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li.님의 후의에 의한 미칠듯이 이상적인 유책....인가? 하여튼 단금 단편을 읽은 후 피를 서 말이나 토하고 쓰러졌다. 아... 아니되옵니다...! 이런 걸 써주시면...! 감사의 마음만 있는 힘껏 우겨넣은 민폐성 답변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되풀이하다 결국은 한 바퀴 돌아서 약 6개월 전에 하다 말았던(...) 주유전 해설로 되돌아왔음. 아~이 현금 같은 여자.
그럼 분발하여 뚝딱 해치운 Part 4 나갑니다. 이런 퀄리티를 퍼갈 분, 없으시죠?
그런데 우리 집 유책...인가? 하여간 단금은 바보커플입니까. 바보커플이었군 일단 모양만은.
제 7장. 중호군・주유(中護軍・周瑜)
두 번 다시, 다. 두 번 다시.
근데 어쩜 TOP 3를 최고 심복으로만 쏙쏙 골라놨냐. 불타게스리.
손책이 단양・오・회계의 제압을 근 마무리짓고 여강(廬江) 공략에 나선 것은 199년이었습니다. 본 여강공략전의 일련의 흐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여강의 유훈이 예장군(豫章郡) 상료(上繚) 토벌에 나서도록 선동한다.
● 유훈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환성(皖城)을 급습.
● 팽택(彭沢)에서 매복, 돌아오는 유훈을 공격.
● 서새산(西塞山)에 틀어박힌 유훈을 토벌.
● 사이(沙羨)에서 황조와 대결.
이와 같이 여강공략전은 예장군 제압과 황조 토벌을 동시에 겸한, 단양공략전 이래 최대의 대형군사행동이었습니다. 주유는 중호군(中護軍)・강하태수(江夏太守)로써 본 공략전에 참가했지요.
중호군은 본디는 중군(中軍), 즉 수도방위군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중앙군(中央軍), 즉 주력부대를 가리킨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본 공략전에서 주유는 주력부대의 장관 중 하나로써 참전했다는 말이죠. 이제까지는 원술과의 관계도 있어 주유는 후방지원・후위방어・첩보활동 등을 주로 담당했었지만, 이 무렵부터 주유 단독의 행군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강하태수 쪽은 이름뿐인 관직입니다. 적벽대전 후에 손권이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취임한 것과 마찬가지죠. 사실상 손오 정권이 강하까지 세력권을 넓히는 건 적벽대전 이후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럼 잠시 손책전에 기술되었던 황조토벌전에 참전한 부장들의 명단을 살펴볼까요.
● 강하태수・건위중랑장(建威中朗将) 주유
● 계양태수(桂陽太守)・정로중랑장(征虜中朗将) 여범
● 영릉태수(零陵太守)・탕구중랑장(蕩寇中朗将) 정보
● 행봉교위(行奉校尉) 손권
● 선등교위(先登校尉) 한당
● 무봉교위(武鋒校尉) 황개
여기서 태수직을 배령한 사람은 주유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번듯한 간판 하나 달아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주력부대는 주유, 여범, 정보 세 사람이므로, 이들이 각각 중호군・좌호군(左護軍)・우호군(右護軍)을 맡았으리라는 예상도 가능합니다. 그나저나 정보와 여범을 제쳐두고 주유에게 덜컥 중호군을 줘 버린 것에서, 주유에 대한 손책의 절대적인 신뢰가 똑똑히 보여 재미있습니다.
본 공략전에서 주유는 주력부대로서 환성→서새산→사이의 순으로 군을 움직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와중에 환성에서는 강동제일의 미인자매로 명망도 드높았던 대교와 소교를 얻어 손책과 더불어 처로 맞아들였고요. 조비의 진황후 약탈사건과 경위가 매우 흡사한 만큼, 필경 이 두 사람은 환성을 공격할 때 이미 교자매를 수중에 넣는 것도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었겠지요 (웃음) 틀림없다니까요. 아~부러워라.
여강공략전은 정보・행군・통술・계략 등 어느 측면을 보아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전투였습니다. 손책=총사령관, 주유=주력부대 통솔이라는 손책・주유 콤비의 베스트 패턴이 유감없이 본령을 발휘한 전투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불행히도 손책・주유 골든 콤비가 구현된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고, 재현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 여강의 유훈이 예장군(豫章郡) 상료(上繚) 토벌에 나서도록 선동한다.
