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주워 온 대만인지 중국인지의 인기 가수 린 쥔지에(林俊杰)의 <조조(曹操)>만 죽어라고 반복 재생하고 있습니다 S입니다. (노래는 끝내주게 좋음. 가사는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역시 대만 가수 - 예명이 음악소패왕TANK라나 어쨌다나; - 중에 <삼국련(三國戀)>이란 걸 불러대는 친구도 있음. 하여간 중국놈들 삼국지 울궈먹는 근성은 알아줘야 돼.
하여간 항례의 손책전 해설 번역 나갑니다. 얼렁뚱땅 벌써 14장. 배째요! 등따요! 장 꺼내서 줄넘기해!!
무단으로 가져가실 분, 물론 없죠? (쿄고쿠도의 저주 7대분을 사랑하신다면야 얼마든지!)
그리고 시엘레이스 님, 1만 히트 리퀘 안 하십니까- (안 하시면... 뭐... 저야... 좋죠?)
제 12장. 태사자의 약속(太史慈の約束)
또 나온다, 꿈도 희망도 로망도 없는 발언! -3-
남자와 남자가 눈맞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알거늘. 손포코 님은 어느 정도 사귀어보지 않고서 사람됨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했지만, Keep you friends close, keep your enemies closer라는 말마따나 적의 됨됨이가 더 알기 쉬울 때도 있고, 앉은 자리에서 줄 끊고 중랑장 지위를 제수할 정도라면 잔병을 모아오도록 흔쾌히 보내주지 못할 것도 없으리란 게 내 생각이다. 랄까, 그쪽이 훠얼씬 로망이거든! 로망을 모르는 남자로군 그래!
하여간 2년간 열심히 튕기며 소패왕의 속을 잘잘 끓이던 - 얼마나 애가 탔으면 직.접. 잡으려 가셨단다. 직.접 - 태사자가 드디어 손책의 수중에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음. 실은 태사자×손책 쓰고 싶어 환장하겠다. 그런데 떠오르는 네타는 왜 형제물? ;;;;;
태사자와 일기토로 맞붙는 등 예상 외의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손책군의 우세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손책군이 곡아(曲阿)를 침공하자, 유요(劉繇)는 이곳에서는 버틸 수 없겠다 판단하고 단도(丹徒)로 도망하지요. 애초 유요는 단도에서 다시 회계군(会稽郡)으로 피신할 예정이었지만, 허자장(許子将)의 진언을 받아들여 조조 혹은 유표(劉表)와 연락을 주고받기 쉬운 예장군(豫章郡)까지 달아납니다. 그러나 한 번 꺾여버린 기세는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고, 부하 작융(笮融)은 모반마저 일으켰습니다. 두 번의 토벌전으로 간신히 작융을 격파하기는 했지만, 그 직후 유요는 병사합니다. 이리하여 손책은 곡아에 입성하여 유요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손책은 곡아로 들자마자 상을 내려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진보(陳宝)를 파견해 가족을 부릉(阜陵)에서 곡아로 옮겼습니다. 단양(丹陽)에서의 싸움을 일단 매듭지은 이상, 곡아로 이주시켜도 문제될 게 없고, 이후 발발할 원술과의 항쟁을 고려하면 가족을 계속 원술 지배 하에 있는 장강(長江) 이북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걸로 보입니다. 또한 손책은, '유요의 술하 중 항복한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종군하기를 원하는 자의 가족에겐 세금을 면제해 준다' 라는 포고를 내거는데, 이건 아마도 장굉(張紘)이나 장소(張昭)의 조언을 채택한 결과겠지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 손책군은 이 기회를 틈타 일거에 세력을 불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점령한 단양군의 치안 유지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손책군은 노도의 기세로 인해 민중에게 두려움을 사고 있었거든요. 유요는 제법 괜찮은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걸 두들겨 부수고 난입한 손책군이 불안과 공포에 맞닥뜨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해소하고자 손책이 철저하게 휘하 군대에게 약탈을 금지한 결과, 손책군은 성에 들어가도 가축이나 작물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강동에 기반을 두려 하는 이상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철칙이었죠.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 손책의 정책은,
● 점령한 단양군의 치안 유지
● 뿔뿔이 흩어진 유요군의 흡수
이 두 가지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는 장굉과 장소가 힘을 쓰면 될 일이었지만, 남은 문제는 유요군 잔병의 흡수였습니다.
