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 Part 5, 제 11장까지 진행된 손책전 해설. 소패왕은 진격, 진격 그리고 또 진격하고 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쿄고쿠도의 저주 7대 분이 달가우신 분만 무단으로 도용하셔도 좋음. 어차피 가져갈 사람도 없겠지만 이게 바로 노파심. 와하하하하하하하하.
그나저나 슬슬 1만 히트(!!)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 기적 같은 일을 기념해서 리퀘라도 받아볼까. (또 무덤 파고 있음;)
제 9장. 손책 사망?(孫策死す?)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다는 건 이런 상황.
손책은 우저(牛渚)의 요새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장강(長江)을 따라 북동쪽으로 내려가면 바로 설례(薛礼)와 작융(笮融)이 버티고 있는 말릉성(秣陵城)이 있었습니다. 설례는 본디 팽성현(彭城県)의 상(相 : 지사知事)이었으나, 도겸(陶謙)을 피해 유요(劉繇)를 의탁하여 말릉에 와 있었지요. 작융은 도겸 밑에서 물자운송 감독관으로 일했던 사람인데, 물자를 착복하여 재력을 불려서는 불교 사원을 건립했습니다. 사원의 불상은 황금칠을 하고 비단을 둘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융은 매우 급진적인 불교 신자로, 서주(徐州)에서 불교를 열성껏 전파하여, 휘하의 신자는 1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무렵 조조가 노도의 기세로 서주를 휩쓸었으므로, 신자 1만을 이끌고 남쪽의 광릉(広陵)으로 도주하였습니다. 광릉은 매우 풍요로운 토지였기 때문에, 그에 눈독을 들인 작융은 광릉태수 조욱(趙彧)을 살해하고 광릉을 약탈한 후 말릉의 설례와 합류해 유요를 맹주로 삼았습니다. 전기를 보면 설례는 그렇다 쳐도, 작융은 여간내기가 아니었지요. 아마도 작융의 군대는 대부분이 불교 신자였을 겁니다. 더구나 불교에는 충실하지만 그를 위해선 약탈과 살인도 불사한다는 점에서, 일부의 사교를 연상시키는 행동마저 취하고 있어, 작융은 유요를 따랐다기보다도, 이용 가능한 건 전부 이용해 보자는 속셈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실제로도 작융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유요의 명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설례는 먼저 손책의 상대로 작융을 내보내고, 스스로는 말릉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말릉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한 작융은 손책군과 격돌하지만, 손책군은 초반 접전에서 순식간에 적의 선봉을 대파해 버렸습니다. 군사 전문가가 줄줄이 모여 있는 손책군과, 불교라는 끈으로 묶여 있을 뿐인 일반인의 차이는 확연했습니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작융은 진영에 틀어박혀 수비를 굳게 하고 전혀 출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통 골치아픈 일이 아닙니다. 본디 하나의 종교 아래 묶인 군대는 위기가 닥쳐오면 광신이라는 형태로 폭발할 가능성도 높고, 수가 많은 작융군이 수비를 굳히고 있는 진영에 돌입하면 설령 이긴다 해도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될 터였습니다. 더구나 전황도 그다지 낙관할 수 있는 사태는 아니었지요. 횡강진(横江津)・당리구(当利口)의 전투에서 패배한 번능(樊能)・우미(于糜)가 군을 재편성하여, 다시금 우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대로 작융과 눈싸움을 계속하고 있다가는 번능・우미군과 설례・작융군에게 동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책은 적이 합류하기 전에 군을 급행시켜 각개격파하는 전법을 동원합니다. 수비에만 치중하고 있는 작융은 그대로 방치하고, 먼저 말릉의 설례부터 급습한 것입니다. 설례는 손책이 남쪽에서 작융과 대치 중이리라고만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지, 손책군의 급습을 받은 말릉성은 어렵잖게 함락되었고 설례는 성에서 달아났습니다. 손책군은 말릉성을 손에 넣기가 무섭게 말머리를 되돌려 막 우저를 함락시킨 번능・우미군과 격돌, 이 전투에서 무려 1만 이상의 적을 포로로 삼는 전과를 올립니다. 아무리 손책군이 정예라고는 하지만 이건 도저히 제대로 싸운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적이 임전 태세를 갖추기 전에 손책군이 기습을 가했다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겠지요.
