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손책전이 최종장을 맞았습니다. 8월 2일부터 번역하기 시작했으니 거의 두 달만에 완성을 본 셈임. 이런 게으름뱅이...;;; 하여간 시원섭섭하다. 내용을 생각하면 택없이 우울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한 박자 쉬고 주유전으로 들어갈 예정임.
제 22장. 의문의 죽음(謎の死)
손포코 님 당신이 구제불능의 손책 형님 팬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남자가 남자한테 반하면 약도 없다니까...!!)
소패왕 손책 백부, 향년 26세.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그 시대에도 정말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에 불꽃처럼 스러져 버렸다. 근본적으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은 오래 못 사는 법이다. 언제나 말하듯이.
예전에도 말했지만 여기서 손권을 후계자로 지명한 게 손책의 거취를 무진장 미묘하게 만드는데, 거기에 대해선 정말로 언젠가 한 번 제대로 각잡고 포스팅하려 마음먹고 있다.
괜히 한 마디 하자면 실상 간웅 계열인 손책이 체육계로 낙인 찍힌 건 순전히 비본 삼국지 때문이다. 고로 나는 읽을 마음이 전혀 없음. 탕, 탕, 탕.
(참고로 <장강은 타오르고>는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미 모두가 알고 계실 테니 결론부터 후딱 써 버리겠습니다. 손책은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許都) 습격을 위해 착착 준비를 다지고 있었습니다만, 바로 그럴 때 의문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손책의 사인(死因)은 부친 손견 이상으로 수수께끼 투성이입니다. 여기서 정사의 기술을 보기 전에, 각종 삼국지계 소설 및 만화에서 손책의 사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한 번 훑어보도록 하지요.
우선 요코야마 삼국지(横山三国志)를 봅시다. 요코야마 삼국지는 손책이 조조에게 암살당한 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책이 죽기 직전에 조조와 곽가로 여겨지는 인물이 무언가 밀담을 나누고, 바로 그 직후에 손책이 사망합니다. 위서(魏書)의 곽가전을 보면, 곽가가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기는 하였으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아, 나의 관찰에 의하면 반드시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더구나 그 말이 나오고 얼마 되지도 않아 손책이 자객에게 암살당하므로, 아무리 곽가가 천재 군사였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생사까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할 터, 너무나 앞서나간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때문에 곽가는 손책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직접 가담했을 거라는 추론이 성립하지요. 허공(許貢)이 만약 조조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면 아주 있을 수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이 설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요. 배송지가 주석에서 해설한 대로, 곽가는 강동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점과 손책이 자기 자신을 과신하여 경호가 허술하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고, 직후에 손책이 죽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우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창천항로(蒼天航路). 아니나다를까 창천항로는 분석이 잘 되어 있어, 우길(于吉)의 저주 운운하는 미심쩍은 설은 채택하지 않고 있어요. 허공의 아들과 손책에게 탄압당한 종교세력이 손을 잡고 암살을 획책했다는 설입니다. 더구나 그 배후에는 유표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만, 유표가 관계되어 있다는 부분만은 유표를 다소 지나치게 높이 산 듯한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은 장강은 타오르고(長江燃ゆ). 토모노 로우(伴野 朗)씨가 저술한, 아마도 일본 최초의 (세계일지도? ^^;) 손견과 손책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입니다. 소설로서의 재미도 상당하기 때문에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은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네요. (필자는 소설 스바루小説すばる의 증간호에서 읽었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무책임!! ;;;) 이 소설의 경우, 선인이 된 우길과의 트러블과 허공의 자객으로 손책이 목숨을 잃는다는, 정사의 기술을 모조리 우겨넣은 듯한 설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토모노 씨의 후기에 따르면, 손견전은 신나게 써내려갔지만 어쩐지 손책전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아 손책의 사인도 정사를 그대로 따라갔다는 모양이에요.
마지막으로 진순신(陳瞬臣) 씨의 비본삼국지(秘本三国志). 필자가 아는 한 일본 최초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입니다. 지금도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지요. 지금 당장 책을 갖고 있지 않아 순 기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만, 진순신 씨는 손책은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죽여 원한을 크게 샀다고, 배려심이 모자란 손책보다 손권 쪽이 군주로서 유능했다는 식으로 저술하고 있었죠. 비본삼국지는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손책의 해석에 대해선 당시에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죽였다 한다면, 서주(徐州)에서 대량 학살을 감행한 조조는 대체 어찌 됩니까? 원한이라면 조조도 만만치 않게 샀을 텐데, 그걸로 군주로서의 자질을 판단한다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웃음) 그리고 손권에게 배려심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좀 (웃음) 손권도 몹쓸 짓은 무척 많이 했는걸요 ^^; 그리고 반란세력은 철저히 숙청하는 건 고금동서 어느 군주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손책이 반란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배려심이 모자랐다고는 보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살펴봤으면 정사의 기술로 눈을 돌려보지요. 진수의 본문에 따르면, 허공의 막내아들과 식객은 장강(長江) 부근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손책과 우연히 마주쳤고, 식객이 손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진실의 전부겠지요. 이어서 배송지가 대량의 이설(異説)을 주석으로 달고 있습니다.
●『오록(呉録)』출처. 어떤 자가 고대(高岱 : 허공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습니다)와 손책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손책의 손을 빌려 고대를 죽이고, 손책은 더욱 원한을 사도록 하려는 음모였지요. 문제의 '어떤 자'는 허공의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봅니다.
●『강표전(江表伝)』출처. 우길이라는 도교(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나 장로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연상하시면 됩니다)의 도사(道士)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우길을 숭앙하므로, 손책은 우길을 죽이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모친 오부인이 우길은 훌륭한 사람이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충고하지만, 손책은 종교인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니 내버려둘 수 없다며 우길을 처형합니다.
●『지림(志林)』출처. 강표전의 기술에서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전, 우길의 제자가 순제(順帝)에게 우길이 입수한 『태평청령서(太平青領書)』라는 서책을 헌상했다는 기술을 들어, 당시 만약 우길이 살아 있었다면 100살이 다 되었을 것이라고 저술하지요.
