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딴 짓 하느라 꾸물거리다 앞길에 우선 주유전과 태사자전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고 식겁하여 재빨리 손책전 번역으로 돌아온 S입니다 안녕하십니까. (....)
다음 타자가 속 보인다고 하시면 슬픕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단으로 가져가셔도 슬픕니다.
제 17장. 새로운 체제(新体制)
저것들이 모두 소패왕의 남자란 이야기. (....)
전(前) 여강태수 육강은 육의(陸議), 즉 훗날의 소패왕 사위(....) 육손(陸遜)의 숙부이기도 하다. 육강을 노강에서 몰아낸 장본인이 바로 손책임을 감안하면 - 원술의 명이었다고는 하지만 - 그 아들 육적이 손책군의 문관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함. 뭐 모든 것은 카리스마 빔의 인도인즉슨. 손책 정권 = 손일문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정권이었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손책 백부라는 개인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지되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강동 평정과 원술 휘하에서의 독립을 일거에 달성한 손책은, 강동에 새로운 체제를 확립하는 데 착수합니다. 우선은 인재 발굴부터. 무관으로는 동습(董襲)・하제(賀斉)・전유(全柔)・여몽(呂蒙)을, 문관으로는 우번(虞翻)・호종(胡綜)・진송(秦松)・진단(陳端)・육적(陸績) 등을 등용하지요.
동습은 회계군(会稽郡) 출신으로, 약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한이었습니다. 손책이 회계로 왔을 때 휘하로 들어왔지요. 지성과 무용을 겸비한 인물로, 손책군에 들어오고 얼마되지 않아 회계의 도적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 별동대 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제 역시 회계군 출신으로 현령 노릇을 하고 있었죠. 손책에게 천거되어, 동치(東治)로 도주한 왕랑(王朗)의 토벌전에서 크게 활약합니다.
전유는 한왕실에서 회계군의 동도위(東都尉)로 임명한 정식 관리입니다. 손책이 오군(呉郡)을 찾았을 때 맨 먼저 군을 이끌고 복속하였습니다.
여몽은 본디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손책군의 부장(部将)이었던 매부 등당(鄧当)에게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못살게 군 관리를 죽이고 체포되었지만, 여몽을 변호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어 손책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여몽을 눈여겨 본 손책을 그를 시종으로 채용했고, 이후 등당군의 뒤를 잇게 됩니다. 손책이 여몽을 시종으로 썼을 당시, 여몽은 15~6세였습니다.
이들 중 오로지 전유만이 정식으로 등용된 한의 관리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무관(無官)이었습니다. 여몽에 이르러선 아예 죄인이었죠. 손책이 가문에 상관치 않고 능력만을 보고 인재를 뽑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손책의 인재활용법은 청탁(清濁)을 가림없이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리라 하였던 조조의 그것이 극히 유사합니다. 그리고 손책 휘하의 무관의 경우, 시종에서 별동대 대장으로 승진하는 케이스가 많았음도 알게 됩니다. 주태(周泰)・장흠(将欽)・진무(陳武)・동습(董襲)・여몽은 모두 같은 길을 밟아 손책군에서 손꼽히는 무장으로 성장했지요. 이들은 모두 가문이 보잘 것 없어 시작부터 무장으로 삼을 수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먼저 시종으로 채용하고, 거기서 손책의 눈에 들면 별동대 대장이 되어 소수나마 병사를 지휘할 권한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별동대 대장의 신분으로 공적을 차근차근 세워, 마침내는 손책군의 주력(主力)으로 성장했던 것이지요.
(주) 주태・장흠・진무・동습・여몽 등은 모두 잔다리밟기로 성장하여 오를 짊어진 무관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무장이 유독 많다는 것이야말로 손오의 무관 구성 상의 최대 특징입니다. 이러한 밑바닥 출신 무장은 특히 손책 정권기에 다수 등용되어, 손책의 혜안을 쉬이 짐작케 하지요.