(주) 강동제압전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작융이 말릉성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유격군(遊撃軍)이 된 것을 보면, 밖에서 작융이 손책의 발을 묶어놓은 사이 설례가 성을 나와 협공하거나, 혹은 번능・우미군의 도착을 기다려 일제공격을 가하자는 전술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는 일마다 역을 찔린 걸까요? 우선은 첩보력의 현저한 차이를 들 수 있겠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일제공격 혹은 협공의 계책은 기본적으로 대기 전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군이 유리한 체제를 갖출 때까지 기다리는 작전이므로, 그만큼 손책에게 움직일 시간을 주고 말았던 거죠. 손책은 귀중한 시간차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애초에 설례와 작융이 군을 나눌 필요도 없었던 겁니다. 다만 여기에 관해선, 설례와 작융 사이에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손책군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실로 화려한 각개격파 전법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감이 없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비참한 결과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각개격파 전법을 후방 지원한 것은 역시 정보전이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어째서 번능・우미군은 손책이 싸우고 있었던 말릉이 아닌 우저를 공략한 걸까요? 말릉에서 3군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면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래도 번능・우미군은 정보와 전장에서의 자유재량권이 심하게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번능과 우미는 이미 당리구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투항병과 함께 우저 요새에 감금되어 있었으리란 겁니다. (오경전呉景伝에 그를 암시하는 듯한 기술이 있습니다) 혹은, 설령 포로는 되지 않았어도 군의 거의 대부분을 잃어, 사로잡힌 아군과 연락을 취하여 우저를 탈환하는 도리밖에 달리 방법이 전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번능과 우미는 그저 반란을 일으켰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타이밍이 나빠 이미 설례와 작융은 패배했고, 투항하여 이미 병기도 몰수당한 그들은 말머리를 돌린 손책군에게 일방적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그렇다면 수급 일만 이상이라는 상식 이상의 전과도 납득이 가능합니다.
남은 것은 거북이처럼 진영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작융군뿐이었습니다. 손책은 우저에서 장강을 따라 이동하여 작융을 공격, 진영까지 돌입합니다. 그러나... 도중 손책군은 느닷없이 퇴각을 개시하여 우저로 회군하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작융은 기이하게 여겨 세작(細作)을 파견했다가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손책이 전투 도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례는 먼저 손책의 상대로 작융을 내보내고, 스스로는 말릉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말릉의 남쪽에 진영을 설치한 작융은 손책군과 격돌하지만, 손책군은 초반 접전에서 순식간에 적의 선봉을 대파해 버렸습니다. 군사 전문가가 줄줄이 모여 있는 손책군과, 불교라는 끈으로 묶여 있을 뿐인 일반인의 차이는 확연했습니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작융은 진영에 틀어박혀 수비를 굳게 하고 전혀 출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통 골치아픈 일이 아닙니다. 본디 하나의 종교 아래 묶인 군대는 위기가 닥쳐오면 광신이라는 형태로 폭발할 가능성도 높고, 수가 많은 작융군이 수비를 굳히고 있는 진영에 돌입하면 설령 이긴다 해도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될 터였습니다. 더구나 전황도 그다지 낙관할 수 있는 사태는 아니었지요. 횡강진(横江津)・당리구(当利口)의 전투에서 패배한 번능(樊能)・우미(于糜)가 군을 재편성하여, 다시금 우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대로 작융과 눈싸움을 계속하고 있다가는 번능・우미군과 설례・작융군에게 동서 양쪽에서 협공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책은 적이 합류하기 전에 군을 급행시켜 각개격파하는 전법을 동원합니다. 수비에만 치중하고 있는 작융은 그대로 방치하고, 먼저 말릉의 설례부터 급습한 것입니다. 설례는 손책이 남쪽에서 작융과 대치 중이리라고만 믿고 안심하고 있었던지, 손책군의 급습을 받은 말릉성은 어렵잖게 함락되었고 설례는 성에서 달아났습니다. 손책군은 말릉성을 손에 넣기가 무섭게 말머리를 되돌려 막 우저를 함락시킨 번능・우미군과 격돌, 이 전투에서 무려 1만 이상의 적을 포로로 삼는 전과를 올립니다. 아무리 손책군이 정예라고는 하지만 이건 도저히 제대로 싸운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적이 임전 태세를 갖추기 전에 손책군이 기습을 가했다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겠지요.