여기에서 태사자의 궤적을 추적해 보죠. 태사자는 유요와 함께 예장으로 피신했나 싶더니 웬걸, 도중에 유요와 헤어져 행방을 감추어 버립니다. 태사자는 아직 손책에게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던 거지요.
태사자는 무얼 근거로 승산이 있다고 여긴 걸까요? 추론하자면,
● 유요가 사망함으로써 휘하의 군사는 허공에 뜬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규합하면 손책군에게도 대항이 가능하다.
● 단양군을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6현은 아직 손책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단양에도 손책에게 항전할 기반이 있었다.
● 강동의 정세는 혼란의 극에 달했으므로, 산월(山越), 엄백호(厳白虎), 조랑(祖郎) 등의 반란분자와 손을 잡고 게릴라전으로 나서면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대충 이 정도겠지요. 특히 첫 번째 사항, 유요군의 잔병 거취와 반란세력의 동향은 유동적이었습니다. 분명 태사자에게는 여전히 승기가 있었어요. 태사자의 성격을 볼 때 "이대로 꼬리 말고 내뺄까 보냐!!" 라는 마음도 있긴 있었겠지만, 승산도 없는 무모한 싸움은 아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태사자의 동향에 손책은 발빠르게 대응해야만 했습니다. 태사자가 유요군을 규합하여 반란분자와 결탁해 버리면 골치만 아프고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여간 유요군 잔병이 태사자에게 붙기 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태사자는 아직 단양의 반란분자인 산월의 일부를 규합했을 뿐이었으니까요. 손책은 부하에게 위임하는 대신 직접 태사자의 토벌에 나섰고, 결과적으로 태사자는 패배해 포로의 몸이 됩니다.
여기서 잠시 정사에 기술된, 사로잡힌 태사자와 손책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역시 놓칠 수 없는 명장면이므로, 전례를 따라 다소 각색하여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손책 『만일 그때의 일기토에서 내가 패배했더라면 귀공은 어찌 하였겠나?』
태사자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손책 『귀공이 했을 처우를 나도 마땅히 귀공에게 돌려주어야겠지.』
이렇게 말하고 태사자의 포박을 풀고, 그 자리에서 자군에 영접하여, 단양에 돌아가자마자 병사와 중랑장(中郎将)의 지위를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유요에게 중히 쓰이지 못한 태사자가 껌벅 넘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과연 사람 꼬드기는 데는 도가 튼 손책입니다. (웃음)
덧붙이자면,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에는 연의에서도 유명한, 태사자가 유요군 휘하의 잔병을 모아오겠으니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손책이 이를 승낙, 모두가 태사자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근심하는 가운데 손책만이 태사자를 믿었는데 태사자 역시 약속을 지켜 흩어진 병사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손책과 태사자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이지만, 이건 영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요. 아무리 손책이라 해도, 막 사로잡은 방금 전까지의 적을 전면적으로 신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태사자도 붙잡히자마자 보내달라고 요청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웃음) 만약 그랬다면 태사자는 굉장히 비상식적인 사람인걸요. ^^;
실제로 태사자는 예장에 있는 유요군의 잔병을 모아오도록 손책에게 요청을 받긴 했지만, 그건 회계(会稽)・오군(呉郡)을 토벌한 후의 일입니다. 손책이라 해도, 어느 정도 사귀어보지 않고 태사자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태사자를 예장으로 보낼 때도, 일부에서는 태사자는 예장태수인 화흠(華歆)과 동향인데 간 김에 그냥 머무르지 않겠느냐는 둥 서주(徐州) 출신이니 이대로 북쪽으로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둥 온갖 의견이 난립했던 모양입니다. 손책군에 가담하고 얼마 되지 않은 태사자는 충분한 신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손책은 "태사자는 용기와 대담함을 겸비했지만, 책모에 의존할 인물은 아니야. 걱정없어." 라고 하면서 태사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태사자는 약속한 대로 유요군의 잔병을 규합하여 돌아왔지요. 손책과 태사자의 약속은 그만큼 굳건했던 겁니다.