그러나 또다른 시점에서 뒤집어 보자면, 밑바닥 출신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손책이 기본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기본적으로 직접 무장을 육성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문관도 마찬가지로, 중원에서 강동으로 흘러온 사인(士人)이 대다수로, 지방 호족의 등용은 열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입니다. 이 점이야아말로 손책 정권과 손권 정권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만약 손책이 요절하지 않고 장기간 집권했다면, 훗날 호족과의 합의제(合議制)로 일컬어졌던 손오 정권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손책 정권은 손일문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권이 확립된 정권이었습니다.
우번은 왕랑(王朗)의 막하에서 공조(功曹 : 인사담당 문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손책군이 침공한 당초부터, 우번은 손책군과는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왕랑이 동치(東治)로 도주하자, 우번은 내친 김에 교주(交州)까지 달아나려는 왕랑을 설득하여 손책에게 출두시킵니다. 그 후로도 예장태수 화흠(華歆)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파견되는 등, 내정과 외교에서 폭넓게 활약했습니다.
호종은 서남(徐南 : 예주) 출신. 모친과 더불어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손책이 회계태수가 되었을 때 등용되어 손권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학문을 닦았다고 합니다. 당시 호종은 14세였습니다.
진송은 전기가 남아 있지 않아 출생과 경력은 일절 불명입니다만, 왜 기록이 없는지 신기할 정도로 손책군 내에서는 상당한 거물이었습니다. 진송의 이름은 항상 『장소(張昭)・장굉(張紘)・진송 등은...』이라는 식으로 장굉 및 장소와 동격으로 기술되어 있고, 이후 적벽에 관한 기록에서도 장소 및 장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관의 넘버 3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천수를 다 누리지 못했다 되어 있어, 아마도 적벽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진송 역시, 전란을 피하여 강동을 찾은 사인 중 하나겠지요.
진단도 어지간히 일찍 죽은 듯 기술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손책전에 『장소・장굉・진송・진단 등이 손책의 참모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초기의 손책군을 그늘에서 지탱한 문관으로 짐작됩니다.
육적은 옛 여강태수(廬江太守) 육강(陸康)의 아들입니다. 원술은 육적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만나보고 비범한 소년임을 알아보았다고 하지요. 이 무렵 육적은 아직 스물이 채 되지 못했지만, 이미 군 회의에서는 말석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보다시피 문관의 대부분은 평화를 구해 강동으로 흘러들어온 인재였습니다. 이 무렵 어지러운 중원을 떠나 강동을 찾은 민중과 사인이 줄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책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사인들 중에는 이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인물도 많아, 실은 손책을 받드는 대신 후에 중원으로 돌아가 위에 복속한 사람도 몇 명인가 있긴 합니다. 한편 호종과 여몽의 예를 보아도, 손책은 귀천(貴賎)은 물론 연령도 하등 신경 쓰지 않고 재능만 있으면 뽑아 썼다는 걸 알게 됩니다. 손책 자신이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인재등용에 관해 손책은 조조마저도 능가한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 여러분은 어떠신지?
강동 각 군의 태수(太守)와 도위(都尉)도 이때 임명되었습니다.
단양태수(丹陽太守) 오경(呉景) 도위 전유(全柔)
오군태수(呉郡太守) 주치(朱治) 도위 정보(程普)
회계태수(会稽太守) 손책(孫策) 남부도위(南部都尉) 하제(賀斉)
동부도위(東部都尉) 예량(芮良)
예장태수(豫章太守) 손분(孫賁) 건창도위(建昌都尉) 태사자(太史慈)
여릉태수(廬陵太守) 손보(孫輔)
단양군에서 원윤(袁胤)을 몰아낸 직후에는 서곤(徐琨)이 태수직을 맡고 있었으나, 옛 단양태수였던 오경이 썩 훌륭하게 통치했음을 감안하여 손책은 숙부와 부하를 교대시켰습니다. 더구나 서곤은 휘하의 장병이 많았던 까닭에 군부 소속인 편이 훨씬 무겁게 쓰였던 모양이에요. 회계군 동부도위에 임명된 예량은 손견 시절부터 복속한 고참 무장이었습니다.