(주) 강동제압전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작융이 말릉성에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유격군(遊撃軍)이 된 것을 보면, 밖에서 작융이 손책의 발을 묶어놓은 사이 설례가 성을 나와 협공하거나, 혹은 번능・우미군의 도착을 기다려 일제공격을 가하자는 전술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는 일마다 역을 찔린 걸까요? 우선은 첩보력의 현저한 차이를 들 수 있겠죠. 그리고 또 하나는, 일제공격 혹은 협공의 계책은 기본적으로 대기 전법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군이 유리한 체제를 갖출 때까지 기다리는 작전이므로, 그만큼 손책에게 움직일 시간을 주고 말았던 거죠. 손책은 귀중한 시간차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애초에 설례와 작융이 군을 나눌 필요도 없었던 겁니다. 다만 여기에 관해선, 설례와 작융 사이에 어떠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손책군으로 시선을 돌려봅시다. 실로 화려한 각개격파 전법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감이 없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비참한 결과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각개격파 전법을 후방 지원한 것은 역시 정보전이었지요.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어째서 번능・우미군은 손책이 싸우고 있었던 말릉이 아닌 우저를 공략한 걸까요? 말릉에서 3군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면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래도 번능・우미군은 정보와 전장에서의 자유재량권이 심하게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번능과 우미는 이미 당리구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투항병과 함께 우저 요새에 감금되어 있었으리란 겁니다. (오경전呉景伝에 그를 암시하는 듯한 기술이 있습니다) 혹은, 설령 포로는 되지 않았어도 군의 거의 대부분을 잃어, 사로잡힌 아군과 연락을 취하여 우저를 탈환하는 도리밖에 달리 방법이 전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번능과 우미는 그저 반란을 일으켰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타이밍이 나빠 이미 설례와 작융은 패배했고, 투항하여 이미 병기도 몰수당한 그들은 말머리를 돌린 손책군에게 일방적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그렇다면 수급 일만 이상이라는 상식 이상의 전과도 납득이 가능합니다.
남은 것은 거북이처럼 진영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않는 작융군뿐이었습니다. 손책은 우저에서 장강을 따라 이동하여 작융을 공격, 진영까지 돌입합니다. 그러나... 도중 손책군은 느닷없이 퇴각을 개시하여 우저로 회군하였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작융은 기이하게 여겨 세작(細作)을 파견했다가 놀라운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손책이 전투 도중에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다는 건 이런 상황.
제 10장. 쾌진격(快進撃)
중태도 아니고 사망이다, 사.망. 생사를 오락가락한다는 소문 정도로도 충분했을 텐데 아주 쌈빡하게 사망임. 평생 크고 작은 전투를 무수히 벌이며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신 조조 님마저도 - 내 기억이 맞다면 - 죽은 시늉 하셨던 적은 없는 줄로 아는데 말이지.
자기 자신의 목숨조차 주저없이 한 개 장기말로 써먹는 저 담대함이랄지 냉철함, 아니 오히려 지독한 무모함에서 S가 연상한 것은 <매직 카이토>에서 자신을 그대로 카피한 사이보그를 파괴하고자 주저않고 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당.긴. 키드 님이었다. 그 장면 하나로 키드 님은 나와 H양에게 영원히 찍혔음. (H양의 울부짖음 : "저게 어디가 개그 만화야!!")
내가 손책은 스스로에 대한 위기의식 혹은 애착이 극도로 결핍되어 있었으리라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 늘 하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저런 놈은 절대로 오래 못 산다.
대놓고 패러렐물인 홍콩의 인기 삼국지 만화 화봉요원에서는 이 '화살 맞고 죽은 척 위장했지롱'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서 유쾌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어레인지 되어 등장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포스팅하리라!
손책이 죽어? 우저(牛渚)로 물러난 손책군에서 탈영한 병사한테 얻은 정보였습니다. 손책은 부친 손견과 마찬가지로, 최전선에서 군을 진두 지휘하는 맹장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그러한 불의의 사고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죠. 더구나 부친과 흡사하게 빗나간 화살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작융(笮融)은 당연히 광희난무했습니다. 수비를 굳게 하고 원군을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설례(薛礼)군도 번능(樊能)・우미(于糜)군도 어어... 하는 사이에 손책군에게 격파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적장 손책은 죽었습니다. 작융은 크게 결단하고 부하 우자(于茲)를 파견하여 손책군을 추격합니다. 주군을 잃은 손책군은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없는 듯, 우자군의 공격에 변변히 반격 한 번 못하고 패주했습니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우자는 여겼겠지요. 그러나 돌연 전황이 뒤집힙니다. 배후에서 손책군의 복병이 급습을 가해온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손책군의 공격 앞에 우자군은 힘없이 무너졌고, 손책군은 철저하게 추격 부대를 두들깁니다. 즉, 손책이 죽었다는 것은 거짓 정보였지요. 아마도 손책은 실제로 부상을 입었겠지만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고, 이를 이용해 작융군을 진영에서 끌어내는 작전에 착안했던 겁니다.
