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굴러들어간 블로그에서 기타카타 삼국지의 열렬한 팬이신 모님의 '제갈량/주유 쌍대청승과부론'(오타 아님)을 읽고 - 틀림없이 동인의 별이 나를 그리로 인도하신 것이리라 하아하아하아하아(....) - 무시무시한 기세로 재연소하고 말았다. 모에로 파이어!! 타올라라 나의 코스모여!!
예전에도 제갈량/주유 동족혐오설을 주절주절 떠들어댄 적이 있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경우가 참으로 비슷하다. 근 동시대의 충신 두 사람이 다 죽은 놈이 휘떡 던져두고 간 꿈을 짊어지고 (기타카타 대이이이이이인!!!) 있는 순정 없는 일편단심 다 바치다 몸은 몸대로 상하고 결국 과로사로 죽는 열녀비감 과부 팔잘 빡세게 타고났다니 그저 습기만이 안구를 굼실굼실 채웁니다요 오라버니. 유비야 나이도 나이였고 병도 들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억지로 납득한다손 쳐도 소패왕 그 인간은... 어이구 말을 말자 말을 말어. (한숨)
그래서 나는 곧 죽어도 수어에 단금파. 아니 좀 더 정확히 따지자면 주유->손책에 제갈량->유비가 무진장 뜨겁다. 그치만, 자고 일어날 때마다 하나씩 새로 홀리는 게 일인 남자 자석과 남자 꼬시는 데 도튼 카리스마 비머가 남자 하나한테 잘도 묶여 있겠거니와 큰형님에게 일단 최고 우선순위는 덩치 크고 한 귀염하는 이쁜(...) 동생들이고 소패왕은 동생도 동생이지만 조강지처와는 심정적으로 너무 가까운 나머지 제일 연애질 비슷한 짓거리는 저어기 동래에서 굴러들어온 태사무시기 씨와 하고 있을 거란 심증이 강력하게 드는 데다, 과부는 보답을 못 받을수록 모에인 법이다(뭣)
그러고 보니 겐 상 생일은 물론이고 실은 주유의 기일(12월 3일)도 못 챙... 실은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는데(...팬 맞냐;) 생각이 드디어 미쳤음. 그나마 12월 3일은 음력이란 게 유일한 구원인가.... (먼 눈)
하여간 그런 이유로 지하의 주공근을 향해 머리 박고, 주유전 Part 3에 들어갑니다. 어... 얼마만이냐 이거;;;;
무단으로 퍼 가실 분은 없으시죠?
제 4장. 손책과 함께(孫策と共に)
그럼, 손책의 강동제압군 내에서 주유의 역할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진수의 기술을 순서대로 따라가 봅시다.
주유는 손책의 휘하에 들어가 횡강(横江)・당리(当利)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킨 후, 한층 진군해 말릉(秣陵)에서 작융(笮融)과 설례(薛礼)를 격파하였다. 직후 진로를 바꾸어 호숙(湖孰)・강하(江乗)를 점령하고 곡아(曲阿)에까지 침공하니 유요(劉繇)는 도망하였다. (주유전)
원 세상에, 손책의 진군 경로 고대로군요. 다시 말해 주유는 손책군에서 부대장(部隊長) 혹은 참모의 위치였다는 말이죠. 게임이나 소설 등의 영향으로 주유는 군사로서의 이미지가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를 말하자면 주유가 군사의 역할을 수행한 일은 지극히 드뭅니다. 적벽대전에서도 그 이후의 강릉(江陵)제압전에서도 주유는 사령관이었습니다. 주유가 군사로써 활약한 적이 있다면 오로지 손책의 단양(丹楊)공략전 당시뿐입니다. 우저(牛渚)의 요새에 비축된 물자의 거취를 미리 냄새맡고 유요군 각 부대의 행동을 예측하여 선수를 치는 등의 작전에서 주유의 재능이 마음껏 발휘되었으리란 사실은 안 봐도 뻔하지요. 적벽대전에서도 그랬다시피 정확한 정보 수집과 상황 판단은 바로 주유를 위한 분야였고 그의 십팔번이었습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단양공략전에서 주유는 항시 손책과 함께 하고 있었으므로 단독으로 세운 전공이랄 게 없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단독으로 수훈을 세운 건 주치와 여범이었어요. 이 시점에서 주유의 공적은, 단양 공략에 필요한 병사, 물자, 군선을 조달한 것, 그리고 첩보 활동을 통한 정확한 정보 수집, 이렇게 두 가지였습니다.