여릉군은 손책이 예장군을 분할하여 새로이 만든 지역입니다. 예장군은 넓기도 넓은 데다 반란이 잦아서, 화흠이 현상유지만으로도 피가 마르는 지경이었던 걸 보아도 분할해서 통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새로 임명된 인물들을 훑어보면, 손책군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단계 훌쩍 건너뛰어서 도위가 된 전유와 하제가 눈에 뜨입니다. 전유는 본디부터 한실이 정식으로 임명한 도위였던 것, 그리고 하제는 회계군 현령을 맡은 경험으로 군에 들끓는 도적에 대해 빠삭하다는 걸 고려한 발령이겠지요.
손책은 착실하게 강동에 새로운 체제를 수립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강동 전역이 손책의 수중에 들어온 건 아니었지요. 특히 회계군과 예장군은 손책을 무릎을 꿇지 않은 세력이 아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단양태수 교대 사건으로 손책에게 앙심을 품은 원술은, 이 건방진 꼬맹이에게 쓴 맛을 보여주려고 벼르고 있었고요.
동습은 회계군(会稽郡) 출신으로, 약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거한이었습니다. 손책이 회계로 왔을 때 휘하로 들어왔지요. 지성과 무용을 겸비한 인물로, 손책군에 들어오고 얼마되지 않아 회계의 도적을 성공적으로 토벌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 별동대 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제 역시 회계군 출신으로 현령 노릇을 하고 있었죠. 손책에게 천거되어, 동치(東治)로 도주한 왕랑(王朗)의 토벌전에서 크게 활약합니다.
전유는 한왕실에서 회계군의 동도위(東都尉)로 임명한 정식 관리입니다. 손책이 오군(呉郡)을 찾았을 때 맨 먼저 군을 이끌고 복속하였습니다.
여몽은 본디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손책군의 부장(部将)이었던 매부 등당(鄧当)에게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못살게 군 관리를 죽이고 체포되었지만, 여몽을 변호하는 자들이 상당수 있어 손책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여몽을 눈여겨 본 손책을 그를 시종으로 채용했고, 이후 등당군의 뒤를 잇게 됩니다. 손책이 여몽을 시종으로 썼을 당시, 여몽은 15~6세였습니다.
이들 중 오로지 전유만이 정식으로 등용된 한의 관리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무관(無官)이었습니다. 여몽에 이르러선 아예 죄인이었죠. 손책이 가문에 상관치 않고 능력만을 보고 인재를 뽑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손책의 인재활용법은 청탁(清濁)을 가림없이 능력이 있으면 등용하리라 하였던 조조의 그것이 극히 유사합니다. 그리고 손책 휘하의 무관의 경우, 시종에서 별동대 대장으로 승진하는 케이스가 많았음도 알게 됩니다. 주태(周泰)・장흠(将欽)・진무(陳武)・동습(董襲)・여몽은 모두 같은 길을 밟아 손책군에서 손꼽히는 무장으로 성장했지요. 이들은 모두 가문이 보잘 것 없어 시작부터 무장으로 삼을 수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먼저 시종으로 채용하고, 거기서 손책의 눈에 들면 별동대 대장이 되어 소수나마 병사를 지휘할 권한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별동대 대장의 신분으로 공적을 차근차근 세워, 마침내는 손책군의 주력(主力)으로 성장했던 것이지요.
(주) 주태・장흠・진무・동습・여몽 등은 모두 잔다리밟기로 성장하여 오를 짊어진 무관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무장이 유독 많다는 것이야말로 손오의 무관 구성 상의 최대 특징입니다. 이러한 밑바닥 출신 무장은 특히 손책 정권기에 다수 등용되어, 손책의 혜안을 쉬이 짐작케 하지요.