손책은 우자군을 대파한 후 작융의 진영까지 일거 돌격하였습니다. 진영 앞에서 손책군은 입을 모아 손책의 전술을 보았느냐!! 고 크게 외칩니다. 스스로의 목숨마저 이용해 먹는 자와 싸울 수 있겠느냐. 우선 명줄이 붙어야 뭘 해도 하는 법이 아니냐. 작융군의 병사는 크게 놀라고 두려워해 전의를 잃고, 밤을 틈타 진영에서 탈주하는 자가 줄을 잇습니다. 작융은 아마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니었을 겁니다. 작융은 땅을 더욱 깊게 파고 벽을 더욱 높여 수비를 강화하였고,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려 하지 않게 됩니다.
작융이 어지간히 견고한 지형에 진을 쳤던지, 손책은 작융은 그대로 내팽개치고 유요의 본거 공략에 나섭니다. 이 무렵 손책은 해릉(海陵)에서 유요군의 별동대를 격파했습니다. 해릉은 장강(長江) 하류 이북에 위치했으므로, 아마도 손책군과 정면 충돌하는 대신 배후에서 기습하려는 작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손책은 이러한 사정마저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별동대를 격파한 후, 손책군은 진로를 바꿔 호숙(湖孰)・강승(江乗)을 점령합니다. 이 무렵에 이르러, 손책군은 완전히 유요군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유요의 본거지, 곡아(曲阿)였지요.
(주) 강동제압전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의문점이 두 가지 떠오릅니다. 우선은 해릉에서의 전투. 명백하게 이 전투만이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곡아에서 보았을 때 해릉은 동쪽으로, 손책군의 진군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이죠. 그쪽으로 군을 보낼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또, 서쪽으로 움직인 군대를, 곡아를 그냥 지나치면서까지 손책이 격파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전투는 별동대끼리의 단순한 충돌에 지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유요가 서주(徐州)의 진등(陳登)쯤과 접촉을 시도하여, 사전에 감지한 손책이 미리 접촉할 여지를 밟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이 전투만은 의미를 모르겠어요.
또 하나는, 말릉(秣陵) 남쪽에 진을 치고 유일하게 손책의 파상 공세를 버텨낸 작융입니다. 이후 호숙, 강승, 곡아로 전선이 이어지지만 작융은 일절 행동에 나서지 않습니다. 혹여 작융이 할 마음을 먹었다면 우저나 말릉을 탈환하는 것도 가능하지는 않았을까요?
이렇게 보면, 말릉 남쪽에서 손책과 대치하는 사이에 작융은 이미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미 손책과 맞붙는 대신 지금의 주군을 내버리는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다시 주) 해릉은 너무 멀다.... 싶었더니 추가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주해서에 따르면, 해릉이 아니라 매릉(梅陵)의 잘못이라고 하네요. 매릉이 어디인지는 현재 조사 중입니다. (웃음)
작융(笮融)은 당연히 광희난무했습니다. 수비를 굳게 하고 원군을 기다릴 작정이었지만, 설례(薛礼)군도 번능(樊能)・우미(于糜)군도 어어... 하는 사이에 손책군에게 격파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적장 손책은 죽었습니다. 작융은 크게 결단하고 부하 우자(于茲)를 파견하여 손책군을 추격합니다. 주군을 잃은 손책군은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없는 듯, 우자군의 공격에 변변히 반격 한 번 못하고 패주했습니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라고 우자는 여겼겠지요. 그러나 돌연 전황이 뒤집힙니다. 배후에서 손책군의 복병이 급습을 가해온 것입니다. 예기치 못한 손책군의 공격 앞에 우자군은 힘없이 무너졌고, 손책군은 철저하게 추격 부대를 두들깁니다. 즉, 손책이 죽었다는 것은 거짓 정보였지요. 아마도 손책은 실제로 부상을 입었겠지만 대단한 상처는 아니었고, 이를 이용해 작융군을 진영에서 끌어내는 작전에 착안했던 겁니다.
