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매우 게을렀습니다 데헷. 내년부터는 좀 더 신경 써서 블로그를 돌보겠습니다. 진짜예요. 이 오빠 말 못 믿는 겁니까. 영롱하게 반짝이는 이 눈동자를 들여다보라니까. 아 글쎄 진짜라니까요!!
하여간 2010년의 마지막 포스팅은 주유전 해설 Part 7입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한 몸 희생해라 미주랑.
제 16장. 복잡기괴한 형주사건(複雑怪奇な荊州事情)
물 밑에서 열심히들 치고받고 있습니다.
강릉을 점령하여 양주 및 형주의 장강유역을 완전히 제압한 주유는 전략 목표를 달성했던지 양양으로는 진군하지 않았습니다. 적벽대전부터 강릉제압전에 이르기까지의 전략 목표는 다음의 두 가지였던 모양입니다.
1. 형주에 진입한 조조군을 철퇴시킬 것.
2. 강하와 강릉을 점령하여 양주 및 형주의 방어거점을 제압할 것.
뒤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야말로 주유의 천하이분의 계의 입각점 중 하나에 해당하는 <장강을 방패로 삼아 천하이분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정보를 강하태수로 주유를 남군(강릉)태수로 삼고, 새로이 얻은 강하와 강릉의 방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야 비로소 손오는 형주 제압을 위한 발판을 처음으로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유비와 연합하여 강릉을 점령한 이상 유비에게도 보수를 줄 필요가 있었죠. 주유는 공안(公安)에 유비를 주둔하게 합니다.
이쯤에서부터 형주 지배를 둘러싼 복잡한 요인이 출몰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주유는 편장군(偏将軍, 손권이 토로장군討虜将軍이었던 만큼 주유에게 줄 수 있는 관직은 이게 한계였습니다) 겸 남군태수로 봉해졌고, 동시에 하전(下雋)・한창(漢昌)・유양(劉陽)・주릉(州陵)(모두 형주의 토지입니다. 한 곳에 몰리지 않고 강하에서 장사에 걸쳐 넓은 범위로 흩어져 있죠)을 봉읍으로 하사받았습니다.
(주) 손오의 봉읍제도(奉邑制度)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갈까요. 봉읍제란 관직에 따라 현을 봉읍으로 받아 그 수입으로 군사를 부양하는 제도입니다. 주유뿐만 아니라 주치전이나 여범전을 비롯한 다수의 전에 봉읍을 받았다는 기술이 남아 있어요. 다만 이들 봉읍은 후임자에게 넘어가는 게 원칙이고 세습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주유의 봉읍은 후에 노숙이 이어받게 됩니다.
다음으로 유비를 봅시다. 유비는 좌장군(左将軍)으로서 공안에 주둔했습니다. 유비군과 연합하여 강릉을 제압했으니 유비에게도 토지가 돌아가야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고, 그래서 주유는 유비에게 공안을 내주었죠. (유비전의 주석을 보면 강표전에 주유가 주었다고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군의 장강 북쪽 기슭은 주유가, 남쪽 기슭은 유비가 차지한 셈입니다.
다음으로 유비는 유기를 형주자사, 손권을 서주자사 및 거기장군 대행으로 삼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유기를 형주자사로 민 건 선대 유표의 뒤를 잇는 의미였으나 매우 당연한 처사였죠. 다만 이 상소가 조정에 제대로 올려서 수리된 것인지, 유비와 손권 사이에서만 꿍짝하고 말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사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알쏭달쏭합니다. 손권의 서주자사는 완전히 명예직입니다. 실제로 서주를 지배하고 있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회계태수이자 토로장군에 불과했던 손권에게 자사의 자리는 무척 중요했을 터입니다. 뭐 건 그렇고, 만약 손권과 마찬가지였다면 유기의 형주자사도 명예직이었겠지요.
