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넘 생일도 맞았으니 게으름을 터는 의미에서 겸사겸사 뭣 좀 써서 올리려는 찰나에 일폭탄을 맞았다. 1년만에 완전히 정식으로 수주한 프로젝트에 이어 쏟아지는 일일일일일일. 우어어억 己の有能さが恐すぎるわい (뭐 임마) 그러나 오기로라도 포스팅은 합니다. 한다니까요. 세상에 흉흉할수록 자기 일에 충실하고 한 개 오덕은 오덕질에 매진해야 하는 법이지 말입니다 흥 쳇 핏.
다만 지금 시기에, 안 그래도 즉석 창작이 안되는 KISARA에게 창작은 많이 무리인 관계로 홧김에 사모하는♡ 비아이 님의 리퀘를 받는 한편, 비아이 님의 리퀘를 소화하려 낑낑대고 계실(깜장 하-트) 사예 님께 도움이 조금이라도 되기를 바라면서 입만 산 인간들이 상대방을 갈구고 선동질하기에 정신없으며(...) 손안의 책에서 대체 언제 내줄지 기약이 없는(....) 죠로구모의 도리(絡新婦の理) 중 여러모로 클라이맥스이자 여러모로 모에 포인트인 프롤로그를 뚝딱뚝딱 번역해 버렸습니다 데헷. 죠로구모의 도리 마지막 발췌 번역을 한 게 무려 5년 전이지만 그딴 사소한 과거에 신경을 쓰면 좋은 블로거가 될 수 없다능.
무단으로 퍼갈 경우 나랑 전쟁하자는 걸로 간주하겠습니다.
...and less.
'사로잡힌 나비는 볼품없이 망가지고 닳아버린 날개 밑에, 실상 표독스럽고도 선열한 여덟 개의 길디 긴 다리를 숨기고 있었던 셈이지요──' 비유 봐라 이놈의 포에머. 어딘가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한 뇬이 되게 뇌세포를 콱콱 찔러오지만 신경 쓰면 못 쓴대도요.
이 애매뽕빨한 대화가 대체 무슨 의미를 깨알같이 숨겼는지 궁금하신 분은 큰 마음 먹고 죠로구모의 도리를 읽어보시길. 비록 단일 문고본으로는 제일 이두박삼두박감이거니와 (문고본 기준으로 1380페이지...) 세키구치가 거의 없고 - 이거 중요! - 추젠지가 비교적 늦게 나오는 편이라 장광설도 상대적으로 적으며 에노키즈가 상당히 빨리 참전한 덕분에 쟈미의 물방울보다는 훨씬 전개가 시원시원해서 물 흐르듯이 넘어갑니다. 여기 주인장이 이틀만에 완독했으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니까요. 이 오빠를 못 믿는 거냐!
비아이 님께 바칩니다. 우훗.
「당신이───거미였군요」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벚꽃이 천지를 흐드러지게 뒤덮었다.
만개한 벚꽃의 한가운데.
봄바다를 건너온 해신(海神)의 거센 숨결이 단애절벽을 단숨에 거슬러올라 현세의 덧없는 영화를 한순간에 흩날렸다. 하늘도 바다도 대지도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계를 연홍빛 단 한색으로 물들인 듯한 광경이었다.
그 연홍빛 안개의 한가운데 홀로 검은 그림자가 있다.
무너져가는 묘석. 그리고───흑의(黑衣)의 사내.
마주선 이는 연홍빛에 잠긴 여인.
흑의의 사내는 어찌 보면 무표정을 애써 가장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무표정이 단지 곤란한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기 위한 표층만의 연기인지, 진정으로 감정의 기복이 희미한 사내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지, 여인으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내는 말을 이었다.
「팔방으로 뻗어나간 거미집의 중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사로잡힌 나비는 볼품없이 망가지고 닳아버린 날개 밑에, 실상 표독스럽고도 선열한 여덟 개의 길디 긴 다리를 숨기고 있었던 셈이지요──」
여인은 말한다. 새삼스레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건은 이미 해결되었답니다──. 사내는 말한다. 사건은 해결되었어도 당신의 장치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훼방꾼을 훼방꾼으로 제압한 결과,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을 속박하던 자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또다시 속박을 택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계획은 종료하지 않은 겁니다」
글쎄요──여인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당신은, 이 다음으로 당신을 속박하는 자를 배제함으로써 명실상부 이 나라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겠지요. 그 다음도──있습니까」
여인의 얼굴에 머리칼에, 수 개의 꽃잎이 피어났다.