손책은 우자군을 대파한 후 작융의 진영까지 일거 돌격하였습니다. 진영 앞에서 손책군은 입을 모아 손책의 전술을 보았느냐!! 고 크게 외칩니다. 스스로의 목숨마저 이용해 먹는 자와 싸울 수 있겠느냐. 우선 명줄이 붙어야 뭘 해도 하는 법이 아니냐. 작융군의 병사는 크게 놀라고 두려워해 전의를 잃고, 밤을 틈타 진영에서 탈주하는 자가 줄을 잇습니다. 작융은 아마 살아 있는 기분이 아니었을 겁니다. 작융은 땅을 더욱 깊게 파고 벽을 더욱 높여 수비를 강화하였고, 이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려 하지 않게 됩니다.
작융이 어지간히 견고한 지형에 진을 쳤던지, 손책은 작융은 그대로 내팽개치고 유요의 본거 공략에 나섭니다. 이 무렵 손책은 해릉(海陵)에서 유요군의 별동대를 격파했습니다. 해릉은 장강(長江) 하류 이북에 위치했으므로, 아마도 손책군과 정면 충돌하는 대신 배후에서 기습하려는 작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손책은 이러한 사정마저도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별동대를 격파한 후, 손책군은 진로를 바꿔 호숙(湖孰)・강승(江乗)을 점령합니다. 이 무렵에 이르러, 손책군은 완전히 유요군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유요의 본거지, 곡아(曲阿)였지요.
(주) 강동제압전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의문점이 두 가지 떠오릅니다. 우선은 해릉에서의 전투. 명백하게 이 전투만이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곡아에서 보았을 때 해릉은 동쪽으로, 손책군의 진군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이죠. 그쪽으로 군을 보낼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또, 서쪽으로 움직인 군대를, 곡아를 그냥 지나치면서까지 손책이 격파해야 할 필요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전투는 별동대끼리의 단순한 충돌에 지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은, 유요가 서주(徐州)의 진등(陳登)쯤과 접촉을 시도하여, 사전에 감지한 손책이 미리 접촉할 여지를 밟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이 전투만은 의미를 모르겠어요.
또 하나는, 말릉(秣陵) 남쪽에 진을 치고 유일하게 손책의 파상 공세를 버텨낸 작융입니다. 이후 호숙, 강승, 곡아로 전선이 이어지지만 작융은 일절 행동에 나서지 않습니다. 혹여 작융이 할 마음을 먹었다면 우저나 말릉을 탈환하는 것도 가능하지는 않았을까요?
이렇게 보면, 말릉 남쪽에서 손책과 대치하는 사이에 작융은 이미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즉, 이미 손책과 맞붙는 대신 지금의 주군을 내버리는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다시 주) 해릉은 너무 멀다.... 싶었더니 추가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주해서에 따르면, 해릉이 아니라 매릉(梅陵)의 잘못이라고 하네요. 매릉이 어디인지는 현재 조사 중입니다. (웃음)
중태도 아니고 사망이다, 사.망. 생사를 오락가락한다는 소문 정도로도 충분했을 텐데 아주 쌈빡하게 사망임. 평생 크고 작은 전투를 무수히 벌이며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신 조조 님마저도 - 내 기억이 맞다면 - 죽은 시늉 하셨던 적은 없는 줄로 아는데 말이지.
자기 자신의 목숨조차 주저없이 한 개 장기말로 써먹는 저 담대함이랄지 냉철함, 아니 오히려 지독한 무모함에서 S가 연상한 것은 <매직 카이토>에서 자신을 그대로 카피한 사이보그를 파괴하고자 주저않고 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당.긴. 키드 님이었다. 그 장면 하나로 키드 님은 나와 H양에게 영원히 찍혔음. (H양의 울부짖음 : "저게 어디가 개그 만화야!!")
내가 손책은 스스로에 대한 위기의식 혹은 애착이 극도로 결핍되어 있었으리라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 늘 하는 말이지만 근본적으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저런 놈은 절대로 오래 못 산다.
대놓고 패러렐물인 홍콩의 인기 삼국지 만화 화봉요원에서는 이 '화살 맞고 죽은 척 위장했지롱'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어서 유쾌하기까지 한 방식으로 어레인지 되어 등장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포스팅하리라!