● 유훈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환성(皖城)을 급습.
● 팽택(彭沢)에서 매복, 돌아오는 유훈을 공격.
● 서새산(西塞山)에 틀어박힌 유훈을 토벌.
● 사이(沙羨)에서 황조와 대결.
이와 같이 여강공략전은 예장군 제압과 황조 토벌을 동시에 겸한, 단양공략전 이래 최대의 대형군사행동이었습니다. 주유는 중호군(中護軍)・강하태수(江夏太守)로써 본 공략전에 참가했지요.
중호군은 본디는 중군(中軍), 즉 수도방위군을 뜻하는 말이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중앙군(中央軍), 즉 주력부대를 가리킨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본 공략전에서 주유는 주력부대의 장관 중 하나로써 참전했다는 말이죠. 이제까지는 원술과의 관계도 있어 주유는 후방지원・후위방어・첩보활동 등을 주로 담당했었지만, 이 무렵부터 주유 단독의 행군을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강하태수 쪽은 이름뿐인 관직입니다. 적벽대전 후에 손권이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취임한 것과 마찬가지죠. 사실상 손오 정권이 강하까지 세력권을 넓히는 건 적벽대전 이후의 일이었으니까요. 그럼 잠시 손책전에 기술되었던 황조토벌전에 참전한 부장들의 명단을 살펴볼까요.
● 강하태수・건위중랑장(建威中朗将) 주유
● 계양태수(桂陽太守)・정로중랑장(征虜中朗将) 여범
● 영릉태수(零陵太守)・탕구중랑장(蕩寇中朗将) 정보
● 행봉교위(行奉校尉) 손권
● 선등교위(先登校尉) 한당
● 무봉교위(武鋒校尉) 황개
여기서 태수직을 배령한 사람은 주유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번듯한 간판 하나 달아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주력부대는 주유, 여범, 정보 세 사람이므로, 이들이 각각 중호군・좌호군(左護軍)・우호군(右護軍)을 맡았으리라는 예상도 가능합니다. 그나저나 정보와 여범을 제쳐두고 주유에게 덜컥 중호군을 줘 버린 것에서, 주유에 대한 손책의 절대적인 신뢰가 똑똑히 보여 재미있습니다.
본 공략전에서 주유는 주력부대로서 환성→서새산→사이의 순으로 군을 움직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와중에 환성에서는 강동제일의 미인자매로 명망도 드높았던 대교와 소교를 얻어 손책과 더불어 처로 맞아들였고요. 조비의 진황후 약탈사건과 경위가 매우 흡사한 만큼, 필경 이 두 사람은 환성을 공격할 때 이미 교자매를 수중에 넣는 것도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었겠지요 (웃음) 틀림없다니까요. 아~부러워라.
여강공략전은 정보・행군・통술・계략 등 어느 측면을 보아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전투였습니다. 손책=총사령관, 주유=주력부대 통솔이라는 손책・주유 콤비의 베스트 패턴이 유감없이 본령을 발휘한 전투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불행히도 손책・주유 골든 콤비가 구현된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고, 재현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번 다시, 다. 두 번 다시.
근데 어쩜 TOP 3를 최고 심복으로만 쏙쏙 골라놨냐. 불타게스리.
제 8장. 예장 제압(豫章制圧)
카리스마 군주의 신뢰는 언제나 분골쇄신 세제곱으로 갚아야 하는 법. 미주랑의 어깨가 무겁다.
손책군은 사이(沙羨)에서 황조를 격파했지만, 그대로 여세를 몰아 강하(江夏) 제압에 돌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돌입할 수 없었다고 해야겠지요. 황조 토벌은 어디까지나 부친 손견의 원수이자 양주(揚州) 제압의 연장선상에서 손 봐 줄 필요가 있는 자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줬다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전에 예장군부터 제압해야 할 필요가 있었죠.
당시 예장군의 정세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손책의 여강공략전 및 황조토벌전 무렵에 유요가 병사했습니다. 그 후에 예장태수가 된 게 화흠(華歆)이었지만 그로서는 예장군 전체를 총괄하기엔 역부족이었죠. 여릉(盧陵)에서는 동지(僮芝)가 여릉태수를 자처하고 나섰고요.