그러나 또다른 시점에서 뒤집어 보자면, 밑바닥 출신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것은 손책이 기본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기본적으로 직접 무장을 육성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문관도 마찬가지로, 중원에서 강동으로 흘러온 사인(士人)이 대다수로, 지방 호족의 등용은 열 손가락에 겨우 꼽을 정도입니다. 이 점이야아말로 손책 정권과 손권 정권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만약 손책이 요절하지 않고 장기간 집권했다면, 훗날 호족과의 합의제(合議制)로 일컬어졌던 손오 정권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손책 정권은 손일문을 정점으로 하는 군주권이 확립된 정권이었습니다.
우번은 왕랑(王朗)의 막하에서 공조(功曹 : 인사담당 문관)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손책군이 침공한 당초부터, 우번은 손책군과는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왕랑이 동치(東治)로 도주하자, 우번은 내친 김에 교주(交州)까지 달아나려는 왕랑을 설득하여 손책에게 출두시킵니다. 그 후로도 예장태수 화흠(華歆)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사자로 파견되는 등, 내정과 외교에서 폭넓게 활약했습니다.
호종은 서남(徐南 : 예주) 출신. 모친과 더불어 전란을 피해 강동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손책이 회계태수가 되었을 때 등용되어 손권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학문을 닦았다고 합니다. 당시 호종은 14세였습니다.
진송은 전기가 남아 있지 않아 출생과 경력은 일절 불명입니다만, 왜 기록이 없는지 신기할 정도로 손책군 내에서는 상당한 거물이었습니다. 진송의 이름은 항상 『장소(張昭)・장굉(張紘)・진송 등은...』이라는 식으로 장굉 및 장소와 동격으로 기술되어 있고, 이후 적벽에 관한 기록에서도 장소 및 장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관의 넘버 3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천수를 다 누리지 못했다 되어 있어, 아마도 적벽 직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진송 역시, 전란을 피하여 강동을 찾은 사인 중 하나겠지요.
진단도 어지간히 일찍 죽은 듯 기술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손책전에 『장소・장굉・진송・진단 등이 손책의 참모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초기의 손책군을 그늘에서 지탱한 문관으로 짐작됩니다.
육적은 옛 여강태수(廬江太守) 육강(陸康)의 아들입니다. 원술은 육적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만나보고 비범한 소년임을 알아보았다고 하지요. 이 무렵 육적은 아직 스물이 채 되지 못했지만, 이미 군 회의에서는 말석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보다시피 문관의 대부분은 평화를 구해 강동으로 흘러들어온 인재였습니다. 이 무렵 어지러운 중원을 떠나 강동을 찾은 민중과 사인이 줄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손책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사인들 중에는 이미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인물도 많아, 실은 손책을 받드는 대신 후에 중원으로 돌아가 위에 복속한 사람도 몇 명인가 있긴 합니다. 한편 호종과 여몽의 예를 보아도, 손책은 귀천(貴賎)은 물론 연령도 하등 신경 쓰지 않고 재능만 있으면 뽑아 썼다는 걸 알게 됩니다. 손책 자신이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던 까닭도 있었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인재등용에 관해 손책은 조조마저도 능가한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 여러분은 어떠신지?
강동 각 군의 태수(太守)와 도위(都尉)도 이때 임명되었습니다.
단양태수(丹陽太守) 오경(呉景) 도위 전유(全柔)
오군태수(呉郡太守) 주치(朱治) 도위 정보(程普)
회계태수(会稽太守) 손책(孫策) 남부도위(南部都尉) 하제(賀斉)
동부도위(東部都尉) 예량(芮良)
예장태수(豫章太守) 손분(孫賁) 건창도위(建昌都尉) 태사자(太史慈)
여릉태수(廬陵太守) 손보(孫輔)
단양군에서 원윤(袁胤)을 몰아낸 직후에는 서곤(徐琨)이 태수직을 맡고 있었으나, 옛 단양태수였던 오경이 썩 훌륭하게 통치했음을 감안하여 손책은 숙부와 부하를 교대시켰습니다. 더구나 서곤은 휘하의 장병이 많았던 까닭에 군부 소속인 편이 훨씬 무겁게 쓰였던 모양이에요. 회계군 동부도위에 임명된 예량은 손견 시절부터 복속한 고참 무장이었습니다.
