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도착한 00F를 후루룩 펼쳐보고 침몰했다.
미묘하기 짝이 없는 연출 및 내용은 토키타니까 뭐 그러려니 패스하고 (야) 중국어 번역판으로 볼 때조차 짧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어, 어어어어...? 더만 일본어 원문은 너무나도 거대하게 쪽팔려서 직시할 수가 없었다.... 살짝 농담이었는데 정말로 방법하기냐 폰 스파크;;; 세상에 「オレ様にお前のすべてを見せろ、ロックオン」이라는 둥 「やりゃできるじゃねーか」라는 둥 「そうやっていい子でいりゃいいのさオレを楽しませるためにな」라는 둥 (낯팔려서 한국어로 옮기지도 못하겠음;) 게다가 의미도 없이 초 하이텐션이니 아아 이것은 정녕 시대의 식은땀인가요... 켈트 미인 좋은 건 알겠는데 (어찌 된 일이 록횽만 탁월하게 미인이다) 얘야 폰아 그 사람 너보다 여섯 살이나 연상이거든...!? OTL
얘기를 돌려, 이하, 오밤중에 자학하고 싶으신 여러분을 위한(...) S의 록형 선곡.
Janne Da Arc - 월광화(月光花) (디폴트)
angela - seperation
RURUTIA - 환혹의 바람(幻惑の風)
La'cryma Christi - Lhasa
GARNET CROW - Cried a little
GARNET CROW - Timeless Sleep
GARNET CROW - Jewel Fish
하마사키 아유미(浜崎あゆみ) - SEASONS
KOKIA - il mare dei suoni
Cocco - 음유시인(唄い人)
My Chemical Romance - Helena
오늘의 덤 에이브릴 라빈(Avril Lavigne) - Complicated (* '제발 어깨에서 힘 좀 빼고 사시지?' 란 노래) <-
그밖에 추천할 만한 곡이 있으신 분은 덧글로 기탄없이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자학 중인데 뭔 짓을 못하랴(.....)
리린 님의 단편으로 마음에 왕따시만한 상처를 입고 ↑저 곡들을 무한재생하며 넷의 바다를 방랑하던 중 텍스트 운만 지독히도 좋은 나답게 새로 발견한 다크호스 아이자와 케이(相澤 桂, 사이트명 밤이 밝아오다夜が明ける) 씨의 <밝아오는 날(明ける日)>을 즉석에서 납치해왔다. 질은 물론 믿으시면 안되고(...) 문제가 되면 깨끗이 지워없앨 예정이다.
죽은 자와 산 자, 록온과 세츠나의 복잡미묘한 관계성의 결말에 대한 거의 완벽한 해답의 하나.
BGM은 GARNET CROW의 Cried a little. 꼭 들어보시길.
목덜미를 덮은 흑발은 물에 젖어 묵직했다.
샤워기에서 솨아솨아 쏟아지는 물이 손안을 채우고 넘쳐흘렀다. 보일러는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대신 미지근한 물만은 아낌없이 베풀어주었다. ……제법 자란 머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헹구고,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손을 뻗어 수도꼭지를 잠갔다. 구리를 뚫고 삐죽 튀어나온 딱딱한 밸브. 좁다란 욕실은 말이 좋아 욕실일 뿐 욕조는 없다. 배수관에 고정시킨 샤워꼭지의 수압을 조절하는 것이 전부인 간소한 구조였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했다. 물을 뒤집어쓰고 되살아난 기분으로 손끝을 털면서 수건을 잡았다.
철퍽. 물방울이 바닥 위를 튀었다.
미적지근한 물을 한바탕 뒤집어쓴 것만으로 잠에서 덜 깬 머리는 즉시 활동을 개시했다. 전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세츠나로서는, 잠잘 곳이 있고 물을 마음껏 쓸 수 있고 먹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라면 불평은커녕 감지덕지였다. 집어든 수건으로 적당히 물기를 털어내고, 덥수룩해져 무게도 늘어난 흑발을 다소 열의를 갖고 문질렀다. 그래도 마룻바닥은 물로 범벅이 되었다. 좀 더 신경쓰고 살라며 핀잔을 주던 사람은 가까이 있던 누구였던가.