(주 1) 이때의 여릉은 아직 군(郡)이 아니었습니다. 예장군 제압 후에 손책이 예장군을 예장과 여릉으로 분할했지요. 따라서 이 시점에서 동지가 여릉태수라 자인한 것은 순전히 날조입니다 (웃음) 하지만 광대한 예장군을 남북으로 분할해서 통치하자는 손책의 발상은, 어쩌면 동지가 여릉태수를 자칭하고 나선 데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주 2) 손책전에 대해서 썼을 때는 시기가 이상하다고 여겨서 유요가 사망한 시점을 197년 경으로 잡았습니다. (주된 이유는 태사자가 예장 정찰에 나섰을 때 이미 유요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적으로 봐서 그 무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시점을 바꿔서 태사자가 예장을 정찰한 것이 황조 토벌 이후였다고 가정한다면 전체적인 흐름엔 문제가 없어요. 다만 그 경우에는 태사자도 손책과 더불어 황조 토벌에 참전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겠죠. (만약 태사자가 이때 단양[丹楊]에 있었다면, 손책은 일부러 단양에서 태사자를 불러들여 예장 정찰을 명했다는 말이 됩니다) 허나 황조토벌군 참가 무장의 명단에는 태사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아무래도 후방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으~음, 모르겠네요.
(주 3) 주석이란 건 참 편한 방식이에요(웃음). 문장의 정합을 일일이 따질 필요도 없고 나중에 덧붙여도 되니까요. (어이!) 태사자전을 잘 읽어보면, 태사자도 황조 토벌에 참전했다고 여겨지는 기술이 있습니다. 태사자는 마보(麻保)라는 곳에서 반란군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이 마보는 온전히 강하군입니다. 하구(夏口)도 지나쳐서 오림(烏林) 근처쯤이에요. 그런 지역의 도적 토벌에 나선 건 아무래도 황조 토벌의 시기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태사자는 이미 절충중랑장(折衝中郎将)이었으니만큼 일군을 이끌고 있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주유와 비교하면 보유 병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겠지요. 마보의 도적은 역시 황조 휘하의 자들인 걸로 여기는 게 온당하겠고요. 그렇다면, 황조토벌전 당시 상당히 철저하게 황조를 분쇄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동안 예장에서 나올 꿈도 꾸지 못하도록.
주유와 상관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잖아! 화흠은, 당시 이미 조조와 꿍짝이 맞고 있었던 손책이 오자마자 저항할 이유도 없다면서 순순히 항복해 손책의 상객(上客)이 됩니다. 이리하여 예장제압은 일단 종료. 손책은 강동으로 회군합니다. 단양・오・회계와 마찬가지로 이제 남은 일은 반란세력의 일소뿐이죠. 예장은 반란세력도 많을 뿐더러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지역이었지만, 현시점에서 최대의 맞수는 자칭 여릉태수 동지였습니다. 동지 토벌을 위해 예장의 군도(郡都)인 남창(南昌)에 남은 장수는 손분, 손보, 그리고 주유였어요. 손분과 손보는 이 무렵 각각 예장태수와 여릉태수로 임명되어, 오경과 같이 일군의 통치도 맡겨진 상태였지요. 한편 여범은 파양(鄱陽)의 반란세력 토벌에 나섰습니다. 덧붙이자면 태사자는 이후 건창도위(建昌都尉)로써 예장군 서부의 수비를 담당하게 됩니다. 손책은 강하와는 달리 예장을 완전히 병합할 작정이었죠.