여릉군은 손책이 예장군을 분할하여 새로이 만든 지역입니다. 예장군은 넓기도 넓은 데다 반란이 잦아서, 화흠이 현상유지만으로도 피가 마르는 지경이었던 걸 보아도 분할해서 통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새로 임명된 인물들을 훑어보면, 손책군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 단계 훌쩍 건너뛰어서 도위가 된 전유와 하제가 눈에 뜨입니다. 전유는 본디부터 한실이 정식으로 임명한 도위였던 것, 그리고 하제는 회계군 현령을 맡은 경험으로 군에 들끓는 도적에 대해 빠삭하다는 걸 고려한 발령이겠지요.
손책은 착실하게 강동에 새로운 체제를 수립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아직 강동 전역이 손책의 수중에 들어온 건 아니었지요. 특히 회계군과 예장군은 손책을 무릎을 꿇지 않은 세력이 아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단양태수 교대 사건으로 손책에게 앙심을 품은 원술은, 이 건방진 꼬맹이에게 쓴 맛을 보여주려고 벼르고 있었고요.
저것들이 모두 소패왕의 남자란 이야기. (....)
전(前) 여강태수 육강은 육의(陸議), 즉 훗날의 소패왕 사위(....) 육손(陸遜)의 숙부이기도 하다. 육강을 노강에서 몰아낸 장본인이 바로 손책임을 감안하면 - 원술의 명이었다고는 하지만 - 그 아들 육적이 손책군의 문관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함. 뭐 모든 것은 카리스마 빔의 인도인즉슨. 손책 정권 = 손일문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정권이었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손책 백부라는 개인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유지되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에.
제 18장. 잠재적 위협(潜在的脅威)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내가 날조 설정에서 소패왕이 열세 살 때 식인 호랑이를 때려잡았다고(....) 주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이 저 모양이니 원... (한숨)
하지만 태사자에게 수극 사용 방법을 배웠다는 발상은 동인녀의 입장에서 아주 훌륭하다. 굿! (인생을 리비도로 사는 여자 같으니;)
하여간 조조 님 역시 멀리 갈 거 없이 바람 피우는 사이에 쓰디쓴 맛을 보여준 장수와 가후를 등용한 전적이 있으신 걸 생각하면 역시 손포코 님은 빼도 박도 못할 손책의 골수 팬이라는 기정 사실만 재확인하게 됨. 남자가 남자한테 반하면 약도 없다더니? 당신도 소패왕의 카리스마 빔 희생자십니까앗;;;
내 경우 인재등용법(이라고 쓰고 꼬심의 기술이라고 읽는다;)이고 뭐고를 떠나서, 바로 위의 제 17장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조조 님과 서로의 속을 복복 긁어가며 각자 알겨낼 수 있는 건 다 알겨내고 있는 꼴을 보자면(...) 조조 님과 손책이 같은 간웅 계열이라는 심증이 팍팍 든다. 필시 얼굴 대 얼굴로 마주했으면 순식간에 손발이 착착 맞아 내롱네롱하는 사이가 되던가 동족혐오의 피바람이 몰아치던가 둘 중의 하나. 덤으로 후자일 가능성이 약 99.98퍼센트. (그리고 으르렁대며 분개하는 주군들 옆에서 퍽퍽 깎이는 위벽을 부여잡고 잘 듣는 위장약 정보를 교환하는 주유와 돈형 [爆])
존경하고 존경해 마지 않아 언제나 그늘에 숨어 스토킹;하고 있는 모님께서 조조 님을 당당하고 잔인하며 경박한 얼굴 밑에 원대한 야망을 감춘 교활한 용에, 그리고 큰형님을 인자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품을 가진 용에 비유하신 적이 있는데 너무나 적확한 비유에 군침을 줄줄 흘리며 동의하는 한편 그럼 과연 손씨 집안은 어떨지 나름대로 통박 좀 굴려 본 적이 있음. 손권의 경우 필시 느릿하고 차분한 모양새 뒤에 노련함과 교묘함을 숨긴 3년간 침묵하지만 한 번 떨쳐 일어나면 하늘을 뒤덮을 용일 것이다. 그럼 손책은?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뛰는 광룡(狂龍)이리라 생각함.
