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카타 삼국지가 이미 1999년에 <영웅 삼국지>라는 엄청 바보 같은 제목으로 말아먹을(빠드드득) 서울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는 걸 알고 힉겁한 S. 어차피 서울문화사 따윈 해가 서쪽에서 솟아나도 믿지 않으므로 조금도 억울하진 않지만 - 플러스 될 수 있는 한 원서로 읽는 게 장땡이라는 신념 - 왜 여태 몰랐지...!? 필요 이상으로 무덤덤한 문체가 한국인의 뜨거운 감성에 안 맞았나!? (내용은 충분히 뜨겁다고!!?)
이번에 하도 ~殿의 번역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서 생각난 김에 별 거 아닌 것 같으면서 내 눈에서 걸핏하면 피눈물을 뽑는 놈들만 생각나는 대로 쭈욱 모아보았다. 미리 부연하지만 이렇게 시끌시끌하게, 때로는 되게 잘난 척 떠들어대지만 실은 일본어에 정통한 것도 아니고 한국어의 달인인 것도 저언혀 아니다. 나도 좀 그렇게 되어 봤으면 좋겠다;;; 걍 푸념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시라;
① ~殿, ~さん
~さんはいいよ。
姓の後ろに付ければどんな者にでもすぐ尊称になれる。
나름대로 카오루 풍(...).
한국에도 이런 전천후 존칭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S가 허구헌날 울부짖는 ~さん.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지 마랏;) 어디서 봤는지는 까먹었지만 ~さん을 얼마나 쌈박하게 잘 옮기느냐로 그 사람의 번역 센스가 다 뽀록난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랬던 것 같다; 실례로, 길이길이 한국방송사에 남을 걸작 SBS판 슬레이어즈의 훌륭한 번역에 따르면 세계 최강 민폐 팀(...)의 나머지 구성원 네 명에 대한 아멜리아의 호칭은 리나 언니, 가우리 오빠, 제르가디스 오빠, 제로스 님이지만 그거 아나? 이게 일본판에서는 전부 ~さん이다. 아니나다를까 투니버스판은 무식하게도 전부 ~씨로 옮겨져 있다; ~さん과 ~씨는 절대로 1대 1 대응이 아니다 투니버스 번역자! ;;;
실은 그거보다 더 골때리는 게 ~殿다. 이 ~殿라는 게 알고 보면 참 헛갈리는 놈이심. 殿를 단독으로 쓰면 휘하 가신이 자신의 주군 혹은 주공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 뒤에 글자 하나 더 붙여 殿様로 만들면 이건 '영주님' 비스무리한 고유명사가 된다. 실제로 S가 예전 욕망에 사로잡혀 번역한 존이누 님의 단편 <상흔(傷痕)>에서 마고이치는 마사무네 님을 殿様라고 부르고 있다. 고용관계이긴 하지만 완전히 주종관계는 아니므로 殿는 과하고, 어느 정도 친우에 가깝기도 하지만 또 오슈왕에게 경의도 표해야 하는 미묘한 관계니까 殿様. 아 벌써부터 골때리기 시작하누만; 그런데 殿 앞에 성명을 붙여서 ~殿라 부르면 완전히 의미가 달라져 버린다. 성별 나이 적군 아군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함부로 할 수 없는, 즉 어느 정도의 존대가 필요한 상대에게 쓰는 또다른 전천후 존칭이 되는 것이다. 실은 문면만 같지 독음도 다르다. 전자는 との고 후자는 どの니까.
자 이제 진짜로 큰일났다. ~殿는 실상 요즘에 와서는 고리타분한 시대의 유물이 되어 있는 호칭이다. 다시 말해 시대물에서나 쓰이는 놈이란 얘기다. ~さん이야 불완전하나마 '~씨'라는 말도 있고 머리를 죽어라 굴리면 어떻게든 해결되지만, ~殿는... 적당히 대응할 만한 단어가 없고, 머리를 굴리자니 시대물에 약한 내게는 정말로 쥐약이 따로 없다. 최근에 식은땀 흘리면서 던져놨던 고전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는 덴 다 이유가 있다 (먼 눈)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내가 지금도 이 악물고 틈틈이 쓰고 있는 삼국군주 대면식(또 AU냐;) 말이지만, 정말 조조 님과 큰형님과 손책이 한 자리에 모였다면 이들의 상호간 호칭은 일본어의 경우 曹操殿, 劉備殿, 孫策殿로 모든 게 해결된다. 더럽게 편리하다. 차라리 일본어로 쓰고 싶어질 지경이다. (실은 만담은 일본어로 쓰기가 더 쉽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자존심이 있지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으니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겠다.