제 11장. 태사자와 허자장(太史慈と許子将)
무려 2년이나 소패왕의 노도의 헌팅(...)을 버텨낸 - 그러나 넘어갈 때는 한순간; - 소패왕의 남자 No.2이자 때로는 주유의 위치마저 위협하는 최강의 다크호스 태사자 자의(太史慈子義)가 드디어 무대에 등장했다. 태. 사. 자! 이예~이! (실은 태사자×손책도 무진장 좋아함. 엄청나게 로망임. 그래 나 절조없다;)
기타카타 삼국지에선 태사자가 손책의 직속 무장 겸 호위역으로 설정되어 있어 코피 뿜었으므로 허접 팬픽의 세계 역시 그 설을 기꺼이 채택하고자 한다. 자 얼른 넌 나한테 찍힌 순간부터 몸도 마음도 전부 내 거라고 뻔뻔하게 주장하는 소패왕의 헌팅에 넘어가 버려라 태사자! >_<
그나저나 까놓고 말해 '적이 정정당당하게 1대 1로 붙어보자 도발한다고 그걸 정말 받아주는 일국의 주군'은 중국 역사는 고사하고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음. 손책이 거의 유일하다 해도 과언 아님. 에라이 이 형님아.... OTL
덧붙이자면 허자장(許子将) 즉 허소(許邵)는 조조 님에게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姦雄)'이라는 멋지고도 멋진 레테르를 붙여준 바로 그 사람이심. 그러나 청렴결백하고 충의를 다하느냐에 따라 능력에 대한 평가까지 오락가락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나 어쨌다나. 태사자에게 '전과'가 있다는 건 북해태수 공융(孔融)을 버리고 온 일을 가리키는데, 뭐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어찌하여 이리도 간단히 아군이 무너지는 건가? 아마도 유요(劉繇)는, 손책 진군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겠지요. 원술에게는 결코 지지 않았는데, 군세도 얼마 되지 않았던 손책에게는 붙을 때마다 선수를 빼앗기고 무참한 패배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손책군의 숫자는 크게 불어나, 이미 유요군을 능가하고 있었죠.
손책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유요의 전략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천연의 요새인 장강(長江)을 끼고 수군으로 원술에게 맞선다. 이건 이후 위를 맞아 싸운 손권의 전술을 보아도 가장 건실한 정공법이며, 또한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임명된 경위를 보아도 유요는 조조에게 협력을 구할 수 있는 입장으로, 남북에서 원술을 공격하는 한편 강동에서 세력을 넓혀가면 스스로 강동의 거대 군벌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략면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언정, 막상 일이 전술, 즉 군사로 넘어가면 수의 우위를 내세워 압박하는 방법 이외에는 몰랐던 것은 아닐까요? 그 점에서, 손견 시절부터의 군사 전문가 일동과 장굉, 장소, 주유 등 배후에서 손책을 지원해준 인재를 이끌고, 스스로도 천재적인 전술가였던 손책은, 전술면에서 유요를 아득하게 능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간, 패전을 거듭하여 앞날이 불안해진 유요였지만, 아직 인재를 모두 잃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휘하에는 고명한 허자장(許子将)이 있었으며, 또한 수많은 호걸다운 에피소드로 유명한 태사자(太史慈) 역시 곡아에 와 있었던 것이죠. 허자장은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사인(士人)의 한 사람으로, 월단(月旦)이라고도 하는 인물평으로 중국의 정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거물이었습니다. 허자장이 유요에게 복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유요 스스로도 결코 무능하거나 악독한 위정자는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합니다.
태사자는 서주(徐州) 동래군(東萊郡) 출신으로 유요의 휘하에 오기 전까지, 무수한 일화를 남긴 호걸이었습니다. 태사자전 해설에서 쓸거리가 없어지므로 여기서는 우선 넘어가겠습니다만. (웃음) 이 두 사람은 손책에 대항할 비장의 카드로, 유요는 응당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손책에 맞섰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요는 허자장을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태사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허자장의 인물평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분명 올바른 비평도 많았겠지만, 다만 이 사람이 군사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정치와 전략은 허자장에게 맡기고, 군에 관해서는 완전히 태사자에게 위임하는 것이야말로 유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텐데, 유요는 엉뚱하게도 허자장에게만 의지하고 말았습니다. 이 점에서 유요의, 난세를 살아남는 군웅으로서의 자질에 한계가 보입니다.