(주) 어쩐지 주유전은커녕 손책의 예장제압전의 경위를 보충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과히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황조토벌전과 그 후 손오의 각 부장들의 배치가 꽤 유쾌한 관계로 한 번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먼저 환성・서새산・사이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군에는 손책군의 주력 부장 대부분이 참전했습니다. 단양・오・회계의 수비는 어쩌고!? 라고 묻고 싶어질 지경이죠(웃음). 남은 사람은 오에 주치, 단양에 오경, 회계에 하제(賀斉) 정도였고요. 그리고 황조토벌전까지 참가한 무장을 보자면, 손분・손보(유훈토벌전 당시에는 별동대로 활약했고요), 서곤(徐琨, 황조토벌전에서 전사), 태사자(태사자전에 마보의 도적을 쳤다는 기술이 남아 있습니다), 주역(^^;)인 주유에서부터 정보・황개・한당・장흠・주태・진무・동습・여범 등등등 이 시점에서 군속이었던 자는 거의 대다수가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황조토벌전 이후의 동향을 보자면,
● 예장 군도인 남창에 주둔……손분・손보・주유
● 파양의 반란군 제압……여범・한당
● 단양으로 귀환……정보・황개
이와 같습니다. 그 외의 무장은, 이때는 아직 일군을 통솔할 장수로서의 역량이 충분치 못하였으므로 상세한 사항은 불명입니다. 다만 장흠과 주태는 각각 갈양현(葛陽県)과 선춘현(宣春県)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예장군 반란 진압의 일환을 담당했지요.
하여간 이 시점에서 군속의 TOP 3는 주유, 정보, 여범 세 사람이었습니다. 손분과 손보는 예장과 여릉의 태수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므로, 그를 제하면 동지토벌전의 주력으로써 손분과 손보의 보좌를 맡게 된 것이 주유, 예장의 또다른 반란세력의 거점인 파양토벌전의 주력이 된 것이 여범, 아직 정세가 안정되지 않은 단양 서부의 경비를 담당한 것이 정보. 이런 식으로 깨끗이 정리됩니다. 이걸 보면 세 사람을 톱으로 내세우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주유에게 일임했음을 알 수 있지요. 여범은 툭하면 별동대 지휘입니다. 정보는 본진의 선봉역이라고 봐야 하나요?
이야기가 탈선했습니다만, 동지토벌전으로 되돌아가죠 ^^;
남창에 주둔하는 손분, 손보, 주유 세 사람 중에서, 최고상관이면서도 제일 손책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던 사람은 손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손책이 일부러 "당신을 이곳 예장에 두는 건, 동지 토벌의 기회를 노려 적절한 시기에 함락시키기 위해섭니다" 라고 못을 박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주유를 보좌로 붙여준 것도 손분의 상황판단력을 손책이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죠. 다시 말해 군사이자 감시역인 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유를 손분의 감시역으로 고른 것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동지가 병에 걸렸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이런 첩보전략은 주유의 장기 중의 장기죠) 단숨에 동지토벌에 착수하여 주유는 파구(巴丘)까지, 손보는 한층 더 진군하여 여릉을 제압했습니다. 이로써 손책의 예장 병합이 완료되었습니다.
당시 예장군의 정세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손책의 여강공략전 및 황조토벌전 무렵에 유요가 병사했습니다. 그 후에 예장태수가 된 게 화흠(華歆)이었지만 그로서는 예장군 전체를 총괄하기엔 역부족이었죠. 여릉(盧陵)에서는 동지(僮芝)가 여릉태수를 자처하고 나섰고요.
(주 1) 이때의 여릉은 아직 군(郡)이 아니었습니다. 예장군 제압 후에 손책이 예장군을 예장과 여릉으로 분할했지요. 따라서 이 시점에서 동지가 여릉태수라 자인한 것은 순전히 날조입니다 (웃음) 하지만 광대한 예장군을 남북으로 분할해서 통치하자는 손책의 발상은, 어쩌면 동지가 여릉태수를 자칭하고 나선 데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주 2) 손책전에 대해서 썼을 때는 시기가 이상하다고 여겨서 유요가 사망한 시점을 197년 경으로 잡았습니다. (주된 이유는 태사자가 예장 정찰에 나섰을 때 이미 유요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적으로 봐서 그 무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시점을 바꿔서 태사자가 예장을 정찰한 것이 황조 토벌 이후였다고 가정한다면 전체적인 흐름엔 문제가 없어요. 다만 그 경우에는 태사자도 손책과 더불어 황조 토벌에 참전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겠죠. (만약 태사자가 이때 단양[丹楊]에 있었다면, 손책은 일부러 단양에서 태사자를 불러들여 예장 정찰을 명했다는 말이 됩니다) 허나 황조토벌군 참가 무장의 명단에는 태사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 아무래도 후방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으~음, 모르겠네요.