별달리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평균적인 마음씀씀이를 지닌 자로서 옷차림에 무심하고 말수도 적은 세츠나를 대했을 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것저것 참견하고 나서는 사람이라면 항상 있었다. 완고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세츠나가, 실제로는 대단히 성격파탄도 아니며 단지 표현방식이 서투르고 미숙할 뿐임을 아는 이는 알 만큼은. ……인간은, 본디부터 옹고집을 끝까지 고수하진 못하는 생물인 법이다.
상대가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그저 이 자리에 세츠나의 무신경함을 책망할 사람이 없는 것도 현실이었다. 단순한 부재에 불과했지만. 적당히 바지를 꿰어입고 철퍽대며 맨발로 부엌에 향해, 적당한 컵을 꺼내서 우유를 부었다. 세츠나에게 적극적으로 우유를 권장했던 이가 사라진 후에도 별 문제없이 습관은 습관대로 남았다. 이전은 그대로 마셨지만 지금은 살짝 데우고, 역시 찬장에서 찾아낸 벌꿀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실상 아침 나절부터 식욕이 왕성한 체질은 못되었다. 예전에는 에너지 섭취를 명목 삼아 억지로라도 밀어넣었지만, 이제 와선 애써 고행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
식탁 위에 방치했던 휴대용 단말이 메시지를 여럿 수신한 증거로 점멸하고 있었다.
열전도선과 부품을 이어 이동효율을 향상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라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을 터였다. 그 과제에 골머리를 썩이는, 지금쯤 우주에 있을 기술주임과 중계점에서 일하는 하부조직의 기술자들을 상대로 하는 파일럿 시점의 연구 및 토의는 결론이 내려질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이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애초 200년이 넘는 세월을 회전해 온 톱니바퀴다. 세츠나가, 그리고 그들이 성급하게 설쳐보았자 대단한 변화가 있을 리도 없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과거 엑시아에 대한 정열만으로 첨단공학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고 기술주임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정비부터 메인테넌스까지 모든 요소를 책임지려 한 세츠나 F. 세이에이의 무모한 노력은, 그러나 그 시기를 넘긴 현재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필요한 두뇌가 되어 있었다. 유능한 엔지니어는 적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탑승자의 역할마저 소화할 수 있는 자는, ……더구나 방대한 경험을 축적하고 그 정수를 체현하는 자는, 하부조직까지 뭉뚱그려도 지극히 드물었다.
보나마나 그 문제요 미처 못 짚고 넘어간 점이라도 있던가 하여 별 생각없이 단말을 열어보고, 세츠나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그래」
현지의 시각을 고려한 듯 리얼타임으로 발송되지는 않은, 암호통신과 일반통신이 뒤섞인 메시지가 단말에 줄줄이 쌓여 있었다. 소속된 분야에서는 과장을 제하고도 베테랑 소리를 들어 손색이 없을 경력이었다. 세츠나의 인간관계는 오래 전, 누군가가 기막혀 하며 소년의 머리를 토닥였던 그 무렵과는 과연,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방대해졌다고 새삼 무덤덤하게 반추했다.
잊지는 않았지만 각별히 의식하지도 않았다.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세츠나는 슬몃 탄식하고, 희미한 애매함을 머금으며 그 사실을 되짚었다. 때문에 감개는 오늘을 맞이하고도 어딘지 모르게 불확실한 채였다. 들어온 통신에 전부 구태여 답변을 하지 않고 단말을 닫았다. 세츠나가 있는 이곳은 이른 아침이다. 닫아둔 창문으로는 빛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단말 너머의 면면들을 손꼽아보고, 저녁까지 몇 개가 더 들어오리라고 냉정히 판단한 후 답장은 한꺼번에 보내기로 했다.
무언가가 극적으로 변하리라 믿었던 것 같은가 하면 의외로 이토록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던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매일 아침의 습관이 그 사실 하나로 인해 이제 와서 바뀔 리도 없어, 우유를 한숨에 들이키고 컵을 싱크대에 넣었다가, 미리미리 씻어서 치워두기로 마음먹었을 때.
