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김에 기냥 6장까지 뚝딱 번역해 부렀다. 내 배째라 정신이야 언제나 건재하심.
쿄고쿠도의 저주 7대분이 반갑지 않으신 분은 무단도용을 삼가 주십시오. 아니 이런 퀄리티의 이런 마이너한 글을 가져갈 사람은 없을라나? ;;;;
제 4장. 원술의 휘하에서(袁術の元で)
어쩐지 지독시리 손책 팬인 손포코 님이 제 3장에서 원술 진영에서의 에피소드를 다루지 않고 넘어갔다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하여간 남의 진영에서 남자 킬러의 본령을 실컷 발휘하고 계시는 소패왕. 그러니까 원술이 선뜻 병사를 반환하지 않는 거닷!!
그나저나 이 장을 번역하느라 이문열의 삼국지를 좀 참조했다가 웃겨서 미치는 줄 알았다.
'원술은 한 번 손책을 보자 몹시 사랑하여 전일 그 아비 손견이 다스리던 곳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좀 오역. 원문에서는 부곡[部曲]을 돌려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부곡은 사설부대지 땅이 아님;)
'마치 사랑스런 자식을 대하듯 하는 태도였다.'
'강(江)・회(淮)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손책을 그 이름보다는 손랑(孫郞)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해 따르고 또 그를 위해 죽는 걸 즐거움으로 여기기까지 하니 멀지 않은 서주의 도겸으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가 원술의 진중에 있었는데, 역시 손책을 기이하게 여겼다. 조정에 표문을 올려 그 재주와 무예를 기리니 천자는 손책을 회의교위(懐義校尉)로 삼았다.'
제, 제발 그만해 문열 아저씨... (폭소)
(이래서 남자가 하는 팬질이 더 무섭다니까 [깔깔깔])
괜히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연의와 기타카타 삼국지와 창천항로에서 손견이 우연히 입수했다가 나중에 손책이 뇌물로 잘 써먹은 전국옥새는 정사에서는 그 존재가 부정되고 있다. 진수는 그냥 씹고 넘어가고(아저씨...OTL) 배송지는 손견과 같이 충의 깊은 인물이 옥새를 가지고 장난질을 쳤을 리가 없다며 이건 누명이라고 주석에서 실컷 툴툴대고 있음(아저씨... [데굴데굴]).
하여간 손견 파파가 설령 입수했다손 치더라도 창천항로에서처럼 표표~하게 주워놓고 과히 신경 안 썼다는 쪽이 훨씬 사실에 가까우리라 생각함. 화웅 토벌의 공로를 잽씨덕 관운장에게 줘 버리는 것도 그렇고, 진짜 너무하다야 연의.
참고로 육강은 바로 훗날의 육손(陸遜)이 되는 육의(陸義)의 숙부이다.
원술군에 과감히 뛰어든 손책은 아니나다를까 비범함을 마음껏 발휘합니다. 원술군의 교유(喬蕤)와 장훈(張勲)에게는 존경을 받고, 원술도 "내게 너 같은 아들이 있다면 지금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 라는 말을 항시 입에 올릴 정도였지요. 그 무렵의 에피소드로, 손책의 수하가 죄를 짓고 원술의 영채로 숨어들었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손책은 주저하지 않고 그 자를 처벌한 후 원술에게 멋대로 군영에 들어간 것을 사죄했습니다. 솔선수범해서 군기를 다잡은 셈입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원술에게 사자로 파견된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는 상소를 올려 손책에게 회의교위(懐義校尉)의 자리를 제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럭저럭해서 원술군 내에서도 손책은 유독 이채를 발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손책을 상대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놈이 챙기는' 원술의 특기가 작렬합니다. 원술은 손책을 구강(九江)태수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 임명된 사람은 진기(陳紀)였습니다. 또한 여강(廬江)태수인 육강(陸康)이 원술의 명을 따르지 않자 (육강은 손일문과 친분이 있었습니다만, 손책에게는 싸늘한 태도를 보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원술은 손책을 파견했지만, 육강을 쓰러뜨리면 여강태수의 지위를 주겠다고 해놓고 막상 손책이 육강을 치자 실제로는 자신의 부하인 유훈(劉勲)을 여강태수로 삼아버립니다.
