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더 막 나가는 삼국지 SS 제 6탄.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도 나는 간다 아아 오늘도 간다.
SIDE A-46. 동반(道連れ)
여러 가지로 겁나게 난감했던바보만화 순정만화 <강동의 새벽(江東の暁)>에서 쌔벼온 설정 및 전개. 난향이를 보내고 싶지 않은(...) 손견과 손책에게 떠밀려 주유가 울며 겨자먹기로 여장하게 되는 데까지는 그대로 따왔다. 출처가 그 모양이다 보니 평소의 배 이상으로 강인하게 역사를 무시하고 있음. 으하하하하하하;;;;
손책은 목적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류였다고 생각함. 죽는 시늉은 고사하고 필요하면 제 장례식도 치르고 여장에다 몸 내주기도 불사할 인간. 주위에서 속이 타건 끓건 뒤집히건 목적만 달성하면 내 알 바 아님. 그런 걸 좀 발랄하게 써보고 싶었다. 플러스 무언가 일반인과는 크게 어긋난 손일문에 끼여서 짤짤이 고생하는 주유와 罵り愛의 손견 손책 부자도 (爆)
다음 예정은 유책(유+책?)의 시리어스물.
(실은 강동의 새벽 네타로 한 개 더 써 버릴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비밀임. 것도 여자 버전으로;;)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하자면 "너 사실은 남장 소녀지?" "아냐──!!" 는 S의 삼국지 SS 제 2탄 '응?' 에서 한 번 써먹었던 네타임 (웃음)
'강동의 호랑이'라는 이명으로 명성을 천하에 떨치는 손문대의 장남이자, 세간에 기린아(麒麟児)로써 벌써부터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손백부를 만나보고 싶은 욕구를 못 이기고 과감하게 수춘으로 향해, 막상 대면한 장본인의 한인(漢人)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은발에 놀라고 소문과는 영 딴판인 돌려 말해 무진장 파격적인 성격에 기겁했지만 결국엔 운명을 느껴 눈이 맞고 불꽃이 튄 후로 -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 약 반 년. (길다;)
그 후로 모친 장(蒋)부인의 탐탁찮아 하는 얼굴을 굳이 못 본 척해 가며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수춘의 손일문 저택을 들락날락하던 주유의 다섯 번째 방문을 장식한 것은 한수(韓遂) 토벌전에서 장사태수(長沙太守)의 인을 기념품으로 귀환한 손견 자신이었다. 주유에게 꼭 붙어 있던 난향(蘭香)과 손권을 덥석 끌어안으며 호쾌하게도 등장한 강동의 호랑이는 돌발 상황에 굳어버린 주유를 뒤늦게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오호라, 자네가 주공근이로군! 책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그놈, 요즘 자나 깨나 줄창 자네 얘기뿐일세. 거 참 질투나는구먼. 그런데 난 또 웬 기억에 없는 미소녀가 집에 있나 했지! 와하하하하하!!! 그, 그러신가요;;;
처음으로 대면한 손문대는 빛의 강약에 따라 금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옅은 갈색 머리와 멋진 수염의 댄디한 30대였다. 장남이 은발, 차남이 적발이고 보면 이젠 무슨 색이 나와도 놀랍지 않다. 헤실헤실한 듯 하면서 기실 빈틈없고 날카로운 눈매가 어딘지 친우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암만 어른스럽고 침착해도 아직 열세 살인 주유는 강동 최고의 용장(勇將)을 직접 만난 것에 내심 흥분하여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 손견의 짧은 감탄사에 고개를 돌려본 주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오는 낯익은 은발을 보았다. 공근, 어서 와라! 친우에게 인사하고 오랜만에 마주한 부자, 감동의 상봉.
"아버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소자 눈물겹습니다!"
"오오 책! 못 본 사이에 더욱 멋진 남자가 됐구나!"
"─라고 할 줄 알았냐 빌어먹을 늙다리!! 오늘이야말로 그 잘나빠진 수염 모조리 뽑아줄 테다 이리 와!! 못 와!?"
"아직도 포기 못한 거냐 지랄맞은 애새끼!! 다리몽댕이를 확 분질러 버릴까!!"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보시지! 동탁한테 뒤나 먹혀버려 이 영감탱이!!"
"뭣이 어쩌고 어째─────!!!!"
어딘가의 손씨 부자가 항례의 욕설과 주먹질의 부자애를 공고히 다지는 와중에 그간 잘 쌓아온 '강동의 호랑이'에 대한 사춘기 소년의 환상과 덤으로 낭하가 일거에 박살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만면에 상냥한 웃음을 띠운 오부인이 어디선가 출현한 솥뚜껑을 부군과 아들의 머리에 집어던짐으로써 일은 무사히 수습되었다.
본디부터 하극상불사 사투용납의 살벌한 전장인 손일문의 식사 시간이 손견의 참전으로 한층 피와 살이 튀는 처참한 현장이 될 각오를 미리부터 굳힌 주유였지만, 언제라도 내리찍을 수 있도록 잡은 국자를 살살 흔들며 변함없이 상냥히도 웃는 오부인의 위협이 어지간히 겁났던지 아버지도 아들도 비교적 조용했다. 대신 황건적의 난, 한수 토벌의 경위, 장사태수 임명, 쌓이고 쌓인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결국엔 최근 항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수춘의 소위 미소녀 연속 실종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갔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그럴싸한 외모를 지닌 소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거리에서 홀연히 사라진 사건으로, 실종자는 이미 열 명을 넘어 인심은 뒤숭숭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까지 듣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감한 주유의 얼굴이 백짓장이 되었다.