(주) 손권전 해설을 쓸 무렵에는 손권과 유비 둘이서만 꿍짝하고 말지 않았겠는가 생각했지만, 정세를 돌이켜보면 실제로 상소가 수리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물론 조조는 대체 뭘하고 있었냐는 의문을 무시해야 하지만요. 이 시기에 유종이 항복하고 청주자사가 되었다 치면 형주자사는 비어 있었습니다. 자사의 자리를 비워두는 건 그닥 바람직하지도 않으려니와, 유표의 장자인 유기가 자사에 취임한다면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아니, 상소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유기는 애초부터 형주자사가 될 수 있는 입장이었어요. 꼭두각시이긴 해도요. 허나 방금 전까지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전투했던 상대가 옹립하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니 영 껄적지근하단 말입니다……그리고 손권의 서주자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이야기를 되돌립니다. 공안에 주둔한 유비는 남부 4군의 공략에 나섰습니다. 그 문제로 손권과 알력이 생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는 아직 형주차용문제는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유비전의 기술을 살펴보면, 유비가 경성(京城)으로 출두해 손권에게 형주차용을 두고 이야기를 꺼낸 건 유기가 병사하고 군신들에게 떠밀리다시피 유비가 형주목의 자리에 앉은 이후입니다.
아무튼 정리해 보죠. 유기는 형주자사가 되기는 했지만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였어요. 실제로는 양양 이북은 조조의 수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강하와 강릉은 손권의 세력권이었고요(강릉은 분할 통치). 남부 4군은 유비가 공략했습니다. 이때 유비가 남부 4군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는지는 좀 미묘합니다. 유비전과 제갈량전을 읽어보면 공안만으로는 식솔들을 먹여살릴 수 없어 남부 4군을 공략하고 제갈량이 통치를 맡았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강하와 강릉의 병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만큼 공안(장강 남쪽 기슭)에 유비를 둔 시점에서, 유비의 남부 공략은 암묵의 약속이었을 터입니다. 남부 4군을 노릴 작정이었다면 주유가 직접 공안에 진을 쳤을 테니까요. 그리고 형주 전역의 경우 형주자사는 어디까지나 유기였습니다(형식적인 치안안정 조치라고 해도 말이죠). 역시 형주차용문제가 불거진 건 유비가 형주목에 취임하고 난 다음이겠네요.
당시 형주의 정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손권과 유비를 별개의 세력으로 간주하자니 무언가 모순이 생기고 맙니다. 강하와 강릉은 손오가 지배하고 있는데 형주자사가 유기라는 것부터가 이미 모순덩어리죠. 그렇게 따지면 정보와 주유는 유기의 휘하가 되는 걸요.
더구나 주유가 받은 봉읍은 강하부터 장사에 걸쳐 점점이 퍼져 있었죠.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을 제압하고 나면 그 세력권에 들어가는 토지도 많았습니다. 즉, 주유는 유비가 지배하는 토지에 봉읍을 두게 되는 셈입니다.
방통의 사례를 들어보죠. 방통은 군(아마도 남군南郡)의 공조(功曹)로 일하던 중 주유가 남군태수로 취임하자 그를 상관으로 모십니다. 하지만 주유가 죽고 유비가 형주목이 되자 유비를 따르죠. 아무리 봐도 복속하는 세력을 통째로 갈아치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방통은 그때그때의 상관에게 충실했던 거니까요.
마지막으로, <주유 사후, 노숙은 주둔지를 강릉에서 육구(강하)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노숙이 강릉에서 철퇴한 후 처음으로 강릉의 지배권이 유비에게 넘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종합해 봅시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손권과 유비는 동일 세력으로 보는 편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소위 <반 조조 연합체제>인 거죠. 어째서 연합체제인가 하면, 물론 실질적으로 조조를 쫓아보낸 쪽은 손오였지만, 손권은 그다지 높은 관직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좌장군인 유비 쪽이 누가 보아도 격이 훨씬 위죠. 손권에게 자사를 제수하도록 유비가 상소를 올린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손권에게는 상소를 올릴 권한이 없었거든요.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한 거예요. 손권의 입장에서는 유비는 상객(上客)이고, 유비에게 손권은 협력자였겠지요. 방통전도 주유는 유비가 형주를 지배하는 데 협력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토지의 지배권을 두고 다툼을 벌일 여지는 없었어요. 그 문제는 유비가 형주목이 된 이후에 비로소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어폐를 감안하고 단언하자면, 유비의 형주목 취임 선언은 이퀄 독립선언이었습니다. 손권과 알력이 벌어질 우려가 컸기 때문에 유비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경성으로 향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가 찾아왔으니 손오정권에서도 유비의 처우를 두고 의견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1. 형주에 진입한 조조군을 철퇴시킬 것.
