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갔더니 사랑하는 그분이 전국 BASARA로 내달리고 있었다. (경악)
그것도 필두필두893893하고 있었다. (초 경악)
BASARA 무인판에서 유키유키의 최고 명대사가 "우랴아아아아아아아아압!!! 격파 격파아아아아아!!!" 였다면 2는 볼 거 없이 "방해다 방해다 방해다아아아아아아!!!!" 이런 迷台詞 제조기 같으니 -_-
마사무네 님 2P 의상의 에로도에 기절할 지경임. 알흠다운 팬텀 다이브는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아하시면 슬퍼요. (진지)
하여간 다 집어치우고, 주유전 Part 2로 들어갑니다.
제 2장. 주일문과 손일문이 접근한 이유(なぜ周家と孫家は接近したのか?)
별 거 아닌데 번역에는 엄청 애 먹었음. 뭐냐 주유, 반항하는 거냐 -_-;;;
하여간 잘 나가다 이런 꿈도 희망도 로망도 없는 현실주의자로 느닷없이 선회하는 건 손포코 님의 나쁜 버릇이다. 君の悪い癖だよ伯符! 진수의 기술을 믿어보자 제발 좀! (너 좋은 것만 믿는 인간이 뭔 말이냐;)
니시이 상이 20편짜리 초장편 망남(望南)에서 은근슬쩍 이용해 먹은 게 아마 강표전의 저 기술이지 싶음. 엄청난 네타바레이므로 만약을 위해 슬쩍 가리겠지만 망남의 손책과 주유는 실상 이종사촌 간이기 때문이다. (우효오 진성근친!!)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시라. 으하하하하하하.
주일문과 손일문의 접촉은 손견의 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손견은 동탁 토벌에 나서면서, 가족을 부춘(富春)에서 서(舒)로 옮겼습니다. 손책전에서는, 주유가 손책의 평판을 듣고 머나먼 서에서 부춘까지 찾아온 끝에 의기투합하여, 주유의 제안을 따라 손책 본인이 결정한 일인 것처럼 기술되어 있지만, 이 시점에서 가장은 어디까지나 손견이었으니 아들인 손책에게 결정권이 있었을 성 싶지는 않군요. 역시 최종 결정을 내린 사람은 손견이겠지요. 서로 이주한 손일문은 주일문에게서 길에 면한 남측의 커다란 저택을 양도받아, 상호간에 생필품을 사이좋게 나눠쓰면서 살았다고 하네요. 설마하니 손견이 살 집도 확보하지 않고 가족을 옮겼을 리는 없으니, 이건 처음부터 주일문을 바라고 이사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손견 대에서 이미 주일문과 손일문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손일문에게 주일문이 얼마나 유용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명문 중의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는 주일문과 친분을 쌓는 것은 밑바닥 출신인 손일문에게는 엄청난 이점이었으면 이점이었지 손해볼 일은 한 개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주일문 쪽의 메리트가 뭐였는지는 도통 모르겠어요. 일반적으로 강동의 호족이 손일문을 지지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무가(武家)인 손일문을 필두로 내세워 강동의 안정화를 꾀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긴 합니다. 육(陸)일문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일문의 경우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이 시점에서 손견은 강동에 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손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동탁을 쓰러뜨리는 것이었고, 본거지도 형주(荊州)와 장사(長沙)였지요. 손견이 불귀의 객이 되지 않았더라면 형주를 할거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주일문이 강동의 안정화를 위해 손일문에 접근했다는 이론에는 다소 문제가 있군요.