Q. 이걸 가장 무난하게 한국어로 옮기는 방법은?
조공? 조조 님? 조조 공?
땡. 다 아니다. 답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견이지만;) 조승상, 유황숙, 손토역이다.
실제로도 고대 중국에선 휘도 자도 함부로 대놓고 부를 수 없으니까 성 뒤에 역직명을 붙이는 걸로 해결했는데, 일본 같은 전천후 호칭이 없는 한국인 입장으로선 이게 가장 무난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만사가 OK인 것 같지만, 기실 여기에는 치명적한 결함이 두 가지 있다. 첫째로 무관(無官)인 사람에겐 통용되지 않고;;; 둘째로 그 시점에서 그 사람이 무슨 자리에 있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닷;;; 특히 두 번째는 말이 쉽지 보통 골때리는 문제가 아니다. 손책이 토역장군을 제수받은 게 198년인지 199년인지도 헛갈리는 이 판국에;;; 더구나 이 말을 뒤집으면, 극단적으로 봐서 일본애들은 상업이건 동인이건 삼국지 팬픽을 쓸 때 눈에 불 켜고 역직명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좀 귀찮으면 그냥 무슨무슨 도노, 로 다 슬렁슬렁 넘겨버릴 수 있으니까. 크아악 이 부러운 놈들!!
이렇게 따지면 유키유키의 政宗殿가 얼마나 골치아픈 존재인지가 새삼 골수까지 스며든다. BASARA의 세계에선 역직명이 무의미하니 걍 그걸로 때울 수도 없고 마사무네 공은 이미 일본어에도 政宗公이라는 표현이 있고 政宗殿보다 거리감도 있고 무엇보다 내 마음에도 별로 안 들고 마사무네 님으로 하자니 政宗様와의 차별화가 불가능해지고 게다가 일단은 적인데 그래도 되나 싶고... 악 머리 아파;;; 배째고 BASARA 팬픽 번역 들어가기 전에 며칠을 굴러댕기며 고민한 것도 그래서다.
그나마 유키유키의 政宗殿가 '마사무네 님'으로 대강 낙착 보고 손 털고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히도 유키유키가 나이는 그렇다 치고 입장 상 도노보다 아래였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나를 때아닌 한낮에 무진장 경악시켰던 사나다의 政宗殿(무쌍)->政宗様(무쌍 2)로의 미묘한 변화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하지만 말이지... (크으으윽) (모든 걸 다 얻을 순 없다. 빌어먹을)
여기서 괜히 주의! 주군에 대해서는 이름+殿가 아니라 이름+様로 호칭해야 한다. 존칭이긴 하지만 ~殿는 ~様보다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주군 상대로는 상당히 무례해진다. 코쥬로가 괜히 도노를 政宗様로 부르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내가 무쌍 유키무라를 붙잡고 탈탈 흔들고 싶은 것이다. 왜 政宗「様」냐고!!!)
생각난 김에 한 가지 더. 유키유키의 말버릇 No.1 お館様는 또 다르다. 이걸 주군/주공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어디선가 받은 적이 있는데 안될 말임. 어감이 殿와는 완전히 딴판이기 때문이다. 일일사전을 보면 본디 이 말은「大名・貴人」을 의미함. 그냥 おやかた는 '대빵'이란 뜻이고; 하여간 어거지로 그나마 비슷한 표현을 찾으면 어르신 아니면 대인인데 대인은 무협지 냄새가 너무 나고 가락이 영 안 살아서 기각이고 그래서 여전히 너무 짧고 성에는 안 차지만 어르신. 오야카타사마아아아아아아!! 에 비해서 어르시이이이이이이이인!!! 이라면 가락 안 살긴 마찬가지이나 사치스런 소리할 때가 아니다. 영감이나 대감마님이라고 할 수도 없잖아;;;; 전국무쌍 무인판 한글화 작업을 하신 분의 고충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나 왜 여기로 온 거야!!!