그 점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손책이 강동을 제압했을 무렵의 반란 세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회계군(会稽郡)을 중심으로 하는 엄백호(厳白虎) 일파. 또 하나는 단양(丹陽) 서부에서부터 예장(豫章)에 걸쳐 기반을 둔 조랑(祖郎) 일파였습니다. 그 외에도 예장군에서는 종교 세력과 민중의 독립세력과 결탁하여 동지(僮芝)가 여릉(盧陵)에서 태수를 자청하고 있었죠.
손책이 예장군을 완전히 수중에 넣는 건 실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므로, 이 무렵에 손책에게 대항하는 반란세력이라면 역시 엄백호와 조랑의 쌍대산맥이었지요. 양쪽이 따로따로 행동할 때에는 별반 위협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만, 손책이 강동을 찍어누른 시점부터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손책의 신속한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북방의 세력과, 엄백호와 조랑 등의 반란세력이 손을 잡고 나선 것이죠.
먼저, 단양에서 손책과 충돌한 원술을 살펴봅시다. 당시 원술은 서주(徐州)에 개입하려던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막 황제를 참칭하고 나서려던 시기라 내정면에서는 거의 엉망진창이 되어가던 중이었지요. 손책군과 정면으로 맞부딪힐 여유는 없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래서 조랑에게 관직을 주는 한편 산월(山越)을 선동하여 내란을 획책했던 겁니다.
헌데 아무래도, 분규를 획책한 건 원술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진우(陳瑀 : 진등陳登의 사촌에 해당합니다. 본디는 양주자사揚州刺史였으나 원술에게 쫓겨 하비下邳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또한 오군태수(呉郡太守)를 자인하며 엄백호 등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 양주 탈환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이건 과연 진우의 독단이었까요? 기술을 믿는다면 진우는 무능한 부류에 가까우므로, 그 뒤에 진등이, 더욱 나아가서는 조조가 도사리고 있었던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러한 반란세력은, 강동에 기반을 두는 이상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잠재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훗날 조위와 촉한이 손오와 맞서 싸울 때에도, 정면 침공과 동시에 산월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반란을 선동하는 건 상투 수단이었거든요. 더구나 손책은 늦은 시간만큼을 만회하고자 단숨에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반란분자는 각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친 손견에게서 손책에게로 유산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결과라고 봐도 좋습니다. 손책은 엄백호와 조랑의 토벌, 더 나아가 잠재적 반란분자의 일소에 착수했습니다.