안 그래도 혈기왕성한데 든든한 부친까지 마침 돌아와 기고만장해진 손일문의 장남과 장녀가 위에 선 자의 책임 겸 의무로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악을 타파하자 설쳐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난향은 몰라도 손책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봐선 그저 합법적으로 피 볼 자리가 생기는 게 좋을 뿐임이 틀림없다.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손견의 눈 역시 몸풀기용으로 딱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얼굴은 한 개도 닮지 않았으면서, 이런 것만은 부자가 아주 한 판인 모양이었다.
이런 사건엔 미끼를 내건 함정 수사가 제일 잘 먹히는 줄은 고금동서를 통틀어 흔들림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정작 미끼를 자청한 난향의 제안은 눈에 핏발 선 아빠와 오빠에게 단숨에 거부당하고("안 돼! 시집 못 가게 되면 어쩌려고!!" ×2), 그럼 무슨 획기적인 수로 잡을 거냐며 아버지와 아들과 딸이 이마를 맞대고 으르렁컹컹아웅다웅하다 마침내 손책의 "아 참," 을 신호로 손씨 일족 3인조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머무른 그 끝에는.
주유가 있었다.
"엣!?"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일직선으로 돌진해 온 아버지에게 양 어깨를 덥썩 붙들리고 딸에게는 팔을 더럭 움켜잡혔다.
"오오, 난향일 대신해 주는 건가, 공근 군!"
대타로 나서겠다고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랬냐 이 아저씨야.
"공근은 미인이니까, 틀림없이 잘 어울릴 거야...."
이봐, 이봐, 풀어진 시선으로 얼굴을 붉히지 마 난향!
결정타는 주유의 근 애원하는 시선을 속 시원히도 씹고 어깨에 손을 턱 짚은 친우였다.
"잘 됐구나 공근, 너의 교활한 머리를 십분지 일이나마 세상을 위해 써 볼 절호의 기회가 드디어 왔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아아아아아아주 잘 알았어, 백부....."
주위에 반짝반짝 빛발을 흩뿌리는 상큼한 미소 앞에서 반항할 기력도 잃어버렸다.
의욕이 샘솟는다며 입을 가리고 오호호 웃는 오부인에게 근 납치당하다시피 규방으로 끌려갔다 대략 반 시진만에 하루 아침에 친족이 몽땅 죽고 세상이 다 끝장난 듯한 얼굴로 돌아온 주유는 분명 손색이 없는 미소녀의 모양새였다. 죽을 상이 다 된 것치곤 역시 명문가의 가락은 어쩔 수 없는지 동작도 폼새도 완벽하다.
붉어진 얼굴로 황홀한 감탄사를 토해내는 난향과 공근 예쁘다- 라며 천진하게 기뻐하는 손권을 위시한 어린 동생들과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꼬셨을 거라며 와하하하 웃어대다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은 오부인에게 귀를 잡힌 손견에게 둘러싸여 주유의 살고픈 의욕이 바야흐로 하한선을 치고 있을 제, 친우라고 있는 건 쓰린 마음을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확인 사살을 가하고 있었다.
턱에 손을 대고 주유가 식은땀이 솟을 때까지 위 아래로 꼼꼼히도 관찰하던 손책이 결국 한다는 소리가.
"공근, 너 사실은 집안 사정으로 남장하고 있다던가, 그런 즐거운, 아니아니 딱한 뒷사연은 없냐?"
"...목욕까지 실컷 같이 해놓고 새삼 헛소리하기냐 백부...."
"체에. 꿈도 희망도 낭만도 없구먼. 시시하게스리─."
"시시하긴 뭐가 시시해!? 그리고 이 일련의 대화, 왠지 낯익어!!"
"진정해. 차원이 틀려."
"무슨 소리야!?"
"자, 자, 됐으니까 인상 그만 써라. 구기고 있어선 잡을 범인도 못 잡는다. 범인확보! 사건해결! 서민구제! 덤으로 미소녀 구출, 이게 바로 일석사조♥"
"....사는 게 즐거워서 참- 좋겠구나."
"이봐이봐~공근, 왜 이리 의욕이 없어?"
"없긴 뭐가. 끓어오르잖아. 보다시피."
"아─정말!! 못 봐주겠다!!"
손책이 발을 쾅 굴렀다.
"넌 내 동생이 악한에게 납치되어서 이렇고 저렇고 그런 꼴을 당해도 좋다 이거야!!? 제대로 안 할래! 등 똑바로 펴! 얼굴도 펴! 미소녀라면 미소녀답게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라고!!"
난향을 미끼로 내세우는 게 너무 위험하다는 데는 물론 주유도 찬성이다. 저항조차 변변히 못할 소녀를 잇달아 유괴하는 파렴치한 범인을 잡아 포박을 가할 수 있다면 속도 시원할 테고, 기왕지사 맡은 일은 잘 해내고 싶은 욕구도 의무감도 있다.
그렇지만.
'그럼 나는 괜찮고!? 백부 너한테 난 뭐 편리한 도구인 거냐!!?'
주유의 내부에서 인간으로서 아주 중요한 이성이랄까 수치심이랄까 하여간 뭔가가 뚝 끊어졌다.
