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일에 실컷 치이다 겨우 해방됐더니 환절기에는 정해놓고 걸리는 감기에 덜컥 걸려버려 블로그를 세어보기도 두려운 시간 동안 방치한 S 인사드립니다. 잘하는 짓이다 이뇬아.
늘 하듯이 워밍업 겸사겸사 번역으로 포스팅 재개합니다. 그림이면 그림, 글이면 글, 시리어스면 시리어스 개그면 개그 못하는 게 없어 범골 입장에서는 몹시 괘씸한(....) 코다마(コダマ, 사이트명 O-dama) 씨의 신작 단편 Das Lied der Bildsäule(비석의 노래). 실은 릴케의 한국어판을 찾다가 시간 다 잡아먹었다고는 절대 말 못하지라. 번역 질? 언제부터 나한테 그런 거 기대하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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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해석 및 보충 설명
<비탄>은 결국 한국어판을 찾지 못한 나머지 영문판과 일어판을 참고해가며 시에 대한 소양이라고는 개미 발바닥만큼도 없는 인간이 무우려 직.접. 번역했으므로 질은 결.코. 보장 못합니다. (사죄해! 대시인에게 사죄해 이뇬아!!)
하여간 디란디즈는 답이 없다. 그게 정답.
닐라일로 커플링물을 쓰면 어떻게 될지 시도해 봤습니다.
어째서 평소보다 건전한 플라토닉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요.
(시간축으로는 최종화 이후, 세츠나와 라일밖에 등장하지 않아요)
Das Lied der Bildsäule
라일이 옅은 노란색 표지를 양손으로 펼치자, 낡은 문고본의 마른 향기가 피어올라 짧은 순간 프톨레마이오스의 무기질적인 공간을 채웠다.
「그 책인가」
그러기가 무섭게, 담화실의 맞은편에 선 세츠나가 말했다.
「그 책? 무슨 책?」
라일은 차례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본의 아니게 심술궂은 반문이 되고 말았다. 휴대단말 하나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시대에 종이매체는 분명 드물기야 하겠으나, 마지막으로 아일랜드를 떠나면서 가져온 이 문고본은, 아직 톨레미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시집이다. 오래된」
「오래된 시집……아아, 릴케 말이지」
「이름은 잊었다」
「읽은 적이?」
「나는 없어」
아아, 형인가.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을 샀을 때, 나도 있었다」
세츠나는 라일의 맞은편에 테이블을 끼고 걸터앉아,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팔짱을 끼었다.
탑승자가 줄어든 프톨레마이오스는 한결 스산했다. 공기조절장치의 희미한 잡음만이 방의 환기구에서 스며나올 뿐이다.
「셀레스티얼 비잉의 이름이 세간을 들끓게 하기 이전이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세츠나를 라일이 가볍게 재촉했다.
「첫 미션 플랜보다 몇 달 전이었다. 우리는 AEU의 세이프 하우스에 잠복하고 있었지」
말이 좋아 잠복이지, 그 녀석은 식사다 쇼핑이다 태평하게 외출하기 일쑤였지만.
세츠나는 은근히 책망하는 눈초리로 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이봐이봐, 아무리 가족이라도 형의 행동까지 책임은 못 져」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세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무렵에는 아직 외출은 허용되는 수준이었다. 다만──」
「아하. 어지간히 덥적거렸나 보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꽉 막혔다는 평판이 도는 세츠나다. 형의 사람됨을 보아선, 필경 아이를 좀 구슬러 볼 심산으로 걸핏하면 연하의 동료를 이리저리 끌고 돌아다녔으리라.
「그 사람답네」
손에 든 문고본을 굽어보며 중얼거리자, 앞쪽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단독으로 경제특구에 잠복하기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몰라」
「왜?」
「나는 작전 행동 중에는 식료의 보급을 햄버거로 대신했다」
「햄버거가 어쨌는데?」
「패스트푸드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AEU에서 그 녀석에게 배웠다.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백날을 기다려도 음식이 나오지 않는 줄 몰랐으면, 보급도 끊어졌겠지」
지독스레 진지한 표정으로 세츠나가 단언했고, 수초의 간격을 두고 라일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너도 농담을 다 하냐」
「농담이 아니다」
「알아」
「그렇다면, 왜 웃나」
「화내지 마」
「화나지 않았어」
그것도 알아. 응수하고, 라일은 다시금 심플한 하얀 책갈피가 꽂힌 시집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Die Blätter fallen, fallen wie von weit,
als welkten in den Himmeln ferne Gärten;
sie fallen mit verneinender Gebärde.