그럼 단양공략전 이후의 주유를 살펴봅시다.
손책은 "이만한 군세가 갖추어진 이상, 나 혼자서도 오(呉)와 회(会)를 수중에 넣고 산월(山越)을 충분히 평정할 수 있겠지. 그대는 돌아가서 단양의 기반을 굳혀 주게." 라고 주유에게 말하였다. 주유는 단양으로 귀환했다. (주유전)
단양공략전 이후의 주유는 손책과는 별개 행동을 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손분과 오경도 원술 휘하로 돌아갔으므로, 다시 말해 손책은 이때부터 단독으로 오군과 회계군의 공략을 추진한 셈입니다. 오군과 회계군에서 원술에 대한 손일문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해서였지요.
한편 주유는, 심정적이야 어찌 되었건 입장 상으로는 완벽하게 원술 진영의 일원이었습니다. 단양태수 주상(周尚)의 대리 자격으로 참전한 이상, 단양 공략에 성공한 지금 돌아가서 치안 유지에 힘쓰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었지요. 실은 단양에는 산월족이 도사리고 있어 치안이 좋다고는 빈말로도 할 수 없는 지방이었는데다, 손책이 말릉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었기 때문에 단양 서쪽의 6현에는 아직 손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양 공략이 성공한 건 좋았지만 꾸물대다 산월에게 통치권을 빼앗기는 날에는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될 판이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주유는 단양 유지에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어요.
아니나다를까 손책이 회계 공략에 나섰을 무렵, 태사자가 단양태수를 자칭하고 산월족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대략 196년 경의 일입니다. 태사자의 토벌을 마무리한 사람은 회계군을 집어삼키고 단양으로 돌아온 손책이었지만, 그 사이의 약 1년간 태사자는 단양군을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반란 세력의 일원인 조랑(祖郎)도 같은 시기에 단양에 자리잡고 있었고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주유는 태사자와 조랑 등 반란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고 단양 동쪽의 통치권을 유지할 책무를 짊어졌을 테고, 주력이 오군과 회계군으로 출장나간 상황이었으니 거의 주유 혼자서 단양 동부의 통치권 확보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겠지요. 정사에는 이렇게 수수한 공적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오군・회계군 토벌전이 진행되는 사이 단양을 잘 지켜낸 주유의 공적은 참으로 크다 하겠습니다.
제목부터 절라 우울하다. 앞으로 어이 될지도 모르고 3년만에 재회한 게 그저 좋아서 열심히 빨빨빨빨 뛰어댕기는 주공근을 보라. 젠장 눈물부터 좀 닦자;;;;
제 5장. 단양태수 교대극의 진상(丹楊太守交代劇の真相)
196년 경에 주유에게 하달된 책무는, 단양 동부의 지배권을 조랑・태사자・산월 등의 공세에서 지켜내고 기반을 굳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손책은 오・회계군의 토벌에 나서, 양쪽을 1년이 채 못 되는 사이에 제압하고 맙니다. 다만 제압했다고는 해도 완전히 수중에 넣은 것은 아니고, 오와 회계의 태수의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냈을 뿐이었지만요. 손책이 앞뒤 가리지 않고 후딱 영토를 넓히는 일에만 집중한 이유는, 원술과 결별했을 때 손일문이 우위를 확보한 토지를 한뼘이라도 더 벌어두기 위해서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원술과 손을 끊을 시기가 닥쳐왔습니다. 원술이 주유의 숙부인 주상을 대신하여 사촌 원윤(袁胤)을 새로운 단양태수로 파견한 것이죠. 이때 주유는 원술의 명령을 받아들여 숙부 주상과 더불어 수춘(寿春)에 돌아가기로 합니다.
이 단양태수 교대 시기에 언제였는지는 정사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언급되는 것도 주유전・서곤전(徐琨伝)・손보전(孫輔伝) 세 개뿐이고요. 이 셋의 기술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손책이 원술과 절연하고 그에 따라 주유가 원술의 휘하에서 벗어난 것이 198년.