2. 강하와 강릉을 점령하여 양주 및 형주의 방어거점을 제압할 것.
뒤에 좀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야말로 주유의 천하이분의 계의 입각점 중 하나에 해당하는 <장강을 방패로 삼아 천하이분을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정보를 강하태수로 주유를 남군(강릉)태수로 삼고, 새로이 얻은 강하와 강릉의 방비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야 비로소 손오는 형주 제압을 위한 발판을 처음으로 손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유비와 연합하여 강릉을 점령한 이상 유비에게도 보수를 줄 필요가 있었죠. 주유는 공안(公安)에 유비를 주둔하게 합니다.
이쯤에서부터 형주 지배를 둘러싼 복잡한 요인이 출몰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주유는 편장군(偏将軍, 손권이 토로장군討虜将軍이었던 만큼 주유에게 줄 수 있는 관직은 이게 한계였습니다) 겸 남군태수로 봉해졌고, 동시에 하전(下雋)・한창(漢昌)・유양(劉陽)・주릉(州陵)(모두 형주의 토지입니다. 한 곳에 몰리지 않고 강하에서 장사에 걸쳐 넓은 범위로 흩어져 있죠)을 봉읍으로 하사받았습니다.
(주) 손오의 봉읍제도(奉邑制度)에 대해서 잠시 짚고 넘어갈까요. 봉읍제란 관직에 따라 현을 봉읍으로 받아 그 수입으로 군사를 부양하는 제도입니다. 주유뿐만 아니라 주치전이나 여범전을 비롯한 다수의 전에 봉읍을 받았다는 기술이 남아 있어요. 다만 이들 봉읍은 후임자에게 넘어가는 게 원칙이고 세습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주유의 봉읍은 후에 노숙이 이어받게 됩니다.
다음으로 유비를 봅시다. 유비는 좌장군(左将軍)으로서 공안에 주둔했습니다. 유비군과 연합하여 강릉을 제압했으니 유비에게도 토지가 돌아가야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었고, 그래서 주유는 유비에게 공안을 내주었죠. (유비전의 주석을 보면 강표전에 주유가 주었다고 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남군의 장강 북쪽 기슭은 주유가, 남쪽 기슭은 유비가 차지한 셈입니다.
다음으로 유비는 유기를 형주자사, 손권을 서주자사 및 거기장군 대행으로 삼기를 청원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유기를 형주자사로 민 건 선대 유표의 뒤를 잇는 의미였으나 매우 당연한 처사였죠. 다만 이 상소가 조정에 제대로 올려서 수리된 것인지, 유비와 손권 사이에서만 꿍짝하고 말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사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알쏭달쏭합니다. 손권의 서주자사는 완전히 명예직입니다. 실제로 서주를 지배하고 있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회계태수이자 토로장군에 불과했던 손권에게 자사의 자리는 무척 중요했을 터입니다. 뭐 건 그렇고, 만약 손권과 마찬가지였다면 유기의 형주자사도 명예직이었겠지요.
(주) 손권전 해설을 쓸 무렵에는 손권과 유비 둘이서만 꿍짝하고 말지 않았겠는가 생각했지만, 정세를 돌이켜보면 실제로 상소가 수리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물론 조조는 대체 뭘하고 있었냐는 의문을 무시해야 하지만요. 이 시기에 유종이 항복하고 청주자사가 되었다 치면 형주자사는 비어 있었습니다. 자사의 자리를 비워두는 건 그닥 바람직하지도 않으려니와, 유표의 장자인 유기가 자사에 취임한다면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아니, 상소 어쩌고 할 필요도 없이 유기는 애초부터 형주자사가 될 수 있는 입장이었어요. 꼭두각시이긴 해도요. 허나 방금 전까지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전투했던 상대가 옹립하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린다니 영 껄적지근하단 말입니다……그리고 손권의 서주자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이야기를 되돌립니다. 공안에 주둔한 유비는 남부 4군의 공략에 나섰습니다. 그 문제로 손권과 알력이 생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는 아직 형주차용문제는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유비전의 기술을 살펴보면, 유비가 경성(京城)으로 출두해 손권에게 형주차용을 두고 이야기를 꺼낸 건 유기가 병사하고 군신들에게 떠밀리다시피 유비가 형주목의 자리에 앉은 이후입니다.