Und in den Nächten fällt die schwere Erde
aus allen Sternen in die Einsamkeit.
Wir alle fallen. Diese Hand da fällt.
Und sieh die andre an: es ist in allen.
Und doch ist einer, welcher dieses Fallen
unendlich sanft in seinen Händen hält.
「지독하지」
5년 전부터 줄곧 같은 페이지에 끼워진 채인 책갈피를 손끝으로 집어올리며, 라일은 한숨을 쉬었다.
「뭐가 말인가」
세츠나가 눈썹을 모았다.
「이 시가」
즉흥적으로 공통어로 번역해 읽어주자, 적갈색 눈동자의 청년은 더더욱 곤혹스럽게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나는 시에는 문외한이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이런 시를 동생에게 보내는 형이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는 알 수 있었다.
구좌에 일방적으로 학비를 송금할 뿐 편지 한 통 없었던 형이, 단 한 번 라일 앞으로 보낸 그림엽서가 있었더랬다. 유럽 어딘가 호수의 사진이 인쇄된 엽서의 한 구석에, 낯선 필체로 휘갈겨쓴 구절을 기억한다. 너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니.
십여 년만에 날아온 형의 육성을, 라일은 집에서, 직장에서, 공원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샅샅이 들여다보며, 멋대가리 없는 한 줄에 숨은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려 고문서를 해독하는 학자마냥 필사적으로 매달렸었다.
그렇지만, 말은 말일 뿐이다. 아무리 관찰한들, 형의 필체가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사실밖에 알아낼 수 없었다.
물론 말에 붙여 생각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컨대, 라일이 돌려보낼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너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니.
읽고 있던 책에서 경제학서와 잡지를 제외하니 릴케가 남았다.
그래서, 그림엽서에 쓰인 반송주소로 책을 부쳤다.
편지는 동봉하지 않았다. 주소는 손으로 썼다. 그 사람도 내 필체를 보고,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할까.
답장이 없는 채, 한 달이 흘렀다.
기대는 없었다. 반송주소는 AEU의 사설 우편함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설사 그 주소가 실존한다 하더라도 형이 직접 수령할 거라고는 라일도 생각지 않았다. 홀연히 행방을 감춘 형이 딱 한 번 일으킨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고──그 <변덕>이 형을 기다리는 <무언가>를 예감한 결과였음은 자명했지만──스스로를 달랬다.
그럼에도 라일은 매일같이 우편함을 기웃거렸다. 아파트 현관의 우편함에, 하늘색만이 선명하게 박힌 싸구려 그림엽서가 들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려고, 동료의 권유를 뿌리치고 서둘러 귀가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한 것은, 시집을 보내고 한 달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읽다 만 하드커버를 봉투에 넣으면서, 두연히 시선이 머물렀던 시 한 소절. 라일은 그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었다.
형에게 보낼 편지는 없어도, 이 정도는. 이 정도라면, 용납해 줄지도 모른다고. 책갈피 대신에 읽은 자리를 표시한 흔적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변명을 널어놓으며 귀퉁이를 접은 것을, 라일은 후회하고 있었다.
O wie ist alles fern
und lange vergangen.
Ich glauben, der Stern,
von welche mich Glanz empfangen,
ist seit Jahrtausenden tot.
Ich glaube, im Boot,
das vorüber führ,
hörte ich etwas banges sagen.
Im Hause hat eine Uhr
geschlagen……
In welchem Haus? ……
Ich möchte aus meinem Herzen hinaus
unter den großen Himmel treten.
Ich möchten beten.
Und einer von allen Sternen
müßte wirklich noch sein.
Ich glaube, ich wüßte,
welcher allein
gedauert hat,—
welcher wie eine weiße Stadt
am Ende des Strahls in den Himmeln steht ……
그 시를 읽고 형은 놀랐을까, 어쩌면 당황했을까.
Ich möchten beten.
상대에게서 아무런 기별도 없음을 구실 삼아,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 소원해진 것을 지금껏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는 동생에게서, 이런 걸 건네받았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용기도 없어, 묵묵히 형의 의사를 따르는 것으로 보답이 되는 줄 믿고 있는 인간에게서, 이런 말을.
총명하면서도 은근히 데면데면한 사람이 형이다. 어쩌면 정말로, 접힌 귀퉁이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혹은 눈치챘음에도 무심하게 넘겼을지 몰랐다. 결코, 시의 내용에 곤혹한 나머지 연락을 끊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라일은 변함없는 일상을 보냈다.
싱숭생숭한 나날이었다.