여기서부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필자의 억측임을 사전에 명기하겠습니다. 손일문과 주일문의 접촉은 손견 대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강동의 정세 안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일문 측에, 손일문을 원조하기로 결정한 인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민활달하여 어린 시절부터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고는 하나, 손책과 같은 나이의 주유가 이때 벌써 당주였을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럼 동탁 토벌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당시의 주일문 당주는 누구였을까요? 제 1장에서 언급한 태위(太尉)이 주충(周忠)이야말로 당주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역시 앞 장에서도 밝혔습니다만, 주충은 가후와 공모하여 반 이각(李傕)파의 명사였던 주준(朱儁)의 입조를 획책하는 등, 이각과 대립하는 위치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단 조정에 출사는 했을지언정, 가계도 그렇거니와 틀림없이 친 동탁파는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궁중에서 동탁 일파의 일소를 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주일문이 반 동탁의 최선봉이었던 손견을 원조하기로 한 이유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의 별반 신빙성이 없는 문헌입니다만, 주유전의 주석에서 인용된 강표전에 아주 재미있는 기술이 보입니다. 강동을 홀랑 집어삼켰을 무렵에, 손책 자신이 "주유는 영걸이자 귀재로, 나와는 오랜 친구이며 혈연관계도 있소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죠. 앞쪽은 단순히 띄워주는 말이므로 그다지 의미는 없습니다. 문제는 '혈연관계가 있다'는 부분입니다. 손책과 주유는 교씨 자매를 나란히 아내로 맞은 사이이므로 단순히 동서지간임을 가리킨다면 그뿐이겠습니다만, 만약 강표전의 기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의 혈연관계, 즉 선대 어디선가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일단, 손견 쪽으로는 주일문과 접점이 없으리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손견의 가계는 그 선조가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조차 오리무중인 언더그라운드 계열입니다. 명문 중의 명문인 주일문과 무슨 관계가 있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역시 외가인 오(吳)일문 쪽이겠지요. 오일문과 주일문이 친족이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양가(兩家) 모두 양주(揚州)의 호족이었으므로 혈연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긴 합니다. 더구나 서로 이주한 후의 주일문과 손일문의 사귐을 보고 있자면, 모든 타산을 뛰어넘은 무언가 인간적인 정과 흡사한 것이 느껴지기도 해요. 실제로도 오부인이 손권에게 "나는 주유를 내 친자식과 마찬가지로 여깁니다. 그대도 주유를 형으로 의지하고 따르도록 하시오." 라며 이르는 대목을 볼 수 있는데, 이건 암만 봐도 일개 가신, 혹은 일개 협력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그만큼 주유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도 되겠지만, 오일문과 주일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다면 오부인의 말도 납득이 갑니다. 강표전에 딱 한 줄 언급된 걸 물고 늘어져서 억측에 억측을 거듭한 추론이긴 해도, 혈연이 있으리라 가정하고 보면 손일문과 주일문 사이의 강력한 라인도 쉽게 설명이 되긴 합니다.
손일문에게 주일문이 얼마나 유용했을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명문 중의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는 주일문과 친분을 쌓는 것은 밑바닥 출신인 손일문에게는 엄청난 이점이었으면 이점이었지 손해볼 일은 한 개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주일문 쪽의 메리트가 뭐였는지는 도통 모르겠어요. 일반적으로 강동의 호족이 손일문을 지지했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무가(武家)인 손일문을 필두로 내세워 강동의 안정화를 꾀했다고 보는 관점도 있긴 합니다. 육(陸)일문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일문의 경우에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이 시점에서 손견은 강동에 적을 두고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손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동탁을 쓰러뜨리는 것이었고, 본거지도 형주(荊州)와 장사(長沙)였지요. 손견이 불귀의 객이 되지 않았더라면 형주를 할거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주일문이 강동의 안정화를 위해 손일문에 접근했다는 이론에는 다소 문제가 있군요.