아무튼 정리해 보죠. 유기는 형주자사가 되기는 했지만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였어요. 실제로는 양양 이북은 조조의 수중에 들어 있었습니다. 강하와 강릉은 손권의 세력권이었고요(강릉은 분할 통치). 남부 4군은 유비가 공략했습니다. 이때 유비가 남부 4군의 지배권을 손에 넣었는지는 좀 미묘합니다. 유비전과 제갈량전을 읽어보면 공안만으로는 식솔들을 먹여살릴 수 없어 남부 4군을 공략하고 제갈량이 통치를 맡았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강하와 강릉의 병사를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만큼 공안(장강 남쪽 기슭)에 유비를 둔 시점에서, 유비의 남부 공략은 암묵의 약속이었을 터입니다. 남부 4군을 노릴 작정이었다면 주유가 직접 공안에 진을 쳤을 테니까요. 그리고 형주 전역의 경우 형주자사는 어디까지나 유기였습니다(형식적인 치안안정 조치라고 해도 말이죠). 역시 형주차용문제가 불거진 건 유비가 형주목에 취임하고 난 다음이겠네요.
당시 형주의 정세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손권과 유비를 별개의 세력으로 간주하자니 무언가 모순이 생기고 맙니다. 강하와 강릉은 손오가 지배하고 있는데 형주자사가 유기라는 것부터가 이미 모순덩어리죠. 그렇게 따지면 정보와 주유는 유기의 휘하가 되는 걸요.
더구나 주유가 받은 봉읍은 강하부터 장사에 걸쳐 점점이 퍼져 있었죠.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을 제압하고 나면 그 세력권에 들어가는 토지도 많았습니다. 즉, 주유는 유비가 지배하는 토지에 봉읍을 두게 되는 셈입니다.
방통의 사례를 들어보죠. 방통은 군(아마도 남군南郡)의 공조(功曹)로 일하던 중 주유가 남군태수로 취임하자 그를 상관으로 모십니다. 하지만 주유가 죽고 유비가 형주목이 되자 유비를 따르죠. 아무리 봐도 복속하는 세력을 통째로 갈아치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방통은 그때그때의 상관에게 충실했던 거니까요.
마지막으로, <주유 사후, 노숙은 주둔지를 강릉에서 육구(강하)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노숙이 강릉에서 철퇴한 후 처음으로 강릉의 지배권이 유비에게 넘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죠.
종합해 봅시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손권과 유비는 동일 세력으로 보는 편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소위 <반 조조 연합체제>인 거죠. 어째서 연합체제인가 하면, 물론 실질적으로 조조를 쫓아보낸 쪽은 손오였지만, 손권은 그다지 높은 관직에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좌장군인 유비 쪽이 누가 보아도 격이 훨씬 위죠. 손권에게 자사를 제수하도록 유비가 상소를 올린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손권에게는 상소를 올릴 권한이 없었거든요.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보완한 거예요. 손권의 입장에서는 유비는 상객(上客)이고, 유비에게 손권은 협력자였겠지요. 방통전도 주유는 유비가 형주를 지배하는 데 협력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토지의 지배권을 두고 다툼을 벌일 여지는 없었어요. 그 문제는 유비가 형주목이 된 이후에 비로소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어폐를 감안하고 단언하자면, 유비의 형주목 취임 선언은 이퀄 독립선언이었습니다. 손권과 알력이 벌어질 우려가 컸기 때문에 유비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경성으로 향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가 찾아왔으니 손오정권에서도 유비의 처우를 두고 의견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물 밑에서 열심히들 치고받고 있습니다.
