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재난도 삼중, 골칫거리도 삼중.

울프와 굿윈 | 2006/08/30 15:23

이하는 군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심심풀이 삼아 읽다가 아닌 밤중에 눈 튀어나오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는 경험을 한 네로 울프 단편집 <삼중의 재난(Trouble in Triplicate)>의 서문이다. 도저히 혼자만 죽을 수 없으므로 물귀신 근성으로 뚝딱 번역해 버렸음. 퀄리티에 대해선 책임 안 집니다. (이봐요)

네로 울프만 생각하면 나는 소름부터 쫙 끼친다.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네로 울프한텐 접근도 하지 말라고 누누이 타이르고 있다. 울프는 이상적인 탐정 따위와는 대략 수억 광년 가량 동떨어진 존재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울프는 그놈의 빌어먹을 꽃을 키운다. 내가 알기로 그 꽃이란 것들은 열대 우림의 지하 수역에서 옥내까지 날라온 난초로, 꽃송이가 벌어지면 흡사 결 따라 다진 살덩이, 허여멀건한 세포 조각, 습기에 젖어 축축 늘어진 근육덩이 같은 꼬락서니를 띤다. 놈들은 배설물을 먹고 여과기로 걸러낸 기후에서 쑥쑥 자란다. 뉴욕 시에서, 더군다나 35번가의 갈색 벽돌집에 갇혀 자란 난초는 도대체가 우아하고 고상해질 수가 없다. 나는 때로 네로 울프가 그놈들을 먹지 않나 의심한다.
물론 울프는 항상 먹고 있다. 네로 울프는 밥을 내놓으라고 고함을 질러대는 괴물이다. 끝없이 먹고 또 먹기 위해서만 몸뚱이가 있는 이 탐욕스럽고 걸신들린 생물은 필시 어디 다른 행성에서 온 식물이 틀림없다. 그런데 대체 어느 행성이람? 또한 네로 울프는, 까놓고 말하자면, 오만하고 도도한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대신, 울프는 너무나 크게 자란, 우주급으로 쓸모없게 비대해진 몸뚱이를 부여받았다. 나는 울프가 보나마나 우리 사고 체계의 태양계에 자리잡은 행성에서 왔으리라 생각한다. 네로 울프는 인간 정신의 거대한 구현이다.
바깥의 직사광선에 대한 드라큘라식의 혐오 - 햇볕에 노출되면 즉각 물집투성이가 되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 에 꽁꽁 틀어박힌 네로 울프는 유리병에 담긴 미스터리 독자의 뇌와도 같다. 헌데 이 뇌는 제 목소리, 범죄 해결을 위해 추리력을 휘둘러대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겁먹어서 당연하다. 예입 선생님, 우린 지금 괴물을 양손으로 떠받들고 있다니까요. 그놈의 나태한 살덩이 속에는 살아 움직이는 정신의 살아 움직이는 메타포가 꼭꼭 처박혀 있다. 마치 빛의 자그마한 조각과도 같은 생각은 어두컴컴한 구석탱이에서, 꽃이 피어나듯 발아하는 아이디어의 계시를 흡수하고 저장하고 빨아들이면서 태어난다. 살이 떨리도록 무시무시한 일이다. 내 등줄기에 전율이 흐른다. 그리고 나는 그걸 사랑한다!
허나 차라리 머리통에 구멍을 뚫고 뇌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으면 찔러댔지 네로 울프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도 나는 울프를 알기 위해 울프를 가까이 할 필요는 없다. 그걸 전부 대행해 줄 아치 굿윈, 네로 울프 미스터리의 내레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어떤 순서로든 네로 울프 미스터리를 세 편 정도 읽으면 갈색 벽돌집에 틀어박힌 매머드와 일단 척 보기엔 그의 심부름꾼이고 호감 가는 인물인 아치 굿윈 사이에 대체 무슨 화학 반응이 발생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기 시작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관계야말로 렉스 스타우트 소설의 정수를 이루는 근간이라 할 수 있으리라. 나는 흔히 이를 남자들끼리의 결혼으로 인식한다. 그야, 당최 이 친구들이 무슨 수로 내롱네롱하며 지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어쨌거나 아치는 노멀이니까.