여기서부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필자의 억측임을 사전에 명기하겠습니다. 손일문과 주일문의 접촉은 손견 대에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강동의 정세 안정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일문 측에, 손일문을 원조하기로 결정한 인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민활달하여 어린 시절부터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고는 하나, 손책과 같은 나이의 주유가 이때 벌써 당주였을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럼 동탁 토벌 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당시의 주일문 당주는 누구였을까요? 제 1장에서 언급한 태위(太尉)이 주충(周忠)이야말로 당주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역시 앞 장에서도 밝혔습니다만, 주충은 가후와 공모하여 반 이각(李傕)파의 명사였던 주준(朱儁)의 입조를 획책하는 등, 이각과 대립하는 위치였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단 조정에 출사는 했을지언정, 가계도 그렇거니와 틀림없이 친 동탁파는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궁중에서 동탁 일파의 일소를 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주일문이 반 동탁의 최선봉이었던 손견을 원조하기로 한 이유가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의 별반 신빙성이 없는 문헌입니다만, 주유전의 주석에서 인용된 강표전에 아주 재미있는 기술이 보입니다. 강동을 홀랑 집어삼켰을 무렵에, 손책 자신이 "주유는 영걸이자 귀재로, 나와는 오랜 친구이며 혈연관계도 있소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죠. 앞쪽은 단순히 띄워주는 말이므로 그다지 의미는 없습니다. 문제는 '혈연관계가 있다'는 부분입니다. 손책과 주유는 교씨 자매를 나란히 아내로 맞은 사이이므로 단순히 동서지간임을 가리킨다면 그뿐이겠습니다만, 만약 강표전의 기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의 혈연관계, 즉 선대 어디선가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일단, 손견 쪽으로는 주일문과 접점이 없으리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손견의 가계는 그 선조가 대체 뭘 하고 살았는지조차 오리무중인 언더그라운드 계열입니다. 명문 중의 명문인 주일문과 무슨 관계가 있었으리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역시 외가인 오(吳)일문 쪽이겠지요. 오일문과 주일문이 친족이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양가(兩家) 모두 양주(揚州)의 호족이었으므로 혈연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긴 합니다. 더구나 서로 이주한 후의 주일문과 손일문의 사귐을 보고 있자면, 모든 타산을 뛰어넘은 무언가 인간적인 정과 흡사한 것이 느껴지기도 해요. 실제로도 오부인이 손권에게 "나는 주유를 내 친자식과 마찬가지로 여깁니다. 그대도 주유를 형으로 의지하고 따르도록 하시오." 라며 이르는 대목을 볼 수 있는데, 이건 암만 봐도 일개 가신, 혹은 일개 협력자를 대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그만큼 주유의 영향력이 컸다는 뜻도 되겠지만, 오일문과 주일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다면 오부인의 말도 납득이 갑니다. 강표전에 딱 한 줄 언급된 걸 물고 늘어져서 억측에 억측을 거듭한 추론이긴 해도, 혈연이 있으리라 가정하고 보면 손일문과 주일문 사이의 강력한 라인도 쉽게 설명이 되긴 합니다.
별 거 아닌데 번역에는 엄청 애 먹었음. 뭐냐 주유, 반항하는 거냐 -_-;;;
하여간 잘 나가다 이런 꿈도 희망도 로망도 없는 현실주의자로 느닷없이 선회하는 건 손포코 님의 나쁜 버릇이다. 君の悪い癖だよ伯符! 진수의 기술을 믿어보자 제발 좀! (너 좋은 것만 믿는 인간이 뭔 말이냐;)
니시이 상이 20편짜리 초장편 망남(望南)에서 은근슬쩍 이용해 먹은 게 아마 강표전의 저 기술이지 싶음. 엄청난 네타바레이므로 만약을 위해 슬쩍 가리겠지만 망남의 손책과 주유는 실상 이종사촌 간이기 때문이다. (우효오 진성근친!!)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시라. 으하하하하하하.
