있는 일상의 일부분이다.
이 시대, 주군과 침식을 함께 하는 것은 그 신하에게는 무엇보다 큰 영광이자 명예를 뜻한다. 현 손책군에서 그 기쁨은 고스란히 주유의 몫이었다. 철 든 이후로 타인과 같이 자 본 적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주유의 팔을 놓칠세라 꽈악 붙들고 "이거다 싶은 사내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꼬셔라─이거야말로 무가(武家)의 기본이라고" 라 주장하는 손책에게 말려들어가 얼떨결에 같이 침상을 사용한 게 처음 만난 12세 때, 두 해가 지나고 친우의 성별을 안 순간에 뒤로 돌아 미친듯이 내뺐어야 했지만 지금 와서 여자로 대접하면 썰어버리겠다는 손책의 협박(과 치켜든 칼)을 감당치 못하고 꺾인 후로 이럭저럭 10여 년, 이제는 거의 습관에 가까운 행위라 하여도 무방하도록 오랫동안 지속된 일이다. 사적 자리에서 자(字)만으로 부르고 말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주공근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과거 손견 휘하의 사천왕 중에서도 유난히 까탈스런 시어머니격인 정공(정보)을 비롯하여 손책군의 잔소리 전담인 장소와 장굉이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아도, 가신들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돌려돌려 진언을 올려도, 무장들이 주군 독점이 웬말이냐 치사하다 비겁하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들고 일어나도, 그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는, 그들 둘이 강동 제일의 미인 자매로 명망 높은 이교(二喬)를 각자 아내로 맞은 지금에 와서도.
동오에서도 손꼽히는 유력자인 토후 교윤(喬潤)이 꽃도 수줍어 고개를 숙이고 달도 부끄러워 얼굴을 돌린다는 아름다운 용모에 재기 풍부하고 시서화에도 능하여 수많은 구혼자들을 애태운 장중보옥의 두 영애─교소엽(喬昭燁)과 교경패(喬瓊牌)를, 명실상부한 강동의 패자로 부상한 손백부와 자타 공인의 오른팔인 주공근의 정처로 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온 것은 넉 달 전이었다.
잔소리 전담 중 누군가 보는 날엔 불을 뿜으며 격노할 칠칠치 못한 폼으로 장의자에 늘어져 발을 까닥이던 손책은 주유가 서신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기세좋게 퉁기듯 일어나 내가 거물 되긴 된 모양이라며 배를 잡고 웃고는, 너무 웃어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면서 그대로 진행시키도록 지시했다.
주군이 손일문의 장남 아닌 장녀라는 비밀을 최소한 바늘 하나 찔러박을 틈도 없는 위업을 달성하는 그날까지는 어떻게든 사수하고자 힘을 다 해온 중신들이 기겁하여 말리고 나섰으나, 어차피 기반을 다지기 위해 누군가 유력한 터줏대감을 구워삶아 귀하신 따님을 얻어낼 일로 골치가 지끈거리던 참에 강동 제일 미녀가 둘이라니 이게 웬 떡이냐고 우겨대는 손책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최후의 희망으로 (강제) 발탁된 주유가 교윤은 그렇다 치고, 그 당사자는 대체 어찌할 거냐고 지적했을 때, 손책은 오래 전 여자 가슴 처음 보냐고 부당하게 친우를 구박하던 그 순간과 한 치 다르지 않은 뻔뻔함으로 명쾌히도 대답했다. 밝혀야지. 당연한 거 아냐. 평생 데리고 살 여자한테 뭔 수로 숨겨. 황당하기 짝이 없는 답변에 아연해진 주유가 말을 잃자, 손책은 자신보다 살짝 높은 위치의 어깨에 손을 퐁 얹고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낄낄대고 웃었다. 유쾌할 때는 항상 그렇듯, 목젖을 가릉가릉 울리는 고양이과의 맹수와도 흡사한 웃음소리였다.
"뭐, 일이 잘못되어서 내가 퇴짜를 맞더라도 넌 보나마나 무사 통과할 텐데 밑져야 본전이라구. 세상 어느 배부른 여자가 감히 주공근의 아내가 되길 거부하겠냐?"
그 말에 발끈하여 반박하려 했지만, 손가락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어깨에 파고들어와 주유는 일순 흠칫했다.