형이 AEU의 <세이프 하우스>에서 하드커버를 받고, 아마도 동생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고, 시를 읽고 이해하고, 답장 대신 새롭게 문고본을 구입해 책갈피를 끼워 아일랜드로 보내기까지, 결국에는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지도에서 고서점을 발견한 그 녀석이 가겠다 고집을 부려서,」
세츠나의 말에, 라일은 시선을 들었다.
「버스로도 여러 시간이 걸렸다」
「일부러 둘이서?」
책갈피를 집어든 손끝으로, 세츠나와, 그 옆의 빈 자리를 번갈아 가리켜보였다.
「그래」
「고생 깨나 했겠다. 이런 케케묵은 고전을 취급하는 서점은 드물잖아」
단말로 다운로드한 데이터를 인쇄하는 서비스라면 발길에 채이도록 많지만, 장정한 문고본은 매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가게에서나 겨우 구할 수 있는 시대이다.
「국경을 몇 개나 넘었다」
세츠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라일은 소리내어 웃었다.
「당일치기가 됐어?」
「점심 직후에 갑작스럽게 출발하게 되었다. 다음날 저녁에야 돌아왔지」
「역시」
한손에 든 문고본으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찡긋해 보이자, 세츠나는 한동안 말없이 흑자색으로 인쇄된 제목을 바라보고, 조금은 다른 음색으로 말했다. 그 녀석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어, 라고.
라일은 손을 테이블 위에 내리고, 눈을 깜박였다. 누군가가 담화실 앞을 지나가는 기척이 났지만, 어느 쪽도 문에 시선을 주진 않았다.
「무척이나 열심히 책을 탐독하더군. 누가 보냈는지는 몰랐지만, 단순한 심심풀이 같지는 않았어」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 세츠나를 침실로 쫓아보내고, 밤이 깊도록 책에 몰두했었더랬다. 두툼한 책은 아니었다. 갖은 공을 다 들이며 읽어도 하룻밤으로 끝날 일을, 몇날 며칠, 조명을 낮춘 맨션의 거실에 앉아, 창으로 들어오는 야경의 빛과 전기 스탠드의 불빛에만 의지하여 나열된 문자를 더듬고 있었다.
「네 책이다」
적갈색 눈동자가, 라일을 바라보았다.
내 책. 조그맣게 되풀이해 보았다. 떨리려는 입술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반송할 시집을 찾을 때에도──」
「됐어」
세츠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됐어. 더 이상은 반칙이야」
나는 형을 모르는 채로 릴케를 보냈어. 형도 나를 모르는 채로 릴케를 보냈어.
「여기서 나만 다 들어버리면, 안되잖아」
그리 말하고 웃어보이자, 세츠나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다. 부질없는 이야기였군」
「아니, 고마워 세츠나」
책갈피를 본디 있었던 자리에 도로 끼워넣으려다, 포기했다.
페이지를 누르는 손에서 힘을 뺐다. 5년간 펼쳐진 적이 거의 없었던 종이뭉치는 원형으로 돌아가고자 팔랑팔랑 물 흐르듯 넘어가, 마침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의사중력을 따라 테이블 위에서 탁 덮혔다.
「정보 제공이라면 환영할게. 다음엔 형의 말도 안 되는 명중률의 비결에 얽힌 얘기라도 알거든 들려주라」
「생각해내도록 노력하겠다」
농담하는 기색은 한 톨도 없이 진지하게 응답하고, 세츠나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릿지에 가는 거지. 같이 가」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라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5분 후에는 정시 브리핑이 시작한다.
「그건 두고 가나」
세츠나는 테이블 위에 둔 시집에 시선을 주었다.
「방해되잖아. 나중에 가지러 오지 뭐」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라일은 다시 한 번 테이블로 향해, 휑덩그렁한 뒷표지를 유일하게 장식한 덩굴 문양을 장갑 끝으로 쓰다듬었다. 갈 곳을 잃은 책갈피가 문고본 옆에서 에어콘의 바람에 희미하게 팔랑이고 있었다.
라일은 오른손으로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쳤다.
Das Lied der Bildsäule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제목에 한순간 멈칫했다가, 책갈피를 끼우고 도로 덮었다. 옅은 회색을 띤 테이블 위를 차지한 옅은 노란색의 표지는 무척이나 선열했다.
「록온」
세츠나가 이름을 불렀다.
「미안, 지금 가」
라일은 더는 돌아보지 않고, 흑발의 청년을 따라 담화실을 뒤로 했다. 자동문이 스르륵 닫혔다.
「시를 좋아하나」
이동용 리프트를 잡은 세츠나가 물었다.