"백부."
"응?"
"너도 입어."
"...............예?"
"여.장.해."
"...저기, 여보세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진리를 잊은 거냐. 특히 미끼는 많을수록 좋고. 한 명보다는 두 명이지. 얼른 입어!"
"...근래 들어본 농담 중에서 제일로 죽인다, 공근. 미소녀라니까, 미-소-녀. 여자옷만 입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가져. 백부는 정사에서 인정받은 미자안(美姿顔)이잖아. 잠자코만 있으면 웬만큼 속아넘어갈 거라니까?"
"와아, 신기해라. 공근이 호색 늙은이로 보여요~랄까, 손을 움찔거리면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접근하지 마! 진짜 무서워!"
주유를 피해 슬금슬금 물러나는 손책의 양어깨를 뒤에서 덥석 찍어누르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손견이다.
질겁해서 올려다보는 큰아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강동의 호랑이는 턱에 손을 대고 - 이 포즈도 아들 판박이다 - 사려 깊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군. 더구나 명색이 우리 집에 든 귀한 손님을 사지에 홀로 보낼 수야 없지. 손님을 보호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 그런 이유로 백부, 너도 가거라. 부인, 잘 부탁하오."
"호호호호, 의욕이 솟구치네요♡"
"왓, 잠깐, 못 내려놔 아버지!? 손님 보호는 무슨 얼어죽을, 지금 씨익 쪼갠 거 못 봤을 줄 알고!! 재밌겠다고 생각했지 방금!!!"
"이 애비의 선한 진심을 이해 못하다니 그 참 매정한 아들놈일세. 아빤 슬프구나. 훌쩍훌쩍."
"은근슬쩍 어딜 더듬냐!!! 내─려─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됐다.
서른 여섯 번 하고도 또 한 번 말하지만 손책은 형제자매 8명 중 절강제일미로 명성을 떨친 모친을 가장 빼닮은 섬세한 조형의 얼굴이다. 입 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면.
한 눈에 뜨이는 은발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씌워놓은 검은 머리타래를 고정시킨 나비 모양의 귀여운 머리 장식을 비롯해 오부인이 심혈을 기울여 꾸며놓은 온갖 장신구와 치렁치렁한 옷은 내용물을 잠시 잊으면 주유와는 다른 방향으로 제법 볼만했다.
하긴 그것도 불퉁한 얼굴로 턱 짚고 반가사유상 포즈로 다리를 훤히 내놓고 앉아 있어서야 한 개도 소용없지만.
"안심하세요 오라버니, 입만 다물면 절세의 미소녀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곤 할 수 없으니까!!"
"....맞고 싶냐 난향?"
"형님, 잘 어울려요─."
"........응, 그래. 고맙다 권."
"오오, 꽤나 미인이구먼. 역시 아빠와 엄마의 아들이라니까. 왓핫핫핫핫."
"입닥쳐 영감탱이!!"
허공으로 날아갔던 이성이 이 무렵에야 겨우 제자리를 찾아온 주유는 식은땀이 등골을 쪼옥 타고 내려가는 걸 느꼈다.
그리하여 손견 이하 든든한 호위병들이 숨어서 감시의 눈을 빛내는 가운데 범행다발장소를 찾아 한밤중의 거리로 진출한 두 소녀(?)였으나.
"....백부, 저 말야."
"왜 불러."
"범인이 나타나면 우선 얌전히 잡혀가야 된다? 제발 일격에 때려눕히지 말고."
"알았다니까."
"화날 일이 있더라도 좀 참고..."
"알.았.다.니.까~!"
"부탁인데 말투 주의하고 좀 조신하게,"
"아, 거! 진드기 같은 남자는 인기없다, 공근? 벌써 열두 번째야! 원 사람을 못 믿어도 유분수지!"
실은 벌써부터 불안해 죽겠으며 괜히 데려왔다고 후회막급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못하는 주유였다.
그랬는데.
"자아, 어르신도 한 잔 받으시오소서."
섬섬옥수...에 들린 옥병에서 맑은 술이 옥잔으로 쪼르르르 부어졌다.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살집 두툼한 손이 물러가려는 손목을 부여잡고 음탕하게 부비적거린다.
"오오, 이 백옥같은 살결. 과연 동녀(童女)를 능가할 자는 없음이라. 어떠한가, 내 측실이 되어 더불어 밤낮으로 뼈와 살을 불태워 보지 않겠는고?"
"호호호호, 아이 어르신, 소녀를 놀리시면 싫사옵니다."
우아하게 날선 새끼손가락을 입술에 살포시 대고 까르르 웃는 소녀....를 주유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너 누구냐.
골목 셋을 돌았을 때 목적했던 대로 무사히 납치당하는 데는 성공했다.
들려오는 도중에 지하통로로 빠져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해 손견과 기타 등등이 제대로 뒤를 밟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손책이 같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마도 산기슭에 있는 어딘가의 저택으로 끌려가 지하 감옥 비스무리한 장소에 갇혔다.
다행히도 실종되었던 소녀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지만.
갇힌지 얼마 안 되어 손책과 함께 술자리로 호출당했다.
최상등품이 한꺼번에 둘이나 걸렸다며 우하우하 즐겁기도 하신 징그러운 눈길의 흑막들이 엉뚱하게도 수춘의 현령인 강겸(姜兼)과 알 만한 유력자 몇몇인 데는 질려서 더 할 말도 없었다.