「소란! 소란, 일어났어?」
똑똑똑. 부엌에 바로 면한 벽 언저리에 붙은 현관문에서 시원스런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오랜 기간 체류했던 거리에 흔하게 있었던 독신자용 아파트가 아니었다. 좋게 말해 아담하고 정직히 말해 허술한 집이다. 대단히 두껍지도 않은 문 너머로 어느 틈엔가 귀에 익은 애교스런 목소리가 천진난만하게 세츠나 아닌 소란 이브라힘을 불렀다.
「아침부터 웬일이지, 아냐」
며칠 내내 지속된 논의를 마무리짓고 겨우 잠자리에 든 다음날 아침이다. 평소 습관보다 다소간은 늦은 기상일지언정 세츠나의 생활은 여전히 철저하게 규칙적이었다. 새벽으로 분류해도 문제는 없을 지금의 시간대를 가늠해 보고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물음에 답하자 이제는 딱히 잠그고 살지도 않는 문이 기세좋게 벌컥 열렸다.
「소란! 축하……에, 에엣, 꺄아아악!!」
귀에 익은 애교스런 목소리와 함께, 근처에 사는 적갈색 머리의 소녀가 활기차게 머리를 디밀었다. 디미는가 했더니 문짝이 부서지라고 요란스럽게 닫아버렸다.
「바보! 빨리 뭐든 입어!」
「……아아」
대놓고 쩔쩔매는 소녀의 비명을 듣고서야 새삼 현상황을 자각하고 손에 닿는 셔츠를 대충 걸쳤다. 어려도 숙녀 앞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혼자 사는 남자란 게 원래 그런 법이다.
「하지만 아냐, 예고도 없이 문을 연 너도 문제는 있다」
「……알아, 안다고, 소란이 그런 사람인 줄」
마지못해나마 미안한 얼굴로 도로 문을 연 소녀를 향해 다시금 희미하게 웃었다. 결코 알아보기 쉬운 미소는 아니었지만, 세츠나가, ……소란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항시 비슷비슷한 표정을 유지하는 버릇은 이날 이때까지 그대로여서, 이날 이때까지 세츠나에, 소란에 대한 주위의 평가 역시 좀 더 붙임성 좋게 살 수 없겠냐, 그 정도였다. 더구나 태도가 데면데면하다 불평하는 상대일수록 예의를 차리면 버럭 화부터 내기 십상이므로 해결책이 있을 리도 없었다.
「제일 먼저, 말해주고 싶었어. ……미안해」
따라서 진짜로 기분을 상하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부끄러운 기색을 남긴 채로 주장하는 소녀에게 순순히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대놓고 토라진 얼굴이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소란은 사실 리샤 언니한테 듣고 싶었겠지. 하지만 안 되셨습니다! 올해 첫타자는 나예요」
그러니까, 먼저 받아줘. 모래와 대지의 갈색. 소란과 같은 피부색의 소녀는 적갈색의 땋은 머리를 출렁이며 열을 올려 말했다. 벽지라고 해도 좋을 곳에 자리잡은 이 집에 대해 아슬아슬하나마 사전적 정의가 일단 적용되기는 하는 이웃집. 나름 가까이 지내는 이웃의 자매 중 어리고 쾌활한 동생. 마주 서면 아냐는 소란의 가슴팍에 가까스로 미쳤다. 자그마한 소녀였다. ……어쩌면 한때의 세츠나 F. 세이에이와 그닥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키도, 나이도.
돌아보면 정말로 어리고 작았던 세츠나 F. 세이에이와.
「저기, 저녁엔 파티 하자. 엄마도 찬성하셨어. 그러니까 소란, 오늘 밤은 빨리 일 끝내고 우리 집에 와야 해」
응당 그래야 하는 듯이 명랑하게 재잘거린다. 소녀처럼, 이곳에 사는 이들은 마음까지 거칠어져 있지 않았다. 가벼운 호기심을 제하더라도 충분히 남는 순박한 호의. 특히 모친과 자매만으로 이루어진 아냐의 가족은 중동의 벽지, 소박한 마을에서도 변두리에 자리잡아 잊혀져가던 집에 소란이 기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친절하고 상냥하며, 마음씀과 약간의 심려를 담아 혼자 사는 청년을 종종 찾아주는 이웃이었다.