손책은 곡아로 들자마자 상을 내려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진보(陳宝)를 파견해 가족을 부릉(阜陵)에서 곡아로 옮겼습니다. 단양(丹陽)에서의 싸움을 일단 매듭지은 이상, 곡아로 이주시켜도 문제될 게 없고, 이후 발발할 원술과의 항쟁을 고려하면 가족을 계속 원술 지배 하에 있는 장강(長江) 이북에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던 걸로 보입니다. 또한 손책은, '유요의 술하 중 항복한 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종군하기를 원하는 자의 가족에겐 세금을 면제해 준다' 라는 포고를 내거는데, 이건 아마도 장굉(張紘)이나 장소(張昭)의 조언을 채택한 결과겠지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 손책군은 이 기회를 틈타 일거에 세력을 불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점령한 단양군의 치안 유지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손책군은 노도의 기세로 인해 민중에게 두려움을 사고 있었거든요. 유요는 제법 괜찮은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걸 두들겨 부수고 난입한 손책군이 불안과 공포에 맞닥뜨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해소하고자 손책이 철저하게 휘하 군대에게 약탈을 금지한 결과, 손책군은 성에 들어가도 가축이나 작물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강동에 기반을 두려 하는 이상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철칙이었죠.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 손책의 정책은,
● 점령한 단양군의 치안 유지
● 뿔뿔이 흩어진 유요군의 흡수
이 두 가지에 집중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는 장굉과 장소가 힘을 쓰면 될 일이었지만, 남은 문제는 유요군 잔병의 흡수였습니다.
여기에서 태사자의 궤적을 추적해 보죠. 태사자는 유요와 함께 예장으로 피신했나 싶더니 웬걸, 도중에 유요와 헤어져 행방을 감추어 버립니다. 태사자는 아직 손책에게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던 거지요.
태사자는 무얼 근거로 승산이 있다고 여긴 걸까요? 추론하자면,
● 유요가 사망함으로써 휘하의 군사는 허공에 뜬 상태로 방치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규합하면 손책군에게도 대항이 가능하다.
● 단양군을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6현은 아직 손책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단양에도 손책에게 항전할 기반이 있었다.
● 강동의 정세는 혼란의 극에 달했으므로, 산월(山越), 엄백호(厳白虎), 조랑(祖郎) 등의 반란분자와 손을 잡고 게릴라전으로 나서면 역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대충 이 정도겠지요. 특히 첫 번째 사항, 유요군의 잔병 거취와 반란세력의 동향은 유동적이었습니다. 분명 태사자에게는 여전히 승기가 있었어요. 태사자의 성격을 볼 때 "이대로 꼬리 말고 내뺄까 보냐!!" 라는 마음도 있긴 있었겠지만, 승산도 없는 무모한 싸움은 아니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태사자의 동향에 손책은 발빠르게 대응해야만 했습니다. 태사자가 유요군을 규합하여 반란분자와 결탁해 버리면 골치만 아프고 끝날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여간 유요군 잔병이 태사자에게 붙기 전에 격파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태사자는 아직 단양의 반란분자인 산월의 일부를 규합했을 뿐이었으니까요. 손책은 부하에게 위임하는 대신 직접 태사자의 토벌에 나섰고, 결과적으로 태사자는 패배해 포로의 몸이 됩니다.
여기서 잠시 정사에 기술된, 사로잡힌 태사자와 손책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역시 놓칠 수 없는 명장면이므로, 전례를 따라 다소 각색하여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손책 『만일 그때의 일기토에서 내가 패배했더라면 귀공은 어찌 하였겠나?』
태사자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손책 『귀공이 했을 처우를 나도 마땅히 귀공에게 돌려주어야겠지.』
이렇게 말하고 태사자의 포박을 풀고, 그 자리에서 자군에 영접하여, 단양에 돌아가자마자 병사와 중랑장(中郎将)의 지위를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유요에게 중히 쓰이지 못한 태사자가 껌벅 넘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과연 사람 꼬드기는 데는 도가 튼 손책입니다. (웃음)
덧붙이자면,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에는 연의에서도 유명한, 태사자가 유요군 휘하의 잔병을 모아오겠으니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손책이 이를 승낙, 모두가 태사자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근심하는 가운데 손책만이 태사자를 믿었는데 태사자 역시 약속을 지켜 흩어진 병사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손책과 태사자의 됨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일화이지만, 이건 영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요. 아무리 손책이라 해도, 막 사로잡은 방금 전까지의 적을 전면적으로 신용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태사자도 붙잡히자마자 보내달라고 요청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웃음) 만약 그랬다면 태사자는 굉장히 비상식적인 사람인걸요. ^^;
실제로 태사자는 예장에 있는 유요군의 잔병을 모아오도록 손책에게 요청을 받긴 했지만, 그건 회계(会稽)・오군(呉郡)을 토벌한 후의 일입니다. 손책이라 해도, 어느 정도 사귀어보지 않고 태사자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태사자를 예장으로 보낼 때도, 일부에서는 태사자는 예장태수인 화흠(華歆)과 동향인데 간 김에 그냥 머무르지 않겠느냐는 둥 서주(徐州) 출신이니 이대로 북쪽으로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둥 온갖 의견이 난립했던 모양입니다. 손책군에 가담하고 얼마 되지 않은 태사자는 충분한 신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손책은 "태사자는 용기와 대담함을 겸비했지만, 책모에 의존할 인물은 아니야. 걱정없어." 라고 하면서 태사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태사자는 약속한 대로 유요군의 잔병을 규합하여 돌아왔지요. 손책과 태사자의 약속은 그만큼 굳건했던 겁니다.