이상, 현재까지의 경위.
그러나 이젠 경위고 뭐고 아무래도 좋아질 것 같은 주유였다.
친우가 언제 인내심이 끊겨 날뛸지 모른다고 그리 우려했건만 되려 발동이 걸려버린 쪽은 손책이었기 때문이다.
"자아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꾸나."
"아이 부끄럽사옵니다♡"
"내 이미 동녀를 백은 섭렵해 보았으나 너와 같은 아이는 처음이로다. 오늘밤은 저 영감 대신 내 수청을 들지 않겠느뇨?"
"어머나, 어르신께서 소녀를 그리 사랑해주시다니 영광이어요."
나긋나긋부들부들하게 애교 만땅으로 착착 감겨들며 비위를 맞추는 모양을 보는 주유의 전신에 닭살이 푸드드득 돋았다. 저거 정말 백부? 혹시 중간에 비슷한 얼굴의 딴 사람이랑 바뀌지 않았을까?
주유가 그딴 생각이나 하는 사이 호색 중년 No.2의 손은 대담하게도 친우의 허리를 비롯해 현대라면 당장에 성추행으로 고소당할 온갖 군데를 거침없이 부비부비하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좋지 않은가, 좋지 않은가~"
"꺄아앙~부디 용서를♡"
갈수록 가관이다.
주유는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일곱 개의 천을 감은 무희가 불려나와 그렇고 그렇게 낯뜨거운 춤을 피로하여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간 틈을 타 주유는 총알같이 달려가 오오~하며 물색없이 감탄하고 있는 손책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백~~부~~~!!"
"공근, 목청 좀 낮춰라. 들리겠다."
찔끔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숨결이 거친 아저씨들이 춤에 정신을 홀랑 뺏겼음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넌! 그야 지금 당장은 기회를 엿보는 게 중요하지만, 가장에도 정도가 있지! 세상에 그런... 그런....!"
"임마 진정해라. 숨 쉬어 숨. 괜찮아 괜찮아, 여자도 아닌데 뭐 어때. 좀 만지작거린다고 안 닳아."
"문제의 초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봤잖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따라주는 대로 홀짝홀짝 다 마신다고.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남자란 참 슬픈 생물일세 그려. 나도 남자지만. 캬하하핫."
"백부, 사람 말을 좀 진지하게....!!"
주유의 격한 항의는 손책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제서야 이쪽을 돌아본 친우의 눈은 평소와는 명백하게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다 이용해 먹으라고 한 건, 손자 영감님 아니었냐."
"백부,"
"나중에 톡톡히 갚아주면 그만이다.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말이지."
주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아까 내 손목 잡은 저 영감탱이는 손모가지부터 반대로 꺾어놓고."
"......에?"
손책이 너무나도 상쾌발랄천진하게 툭 내뱉는 통에 주유는 하마터면 말의 의미를 놓칠 뻔했다.
"치맛자락 밑으로 기어들어오려 한 저놈은 (삐────────)고, 너한테 술냄새 풍기는 주둥이를 부비려 한 저기 돼지는 (삐─────)에 (삐───────)하고 (삐───────)만으로는 좀 가벼울라나, 흐음. 내 허리를 주물럭거린 저 물체는 (삐────)고 (삐──────)해서 (삐───────────)(삐────────)(삐────)는 기본이고, 저기 저 존재 자체가 기분 나쁜 노친네는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아 맞다, 물론 저 구석에 앉은 음탕 중년은..."
이하 생략.
고문백과사전 하나는 족히 채울 꿈자리 사나운 징벌을 방송금지용어를 산더미처럼 삽입해 가며 리얼하게 묘사한 후 상상력 풍부한 죄로 주유가 밀랍처럼 창백해지거나 말거나 손책은 어깨를 들먹이며 키득거렸다.
"은혜는 두 배 원수는 열 배, 우리 손일문의 가훈을 알까 모르겠네... 후... 후후후... 후후후후후후후후후....."
부디 더더욱 춤에 정신 팔려 손마디를 우두두둑 꺾으며 밤에 보면 실신할 것 같은 흉악한 낯으로 킬킬킬킬(Kill Kill Kill Kill) 웃어제끼는 친우를 아무도 못 보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초목도 잠든 삼경을 지나 미소녀 둘 - 주로 손책 - 의 맞장구가 워낙에 유연해 일배일배부일배라고 호위병까지 모조리 억병으로 취했을 무렵.
이 국면에서 꼭지가 돈 음탕 중년들이 젊은 처자들에게 목청을 높여 요구하는 건 십에 팔구는 가무라고 논어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 말 없습니다)
"부끄럽사오나 소녀 어리석고 재주가 없어 아악에는 능하지 못하옵니다. 다만,"
손책은 거기서 말을 끊고 주유에게 흘끗 눈길을 주었다.
입끝이 분명히 웃고 있었다.
"저 아이의 반주로 검무라면 다소간 자신이 있사온데 어떠하신지?"
그 다음은, 뭐, 모두가 짐작한 대로 되었다.
다음날 아침, 어깨에 대도를 걸머지고 조신함의 ㅈ도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산길을 내려가는 피에 홀딱 젖은 미소녀와 군데군데 피에 젖은 옷자락으로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뒤를 죽자사자 쫓아가는 흑발의 소녀(십에 팔구 역시 미소녀)가 범인 소탕 작전에 동원된 손견 휘하의 병사들과 가까스로 구출된 피해자들에게 목격되었다는 후일담.