(주 3) 주석이란 건 참 편한 방식이에요(웃음). 문장의 정합을 일일이 따질 필요도 없고 나중에 덧붙여도 되니까요. (어이!) 태사자전을 잘 읽어보면, 태사자도 황조 토벌에 참전했다고 여겨지는 기술이 있습니다. 태사자는 마보(麻保)라는 곳에서 반란군을 토벌했다고 하는데, 이 마보는 온전히 강하군입니다. 하구(夏口)도 지나쳐서 오림(烏林) 근처쯤이에요. 그런 지역의 도적 토벌에 나선 건 아무래도 황조 토벌의 시기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태사자는 이미 절충중랑장(折衝中郎将)이었으니만큼 일군을 이끌고 있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주유와 비교하면 보유 병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겠지요. 마보의 도적은 역시 황조 휘하의 자들인 걸로 여기는 게 온당하겠고요. 그렇다면, 황조토벌전 당시 상당히 철저하게 황조를 분쇄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한동안 예장에서 나올 꿈도 꾸지 못하도록.
주유와 상관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잖아! 화흠은, 당시 이미 조조와 꿍짝이 맞고 있었던 손책이 오자마자 저항할 이유도 없다면서 순순히 항복해 손책의 상객(上客)이 됩니다. 이리하여 예장제압은 일단 종료. 손책은 강동으로 회군합니다. 단양・오・회계와 마찬가지로 이제 남은 일은 반란세력의 일소뿐이죠. 예장은 반란세력도 많을 뿐더러 여러가지로 골치아픈 지역이었지만, 현시점에서 최대의 맞수는 자칭 여릉태수 동지였습니다. 동지 토벌을 위해 예장의 군도(郡都)인 남창(南昌)에 남은 장수는 손분, 손보, 그리고 주유였어요. 손분과 손보는 이 무렵 각각 예장태수와 여릉태수로 임명되어, 오경과 같이 일군의 통치도 맡겨진 상태였지요. 한편 여범은 파양(鄱陽)의 반란세력 토벌에 나섰습니다. 덧붙이자면 태사자는 이후 건창도위(建昌都尉)로써 예장군 서부의 수비를 담당하게 됩니다. 손책은 강하와는 달리 예장을 완전히 병합할 작정이었죠.
(주) 어쩐지 주유전은커녕 손책의 예장제압전의 경위를 보충 설명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과히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황조토벌전과 그 후 손오의 각 부장들의 배치가 꽤 유쾌한 관계로 한 번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먼저 환성・서새산・사이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군에는 손책군의 주력 부장 대부분이 참전했습니다. 단양・오・회계의 수비는 어쩌고!? 라고 묻고 싶어질 지경이죠(웃음). 남은 사람은 오에 주치, 단양에 오경, 회계에 하제(賀斉) 정도였고요. 그리고 황조토벌전까지 참가한 무장을 보자면, 손분・손보(유훈토벌전 당시에는 별동대로 활약했고요), 서곤(徐琨, 황조토벌전에서 전사), 태사자(태사자전에 마보의 도적을 쳤다는 기술이 남아 있습니다), 주역(^^;)인 주유에서부터 정보・황개・한당・장흠・주태・진무・동습・여범 등등등 이 시점에서 군속이었던 자는 거의 대다수가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황조토벌전 이후의 동향을 보자면,
● 예장 군도인 남창에 주둔……손분・손보・주유
● 파양의 반란군 제압……여범・한당
● 단양으로 귀환……정보・황개
이와 같습니다. 그 외의 무장은, 이때는 아직 일군을 통솔할 장수로서의 역량이 충분치 못하였으므로 상세한 사항은 불명입니다. 다만 장흠과 주태는 각각 갈양현(葛陽県)과 선춘현(宣春県)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예장군 반란 진압의 일환을 담당했지요.