제 17장. 혼란의 소용돌이(混乱の京城)
주유전도 다음 편으로 드디어 끝. 자 주공근의 눈물나는 고생담의 피날레를 기대하시라.
제 16장이 이만저만 복잡하질 않다 보니 필자도 헛갈립니다. 한 번 더 정리하지요. 그런데 제 17장도 만만찮게 비비 꼬였어요;
1.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손오가 강하를 지배.
2. 강릉공략전에서 손권・유비연합군이 승리. 남군을 분할통치.
3. 유비가 손권에게 서주자사 및 거기장군 대행으로, 유기에게 형주자사를 제수하도록 상소를 올림. 수리됨.
4.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을 공략.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의 지배권을 획득?)
5. 유기가 병사한 후 군신들에게 떠밀리듯이 유비가 형주목에 취임.
이렇게 많은 사건이 단기간에 줄줄이 터졌습니다. 하도 복잡하다 보니 해석도 여러 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유비가 형주목으로 취임할 때까지 손권과 유비는 연합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간주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기는 모순이 한둘이 아닙니다. 손권의 입장에서 볼 때 유비는 토지가 없는 객장이었어요. 따라서 유비의 행동은 모두 객장의 행동이고, 토지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벌어질 일도 없습니다. 헌데 유비가 형주목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목사는 휘하에 있는 주의 군사권을 가지거든요. 다시 말해 유비가 공식적으로 형주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강하와 남군에는 손오의 장수인 정보와 주유가 태수로 주둔하고 있죠. 일단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형주 남부 4군의 소유권도 짚고 넘어가야죠. 유비가 형주 남부 4군 공략에 나설 수 있게 된 건 애시당초 주유가 강하와 강릉에서 조조군을 쫓아냈기 때문이었어요. 더구나 유비로서는 형주의 영토는 필요하되 손권과 대놓고 반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유비는 무언가의 목적을 가지고 경성까지 왔어요. 자, 당시 경성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선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전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 『유비전 본문』 유비는 경성에서 손권과 회담을 갖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죠. 손권은 사자를 보내 촉을 함께 정복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일부는 손오가 형주를 넘어 촉을 지배하기란 불가능할 테니 수락하기를 권유했지만, 은관(殷観)은 자칫하면 근거지를 잃을 수도 있는 만큼 손오에게는 움직일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고하고 이후 행동에 들어가자고 진언합니다.
● 『유비전 주석・헌제춘추(献帝春秋)』 손권은 사자를 파견해 촉을 함께 정복하자고 합니다. 유비는 촉을 차지할 마음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손권은 이를 무시하고 손유에게 수군을 주어 하구로 보냈습니다. 유비는 군이 순순히 통과시키는 대신 각 장수를 포진시킵니다. 이를 안 손권은 손유를 물렸습니다.
● 『방통전 주석・강표전』 유비는 방통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대는 공조로 주유에게 복속했었지. 주유는 내가 경성으로 갔을 때 이대로 유비를 오에 잡아두라고 진언했다던데, 정말인가?" 라 물었습니다. 방통이 사실이라고 대답하자 유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의 지모를 가진 이는 과연 생각하는 바가 똑같구나. 공명은 그때 가지 말도록 권유했지만, 나는 손권이 북쪽의 조조에게 공포심을 품고 있는 만큼 그럴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다네. 그건 만전을 기한 계책이 아니었어."
● 『주유전 본문』 유비가 경성으로 오자, 주유는 말합니다. "유비는 효웅(梟雄)이고,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유비를 이대로 오에 붙잡아 두고, 관우와 장비는 이를테면 제가 손발로서 써야 합니다. 유비에게 토지를 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터입니다."
한편 주유는 경성을 찾아 촉을 칠 계획을 진언했고, 손권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유비가 경성을 떠날 때 송별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유비는 말합니다. "주유는 문무양도의 재능을 겸비한 천하의 영걸입니다. 기량을 보건대 누군가의 휘하로 계속 만족할 인물은 아니리이다."
● 『노숙전』 경성에 온 유비가 형주의 도독으로 취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노숙만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고, 협력하여 조조를 물리쳐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조조는 손권이 토지를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소식을 듣자 들고 있는 붓을 떨어뜨릴 정도로 동요합니다.