「설마하니 당신께선──제게, 쯔키모노오토시인지 무언지를 시도하실 작정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솔선해서 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당신에게서 떨구어낼 것도 없고요. 그리고 떨굴 필요도 없지 않나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는 이미 제 스스로의 힘으로 떨쳐버렸으니까요.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정말 그럴까요──사내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
「즉 당신은, 당신을 옭아매는 온갖 제도의 주박에서 풀려나, 정체성을 관철하고, 스스로가 있을 자리를 얻고자 모든 계획을 세웠다──이런 말씀이지요」
그래요, 있을 곳이 필요했어요──여인이 말했다.
「어디에도──어느 곳에도 제 자리는 없었어요──그래서, 내 힘으로, 내가 있을 곳을 얻어내자고──그렇게 결심했어요」
「기왕 얻을 바에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제일 좋은 것을 원해요. 당연한 일입니다」
여인은 허세를 부린다. 사내는 냉철하게 응시한다.
「그에 관해──당신이 채택한 방법은 실로 무섭도록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대로 희미한 시간의 저너머에 묻히고 사라져 버리기에는 아깝기조차 합니다」
후하신 칭찬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여인은 그리 대답하고 미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어지러이 춤추는 무수한 연홍색의 파편이 여인의 표정을 가리고 감추어, 여인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양 보였다.
실제로──여인은 울고 있었다.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진심이었다.
그래도──여인은 웃어야만 했다.
사내는 말했다.
「1년 전에──독물을 사용하셨지요」
「글쎄, 무슨 말씀이신지」
「2개월 전에도, 그리고 1주일 전에도」
「그래서, 문제라도?」
「지나쳤습니다」
「세 사람 다 멀지 않아 죽을 목숨이었어요. 저는 당신이 말씀하셨듯이 제가 있을 곳을 마련했을 뿐입니다. 얌전히 입다물고 있어서야 아무도 제게 자리를 주지 않아요」
사내는, 여인을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한도를 넘었습니다. 비록 발 디딜 곳을 얻으려 했다고는 하지만, 대체 당신의 발치에 시체가 몇 구나 나뒹굴어야 속이 풀리겠습니까」
여인은, 각오를 굳혔다.
「말씀 한 번 대단히 기특하시군요. 당신답지도 않으십니다. 아니면──그것이 당신의 한계인가요.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전 알고 있어요. 당신 역시, 당신의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저는──제 자신의 주의를, 사리사욕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약삭빠른 변명이에요. 분명 당신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간청을 받아 근 끌려나오다시피 몸을 일으키십니다. 맞아요. 제가 당신을 끌어내려 한 건, 물론 사가미호(相模湖)의 사건 조서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쿠온지 가의──사건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당신에게 있을 곳을 빼앗겼어요. 그야 당신께서 나서지 않으셨어도 전말은 달라지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한층 처참한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당신은 그녀를 구하셨죠──그녀는 암흑에서 해방되어, 결과적으로 있을 곳을 잃고 죽었습니다. 혹여 그건 당신께서 바라는 바가 아니지 않았던가요?」
「당신은 절 오해하시는군요. 그런 식으로 곡해해서야, 제 본의를 무슨 수로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알아요. 당신은 저와 달리 매우 인도적이시지요. 그래서 당신은──제게 위해를 가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사내는 웃었다.
「실은──방금 전에, 딱 하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인은 커다란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 사내의 윤곽이 뚜렷이 떠올랐다.
「카와시마 키이치는──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지요」
여인은 사내에게서 묘석의 검은 빛깔로 눈길을 옮겼다.
사내는 여인을 등지고 벚꽃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당신은 무엇 하나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겠지요. 실제로도 그 친구는 당신을 적발할 의사를 보이기는커녕──감사마저 하더군요」
「그건──기쁜 일이에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니, 보다 직접적으로 카와시마 군을 조종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 친구는 제 수중에 있습니다. 당신이 법적으로 처벌받게 될, 혹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를 무너뜨릴 허구를 구축하고,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어째서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당신은 인도적이시니까──스스로가 가지신 그 능력을, 그러한 형식으로는 결코 쓰지 않으실 테지요」
사내는 처음으로 의외로운 표정을 지었다.