●『수신기(捜神記)』출처. 손책은 우길을 체포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면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우길이 하늘에 기도를 드리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손책은 결국 우길을 처형합니다.
●『강표전』출처. 진등(陳登)은 손책의 후방을 교란시키고자 엄백호(厳白虎)의 잔당에게 관직을 제수합니다. 손책은 진등 토벌을 위해 단도(丹徒)까지 진군하는데, 잠시 휴식 중에 혼자서 사냥을 나갔다가 허공의 식객들과 마주칩니다. 손책은 그들을 베어 죽이지만, 뺨에 화살을 맞았습니다.
●『구주춘추(九州春秋)』출처. 손책의 허도습격계획은 준비가 충분치 못했으므로 재난을 당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동평(異同評)』출처.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려 했다는 설에 대해, 당시 손책은 강동을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그럴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논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손책의 죽음과 관도대전이 막을 올린 시기에 비춰보아, 손책은 허도 습격이 아닌 진등 토벌 중 서거했다고 보는 게 온당하리라 주장합니다. 강표전과 구주춘추의 모순점에 대하여 창피한 오류라고도 논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배송지는, 강동을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반란세력의 대부분을 진압했으므로, 손책에게 허도를 침공할 여유가 있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오력(呉歴)』출처. 손책은 부상을 입은 후, 의사에서 치명상은 아니지만 100일 간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병색이 완연한 것에 이런 꼴로 대업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격분하여, 상처가 터져 사망했다고 기술합니다.
●『수신기』출처. 손책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지만, 이때 우길의 망령이 나타나 손책을 주살(呪殺)했다고 기술합니다.
이렇듯 온갖 제설이 난무하고 있어요. ^^;
먼저 우길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아마도 당시의 강동에서는 우길과 같은 종교인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손책은 종교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므로, 미신을 믿기 쉬운 당시의 사람들은 손책의 이른 죽음과 종교인의 저주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딱 잘라 말해 손책이 주저없이 종교세력을 두들겨팬 것은 그가 미신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건 전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흥종교나 미신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진보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또한, 모친 오부인은 몹시 총명한 여성으로, 손책이 부하와 트러블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 나선 사례는 있지만 그런 사람이 종교세력을 옹호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컬트종교세력이야말로 손일문에게는 타파해야 할 적이었으니 말이지요.
다음으로 허공의 아들과 그를 따른 식객들을 살펴봅시다. 물론 손책은 반란세력과 불온분자를 무자비하리만치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강동을 통치하는 자로서 완수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처벌을 받은 사람들의 원한까지 고려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손책은 부친 손견의 유산을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손책이 강동제압에 나섰을 무렵, 원소・원술・조조・유표・도겸 등은 이미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강동을 지배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손책은 서둘러서 강동을 집어삼켜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게 손일문이 군웅으로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책이 강동제패를 위해 적대세력을 짓밟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손책이 저지른 실책은 단 하나입니다. 보신(保身)에 지나치게 무관심했다는 것이죠. 전장에서 최선봉에 서서 병졸을 베거나, 줄창 단독으로 정찰 혹은 사냥을 나가서야 아무리 손책의 무용이 뛰어나도 위험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장굉과 장소가 몇 번이나 간언했던 것도 그 점이었지요. 조조의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경호를 늦추지 않았고, 언제나 전위・허저 등의 호걸이 신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장수(張繍)의 급습을 받고도 조조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죠. 유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비도 따지고 보면 무척 무모한 축에 들지만, 만년에 들면 그런 류의 무모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손일문에도 주태, 태사자, 정보에 한당과 같이 몸을 돌보지 않고 군주의 위기를 구해낼 장수는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하다못해 그들과 근위병만은 항상 가까이에 두어야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성향은 손일문의 전통인지도 모릅니다. 실은 손권조차도 호랑이 사냥을 하거나, 전장에서 적장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따위의 위험한 행동을 걸핏하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손권은 정말로 운이 좋았던 셈이지요. 후에 성향부터 완전히 황족이 된 손권의 아들들은 별개로 하고, 손견・손책・손권 세 사람은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온 무가(武家)의 사나이였던 것이고, 그게 바로 손일문의 매력이기도 합니다만.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면서도, 손책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후 반드시 일어날 부하의 이탈과 손일문의 분열을 최소한으로 억제할 방책이 필요했던 겁니다. 손책은 휘하의 분열을 저지할 인물로 장소를 점찍고, 그에게 후계자의 보좌를 부탁합니다. 이때 손책에게는 손소(孫紹)라는 적자가 이미 있었지만, 손책은 친아들이 아닌 동생 손권을 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손책은 자기 자손의 번영보다 손일문의 번영을 택했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인물평을 내릴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손책은 손권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군단의 총대장으로서 천하의 군웅들과 패권을 다투는 일에서 너는 내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인재를 교묘히 활용해 강동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라면 너는 나를 능가한다. 뒷일을 부탁한다." 손책은 동생의 인물됨도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죠. 손책은 당시 아직 26세였습니다. 스무 살에 거병하여 불과 6년만에 손일문의 기반을 쌓아올린 손일문 최대의 영걸은 이렇게 짧은 생애의 막을 내렸습니다.