정말로 쪼잔한 원술입니다(^^;). 손책의 능력을 인정하고, 이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떠들어대면서, 정작 손책이 공을 세우면 아까워져서 제 부하에게 태수의 지위를 주어 버리죠. 손견 때도 그랬지만, 원술은 사람을 쓰는 게 어찌 보면 능란하달까, 치사해요. 좀 더 고찰해보면, 원술은 손책에게 땅을 한 번 주면 명령을 더 이상 듣지 않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손책 입장에서 보자면 이가 갈릴 일이죠. 아무리 공적을 쌓아봤자 결국 기반이 없으면 전부 탈취당하는 게 고작입니다. 이 무렵 손책은 원가의 투쟁에 말려들었을 때의 손견과 비슷한 울적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책은 언제까지고 이런 환경에 만족할 속셈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꽤나 일찍부터 기반을 둔다면 응당 강동(江東)이라 벼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강(長江)을 끼고 있는 강동은 원술의 세력권 밖이었으므로, 강동을 점령한다면 독립은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손책은 강도(江都)에 머무르던 시절에 이미 이것을 꿰뚫어보고 장굉(張紘)과 그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주치(朱治) 역시 강동에 터를 잡아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손책은 강동으로 출병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손책을 상대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놈이 챙기는' 원술의 특기가 작렬합니다. 원술은 손책을 구강(九江)태수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로 임명된 사람은 진기(陳紀)였습니다. 또한 여강(廬江)태수인 육강(陸康)이 원술의 명을 따르지 않자 (육강은 손일문과 친분이 있었습니다만, 손책에게는 싸늘한 태도를 보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원술은 손책을 파견했지만, 육강을 쓰러뜨리면 여강태수의 지위를 주겠다고 해놓고 막상 손책이 육강을 치자 실제로는 자신의 부하인 유훈(劉勲)을 여강태수로 삼아버립니다.
정말로 쪼잔한 원술입니다(^^;). 손책의 능력을 인정하고, 이런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떠들어대면서, 정작 손책이 공을 세우면 아까워져서 제 부하에게 태수의 지위를 주어 버리죠. 손견 때도 그랬지만, 원술은 사람을 쓰는 게 어찌 보면 능란하달까, 치사해요. 좀 더 고찰해보면, 원술은 손책에게 땅을 한 번 주면 명령을 더 이상 듣지 않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손책 입장에서 보자면 이가 갈릴 일이죠. 아무리 공적을 쌓아봤자 결국 기반이 없으면 전부 탈취당하는 게 고작입니다. 이 무렵 손책은 원가의 투쟁에 말려들었을 때의 손견과 비슷한 울적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책은 언제까지고 이런 환경에 만족할 속셈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꽤나 일찍부터 기반을 둔다면 응당 강동(江東)이라 벼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강(長江)을 끼고 있는 강동은 원술의 세력권 밖이었으므로, 강동을 점령한다면 독립은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손책은 강도(江都)에 머무르던 시절에 이미 이것을 꿰뚫어보고 장굉(張紘)과 그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주치(朱治) 역시 강동에 터를 잡아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손책은 강동으로 출병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쩐지 지독시리 손책 팬인 손포코 님이 제 3장에서 원술 진영에서의 에피소드를 다루지 않고 넘어갔다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하여간 남의 진영에서 남자 킬러의 본령을 실컷 발휘하고 계시는 소패왕. 그러니까 원술이 선뜻 병사를 반환하지 않는 거닷!!
그나저나 이 장을 번역하느라 이문열의 삼국지를 좀 참조했다가 웃겨서 미치는 줄 알았다.
'원술은 한 번 손책을 보자 몹시 사랑하여 전일 그 아비 손견이 다스리던 곳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좀 오역. 원문에서는 부곡[部曲]을 돌려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부곡은 사설부대지 땅이 아님;)
'마치 사랑스런 자식을 대하듯 하는 태도였다.'
'강(江)・회(淮)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손책을 그 이름보다는 손랑(孫郞)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한 번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해 따르고 또 그를 위해 죽는 걸 즐거움으로 여기기까지 하니 멀지 않은 서주의 도겸으로서는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태부(太傅) 마일제(馬日磾)가 원술의 진중에 있었는데, 역시 손책을 기이하게 여겼다. 조정에 표문을 올려 그 재주와 무예를 기리니 천자는 손책을 회의교위(懐義校尉)로 삼았다.'