「──숨기셔도 소용없어요. 당신의 약점은──당신 자신이 원하시지 않는 그 인간성에 있으니까요」
「인간성──입니까」
「혹은 근대성──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의 궤변──당신께서 자아내는 주문은 지독히도 효과적이지요. 허나 당신은 의도적으로 파탄을 내실 때가 있어요」
여인은 쏘는 듯한 시선을 사내에게 던졌다.
「애당초 당신은 반근대적인 음양사시지요. 저와 마찬가지로 중세 암흑의 후예가 아니십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근대주의자라니 모순에도 정도가 있으십니다. 고대의 암흑을 논하고 암흑을 만들고 암흑을 떨구는 자가 어째서, 올바르기를, 건전하기를, 근대인이 되기를 요구하고 흐리멍덩한 주장을 주문에 짜넣으시나요. 세상과 타협하려는 당신 나름의 노력이신가요. 그건 엄청난 기만이 아닌가요?」
일순 바람이 멎었다. 두둥실 떠오른 꽃잎이 너풀거리며 낙하한다.
칠흑을 두른 사내의, 사신과도 같은 풍모가 부상했다.
사내는 말한다.
「조금 다릅니다. 저는 직무로써 제령과 저주를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설령 본의가 아니더라도, 저의 주의와 상반하더라도, 혹은 모순이 발생하더라도 하등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순간에 가장 상대에게 먹히는 주문을 외울 따름입니다. 근대와 반근대, 인도적과 비인도적의 구분은 처음부터 여기에는 없습니다」
여인은 반박한다.
「궤변이에요. 당신은 초월자인양 행세하고 계시지만, 그건 초월이 아니라 오히려 방황에 가깝지 않나요. 당신의 경우 드물게 고개를 내미는 인간성은 고대의 도리에 뿌리박힌 암흑을 근대주의자의 불모성으로 비추는 기능밖에 하지 못합니다. 귀신도, 뱀도, 신도 부처도 설 자리를 잃고──선 채로 말라붙어 죽어갈 뿐이에요. 당신의 망설임은 타인을 파멸시킵니다. 당신 또한──사람을 죽이셨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유감스럽지만 그것도 빗나갔습니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저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카테고리로 역사를 분류하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근대건 고대건 과거는 과거입니다. 앞으로의 향방을 제외하고 현재를 포함하는 지나간 세월은 모두 동렬이지요. 그리고 근대주의건 반근대주의건 모든 언설은 하나의 주문에 불과합니다. 제 말이 인도적으로 들린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청자가 인도주의의 독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장도 저의 주의도 아닙니다. 제 말이 허점이 있다면 그것 또한 계산된 바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죽도록 내몰았어요──여인은 드물게 격앙한다. 그건 바라시는 바가 아니었을 텐데요──사내를 추궁한다. 그 말이 사내를 동요시킬 수 있으리라고, 어째서인지 여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사내는 대답한다.
「물론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아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허나 그리 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발을 들여놓으면 반드시 파멸이 찾아올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바였습니다. 때문에 저는──제 자신의 행위를 무효화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를 항상 몽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없지요」
「정해져 있었다고요──?」
당신도 충분히 아실 터인데요──사내는 조용히 여인을 도발한다.
여인은 희미한 혼란에 빠져, 냉랭한 묘석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께서 발을 들이시기만 해도 시스템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지고 말아요. 당신은 방관자인 체 하시지만, 관측행위 자체가 이미 불확정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예측 따윈」
땅을 뒤덮은 꽃잎이 선풍에 휩쓸려올라 허공에서 춤추었다.
소용돌이에 언어를 실어, 사내의 말은 가속화한다.
「말씀하시는 대로, 관측자에게 자기인식이 없는 경우에는 불확정성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관측자가 한계를 충분히 깨닫고 있는 한, 스스로의 시점을 항시 괄호 속에 봉하고 임하는 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저는 제가 사건의 방관자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찰행위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어를 사용하지요. 언어로 자신의 경계를 구획합니다. 저는 제가 관찰하는 행위까지 사건의 전체에 포함시켜 언설로 변환합니다. 기존의 경계를 일탈할 마음은 없습니다. 탈영역화를 의도하지도 않습니다」
「다, 당신은───」
「저의 비애는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지 줄곧 의심했었지요. 허나 지금 보아하니, 당신은 그저 인식하지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사내는 여인을 다시금 마주본다.