귓전에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지근거리에서, 그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혼인, 해 줄 거지? ──날 위해서."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 후의 양자대면에서, 손책은 정말로 얼굴에 철판 깔고 대교, 즉 소엽에게 당당히도 자신이 여자임을 밝혀버렸다. 정작 주유는 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의 아내감인 소교─경패와 정원에서 싯귀로 탐색전을 벌이느라 현장에는 없었으나, 교소엽은 반 시진도 채 되기 전에 손책에게 큰 절을 올리며 정처로 삼아주기를 스스로 청하였다고 했다. 어디선가 말이 새어나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고 분개하는 교윤을 설득하여 항복시킨 사람도 소엽이었다.
가신들 절반이 머리를 싸쥐고 무언가를 포기한 절반이 얼싸 신난다고 북치고 장구치는 가운데 혼인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연회석에서 주유는 또다른 한 쌍에게 때때로 눈길을 던졌다. 손책의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가끔씩 무언가의 농담에 숨죽여 웃는 소엽은 꾸밈없이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그날 이후로도, 그 기묘한 '부부'는 이상하리만치 사이가 좋았다.
틈을 보아 정말로 백부의 정처가 되어 괜찮으시겠느냐 주유가 넌지시 물었을 때 소엽은 단지 조용히 미소했다. 여자고 남자고를 떠나 이 분이야말로 내 운명이라고 직감했으며, 붙들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리라 여겼을 뿐이라고 하였다. 본인이 좋다는데 어쩌겠나 싶었다.
진심 어린 축사를 건넨 손권이 잠시 머뭇거리다 흡사 충동적으로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주유의 마음은 평온했다.
"저는 틀림없이 공근 님이.... 죄송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상냥한 성품의 동생은 서둘러 끝을 흐렸지만, 입속으로 삼켜진 나머지 부분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님이 누군가와 혼인한다면 그 상대는 틀림없이 공근 님일 줄로만 알았다고.
교경패. 작고 가냘프고, 화사하면서 부드러운 그의 정처.
세상 모든 남자가 부러워해 마지 않을 아내와의 신혼 생활은 그러나 두 달도 못 가서 삐걱이기 시작했다.
혼인 후 세 번째로 달 보며 밤새 술이나 푸자는 손책의 호출에 응한 날, 경패는 드디어 분통을 터뜨렸다.
── 그 분과는 혼인을 언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모두가 입을 모아 공근 님과 백부 님은 범상치 않은 사이시라 하옵니다.
── 사실이십니까.
── 어째서 아무 말도 해주시지 않으십니까.
── 그렇다면 어이하여 그 분 아닌 저와 혼인하셨는지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호소하는 아내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혼인 언약 운운이라면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단단히 오른 손견이 등짝을 마구 두들기며 자네라면 저 선머슴아를 믿고 맡겨도 좋다고 껄껄 웃은 게 전부였다고. 4년 전, 손책이 드디어 원술의 막하를 벗어나 결사의 장강 도하를 감행하고 몇 번인가의 전투에서 승전고를 울린 뒤, 가까스로 짬을 내어 막하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열었던 연회의 밤, 대부분이 녹아떨어지고 더워 죽겠다는 둥 사내놈들의 땀냄새로 질식하겠다는 둥 투덜대는 손책에게 팔꿈치를 잡혀 끌려나온 연못가에서 청혼한 적도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중원에서도 이름 높은 명문 주일문의 당주로써 지금 이상으로 손책의 패업에 공헌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그때, 손책은 아주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스르륵 웃으면서 내뱉었다.
── 주공근, 그렇게 우리 관계에 흙탕물을 끼얹고 싶은 게냐?
필경 평생 잊기 힘들 싸늘한 조소로 야유당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무슨 이유로 흐느끼는 아내를 앞에 두고 단지 침묵을 지켰는지는 주유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성 이전에 단금지교의 친우, 친우 이전에 전생애를 걸어 마땅한 주군.
그에게 손백부는 항상 그런 대상이었다.
누님의 응징에 반항하는 의제(義弟)를 함부로 짓밟기도 질렸는지, 어느 틈엔가 반 강제로 제 무릎을 베개로 내주고 윤기 있는 흑발을 들뜬 손놀림으로 꼬았다 풀었다 갖고 놀기에 열중하는 손책을, 주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머리와 목이 편치 못한 무릎베개는 난생 처음이었지만 굳이 비키고 싶지는 않았다.