② 君 / あんた
'당신'보다는 격이 낮고, '너'보다는 높고, '자네'보다는 훨씬 정감이 가는 2인칭. 내가 일본의 君에 해당하는 동년배간의 2인칭이 유난히 절실해지는 것은 풀 메탈 패닉을 읽을 때다. 아시다시피 소스케는 카나메를 君라고 부른다. (실은 비단 카나메뿐만이 아니라 또래 여자애들에겐 모두 君지만 대충 넘어가자)
과거편 '북극에서 들려온 목소리'(...제목 맞나? ;)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스케는 서너 살 때 암살자 훈련캠프에 들어가 불과 여덟 살 때 최고 클래스의 암살자로 성장해 그 후 약 10년 온갖 험악한 전장을 진진하게 굴러댕기며 살아온 아이다. 말할 것도 없이 또래 소녀와 접촉해볼 기회 따위는 전혀 없었다. 물론 전장이라고 10대 여자애들이 없을 리도 없고 텟사도 비슷한 나이긴 하지만, '먹을 걱정 잘 걱정 안 하고 태어나서 평생 진짜 총은 구경도 못해 본 평범한 사춘기 소녀'는 말 그대로 난생 처음임. 당연히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잘못 건드리면 다칠 것 같고 도대체 뭘 생각하고 왜 그렇게 감정 기복이 심한지도 깜깜하다. 아직 가까워지기 위해 가야 할 거리는 첩첩산중이요 투닥투닥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정말로 소중하고 알고 싶은 존재인 카나메에 대한 조심스러운 존칭이 君인 셈이다.
이 미묘한 정중함이 정말정말정말정말로 귀여워 죽겠는데 한국어로는 그걸 표현할 수단이 없다...! orz 뉴타입노벨판 풀 메탈 패닉의 번역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소스케의 카나메에 대한 2인칭이 '너'인 걸 보면 좀 읽고 싶다가도 의욕이 절반으로 뚜욱 꺾여버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T.T 역시 주유가 손책에게 君の悪い癖だ 어쩌고 하면서 아주 존대도 아니고 아주 너랑 나랑 맞먹어보자도 아닌 투로 틱틱거리는 것도 되게 좋아하지만 한국어로는... (외면)
あんた도 마찬가지다. '당신'보다는 격이 낮고 (약간 천박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자네'보다 훨씬 격의 없고 그렇다고 막 까대는 것도 아닌 이 2인칭도 한국어로 옮기면 걍 문단에서 죽어버린다. 특히 마사무네 님이 유키유키를 あんた라고 할 때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모에와 피가 솟구치는 느낌을 한국어로 어떻게 전달한담?
③ 綺麗
손책 성별 역전 버전을 룰루랄라 쓰고 있을 때 綺麗에 대응하는 한국어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보통 '아름답다' 혹은 '예쁘다' 로 번역되는 綺麗지만 실은 이 단어는 저 두 가지 표현의 대략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아 정말이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조형의 단정함이나 깔끔함을 논하는 데서 벗어나 막연하나마 청량하면서 무언가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단어가 綺麗다. 이 말에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무겁고 '예쁘다'는 말은 깃털처럼 가볍다. 더구나 존경해 마지 않는 샐리 님도 지적하신 일이지만 한국어의 '예쁘다'는 오히려 일본어의 可愛い와 더욱 잘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 '곱다'는 말은 논외다. 지금 신소설 쓰는 것도 아니고;
성별 역전 버전의 손책에겐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정통적 의미의 미녀는 저어어얼대로 아니고 그렇다고 예쁘장한 것도 아니고 근데 보고 있으면 넋이 쏙 빠질 것 같은 중간 영역의... 아 젠장 설명이 안 돼!!! ;;;; 綺麗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문장이다. 억울해라... orz
젠장 누구냐! 일본어가 쉽다는 날구라를 깐 놈은!!! 이렇게 기본적인 단어에서부터 벌써 비틀거리는데!! (쳐울기)
나를 울리는 일본어들.
Still not a translation | 2006/10/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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