물론, 그들은 이 대지에 뿌리내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CB는 물론 세계의 어떠한 무력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선량하고 무력하고 상냥하고, 또한 강인한 사람들이다.
「아아. 기꺼이. ……어머니와 언니에게도 고맙다고 전해 줘」
재야연구자로 막 첫발을 내딛은 햇병아리로서 필드워크를 겸한다는 구실로 외딴 집에서 담담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렇다 해서 무조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지만도 않는 청년이 오늘 일정을 진작에 정해버리지 않도록 미리미리 통보하러 찾아온 쾌활한 소녀에게 승낙의 뜻을 밝히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른 아침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이웃집이다. 실제로도 일은 어젯밤으로 일단락을 지은 참이었다. 평범하게 고마웠다. 미리 정해진 이야기를 딱 잘라 거절할 만큼 냉기 감도는 사이도 아니었다.
「기다릴게. 꼭, 꼭 와!」
천진하게 약속을 강요한다.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소녀는 소란의 배웅을 받으며 이웃집까지 이어지는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단숨에 달려갔다. 자그마한 태풍처럼 왔다가 질풍처럼 사라진 소녀는 생기발랄하고도 명랑하여, 결코 풍요롭지 못한 토지에서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수심도 그늘도 드리워지지 않은 얼굴이 세츠나에게는 무척 기꺼웠다.
「……,」
빛바랜 대지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소녀를 배웅하고자 열어둔 문으로 능선이 아련하게 보이는 평원이 펼쳐지고 동쪽 하늘에서 떠오른 거대한 태양이 정면에서 빛을 발해 눈이 부셨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곧 현관을 나섰다. 모래알이 맨발을 간지럽혔다. 꼭꼭 걸어잠근 집안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햇빛을 한가득 받으며 아주 잠시, 세츠나는 조용히 호흡했다. 바깥은, 밝았다. 소녀가 이른 시각부터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온 것이 납득되고도 남을 맑게 갠 하늘이었다. 미처 다 떠오르지는 않았으되 황금빛의 햇살이 한 발 앞서 찬란하게 내리쬐이고 있었다. 인기척이 없는 자리에 동그마니 선 이 집은 널찍한 비탈과 완만한 구릉 사이에 위치했고 주위는 청량한 아침의 맑은 공기로 충만하였다. 바람이 불고 하늘의 구름은 서서히 흘러가고 있었다,
잊지는 않았지만 각별히 의식하지도 않았고 정확히는,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록온. 나는 오늘, 스물 다섯이 됐어」
실로 오랜만에 소리내어 말한 그 이름은 예전처럼, 깊숙이 세츠나의, 소란 이브라힘의 온 몸을 파고들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일이 아니었다. 누가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실상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았을 그의 정확한 생몰년조차도 안 것은 어이없이 놓쳐버리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추억한다. 그리고 이날 세츠나가 처음으로 맞이한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 8년도 더 옛날, 바로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린 남자의 이름이 지금,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목소리로 청량한 아침공기 속에 녹아들고 가만히 더는 소년이 아닌 세츠나의 온 몸을, 그럼에도 깊이 정든 음색으로 가득 채웠다.
록온 스트라토스.
특별한 이름이었다. 진정으로, 아무런 타의도 색채도 무엇 하나 품지 않은 극도로 순수한 특별함.
그 음색이 허상임을 탄식한 일도 없거니와 기뻐하지도 않았다. 세츠나 F. 세이에이가 알았던 록온 스트라토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함께 한 시간은 모두 합쳐도 3년이 채 되지 못한다. 잃은 후로는 8년. 키는 자랐고 어깨도 가슴도 몰라보게 탄탄해졌다. 세츠나는 이미 그 시절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격동의 시대였다 할지언정 단 한 걸음도 늦추지 않은 채 줄곧 앞만 보고 달려온 세츠나의, 그리고 소란 이브라힘의 25년에 비하면 한웅큼에 불과한 짧은 시간.
그럼에도 영영 잃어버린 그날로부터, 그의 이름이 가슴 속에서 지워진 적은 한순간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처음으로, 타인에게 부추겨져서도 환상에 불과한 신의 대리로서도 아닌 온전히 스스로의 의사로, 순수히 오직 그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어봐도 좋겠다고 처음으로 여겼던 남자.