「그렇지도 않아. 알아먹질 못하니까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수준. 형한테 시집을 보낸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어」
「그 책──」
「왜, 빌려줄까?」
「아니, 그 녀석이 가지고 있었던 네 책은……」
함선과 함께 불타버렸을까, 세츠나는 그렇게 뇌까렸다. 4년 전에.
「우주까지 가져갔다면, 그럴지도」
「가져갔다」
「봤어?」
「아아, 방에 있더군」
펼쳐든 모습도 몇 번인가 보았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방안에 곱게 잠든 채, 옛 동료들과 더불어 전화에 한 줌 재가 되었으리라.
「그래. 틀림없이 그건 세상에서 단 하나,」
멈춰선 세츠나의 옆에서 팔을 뻗어, 라일도 리프트를 잡았다. 레일을 따라 저중력의 통로를 스윽 미끄러져 간다.
「단 하나?」
세츠나가 뒤에서 물어왔다. 라일은 어깨 너머로 돌아보고 웃었다.
「단 하나, 우주로 돌아간 릴케겠지」
Wer ist es, wer mich so liebt, daß er
sein liebes Leben verstößt?
Wenn einer für mich ertrinkt im Meer,
so bin ich vom Steine zur Wiederkehr
ins Leben, ins Leben erlöst.
Ich sehne mich so nach dem rauschenden Blut;
der Stein ist so still.
Ich träume vom Leben: das Leben ist gut.
Hat keiner den Mut,
durch den ich erwachen will?
Und werd ich einmal im Leben sein,
das mir alles Goldenste giebt,
so werd ich allein
weinen, weinen nach meinem Stein.
Was hilft mir mein Blut, wenn es reift wie der Wein?
Es kann aus dem Meer nicht den Einen schrein,
der mich am meisten geliebt.
(2009/04/19)
어째서 평소보다 건전한 플라토닉이 된 건진 모르겠지만요.
(시간축으로는 최종화 이후, 세츠나와 라일밖에 등장하지 않아요)
Das Lied der Bildsäule
라일이 옅은 노란색 표지를 양손으로 펼치자, 낡은 문고본의 마른 향기가 피어올라 짧은 순간 프톨레마이오스의 무기질적인 공간을 채웠다.
「그 책인가」
그러기가 무섭게, 담화실의 맞은편에 선 세츠나가 말했다.
「그 책? 무슨 책?」
라일은 차례에 박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본의 아니게 심술궂은 반문이 되고 말았다. 휴대단말 하나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시대에 종이매체는 분명 드물기야 하겠으나, 마지막으로 아일랜드를 떠나면서 가져온 이 문고본은, 아직 톨레미의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시집이다. 오래된」
「오래된 시집……아아, 릴케 말이지」
「이름은 잊었다」
「읽은 적이?」
「나는 없어」
아아, 형인가. 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을 샀을 때, 나도 있었다」
세츠나는 라일의 맞은편에 테이블을 끼고 걸터앉아,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팔짱을 끼었다.
탑승자가 줄어든 프톨레마이오스는 한결 스산했다. 공기조절장치의 희미한 잡음만이 방의 환기구에서 스며나올 뿐이다.
「셀레스티얼 비잉의 이름이 세간을 들끓게 하기 이전이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세츠나를 라일이 가볍게 재촉했다.
「첫 미션 플랜보다 몇 달 전이었다. 우리는 AEU의 세이프 하우스에 잠복하고 있었지」
말이 좋아 잠복이지, 그 녀석은 식사다 쇼핑이다 태평하게 외출하기 일쑤였지만.
세츠나는 은근히 책망하는 눈초리로 라일을 올려다보았다.
「이봐이봐, 아무리 가족이라도 형의 행동까지 책임은 못 져」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세츠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무렵에는 아직 외출은 허용되는 수준이었다. 다만──」
「아하. 어지간히 덥적거렸나 보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꽉 막혔다는 평판이 도는 세츠나다. 형의 사람됨을 보아선, 필경 아이를 좀 구슬러 볼 심산으로 걸핏하면 연하의 동료를 이리저리 끌고 돌아다녔으리라.
「그 사람답네」
손에 든 문고본을 굽어보며 중얼거리자, 앞쪽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이 없었더라면, 나는 단독으로 경제특구에 잠복하기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몰라」
「왜?」
「나는 작전 행동 중에는 식료의 보급을 햄버거로 대신했다」
「햄버거가 어쨌는데?」
「패스트푸드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AEU에서 그 녀석에게 배웠다.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백날을 기다려도 음식이 나오지 않는 줄 몰랐으면, 보급도 끊어졌겠지」
지독스레 진지한 표정으로 세츠나가 단언했고, 수초의 간격을 두고 라일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우와, 너도 농담을 다 하냐」
「농담이 아니다」
「알아」
「그렇다면, 왜 웃나」
「화내지 마」
「화나지 않았어」
그것도 알아. 응수하고, 라일은 다시금 심플한 하얀 책갈피가 꽂힌 시집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Die Blätter fallen, fallen wie von weit,
als welkten in den Himmeln ferne Gärten;
sie fallen mit verneinender Gebärde.