형제 자매 8명 중에서 한때 동오 절강미로 손꼽혔던 어머니 오부인을 가장 빼닮은 얼굴은 가까이서 자세히 뜯어보면 놀랍도록 섬세한 조형을 하고 있지만, 결코 미녀로 분류될 성질의 생김새는 아니다. 아직 그들이 들로 산으로 쏘다니던 어렸을 무렵, 종종 남장 소녀로 오인당한 쪽은 오히려 주유였다. (허리가 끊어져라 폭소하는 손책을 몇 번 걷어찼는지 모를 일이다) 남자로서는 선이 가늘고 여자로서는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외모는 언뜻 악동 티를 덜 벗은 팔팔한 소년을 연상시켰다.
무예를 즐겨 남장을 하고 언니 뒤를 기를 쓰고 따라다녔던 여동생 난향(蘭香)마저 말괄량이 티를 벗고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이, 정작 손책의 체내 시계는 열세 살 어디쯤에서 멎어버린 것 같았다. 키만은 7척 5촌(172.5cm)까지 쑥쑥 자랄 동안 있어야 마땅할 2차 성징은 전부 뒤에 남겨졌다. 마치 성별을 갖기를 육체가 거부하듯 스물 넷이 되도록 끝내 초경조차 맞지 않은 그녀에겐 여성 특유의 곡선미와 부드러움이 극단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불필요한 근육이 전혀 붙지 않은 늘씬하면서 탄탄한 소년 같은 몸은 분명 매력적이다. 매력적이지만 그뿐으로, 결코 어떠한 종류의 욕구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성장을 비켜나가 어른의 욕망에 무관심한 주인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함의를 일절 배제하는 결벽하기까지 한 균형미는 매혹적인 여인을 마주한 남자의 충동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것이다.
그녀는 안을 수 있는 여자도 아니거니와 이성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대부분이 아내와 첩을 거느린 무장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이 주군과 침식을 같이 할 권리를 우리에게도 양보하라고 아우성칠 수 있다. 그들이 마음 깊이 경애하는 대상은 손일문의 '장녀'가 아닌 손책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므로. 잘은 알 수 없고 때로 기괴하지만 황홀하게 아름다운 무성(無性)의 생물을 경배하듯 그들은 그녀를 숭배하고 있다. 소엽이 선택의 순간에 성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단호히 말했던 대로, 손책은 성별 운운 이상의 무엇이었다.
우리 사이에 있는 수많은 것을 무슨 수로 평범한 남녀 사이의 틀에 끼워넣겠느냐 대놓고 조소했던 손책이 옳았다. 10여 년 전 연못에 추락했던 그 순간, 아주 잠시 곤혹스러웠던 그날 이후로, 친우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손책을 가까이서 지켜보지 않은 경패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횡포임을 모르지는 않는다.
경패. 좋게 말해 대범하고 솔직히 말해 거칠고 제멋대로이고, 그 기개와 역량이 역발산의 패왕 항우를 빼닮았다 하여 소패왕으로까지 칭해지는 친우와는 정반대의 가냘프고 화사한 여인.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모든 남자들의 이상적인 아내감. 틀림없이 순수히 한 남자로서 정성을 다해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녀를 자꾸 소홀히 하게 되는지 그 자신 종종 자괴감에 빠지고는 하지만, 자괴감에 빠질 뿐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의외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꼬았다 풀기를 반복하더니 그예 (쓸데없이) 진지하게 남의 머리카락으로 실뜨개를 하고 있는 (실례다) 손책을 저지할 기력도 별반 일지 않아, 주유는 얇은 침의 한 장으로 가로막힌 전혀 부드럽지 못한 무릎베개에 치댄 채로 문득 입을 열었다.
"백부."
"아~? 왜 불러, 공근."
"우린 이제 각자 처를 두었지."
"응."
"그런데 신혼의 아내가 있는 사람을 밤이면 밤마다 자꾸 불러내도 되는 거냐?"
꼬박꼬박 응하는 너는 뭔데, 라고 반박할 줄 알았더니 오히려 어째서지? 를 얼굴에 가득 박고 고개를 갸웃거려 주유는 하마터면 탈력할 뻔했다.