● 원윤을 힘으로 쫓아낸 서곤은 그대로 단양태수에 취임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오경(呉景)이 강동에 돌아왔기 때문에 이미 단양에서 인심을 얻고 있었던 오경이 다시 단양태수가 되었다.
● 원윤이 추방된 후, 원술은 조랑에게 인수를 주어 손책에 대한 공격을 선동했다. 이 때문에 손책은 조랑 토벌에 나선다.
위의 사실들로 볼 때, 먼저 원윤 추방사건과 주유・오경 등의 강동 탈출은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연속적으로 일어났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유도 오경도 이렇게 될 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거죠. 또한 조랑 토벌과 태사자 토벌이 거의 같은 시기에 벌어졌을 것이라 보는 편이 자연스러우므로, 조랑을 격파한 것은 손책이 회계군에서 귀환한 이후입니다. 시기적으로 197년~198년 경의 사건인 셈이죠. 즉 원윤은 손책이 회계제압전에서 귀환한 직후에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역산하면 원술이 주상과 원윤을 교대시킨 것은 196년 경, 유요가 패퇴하고 손책이 회계 제압에 나섰을 무렵으로 여겨집니다. 예전 손책이 여강(廬江)의 육강(陸康)을 토벌했을 때, 손책을 여강태수로 삼겠다고 약조해 놓고 실제로는 유훈(劉勲)을 지명한 경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전공은 손책이 세우고 얻은 토지는 심복 부하가 받아가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딴놈이 챙기는 원술의 방침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던 거지요.
자, 그럼 이 태수 교대극에 주유가 순순히 응한 이유는 뭘까요? 물론 당시의 주군은 엄연히 원술이었으니 명령에 따르는 게 합리적이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론 손책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단양태수 교대사건은 손책이 회계로 원정을 나가 있었을 무렵에 터졌으리라 여겨집니다. 만약 손책이 단양에 돌아온 후였더라면, 손책이 이걸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리도 만무하거니와 주유가 원술 휘하로 가는 일도 없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손책은 머나먼 회계에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주유는 독단으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주유와 주상이 태수 교대를 거부한다면, 손일문이 원술에게 딴 마음을 먹고 있는 것이 명백해져, 까닥하다간 오・회계・단양 세 곳에서 허공(許貢)・왕랑(王朗)・원술을 상대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오・회계 토벌은 순전히 손책의 독단으로 명령에도 없는 행동이었으므로, 주유의 결단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봐야 하겠지요. 이리하여 주유는 한동안 원술의 휘하에 머무르게 됩니다.
재회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단신부임이삼. 뭐 어쩌겠수. 복없는 것도 지 팔자고 운없는 것도 지 천명이라는데 (먼 눈)
제 6장. 탈출(脱出)
주유가 원술의 휘하로 들어갔을 때, 주유전에 따르면 '원술은 주유를 부장(部将)으로 삼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유는 거소현(居巣県)의 현령을 맡겠다고 질기게 버텨, 결국 원술은 이를 용인합니다. 거소는 소호(巣湖 : 합비合肥・유수濡須 근방) 기슭에 위치한 장강유역의 지역이었습니다. 군부(軍部)에 한 번 적을 두면 여차직할 때 행동이 어려워집니다. 손분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군에 몸을 담은 손분은 결국 처자까지 버리고 강동으로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유가 거소현의 현령을 자청하고 나선 것은 언젠가 단양에서 손책이 사고를 칠 때를 대비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손분의 비극을 보아도 주유의 선견지명은 한층 빛이 납니다. 그뿐만일까요, 거소현에 머물러 있을 시기에 주유는 노숙(魯粛)과 교분을 맺었습니다. 노숙전에는 예의 노숙이 두 개 창고 중의 하나를 인심좋게 주유에게 개방한 일화가 실려 있는데, 이를 사실적으로 판단하면 주유는 여강 부근의 유력 호족들과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그 중에서 원술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던 호족이 노숙이었던 셈이고, 결국 그 후 주유는 노숙과 함께 강동을 탈출하게 됩니다.