제, 제발 그만해 문열 아저씨... (폭소)
(이래서 남자가 하는 팬질이 더 무섭다니까 [깔깔깔])
괜히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연의와 기타카타 삼국지와 창천항로에서 손견이 우연히 입수했다가 나중에 손책이 뇌물로 잘 써먹은 전국옥새는 정사에서는 그 존재가 부정되고 있다. 진수는 그냥 씹고 넘어가고(아저씨...OTL) 배송지는 손견과 같이 충의 깊은 인물이 옥새를 가지고 장난질을 쳤을 리가 없다며 이건 누명이라고 주석에서 실컷 툴툴대고 있음(아저씨... [데굴데굴]).
하여간 손견 파파가 설령 입수했다손 치더라도 창천항로에서처럼 표표~하게 주워놓고 과히 신경 안 썼다는 쪽이 훨씬 사실에 가까우리라 생각함. 화웅 토벌의 공로를 잽씨덕 관운장에게 줘 버리는 것도 그렇고, 진짜 너무하다야 연의.
참고로 육강은 바로 훗날의 육손(陸遜)이 되는 육의(陸義)의 숙부이다.
제 5장. 양주의 정세(揚州の情勢)
저렇게 나름대로 잘 나가던 친구들이었건만 어디서 이제 겨우 스물 된 새파란 애기 하나가 밀고 들어와 질풍노도 욱일승천의 기세로 깽판을 놓더니 4년만에 몽땅 깔고 앉아 버렸다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함. 당신들이 못난 게 아니에요, 손백부가 너무 잘났던 거지...!
(그 말이 하고 싶었냐 S!!)
손책의 강동제압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당시의 양주(揚州) 일대의 정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뭉뚱그려 양주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이게 보통 넓은 것이 아닙니다. 지도를 참조해 주십시오. 일본 전토를 다 합쳐도 양주 하나에 미치지 못할 정도의 크기입니다. 한왕조 당시부터 양주는 일단 중국에 속하기는 했지만, 한왕조의 위엄은 장강(長江) 너머에까지는 충분히 미치지 못했습니다. 장강의 이남에서는 한왕조와 반목하는 산월(山越)이라 불리는 민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산월이 단일민족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한왕조에 복속하지 않은 자들의 통칭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위서(魏書)는 손권군조차 도적 취급을 하고 있었으므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복종하지 않는 백성은 모조리 싸잡아 산월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상이야 어찌 됐건 산월은 양주와 형주(荊州) 남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며,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정해놓고 난을 일으켰지요. 몇 번을 진압해도 또 어디선가 다시 기어나와(...) 다시금 반란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해, 양주라는 명칭으로 묶어놓기는 하였으되, 장강 이북과 장강 이남은 별도의 세력권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한왕조의 권위 하에 있었던 장강 이북과 야만족의 이남. 따라서 한왕조 시대에 양주의 주도(州都)는 장강 이북의 수춘(寿春)일 수밖에 없었죠. 손책이 원술의 밑에 있었던 194년 경 장강 이북은 완전히 원술의 세력권으로, 손책이 파고들 틈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 장강 이남의 정세는 어떠했느냐 하면.
우선 양주자사(揚州刺史)로서 부임한 유요(劉繇)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도인 수춘에는 원술이 죽치고 있었던 까닭에, 유요는 장강 이남의 곡아(曲阿)에서 지배를 획책합니다. 연의에서 유요는 손책에게 줄창 당하고만 있으나, 유요전을 살펴보면 도저히 무능한 인물로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19세 때에 도적에게 사로잡힌 숙부 유위(劉偉)를 구출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고, 제남(済南)에서 행정관으로 봉직할 무렵에 뇌물을 밝히는 상관을 파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유요의 백부인 유총(劉寵)은 양주의 회계군(会稽郡)에서 태수직을 맡아 청렴결백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유요는 아주 기반이 없는 토지에서 용을 쓰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요. 유요는 원술의 장강 이남 공략전의 최전선으로 부임해 있었던 단양(丹陽)태수 오경(呉景)과 그 도위(都尉 : 방위군 대장) 손분(孫賁)과 대치하여, 부하 장영(張英)과 번능(樊能)을 파견,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원술이 유요를 꺾지 못하고 꾸물대는 사이, 유요는 양주목(揚州牧)과 진무장군(振武将軍)의 지위를 더하고 그 군세는 이미 만을 훌쩍 넘게 되었습니다. 손책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유요의 양주 지배 계획은 순조로웠던 셈입니다.