또 나온다, 꿈도 희망도 로망도 없는 발언! -3-
남자와 남자가 눈맞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알거늘. 손포코 님은 어느 정도 사귀어보지 않고서 사람됨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고 했지만, Keep you friends close, keep your enemies closer라는 말마따나 적의 됨됨이가 더 알기 쉬울 때도 있고, 앉은 자리에서 줄 끊고 중랑장 지위를 제수할 정도라면 잔병을 모아오도록 흔쾌히 보내주지 못할 것도 없으리란 게 내 생각이다. 랄까, 그쪽이 훠얼씬 로망이거든! 로망을 모르는 남자로군 그래!
하여간 2년간 열심히 튕기며 소패왕의 속을 잘잘 끓이던 - 얼마나 애가 탔으면 직.접. 잡으려 가셨단다. 직.접 - 태사자가 드디어 손책의 수중에 데굴데굴 굴러떨어졌음. 실은 태사자×손책 쓰고 싶어 환장하겠다. 그런데 떠오르는 네타는 왜 형제물? ;;;;;
제 13장. 독립을 향한 포석(独立への布石)
무슨 뒷공작? 몸이라도 팔았냐? (......어이)
그야말로 손책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뭔 짓이든 다 하는 주유. 자리 좀 잡힐 만하니 이젠 단신부임을 강요당하는 주유. 과부도 팔자고 지 복 없는 것도 팔자다. (먼 눈)
그나저나 저 미묘한 선택이, '무엇을 하든 한 가지 목적만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던 남자'이자 S의 영원한 아이돌(...)이신 카이사르 님을 연상시켜서 왠지 흐뭇했다는 건 비밀...도 아니군.
단양군(丹陽郡)을 완전히 집어삼킨 손책은 여기서 비로소 자신의 기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손책을 둘러싼 양주(揚州)의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우선 단양군 주변에 위치한 오군(呉郡)・회계군(会稽郡)・예장군(豫章郡)의 동향이 문제였지요. 이들 군의 태수는, 모두 정식으로 임명된 양주자사(刺史)였던 유요(劉繇)와 비슷한 입장이었습니다. (허공許貢은 예외입니다) 즉, 후한(後漢) 왕조가 지명한 태수였지요. 그에 비해 손책군은 일단 원술군으로서 행동하고 있었으므로, 기본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오군태수 허공(許貢)과 회계군 태수 왕랑(王朗)은 한의 관리로서 손책에게 대항할 뜻을 보입니다. 다만 예장태수 화흠(華歆)만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유요의 잔병들은 위치적으로 가장 가까운 화흠에게 종군하고자 했으나, 화흠은 단호하게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아마도 유요군 잔병을 맞아들이면 막바로 손책의 표적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손책은 배후에도 충분히 신경을 써야만 했습니다. 즉 원술과의 관계입니다. 손책의 지상 과제는 물론 독립이었지만, 완전히 원술과 반목하게 되는 것은 가능한 한 뒤로 미뤄둘 필요가 있었죠. 당시 원술은 서주(徐州)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었으나, 단양군을 점령한 단계에서 단양태수를 자칭했다가는 당장 창 끝이 손책을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단양을 에워싼 대부분의 군이 항거의 뜻을 표명한 만큼 아직 원술과 완전히 손을 끊을 수는 없었던 겁니다. 여기서 손책은 전황 보고라는 구실로 손분(孫賁)과 오경(呉景)을 수춘(寿春)으로 돌려보냅니다. 더불어 원술에게 공순(恭順)한 제스처를 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요. 또 하나 더, 손책 자신의 군과 원술의 병사를 분리할 속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손책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역양(歴陽)에서 데려온 직속 부대 약 천 명
● 오경・손분 휘하의 병사 약 4~5천 명
● 주유와 함께 참전한 병사
● 전쟁에서 포로로 삼은 옛 유요군
● 곡아(曲阿)에서 징병한 신병
이 중 두 번째, 즉 손분과 오경의 군대는 원술의 병사로,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는 한 손책이 계속 이긴다 해도 전부 원술의 승리로 인식되어 성과를 모조리 박탈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손책 휘하에 원술군이 있어서야 본격적으로 독립에 나섰을 때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경과 손분은 원술파로도 손책파로도 볼 수 있는 참으로 미묘한 위치였지요. 그 두 사람 역시, 당시에는 자신이 손책 막하의 무장이라는 의식이 희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명, 입장을 볼 때 원술군에 가까운 위치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주유입니다. 