냐하하핫 웃으면서 동행인의 매도폭언(들리지는 않았지만)을 대충 받아넘기는 앞선 소녀의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모 손일문의 도련님처럼 은색으로 반짝거렸다는 건, 아마도 눈의 착각이려니.
그 후로 모친 장(蒋)부인의 탐탁찮아 하는 얼굴을 굳이 못 본 척해 가며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수춘의 손일문 저택을 들락날락하던 주유의 다섯 번째 방문을 장식한 것은 한수(韓遂) 토벌전에서 장사태수(長沙太守)의 인을 기념품으로 귀환한 손견 자신이었다. 주유에게 꼭 붙어 있던 난향(蘭香)과 손권을 덥석 끌어안으며 호쾌하게도 등장한 강동의 호랑이는 돌발 상황에 굳어버린 주유를 뒤늦게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오호라, 자네가 주공근이로군! 책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그놈, 요즘 자나 깨나 줄창 자네 얘기뿐일세. 거 참 질투나는구먼. 그런데 난 또 웬 기억에 없는 미소녀가 집에 있나 했지! 와하하하하하!!! 그, 그러신가요;;;
처음으로 대면한 손문대는 빛의 강약에 따라 금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옅은 갈색 머리와 멋진 수염의 댄디한 30대였다. 장남이 은발, 차남이 적발이고 보면 이젠 무슨 색이 나와도 놀랍지 않다. 헤실헤실한 듯 하면서 기실 빈틈없고 날카로운 눈매가 어딘지 친우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암만 어른스럽고 침착해도 아직 열세 살인 주유는 강동 최고의 용장(勇將)을 직접 만난 것에 내심 흥분하여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 손견의 짧은 감탄사에 고개를 돌려본 주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달려오는 낯익은 은발을 보았다. 공근, 어서 와라! 친우에게 인사하고 오랜만에 마주한 부자, 감동의 상봉.
"아버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소자 눈물겹습니다!"
"오오 책! 못 본 사이에 더욱 멋진 남자가 됐구나!"
"─라고 할 줄 알았냐 빌어먹을 늙다리!! 오늘이야말로 그 잘나빠진 수염 모조리 뽑아줄 테다 이리 와!! 못 와!?"
"아직도 포기 못한 거냐 지랄맞은 애새끼!! 다리몽댕이를 확 분질러 버릴까!!"
"할 수 있으면 어디 해 보시지! 동탁한테 뒤나 먹혀버려 이 영감탱이!!"
"뭣이 어쩌고 어째─────!!!!"
어딘가의 손씨 부자가 항례의 욕설과 주먹질의 부자애를 공고히 다지는 와중에 그간 잘 쌓아온 '강동의 호랑이'에 대한 사춘기 소년의 환상과 덤으로 낭하가 일거에 박살나는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만면에 상냥한 웃음을 띠운 오부인이 어디선가 출현한 솥뚜껑을 부군과 아들의 머리에 집어던짐으로써 일은 무사히 수습되었다.
본디부터 하극상불사 사투용납의 살벌한 전장인 손일문의 식사 시간이 손견의 참전으로 한층 피와 살이 튀는 처참한 현장이 될 각오를 미리부터 굳힌 주유였지만, 언제라도 내리찍을 수 있도록 잡은 국자를 살살 흔들며 변함없이 상냥히도 웃는 오부인의 위협이 어지간히 겁났던지 아버지도 아들도 비교적 조용했다. 대신 황건적의 난, 한수 토벌의 경위, 장사태수 임명, 쌓이고 쌓인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 결국엔 최근 항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수춘의 소위 미소녀 연속 실종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넘어갔다.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그럴싸한 외모를 지닌 소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거리에서 홀연히 사라진 사건으로, 실종자는 이미 열 명을 넘어 인심은 뒤숭숭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까지 듣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감한 주유의 얼굴이 백짓장이 되었다.
안 그래도 혈기왕성한데 든든한 부친까지 마침 돌아와 기고만장해진 손일문의 장남과 장녀가 위에 선 자의 책임 겸 의무로서 민생고를 해결하고 악을 타파하자 설쳐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난향은 몰라도 손책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봐선 그저 합법적으로 피 볼 자리가 생기는 게 좋을 뿐임이 틀림없다.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손견의 눈 역시 몸풀기용으로 딱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얼굴은 한 개도 닮지 않았으면서, 이런 것만은 부자가 아주 한 판인 모양이었다.
이런 사건엔 미끼를 내건 함정 수사가 제일 잘 먹히는 줄은 고금동서를 통틀어 흔들림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정작 미끼를 자청한 난향의 제안은 눈에 핏발 선 아빠와 오빠에게 단숨에 거부당하고("안 돼! 시집 못 가게 되면 어쩌려고!!" ×2), 그럼 무슨 획기적인 수로 잡을 거냐며 아버지와 아들과 딸이 이마를 맞대고 으르렁컹컹아웅다웅하다 마침내 손책의 "아 참," 을 신호로 손씨 일족 3인조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머무른 그 끝에는.
주유가 있었다.
"엣!?"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일직선으로 돌진해 온 아버지에게 양 어깨를 덥썩 붙들리고 딸에게는 팔을 더럭 움켜잡혔다.