하여간 이 시점에서 군속의 TOP 3는 주유, 정보, 여범 세 사람이었습니다. 손분과 손보는 예장과 여릉의 태수가 내정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므로, 그를 제하면 동지토벌전의 주력으로써 손분과 손보의 보좌를 맡게 된 것이 주유, 예장의 또다른 반란세력의 거점인 파양토벌전의 주력이 된 것이 여범, 아직 정세가 안정되지 않은 단양 서부의 경비를 담당한 것이 정보. 이런 식으로 깨끗이 정리됩니다. 이걸 보면 세 사람을 톱으로 내세우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포지션은 주유에게 일임했음을 알 수 있지요. 여범은 툭하면 별동대 지휘입니다. 정보는 본진의 선봉역이라고 봐야 하나요?
이야기가 탈선했습니다만, 동지토벌전으로 되돌아가죠 ^^;
남창에 주둔하는 손분, 손보, 주유 세 사람 중에서, 최고상관이면서도 제일 손책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던 사람은 손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손책이 일부러 "당신을 이곳 예장에 두는 건, 동지 토벌의 기회를 노려 적절한 시기에 함락시키기 위해섭니다" 라고 못을 박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주유를 보좌로 붙여준 것도 손분의 상황판단력을 손책이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죠. 다시 말해 군사이자 감시역인 셈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유를 손분의 감시역으로 고른 것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동지가 병에 걸렸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이런 첩보전략은 주유의 장기 중의 장기죠) 단숨에 동지토벌에 착수하여 주유는 파구(巴丘)까지, 손보는 한층 더 진군하여 여릉을 제압했습니다. 이로써 손책의 예장 병합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리스마 군주의 신뢰는 언제나 분골쇄신 세제곱으로 갚아야 하는 법. 미주랑의 어깨가 무겁다.
제 9장. 가능성의 상실(可能性の死)
은혜를 원수로 갚는 카리스마 군주. (....)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손책이 죽으면서 주유의 많은 부분도 같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로도 스스로 명부에 들 때까지 10년 전에 잃어버린 친우의 그림자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자각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
손책군은 승룡의 기세로 비약을 거듭했지만, 손책・주유의 골든 콤비가 완전한 형태로 기능했던 전투는 여강・예장제압전이 유일했습니다. 200년, 손책은 불과 스물 여섯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합니다.
흔히 손책 및 주유의 죽음을 가리켜 가능성의 상실이라고 하지만, 실로 손책의 죽음이야말로 가능성의 상실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손견까지 포함하면 손오는 세 번의 커다란 가능성을 상실했습니다.
지극히 불확실한 추론이기는 하되, 여기서 그 세 가지의 가능성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취미의 범위이므로 게임의 감각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손견이 죽지 않았다면 손오가 나아갈 길은 크게 달라졌겠지요. 손오는 형주를 거점으로 삼아 탄생했을 겁니다. 형주를 할거한 후, 손견은 손책과 마찬가지로 원술에서 독립할 필요성에 쫓겼을 테지요. 손책보다 다소 직선적인 손견이니만큼 원술에게서 떨어져나오는 과정은 아들처럼 교묘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형주와 양주(揚州)에서 손오가 우위를 확립할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으므로, 북에 원소, 중앙에 조조, 남에 손견이라는 생판 다른 형태로 삼국이 성립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파(巴)와 촉(蜀), 양주(涼州)를 꿰찬 세력까지 출현했을 경우(실제 역사에서 유비의 위치), 각자의 세력이 할거한 채로 전국시대와 흡사한 양상으로 돌입했을 가능성도 있죠.
손책의 경우, 손오는 허도(許都) 공략이라는 가능성을 잃었습니다. 여기서는 억측에 억측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만약 손책이 진지하게 허도 공략을 고려하고 있었다면, 이대로 조조의 토지를 꿀꺽해 버리자는 의미는 아니었을 겁니다.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당시의 손오는 그에 대응할 만한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중원으로 치고 나갈 정도의 힘은 없었습니다. 그 점이 곽가로 하여금 손책의 허도 습격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게 했지요. 어쩌면, 오히려 허도를 전격 급습해 헌제를 강동에서 보호할 생각이었던 건 아닐까요? 분명 기발한 발상이긴 합니다만, 손책이 진심이었다면 그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네요. 거점을 다지면서 장기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전투는 손책의 성향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그걸 실현할 병력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서주(徐州)의 진등(陳登)을 치려고 했다는 설도 있지만, 관도대전이라는 일대 터닝 포인트에서 손책이 쪼잔하게 서주를 고집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듭니다. 또한 그 시점에서 서주를 얻고자 한들 싸움이 장기화되어, 관도대전이 결말을 보면 언젠가 도로 빼앗길 가능성이 막대했습니다.