우선 요코야마 삼국지(横山三国志)를 봅시다. 요코야마 삼국지는 손책이 조조에게 암살당한 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손책이 죽기 직전에 조조와 곽가로 여겨지는 인물이 무언가 밀담을 나누고, 바로 그 직후에 손책이 사망합니다. 위서(魏書)의 곽가전을 보면, 곽가가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기는 하였으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아, 나의 관찰에 의하면 반드시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더구나 그 말이 나오고 얼마 되지도 않아 손책이 자객에게 암살당하므로, 아무리 곽가가 천재 군사였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생사까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할 터, 너무나 앞서나간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 때문에 곽가는 손책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거나 혹은 직접 가담했을 거라는 추론이 성립하지요. 허공(許貢)이 만약 조조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면 아주 있을 수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이 설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요. 배송지가 주석에서 해설한 대로, 곽가는 강동이 아직 불안정하다는 점과 손책이 자기 자신을 과신하여 경호가 허술하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고, 직후에 손책이 죽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러우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으로 창천항로(蒼天航路). 아니나다를까 창천항로는 분석이 잘 되어 있어, 우길(于吉)의 저주 운운하는 미심쩍은 설은 채택하지 않고 있어요. 허공의 아들과 손책에게 탄압당한 종교세력이 손을 잡고 암살을 획책했다는 설입니다. 더구나 그 배후에는 유표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지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지만, 유표가 관계되어 있다는 부분만은 유표를 다소 지나치게 높이 산 듯한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다음은 장강은 타오르고(長江燃ゆ). 토모노 로우(伴野 朗)씨가 저술한, 아마도 일본 최초의 (세계일지도? ^^;) 손견과 손책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입니다. 소설로서의 재미도 상당하기 때문에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은 꼭 한 번 보셨으면 좋겠네요. (필자는 소설 스바루小説すばる의 증간호에서 읽었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무책임!! ;;;) 이 소설의 경우, 선인이 된 우길과의 트러블과 허공의 자객으로 손책이 목숨을 잃는다는, 정사의 기술을 모조리 우겨넣은 듯한 설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토모노 씨의 후기에 따르면, 손견전은 신나게 써내려갔지만 어쩐지 손책전은 그럴 마음이 나지 않아 손책의 사인도 정사를 그대로 따라갔다는 모양이에요.
마지막으로 진순신(陳瞬臣) 씨의 비본삼국지(秘本三国志). 필자가 아는 한 일본 최초 조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입니다. 지금도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지요. 지금 당장 책을 갖고 있지 않아 순 기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만, 진순신 씨는 손책은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죽여 원한을 크게 샀다고, 배려심이 모자란 손책보다 손권 쪽이 군주로서 유능했다는 식으로 저술하고 있었죠. 비본삼국지는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손책의 해석에 대해선 당시에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사람을 지나치게 많이 죽였다 한다면, 서주(徐州)에서 대량 학살을 감행한 조조는 대체 어찌 됩니까? 원한이라면 조조도 만만치 않게 샀을 텐데, 그걸로 군주로서의 자질을 판단한다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웃음) 그리고 손권에게 배려심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좀 (웃음) 손권도 몹쓸 짓은 무척 많이 했는걸요 ^^; 그리고 반란세력은 철저히 숙청하는 건 고금동서 어느 군주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손책이 반란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배려심이 모자랐다고는 보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살펴봤으면 정사의 기술로 눈을 돌려보지요. 진수의 본문에 따르면, 허공의 막내아들과 식객은 장강(長江) 부근에 숨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손책과 우연히 마주쳤고, 식객이 손책에게 중상을 입혔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진실의 전부겠지요. 이어서 배송지가 대량의 이설(異説)을 주석으로 달고 있습니다.
●『오록(呉録)』출처. 어떤 자가 고대(高岱 : 허공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습니다)와 손책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손책의 손을 빌려 고대를 죽이고, 손책은 더욱 원한을 사도록 하려는 음모였지요. 문제의 '어떤 자'는 허공의 관계자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봅니다.
●『강표전(江表伝)』출처. 우길이라는 도교(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나 장로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를 연상하시면 됩니다)의 도사(道士)에 관하여 기술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우길을 숭앙하므로, 손책은 우길을 죽이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모친 오부인이 우길은 훌륭한 사람이므로 죽여서는 안된다고 충고하지만, 손책은 종교인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니 내버려둘 수 없다며 우길을 처형합니다.
●『지림(志林)』출처. 강표전의 기술에서 모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전, 우길의 제자가 순제(順帝)에게 우길이 입수한 『태평청령서(太平青領書)』라는 서책을 헌상했다는 기술을 들어, 당시 만약 우길이 살아 있었다면 100살이 다 되었을 것이라고 저술하지요.
●『수신기(捜神記)』출처. 손책은 우길을 체포하여 비를 내리게 한다면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우길이 하늘에 기도를 드리자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손책은 결국 우길을 처형합니다.
●『강표전』출처. 진등(陳登)은 손책의 후방을 교란시키고자 엄백호(厳白虎)의 잔당에게 관직을 제수합니다. 손책은 진등 토벌을 위해 단도(丹徒)까지 진군하는데, 잠시 휴식 중에 혼자서 사냥을 나갔다가 허공의 식객들과 마주칩니다. 손책은 그들을 베어 죽이지만, 뺨에 화살을 맞았습니다.
●『구주춘추(九州春秋)』출처. 손책의 허도습격계획은 준비가 충분치 못했으므로 재난을 당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동평(異同評)』출처.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려 했다는 설에 대해, 당시 손책은 강동을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그럴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논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손책의 죽음과 관도대전이 막을 올린 시기에 비춰보아, 손책은 허도 습격이 아닌 진등 토벌 중 서거했다고 보는 게 온당하리라 주장합니다. 강표전과 구주춘추의 모순점에 대하여 창피한 오류라고도 논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배송지는, 강동을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반란세력의 대부분을 진압했으므로, 손책에게 허도를 침공할 여유가 있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오력(呉歴)』출처. 손책은 부상을 입은 후, 의사에서 치명상은 아니지만 100일 간은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 병색이 완연한 것에 이런 꼴로 대업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격분하여, 상처가 터져 사망했다고 기술합니다.
●『수신기』출처. 손책의 상처는 거의 회복되었지만, 이때 우길의 망령이 나타나 손책을 주살(呪殺)했다고 기술합니다.
이렇듯 온갖 제설이 난무하고 있어요. ^^;
먼저 우길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아마도 당시의 강동에서는 우길과 같은 종교인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손책은 종교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으므로, 미신을 믿기 쉬운 당시의 사람들은 손책의 이른 죽음과 종교인의 저주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딱 잘라 말해 손책이 주저없이 종교세력을 두들겨팬 것은 그가 미신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건 전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흥종교나 미신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진보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또한, 모친 오부인은 몹시 총명한 여성으로, 손책이 부하와 트러블을 일으켰을 때 조정에 나선 사례는 있지만 그런 사람이 종교세력을 옹호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컬트종교세력이야말로 손일문에게는 타파해야 할 적이었으니 말이지요.