"오오, 난향일 대신해 주는 건가, 공근 군!"
대타로 나서겠다고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랬냐 이 아저씨야.
"공근은 미인이니까, 틀림없이 잘 어울릴 거야...."
이봐, 이봐, 풀어진 시선으로 얼굴을 붉히지 마 난향!
결정타는 주유의 근 애원하는 시선을 속 시원히도 씹고 어깨에 손을 턱 짚은 친우였다.
"잘 됐구나 공근, 너의 교활한 머리를 십분지 일이나마 세상을 위해 써 볼 절호의 기회가 드디어 왔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아아아아아아주 잘 알았어, 백부....."
주위에 반짝반짝 빛발을 흩뿌리는 상큼한 미소 앞에서 반항할 기력도 잃어버렸다.
의욕이 샘솟는다며 입을 가리고 오호호 웃는 오부인에게 근 납치당하다시피 규방으로 끌려갔다 대략 반 시진만에 하루 아침에 친족이 몽땅 죽고 세상이 다 끝장난 듯한 얼굴로 돌아온 주유는 분명 손색이 없는 미소녀의 모양새였다. 죽을 상이 다 된 것치곤 역시 명문가의 가락은 어쩔 수 없는지 동작도 폼새도 완벽하다.
붉어진 얼굴로 황홀한 감탄사를 토해내는 난향과 공근 예쁘다- 라며 천진하게 기뻐하는 손권을 위시한 어린 동생들과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꼬셨을 거라며 와하하하 웃어대다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은 오부인에게 귀를 잡힌 손견에게 둘러싸여 주유의 살고픈 의욕이 바야흐로 하한선을 치고 있을 제, 친우라고 있는 건 쓰린 마음을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확인 사살을 가하고 있었다.
턱에 손을 대고 주유가 식은땀이 솟을 때까지 위 아래로 꼼꼼히도 관찰하던 손책이 결국 한다는 소리가.
"공근, 너 사실은 집안 사정으로 남장하고 있다던가, 그런 즐거운, 아니아니 딱한 뒷사연은 없냐?"
"...목욕까지 실컷 같이 해놓고 새삼 헛소리하기냐 백부...."
"체에. 꿈도 희망도 낭만도 없구먼. 시시하게스리─."
"시시하긴 뭐가 시시해!? 그리고 이 일련의 대화, 왠지 낯익어!!"
"진정해. 차원이 틀려."
"무슨 소리야!?"
"자, 자, 됐으니까 인상 그만 써라. 구기고 있어선 잡을 범인도 못 잡는다. 범인확보! 사건해결! 서민구제! 덤으로 미소녀 구출, 이게 바로 일석사조♥"
"....사는 게 즐거워서 참- 좋겠구나."
"이봐이봐~공근, 왜 이리 의욕이 없어?"
"없긴 뭐가. 끓어오르잖아. 보다시피."
"아─정말!! 못 봐주겠다!!"
손책이 발을 쾅 굴렀다.
"넌 내 동생이 악한에게 납치되어서 이렇고 저렇고 그런 꼴을 당해도 좋다 이거야!!? 제대로 안 할래! 등 똑바로 펴! 얼굴도 펴! 미소녀라면 미소녀답게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라고!!"
난향을 미끼로 내세우는 게 너무 위험하다는 데는 물론 주유도 찬성이다. 저항조차 변변히 못할 소녀를 잇달아 유괴하는 파렴치한 범인을 잡아 포박을 가할 수 있다면 속도 시원할 테고, 기왕지사 맡은 일은 잘 해내고 싶은 욕구도 의무감도 있다.
그렇지만.
'그럼 나는 괜찮고!? 백부 너한테 난 뭐 편리한 도구인 거냐!!?'
주유의 내부에서 인간으로서 아주 중요한 이성이랄까 수치심이랄까 하여간 뭔가가 뚝 끊어졌다.
"백부."
"응?"
"너도 입어."
"...............예?"
"여.장.해."
"...저기, 여보세요?"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진리를 잊은 거냐. 특히 미끼는 많을수록 좋고. 한 명보다는 두 명이지. 얼른 입어!"
"...근래 들어본 농담 중에서 제일로 죽인다, 공근. 미소녀라니까, 미-소-녀. 여자옷만 입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자신을 가져. 백부는 정사에서 인정받은 미자안(美姿顔)이잖아. 잠자코만 있으면 웬만큼 속아넘어갈 거라니까?"
"와아, 신기해라. 공근이 호색 늙은이로 보여요~랄까, 손을 움찔거리면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접근하지 마! 진짜 무서워!"
주유를 피해 슬금슬금 물러나는 손책의 양어깨를 뒤에서 덥석 찍어누르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손견이다.
질겁해서 올려다보는 큰아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강동의 호랑이는 턱에 손을 대고 - 이 포즈도 아들 판박이다 - 사려 깊은 얼굴로 머리를 끄덕거렸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군. 더구나 명색이 우리 집에 든 귀한 손님을 사지에 홀로 보낼 수야 없지. 손님을 보호하는 것은 주인의 의무! 그런 이유로 백부, 너도 가거라. 부인, 잘 부탁하오."
"호호호호, 의욕이 솟구치네요♡"
"왓, 잠깐, 못 내려놔 아버지!? 손님 보호는 무슨 얼어죽을, 지금 씨익 쪼갠 거 못 봤을 줄 알고!! 재밌겠다고 생각했지 방금!!!"