주유는 손책과 합류할 때 데려온 병사를, 당시 단양태수였던 숙부 주상(周尚)에게서 빌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쪽의 기술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주상은 원술이 독자적으로 지명한 태수였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설령 숙부라 해도, 손책군에 참전하는 주유에게 후한이 임명한 자사를 쓰러뜨리기 위한 병사를 빌려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주유는 원술 막하의 관리인 숙부를 대행하는 형태로 참전하지는 않았을까요? 한편 원술도 손책의 성공에 주유가 크게 기여한 것을 알고, 주유를 발탁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손책은 오군・회계군 공략 전에 주유를 놓아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물론 오경과 손분이 이끄는, 역양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병사를 돌려보내고, 강동에서 얻은 신병을 중심으로 하는 편성의 군대로 싸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도 보통 타격이 아니었습니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오경・손분은 손책군을 떠나 원술에게로 향합니다. 주유 역시 단양에 있는 숙부 주상에게 돌아가지요. 주유가 단양에서 맡은 임무는 막중했습니다. 원술에게 충성을 다하는 척하면서, 단양이 원술의 영향 하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도록 숙부 주상을 손책파로 끌어들여 손책의 기반을 굳히는 일이었지요. 여차직할 때는 원술에게 반기를 들고 단양을 굳게 수비하는 역할도 주어져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건 손책이 주유를 보낼 때 "이만큼 있으면 오군과 회계군은 내 병사만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단양으로 돌아가서 기반을 굳혀주지 않겠나" 라고 말했던 것에서도 짐작 가능하지요.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유의 숙부가 단양태수에 임명된 건 손책에게 굉장한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주상이 아니라 주유와 아무런 연도 없는 원술의 장수가 태수였다면 손책은 단양을 손에 넣고자 이때 이미 원술과 절연해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주유가 주상이 태수로 임명되도록 무언가 뒷공작을 했던 걸까요?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일시적으로나마 주유가 손책을 떠나 원술 휘하에서 일해야만 했던 이유도 훨씬 분명해집니다만.
어쨌건 손책은 원술의 영향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원술에게 예를 표하는 실로 미묘한 선택을 한 셈이지요. 보기에 따라서는 원술에서 반독립했다고도 하겠습니다. 손책은 독립을 향한 포석을 착실하게 깔아나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손책은 배후에도 충분히 신경을 써야만 했습니다. 즉 원술과의 관계입니다. 손책의 지상 과제는 물론 독립이었지만, 완전히 원술과 반목하게 되는 것은 가능한 한 뒤로 미뤄둘 필요가 있었죠. 당시 원술은 서주(徐州)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었으나, 단양군을 점령한 단계에서 단양태수를 자칭했다가는 당장 창 끝이 손책을 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단양을 에워싼 대부분의 군이 항거의 뜻을 표명한 만큼 아직 원술과 완전히 손을 끊을 수는 없었던 겁니다. 여기서 손책은 전황 보고라는 구실로 손분(孫賁)과 오경(呉景)을 수춘(寿春)으로 돌려보냅니다. 더불어 원술에게 공순(恭順)한 제스처를 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요. 또 하나 더, 손책 자신의 군과 원술의 병사를 분리할 속셈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손책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역양(歴陽)에서 데려온 직속 부대 약 천 명
● 오경・손분 휘하의 병사 약 4~5천 명
● 주유와 함께 참전한 병사
● 전쟁에서 포로로 삼은 옛 유요군
● 곡아(曲阿)에서 징병한 신병