어찌 보면 그것은 순리였다. 몇 번이고 기억하고, 지금도 추억한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전사(戰士)로 선택된 세츠나 F. 세이에이가 가장 어리고, 가장 완고하고 가장 불안정했던 시간에 세츠나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었다. 파괴자의 집단에 속하고도 조직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세츠나를 지켜보고, 여러모로 마음을 쓰고, 돌봐주고, 세상을 가르쳐주고 서툰 손을 잡아 이끌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머무른 자리가 자리였던만큼 위선이라 비방하는 자도 있었겠지만 상관없었다. 세츠나가 록온 스트라토스의 사정을, 내심을 얼마간이나 안 것은 최후가 임박해서였다. 더욱 상세한 사항을 무미건조한 데이터로서나마 어렵게 손에 넣은 것은 그보다 훨씬 뒷날의 일이었다. 그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훨씬 작았던 소년의 손을 솔선해서 잡아준 록온의 진의는 끝끝내 알 수 없었다.
타인의 속은 들여다보지 못한다. 무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상냥했었다. 애정을 베풀고, 세츠나를 인도했었다. 한없이 가족, 에 가까웠던 무한한 정. 설령 그것이 무언가의 보상 행위였다 한들 그가 진정 무엇을 생각하고 괴로워하며 그곳에 있었는지를 되짚고, 결코 이르지 못할 결론에 입술을 깨물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는 오로지 사실만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가만 있어라. 내가 근사하게 잘라 줄게.
제법 자란 머리를 바람이 흔들고 지나가 불현듯 그 말을 기억해냈다. 가위를 꺼내들고 구김살없이 웃고 있었다. 흘러간 세월을 고려하면 놀라울 만큼 또렷하기 그지 없는 울림 하나가 당돌히 재생되었다. 재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때때로나마 끈질기게 되풀이되었다. 미련은 없고 비통함도 없고 오늘에 이르러선 애수마저도 엷어졌는데. 그의 체온과도 닮은, 따뜻한 기억. 짧디 짧았던 시간임에도 농밀하면서 또한 소중한 기억. 흉기를 든 자가 등뒤에 서도록 허용한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따스한 손의 감촉. 챙김받는다는 겸연쩍은 느낌. 그에 따르는 아이다운 불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친근감을 담은 인사. 충고. 질타. 염려. 안도. 친애라는 이름의 애정. 질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래도 용납해 버리는 모습. 그 전부를 포함하고 지금도 생생하게 회상하는 차갑게 불타던 살의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감정. 하찮은 습관과, 그런 것이 한 자리에 모여 조금이나마 타인을 받아들이게 된 자신을 서서히 그러나 새롭게 구축해갔다.
완고한 가시를 휘감고 스스로를 지킬 줄밖에 몰랐던 어린 날의 세츠나 F. 세이에이를 처음으로 무너뜨린 어른.
「……이상한 일이지. 당신은 어째서 여기에 없는 걸까」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갔다. 선명한 하늘은 푸르고, 아련한 능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눈부신 아침의 태양이 황금색의 빛을 대지에 흩뿌리고 있었다.
전쟁근절의 길은 멀었다. 록온을 잃은 후로도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가며 CB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지금도. 아직도. 이 온후한 대지의 어딘가에서 4세대 마이스터들이 싸우고 있다. 세츠나가 록온과. 그리고 알렐루야와, 티에리아와. 이제는 누구와도 만나지 못하는 동료들과 더불어 싸우고, 틀림없이 뜻을 하나로 모았던 순간마저도 이미 멀었다. 그날, 록온이 사라지고, 그럼에도 싸움을 계속했던 알렐루야도 티에리아도 저마다의 상처를 남긴 채 저마다의 이유로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자취를 더듬으면 재회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겠지만, 그 선택지를 외면한 채 결국, 최후까지 CB에 남은 세츠나 F. 세이에이 역시 엑시아를 내렸다. 이미 2년 전의 일이다.
알리 알 서셰스를 마침내 쓰러뜨린 전장에서 엑시아는 대파했다.