다음으로 허공의 아들과 그를 따른 식객들을 살펴봅시다. 물론 손책은 반란세력과 불온분자를 무자비하리만치 숙청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강동을 통치하는 자로서 완수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처벌을 받은 사람들의 원한까지 고려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손책은 부친 손견의 유산을 이어받지 못했습니다. 손책이 강동제압에 나섰을 무렵, 원소・원술・조조・유표・도겸 등은 이미 확고한 기반을 다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강동을 지배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손책은 서둘러서 강동을 집어삼켜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게 손일문이 군웅으로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책이 강동제패를 위해 적대세력을 짓밟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손책이 저지른 실책은 단 하나입니다. 보신(保身)에 지나치게 무관심했다는 것이죠. 전장에서 최선봉에 서서 병졸을 베거나, 줄창 단독으로 정찰 혹은 사냥을 나가서야 아무리 손책의 무용이 뛰어나도 위험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장굉과 장소가 몇 번이나 간언했던 것도 그 점이었지요. 조조의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경호를 늦추지 않았고, 언제나 전위・허저 등의 호걸이 신변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장수(張繍)의 급습을 받고도 조조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죠. 유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비도 따지고 보면 무척 무모한 축에 들지만, 만년에 들면 그런 류의 무모함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손일문에도 주태, 태사자, 정보에 한당과 같이 몸을 돌보지 않고 군주의 위기를 구해낼 장수는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하다못해 그들과 근위병만은 항상 가까이에 두어야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성향은 손일문의 전통인지도 모릅니다. 실은 손권조차도 호랑이 사냥을 하거나, 전장에서 적장의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따위의 위험한 행동을 걸핏하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손권은 정말로 운이 좋았던 셈이지요. 후에 성향부터 완전히 황족이 된 손권의 아들들은 별개로 하고, 손견・손책・손권 세 사람은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온 무가(武家)의 사나이였던 것이고, 그게 바로 손일문의 매력이기도 합니다만.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면서도, 손책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후 반드시 일어날 부하의 이탈과 손일문의 분열을 최소한으로 억제할 방책이 필요했던 겁니다. 손책은 휘하의 분열을 저지할 인물로 장소를 점찍고, 그에게 후계자의 보좌를 부탁합니다. 이때 손책에게는 손소(孫紹)라는 적자가 이미 있었지만, 손책은 친아들이 아닌 동생 손권을 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손책은 자기 자손의 번영보다 손일문의 번영을 택했고,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인물평을 내릴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손책은 손권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군단의 총대장으로서 천하의 군웅들과 패권을 다투는 일에서 너는 내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인재를 교묘히 활용해 강동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라면 너는 나를 능가한다. 뒷일을 부탁한다." 손책은 동생의 인물됨도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죠. 손책은 당시 아직 26세였습니다. 스무 살에 거병하여 불과 6년만에 손일문의 기반을 쌓아올린 손일문 최대의 영걸은 이렇게 짧은 생애의 막을 내렸습니다.
손포코 님 당신이 구제불능의 손책 형님 팬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남자가 남자한테 반하면 약도 없다니까...!!)
소패왕 손책 백부, 향년 26세.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던 그 시대에도 정말 터무니없이 젊은 나이에 불꽃처럼 스러져 버렸다. 근본적으로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은 오래 못 사는 법이다. 언제나 말하듯이.
예전에도 말했지만 여기서 손권을 후계자로 지명한 게 손책의 거취를 무진장 미묘하게 만드는데, 거기에 대해선 정말로 언젠가 한 번 제대로 각잡고 포스팅하려 마음먹고 있다.
괜히 한 마디 하자면 실상 간웅 계열인 손책이 체육계로 낙인 찍힌 건 순전히 비본 삼국지 때문이다. 고로 나는 읽을 마음이 전혀 없음. 탕, 탕, 탕.
(참고로 <장강은 타오르고>는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다)
제 23장. 손책전 연표(孫策伝年表)
여기서는 빼먹고 넘어가신 모양이지만 예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지림(志林)이라는 문헌에 喜推考桓王之薨、建安五年四月四日이라는 구절이 있음. 환왕(桓王)이란 장사환왕(長沙桓王), 즉 손책을 가리키므로 200년 4월 4일이 손책의 타계일이라는 말이 된다. 타계일이 200년 8월 이후로 짐작된다는 조조전과 모순되지만, 진수의 삼국지는 각 인물들의 전기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저 전기와 이 전기의 말이 안 맞고 이 전기와 저 전기의 시기가 차이나는 일은 흔히 있음. 그러므로 그냥 4월 4일이라고 믿도록 하겠다.
실제로도 위를 보면, 장굉을 조조 님에게 파견한 후에 토역장군을 제수받아야 할 것 같은데 (장군직 따내려고 장굉까지 보냈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나 말이다) 어떻게 된 게 토역장군 제수는 198년(강표전), 장굉 파견은 199년(장굉전)이다. 뭐냐 이거;;; 고민고민하다가 그냥 나온 숫자대로 분산시켜 버렸다. 나도 모르겠다 니미럴.
그리고 손보가 태수로 있었던 군의 이름이 몇 장 전부터 여릉(廬陵)인지 노릉(盧陵)인지 필자도 헛갈리고 역자도 헛갈렸는데 치쿠마 문고판 정사 삼국지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 진작 확인했어야지 이 인간아; - 여릉이 맞다. 다신 헷갈리지 말아야지;
그나저나 정말로 숨쉴 틈도 없는 7년이었음. 나도 숨이 차다.
손책전의 경우 불과 6~7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사건과 합전(合戦)이 난립하고 있어, 이야기의 전후관계가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필자 나름대로 손책이 강동제패를 개시했을 때부터 서거했을 때까지 7년간의 연표를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이므로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어딘가가 틀렸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절대로)
먼저 손책전에 연도가 기술되어 있는 것부터 열거하겠습니다.