이 중 두 번째, 즉 손분과 오경의 군대는 원술의 병사로,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는 한 손책이 계속 이긴다 해도 전부 원술의 승리로 인식되어 성과를 모조리 박탈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손책 휘하에 원술군이 있어서야 본격적으로 독립에 나섰을 때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경과 손분은 원술파로도 손책파로도 볼 수 있는 참으로 미묘한 위치였지요. 그 두 사람 역시, 당시에는 자신이 손책 막하의 무장이라는 의식이 희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한 명, 입장을 볼 때 원술군에 가까운 위치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주유입니다. 주유는 손책과 합류할 때 데려온 병사를, 당시 단양태수였던 숙부 주상(周尚)에게서 빌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뒤쪽의 기술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주상은 원술이 독자적으로 지명한 태수였던 모양이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설령 숙부라 해도, 손책군에 참전하는 주유에게 후한이 임명한 자사를 쓰러뜨리기 위한 병사를 빌려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쩌면 주유는 원술 막하의 관리인 숙부를 대행하는 형태로 참전하지는 않았을까요? 한편 원술도 손책의 성공에 주유가 크게 기여한 것을 알고, 주유를 발탁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손책은 오군・회계군 공략 전에 주유를 놓아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죠. 물론 오경과 손분이 이끄는, 역양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병사를 돌려보내고, 강동에서 얻은 신병을 중심으로 하는 편성의 군대로 싸움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도 보통 타격이 아니었습니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오경・손분은 손책군을 떠나 원술에게로 향합니다. 주유 역시 단양에 있는 숙부 주상에게 돌아가지요. 주유가 단양에서 맡은 임무는 막중했습니다. 원술에게 충성을 다하는 척하면서, 단양이 원술의 영향 하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도록 숙부 주상을 손책파로 끌어들여 손책의 기반을 굳히는 일이었지요. 여차직할 때는 원술에게 반기를 들고 단양을 굳게 수비하는 역할도 주어져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건 손책이 주유를 보낼 때 "이만큼 있으면 오군과 회계군은 내 병사만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단양으로 돌아가서 기반을 굳혀주지 않겠나" 라고 말했던 것에서도 짐작 가능하지요.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주유의 숙부가 단양태수에 임명된 건 손책에게 굉장한 행운이었습니다. 만약 주상이 아니라 주유와 아무런 연도 없는 원술의 장수가 태수였다면 손책은 단양을 손에 넣고자 이때 이미 원술과 절연해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주유가 주상이 태수로 임명되도록 무언가 뒷공작을 했던 걸까요? 그런 사정이 있었다면, 일시적으로나마 주유가 손책을 떠나 원술 휘하에서 일해야만 했던 이유도 훨씬 분명해집니다만.
어쨌건 손책은 원술의 영향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원술에게 예를 표하는 실로 미묘한 선택을 한 셈이지요. 보기에 따라서는 원술에서 반독립했다고도 하겠습니다. 손책은 독립을 향한 포석을 착실하게 깔아나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뒷공작? 몸이라도 팔았냐? (......어이)
그야말로 손책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뭔 짓이든 다 하는 주유. 자리 좀 잡힐 만하니 이젠 단신부임을 강요당하는 주유. 과부도 팔자고 지 복 없는 것도 팔자다. (먼 눈)
그나저나 저 미묘한 선택이, '무엇을 하든 한 가지 목적만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던 남자'이자 S의 영원한 아이돌(...)이신 카이사르 님을 연상시켜서 왠지 흐뭇했다는 건 비밀...도 아니군.
제 14장. 오군 평정(呉郡平定)
보다시피 S의 세 번째 삼국지 SS <부재중>의 배경이 되는 시기. 그러니까, 보나마나 옆에서 마구 화내고 잔소리하고 바가지; 긁어주고 이지메;도 당해줄 주유가 없어서 할 마음이 나질 않았던 거라니까 이 사람?
그리고 손오 제일의 성질 더러운 남자 우번이 살짝 언급되어서 왠지 기쁜 S.