여기선 허도 전격급습작전을 세우고 있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손책은 거의 전군을 출격시켰을 테지요. 후방을 담당하는 것은 오경, 손분, 손보, 그리고 회계에는 하제, 대략 그 정도였을 겁니다. 행군의 주력은 TOP 3인 주유, 정보, 여범. 필자는, 서주와 해서(海西)까지 진군한 경험이 있는 여범을 별동대로 삼아 서주로 파견하는 한편 주력은 수춘을 공략한 후 정보를(혹은 주유를?) 수춘에 남기고, 손책 자신은 강행군으로 허도를 급습한다는 계획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일이 그리 수월히 풀릴 리는 없을 것이므로, 먼저 서주로 보낸 여범이 고전할 가능성을 예상해 봅시다. 상대가 나쁘거든요. 자칫하면 서주에서 진등에게 패배해 수춘마저 위험해지고, 허도 급습 또한 좌절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비에는 막강한 진등이지만 공세는, 글쎄 어떨까요?
사태를 호전시키는데 일조할 만한 사람이라면 당시 여남(汝南)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벽(劉辟)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손책은 아마도 유벽과 손을 잡을 수 있었겠지요. 잘하면 유비와도 협조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여남에서 발목만 잡히지 않으면 허도까지 진군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정말로 헌제를 보호할 수 있을지의 여부에 대해선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많아요. 까닥하면 곽가나 순욱의 계략에 말려들어 손견의 전철을 고대로 밟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도 급습을 얼마나 신속하게 해치우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적측이 공격을 예견할 수 있다면 당장에 뒤를 찔릴 건 뻔할 뻔자입니다. 그러면 역시 주유를 수춘에 두어서는 안되겠군요. 주유의 재간이 없이 허도 급습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 경우 정보가 수춘에 남게 되겠는데, 이러면 진등이 좀 골치아프겠군요.
또한, 작전은 가능한 한 단기간에 완료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곽가가 예측했던 대로, 만일 손책이 장기간에 걸쳐 중원으로 원정을 나갔을 경우 당장에 본거지인 강동부터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더구나 후방을 맡은 손분과 손보가 반기를 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없고, 산월의 반란이야 늘 있는 일이며, 탄압을 받던 양주 호족이 반격에 나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육의(陸議=훗날의 육손)가 제일가는 요주의 인물이었죠. 곽가라면 틀림없이 강동의 반란을 부채질해 손책을 도로 남쪽으로 끌어내리는 책략으로 대응할 게 분명합니다. 이러한 수많은 장애물을 고려해 보면, 손책 혼자의 힘만으로는 허도 급습의 성공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역시 주유가 필요하지요.
주유가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해서는 본 전기의 마지막에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손책의 타계는 거대한 가능성의 상실이었습니다.
흔히 손책 및 주유의 죽음을 가리켜 가능성의 상실이라고 하지만, 실로 손책의 죽음이야말로 가능성의 상실에 다름아니었습니다. 손견까지 포함하면 손오는 세 번의 커다란 가능성을 상실했습니다.
지극히 불확실한 추론이기는 하되, 여기서 그 세 가지의 가능성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취미의 범위이므로 게임의 감각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손견이 죽지 않았다면 손오가 나아갈 길은 크게 달라졌겠지요. 손오는 형주를 거점으로 삼아 탄생했을 겁니다. 형주를 할거한 후, 손견은 손책과 마찬가지로 원술에서 독립할 필요성에 쫓겼을 테지요. 손책보다 다소 직선적인 손견이니만큼 원술에게서 떨어져나오는 과정은 아들처럼 교묘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형주와 양주(揚州)에서 손오가 우위를 확립할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으므로, 북에 원소, 중앙에 조조, 남에 손견이라는 생판 다른 형태로 삼국이 성립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파(巴)와 촉(蜀), 양주(涼州)를 꿰찬 세력까지 출현했을 경우(실제 역사에서 유비의 위치), 각자의 세력이 할거한 채로 전국시대와 흡사한 양상으로 돌입했을 가능성도 있죠.
