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OY를 사랑한 발레리나에 대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절규.

보거나 혹은 죽거나 | 2006/08/04 12:46

나 그냥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한 마디 좀 해야겠음.

요즘 항간에서 화제인 'B-BOY를 사랑한 발레리나' 말인데, 까놓고 말해서 나는 이 공연이 미치도록 싫다. 브레이크 댄스가 싫다는 얘기 아님. 그렇게 현란하고 즐거운 퍼포먼스도 그리 많지 않다. 내가 혐오하는 건 'B-BOY를 사랑한 발레리나'의 스토리 라인과 썩어빠진 근성이다.

발레리나가 브레이크 댄스의 즐거움을 배워간다기에 내가 기대했던 건 당연히 서로에게 편견을 갖고 있던 브레이크 댄스와 발레가 각자의 장점을 이해하고 화합하는 과정이었다.
화합은 개뿔. 오히려 이 이야기는 브레이크 댄스에 대한 발레의 처절한 패배다.

늘상 하는 얘기지만 진정 비판할 자격이 있는 자는 그 대상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이해하는 자임. (나라고 그걸 잘 실천하고 있느냐 하면 절대 아니지만;) 여기 스태프는 발레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조차도 없음. 조예가 깊다고는 때려죽여도 말할 수 없는 내 눈으로 봐도 발끝만 세우고 있으면 발레 스텝인 줄 아는 티가 풀풀 풍긴다. 그런 주제에 발레를 뭔가 아주 이상한 것으로 만들려 기를 쓰는데 지식이 없다 보니 의도 이상으로 더더욱 엉성하고 조잡하고 기괴할 수밖에 없다. 발레 레슨 신은 보다 보면 그냥 눈 돌리고 나 너 몰라 하고플 지경이며 (세상에 클래식 튀튀 입고 연습하는 발레리나도 있다더냐?) 주인공 발레리나는 제가 발레를 배운 게 몇 년인데 예술적 자부심도 자존심도 없이 브레이크 댄스의 현란함에 홀려 엉성하게 흉내내기에 몰두하는 줏대 없는 기집애고 브레이크 댄서들이 넘쳐흐르는 끼를 주체 못하고 레코드 샵에서 춤을 추면 그건 당연한 거고 발레리나가 클래식을 듣다 열정을 못 이겨 스텝을 밟으면 미친 년이다. 하여간 눈에 뵈는 건 발레와 클래식이라는 물건에 대한 어렴풋한 지레짐작과 막연한 적개심뿐이다. 아니 당신들 정말 발레 한 편이라도 보고 이 짓 하는 거요?

온 몸을 뒤틀어야 하는 브레이크 댄스에 비하면 정적으로 보일지 모르되 발레는 결코 만만한 물건이 아니고 될 수도 없다. 우리 다 잊고 있는데 발레는 한 두 시간 내내 사람 하나 허공에 번쩍번쩍 들어올리고 돌리고 돌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엄청난 근력과 집중력과 지구력을 요구하는 진짜배기 스포츠임. 키 160짜리 발레리나의 찍어차기 일격에 국가대표급 태권도 선수의 빗장뼈가 그냥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거,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쁜 옷 입고 예쁜 척 미소 짓고 그럴 듯한 동작만 취하면 되는 물건이 아니다. 키 160에 42인가가 발레리나의 가장 적정한 체격이란다. 그런 체격으로 두 시간 무대 위에서 버티려면 극한까지 단련이 필요하리란 건 삼척동자도 다 알 일이고 또 동작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눈부시고 예술 되도록 필사적으로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발레는 살아남았다. 수백 년 동안.

한국 브레이크 댄스는 이미 세계 정상급이란다. 우리가 늘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세계 유수 대회란 대회는 전부 석권했고 한국 팀이 출전해 주지 않으면 그 대회는 수준 낮은 놈으로 영영 낙인 찍힌다는 말을 듣고 나 감동까지 먹었다. 어느 틈엔가 세계에서 당당히 존재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나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브레이크 댄스는 그 자체로 훌륭한 하나의 문화다. 쉽게 말해 브레이크 댄스는 브레이크 댄스, 발레는 발레임. 그런데 왜 저 자신에게 자부심을 못 갖고 꼭 애먼 발레, 심지어 잘 알지도 못하는 발레를 끌어들여 박박 까내려야만 하는 거냐? 그거, 미리부터 적개심이나 위기감이나 불안을 느끼고 김칫국부터 마시는 걸 세간에서는 뭐라 하게. 패배견 근성이라고 한다, 패.배.견. 꼬랑지 내린 개 돼서 좋기도 하겠수.

그래서 B-BOY'와 사랑에 빠진' 발레리나가 아니라 B-BOY'를 사랑한' 발레리나. 젠장 재수없어.


덤. 보시겠다는 분들은 말리지 않겠음. 좀 구성이 산만하긴 하지만 브레이크 댄스 자체는 한 번 볼만한 가치가 있다. (B-GIRL들의 동작이 지나치게 단조로운 게 유감.. 이지만 무게중심 상 어쩔 수 없나?) 발레만 안 끌어들였어도... 칫....

덤 2. 여전히 말이 필요 이상으로 과격해지고 있음. 한 30퍼센트쯤 에누리해서 들어주십시오. (꾸벅)

top
Trackback Address :: http://kisara71.cafe24.com/blog/trackback/2314608
수정/삭제 댓글
Cab 2006/08/04 17:29
'발레리나'에 회가 동하여 볼까 하고 있었는데 절대 보면 안 되겠군요;(보다가 무대로 뛰쳐나가 깽판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발레 연습을 두 시간 해도 500칼로리가 채 소모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얘기는 근력 운동이라는 거겠죠. 발레리나로서의 신체적 조건'만'을 충족시키는 게 우주인으로 뽑히는 것과 맞먹게 까다롭다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까내리는지 모르겠네요; 보지 않았으니 욕할 자격도 없긴 합니다만;;;
수정/삭제
KISARA 2006/08/10 12:27
무식하면 죄라는 게 이래서 나오는 말이라니까요. 하지만 발레에 대한 것만 눈 좀 꾹 감아주면 볼 만한 가치는 있습니다. 보시고 나서 저랑 함께 까대어주시기 않으시겠습(후략) (이봐)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