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 화관(花冠).

Banishing from Heaven | 2008/04/25 17:43

영감을 얻겠답시고 <흑룡의 관>을 재독하다 웬만큼 전후 사정 아는 터에 그러잖아도 여러모로 상한 속이 두 배로 시커멓게 타들어갔으므로 (부장니이이이임 ㅠㅠ) 다 집어던지고 홧김에 아마노 쯔키코(天野月子)의 화관(花冠)을 듣다 문득 떠오른 이미지를 되는 대로 갈겨썼다. 문재를 기대하시면 매우 슬픕니다.
은혼은 긴히지 페스티벌 동란편이건만 나는 이게 웬 삽질인겨... OTL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은 눈길 닿는 지평선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세잎 클로버로 뒤덮여 있었다.

사막의 민족에게는 낯설기만 한 풍요로운 녹색의 대지를 다소 곤혹스리 둘러보던 중 문득 눈길이 머문 낯익은 뒷모습, 세잎 클로버에 파묻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어깨에 살짝 닿는 곱슬진 갈색 머리를 세츠나는 숨을 삼키며 응시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여기가 아니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발길을 가로막았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세츠나."

크지는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못을 박았다.

"─아니면,"

하얀 얼굴이 어깨 너머로 세츠나를 돌아보았다.

"그만두고 싶어?"

선명한 비취색 눈동자에는 책망의 빛도 비난하는 기색도 없었다. 단지 기묘하게 무표정할 따름이었다.
세츠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토해내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남자는 그제야 잔잔하게 웃었다.
세츠나가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침대에 들어가려 했을 때, 정크푸드로 대강 때우다 들켰을 때, 엑시아에 몇 시간이고 줄창 매달려 있었을 때 말을 듣지 않고 사고를 쳤을 때 다쳤을 때, 시끌시끌한 설교를 한바탕 늘어놓은 다음에는 별 수 없는 녀석이라 툴툴대며 반드시 보여주던, 어딘가 난처한 듯한 미소였다.

툭툭 털고 일어나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10cm 남짓하게 밑인 세츠나의 머리를 그럼에도 익숙하게 다독이는 장갑 너머의 손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살아 있을 때처럼.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인터페이스가 희미한 불빛만을 발하는 어두운 콕핏 속에서 눈을 떴다.
주황색 구체의 부산스런 합성음이 기체를 굳이 내리기엔 너무나 짧았던 대기 시간의 종료를 알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손을 쥐었다 펴고, 컨디션을 간단히 체크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세츠나는 거의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록온."

짧지만은 않았던 지난 세월 심장에 묻어둔 이름을 소리를 내어 뇌까렸다.
친근한 울림으로 언뜻 서늘해진 가슴 한 켠은 애써 외면하지 않았다.

알고 있어.
한순간도 잊지 않았어.

──약속은 지킬 거야.

세츠나는 수천 수만 번도 더 잡았던 조종간을 다시 한 번 힘주어 그러쥐었다.
"세츠나 F. 세이에이, 엑시아 더블오, 출격한다."


엑시아는 녹색 입자를 흩뿌리며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나름 21화 백일몽의 역버전.
사실 '~출격한다' 는 형님 대사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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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린 2008/04/26 18:47
축하합니다. 드디어 더블오 자가발전.... 아니, 자체연성...... 아아니 무간도 개미지옥(......)에 들어오셨군요.(발목 잡고 늘어진다)

아아 횽님이 계신 저 세잎 클로버 풀밭이 우라지게도 무서워요.......ㅠㅠ 네잎짜린 있지도 않겠죠? 몽땅 다 세잎...... 정말로, 평소 앵스트삐~ 라 자칭하시던 게 막 다가와요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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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8/04/27 06:36
꺄아아아아아 이거 놓으세요오오오오 전 그저 일개 독자예요! 리린 님의 충성스런 일개 독자라구요! 무간도 개미지옥엔 아니 갈랍니다! (바둥바둥)

근데 네잎 클로버라니 그게 뭡니까, 먹는 겁니까(....)
틀림없이 있었어도 제 손으로 다 솎아냈을 거예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 행복에서 뒷걸음질치는 이런 놈 데리고 뭘 하겠느냐 OTL 포즈 찍으시던 모님의 좌절이 새삼 뼈에 사무칩니다. 그리고 감독과 각본가넘 농간으로 거기 말려들어 개피 봐야 하는 츠나 꼬꼬마 지못미... orz

후후후후 앵스트삐~의 본분을 다하고자 앞으로도 정진하겠습니다.... 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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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 2008/04/27 14:23
세잎클로버 풀밭이 왜 이렇게 흉흉한걸까요. 21화 백일몽 역버전입니까- 마리나는 (현실 속) 폐허 안에서 싸움 멈추고 그만 쉬어도 된다고 얘기하는데 형님은 (내세인) 클로버밭에서 싸우라고 종용하는군요....? 폐허 안에는 꽃이 한송이 피었는데 저 세잎 클로버 밭엔 꽃이라곤 찾아볼 수 없겠네요. 꽃없이 (그리고 열매없이) 다 시들겠군요. 근데 이 남자는 죽어도 사람맘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네요. 나쁜 남자같으니.... / 더블오 첫 소설 축하하합니다. 앞으로 다른 연성물을 (멋대로)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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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8/04/30 22:34
될 수 있는 한 반대 구성이 되게 하느라고 신경 좀 썼지요.
근데 그거 아십니까. 이미 한 번 블로그에 포스팅한 적이 있긴 한데, 이설은 많지만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복수'입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큰일나니까 여기서 끝.

큰형님이 나쁜 넘인 거야 원작에서부터니까요. 늘 입에 거품 물고 떠들어대는 말이지만 첫사랑 더하기 임프린팅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엄한 인간한테 걸린 우리 츠나 꼬꼬마랑 티에링만 남은 인생 다 들어먹게 생겼죠 뭐. 어이구 팔자야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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