손책의 경우, 손오는 허도(許都) 공략이라는 가능성을 잃었습니다. 여기서는 억측에 억측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만약 손책이 진지하게 허도 공략을 고려하고 있었다면, 이대로 조조의 토지를 꿀꺽해 버리자는 의미는 아니었을 겁니다.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당시의 손오는 그에 대응할 만한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중원으로 치고 나갈 정도의 힘은 없었습니다. 그 점이 곽가로 하여금 손책의 허도 습격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게 했지요. 어쩌면, 오히려 허도를 전격 급습해 헌제를 강동에서 보호할 생각이었던 건 아닐까요? 분명 기발한 발상이긴 합니다만, 손책이 진심이었다면 그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네요. 거점을 다지면서 장기적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전투는 손책의 성향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그걸 실현할 병력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서주(徐州)의 진등(陳登)을 치려고 했다는 설도 있지만, 관도대전이라는 일대 터닝 포인트에서 손책이 쪼잔하게 서주를 고집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듭니다. 또한 그 시점에서 서주를 얻고자 한들 싸움이 장기화되어, 관도대전이 결말을 보면 언젠가 도로 빼앗길 가능성이 막대했습니다.
여기선 허도 전격급습작전을 세우고 있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손책은 거의 전군을 출격시켰을 테지요. 후방을 담당하는 것은 오경, 손분, 손보, 그리고 회계에는 하제, 대략 그 정도였을 겁니다. 행군의 주력은 TOP 3인 주유, 정보, 여범. 필자는, 서주와 해서(海西)까지 진군한 경험이 있는 여범을 별동대로 삼아 서주로 파견하는 한편 주력은 수춘을 공략한 후 정보를(혹은 주유를?) 수춘에 남기고, 손책 자신은 강행군으로 허도를 급습한다는 계획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일이 그리 수월히 풀릴 리는 없을 것이므로, 먼저 서주로 보낸 여범이 고전할 가능성을 예상해 봅시다. 상대가 나쁘거든요. 자칫하면 서주에서 진등에게 패배해 수춘마저 위험해지고, 허도 급습 또한 좌절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비에는 막강한 진등이지만 공세는, 글쎄 어떨까요?
사태를 호전시키는데 일조할 만한 사람이라면 당시 여남(汝南)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벽(劉辟)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손책은 아마도 유벽과 손을 잡을 수 있었겠지요. 잘하면 유비와도 협조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여남에서 발목만 잡히지 않으면 허도까지 진군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정말로 헌제를 보호할 수 있을지의 여부에 대해선 불안 요소가 너무나도 많아요. 까닥하면 곽가나 순욱의 계략에 말려들어 손견의 전철을 고대로 밟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도 급습을 얼마나 신속하게 해치우느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적측이 공격을 예견할 수 있다면 당장에 뒤를 찔릴 건 뻔할 뻔자입니다. 그러면 역시 주유를 수춘에 두어서는 안되겠군요. 주유의 재간이 없이 허도 급습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 경우 정보가 수춘에 남게 되겠는데, 이러면 진등이 좀 골치아프겠군요.
또한, 작전은 가능한 한 단기간에 완료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곽가가 예측했던 대로, 만일 손책이 장기간에 걸쳐 중원으로 원정을 나갔을 경우 당장에 본거지인 강동부터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더구나 후방을 맡은 손분과 손보가 반기를 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도 없고, 산월의 반란이야 늘 있는 일이며, 탄압을 받던 양주 호족이 반격에 나설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육의(陸議=훗날의 육손)가 제일가는 요주의 인물이었죠. 곽가라면 틀림없이 강동의 반란을 부채질해 손책을 도로 남쪽으로 끌어내리는 책략으로 대응할 게 분명합니다. 이러한 수많은 장애물을 고려해 보면, 손책 혼자의 힘만으로는 허도 급습의 성공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역시 주유가 필요하지요.
주유가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해서는 본 전기의 마지막에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찌 되었건, 손책의 타계는 거대한 가능성의 상실이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카리스마 군주. (....)
좀 가혹하게 말하자면 손책이 죽으면서 주유의 많은 부분도 같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로도 스스로 명부에 들 때까지 10년 전에 잃어버린 친우의 그림자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자각이 있었건 없었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