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래. 그런 사람이었지.

Banishing from Heaven | 2008/03/16 21:42

그가 멘 것은 우리의 질고요
그가 짊어진 것은 우리의 슬픔이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었거늘.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었고,
그가 입은 상처로 우리는 치유되었다.
우리는, 양의 무리.
길을 잃어 저마다의 방향으로 흩어져 갔으되,
우리의 그 모든 죄과를, 주는 그에게 지우셨도다.

- 이사야 서 53장 4-6절 -

이상,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의 신공동역판 성서 번역문. BGM은 KOKIA의 il mare dei suoni.
결심했다. 진선조혈풍장이 다 무어냐 개그가 다 무어냐. 하코다테를 쓸 테다. 가진 재주는 다 부려 우울한 이야기를 쓰고 말겠어. 선라이즈는 다 죽어야 해...

카구라와 신파치의 재롱이 얼마간 위안이 되었고 다음 주는 대망의 Owee인지라 다소 수면으로 부상하긴 했으나 정말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라. 은혼 98화 뜰 때까진 추도 기간인 셈치고 폭주 좀 해야겠다.

계속 고화질로 바꾸어 가며 23화를 세 번이나 보는 혼자서도 잘해요 SM 플레이 끝에 침몰하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형님은 거기서 자뻑에 가까운 자폭을 삼갔다 하더라도 오래 살 관상이 결코 아니었다는 걸 말야. 건담계에서 상식인 플러스 호청년의 2단 콤보는 사망 플러그의 지름길이다 운운의 문제가 아니다. 흔히 저런 타입이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 줄은 알아도 사랑을 받는 법은 절대 모르거든. 자신이 그 애들을 아끼고 사랑한 만큼 그 애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줄은 끝까지 몰라주고 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동용 부스터가 망가진 것도 아닌데 내 할 일 다 끝났다는 식으로 두 손 놓고 맥없이 표류할 수는 없다. 애 울지 말라고 바로 정신 보정 들어가는 사람이 그 비협조성의 덩어리 같던 티에리아가 무려 '내가 반드시 지키겠다' 라는 말까지 해가며 열의를 불태웠는데 걱정 받아줘서 얌전히 몸 사릴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세츠나가 미친듯이 달려오는 걸 뻔히 보면서도 살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부재로 인해 동생들이 얼마나 충격받고 통곡하고 절규할지는, 그래, 아예 시작부터 개념조차 정립이 안 되어 있었겠지. 스스로에 대한 집착이 극단적으로 희박하고 이타주의만 괴물처럼 부풀어오른 놈이 꼭 아무데나 페로몬 슬슬 뿌리다가 이런 대형 사고를 친다. 속속들이 어른이면서도 미처 어른이 못 되었고, 정말 잔인하고 제멋대로고 이기적이고, 그런데 너무 예뻐서 차마 욕도 할 수 없는 남자. 아 놔 내가 찍는 인간은 왜 꼭 이렇게 미련한 놈일까.

지금 위안을 구해 사이트를 한 수십 개를 돌았더니 뭔 말을 해도 어딘가의 표절이 되기 십상이라 내 심정을 100퍼센트 대변해 주신 나데시코(撫子) 씨(사이트명 <Nobody Knows...>)의 일기를 감히 빌어왔다. 그치만 혼자 읽기 너무 괴로웠단 말야. 흑흑흑.

(전략)
좋건 나쁘건, 오늘의 록온은 꾸밈없는 본심과 본성을 전부 드러내보였다고 생각해요. 항상 웃는 얼굴로 자기 감정을 꼭꼭 숨기는 데 능했잖아요. 거의 무의식 레벨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겠지만, 나는 그 사람의 그런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동료들에게조차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래도 속으로는 항상 고민하고 고뇌하고, 미쳐버릴 정도로 고독하고, 한때는 손쓸 수조차 없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던 시기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상처를 민감하게 알아보고 내버려두지 못해 손을 뻗어주는 상냥한 사람으로 자라서 결국엔 마이스터들의 맏형으로 자리잡았던 거겠지만, 그 사람도 본심을 적나라하게 까보일 곳이 있었으면 했어요. 그 사람은 열네 살에서 마음의 시간이 멎어버린,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어른이라고 늘 여겼기 때문에, 23화의 그 사람을 보고, 아아 정말로 록온... 이 아니군요, 닐 디란디로 돌아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 무력을 행사해왔던 사람이, 알리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모든 대의명분과 의의가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가슴 깊숙이 묻어둔 채로 결국 지우지는 못했던 복수심이, 막판의 막판에 그를 마이스터가 아닌, 혼자서 무릎을 끌어안고 이를 악문 채로 열네 살의 그날 성장이 멈춰버린 복수의 화신 닐로 역행시켰어요.

알리와 정면으로 맞서서 감정을 자제없이 터뜨려가며 싸운 것은, 록온 스스로 말했듯이 그 사람이 앞으로도 살기 위해서, 이날까지 살아온 의미를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록온은, 그 사람의 격정이 다이렉트로 느껴져서 솔직히 기뻤어요. 그도 이런 얼굴로 타인을, 세계를 혐오하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진심으로 외쳐댈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더니, 결과는 이 꼴이지만 내심 안도했습니다. 좋은 말만을 하고 이해심만 풍부한 어른보다는 오늘처럼 숨김없이 전부 내보이는 록온이 좋기도 하지만... 뭐랄까. 지금까지 힘들었지요. 정말 잘 견뎠어요. 형님 노릇하려 무작정 애쓰지 않아도 좋으니까 조금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움직여도 좋잖아요.