원점. 그리고 그 원점의 타도. 그 또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살아 있는 한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지워지지 않을 그림자. 모든 것의 출발점에서 소란 이브라힘의 인생을 짓밟고 세츠나 F. 세이에이를 낳았으며 아마도 닐 디란디를 죽였고 끝내는 록온 스트라토스마저 죽인 붉은색의 남자.
세츠나는 죽이지 않았다. 용서하지도 않았다. 단지 쓰러뜨렸다. 전투력을 말살했다. 마치 전란의 산물과도 같았던 그 남자가, 이후 무얼 어찌 했고 어찌 되었는지는 모른다. 소식은 끊겼고 흥미조차 없었다. 한때의 스승이자 원수에 대한 증오는 희박했고, 단지 형태조차 희미한 무언가의 감개가 망연하게 잔재하고 있었다.
한끝 차의 아슬아슬한 승리는 세츠나에게도 심한 타격을 입혔다. 지금도 오른눈과 오른팔은 여전히 부자유하다. 쌓아올린 경험과 기술이라면 그쯤의 장애를 무시하고 마이스터를 계속하기란 어렵지 않았지만 세츠나는 굳이 후진에게 길을 터주었다. 쉴새없이 달려왔던 그 발치에 이제는 끝없는 적막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주저도 망설임도 자비도 없이 CB의 이념을 따라 싸움을 계속해 나갈 열정을 상실했음을 그 순간에 고스란히 인정했을 뿐이었다.
패배가 아니었다.
무수한 사문과 문답을 거치며 절차를 밟았다. 건담 마이스터였던 자, 하물며 10년 가까이 최고 클래스의 기밀이었던 자에게 어디까지 자유를 허용할지의 문제로 격론이 벌어졌으나 결국, 고문연구원에 가까운 형식으로 세츠나 F. 세이에이의 이름을 명부에 남긴 채 소란 이브라힘은 거의 완전한 자유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고향인 중동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쿠르디스도, ……아자디스탄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은 중동, 그 중 한 나라의 한켠이다. 광대한 대지의 아주 작은 끄트머리. 8년의 세월은 이 황폐한 대지에도 변화와 그리고 얼마간의 안식을 가져왔다. 분쟁은 지속되고 있으되 세계는 변혁의 길로 들어섰다. 시간은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 순간 눈앞에 펼쳐진 대지는 아마도, 세츠나 F. 세이에이가 과거 세계에게 품었던 증오와 절망보다도 다소나마 상냥하다.
손을, 가볍게 뻗었다. 크고 굳건하고 그리고 상처입고 일그러진 양손. 모든 것이 그 시절보다 아득히.
「록온, 당신은 여전히 화내고 있나. 화내고 있을까. 이 세계에. 자유로워진 내게. ……죗값을 치르지 않은 모든 것에」
무언가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세계는 여전히 일그러지고 아픔과 탄식과 통곡은 온전히 남은 채였으며 세츠나는 영원히 록온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때때로 생각한다. 죄업 깊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를 누구 하나, 심지어 스스로조차 용서하지 않았던 그 남자는 적어도 싸울 수 없게 되었다 한들 세츠나가 그랬듯이 안온한 생활을 택하는 일만은 기어코 피했으리라고.
알 수 없다. 당연했다. 세츠나는 록온 스트라토스에 대해 무엇 하나 알지 못했으니까.
어째서 여기에 없는 거지. 다시금 뇌까려 본 그 말에는 진정으로 의아함이 감돌았다. 실로 오랜만에 불러본 그 이름은 평온했던 어제의 연장처럼 익숙하게 체내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선명한 하늘은 푸르고, 아련한 능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눈부신 아침의 태양이 황금색의 빛을 대지에 흩뿌리고 있었다. 이 드넓은 대지에. 잡은 손을 어이없이 놓쳐버리고 상실에 몸부림치며 수많은 밤을 지나온 지금도. ……이미 모습은 어렴풋해졌다. 기억은 해마다 빛바래고 당연스럽게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히 되살아나는 장면 하나하나에서조차 윤곽이 흐려진지 오래였다.