Und in den Nächten fällt die schwere Erde
aus allen Sternen in die Einsamkeit.
Wir alle fallen. Diese Hand da fällt.
Und sieh die andre an: es ist in allen.
Und doch ist einer, welcher dieses Fallen
unendlich sanft in seinen Händen hält.
「지독하지」
5년 전부터 줄곧 같은 페이지에 끼워진 채인 책갈피를 손끝으로 집어올리며, 라일은 한숨을 쉬었다.
「뭐가 말인가」
세츠나가 눈썹을 모았다.
「이 시가」
즉흥적으로 공통어로 번역해 읽어주자, 적갈색 눈동자의 청년은 더더욱 곤혹스럽게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나는 시에는 문외한이다」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이런 시를 동생에게 보내는 형이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는 알 수 있었다.
구좌에 일방적으로 학비를 송금할 뿐 편지 한 통 없었던 형이, 단 한 번 라일 앞으로 보낸 그림엽서가 있었더랬다. 유럽 어딘가 호수의 사진이 인쇄된 엽서의 한 구석에, 낯선 필체로 휘갈겨쓴 구절을 기억한다. 너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니.
십여 년만에 날아온 형의 육성을, 라일은 집에서, 직장에서, 공원에서, 카페테리아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샅샅이 들여다보며, 멋대가리 없는 한 줄에 숨은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려 고문서를 해독하는 학자마냥 필사적으로 매달렸었다.
그렇지만, 말은 말일 뿐이다. 아무리 관찰한들, 형의 필체가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사실밖에 알아낼 수 없었다.
물론 말에 붙여 생각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요컨대, 라일이 돌려보낼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너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니.
읽고 있던 책에서 경제학서와 잡지를 제외하니 릴케가 남았다.
그래서, 그림엽서에 쓰인 반송주소로 책을 부쳤다.
편지는 동봉하지 않았다. 주소는 손으로 썼다. 그 사람도 내 필체를 보고,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할까.
답장이 없는 채, 한 달이 흘렀다.
기대는 없었다. 반송주소는 AEU의 사설 우편함 명의로 되어 있었으나, 설사 그 주소가 실존한다 하더라도 형이 직접 수령할 거라고는 라일도 생각지 않았다. 홀연히 행방을 감춘 형이 딱 한 번 일으킨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고──그 <변덕>이 형을 기다리는 <무언가>를 예감한 결과였음은 자명했지만──스스로를 달랬다.
그럼에도 라일은 매일같이 우편함을 기웃거렸다. 아파트 현관의 우편함에, 하늘색만이 선명하게 박힌 싸구려 그림엽서가 들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려고, 동료의 권유를 뿌리치고 서둘러 귀가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한 것은, 시집을 보내고 한 달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읽다 만 하드커버를 봉투에 넣으면서, 두연히 시선이 머물렀던 시 한 소절. 라일은 그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었다.
형에게 보낼 편지는 없어도, 이 정도는. 이 정도라면, 용납해 줄지도 모른다고. 책갈피 대신에 읽은 자리를 표시한 흔적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줄지도 모른다고.
자신에게 변명을 널어놓으며 귀퉁이를 접은 것을, 라일은 후회하고 있었다.
O wie ist alles fern
und lange vergangen.
Ich glauben, der Stern,
von welche mich Glanz empfangen,
ist seit Jahrtausenden tot.
Ich glaube, im Boot,
das vorüber führ,
hörte ich etwas banges sagen.
Im Hause hat eine Uhr
geschlagen……
In welchem Haus? ……
Ich möchte aus meinem Herzen hinaus
unter den großen Himmel treten.
Ich möchten beten.
Und einer von allen Sternen
müßte wirklich noch sein.
Ich glaube, ich wüßte,
welcher allein
gedauert hat,—
welcher wie eine weiße Stadt
am Ende des Strahls in den Himmeln steht ……
그 시를 읽고 형은 놀랐을까, 어쩌면 당황했을까.
Ich möchten beten.
상대에게서 아무런 기별도 없음을 구실 삼아,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 소원해진 것을 지금껏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는 동생에게서, 이런 걸 건네받았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용기도 없어, 묵묵히 형의 의사를 따르는 것으로 보답이 되는 줄 믿고 있는 인간에게서, 이런 말을.