한편, 회계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손책은 대뜸 단양태수로 부임한 원윤 몰아내기에 나섰습니다. 서곤에게 명하여 원윤을 단양에서 쫓아내고, 동시에 원술 막하의 손일문과 연이 닿는 사람들에게 작업을 건 것입니다. 이것은 즉 손일문이 원술에게서 독립함을 의미했지요. 결국 주유, 손분, 오경 등 손일문 관계자들은, 각자의 태도에 온도 차는 좀 있었을지언정 원술을 버리고 강동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손책은 물론 그들을 우대했지만, 주유는 특히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웃음) 주유가 강동에 도착했을 때, 손책은 직접 주유를 마중나온 것은 물론, 건위중랑장(建威中朗将)의 지위를 제수하고 그 자리에서 병사 2000명과 군마 50필을 안겨줬습니다. 당시의 손책은 아직 토역장군을 제수받지 않았으므로, 중랑장이 주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겠지요. 파격적인 우대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또 오경이나 주치는 태수직에 임명되어 내정으로 돌려진 데 반해, 주유는 손책 직속의 군부로서 활동하게 됐다는 것도 알 수 있죠. 주유에게 태수직을 주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손책이 주유에게서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기대했고, 둘째 주유 자신이 너무 젊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당시의 주유는 24세, 태수가 되기에는 다소 젊은 나이였죠. 하긴 동갑인 손책은 자칭 회계태수였습니다만. 이 젊은 영걸 두 사람은 손랑(孫郎)과 주랑(周郎) - 도련님과 비슷한 뉘앙스입니다 - 이라고 불리며, 강동에서는 아이돌 흡사한 대접을 받고 있었어요. (웃음)
여하튼 다시금 손책에게로 돌아온 건 좋았지만, 전황은 급변하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 틈도 없었습니다. 당장 우저(牛渚)의 수비를 맡게 된 주유는 원술의 반격에 대비합니다. 그 무렵 손보도 역양(歴陽)에 포진하고 있어, 원술과의 사이에는 다소나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어요. 한편으로 손책은 손이 미치지 못했던 단양 서부 6현의 평정을 개시하여 태사자와 조랑을 격파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술은 조랑에게 인수까지 넘겨주며 선동을 했으므로, 당시의 손책군은 태사자 및 조랑을 토벌하면서 원술의 동정도 살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유는 태사자・조랑 토벌전에는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참전한 사람은 여범과 정보 등이었지요.
단양 서부 6현을 제압한 후 주유는 춘곡현(春穀県)의 현령이 됩니다. 춘곡은 단양 서부에 위치한 현으로 반란이 빈발하던 지역이었지요. 주유의 반란진압능력을 높이 산 기용입니다. 이렇게 반란이 일어나기 쉬운 현에 정보・황개・주유 등의 군인을 현령으로 파견하는 것은 손오 정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지요.
이 무렵 손책의 주유 기용법은, 정보 등 다른 인물들과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서 재미있어요. 정보의 경우는 명백하게 선봉・진두지휘능력을 높이 사고 있지요. 정반대로 주유는 후방지원・후방방어・첩보담당을 주로 맡고 있습니다. 이때 또다른 부대지휘관으로 활약한 여범은 별동대의 지휘를 맡을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정보가 전장에서의 무력을 높이 평가받은 데 비해, 주유는 넓은 시야로 전모를 파악하고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점을 평가받은 것이죠. 조금 다른 시점에서 보자면, 원술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은 이상 주유를 대놓고 기용할 수는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만.
여러분은 남자 일편단심에는 약도 없다는 진리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어쩜 매 장마다 투덜대고 탄식하고 혀를 끌끌 차야 하는 거냐 이 청승생과부, 이 웬수야아아아아아아아아
하여간 이래서 제갈량과 주유를 쌈붙여봤자 하등 소용없다는 것이다. 보다시피 주유는 뼛속까지 군인이고
제갈건담 공명 선생은 세상이 다 알다시피 내정 전문의 엑스퍼트였는걸. 분야가 다른 사람끼리 니가 잘났네 내가 옳네 암만 싸워봤자 MS와 MF의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다 (비유가? ;;;) 난 마징가가 센지 태권V가 센지 궁금해하는 소년도 아니고 소년인 줄 착각하는 맨도 아니라서 그런 문제는 논외로 하겠음.
....그나저나 남편이 출장간 사이에 곱게 앉아 집을 성심껏 지키는 마눌님을 보는 듯한 이 환각은 뭐지.... (삐질삐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