제 3장. 손가 군벌의 재구축(孫軍閥の再構築)
지참금이냐고 중얼거린 내게 틀림없이 죄는 없다. (진지)
주일문과 손책의 외가인 오일문 사이에 무언가 혈연관계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여기서는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불자면, 주(朱)일문까지 포함하여 일종의 호족 그룹이 형성되어 있었지는 않았을까 생각도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하지요 (웃음)
주일문과 손일문은 서(舒)에서 공동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견의 어이없는 전사와 함께 그 공동 생활도 끝장이 납니다. 손견 사후 손일문은 서를 떠나 강도(江都)로 이주합니다. 어째서 서를 떠난 걸까요? 혹은 떠나야만 했던 걸까요?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장이 된 손책이 장강(長江)을 건너 북쪽도 봐 두고 싶어했을 뿐인지, 아니면 손견의 죽음으로 주일문과의 공동전선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손견의 갑작스런 죽음이 손일문에게는 붕괴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손일문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 그룹이 명백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손일문은 손분(孫憤)을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원술 휘하에서 손분은 오경(呉景)과 거의 동격이거나 그보다 밑이었습니다. 주치(朱治)는 단독으로 오군도위(呉郡都尉)에 임명되었고(조정의 정식 발령입니다), 주일문도 별개 행동에 나섰지요. 다시 말해 손견을 주축으로 하는 호족 그룹은 손견의 군사적 능력에 기대어 결성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 손견이 죽고 없는 지금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존재도 없었던 겁니다.
주일문 쪽으로 눈을 돌려보지요. 앞에서 언급한 주충(周忠)이 태위(太尉)로 임명된 것이 192년. 다시 말해 손견의 전사를 전후한 발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3년에는 원술의 세력 범위가 남양(南陽)에서 회남(淮南)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시기의 손일문・오일문・주일문은 하나같이 원술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흔히 과소 평가되기 십상이지만 당시 원술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습니다. 손책은 이 무렵에 원술 휘하로 들어갔고, 오경도 원술에게 단양태수(丹楊太守)로 임명되었습니다. 주일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194년 경에 오경의 뒤를 이어 주유의 숙부인 주상(周尚)이 단양태수가 되었지요. 다시 말해 주일문 역시 원술파벌에 속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란 이야기입니다.
194년에 개시된 손책의 강동제압전은 손일문의 재부흥의 기치를 들어올린 셈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를 명령한 원술 측에서 보자면, 원술은 강동제압, 즉 대 유요(劉繇) 전선을 손(孫)・오(呉)・주(周)・주(朱)일문 등의 양주 호족에게 일임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본인은 서주(徐州)와 예주(豫州) 등지에 신경을 쏟고 있었던 만큼 강동에 관한 한 현지의 사인(士人)들에게 맡겨놓는 편이 훨씬 편리하기도 했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원술이 손책에게 강동제압군을 떠넘긴 건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한 마디로 오경과 손분이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에 같은 그룹에 속하는 손책과 주유에게 지휘권이 양도된 것입니다. 이 경우, 오경에서 주상으로 단양태수가 교체된 것과 손책의 강동제압전 개시 시기가 거의 겹치는 것도 쉽사리 납득이 갑니다. 이어서 손책은 주유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주유는 단양태수 주상의 대리 자격으로 참전했다─손책의 강동제압 초기의 흐름은 이와 같았습니다.
손책에게 있어 주유의 참전은 매우 마음 든든한 일이었던 듯, 주유를 맞이하면서 "네가 와 준 이상 내 소원은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동을 제압한 거나 마찬가지다)" 라는 말로 환대하고 있지요. 물론 주유 본인의 능력을 높이 사기도 했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단양태수 주상의 협력도 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즉 단양에서 병력 및 물자 조달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실제로도 주유는 참전하면서 군선과 병사, 물자도 함께 가져왔으므로, 기반이 없는 손책에게는 이만큼 반가운 손님도 없었습니다. (다만 단양에서도 장강 이남에 해당하는 지역은 모조리 유요가 깔고 앉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상이 단양태수로 임명되었다고 해도, 단양 전체의 이권을 부여받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죠) 더 나아가서는, 손일문-주일문의 협력관계를 재구성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손견의 전사로 해체되었던 손일문 중심의 호족 그룹이, 손책의 강동제압전 개시와 새기를 같이 하여 재결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원술의 강동전략에서 최대의 실수는, 손책과 주유로 대표되는 호족 그룹을 하나의 군단으로 묶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일문과 손일문은 서(舒)에서 공동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견의 어이없는 전사와 함께 그 공동 생활도 끝장이 납니다. 손견 사후 손일문은 서를 떠나 강도(江都)로 이주합니다. 어째서 서를 떠난 걸까요? 혹은 떠나야만 했던 걸까요?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저 가장이 된 손책이 장강(長江)을 건너 북쪽도 봐 두고 싶어했을 뿐인지, 아니면 손견의 죽음으로 주일문과의 공동전선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손견의 갑작스런 죽음이 손일문에게는 붕괴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타격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손일문을 중심으로 하는 호족 그룹이 명백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손일문은 손분(孫憤)을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았지만, 원술 휘하에서 손분은 오경(呉景)과 거의 동격이거나 그보다 밑이었습니다. 주치(朱治)는 단독으로 오군도위(呉郡都尉)에 임명되었고(조정의 정식 발령입니다), 주일문도 별개 행동에 나섰지요. 다시 말해 손견을 주축으로 하는 호족 그룹은 손견의 군사적 능력에 기대어 결성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그 손견이 죽고 없는 지금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존재도 없었던 겁니다.