- 손책이 원술에게 의탁한 것이 194년 (본문)
- 우저(牛渚)의 요새를 점거한 것이 195년 (강표전江表伝)
- 손책이 조조에게 기도위(騎都尉)・오정후(鳥程侯)・회계태수(会稽太守)를 제수받은 것이 197년 여름 (강표전)
- 손책이 황조(黄祖)를 격파한 것이 199년 12월 11일 (오록呉録)
- 손책이 서거한 것이 200년 (본문)
- 손책은 195년 12월 곡아(曲阿)에서 진구장군(殄冦将軍)으로 임명되었다. (오록)
이것은 195년 12월에 유요(劉繇) 토벌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198년에 손책은 토역장군(討逆将軍) 및 오후(呉侯)가 되었다. (강표전)
손책전에 등장하는 연도는 이것뿐입니다. 다른 전기도 한 번 살펴보지요.
- 193년에 손책이 장강을 도하하여 불과 몇 년 사이에 강동을 제압하였다. (조조전)
- 196년 2월, 조조는 여남(汝南)의 황건적을 토벌하였다. (조조전)
- 197년 여름,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였다. (조조전)
- 197년 9월, 원술은 진국(陳国)을 침공하였으나 조조에게 패배하였다. (조조전)
- 원술이 죽은 것이 199년 (조조전)
- 유훈(劉勲)이 조조에게 귀순한 것이 199년 말 (조조전)
- 손책이 죽은 것은 200년 8월 이후? (조조전)
-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고 나선 것이 197년 (원술전)
- 여강태수(廬江太守) 이술(李術)이 양주자사(揚州刺史) 엄상(厳象)을 살해한 것이 200년 (순욱전)
- 조조가 손책에게 사로잡힌 왕랑(王朗)을 불러들인 것이 198년 (왕랑전)
- 손책이 유훈을 격파한 것이 199년 (손권전)
- 장굉이 조조에게 사자로 파견된 것이 199년 (장굉전)
- 주유가 원술의 막하에서 탈출해 손책에게로 간 것이 198년 (주유전)
- 손책이 회계태수가 되고, 왕랑이 동치(東治)로 달아난 것이 196년 (하제전賀斉伝)
이상입니다. 이걸 근거로 해서 연표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시간의 경과는 분명치 않으므로 대부분이 필자의 짐작임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중에서 분명치 않은 것은 태사자가 반란을 일으킨 시기, 유요가 병사한 시기, 그리고 원술이 단양태수를 교대시킨 시기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태사자의 경우, 유요와 헤어져 단양에서 거병한 것이 손책이 회계토벌에 나선 이후인지 이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전이라면 태사자는 상당히 서둘러서 급하게 거병한 셈이죠. 이후라면 아시다시피 손책은 회계의 동치까지 진군했으므로 태사자 격파는 그 이후가 되어, 태사자가 거병했을 때부터 토벌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테고요. 여기에서는 태사자가 손책이 부재 중일 때를 노렸다고 판단해, 손책이 회계토벌에 나선 이후라고 설정했습니다.
유요가 대체 언제 병사했는지 대해서는, 정사의 기술에 황조를 토벌한 이후였음을 짐작케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 작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손책은 상당히 오랫동안 유요를 그대로 방치한 셈이 됩니다. 더구나 그 이후에 태사자를 정찰로 파견했다는 기술도 미심쩍습니다. (황조를 토벌한 후라는 것은, 즉 손책이 이미 예장에 와 있음을 의미하므로, 새삼스럽게 태사자를 정찰로 내보낼 필요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필자는 유요가 병사한 시점을 태사자를 정찰로 파견하기 직전으로 잡아보았습니다.
단양태수 교대 시기는,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나선 것과 비슷한 시기인지 그 전인지가 불분명합니다. 여기서는 황제를 자칭하기 전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보아도 실로 격동의 7년이었군요. (웃음)
먼저 손책전에 연도가 기술되어 있는 것부터 열거하겠습니다.
- 손책이 원술에게 의탁한 것이 194년 (본문)
- 우저(牛渚)의 요새를 점거한 것이 195년 (강표전江表伝)
- 손책이 조조에게 기도위(騎都尉)・오정후(鳥程侯)・회계태수(会稽太守)를 제수받은 것이 197년 여름 (강표전)
- 손책이 황조(黄祖)를 격파한 것이 199년 12월 11일 (오록呉録)
- 손책이 서거한 것이 200년 (본문)
- 손책은 195년 12월 곡아(曲阿)에서 진구장군(殄冦将軍)으로 임명되었다. (오록)
이것은 195년 12월에 유요(劉繇) 토벌이 완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198년에 손책은 토역장군(討逆将軍) 및 오후(呉侯)가 되었다. (강표전)
손책전에 등장하는 연도는 이것뿐입니다. 다른 전기도 한 번 살펴보지요.