이밖에도, 위에서 쓴 바와 같이 장강 이남에서는 한왕조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반란세력이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손책이 강동으로 향했을 무렵에는 오군(呉郡)에서 엄백호(厳白虎), 단양 부근에서 조랑(祖郎) 등의 반란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손책은 단양에서 모병한 수백의 병사를 조랑의 습격으로 잃은 적이 있어, 수백 명 정도로는 제아무리 손책이 지휘한다 한들 대항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밖에도 회계에는 태수 왕랑(王朗)이, 오군에는 허공(許貢)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더욱 이남에는 컬트 종교 세력과 산월족이 당당히 활보하는 무법 지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지요.
뭉뚱그려 양주라고 부르고는 있지만 이게 보통 넓은 것이 아닙니다. 지도를 참조해 주십시오. 일본 전토를 다 합쳐도 양주 하나에 미치지 못할 정도의 크기입니다. 한왕조 당시부터 양주는 일단 중국에 속하기는 했지만, 한왕조의 위엄은 장강(長江) 너머에까지는 충분히 미치지 못했습니다. 장강의 이남에서는 한왕조와 반목하는 산월(山越)이라 불리는 민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산월이 단일민족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한왕조에 복속하지 않은 자들의 통칭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위서(魏書)는 손권군조차 도적 취급을 하고 있었으므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복종하지 않는 백성은 모조리 싸잡아 산월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상이야 어찌 됐건 산월은 양주와 형주(荊州) 남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며, 세상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정해놓고 난을 일으켰지요. 몇 번을 진압해도 또 어디선가 다시 기어나와(...) 다시금 반란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해, 양주라는 명칭으로 묶어놓기는 하였으되, 장강 이북과 장강 이남은 별도의 세력권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한왕조의 권위 하에 있었던 장강 이북과 야만족의 이남. 따라서 한왕조 시대에 양주의 주도(州都)는 장강 이북의 수춘(寿春)일 수밖에 없었죠. 손책이 원술의 밑에 있었던 194년 경 장강 이북은 완전히 원술의 세력권으로, 손책이 파고들 틈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 장강 이남의 정세는 어떠했느냐 하면.
우선 양주자사(揚州刺史)로서 부임한 유요(劉繇)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도인 수춘에는 원술이 죽치고 있었던 까닭에, 유요는 장강 이남의 곡아(曲阿)에서 지배를 획책합니다. 연의에서 유요는 손책에게 줄창 당하고만 있으나, 유요전을 살펴보면 도저히 무능한 인물로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19세 때에 도적에게 사로잡힌 숙부 유위(劉偉)를 구출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고, 제남(済南)에서 행정관으로 봉직할 무렵에 뇌물을 밝히는 상관을 파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유요의 백부인 유총(劉寵)은 양주의 회계군(会稽郡)에서 태수직을 맡아 청렴결백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유요는 아주 기반이 없는 토지에서 용을 쓰고 있던 것도 아니었지요. 유요는 원술의 장강 이남 공략전의 최전선으로 부임해 있었던 단양(丹陽)태수 오경(呉景)과 그 도위(都尉 : 방위군 대장) 손분(孫賁)과 대치하여, 부하 장영(張英)과 번능(樊能)을 파견,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원술이 유요를 꺾지 못하고 꾸물대는 사이, 유요는 양주목(揚州牧)과 진무장군(振武将軍)의 지위를 더하고 그 군세는 이미 만을 훌쩍 넘게 되었습니다. 손책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유요의 양주 지배 계획은 순조로웠던 셈입니다.
이밖에도, 위에서 쓴 바와 같이 장강 이남에서는 한왕조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반란세력이 힘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손책이 강동으로 향했을 무렵에는 오군(呉郡)에서 엄백호(厳白虎), 단양 부근에서 조랑(祖郎) 등의 반란세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손책은 단양에서 모병한 수백의 병사를 조랑의 습격으로 잃은 적이 있어, 수백 명 정도로는 제아무리 손책이 지휘한다 한들 대항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밖에도 회계에는 태수 왕랑(王朗)이, 오군에는 허공(許貢)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더욱 이남에는 컬트 종교 세력과 산월족이 당당히 활보하는 무법 지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지요.