총명하면서도 은근히 데면데면한 사람이 형이다. 어쩌면 정말로, 접힌 귀퉁이를 눈치채지 못했거나, 혹은 눈치챘음에도 무심하게 넘겼을지 몰랐다. 결코, 시의 내용에 곤혹한 나머지 연락을 끊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라일은 변함없는 일상을 보냈다.
싱숭생숭한 나날이었다.
형이 AEU의 <세이프 하우스>에서 하드커버를 받고, 아마도 동생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고, 시를 읽고 이해하고, 답장 대신 새롭게 문고본을 구입해 책갈피를 끼워 아일랜드로 보내기까지, 결국에는 꼬박 두 달이 걸렸다.
「지도에서 고서점을 발견한 그 녀석이 가겠다 고집을 부려서,」
세츠나의 말에, 라일은 시선을 들었다.
「버스로도 여러 시간이 걸렸다」
「일부러 둘이서?」
책갈피를 집어든 손끝으로, 세츠나와, 그 옆의 빈 자리를 번갈아 가리켜보였다.
「그래」
「고생 깨나 했겠다. 이런 케케묵은 고전을 취급하는 서점은 드물잖아」
단말로 다운로드한 데이터를 인쇄하는 서비스라면 발길에 채이도록 많지만, 장정한 문고본은 매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가게에서나 겨우 구할 수 있는 시대이다.
「국경을 몇 개나 넘었다」
세츠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라일은 소리내어 웃었다.
「당일치기가 됐어?」
「점심 직후에 갑작스럽게 출발하게 되었다. 다음날 저녁에야 돌아왔지」
「역시」
한손에 든 문고본으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찡긋해 보이자, 세츠나는 한동안 말없이 흑자색으로 인쇄된 제목을 바라보고, 조금은 다른 음색으로 말했다. 그 녀석은 계속 생각에 잠겨 있었어, 라고.
라일은 손을 테이블 위에 내리고, 눈을 깜박였다. 누군가가 담화실 앞을 지나가는 기척이 났지만, 어느 쪽도 문에 시선을 주진 않았다.
「무척이나 열심히 책을 탐독하더군. 누가 보냈는지는 몰랐지만, 단순한 심심풀이 같지는 않았어」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 세츠나를 침실로 쫓아보내고, 밤이 깊도록 책에 몰두했었더랬다. 두툼한 책은 아니었다. 갖은 공을 다 들이며 읽어도 하룻밤으로 끝날 일을, 몇날 며칠, 조명을 낮춘 맨션의 거실에 앉아, 창으로 들어오는 야경의 빛과 전기 스탠드의 불빛에만 의지하여 나열된 문자를 더듬고 있었다.
「네 책이다」
적갈색 눈동자가, 라일을 바라보았다.
내 책. 조그맣게 되풀이해 보았다. 떨리려는 입술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반송할 시집을 찾을 때에도──」
「됐어」
세츠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됐어. 더 이상은 반칙이야」
나는 형을 모르는 채로 릴케를 보냈어. 형도 나를 모르는 채로 릴케를 보냈어.
「여기서 나만 다 들어버리면, 안되잖아」
그리 말하고 웃어보이자, 세츠나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다. 부질없는 이야기였군」
「아니, 고마워 세츠나」
책갈피를 본디 있었던 자리에 도로 끼워넣으려다, 포기했다.
페이지를 누르는 손에서 힘을 뺐다. 5년간 펼쳐진 적이 거의 없었던 종이뭉치는 원형으로 돌아가고자 팔랑팔랑 물 흐르듯 넘어가, 마침내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의사중력을 따라 테이블 위에서 탁 덮혔다.
「정보 제공이라면 환영할게. 다음엔 형의 말도 안 되는 명중률의 비결에 얽힌 얘기라도 알거든 들려주라」
「생각해내도록 노력하겠다」
농담하는 기색은 한 톨도 없이 진지하게 응답하고, 세츠나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릿지에 가는 거지. 같이 가」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라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5분 후에는 정시 브리핑이 시작한다.
「그건 두고 가나」
세츠나는 테이블 위에 둔 시집에 시선을 주었다.
「방해되잖아. 나중에 가지러 오지 뭐」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라일은 다시 한 번 테이블로 향해, 휑덩그렁한 뒷표지를 유일하게 장식한 덩굴 문양을 장갑 끝으로 쓰다듬었다. 갈 곳을 잃은 책갈피가 문고본 옆에서 에어콘의 바람에 희미하게 팔랑이고 있었다.