아치 굿윈을 단순히 서술자 혹은 공명판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나 어쩌다 기찻간이나 서점에서 네로 울프 미스터리를 한두 편쯤 읽었을 뿐인 사람은 진짜로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만다. 스타우트를 세 번 겪으면 그때부터 마법이 시작된다. 순서야 어찌 됐건 네로 울프 미스터리를 세 편 읽은 사람에게 아치는 비로소 흥미롭기 짝이 없는 캐릭터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아치는 네로 울프의 자양분이다. 도시 움직일 줄 모르는 천재는 아치 굿윈의 활약 위에서 번성한다. 그리고 아치는, 가끔 반항이야 하되, 네로 울프의 무지막지한 용적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태한 마음의 마누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아치는 35번가에 위치한 울프의 갈색 벽돌 감옥, 구제불능의 게으름이란 감옥과 격리된 현실에서 정밀하게 추출한 사실과 진실로 네로 울프를 먹여살린다. 아치는 괴물을 돌보고 그리하여 괴물은 살아남게 된다.
어째서 아치는 괴물을 먹여살리려고 할까? 아치 굿윈이 네로 울프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훨씬 단정짓기가 어렵다. 정상적인 범위의 인간성을 지니고 상사를 멋지게 놀려먹고 싶은 극도의 충동으로 항상 활활 불타는 아치는, 네로 울프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있다. 때로는, 그 나름대로 정의가 실현되길 원하는 아치의 욕구가 계속 그 괴짜를 먹여살리도록 내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치는 인류의 이득을 위하여 범죄가 가능하면 해결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종종 아치는 경찰을 완전히 바보 만들면서 즐기기도 하는데, 이건 네로 울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치는 네로 울프가 탁월한 성과를 거둘 때마다 진심 어린 만족을 얻는다. 아마도 이건 일종의 중독이다. 언제 한 번 아치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어쩌면 네로 울프가 아치를 교묘하게 이용해 먹는지도 모른다.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네로 울프는 아치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 무슨 수를 쓰던 간에, 네로 울프는 아치를 지배하고 그로써 계속 먹이를 받아먹을 수 있다. 내가 말했다시피, 이건 혼인 관계에서는 아주 흔해빠진 일이다.
작가로써 렉스 스타우트는 독자가 없으면 기능할 수 없다. 그리고 독자는 끝없이 먹이를 받아먹고 교묘하게 조종당한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렉스 스타우트의 미스터리를 세 편만 읽고 나면 여러분도 십에 팔구는 중독되고 말 것이다. 35번가의 갈색 벽돌집에 사는 희고 살찐 거미는 또다른 파리를 나꿔챘다.
경고하건대, 덫에 걸리고 죽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책에는 접근도 하지 말라. 풍성하고 풍요롭지만 골치아픈 인간 정신의 구현인 네로 울프는 본인의 마음 속에 도사린 어둠을 직시하는 행위만큼이나 골때리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도무지 달아날 수 없게 된지 오래다.
이 책, <삼중의 재난>을 읽으면 독자 여러분은 필경 아치와 괴물 같은 마음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탈출은 불가능하다. 숨을 곳은 물론 없다.
<삼중의 재난>은 제목 그대로 대형급 재난이다. 네로 울프의 거대한 부피를 담은 갈색 벽돌집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만일, 만에 하나라도, 네로 울프 미스터리 세 편을 읽은 후에도 렉스 스타우트의 올가미에서 능히 벗어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실로 강한 사람이다. 나와 아치보다 훨씬, 훨씬 강하다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네로 울프의 빌어먹게 오래된 갈색 벽돌집의 문을 열고 다음 사건으로 향하되, 결코 끝을 보지 못하도록 운명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 랜디 러셀(Randy Russell)