- 193년에 손책이 장강을 도하하여 불과 몇 년 사이에 강동을 제압하였다. (조조전)
- 196년 2월, 조조는 여남(汝南)의 황건적을 토벌하였다. (조조전)
- 197년 여름,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였다. (조조전)
- 197년 9월, 원술은 진국(陳国)을 침공하였으나 조조에게 패배하였다. (조조전)
- 원술이 죽은 것이 199년 (조조전)
- 유훈(劉勲)이 조조에게 귀순한 것이 199년 말 (조조전)
- 손책이 죽은 것은 200년 8월 이후? (조조전)
- 원술이 황제를 자칭하고 나선 것이 197년 (원술전)
- 여강태수(廬江太守) 이술(李術)이 양주자사(揚州刺史) 엄상(厳象)을 살해한 것이 200년 (순욱전)
- 조조가 손책에게 사로잡힌 왕랑(王朗)을 불러들인 것이 198년 (왕랑전)
- 손책이 유훈을 격파한 것이 199년 (손권전)
- 장굉이 조조에게 사자로 파견된 것이 199년 (장굉전)
- 주유가 원술의 막하에서 탈출해 손책에게로 간 것이 198년 (주유전)
- 손책이 회계태수가 되고, 왕랑이 동치(東治)로 달아난 것이 196년 (하제전賀斉伝)
이상입니다. 이걸 근거로 해서 연표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시간의 경과는 분명치 않으므로 대부분이 필자의 짐작임을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4년 | 손책, 원술에게 의탁. 부친 손견의 병사 약 천여 명을 돌려받음. 손책, 원술의 명을 받아 여강태수 육강(陸康)을 토벌. 손책, 손분(孫賁)과 오경(呉景)을 원호하여 유요 토벌에 나섬. 손책, 급조한 배로 장강을 도하, 횡강진(横江津)・당리구(当利江)에서 장영(張英)・우미(于糜)・번능(樊能)군을 격파. |
195년 | 손책, 유요의 우저 요새를 점거. 손책, 말릉(秣陵)성 남쪽의 전투에서 작융(笮融)군의 선봉을 격파. 작융, 수비를 강화하여 방어선을 침. 손책, 말릉성을 급습하여 점거. 설례(薛礼)는 도주. 우미・번능군, 우저 요새를 탈환하나, 직후 손책군의 급습을 받고 대패. 손책, 자신이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추격을 가해온 우자(于茲)군을 괴멸시킴. 손책, 작융 공격을 단념. 해릉(海陵)에서 우회한 유요군 별동대를 격파. 손책, 호숙(湖孰)・강승(江乗)을 점거. 곡아로 진격. 태사자, 정찰 중 손책과 조우하여 일기토를 벌임. 유요, 예장(豫章)으로 도주. 손책은 곡아를 점령. 손책, 손분・오경을 전황 보고를 구실 삼아 수춘(寿春)으로 귀환시킴. 주유, 숙부인 단양태수(丹陽太守) 주상(周尚)에게로 돌아감. |
196년 | 작융, 유요를 배신. 예장태수 주호(朱晧)를 살해하고 예장에 눌러앉음. 유요는 작융과 대치하나 패배. 살해된 예장태수 주호를 대신하여 화흠(華歆)이 부임. 주치, 곡권(由拳)에서 오군태수(呉郡太守) 허공(許貢)을 격파, 직후 진군하여 오군을 점령. 허공, 회계의 반란세력 엄백호(厳白虎)를 의탁함. 손책, 회계군 토벌을 개시하나, 절강(浙江)을 사이에 끼고 교착 상태에 빠짐. 태사자, 단양의 반란분자를 규합하여 단양태수를 자칭함. 손책, 고릉(固陵)에서 손정(孫静)의 계책에 따라 왕랑군을 격파. 왕랑, 회계군의 군도(郡都)를 버리고 배로 동치에 도주. 손책, 회계군의 군도에 입성. 회계군 태수를 자칭함. 오군태수에 주치를 임명. 유요, 두 번째의 토벌전으로 작융을 격파. 손책, 왕랑을 추격하여 동치까지 진군. 왕랑은 손책에게 출두함. 손책, 태사자를 격파하여 수하로 삼음. |
197年 | 유요, 병사함. 원술, 단양태수 주상을 불러들이고 대신 원윤(袁胤)을 파견. 주유, 주상을 따라 원술에게 출두. 손책, 서곤(徐琨)에게 명하여 단양태수 원윤을 추방. 손책, 손보에게 역양(歴陽)에서의 포진을 명하여 원술의 침공에 대비. 원술, 황제를 참칭함. 손책, 단양의 반란세력 조랑(祖朗)을 격파. 손책, 조조의 상소에 의하여 기도위・오정후・회계태수를 제수받음. |
198년 | 주유, 노숙과 더불어 원술의 막하를 탈출, 강동으로 귀환. 오경・손분, 원술을 버리고 강동으로 탈출. 손책, 오경을 단양태수로 재임명. 조조, 손책에게 사로잡힌 왕랑을 불러들임. 조조・손책,손분의 딸과 조장(曹章), 조조의 조카딸과 손광(孫匡)을 혼인시킴. 손책, 여범 및 서일(徐逸)에게 명하여 하비(下邳)의 진우(陳瑀)를 해서(海西)에서 격파시킴. 손책, 회계로 진군. 반란세력 엄백호를 격파. 손책, 오정(鳥程)의 전동(銭銅)・추타(鄒他), 가흥(嘉興)의 왕성(王晟),전 오군태수 허공 등 불온분자를 숙청함. 손책, 토역장군 및 오후의 지위를 제수받음. |
199년 | 손책, 장굉을 허도의 조조에게 사자로 파견. 원술, 서거. 잔존병력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흡수됨. 손책, 태사자에게 예장의 정찰과 유요군 잔존병력의 흡수를 명함. 손책, 유훈을 함정에 빠뜨려 여강을 점령함. 손책, 여강태수에 이술을 지명. 손분・손보. 팽택(彭沢)에서 매복, 유훈군을 격파. 손책, 서새산(西塞山)에서 유훈군을 격파. 유훈, 조조에게로 달아남. 손책・주유, 교공(喬公)의 두 딸, 대교와 소교를 각각 아내로 맞음. 손책, 우번에게 명하여 예장태수 화흠을 투항시킴. 손책, 손분을 예장태수, 손보를 여강태수로 임명. 손책, 사선(沙羨)에서 황조군을 격파. |
200년 | 손책, 태사자를 건창도위(健昌都尉)로 임명, 유반(劉盤)을 견제함. 여강태수 이술, 양주자사 엄상을 살해. 손분・손보・주유, 여릉(廬陵)의 동지(僮芝)를 격파. 주유・여범, 각각 파구(巴丘)와 파양(鄱陽)에 파견됨. 손책, 조조의 수도인 허도진격을 계획함. 손책, 허공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함. |
이 중에서 분명치 않은 것은 태사자가 반란을 일으킨 시기, 유요가 병사한 시기, 그리고 원술이 단양태수를 교대시킨 시기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태사자의 경우, 유요와 헤어져 단양에서 거병한 것이 손책이 회계토벌에 나선 이후인지 이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전이라면 태사자는 상당히 서둘러서 급하게 거병한 셈이죠. 이후라면 아시다시피 손책은 회계의 동치까지 진군했으므로 태사자 격파는 그 이후가 되어, 태사자가 거병했을 때부터 토벌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테고요. 여기에서는 태사자가 손책이 부재 중일 때를 노렸다고 판단해, 손책이 회계토벌에 나선 이후라고 설정했습니다.