단양군(丹陽郡)을 깔고 앉아버린 손책은 원술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이번에는 오군(呉郡)・회계군(会稽郡)으로 화살을 돌립니다. 우선은 단양의 바로 오른쪽 옆에 있는 오군 평정에부터 착수하지요. 당시 오군의 태수는 허공(許貢)이었습니다. 허공에 대해서는 촉서(蜀書)와 오서(呉書) 양쪽에 기술이 남아 있지만 무언가 분명치가 않아요. 촉서의 허정전(許靖伝)에는 허공이 오군도위(呉郡都尉 : 오군의 방위군 지휘관)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손책전에는 허공이 본디 오군태수였던 성헌(盛憲)을 강제로 몰아내고 군을 지배했다고 되어 있어, 아마도 본디는 오군도위였던 사람이 힘으로 성헌을 쫓아내고 태수직을 차지한 거겠지요. 기술을 믿는다면 허공은 문관이 아닌 무관이고 더구나 난폭자에 가까웠습니다. 훗날의 수수께끼 같은 손책의 사망과도 관련이 있지만, 허공은 십에 필구 무도가였고 더구나 힘깨나 쓴다는 자들을 모조리 식객으로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천항로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소위 말하는 협자(侠者)와 흡사한 이미지지요.
잠시 시선을 돌려 주치(朱治)를 보도록 하죠. 주치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주치는 원술의 휘하에서 이미 오군도위의 자리를 제수받았다고 합니다. 허공이 오군도위였던 무렵과 겹쳐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지만, 오경(呉景)과 손분(孫賁)이 각각 단양의 태수와 도위로써 유요(劉繇)를 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주치 역시 손분처럼 유요를 견제하기 위해 오군도위에 임명되었는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건 간에 주치는 이전에 오군에 부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 오군 공략은 주치가 주도하게 됩니다. 그 동안 손책은 뭘 했느냐 하면, 군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회계군으로 향하고, 나머지 반은 주치에게 맡겨 오군을 평정토록 지시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증거로, 손책전에는 오군공방전 당시의 손책의 행적에 대해서 한 줄도 나와 있지 않고, 금방 회계군 토벌에 나섰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어요. 손책전만 읽으면 오군 공략은 아예 없었던 걸로 착각할 지경입니다. (그 대신 주치전을 비롯한 각 무장의 전기에 오군 공략에 가담했다는 기술이 있어, 오군공방전의 존재를 알려주지요)
왠지 전격작전에 의한 집중공격을 장기로 하는 손책답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아니나다를까 회계군 공략은 절강(浙江 : 장강長江의 아래 있는 상당한 규모의 강으로, 단양군과 회계군의 경계선이었습니다)을 끼고 교착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손책에게 있어 주유의 이탈은 본인의 예상 이상으로 심각한 데미지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숫적・질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손책군은 역양(歴陽)에서 떠날 당시와 비교하여 엄청난 규모로 불어 있었지만, 바로 직전에 시작부터 참전하여 잔뼈가 굵은 오경과 손분의 군을 원술에게 반환했지요. 남은 건 대부분이 손책군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이었는데, 그걸 또 둘로 나눈 셈이지요. 혹은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양동작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왕랑전을 보면, '손책은 각 군이 협력해서 맞아야 할 상대라고. 어이 화흠 씨, 빨리 손책 타도의 기치를 올려주지 않겠어?' 라는 편지를 화흠(華歆)에게 보내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임무를 맡은 우번虞翻이 도중에 발을 돌려 버리는 바람에 화흠은 편지를 받아보지도 못했던 모양이지만요) 따라서 왕랑과 허공이 동시에 손책에게 대항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요.
반면, 오군의 지형을 숙지한 주치는 눈부신 활약을 보입니다. 주치는 전당(銭塘)에서 오군으로 진군해, 유권(由拳)에서 허공군과 대치, 철저하게 허공군을 두들겨놓습니다. 결국 허공은 남쪽으로 도주하여 반란세력인 엄백호(厳白虎)에게 의탁하지요. 손책에게 살해당하는 건 좀 더 나중입니다.
(주) 단양전선을 일단 마무리지은 손책은, 손분과 오경 등 원술과 관계가 깊은 무장을 떼어내는 한편, 전당으로 손일문을 소집했습니다. 그 대표격이 손정(孫静)이었죠. 또한 오군 토벌에 나선 주치도 전당에서 출격하여, 전당이야말로 오군・회계군 공략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인원의 재편성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주전력은 손책, 손정, 주치 등으로, 여기서부터 원술 대신 손일문 고유의 색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셈이죠.