대릴의 난입으로 인해 끊겨버린 그 말. <하지만 나는 이 세계를──> 뒤에 이어지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봐, 너희들은 만족해? 이런 세계에... 나는.... 싫어>라고. 어쩜 그토록 곱게 웃을 수가 있지요.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할까요. 그 표정이 전부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에 손으로 감싸안고, 마침내는 저격한 것이 지구, 인가요... (몇 번을 울려야 속이 시원하니 이 남자야)
응, 알고 있었요. 그랬었지요. 그래서 당신은 뒤나메스에 타기로 결심했었죠. 이 엿같은 세계를 바꾸고 싶어서, 더 이상 자신처럼 절망하는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서, 원한도 분노도 고통도 꼭꼭 억누른 채 그토록 증오하는 테러리스트로까지 <타락>해서,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반신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조금이라도 밝고 희망찬 세계로 인도하고 싶었던 거죠. 세계가 나아가는 길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쉬웠던 꼭 그만큼 마음 한구석에선 안도하지 않았을까요. 이제야 모든 게 끝났다고.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록온은 애교 있고 서글서글한 주제에 절대로 그 너머로는 들이지 않는 일선을 꽤나 명확하게 긋고 있었잖아요. 사실은 타인한테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고 체험했던 온기를, 애시당초 아예 알지조차 못하고 자라온 위험천만한 동생들에게 자연스레 나누어주려 했었어요. AI에 불과한 하로에게마저 그런 식으로 대하던 사람이었는걸요. 세상에 절망하고 신도 믿음도 버린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애정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냉소적이 되지도 못했고 세상을 박살내지도 못했었지요.
소중한 사람에게 듬뿍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탓에 더욱 괴롭고 힘들고 고독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무의식적으로 서툴게나마 마이스터들에게 베풀려고 했었지요.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순수한 애정이라니! 받아들이는 법조차 모르고 자란 어린애들에겐 얼마나 지독한 억압이었을까요.
하지만, 당신이 쏟아부은 애정은 아이들의 마음에 어느 틈엔가. 조금씩 침투해 있었죠. 그래서 그 애들은 모두 울었어요. 이렇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고, 하지만 대책없이 바보처럼 마냥 상냥했던 당신이 죽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당신에게 이 세계는 틀림없이 전혀 따스하지 않았을 거예요. 줄곧 암흑을 바라보며 발버둥쳤던 만큼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빛이 너무나도 눈부셨던 나머지, 오히려 고독만 더욱 깊어졌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모든 걸 잃어버린 당신이 서툴게나마 동료들을 소중히 했듯이, 그 애들도 당신을 사랑했답니다.
당신이 원했던 바대로 되었고, 그런 얼굴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서야 제 3자는 납득할 수밖에 없지만, 속이 너무너무 상해서 한 대 때려주고픈 마음만이 간절했던 건, 당신이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로 가 버렸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무슨 꼴을 당한들 누구에게도 피해는 주지 않고, 하물며 마음 다칠 일도 없으리라고 믿었다는 것이 나는 그저 슬펐어요. 마지막까지 애정을 받아들이길 거부한 채로,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못나고 잔인한 인간이라고 여기면서 멋대로 명을 재촉한 게, 정말로 분했습니다.
그치만, 애들은 물론이고, 자제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펑펑 울어버린 사람이 일본에 몇이나 있었는지 알기나 해! 바보!

아~아, 최후의 최후까지 나쁜 남자였지만, 그래도 그런 당신을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록온 스트라토스.

물 건너 한국에도 많았어요.
번역하면서 또 울었다. 승화될 때까지 앞으로 1주일은 이러고 있을 겁니다. 젠장할.

....이렇게 앗아가놓고 2기에서 므우 라 플라가처럼 어거지로 살려내는 밥통같은 짓만은 안 하리라 믿는다 감독 앤드 각본가? 엉? 시간을 23화 전으로 역행시키지 못할 바엔 되살리지 마! 작품성에 톡톡히 기여한 비극의 히로인(야;)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만들어!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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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린 2008/03/18 22:11
이 남자가 실상은 조낸 악질적인 데가 있는(...즉, 사람잡는;;) 캐러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말입죠. 애초에 상냥한 스나이퍼라니 그 무슨 정신붕괴 코앞에서 알짱대는 설정이냔 말이죠(.....) 마지막 갈 때 보니까 생각했던 거 보다 더, 더, 더, 악질적인 남자더란 말이죠. 그리고 얼추 짐작했던 거보다 한 3. 14배 정도 더 약한 사람이었더란 말이죠 ㅠㅠ ㅠㅠ ㅠㅠ

번역 잘 봤습니다. 저분 심정과 다르지않아요, 저도. 나빠서 더 안쓰럽고 사랑스런 로끄옹이었습니다 ㅠㅠ ㅠㅠ ㅠㅠ ㅠ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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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8/03/19 08:38
아무래도 전 상냥함이 결국에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는 조낸 악랄한 남자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발리는 팔자인가 봅니다 orz 나쁜데, 못됐는데, 정말 한 대 패줬으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그럴수록 더더욱 이쁘고 사랑스러우니 이걸 어쩜 좋죠.
즐겁게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 맛에 번역질을 그만두지 못하죠...

이미 포스팅에서도 떠들어댔습니다만 리린 님이 제안하신 5단 콤보가 참 무섭게 악랄하지 말입니다...? (리린 님도 시스 계통이란 거 알고 계시죠? orz) 쿠로다가 진짜 저 짓까지 저질러 버리면, 아예 더 막장으로 나가 서셰스를 작살내려는 판국에 난입한 라일 VS 세츠나와 우리 꼬맹이의 미친듯한 절규까지 보여주면 알아서 캐발려줄 자신이 만만합니다. 그래 어디 갈 데까지 가 봐라...

...혹시 5단 콤보 연성해 보실 생각은 없으시나효... (수줍)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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