"이 애비의 선한 진심을 이해 못하다니 그 참 매정한 아들놈일세. 아빤 슬프구나. 훌쩍훌쩍."
"은근슬쩍 어딜 더듬냐!!! 내─려─놔───!!!"
그래서, 결국 그렇게 됐다.
서른 여섯 번 하고도 또 한 번 말하지만 손책은 형제자매 8명 중 절강제일미로 명성을 떨친 모친을 가장 빼닮은 섬세한 조형의 얼굴이다. 입 다물고 가만히만 있으면.
한 눈에 뜨이는 은발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씌워놓은 검은 머리타래를 고정시킨 나비 모양의 귀여운 머리 장식을 비롯해 오부인이 심혈을 기울여 꾸며놓은 온갖 장신구와 치렁치렁한 옷은 내용물을 잠시 잊으면 주유와는 다른 방향으로 제법 볼만했다.
하긴 그것도 불퉁한 얼굴로 턱 짚고 반가사유상 포즈로 다리를 훤히 내놓고 앉아 있어서야 한 개도 소용없지만.
"안심하세요 오라버니, 입만 다물면 절세의 미소녀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곤 할 수 없으니까!!"
"....맞고 싶냐 난향?"
"형님, 잘 어울려요─."
"........응, 그래. 고맙다 권."
"오오, 꽤나 미인이구먼. 역시 아빠와 엄마의 아들이라니까. 왓핫핫핫핫."
"입닥쳐 영감탱이!!"
허공으로 날아갔던 이성이 이 무렵에야 겨우 제자리를 찾아온 주유는 식은땀이 등골을 쪼옥 타고 내려가는 걸 느꼈다.
그리하여 손견 이하 든든한 호위병들이 숨어서 감시의 눈을 빛내는 가운데 범행다발장소를 찾아 한밤중의 거리로 진출한 두 소녀(?)였으나.
"....백부, 저 말야."
"왜 불러."
"범인이 나타나면 우선 얌전히 잡혀가야 된다? 제발 일격에 때려눕히지 말고."
"알았다니까."
"화날 일이 있더라도 좀 참고..."
"알.았.다.니.까~!"
"부탁인데 말투 주의하고 좀 조신하게,"
"아, 거! 진드기 같은 남자는 인기없다, 공근? 벌써 열두 번째야! 원 사람을 못 믿어도 유분수지!"
실은 벌써부터 불안해 죽겠으며 괜히 데려왔다고 후회막급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못하는 주유였다.
그랬는데.
"자아, 어르신도 한 잔 받으시오소서."
섬섬옥수...에 들린 옥병에서 맑은 술이 옥잔으로 쪼르르르 부어졌다.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살집 두툼한 손이 물러가려는 손목을 부여잡고 음탕하게 부비적거린다.
"오오, 이 백옥같은 살결. 과연 동녀(童女)를 능가할 자는 없음이라. 어떠한가, 내 측실이 되어 더불어 밤낮으로 뼈와 살을 불태워 보지 않겠는고?"
"호호호호, 아이 어르신, 소녀를 놀리시면 싫사옵니다."
우아하게 날선 새끼손가락을 입술에 살포시 대고 까르르 웃는 소녀....를 주유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너 누구냐.
골목 셋을 돌았을 때 목적했던 대로 무사히 납치당하는 데는 성공했다.
들려오는 도중에 지하통로로 빠져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해 손견과 기타 등등이 제대로 뒤를 밟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일단 손책이 같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마도 산기슭에 있는 어딘가의 저택으로 끌려가 지하 감옥 비스무리한 장소에 갇혔다.
다행히도 실종되었던 소녀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지만.
갇힌지 얼마 안 되어 손책과 함께 술자리로 호출당했다.
최상등품이 한꺼번에 둘이나 걸렸다며 우하우하 즐겁기도 하신 징그러운 눈길의 흑막들이 엉뚱하게도 수춘의 현령인 강겸(姜兼)과 알 만한 유력자 몇몇인 데는 질려서 더 할 말도 없었다.
이상, 현재까지의 경위.
그러나 이젠 경위고 뭐고 아무래도 좋아질 것 같은 주유였다.
친우가 언제 인내심이 끊겨 날뛸지 모른다고 그리 우려했건만 되려 발동이 걸려버린 쪽은 손책이었기 때문이다.
"자아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꾸나."
"아이 부끄럽사옵니다♡"
"내 이미 동녀를 백은 섭렵해 보았으나 너와 같은 아이는 처음이로다. 오늘밤은 저 영감 대신 내 수청을 들지 않겠느뇨?"
"어머나, 어르신께서 소녀를 그리 사랑해주시다니 영광이어요."
나긋나긋부들부들하게 애교 만땅으로 착착 감겨들며 비위를 맞추는 모양을 보는 주유의 전신에 닭살이 푸드드득 돋았다. 저거 정말 백부? 혹시 중간에 비슷한 얼굴의 딴 사람이랑 바뀌지 않았을까?
주유가 그딴 생각이나 하는 사이 호색 중년 No.2의 손은 대담하게도 친우의 허리를 비롯해 현대라면 당장에 성추행으로 고소당할 온갖 군데를 거침없이 부비부비하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좋지 않은가, 좋지 않은가~"
"꺄아앙~부디 용서를♡"
갈수록 가관이다.