여인은 전율한다. 그러나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사내는 검은 선을 그어넣은 흉악한 눈으로 여인을 응시하였다.
「──이제 겨우 알았습니다」
「아셨다니──무얼?」
「당신은, 당신이 발동시킨 계획이 어떠한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지, 아무런 이해가 없었던 겁니다──」
여인은 허점을 찔려 한순간 허장성세를 잊고 두세 발 뒷걸음질쳤다. 여인에게는 다시 없을 굴욕이었다. 사내는 자그마한 틈새를 놓치지 않고 위협한다.
「──그래서 당신은 멈추지 못했습니다」
「멈──추어요?」
멈춘다.
멈추지 못한다.
벚꽃이 빙글빙글 춤추었다.
「당신은,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인자들에게 의도적인 자극을 가해 사건을 산출하는 네트워크를 재산출하는 사건이 성립하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개별적인 인자와 인자의 행동은 계획 자체에는 수많은 작용을 끼쳤지만 계획의 작동──사건은 개개의 인과적 작용에는 반응치 않고 단지 사건 자체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산출했습니다. 당신은 별다른 의식도 없이, 작동 자체가 시스템을 규정하는 계획을 입안했던 겁니다──」
「그렇다면──저는」
「──이 경우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 이원적으로 한 쌍을 이루는 인식론적인 도식은 무효화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식이 없는 관찰자는 사태를 오인할 수밖에 없지요. 관찰자는 당사자가 포착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입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얻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찰은 그저 사실을 은폐하기만 하는 행위로 타락합니다. 한 번 작동하고 만 계획은 계속해서 사건을 반복하고 재생하기를 되풀이합니다. 때문에──그리고, 당신의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신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잃었다고요──」
잃었어요, 잃고 말았습니다, 모든 걸──.
「──아니에요, 잃은 게 아닙니다」
떨구어냈어요. 퇴치한 거예요. 여인은 말한다.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향기로운 꽃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당신이 하시는 것처럼, 저도」
「하면 어째서 동요하십니까──」
사내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당신은──계속 슬픔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육친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고 낯모르는 이들마저 끌어들이면서──」
「슬퍼했고──말고요」
여인은 진심으로 슬퍼했었다.
수도 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제 마음에는 언제나 정직했으니까.
사내는 검은 하오리를 벗었다.
꽃잎이 여러 장 흩날렸다.
타이르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듯도 한 어조로 사내는 말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자리에──당신은 만족스럽게 오르시렵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을 계속하실 작정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당신이 슬퍼하건 괴로워하건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당신은 강하고, 총명합니다. 차라리 갈채를 보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만──그 시스템 속에 당신이라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사내는 말을 끊었다.
여인은 묘석을 보고 있다.
여인은 변명을 생각해냈다.
「이곳──묘석 밑에 잠든 망자(亡者)들에게 도리를 세우라고 요구하시는 건가요. 듣자하니 당신께선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죽은 자의 사자(使者)라 칭하셨다지요──」
「그건──궤변입니다」
사내는 웃었다.
여인도 웃었다.
「알았습니다. 충고를──따르도록 하지요」
운동은 마침내 정지하고, 동시에 경계는 사라졌다.
「──이번의 제의──고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의 시선에 우수가 깃들었다.
「후회하지──않으시겠습니까」
「하지 않아요」
그렇습니까──사내가 말한다.
「허나──이대로 이곳에서 이와나가히메(石長比売)가 되어 무덤을 지키면서 일생을 마치는 것은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여인이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냥한 말씀을 들려주시니까──」
당신은 오해를 받으시는 거랍니다──여인은 뒷말을 이었다고 여겼지만, 봄나절의 돌풍이 말꼬리를 흐렸고, 사내는 알아듣지 못한 채 짐작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인은 새로이 연분홍을 둘렀다.
여인이 말한다.
「비싸게──쳐주시길 바래요. 저를 위해서」
사내는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미 여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만개한 벚꽃 아래, 낡고 닳은 묘석 앞에서, 여인의 시야는 흐드러지게 춤추는 꽃잎만을 비추고 있다.