저렇게 나름대로 잘 나가던 친구들이었건만 어디서 이제 겨우 스물 된 새파란 애기 하나가 밀고 들어와 질풍노도 욱일승천의 기세로 깽판을 놓더니 4년만에 몽땅 깔고 앉아 버렸다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함. 당신들이 못난 게 아니에요, 손백부가 너무 잘났던 거지...!
(그 말이 하고 싶었냐 S!!)
제 6장. 새로운 인재(新しい人材)
그렇다. 주유의 천거를 받아서야 장소와 장굉을 확보하는 연의는 순 거짓부렁이다! 주유와 재회하기 이전부터 장굉도 장소도 다 손책 거였다구!! (분개하는 S) 특히 장굉은 유비의 삼고초려 뺨치는 다섯 번의 질기디 질긴 방문에 나키오토시(...)까지 총동원해서 진작부터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놨었단 말이다. 손책이 강동을 떠돌아다닐 때 모친과 동생들을 보호해 준 게 누구였는데! 캬악!!
....손오에 조금도 상냥하지 못한 팬픽션 연의에 화내도 소용없긴 하지만... (웃음)
뭐 하여간 여전히 소패왕은 사람 후리기에 정신이 없으심. 이젠 뭐라 할 말도 없슈.
그나저나 모종의 이유에 의하여 이젠 능조라는 이름만 봐도 폭소가 터지려 함. 왜 폭소가 터지려 하는지는 다른 포스팅에서. (무덤을 파라 파!!)
참고로 능조는 능통(凌統)의 아빠다. 연의에선 감녕(甘寧)에게 살해당한 걸로 설정되어 있는 그 사람.
수춘(寿春)에서 강동제압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가면서 손책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군을 이끌 무장과 군을 기능시키기 위한 군사 및 참모의 확보였습니다.
그 무렵, 도겸(陶謙)의 손에 아버지 조숭(曹嵩)을 잃은 조조가 분노에 몸을 떨며 무서운 기세로 서주(徐州)에 침공, 서주는 유례가 없는 혼돈과 학살의 현장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수의 사인(士人)과 민중이 장강 이남의 양주(揚州)로 피난을 와 있었는데, 그중에 손책이 강도(江都)에서 자기 사람으로 만든 장굉(張紘)과 도겸의 천거를 거부하고 연금되어 있었던 장소(張昭)라는 당대의 명사들도 끼여 있었죠.
장굉은 광릉(広陵) 출신으로, 하진(何進), 주준(朱儁), 순상(荀爽) 등 당대 최고위의 인물들로부터 여러 번 천거를 받았지만 남김없이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약관 20세의 손책을 무척이나 아껴, 손책이 강도에 머무르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후 서주의 난을 피하여 강동으로 건너왔을 때 정식으로 손책군에 합류합니다. 장굉은 손책의 상담역, 후방지원역, 그리고 박학다식함과 문재를 살린 외교관역을 주로 맡았지요. 손책에게 부친 손견을 그대로 빼닮은 단점이 있다는 건 유명한 사실. 본인이 선두에 서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겁니다(^^;). 뭐 팬의 입장에서는 그게 멋지니까 좋긴 한데, 군주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이죠. 장굉은 손책에게 종종 "지휘관은 전군의 생명선. 가벼운 마음으로 전선에 나갔다가 존부(尊父)의 전철을 밟으시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주군을 의지하는 자들을 생각하시어 자중하십시오." 라고 진언하고 있습니다. 맞다 맞다 장굉, 더 말해줘라! 그야 직접 선두에서 날뛰는 손책이 근사하긴 하지만요. ^^;
장소는 팽성(彭城) 출신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어, 도겸에게 복속을 요구받았지만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야인(野人) 도겸의 미움을 사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지만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직후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여, 양주로 피한 터에 손책을 만나 그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장소의 역할은 상담역 겸 후방지원역. 문재에서는 장굉보다 한 수 아래였다는 모양입니다. 손책은 행군 시에는 반드시 장굉 아니면 장소 중 한 명을 동반하고, 나머지 한 명에게는 후방 물자지원을 맡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손책군을 그늘에서 지탱한 명참모였습니다. 장소전을 살펴보면 손책과 장소에 얽힌 미소가 절로 감돌만한 일화가 남아 있지요. 장소가 손책에게 종군한 이후, 장소에게 오는 편지라고는 하나같이 당신 참 대단해요, 아직 새파란 손책이 공적을 세우도록 이끌고 있는 건 모두 당신의 힘이에요, 라는 둥 당신의 재능은 뛰어나요, 앞으로는 더욱 높은 사람이 되겠지요, 라는 둥, 장소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 내용뿐이었다고 합니다. 장소는 이 편지를 손책에게 숨기면 왠지 타국의 인물과 밀통하는 것 같아 모양이 좋지 않고, 그렇다고 보여주면 제 자랑을 하는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처분에 고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우연히 전해들은 손책은 크게 웃고 "어찌하여 작은 일에 급급하시오. 내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쓰겠소이까" 라 말하고, 그걸로 끝이었다고 합니다(대폭소). 훗날 손권과 평생 어린애처럼 투닥투닥 치고받고 줄창 싸움만 한 것도 그렇고, 장소는 정말이지 인간 냄새가 물씬한 사람입니다.