결국, 태사자를 대장군(大将軍)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유요는 태사자와 같이 전과가 있는 자를 무겁게 쓰면 허자장의 경멸을 사지 않을까 두려워해, 태사자에게 내린 임무는 정찰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사자는 정찰 중에 손책을 쓰러뜨릴 일발대역전의 기회를 잡습니다. 놀랍게도 정찰 도중 손책과 딱 마주쳐, 정사에서 거의 유일하디시피 한 일기토를 벌였던 것이죠. 연의의 세계에서는 무장간의 일기토는 전장의 꽃과 같은 이벤트로 그려져 있지만, 정사에서는 그와 같은 기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요. 당연합니다. 군을 이끄는 무장간의 일기토로 승패가 정해진다면 군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웃음) 만약 있다면 지극히 소규모의 전투였거나, 앞뒤를 가릴 수 없는 난전이 되어 우연히 무장끼리 맞부딪히는 정도입니다. (훗날 위와 오의 격전에서 손권이 장료張遼와 맞닥뜨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장료는 그게 손권인 줄만 알았더라면 당장에 붙잡았을 거라고 발을 구르며 분해하지요)
문제의 일기토는 태사자전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태사자는 기병(騎兵) 한 사람을 대동하고 정찰 중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기병 열 셋(한당韓当・송겸宋謙・황개黄蓋도 끼여 있었죠)을 거느린 손책이 왔던 겁니다. (어이어이, 왜 그런 가벼운 차림으로 손책이 그런 델 어슬렁대고 있는데! ;;;) 더구나 태사자는 홀로 수만의 적에 포위당한 성에서 빠져나오기까지 한 일세의 호걸이었습니다. 손책 대위기!! 제발 부탁인데 정찰은 부하 무장에게 맡기란 말이다 손책 T.T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요, 손책은 태사자와 호각의 승부를 벌였습니다. 태사자는 손책을 보자마자 곧바로 돌진하여 덮쳤습니다. 허나 손책도 질세라 태사자를 말에서 날려버리고, 태사자가 소지한 수극(手戟 : 암기의 일종으로 적에게 던지는 무기입니다. 태사자는 막판엔 이 수극으로 손책을 찌를 속셈이었던 모양입니다) 중 하나를 탈취합니다. 태사자 역시, 손책의 목을 노리고 창을 휘둘러 투구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우와... T.T 위험해라....;;;) 여기서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한당 일행이 급거 달려와, 두 사람은 결판을 내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태사자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만 거죠. 하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호각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마도 돌아간 후에 손책은 장굉쯤에게 호되게 혼쭐이 났을 겁니다 ^^;; 최전선에서 날뛰는 게 손책다워서 좋긴 하지만, 그것도 어지간히 자제 좀 해주세요 ^^;;;
손책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유요의 전략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천연의 요새인 장강(長江)을 끼고 수군으로 원술에게 맞선다. 이건 이후 위를 맞아 싸운 손권의 전술을 보아도 가장 건실한 정공법이며, 또한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임명된 경위를 보아도 유요는 조조에게 협력을 구할 수 있는 입장으로, 남북에서 원술을 공격하는 한편 강동에서 세력을 넓혀가면 스스로 강동의 거대 군벌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전략면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언정, 막상 일이 전술, 즉 군사로 넘어가면 수의 우위를 내세워 압박하는 방법 이외에는 몰랐던 것은 아닐까요? 그 점에서, 손견 시절부터의 군사 전문가 일동과 장굉, 장소, 주유 등 배후에서 손책을 지원해준 인재를 이끌고, 스스로도 천재적인 전술가였던 손책은, 전술면에서 유요를 아득하게 능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간, 패전을 거듭하여 앞날이 불안해진 유요였지만, 아직 인재를 모두 잃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휘하에는 고명한 허자장(許子将)이 있었으며, 또한 수많은 호걸다운 에피소드로 유명한 태사자(太史慈) 역시 곡아에 와 있었던 것이죠. 허자장은 당시 가장 명성이 높은 사인(士人)의 한 사람으로, 월단(月旦)이라고도 하는 인물평으로 중국의 정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거물이었습니다. 허자장이 유요에게 복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유요 스스로도 결코 무능하거나 악독한 위정자는 아니었음을 단적으로 입증합니다.
태사자는 서주(徐州) 동래군(東萊郡) 출신으로 유요의 휘하에 오기 전까지, 무수한 일화를 남긴 호걸이었습니다. 태사자전 해설에서 쓸거리가 없어지므로 여기서는 우선 넘어가겠습니다만. (웃음) 이 두 사람은 손책에 대항할 비장의 카드로, 유요는 응당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손책에 맞섰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요는 허자장을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태사자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허자장의 인물평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분명 올바른 비평도 많았겠지만, 다만 이 사람이 군사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했습니다. 정치와 전략은 허자장에게 맡기고, 군에 관해서는 완전히 태사자에게 위임하는 것이야말로 유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텐데, 유요는 엉뚱하게도 허자장에게만 의지하고 말았습니다. 이 점에서 유요의, 난세를 살아남는 군웅으로서의 자질에 한계가 보입니다.