"글쎄다.... 진짜 왜냐?"
"....질문한 사람은 나야. 내게 반문해서 어쩌나."
그러게 말야, 하며 냐하핫 웃고는 손책은 태연자약하게 한 문장을 덧붙였고, 순식간에 귀까지 달아오른 주유는 홧김에 친우의 팔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가 당장에 세 배 강도로 걷어차였다.
이성 이전에 단금지교의 친우, 친우 이전에 전생애를 걸어 마땅한 주군.
이성으로 사랑했던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
그러나.
"그럼, 공근에 대한 내 열렬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해 두지."
각자 짝을 찾아간 지금도, 손책은 여전히 때때로 주유를 불러내 같은 침상에서 뒹굴며 천하를 논하고 시시껄렁한 입씨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무릎을 베개로 내주고 윤기 있는 흑발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주유는 가타부타 말없이 그에 응해 탈력하고 곤란해 하고 화내고 일일이 딴지를 걸고 도중에 형편없이 흐트러지는 손책의 머리카락을 강제로 정돈해 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오는 불의의 습격에 당황해서 쩔쩔매고, 그걸로 만족하곤 한다.
어떤 의미이든, 주유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은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손책 하나뿐이다.
고백합니다. 무지 즐거웠습니다. OTL
실은 처음에 반쯤 썼다가 개그도 시리어스도 아닌 어정쩡한 물건이 되어 (니가 늘 그렇지 뭘...) 홧김에 다 지워버렸음. 써도 써도 당최 끝이 나질 않아 도피하고 싶은 생각도 굴뚝 같았는데 이걸 클리어 못하면 앞으로 죽도 밥도 안 될 성 싶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스토리가 파탄나도 부디 그러려니 해주삼. 수정할 기력 읎따.
주유는 성별을 떠나서 손책이라는 존재 자체에 극도로 집착했을 거라 생각함. 그런 이야길 하고 싶었다.
손책 일이라면 신혼의 아내도 뒷전 집안도 뒷전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 뒷전. 물론 세간의 상식도 뒷전.
내용물이 어쨌건 성인 남녀가 한 침상에 들어가 있으면 세상이 뭐라 생각할지는 안중에도 없음. 바보니까 할 수 없다.
남자 쪽이 좀 더 밝;히고 - 색기도 이쪽이 우월함; - 머리카락 색이 다른 것만 제외하면 남자건 여자건 소패왕에 대한 S의 기본적 이미지는 동일하다. 악동이 그대로 몸만 쑤욱 자란 악마. 눈빛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을 뺨치는 고양이과 맹수. 남자면 나쁜 놈이고 여자면 나쁜 년임.
그럼 굳이 역사를 왜곡해 가며 여자로 만든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마음 속의 쬐끄만 짐승(그 이름은 개연성)이 월월컹컹대고 있으나 닥쳐랏 우민. 성적 접촉의 가능성마저 철저히 배제된 관계는 물론 男男도 좋으나 男女 쪽이 훨씬 위험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래도 똑같은 침상에서 뒹굴 땐 男男보다야 男女가 주위에서 사는 의심이 더 많지 않겠나. (그래! 난 샤토브리앙의 <르네>에 군침 좔좔 흘렸던 년이다! 억압 에로티카 만세!!)
...그냥 베르바라 로망이라고 하지 그래? ;;;
그나저나 한국어에도 綺麗에 대응하는 단어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어휘가 빈약해서 모를 뿐이라면 좀 슬픔; 왜 이 나라엔 변변한 동의어 사전도 없는 거냣!!
혹여 '아름답다'와 '예쁘다'의 중간쯤에 있는 적절한 단어를 아시는 분은 제보 바랍니다. 양쪽 모두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실은 君에 해당하는 2인칭이 더 절실하다;)
덤. 난향(蘭香)은 여러 가지로 초 난감한 순정만화 강동의 새벽(江東の暁)에서 쌔벼온 설정. 오빠와 그 친우의 얼굴에 불 나는 연애질 사이에 끼여 손해보는 전형적 여동생 포지션;의 아가씨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말 꼬랑지에 빨간 끈을 묶어놓으면 '발길질을 하므로 접근하지 마시오 위험' 이라는 의미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