세츠나는 오늘, 스물 다섯이 되었다. 앞으로는 멎어버린 록온의 시간을 넘어서서 나아갈 뿐이다.
오늘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지, 생각해 보면 줄곧 망설였던 듯하다. 무언가가 극적으로 변하리라 믿었던 것 같은가 하면 의외로 이토록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던 것 같기도 했다. 록온은 지금도 세츠나보다 훨씬 연상인 어른의 얼굴인 채, 때로는 허물없게, 때로는 엄격하게, 어딘가 헐렁하면서도 상냥한 형과 같은 존재로서 세츠나의 앞을 가고 있다. 문득 이름을 부르면 바로 몸을 돌려 대답해 줄 것만 같은, 멀고도 가까운 뒷모습.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침의 태양이 찬란하게 내리쬐었다. 당연히도 무엇 하나 돌아오지 않는 이곳 대지에.
세츠나는 짧게 내뱉은 숨을 자의로 멈추고, 눈앞에서 불타오르는 눈부신 태양을 보았다. 황금빛의 생명. 아득한 옛날, 록온 스트라토스가 최초이자 최후로 겨누었던 시커먼 총구를 기억했다. 눈앞에 그날과 같이 그가 서 있는 광경을 그려보았다. 풍화되고 지워져가는 초상을 그러모아 그곳에 세웠다. 그것은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호흡처럼 힘겨운 무게로 변함없이 세츠나의 앞에 존재했다. ……록온.
록온.
「나는 소란 이브라힘을 받아들였어. 이대로, 좀 더 살아볼 생각이야」
당신은, 화낼까.
누군가에게 들려줄 일이 아니었다. 누가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오늘처럼 하늘이 푸르렀던 그날 부정했던 이름을 생각했다. 부정했던 자신을 생각했다. 폭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부모를 스스로의 손으로 죽이고 수많은 생명을 빼앗고 신을 상실하고 세계를 저주했던 소년. 일그러지고 일그러뜨리며 오로지 이상만으로 구축한 세츠나 F. 세이에이라는 거짓 우상에 매달려 살아온 추한 인간. ……그래도 내가.
나라는 인간이, 맨 처음에 그 이름을 받고 이 세계에 태어난 사실만은, 변하지 않아.
그 단순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걸렸던 수많은 세월을 소란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분쟁은 지속되고 세계는 여전히 모든 것은 평등하게 일그러졌고 세츠나는 영원히 록온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빛은 강렬했다. 명료한 시력을 상실한 오른눈에조차. 바람이 불고 하늘의 구름은 서서히 흘러가고 있었다. 맑고 푸르른 선명한 하늘, 청결하고 투명한 공기. 아련한 능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눈부신 아침의 태양이 황금빛의 햇살을 대지에 흩뿌리고 있는, 이 아침에.
소란은 오늘, 스물 다섯이 되었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으면 좋았을걸」
무언가 크게 변하지도 않은 세계는 무수한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은 채. 구름이 흘러갔다. 산들바람이 불었고 높고 선명한 하늘은 푸르고, 아련한 능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눈부신 아침의 태양이 황금색의 빛을 대지에 흩뿌리고 있었다.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다. 지속되는 어제와 오늘. 한없이 이어지는 미래가 있었다. 소란은 그 자리에, 결핍된 몸으로 얼마간 망연히 멈추어섰다, 잠시 후엔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언젠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안겨준 남자를 넘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줄곧 걸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순간만은.
당신이, 지금 이곳에 있었으면 했어.
끝없이 이어져나가는 세계를 세츠나는 보았다. 빛이 있고. 대지가 이곳에, 발치에. 조금이나마 상냥해진 이 세계에서 그렇게 록온 스트라토스를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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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7.
당신,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남겼다.
아주 흡족한 결말은 아니거니와 살아보기로 했다는 말에 그냥 침몰해 버렸음. 삘이 꽂히면 끝나는 거다.
여담이지만 첫사랑이 촘 심하게 강력했거나 촘 많이 엄했던 남자는 십에 팔구 훗날 여자 인생 말아먹는 사내로 자란다.
스물 다섯의 세츠나에게서 그런 불길한 냄새가 풀풀 나는데 이 두근거림을 어쩌면 좋을까...!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