라일은 오른손으로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펼쳤다.
Das Lied der Bildsäule
맨 처음 눈에 들어온 제목에 한순간 멈칫했다가, 책갈피를 끼우고 도로 덮었다. 옅은 회색을 띤 테이블 위를 차지한 옅은 노란색의 표지는 무척이나 선열했다.
「록온」
세츠나가 이름을 불렀다.
「미안, 지금 가」
라일은 더는 돌아보지 않고, 흑발의 청년을 따라 담화실을 뒤로 했다. 자동문이 스르륵 닫혔다.
「시를 좋아하나」
이동용 리프트를 잡은 세츠나가 물었다.
「그렇지도 않아. 알아먹질 못하니까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수준. 형한테 시집을 보낸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어」
「그 책──」
「왜, 빌려줄까?」
「아니, 그 녀석이 가지고 있었던 네 책은……」
함선과 함께 불타버렸을까, 세츠나는 그렇게 뇌까렸다. 4년 전에.
「우주까지 가져갔다면, 그럴지도」
「가져갔다」
「봤어?」
「아아, 방에 있더군」
펼쳐든 모습도 몇 번인가 보았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방안에 곱게 잠든 채, 옛 동료들과 더불어 전화에 한 줌 재가 되었으리라.
「그래. 틀림없이 그건 세상에서 단 하나,」
멈춰선 세츠나의 옆에서 팔을 뻗어, 라일도 리프트를 잡았다. 레일을 따라 저중력의 통로를 스윽 미끄러져 간다.
「단 하나?」
세츠나가 뒤에서 물어왔다. 라일은 어깨 너머로 돌아보고 웃었다.
「단 하나, 우주로 돌아간 릴케겠지」
Wer ist es, wer mich so liebt, daß er
sein liebes Leben verstößt?
Wenn einer für mich ertrinkt im Meer,
so bin ich vom Steine zur Wiederkehr
ins Leben, ins Leben erlöst.
Ich sehne mich so nach dem rauschenden Blut;
der Stein ist so still.
Ich träume vom Leben: das Leben ist gut.
Hat keiner den Mut,
durch den ich erwachen will?
Und werd ich einmal im Leben sein,
das mir alles Goldenste giebt,
so werd ich allein
weinen, weinen nach meinem Stein.
Was hilft mir mein Blut, wenn es reift wie der Wein?
Es kann aus dem Meer nicht den Einen schrein,
der mich am meisten geliebt.
(2009/04/19)
시 해석 및 보충 설명
본문의 순서에 따라, 먼저 닐이 라일에게 보낸 시. <가을(Herbst)>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아슬한 곳에서 내려오는 양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양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무거운 대지가 온 별들로부터 정적 속에 떨어집니다.
우리도 모두 떨어집니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집니다.
그대여 보시라. 다른 것들, 만상이 떨어지는 것을.
하지만 그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낙하를
무한히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십니다.
작전 개시를 앞두고 있어 사세의 구(辞世の句) 흡사한 꼬락서니가 되었습니다.
<어느 한 분>은 필경 하느님이겠지요.
하지만 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동생이 그런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아요.
나뭇잎이 떨어지건 무엇이 떨어지건, 라일은 떨어지지 않아요.
받아주는 존재니까.
어이, 착각은 정도껏.
하긴, 라일이 닐에게 보낸 <비탄(Klage)>도 에지간합니다.
아, 모든 것은 너무나도 멀고,
오랜 옛날에 멀어져가고 말았으니.
돌이켜보면 지금 내 얼굴에 빛을 드리우는
별마저도 수천 년 전에 이미 사멸해 버린 것을.
나는 흘러가는 배를 보고
근심거리를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적한 집에서 시계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거니와,
과연 어느 집인 것일까? ……
나는 이 우울한 마음에 안식을 불어넣고,
광대한 하늘 아래 서기를 갈망한다.
나는 기도하나니……
저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존재하리라.
아마도 알 수 있으리라.
홀로 인내하고 있는 별이
어느 것인지,
천공의 빛의 끄트머리에
새하얀 도시처럼 우뚝 선 그 별이, 어느 것인지.
시작부터 꿀적찌근한 게 딱 라일이랄까 뭐랄까.
우울해지기 쉬운 사람은 좀 더 낙관적이 되지 않으면.
주위의 애정을 의심하고 제 껍질에 틀어박히기 일쑤인 라일에게 닐은 별인 모양이에요.
사실은 오랜 옛날에 소멸해 버린 무수한 별들 틈새에서, 지금도 빛나고 있는 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달까.