한편 손책은 장소와 장굉뿐만이 아니라, 군을 이끌 새로운 무장의 발굴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장흠(蒋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능조(凌操)를 비롯하여 무용이 뛰어난 인물들을 수하로 얻은 것도 이 무렵.
장흠은 수춘(寿春), 주태는 구강(九江) 출신으로, 이 두 사람은 손책군 내에서 손책의 눈에 들어 한동안 시종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책은 강동제압전을 위해 거병했을 때 이들에게 별동대 대장을 맡깁니다.
진무는 여강(廬江) 출신. 수춘에서 손책을 알현하고 휘하에 복속했습니다. 신장 185센티미터의 거구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키 185cm는 흔해빠졌지만 당시 185cm라면 지금으로선 2미터 정도의 감각이 아닐까요? 진무 역시 별동대 대장에 임명됩니다.
능조는 오군(呉郡) 출신. 대담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아, 항상 선진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역시 아마도 손책이 발굴한 인재겠지요.
손책은 자군 내에서 쓸만한 인재를 신중하게 선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잔다리를 밟아 올라온 무장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손책이 가문이나 출신에는 전혀 상관없이 재능이 있는 자라면 무조건 등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새로운 인재와 더불어, 고참 무장 정보(程普), 황개(黄蓋), 한당(韓当)에 군의 지휘부터 후방지원까지 뭐든지 맡겨만 주십시오의 주치(朱治)와 여범(呂範). 그리고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손책을 따른 손하(孫河).
비록 적은 수이긴 하되, 손책군의 진용은 그야말로 소수정예였습니다.
그 무렵, 도겸(陶謙)의 손에 아버지 조숭(曹嵩)을 잃은 조조가 분노에 몸을 떨며 무서운 기세로 서주(徐州)에 침공, 서주는 유례가 없는 혼돈과 학살의 현장으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많은 수의 사인(士人)과 민중이 장강 이남의 양주(揚州)로 피난을 와 있었는데, 그중에 손책이 강도(江都)에서 자기 사람으로 만든 장굉(張紘)과 도겸의 천거를 거부하고 연금되어 있었던 장소(張昭)라는 당대의 명사들도 끼여 있었죠.
장굉은 광릉(広陵) 출신으로, 하진(何進), 주준(朱儁), 순상(荀爽) 등 당대 최고위의 인물들로부터 여러 번 천거를 받았지만 남김없이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약관 20세의 손책을 무척이나 아껴, 손책이 강도에 머무르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후 서주의 난을 피하여 강동으로 건너왔을 때 정식으로 손책군에 합류합니다. 장굉은 손책의 상담역, 후방지원역, 그리고 박학다식함과 문재를 살린 외교관역을 주로 맡았지요. 손책에게 부친 손견을 그대로 빼닮은 단점이 있다는 건 유명한 사실. 본인이 선두에 서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겁니다(^^;). 뭐 팬의 입장에서는 그게 멋지니까 좋긴 한데, 군주로서는 치명적인 결점이죠. 장굉은 손책에게 종종 "지휘관은 전군의 생명선. 가벼운 마음으로 전선에 나갔다가 존부(尊父)의 전철을 밟으시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주군을 의지하는 자들을 생각하시어 자중하십시오." 라고 진언하고 있습니다. 맞다 맞다 장굉, 더 말해줘라! 그야 직접 선두에서 날뛰는 손책이 근사하긴 하지만요. ^^;