주유와 감녕이 촉을 빼앗을 것을 건의하여, 손권이 그 문제를 유비에게 상담하자, 유비는 촉의 유장과는 친족이므로 칠 마음은 없다고 물리칩니다.
● 『노숙전 주석・한진춘추(漢晋春秋)』 여범은 유비를 이대로 오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노숙은 조조의 위협이 크므로 형주를 유비에게 대여해야 한다, 조조의 적을 하나라도 더 늘려 아군의 군세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론합니다.
● 『여범전 본문』 유비가 경성에 오자 여범은 유비를 붙잡아 두도록 건의합니다.
기술을 취합해 봅시다. 유비가 경성에 온 것은 <형주의 도독이 되기 위해서(진수의 본문)>였어요. 문자로 남아 있는 유비가 경성을 방문한 이유는 이게 전부입니다. 이 경우의 도독은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를 의미하죠. 즉 형주의 군사권을 얻고자 한 겁니다. 유비는 이미 형주목으로 취임해 있었으니, 다시 말해 실권을 인정해 달라고 의뢰했던 셈이에요. 후에 손오측은 이걸 <형주차용>이라 주장하고, 유비측은 <자력으로 지배한 토지>라 반박하게 됩니다. 토지 지배와 군사권 문제가 따로 놀았던 것이 맹점이었습니다.
(주) 그 후의 노숙과 정보의 위치를 보면, 유비에게는 강하를 제외한 형주 전부의 지배권이 넘어간 모양입니다. 강하는 이후로도 손오의 세력권으로 남았습니다.
이에 대해 손오측의 반응은 당장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형주양도 반대파 : 주유, 여범, 감녕
형주양도 찬성파 : 노숙
이야기가 이미 길어질대로 길어졌으니, 주유가 유비를 오에 붙잡아두고 촉을 공략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이유는 후술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주유측은 유비의 분리 독립을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어요. 반대로 노숙은 유비의 독립을 인정하고 힘을 키워 함께 조조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반박했고요.
적벽대전의 입안자 2명의 의견이 극과 극으로 갈라졌으니 손권도 정신이 없었겠죠. 최종적으로 손권은 유비의 분리 독립을 인정하기로 결론을 내립니다. 촉에 관해서는 유비와 공동전략을 세워 통치하기로 했고요. 하지만 손권의 결단은 모순투성이입니다. 만일 유비가 형주의 군사권을 갖는 걸 인정하면서 촉을 분할통치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통치권을 분할할 생각이었던 걸까요? 이에 대한 손권의 통찰력은 솔직히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징검다리마냥 영토를 분할할 수도 없으니 언젠가는 문제가 터져요. 그럴 거면 독립은 대체 뭐하러 시킵니까. 유비의 독립을 인정할 바에는 노숙의 방침을 전적으로 따라야 했어요. 동맹자인 유비에게 힘을 기를 기반을 마련해주고, 유비의 촉 제압을 원조하며 함께 조조에게 대항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촉이 탐난다면 유비의 독립을 인정하지 말았어야죠. 그래서 결렬한다면 유비와 싸워서 괴멸시킬 수밖에 없죠. 다시 말해 손권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주유와 노숙의 중간책을 택한 겁니다. 어쩌면 손권은 어떤 결과를 빚건 간에 주유와 노숙 중 하나를 섭섭하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물타기를 했는지도 몰라요. 혹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겠지만, 손권은 주유의 진언에서 무언가 위험한 냄새를 맡고, 촉 정복에는 찬동하되 유비를 오에 붙잡아두기는 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유비 쪽에서 보자면, 손권의 제안에 현실성이라고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둘러대서 거절하고 형주의 사실상의 지배권만 얻으면 그 다음이야 어떻게든 될 일이었습니다.
(주) 손권이 저런 괴상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좀 더 정리해서 다음에 쓰겠습니다. 현 단계에서는 완전한 결론을 내리질 못했거든요. 양해 바랍니다.