그리고 아마도, 그걸 구실로 넓은 하늘 아래로 나오고 싶은 소망도 있어요. 자립해 이놈아.
마지막으로, 라일이 (반쯤 우연히) 고른 <비석의 노래(Das Lied der Bildsäule)>입니다.
소중한 목숨을 버릴 만큼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한 사람 바다에 익사한다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체로, 생명체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렇게도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를 잠깨울 수 있을 만큼
용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장 귀중한 것을 내게 주는
생명을 갖게 된다면……
그때 나는 혼자 울리라.
내가 버린 나의 돌을 생각하며 울리라.
나의 피가 포도주처럼 익는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던 사람 하나를
바다 속에서 불러낼 수도 없는 것을.
여기에 이르기까지 애정도 무엇도 없는 사이였지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라일이 닐에게 보내는 시.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던 사람' 이라는 무시무시한 구절이 들어 있지만, 이건 아뉴도 포함하는 걸로 쳐줍시다.
라일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준 것까지 받아들이고, 록온으로서 살 결의를 굳히게 된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어두워.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아슬한 곳에서 내려오는 양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양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무거운 대지가 온 별들로부터 정적 속에 떨어집니다.
우리도 모두 떨어집니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집니다.
그대여 보시라. 다른 것들, 만상이 떨어지는 것을.
하지만 그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낙하를
무한히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십니다.
작전 개시를 앞두고 있어 사세의 구(辞世の句) 흡사한 꼬락서니가 되었습니다.
<어느 한 분>은 필경 하느님이겠지요.
하지만 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동생이 그런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아요.
나뭇잎이 떨어지건 무엇이 떨어지건, 라일은 떨어지지 않아요.
받아주는 존재니까.
어이, 착각은 정도껏.
하긴, 라일이 닐에게 보낸 <비탄(Klage)>도 에지간합니다.
아, 모든 것은 너무나도 멀고,
오랜 옛날에 멀어져가고 말았으니.
돌이켜보면 지금 내 얼굴에 빛을 드리우는
별마저도 수천 년 전에 이미 사멸해 버린 것을.
나는 흘러가는 배를 보고
근심거리를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적한 집에서 시계가 울리는 소리를 들었거니와,
과연 어느 집인 것일까? ……
나는 이 우울한 마음에 안식을 불어넣고,
광대한 하늘 아래 서기를 갈망한다.
나는 기도하나니……
저 무수한 별들 중의 하나는
지금도 변함없이 존재하리라.
아마도 알 수 있으리라.
홀로 인내하고 있는 별이
어느 것인지,
천공의 빛의 끄트머리에
새하얀 도시처럼 우뚝 선 그 별이, 어느 것인지.
시작부터 꿀적찌근한 게 딱 라일이랄까 뭐랄까.
우울해지기 쉬운 사람은 좀 더 낙관적이 되지 않으면.
주위의 애정을 의심하고 제 껍질에 틀어박히기 일쑤인 라일에게 닐은 별인 모양이에요.
사실은 오랜 옛날에 소멸해 버린 무수한 별들 틈새에서, 지금도 빛나고 있는 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달까.
그리고 아마도, 그걸 구실로 넓은 하늘 아래로 나오고 싶은 소망도 있어요. 자립해 이놈아.
마지막으로, 라일이 (반쯤 우연히) 고른 <비석의 노래(Das Lied der Bildsäule)>입니다.
소중한 목숨을 버릴 만큼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누구일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한 사람 바다에 익사한다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체로, 생명체로 되살아날 것이다.
이렇게도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돌은 너무 조용하기만 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생명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나를 잠깨울 수 있을 만큼
용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가장 귀중한 것을 내게 주는
생명을 갖게 된다면……
그때 나는 혼자 울리라.
내가 버린 나의 돌을 생각하며 울리라.
나의 피가 포도주처럼 익는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던 사람 하나를
바다 속에서 불러낼 수도 없는 것을.
여기에 이르기까지 애정도 무엇도 없는 사이였지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라일이 닐에게 보내는 시.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던 사람' 이라는 무시무시한 구절이 들어 있지만, 이건 아뉴도 포함하는 걸로 쳐줍시다.
라일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준 것까지 받아들이고, 록온으로서 살 결의를 굳히게 된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어두워.
<비탄>은 결국 한국어판을 찾지 못한 나머지 영문판과 일어판을 참고해가며 시에 대한 소양이라고는 개미 발바닥만큼도 없는 인간이 무우려 직.접. 번역했으므로 질은 결.코. 보장 못합니다. (사죄해! 대시인에게 사죄해 이뇬아!!)
하여간 디란디즈는 답이 없다. 그게 정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