결국, 태사자를 대장군(大将軍)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유요는 태사자와 같이 전과가 있는 자를 무겁게 쓰면 허자장의 경멸을 사지 않을까 두려워해, 태사자에게 내린 임무는 정찰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사자는 정찰 중에 손책을 쓰러뜨릴 일발대역전의 기회를 잡습니다. 놀랍게도 정찰 도중 손책과 딱 마주쳐, 정사에서 거의 유일하디시피 한 일기토를 벌였던 것이죠. 연의의 세계에서는 무장간의 일기토는 전장의 꽃과 같은 이벤트로 그려져 있지만, 정사에서는 그와 같은 기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요. 당연합니다. 군을 이끄는 무장간의 일기토로 승패가 정해진다면 군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웃음) 만약 있다면 지극히 소규모의 전투였거나, 앞뒤를 가릴 수 없는 난전이 되어 우연히 무장끼리 맞부딪히는 정도입니다. (훗날 위와 오의 격전에서 손권이 장료張遼와 맞닥뜨리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장료는 그게 손권인 줄만 알았더라면 당장에 붙잡았을 거라고 발을 구르며 분해하지요)
문제의 일기토는 태사자전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태사자는 기병(騎兵) 한 사람을 대동하고 정찰 중이었습니다. 바로 거기에 기병 열 셋(한당韓当・송겸宋謙・황개黄蓋도 끼여 있었죠)을 거느린 손책이 왔던 겁니다. (어이어이, 왜 그런 가벼운 차림으로 손책이 그런 델 어슬렁대고 있는데! ;;;) 더구나 태사자는 홀로 수만의 적에 포위당한 성에서 빠져나오기까지 한 일세의 호걸이었습니다. 손책 대위기!! 제발 부탁인데 정찰은 부하 무장에게 맡기란 말이다 손책 T.T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요, 손책은 태사자와 호각의 승부를 벌였습니다. 태사자는 손책을 보자마자 곧바로 돌진하여 덮쳤습니다. 허나 손책도 질세라 태사자를 말에서 날려버리고, 태사자가 소지한 수극(手戟 : 암기의 일종으로 적에게 던지는 무기입니다. 태사자는 막판엔 이 수극으로 손책을 찌를 속셈이었던 모양입니다) 중 하나를 탈취합니다. 태사자 역시, 손책의 목을 노리고 창을 휘둘러 투구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우와... T.T 위험해라....;;;) 여기서 심상찮은 기운을 감지한 한당 일행이 급거 달려와, 두 사람은 결판을 내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태사자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만 거죠. 하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호각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마도 돌아간 후에 손책은 장굉쯤에게 호되게 혼쭐이 났을 겁니다 ^^;; 최전선에서 날뛰는 게 손책다워서 좋긴 하지만, 그것도 어지간히 자제 좀 해주세요 ^^;;;
무려 2년이나 소패왕의 노도의 헌팅(...)을 버텨낸 - 그러나 넘어갈 때는 한순간; - 소패왕의 남자 No.2이자 때로는 주유의 위치마저 위협하는 최강의 다크호스 태사자 자의(太史慈子義)가 드디어 무대에 등장했다. 태. 사. 자! 이예~이! (실은 태사자×손책도 무진장 좋아함. 엄청나게 로망임. 그래 나 절조없다;)
기타카타 삼국지에선 태사자가 손책의 직속 무장 겸 호위역으로 설정되어 있어 코피 뿜었으므로 허접 팬픽의 세계 역시 그 설을 기꺼이 채택하고자 한다. 자 얼른 넌 나한테 찍힌 순간부터 몸도 마음도 전부 내 거라고 뻔뻔하게 주장하는 소패왕의 헌팅에 넘어가 버려라 태사자! >_<
그나저나 까놓고 말해 '적이 정정당당하게 1대 1로 붙어보자 도발한다고 그걸 정말 받아주는 일국의 주군'은 중국 역사는 고사하고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음. 손책이 거의 유일하다 해도 과언 아님. 에라이 이 형님아.... OTL
덧붙이자면 허자장(許子将) 즉 허소(許邵)는 조조 님에게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姦雄)'이라는 멋지고도 멋진 레테르를 붙여준 바로 그 사람이심. 그러나 청렴결백하고 충의를 다하느냐에 따라 능력에 대한 평가까지 오락가락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나 어쨌다나. 태사자에게 '전과'가 있다는 건 북해태수 공융(孔融)을 버리고 온 일을 가리키는데, 뭐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