장소는 팽성(彭城) 출신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얻어, 도겸에게 복속을 요구받았지만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야인(野人) 도겸의 미움을 사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지만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직후 조조가 서주를 침공하여, 양주로 피한 터에 손책을 만나 그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장소의 역할은 상담역 겸 후방지원역. 문재에서는 장굉보다 한 수 아래였다는 모양입니다. 손책은 행군 시에는 반드시 장굉 아니면 장소 중 한 명을 동반하고, 나머지 한 명에게는 후방 물자지원을 맡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손책군을 그늘에서 지탱한 명참모였습니다. 장소전을 살펴보면 손책과 장소에 얽힌 미소가 절로 감돌만한 일화가 남아 있지요. 장소가 손책에게 종군한 이후, 장소에게 오는 편지라고는 하나같이 당신 참 대단해요, 아직 새파란 손책이 공적을 세우도록 이끌고 있는 건 모두 당신의 힘이에요, 라는 둥 당신의 재능은 뛰어나요, 앞으로는 더욱 높은 사람이 되겠지요, 라는 둥, 장소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 내용뿐이었다고 합니다. 장소는 이 편지를 손책에게 숨기면 왠지 타국의 인물과 밀통하는 것 같아 모양이 좋지 않고, 그렇다고 보여주면 제 자랑을 하는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처분에 고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우연히 전해들은 손책은 크게 웃고 "어찌하여 작은 일에 급급하시오. 내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신경을 쓰겠소이까" 라 말하고, 그걸로 끝이었다고 합니다(대폭소). 훗날 손권과 평생 어린애처럼 투닥투닥 치고받고 줄창 싸움만 한 것도 그렇고, 장소는 정말이지 인간 냄새가 물씬한 사람입니다.
한편 손책은 장소와 장굉뿐만이 아니라, 군을 이끌 새로운 무장의 발굴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장흠(蒋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능조(凌操)를 비롯하여 무용이 뛰어난 인물들을 수하로 얻은 것도 이 무렵.
장흠은 수춘(寿春), 주태는 구강(九江) 출신으로, 이 두 사람은 손책군 내에서 손책의 눈에 들어 한동안 시종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손책은 강동제압전을 위해 거병했을 때 이들에게 별동대 대장을 맡깁니다.
진무는 여강(廬江) 출신. 수춘에서 손책을 알현하고 휘하에 복속했습니다. 신장 185센티미터의 거구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키 185cm는 흔해빠졌지만 당시 185cm라면 지금으로선 2미터 정도의 감각이 아닐까요? 진무 역시 별동대 대장에 임명됩니다.
능조는 오군(呉郡) 출신. 대담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아, 항상 선진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역시 아마도 손책이 발굴한 인재겠지요.
손책은 자군 내에서 쓸만한 인재를 신중하게 선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잔다리를 밟아 올라온 무장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손책이 가문이나 출신에는 전혀 상관없이 재능이 있는 자라면 무조건 등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새로운 인재와 더불어, 고참 무장 정보(程普), 황개(黄蓋), 한당(韓当)에 군의 지휘부터 후방지원까지 뭐든지 맡겨만 주십시오의 주치(朱治)와 여범(呂範). 그리고 일족 중에서 유일하게 손책을 따른 손하(孫河).
비록 적은 수이긴 하되, 손책군의 진용은 그야말로 소수정예였습니다.
그렇다. 주유의 천거를 받아서야 장소와 장굉을 확보하는 연의는 순 거짓부렁이다! 주유와 재회하기 이전부터 장굉도 장소도 다 손책 거였다구!! (분개하는 S) 특히 장굉은 유비의 삼고초려 뺨치는 다섯 번의 질기디 질긴 방문에 나키오토시(...)까지 총동원해서 진작부터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놨었단 말이다. 손책이 강동을 떠돌아다닐 때 모친과 동생들을 보호해 준 게 누구였는데! 캬악!!
....손오에 조금도 상냥하지 못한 팬픽션 연의에 화내도 소용없긴 하지만... (웃음)
뭐 하여간 여전히 소패왕은 사람 후리기에 정신이 없으심. 이젠 뭐라 할 말도 없슈.
그나저나 모종의 이유에 의하여 이젠 능조라는 이름만 봐도 폭소가 터지려 함. 왜 폭소가 터지려 하는지는 다른 포스팅에서. (무덤을 파라 파!!)
참고로 능조는 능통(凌統)의 아빠다. 연의에선 감녕(甘寧)에게 살해당한 걸로 설정되어 있는 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