유요가 대체 언제 병사했는지 대해서는, 정사의 기술에 황조를 토벌한 이후였음을 짐작케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 작융이 반란을 일으켰다고는 하지만 손책은 상당히 오랫동안 유요를 그대로 방치한 셈이 됩니다. 더구나 그 이후에 태사자를 정찰로 파견했다는 기술도 미심쩍습니다. (황조를 토벌한 후라는 것은, 즉 손책이 이미 예장에 와 있음을 의미하므로, 새삼스럽게 태사자를 정찰로 내보낼 필요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필자는 유요가 병사한 시점을 태사자를 정찰로 파견하기 직전으로 잡아보았습니다.
단양태수 교대 시기는,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나선 것과 비슷한 시기인지 그 전인지가 불분명합니다. 여기서는 황제를 자칭하기 전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보아도 실로 격동의 7년이었군요. (웃음)
여기서는 빼먹고 넘어가신 모양이지만 예전에도 언급했다시피 지림(志林)이라는 문헌에 喜推考桓王之薨、建安五年四月四日이라는 구절이 있음. 환왕(桓王)이란 장사환왕(長沙桓王), 즉 손책을 가리키므로 200년 4월 4일이 손책의 타계일이라는 말이 된다. 타계일이 200년 8월 이후로 짐작된다는 조조전과 모순되지만, 진수의 삼국지는 각 인물들의 전기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저 전기와 이 전기의 말이 안 맞고 이 전기와 저 전기의 시기가 차이나는 일은 흔히 있음. 그러므로 그냥 4월 4일이라고 믿도록 하겠다.
실제로도 위를 보면, 장굉을 조조 님에게 파견한 후에 토역장군을 제수받아야 할 것 같은데 (장군직 따내려고 장굉까지 보냈다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나 말이다) 어떻게 된 게 토역장군 제수는 198년(강표전), 장굉 파견은 199년(장굉전)이다. 뭐냐 이거;;; 고민고민하다가 그냥 나온 숫자대로 분산시켜 버렸다. 나도 모르겠다 니미럴.
그리고 손보가 태수로 있었던 군의 이름이 몇 장 전부터 여릉(廬陵)인지 노릉(盧陵)인지 필자도 헛갈리고 역자도 헛갈렸는데 치쿠마 문고판 정사 삼국지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 진작 확인했어야지 이 인간아; - 여릉이 맞다. 다신 헷갈리지 말아야지;
그나저나 정말로 숨쉴 틈도 없는 7년이었음. 나도 숨이 차다.
제 24전. 여타 전기에서 본 손책전(他伝に見る孫策伝)
이걸로 끝. 수고하셨습니다.
『위서(魏書) 진등전(陳登伝)』
진등이 광기성(匡琦城)에 있을 때, 손책군이 광기로 진군합니다. 대부분의 자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주장하지만, 진등은 끝까지 교전을 고집하여 적을 방심하게 한 후 기습을 가해 손책군을 패퇴시킵니다. 그 후 다시금 공격을 가해온 군을 계책을 써서 격퇴했다고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손책이 그 정도의 패배를 맛보았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서(呉書)를 들여다보면 손책이 진등과 맞붙었다는 기술은 어느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손책전의 주석에, 손책이 진등을 토벌하고자 진군하던 도중에 암살당했다는 말이 슬쩍 언급될 뿐이지요. 시기적으로는 여포를 쓰러뜨린 후고, 더구나 두 번이나 거병했다고 합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손책이 서주(徐州)를 목표로 대군을 움직인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진교전(陳矯伝)을 보면, 광기성이 손권에게 포위되었을 때, 라는 기술이 있지요. 최소한 두 번째의 행군은 손권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는 누구일까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우(陳瑀) 토벌에 파견된 여범과 서일(徐逸)의 군대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해서(海西)까지 진군하여 진우를 격파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진우와 진등은 같은 일족이고, 이 시기에 여범군과 진등군이 격돌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범과 동행한 서일에 관한 기술은 이후 완전히 끊깁니다. 진등에게 패배해 전사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위서 서혁전(徐奕伝)』
서혁은 전란을 피하여 한때 강동으로 피신하였으나, 손책의 요청을 거절하고 중원으로 돌아갑니다.
『위서 화흠전(華歆伝)』
손책의 사후, 조조는 상소하여 화흠을 허도로 불러들이려 합니다. 손권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화흠은 조조 밑에서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여기에 머무르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조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항복을 권유한 우번과의 대화, 항복하여 손책과 회견했을 때의 상황 등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손책과 화흠 모두 의젓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요.
『위서 왕랑전(王朗伝)』
손책에게 투항한 후의 상황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왕랑은 여기서 변명을 하면 오히려 처형되리라 여겼던지, 자신이 무능했으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만 말합니다. 후에 조조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조조가 손책에 대해서 질문하자, 왕랑은 "손책은 뛰어난 무용과 야심을 지녔으며, 손책을 지탱하는 장소와 주유도 영걸입니다. 손책을 단순한 반란군으로 보셔서는 결코 아니됩니다. (훗날의 근심이 되겠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위서 곽가전(郭嘉伝)』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곽가는 손책의 허도진격의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기는 하였으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아, 나의 관찰에 의하면 반드시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오" 라고 말합니다. 그 직후에 손책은 실제로 자객에게 암살되었습니다. 귀재 곽가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위서 유엽전(劉曄伝)』
이것 역시 앞의 장에서 기술하였지만, 손책의 계책에 빠진 유훈을 설득하는 유엽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등도 그렇고, 유엽도 그렇고, 위에는 숨은 영재가 정말로 많습니다. 위의 저력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위서 유복전(劉馥伝)』
여강태수(廬江太守) 이술(李術)은, 조조의 명을 받고 파견된 양주(揚州刺史) 엄상(厳象)을 살해합니다. 그 대신 유복이 양주자사로 임명되는데, 이 사람은 후의 손권전과 더욱 관련이 깊으므로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웃음)
『위서 진교전』
진교 역시 전란을 피하여 강동으로 왔지만, 원술과 손책의 천거를 거부하고 서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진등의 눈에 들어, 손권이 진군해 왔을 때 원군요청을 위한 사자로 허도에 파견됩니다.