「전 더는 울지 않으렵니다. 울고 있어서는 제가 바로 설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한 번 제가 있을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지지 않을 겁니다.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어요. 당신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등을 곧바로 펴고 살아보이겠어요. 이와나가히메의 후예로서, 저는 슬퍼도 괴로워도 반드시 웃어야만 하겠지요. 그것이──」
여인은, 조용히, 의연하게 말했다.
「그것이──죠로구모(絡新婦)의 도리니까요」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벚꽃이 천지를 흐드러지게 뒤덮었다.
만개한 벚꽃의 한가운데.
봄바다를 건너온 해신(海神)의 거센 숨결이 단애절벽을 단숨에 거슬러올라 현세의 덧없는 영화를 한순간에 흩날렸다. 하늘도 바다도 대지도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계를 연홍빛 단 한색으로 물들인 듯한 광경이었다.
그 연홍빛 안개의 한가운데 홀로 검은 그림자가 있다.
무너져가는 묘석. 그리고───흑의(黑衣)의 사내.
마주선 이는 연홍빛에 잠긴 여인.
흑의의 사내는 어찌 보면 무표정을 애써 가장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무표정이 단지 곤란한 순간을 어떻게든 넘기기 위한 표층만의 연기인지, 진정으로 감정의 기복이 희미한 사내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지, 여인으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내는 말을 이었다.
「팔방으로 뻗어나간 거미집의 중심에 앉아 있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사로잡힌 나비는 볼품없이 망가지고 닳아버린 날개 밑에, 실상 표독스럽고도 선열한 여덟 개의 길디 긴 다리를 숨기고 있었던 셈이지요──」
여인은 말한다. 새삼스레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건은 이미 해결되었답니다──. 사내는 말한다. 사건은 해결되었어도 당신의 장치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훼방꾼을 훼방꾼으로 제압한 결과, 당신의 주변에서 당신을 속박하던 자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또다시 속박을 택하려 합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계획은 종료하지 않은 겁니다」
글쎄요──여인은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당신은, 이 다음으로 당신을 속박하는 자를 배제함으로써 명실상부 이 나라의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되겠지요. 그 다음도──있습니까」
여인의 얼굴에 머리칼에, 수 개의 꽃잎이 피어났다.
「설마하니 당신께선──제게, 쯔키모노오토시인지 무언지를 시도하실 작정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솔선해서 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당신에게서 떨구어낼 것도 없고요. 그리고 떨굴 필요도 없지 않나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는 이미 제 스스로의 힘으로 떨쳐버렸으니까요.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정말 그럴까요──사내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다.
「즉 당신은, 당신을 옭아매는 온갖 제도의 주박에서 풀려나, 정체성을 관철하고, 스스로가 있을 자리를 얻고자 모든 계획을 세웠다──이런 말씀이지요」
그래요, 있을 곳이 필요했어요──여인이 말했다.
「어디에도──어느 곳에도 제 자리는 없었어요──그래서, 내 힘으로, 내가 있을 곳을 얻어내자고──그렇게 결심했어요」
「기왕 얻을 바에는 가장 좋은 자리──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제일 좋은 것을 원해요. 당연한 일입니다」
여인은 허세를 부린다. 사내는 냉철하게 응시한다.
「그에 관해──당신이 채택한 방법은 실로 무섭도록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대로 희미한 시간의 저너머에 묻히고 사라져 버리기에는 아깝기조차 합니다」
후하신 칭찬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여인은 그리 대답하고 미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어지러이 춤추는 무수한 연홍색의 파편이 여인의 표정을 가리고 감추어, 여인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양 보였다.
실제로──여인은 울고 있었다.
슬픈 것도 괴로운 것도 진심이었다.
그래도──여인은 웃어야만 했다.
사내는 말했다.
「1년 전에──독물을 사용하셨지요」
「글쎄, 무슨 말씀이신지」
「2개월 전에도, 그리고 1주일 전에도」
「그래서, 문제라도?」
「지나쳤습니다」
「세 사람 다 멀지 않아 죽을 목숨이었어요. 저는 당신이 말씀하셨듯이 제가 있을 곳을 마련했을 뿐입니다. 얌전히 입다물고 있어서야 아무도 제게 자리를 주지 않아요」
사내는, 여인을 정색하고 바라보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은 한도를 넘었습니다. 비록 발 디딜 곳을 얻으려 했다고는 하지만, 대체 당신의 발치에 시체가 몇 구나 나뒹굴어야 속이 풀리겠습니까」
여인은, 각오를 굳혔다.