주일문 쪽으로 눈을 돌려보지요. 앞에서 언급한 주충(周忠)이 태위(太尉)로 임명된 것이 192년. 다시 말해 손견의 전사를 전후한 발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3년에는 원술의 세력 범위가 남양(南陽)에서 회남(淮南)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시기의 손일문・오일문・주일문은 하나같이 원술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흔히 과소 평가되기 십상이지만 당시 원술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했습니다. 손책은 이 무렵에 원술 휘하로 들어갔고, 오경도 원술에게 단양태수(丹楊太守)로 임명되었습니다. 주일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194년 경에 오경의 뒤를 이어 주유의 숙부인 주상(周尚)이 단양태수가 되었지요. 다시 말해 주일문 역시 원술파벌에 속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리란 이야기입니다.
194년에 개시된 손책의 강동제압전은 손일문의 재부흥의 기치를 들어올린 셈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를 명령한 원술 측에서 보자면, 원술은 강동제압, 즉 대 유요(劉繇) 전선을 손(孫)・오(呉)・주(周)・주(朱)일문 등의 양주 호족에게 일임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본인은 서주(徐州)와 예주(豫州) 등지에 신경을 쏟고 있었던 만큼 강동에 관한 한 현지의 사인(士人)들에게 맡겨놓는 편이 훨씬 편리하기도 했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원술이 손책에게 강동제압군을 떠넘긴 건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한 마디로 오경과 손분이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에 같은 그룹에 속하는 손책과 주유에게 지휘권이 양도된 것입니다. 이 경우, 오경에서 주상으로 단양태수가 교체된 것과 손책의 강동제압전 개시 시기가 거의 겹치는 것도 쉽사리 납득이 갑니다. 이어서 손책은 주유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주유는 단양태수 주상의 대리 자격으로 참전했다─손책의 강동제압 초기의 흐름은 이와 같았습니다.
손책에게 있어 주유의 참전은 매우 마음 든든한 일이었던 듯, 주유를 맞이하면서 "네가 와 준 이상 내 소원은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동을 제압한 거나 마찬가지다)" 라는 말로 환대하고 있지요. 물론 주유 본인의 능력을 높이 사기도 했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단양태수 주상의 협력도 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즉 단양에서 병력 및 물자 조달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실제로도 주유는 참전하면서 군선과 병사, 물자도 함께 가져왔으므로, 기반이 없는 손책에게는 이만큼 반가운 손님도 없었습니다. (다만 단양에서도 장강 이남에 해당하는 지역은 모조리 유요가 깔고 앉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상이 단양태수로 임명되었다고 해도, 단양 전체의 이권을 부여받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죠) 더 나아가서는, 손일문-주일문의 협력관계를 재구성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손견의 전사로 해체되었던 손일문 중심의 호족 그룹이, 손책의 강동제압전 개시와 새기를 같이 하여 재결성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원술의 강동전략에서 최대의 실수는, 손책과 주유로 대표되는 호족 그룹을 하나의 군단으로 묶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지참금이냐고 중얼거린 내게 틀림없이 죄는 없다. (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