다시 손책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손책이 언제까지고 세월아 네월아 꾸물거리고 있을 리가 없었죠. 하기사 오른팔이 이탈한 판에 조금 지지부진했어도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웃음) 이후에 손책은 회계군 토벌의 실마리를 잡아, 다시금 파죽의 쾌진격을 개시하기에 이릅니다.
잠시 시선을 돌려 주치(朱治)를 보도록 하죠. 주치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주치는 원술의 휘하에서 이미 오군도위의 자리를 제수받았다고 합니다. 허공이 오군도위였던 무렵과 겹쳐서 혼동을 일으키기 쉽지만, 오경(呉景)과 손분(孫賁)이 각각 단양의 태수와 도위로써 유요(劉繇)를 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주치 역시 손분처럼 유요를 견제하기 위해 오군도위에 임명되었는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건 간에 주치는 이전에 오군에 부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 오군 공략은 주치가 주도하게 됩니다. 그 동안 손책은 뭘 했느냐 하면, 군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회계군으로 향하고, 나머지 반은 주치에게 맡겨 오군을 평정토록 지시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증거로, 손책전에는 오군공방전 당시의 손책의 행적에 대해서 한 줄도 나와 있지 않고, 금방 회계군 토벌에 나섰던 것처럼 묘사되어 있어요. 손책전만 읽으면 오군 공략은 아예 없었던 걸로 착각할 지경입니다. (그 대신 주치전을 비롯한 각 무장의 전기에 오군 공략에 가담했다는 기술이 있어, 오군공방전의 존재를 알려주지요)
왠지 전격작전에 의한 집중공격을 장기로 하는 손책답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아니나다를까 회계군 공략은 절강(浙江 : 장강長江의 아래 있는 상당한 규모의 강으로, 단양군과 회계군의 경계선이었습니다)을 끼고 교착 상태에 빠져 버렸습니다. 손책에게 있어 주유의 이탈은 본인의 예상 이상으로 심각한 데미지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숫적・질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손책군은 역양(歴陽)에서 떠날 당시와 비교하여 엄청난 규모로 불어 있었지만, 바로 직전에 시작부터 참전하여 잔뼈가 굵은 오경과 손분의 군을 원술에게 반환했지요. 남은 건 대부분이 손책군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이었는데, 그걸 또 둘로 나눈 셈이지요. 혹은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양동작전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왕랑전을 보면, '손책은 각 군이 협력해서 맞아야 할 상대라고. 어이 화흠 씨, 빨리 손책 타도의 기치를 올려주지 않겠어?' 라는 편지를 화흠(華歆)에게 보내려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는 임무를 맡은 우번虞翻이 도중에 발을 돌려 버리는 바람에 화흠은 편지를 받아보지도 못했던 모양이지만요) 따라서 왕랑과 허공이 동시에 손책에게 대항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요.
반면, 오군의 지형을 숙지한 주치는 눈부신 활약을 보입니다. 주치는 전당(銭塘)에서 오군으로 진군해, 유권(由拳)에서 허공군과 대치, 철저하게 허공군을 두들겨놓습니다. 결국 허공은 남쪽으로 도주하여 반란세력인 엄백호(厳白虎)에게 의탁하지요. 손책에게 살해당하는 건 좀 더 나중입니다.
(주) 단양전선을 일단 마무리지은 손책은, 손분과 오경 등 원술과 관계가 깊은 무장을 떼어내는 한편, 전당으로 손일문을 소집했습니다. 그 대표격이 손정(孫静)이었죠. 또한 오군 토벌에 나선 주치도 전당에서 출격하여, 전당이야말로 오군・회계군 공략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인원의 재편성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주전력은 손책, 손정, 주치 등으로, 여기서부터 원술 대신 손일문 고유의 색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셈이죠.
다시 손책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손책이 언제까지고 세월아 네월아 꾸물거리고 있을 리가 없었죠. 하기사 오른팔이 이탈한 판에 조금 지지부진했어도 할 수 없지 않겠어요? (웃음) 이후에 손책은 회계군 토벌의 실마리를 잡아, 다시금 파죽의 쾌진격을 개시하기에 이릅니다.
보다시피 S의 세 번째 삼국지 SS <부재중>의 배경이 되는 시기. 그러니까, 보나마나 옆에서 마구 화내고 잔소리하고 바가지; 긁어주고 이지메;도 당해줄 주유가 없어서 할 마음이 나질 않았던 거라니까 이 사람?
그리고 손오 제일의 성질 더러운 남자 우번이 살짝 언급되어서 왠지 기쁜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