「말씀 한 번 대단히 기특하시군요. 당신답지도 않으십니다. 아니면──그것이 당신의 한계인가요.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전 알고 있어요. 당신 역시, 당신의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저는──제 자신의 주의를, 사리사욕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약삭빠른 변명이에요. 분명 당신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간청을 받아 근 끌려나오다시피 몸을 일으키십니다. 맞아요. 제가 당신을 끌어내려 한 건, 물론 사가미호(相模湖)의 사건 조서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쿠온지 가의──사건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여자는 당신에게 있을 곳을 빼앗겼어요. 그야 당신께서 나서지 않으셨어도 전말은 달라지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한층 처참한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당신은 그녀를 구하셨죠──그녀는 암흑에서 해방되어, 결과적으로 있을 곳을 잃고 죽었습니다. 혹여 그건 당신께서 바라는 바가 아니지 않았던가요?」
「당신은 절 오해하시는군요. 그런 식으로 곡해해서야, 제 본의를 무슨 수로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알아요. 당신은 저와 달리 매우 인도적이시지요. 그래서 당신은──제게 위해를 가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사내는 웃었다.
「실은──방금 전에, 딱 하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인은 커다란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 사내의 윤곽이 뚜렷이 떠올랐다.
「카와시마 키이치는──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그게 어쨌다는 말씀이지요」
여인은 사내에게서 묘석의 검은 빛깔로 눈길을 옮겼다.
사내는 여인을 등지고 벚꽃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당신은 무엇 하나 범법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겠지요. 실제로도 그 친구는 당신을 적발할 의사를 보이기는커녕──감사마저 하더군요」
「그건──기쁜 일이에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당신과 마찬가지로, 아니, 보다 직접적으로 카와시마 군을 조종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그 친구는 제 수중에 있습니다. 당신이 법적으로 처벌받게 될, 혹은 당신의 사회적 지위를 무너뜨릴 허구를 구축하고,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어째서입니까?」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당신은 인도적이시니까──스스로가 가지신 그 능력을, 그러한 형식으로는 결코 쓰지 않으실 테지요」
사내는 처음으로 의외로운 표정을 지었다.
「──숨기셔도 소용없어요. 당신의 약점은──당신 자신이 원하시지 않는 그 인간성에 있으니까요」
「인간성──입니까」
「혹은 근대성──이라 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의 궤변──당신께서 자아내는 주문은 지독히도 효과적이지요. 허나 당신은 의도적으로 파탄을 내실 때가 있어요」
여인은 쏘는 듯한 시선을 사내에게 던졌다.
「애당초 당신은 반근대적인 음양사시지요. 저와 마찬가지로 중세 암흑의 후예가 아니십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근대주의자라니 모순에도 정도가 있으십니다. 고대의 암흑을 논하고 암흑을 만들고 암흑을 떨구는 자가 어째서, 올바르기를, 건전하기를, 근대인이 되기를 요구하고 흐리멍덩한 주장을 주문에 짜넣으시나요. 세상과 타협하려는 당신 나름의 노력이신가요. 그건 엄청난 기만이 아닌가요?」
일순 바람이 멎었다. 두둥실 떠오른 꽃잎이 너풀거리며 낙하한다.
칠흑을 두른 사내의, 사신과도 같은 풍모가 부상했다.
사내는 말한다.
「조금 다릅니다. 저는 직무로써 제령과 저주를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설령 본의가 아니더라도, 저의 주의와 상반하더라도, 혹은 모순이 발생하더라도 하등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 순간에 가장 상대에게 먹히는 주문을 외울 따름입니다. 근대와 반근대, 인도적과 비인도적의 구분은 처음부터 여기에는 없습니다」
여인은 반박한다.