『위서 서선전(徐宣伝)』
그 역시 강동으로 피난은 왔지만 손책의 천거를 거절한 인물입니다. 소위 청류파(清流派)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 손책은 반란분자로 인식되어 있어, 손책이 이들의 등용에 무척 고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책이 관직에 목말라 한 것도 이런 제반 사정 때문이었겠지요.
『촉서(蜀書) 허정전(許靖伝)』
허정은 왕랑과 허공과 교분이 두터워 한때 그들을 의탁했지만, 손책이 진군해 왔을 때 교주(交州)로 피신합니다. 교주에서 유장(劉璋)의 천거를 받아 촉으로 들어가지만, 배송지는 "손책이 온 것과 허정의 안전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교주까지 달아나 (역병에 걸려) 고생하는 것과, 장소 및 장굉과 같이 손책 휘하에서 일국의 기대주로서 활약하는 것, 어느 쪽이 이득일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면서 허정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진등이 광기성(匡琦城)에 있을 때, 손책군이 광기로 진군합니다. 대부분의 자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주장하지만, 진등은 끝까지 교전을 고집하여 적을 방심하게 한 후 기습을 가해 손책군을 패퇴시킵니다. 그 후 다시금 공격을 가해온 군을 계책을 써서 격퇴했다고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손책이 그 정도의 패배를 맛보았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서(呉書)를 들여다보면 손책이 진등과 맞붙었다는 기술은 어느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손책전의 주석에, 손책이 진등을 토벌하고자 진군하던 도중에 암살당했다는 말이 슬쩍 언급될 뿐이지요. 시기적으로는 여포를 쓰러뜨린 후고, 더구나 두 번이나 거병했다고 합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손책이 서주(徐州)를 목표로 대군을 움직인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진교전(陳矯伝)을 보면, 광기성이 손권에게 포위되었을 때, 라는 기술이 있지요. 최소한 두 번째의 행군은 손권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는 누구일까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우(陳瑀) 토벌에 파견된 여범과 서일(徐逸)의 군대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해서(海西)까지 진군하여 진우를 격파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진우와 진등은 같은 일족이고, 이 시기에 여범군과 진등군이 격돌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범과 동행한 서일에 관한 기술은 이후 완전히 끊깁니다. 진등에게 패배해 전사한 건지도 모르겠군요.
『위서 서혁전(徐奕伝)』
서혁은 전란을 피하여 한때 강동으로 피신하였으나, 손책의 요청을 거절하고 중원으로 돌아갑니다.
『위서 화흠전(華歆伝)』
손책의 사후, 조조는 상소하여 화흠을 허도로 불러들이려 합니다. 손권은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화흠은 조조 밑에서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여기에 머무르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고 조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항복을 권유한 우번과의 대화, 항복하여 손책과 회견했을 때의 상황 등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손책과 화흠 모두 의젓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요.
『위서 왕랑전(王朗伝)』
손책에게 투항한 후의 상황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왕랑은 여기서 변명을 하면 오히려 처형되리라 여겼던지, 자신이 무능했으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고만 말합니다. 후에 조조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조조가 손책에 대해서 질문하자, 왕랑은 "손책은 뛰어난 무용과 야심을 지녔으며, 손책을 지탱하는 장소와 주유도 영걸입니다. 손책을 단순한 반란군으로 보셔서는 결코 아니됩니다. (훗날의 근심이 되겠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위서 곽가전(郭嘉伝)』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곽가는 손책의 허도진격의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기는 하였으되 정세는 안정되지 않아, 나의 관찰에 의하면 반드시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것이오" 라고 말합니다. 그 직후에 손책은 실제로 자객에게 암살되었습니다. 귀재 곽가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위서 유엽전(劉曄伝)』
이것 역시 앞의 장에서 기술하였지만, 손책의 계책에 빠진 유훈을 설득하는 유엽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등도 그렇고, 유엽도 그렇고, 위에는 숨은 영재가 정말로 많습니다. 위의 저력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위서 유복전(劉馥伝)』
여강태수(廬江太守) 이술(李術)은, 조조의 명을 받고 파견된 양주(揚州刺史) 엄상(厳象)을 살해합니다. 그 대신 유복이 양주자사로 임명되는데, 이 사람은 후의 손권전과 더욱 관련이 깊으므로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웃음)
『위서 진교전』
진교 역시 전란을 피하여 강동으로 왔지만, 원술과 손책의 천거를 거부하고 서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진등의 눈에 들어, 손권이 진군해 왔을 때 원군요청을 위한 사자로 허도에 파견됩니다.
『위서 서선전(徐宣伝)』
그 역시 강동으로 피난은 왔지만 손책의 천거를 거절한 인물입니다. 소위 청류파(清流派)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 손책은 반란분자로 인식되어 있어, 손책이 이들의 등용에 무척 고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책이 관직에 목말라 한 것도 이런 제반 사정 때문이었겠지요.
『촉서(蜀書) 허정전(許靖伝)』
허정은 왕랑과 허공과 교분이 두터워 한때 그들을 의탁했지만, 손책이 진군해 왔을 때 교주(交州)로 피신합니다. 교주에서 유장(劉璋)의 천거를 받아 촉으로 들어가지만, 배송지는 "손책이 온 것과 허정의 안전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교주까지 달아나 (역병에 걸려) 고생하는 것과, 장소 및 장굉과 같이 손책 휘하에서 일국의 기대주로서 활약하는 것, 어느 쪽이 이득일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면서 허정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끝.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