이야기로 되돌아가죠. 그럼 주유는 이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이루려 했던 걸까요?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1. 적벽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손오가 강하를 지배.
2. 강릉공략전에서 손권・유비연합군이 승리. 남군을 분할통치.
3. 유비가 손권에게 서주자사 및 거기장군 대행으로, 유기에게 형주자사를 제수하도록 상소를 올림. 수리됨.
4.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을 공략.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의 지배권을 획득?)
5. 유기가 병사한 후 군신들에게 떠밀리듯이 유비가 형주목에 취임.
이렇게 많은 사건이 단기간에 줄줄이 터졌습니다. 하도 복잡하다 보니 해석도 여러 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유비가 형주목으로 취임할 때까지 손권과 유비는 연합체제를 이루고 있었다고 간주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생기는 모순이 한둘이 아닙니다. 손권의 입장에서 볼 때 유비는 토지가 없는 객장이었어요. 따라서 유비의 행동은 모두 객장의 행동이고, 토지 지배권을 둘러싸고 대립이 벌어질 일도 없습니다. 헌데 유비가 형주목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목사는 휘하에 있는 주의 군사권을 가지거든요. 다시 말해 유비가 공식적으로 형주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데 강하와 남군에는 손오의 장수인 정보와 주유가 태수로 주둔하고 있죠. 일단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형주 남부 4군의 소유권도 짚고 넘어가야죠. 유비가 형주 남부 4군 공략에 나설 수 있게 된 건 애시당초 주유가 강하와 강릉에서 조조군을 쫓아냈기 때문이었어요. 더구나 유비로서는 형주의 영토는 필요하되 손권과 대놓고 반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유비는 무언가의 목적을 가지고 경성까지 왔어요. 자, 당시 경성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선 당시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전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 『유비전 본문』 유비는 경성에서 손권과 회담을 갖고 친밀한 사이가 되었죠. 손권은 사자를 보내 촉을 함께 정복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일부는 손오가 형주를 넘어 촉을 지배하기란 불가능할 테니 수락하기를 권유했지만, 은관(殷観)은 자칫하면 근거지를 잃을 수도 있는 만큼 손오에게는 움직일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고하고 이후 행동에 들어가자고 진언합니다.
● 『유비전 주석・헌제춘추(献帝春秋)』 손권은 사자를 파견해 촉을 함께 정복하자고 합니다. 유비는 촉을 차지할 마음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손권은 이를 무시하고 손유에게 수군을 주어 하구로 보냈습니다. 유비는 군이 순순히 통과시키는 대신 각 장수를 포진시킵니다. 이를 안 손권은 손유를 물렸습니다.
● 『방통전 주석・강표전』 유비는 방통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대는 공조로 주유에게 복속했었지. 주유는 내가 경성으로 갔을 때 이대로 유비를 오에 잡아두라고 진언했다던데, 정말인가?" 라 물었습니다. 방통이 사실이라고 대답하자 유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의 지모를 가진 이는 과연 생각하는 바가 똑같구나. 공명은 그때 가지 말도록 권유했지만, 나는 손권이 북쪽의 조조에게 공포심을 품고 있는 만큼 그럴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다네. 그건 만전을 기한 계책이 아니었어."
● 『주유전 본문』 유비가 경성으로 오자, 주유는 말합니다. "유비는 효웅(梟雄)이고,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유비를 이대로 오에 붙잡아 두고, 관우와 장비는 이를테면 제가 손발로서 써야 합니다. 유비에게 토지를 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를 터입니다."
한편 주유는 경성을 찾아 촉을 칠 계획을 진언했고, 손권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유비가 경성을 떠날 때 송별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유비는 말합니다. "주유는 문무양도의 재능을 겸비한 천하의 영걸입니다. 기량을 보건대 누군가의 휘하로 계속 만족할 인물은 아니리이다."
● 『노숙전』 경성에 온 유비가 형주의 도독으로 취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노숙만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고, 협력하여 조조를 물리쳐야 한다고 진언했습니다. 조조는 손권이 토지를 유비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소식을 듣자 들고 있는 붓을 떨어뜨릴 정도로 동요합니다.