「궤변이에요. 당신은 초월자인양 행세하고 계시지만, 그건 초월이 아니라 오히려 방황에 가깝지 않나요. 당신의 경우 드물게 고개를 내미는 인간성은 고대의 도리에 뿌리박힌 암흑을 근대주의자의 불모성으로 비추는 기능밖에 하지 못합니다. 귀신도, 뱀도, 신도 부처도 설 자리를 잃고──선 채로 말라붙어 죽어갈 뿐이에요. 당신의 망설임은 타인을 파멸시킵니다. 당신 또한──사람을 죽이셨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유감스럽지만 그것도 빗나갔습니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저는 근대와 전근대라는 카테고리로 역사를 분류하지 않습니다. 제게 있어 근대건 고대건 과거는 과거입니다. 앞으로의 향방을 제외하고 현재를 포함하는 지나간 세월은 모두 동렬이지요. 그리고 근대주의건 반근대주의건 모든 언설은 하나의 주문에 불과합니다. 제 말이 인도적으로 들린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청자가 인도주의의 독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장도 저의 주의도 아닙니다. 제 말이 허점이 있다면 그것 또한 계산된 바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죽도록 내몰았어요──여인은 드물게 격앙한다. 그건 바라시는 바가 아니었을 텐데요──사내를 추궁한다. 그 말이 사내를 동요시킬 수 있으리라고, 어째서인지 여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사내는 대답한다.
「물론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아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허나 그리 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발을 들여놓으면 반드시 파멸이 찾아올 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바였습니다. 때문에 저는──제 자신의 행위를 무효화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를 항상 몽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없지요」
「정해져 있었다고요──?」
당신도 충분히 아실 터인데요──사내는 조용히 여인을 도발한다.
여인은 희미한 혼란에 빠져, 냉랭한 묘석을 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께서 발을 들이시기만 해도 시스템을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지고 말아요. 당신은 방관자인 체 하시지만, 관측행위 자체가 이미 불확정성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예측 따윈」
땅을 뒤덮은 꽃잎이 선풍에 휩쓸려올라 허공에서 춤추었다.
소용돌이에 언어를 실어, 사내의 말은 가속화한다.
「말씀하시는 대로, 관측자에게 자기인식이 없는 경우에는 불확정성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관측자가 한계를 충분히 깨닫고 있는 한, 스스로의 시점을 항시 괄호 속에 봉하고 임하는 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저는 제가 사건의 방관자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관찰행위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어를 사용하지요. 언어로 자신의 경계를 구획합니다. 저는 제가 관찰하는 행위까지 사건의 전체에 포함시켜 언설로 변환합니다. 기존의 경계를 일탈할 마음은 없습니다. 탈영역화를 의도하지도 않습니다」
「다, 당신은───」
「저의 비애는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지 줄곧 의심했었지요. 허나 지금 보아하니, 당신은 그저 인식하지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사내는 여인을 다시금 마주본다.
여인은 전율한다. 그러나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사내는 검은 선을 그어넣은 흉악한 눈으로 여인을 응시하였다.
「──이제 겨우 알았습니다」
「아셨다니──무얼?」
「당신은, 당신이 발동시킨 계획이 어떠한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지, 아무런 이해가 없었던 겁니다──」
여인은 허점을 찔려 한순간 허장성세를 잊고 두세 발 뒷걸음질쳤다. 여인에게는 다시 없을 굴욕이었다. 사내는 자그마한 틈새를 놓치지 않고 위협한다.
「──그래서 당신은 멈추지 못했습니다」
「멈──추어요?」
멈춘다.
멈추지 못한다.
벚꽃이 빙글빙글 춤추었다.
「당신은,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인자들에게 의도적인 자극을 가해 사건을 산출하는 네트워크를 재산출하는 사건이 성립하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개별적인 인자와 인자의 행동은 계획 자체에는 수많은 작용을 끼쳤지만 계획의 작동──사건은 개개의 인과적 작용에는 반응치 않고 단지 사건 자체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산출했습니다. 당신은 별다른 의식도 없이, 작동 자체가 시스템을 규정하는 계획을 입안했던 겁니다──」
「그렇다면──저는」
「──이 경우 주체와 객체, 능동과 수동, 이원적으로 한 쌍을 이루는 인식론적인 도식은 무효화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식이 없는 관찰자는 사태를 오인할 수밖에 없지요. 관찰자는 당사자가 포착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궤도를 수정할 수 있는 입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얻는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찰은 그저 사실을 은폐하기만 하는 행위로 타락합니다. 한 번 작동하고 만 계획은 계속해서 사건을 반복하고 재생하기를 되풀이합니다. 때문에──그리고, 당신의 소망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신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잃었다고요──」
잃었어요, 잃고 말았습니다, 모든 걸──.