주유는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일곱 개의 천을 감은 무희가 불려나와 그렇고 그렇게 낯뜨거운 춤을 피로하여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간 틈을 타 주유는 총알같이 달려가 오오~하며 물색없이 감탄하고 있는 손책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백~~부~~~!!"
"공근, 목청 좀 낮춰라. 들리겠다."
찔끔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숨결이 거친 아저씨들이 춤에 정신을 홀랑 뺏겼음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이번에는 작은 목소리로 따지고 들었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넌! 그야 지금 당장은 기회를 엿보는 게 중요하지만, 가장에도 정도가 있지! 세상에 그런... 그런....!"
"임마 진정해라. 숨 쉬어 숨. 괜찮아 괜찮아, 여자도 아닌데 뭐 어때. 좀 만지작거린다고 안 닳아."
"문제의 초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봤잖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따라주는 대로 홀짝홀짝 다 마신다고.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남자란 참 슬픈 생물일세 그려. 나도 남자지만. 캬하하핫."
"백부, 사람 말을 좀 진지하게....!!"
주유의 격한 항의는 손책의 손에 가로막혔다. 그제서야 이쪽을 돌아본 친우의 눈은 평소와는 명백하게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다 이용해 먹으라고 한 건, 손자 영감님 아니었냐."
"백부,"
"나중에 톡톡히 갚아주면 그만이다.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말이지."
주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아까 내 손목 잡은 저 영감탱이는 손모가지부터 반대로 꺾어놓고."
"......에?"
손책이 너무나도 상쾌발랄천진하게 툭 내뱉는 통에 주유는 하마터면 말의 의미를 놓칠 뻔했다.
"치맛자락 밑으로 기어들어오려 한 저놈은 (삐────────)고, 너한테 술냄새 풍기는 주둥이를 부비려 한 저기 돼지는 (삐─────)에 (삐───────)하고 (삐───────)만으로는 좀 가벼울라나, 흐음. 내 허리를 주물럭거린 저 물체는 (삐────)고 (삐──────)해서 (삐───────────)(삐────────)(삐────)는 기본이고, 저기 저 존재 자체가 기분 나쁜 노친네는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아 맞다, 물론 저 구석에 앉은 음탕 중년은..."
이하 생략.
고문백과사전 하나는 족히 채울 꿈자리 사나운 징벌을 방송금지용어를 산더미처럼 삽입해 가며 리얼하게 묘사한 후 상상력 풍부한 죄로 주유가 밀랍처럼 창백해지거나 말거나 손책은 어깨를 들먹이며 키득거렸다.
"은혜는 두 배 원수는 열 배, 우리 손일문의 가훈을 알까 모르겠네... 후... 후후후... 후후후후후후후후후....."
부디 더더욱 춤에 정신 팔려 손마디를 우두두둑 꺾으며 밤에 보면 실신할 것 같은 흉악한 낯으로 킬킬킬킬(Kill Kill Kill Kill) 웃어제끼는 친우를 아무도 못 보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초목도 잠든 삼경을 지나 미소녀 둘 - 주로 손책 - 의 맞장구가 워낙에 유연해 일배일배부일배라고 호위병까지 모조리 억병으로 취했을 무렵.
이 국면에서 꼭지가 돈 음탕 중년들이 젊은 처자들에게 목청을 높여 요구하는 건 십에 팔구는 가무라고 논어에서도 말하고 있다. (※그런 말 없습니다)
"부끄럽사오나 소녀 어리석고 재주가 없어 아악에는 능하지 못하옵니다. 다만,"
손책은 거기서 말을 끊고 주유에게 흘끗 눈길을 주었다.
입끝이 분명히 웃고 있었다.
"저 아이의 반주로 검무라면 다소간 자신이 있사온데 어떠하신지?"
그 다음은, 뭐, 모두가 짐작한 대로 되었다.
다음날 아침, 어깨에 대도를 걸머지고 조신함의 ㅈ도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산길을 내려가는 피에 홀딱 젖은 미소녀와 군데군데 피에 젖은 옷자락으로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뒤를 죽자사자 쫓아가는 흑발의 소녀(십에 팔구 역시 미소녀)가 범인 소탕 작전에 동원된 손견 휘하의 병사들과 가까스로 구출된 피해자들에게 목격되었다는 후일담.
냐하하핫 웃으면서 동행인의 매도폭언(들리지는 않았지만)을 대충 받아넘기는 앞선 소녀의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아 모 손일문의 도련님처럼 은색으로 반짝거렸다는 건, 아마도 눈의 착각이려니.
여러 가지로 겁나게 난감했던
손책은 목적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류였다고 생각함. 죽는 시늉은 고사하고 필요하면 제 장례식도 치르고 여장에다 몸 내주기도 불사할 인간. 주위에서 속이 타건 끓건 뒤집히건 목적만 달성하면 내 알 바 아님. 그런 걸 좀 발랄하게 써보고 싶었다. 플러스 무언가 일반인과는 크게 어긋난 손일문에 끼여서 짤짤이 고생하는 주유와 罵り愛의 손견 손책 부자도 (爆)
다음 예정은 유책(유+책?)의 시리어스물.
(실은 강동의 새벽 네타로 한 개 더 써 버릴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비밀임. 것도 여자 버전으로;;)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하자면 "너 사실은 남장 소녀지?" "아냐──!!" 는 S의 삼국지 SS 제 2탄 '응?' 에서 한 번 써먹었던 네타임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