주유와 감녕이 촉을 빼앗을 것을 건의하여, 손권이 그 문제를 유비에게 상담하자, 유비는 촉의 유장과는 친족이므로 칠 마음은 없다고 물리칩니다.
● 『노숙전 주석・한진춘추(漢晋春秋)』 여범은 유비를 이대로 오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노숙은 조조의 위협이 크므로 형주를 유비에게 대여해야 한다, 조조의 적을 하나라도 더 늘려 아군의 군세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론합니다.
● 『여범전 본문』 유비가 경성에 오자 여범은 유비를 붙잡아 두도록 건의합니다.
기술을 취합해 봅시다. 유비가 경성에 온 것은 <형주의 도독이 되기 위해서(진수의 본문)>였어요. 문자로 남아 있는 유비가 경성을 방문한 이유는 이게 전부입니다. 이 경우의 도독은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를 의미하죠. 즉 형주의 군사권을 얻고자 한 겁니다. 유비는 이미 형주목으로 취임해 있었으니, 다시 말해 실권을 인정해 달라고 의뢰했던 셈이에요. 후에 손오측은 이걸 <형주차용>이라 주장하고, 유비측은 <자력으로 지배한 토지>라 반박하게 됩니다. 토지 지배와 군사권 문제가 따로 놀았던 것이 맹점이었습니다.
(주) 그 후의 노숙과 정보의 위치를 보면, 유비에게는 강하를 제외한 형주 전부의 지배권이 넘어간 모양입니다. 강하는 이후로도 손오의 세력권으로 남았습니다.
이에 대해 손오측의 반응은 당장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형주양도 반대파 : 주유, 여범, 감녕
형주양도 찬성파 : 노숙
이야기가 이미 길어질대로 길어졌으니, 주유가 유비를 오에 붙잡아두고 촉을 공략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이유는 후술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주유측은 유비의 분리 독립을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어요. 반대로 노숙은 유비의 독립을 인정하고 힘을 키워 함께 조조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반박했고요.
적벽대전의 입안자 2명의 의견이 극과 극으로 갈라졌으니 손권도 정신이 없었겠죠. 최종적으로 손권은 유비의 분리 독립을 인정하기로 결론을 내립니다. 촉에 관해서는 유비와 공동전략을 세워 통치하기로 했고요. 하지만 손권의 결단은 모순투성이입니다. 만일 유비가 형주의 군사권을 갖는 걸 인정하면서 촉을 분할통치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통치권을 분할할 생각이었던 걸까요? 이에 대한 손권의 통찰력은 솔직히 치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징검다리마냥 영토를 분할할 수도 없으니 언젠가는 문제가 터져요. 그럴 거면 독립은 대체 뭐하러 시킵니까. 유비의 독립을 인정할 바에는 노숙의 방침을 전적으로 따라야 했어요. 동맹자인 유비에게 힘을 기를 기반을 마련해주고, 유비의 촉 제압을 원조하며 함께 조조에게 대항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촉이 탐난다면 유비의 독립을 인정하지 말았어야죠. 그래서 결렬한다면 유비와 싸워서 괴멸시킬 수밖에 없죠. 다시 말해 손권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주유와 노숙의 중간책을 택한 겁니다. 어쩌면 손권은 어떤 결과를 빚건 간에 주유와 노숙 중 하나를 섭섭하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물타기를 했는지도 몰라요. 혹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겠지만, 손권은 주유의 진언에서 무언가 위험한 냄새를 맡고, 촉 정복에는 찬동하되 유비를 오에 붙잡아두기는 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유비 쪽에서 보자면, 손권의 제안에 현실성이라고는 없었으므로, 적당히 둘러대서 거절하고 형주의 사실상의 지배권만 얻으면 그 다음이야 어떻게든 될 일이었습니다.
(주) 손권이 저런 괴상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좀 더 정리해서 다음에 쓰겠습니다. 현 단계에서는 완전한 결론을 내리질 못했거든요. 양해 바랍니다.
이야기로 되돌아가죠. 그럼 주유는 이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이루려 했던 걸까요?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주유전도 다음 편으로 드디어 끝. 자 주공근의 눈물나는 고생담의 피날레를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