「──아니에요, 잃은 게 아닙니다」
떨구어냈어요. 퇴치한 거예요. 여인은 말한다.
여인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향기로운 꽃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당신이 하시는 것처럼, 저도」
「하면 어째서 동요하십니까──」
사내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
「당신은──계속 슬픔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육친을 죽이고 친구를 죽이고 낯모르는 이들마저 끌어들이면서──」
「슬퍼했고──말고요」
여인은 진심으로 슬퍼했었다.
수도 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제 마음에는 언제나 정직했으니까.
사내는 검은 하오리를 벗었다.
꽃잎이 여러 장 흩날렸다.
타이르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듯도 한 어조로 사내는 말한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자리에──당신은 만족스럽게 오르시렵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을 계속하실 작정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당신이 슬퍼하건 괴로워하건 제가 알 바 아닙니다. 당신은 강하고, 총명합니다. 차라리 갈채를 보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만──그 시스템 속에 당신이라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사내는 말을 끊었다.
여인은 묘석을 보고 있다.
여인은 변명을 생각해냈다.
「이곳──묘석 밑에 잠든 망자(亡者)들에게 도리를 세우라고 요구하시는 건가요. 듣자하니 당신께선 어딘가에서 스스로를 죽은 자의 사자(使者)라 칭하셨다지요──」
「그건──궤변입니다」
사내는 웃었다.
여인도 웃었다.
「알았습니다. 충고를──따르도록 하지요」
운동은 마침내 정지하고, 동시에 경계는 사라졌다.
「──이번의 제의──고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내의 시선에 우수가 깃들었다.
「후회하지──않으시겠습니까」
「하지 않아요」
그렇습니까──사내가 말한다.
「허나──이대로 이곳에서 이와나가히메(石長比売)가 되어 무덤을 지키면서 일생을 마치는 것은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여인이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냥한 말씀을 들려주시니까──」
당신은 오해를 받으시는 거랍니다──여인은 뒷말을 이었다고 여겼지만, 봄나절의 돌풍이 말꼬리를 흐렸고, 사내는 알아듣지 못한 채 짐작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인은 새로이 연분홍을 둘렀다.
여인이 말한다.
「비싸게──쳐주시길 바래요. 저를 위해서」
사내는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미 여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만개한 벚꽃 아래, 낡고 닳은 묘석 앞에서, 여인의 시야는 흐드러지게 춤추는 꽃잎만을 비추고 있다.
「전 더는 울지 않으렵니다. 울고 있어서는 제가 바로 설 수 없으니까요. 이렇게 되었으니 다시 한 번 제가 있을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지지 않을 겁니다.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어요. 당신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등을 곧바로 펴고 살아보이겠어요. 이와나가히메의 후예로서, 저는 슬퍼도 괴로워도 반드시 웃어야만 하겠지요. 그것이──」
여인은, 조용히, 의연하게 말했다.
「그것이──죠로구모(絡新婦)의 도리니까요」
'사로잡힌 나비는 볼품없이 망가지고 닳아버린 날개 밑에, 실상 표독스럽고도 선열한 여덟 개의 길디 긴 다리를 숨기고 있었던 셈이지요──' 비유 봐라 이놈의 포에머. 어딘가의 존재 자체가 부조리한 뇬이 되게 뇌세포를 콱콱 찔러오지만 신경 쓰면 못 쓴대도요.
이 애매뽕빨한 대화가 대체 무슨 의미를 깨알같이 숨겼는지 궁금하신 분은 큰 마음 먹고 죠로구모의 도리를 읽어보시길. 비록 단일 문고본으로는 제일 이두박삼두박감이거니와 (문고본 기준으로 1380페이지...) 세키구치가 거의 없고 - 이거 중요! - 추젠지가 비교적 늦게 나오는 편이라 장광설도 상대적으로 적으며 에노키즈가 상당히 빨리 참전한 덕분에 쟈미의 물방울보다는 훨씬 전개가 시원시원해서 물 흐르듯이 넘어갑니다. 여기 주인장이 이틀만에 완독했으니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니까요. 이 오빠를 못 믿는 거냐!
비아이 님께 바칩니다. 우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