보았느냐 휠스짱!! 그대에게 이걸 읽히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후딱 번역해 버렸소! >_<
아치가 별로 정의한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결혼 관계'라는 표현은 굿잡이올시다 아저씨. 에라이 저놈의 양키 센스.
실은 문제의 <삼중의 재난>에는 S가 대오각성하고 네로 울프-아치 굿윈 콤비에게 훌러덩 넘어간 첫 번째 계기가 되었던 <구인 광고(Help Wanted, Male)>가 수록된 까닭에 뜬금없이 나까지 등줄기가 뜨끔뜨끔했음. 나... 나도 희고 살찐 거미에게 사로잡힌 파리인 거예요!? T.T

덤. Archie is normal, after all은 사실 '어쨌거나 아치는 정상이니까'로 번역하는 게 옳으나 여기야말로 번역자의 재량이 발휘될 곳. 마음껏 왜곡해 드렸음. 와하하하하하하하하핫!!! (어이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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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 2006/08/30 16:57
안녕하세요.이 아이디가 맞는지 좀 가물가물 합니다만;;kisara님 덕에 쿄고쿠일본 원판 전질을 지른 사람입니다;;;]1만히트되신거 축하드려요^^글 계속 즐겁게 보고있습니다.네로울프시리즈 영판도 이 사이트때문에 샀습니다;;; 번역을 보다가 뒤가 보고 싶어져 버려서;;;위의 글은 소설 서문이 아니라 왠 커플링토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실제 원작이 그런지라;; 어쩔수 없다지만;;그리고 쿄고쿠도 3년만의 신간이 9월 말에 나온답니다! 이번에는 믿어도 괜찮은 얘기겠죠;;
바사라는 난이도가 어느정도 되는지?;;.액션치도 노력하면 가능할까요;;마사무네님을 한번 실제로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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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08/31 11:21
오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늘 찾아주시고 계셨다니 저도 기뻐요 >_< 때때로 멀쩡한 분을 악의 길로 끌어들이는 저의 스킬은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군요. 서문이 저 모양이니 제가 눈에 불을 켜고 번역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쟈미의 시즈쿠가 드디어 나오는 모양이죠. 이러다 또 바람 맞히면 현해탄 너머로 도시락 폭탄을 던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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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lls 2006/08/30 17:21
...크윽...!! 그만두지 못하겠나! 나와 영어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운명...!!!!! (이것은 필경 전생의 과오 <-틀려)
여보 랜디 러셀 씨, 내 말 좀 들어보오, 대저 무슨 화학 반응을 이해한거요 당신, 아니 밑에 줄줄이 설명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말이오...!!!!! (울다죽기)

오타 한번 잘못 냈다가 영어와의 전생의 인연을 깨닫고 만 나.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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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08/31 11:23
절대로 그만 못하겠다. 읽어라 읽어 읽어~ (저주의 북북 댄스) 이런 걸 보고도 영어 공포증을 핑계대며 동하지 않는 척을 가장한다면 자네는 동인녀도 아니야!! 라이더 킥!!

그리고 말하는데 그건 오타 한 번 낸 수준이 아니었어. 말실수는 무의식을 대변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자네는 사실 마음 속으로는 영어를 사랑하고 있는 거요! 냉큼 이리 오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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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 2006/08/30 19:54
겍;; 아래에 난이도에 대해서 나와있어요;;왜 읽었는데도!!...답글수정이 안돼;;;;
...전 실제로 지금까지 액션게임을 정식으로 해본적이 없습니다;;;;
테일즈한것도 액션에 들어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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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08/31 11:23
어라, 답글 수정 될 텐데요?
제가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그건 단언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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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 2006/08/31 12:13
비밀번호를 대충 눌러놨던지 그냥 올렸던지 해서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제 잘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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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본이 2009/07/08 22:48
'마음의 마누라'라는 표현이 너무 적절한듯 OTL
저렇게 완벽하게 공생관계를 이루는 탐정-조수도 달리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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