조랑은 손책이 아직 무관(無官)이었던 시절에, 단양에서 모병한 수백의 병사를 궤멸한 전적이 있었죠. 손책은 스스로 조랑의 토벌에 나섭니다. 도중에 손책이 위기에 빠져, 정보와 단 둘이서 포위망을 뚫는 기막힌 일도 벌어지긴 했지만 (하여간 이런 점은 손견 파파랑 한 판이네요 ^^; 총대장이 병졸이랑 칼을 맞대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장소 이하 가신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원;) 결국, 조랑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지요. 그런데 웬걸, 놀랍게도 손책은 조랑을 수하로 맞아들여 버립니다. 그때 손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 그대는 나를 습격하여, 내리친 칼날이 말안장에 박히기도 했었지만, 나는 나 자신의 대의를 위해 능력 있는 인재라면 누구든지 등용하고 있다. 과거 나와 적대하였으나 발탁된 자는 그대뿐만이 아닐세. (아마도 태사자를 말하는 거겠죠) 아무 걱정 말고 내 부하가 되도록." 손책은 그 자리에서 조랑의 포박을 풀고, 태사자와 더불어 군의 선두에 세워 개선하였다고 합니다. 막 토벌하고 온 적장이 바로 그 개선 퍼레이드의 선두에 서다니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후로 조랑의 이름은 정사에서 사라지므로, 어딘가에서 전사했거나, 반역 기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반기를 들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러나, 이걸 봐도 역시 손책의 인재등용은 조조를 상회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어 엄백호의 토벌에 앞서, 먼저 배후의 선동자인 진우부터 치기 위해 손책은 여범과 서일(徐逸 : 이 대목을 제외하면 더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입니다)을 파견합니다. 여범은 해서(海西)에서 진우군을 격파하고 4천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뒤이은 엄백호 본인의 토벌에는 다시금 손책 자신이 나섭니다. 엄백호(틀림없이 본명은 아닙니다. 야쿠자가 가명을 쓰는 것과 비슷한 감각일까요?)는 동생 엄여(厳輿)를 사자로 파견해 화평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불행해도 이런 행위는 손책이 가장 짜증스러워 하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엄백호는 묘혈을 판 셈이 되어 버렸어요. 자 하여간 엄여가 손책의 진영으로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각본 첨부 손책 극장의 막이 오릅니다 (웃음)
손책『당신, 덩치는 크지만 체구에 걸맞지 않게 행동이 날래고 재빠르다면서?』
엄여『특히 칼을 보면 몸이 저절로 재빠르게 움직인답니다.』(←바보)
손책『헤에─.』
손책, 일순에 수극(手戟 : 태사자가 소지했던 무기와 똑같군요. 태사자에게 쓰는 법을 배운 걸까요?)을 뽑아 엄여에게 던진다.
엄여『으아아아아악!!!!!』
엄여, 미간에 수극이 꽂힌 채로 절명.
손책『뭐야, 못하잖아. (풋)』
<차회예고> 손책의 일격에 허무히 쓰러진 엄여!! 공포로 전율하는 엄백호에게 손책은 내뱉는다. 엄백호, 넌 이미 죽어 있다.
더 할 말도 없습니다 (웃음) 손책은 세기말 히어로라도 되는 걸까요.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 결국, 엄백호는 두려움에 떨다 깊은 산중으로 도주하고 맙니다.
이어서 손책은 잠재적인 반란분자의 일소로 눈을 돌렸습니다. 오정(鳥程)의 도적떼, 추타(鄒他)・전동(銭銅)과 가흥(嘉興)의 도적, 왕성(王晟) 등 지방의 반란분자를 척결하고, 내친 김에 손책에게 충의를 맹세하지 않는 지방의 유력자와 종교 세력의 근절에도 착수합니다. 그 중에 옛 오군태수인 허공(許貢)도 끼여 있었습니다. 허공은 조정(즉 조조)에게 『손책은 과거의 항우(項羽)와도 같은 자로, 이대로 지방에 두면 후에 반드시 재앙의 불씨가 되오리다. 중앙의 관직을 제수하여 도읍에 묶어 두는 것이 현명할 줄로 아뢰오』라는 편지를 보낸 죄로 손책에게 살해당했지요. 실제로 허공이 그런 제안을 했는지의 여부는 좀 미묘하긴 합니다. 허공이라는 반란분자를 껴안고 있어서 손책에게 유리할 건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요. 한편 손책이 탄압한 종교세력 중에는 우길(干吉)과 같은 자들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손책의 반란세력 소탕은 상당히 잔혹했던 모양으로, 왕성을 처치했을 때는 그 일족을 깡그리 몰살시켜 오부인(呉夫人 : 손책의 모친)에게 그렇게까지 하여야 했느냐며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손책이 반란분자를 사정없이 밟은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강동은 한 왕실의 권위조차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습니다. 손책이 강동을 제압했다고는 하지만, 빈틈을 조금만 보여도 금세 반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빤했지요. 아마도 손책은 '날 거역하면 이런 꼴이 된다? 그래도 좋냐?' 는 식으로 본보기를 보이려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훗날 손책의 앞길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지요.
손책이 예장군을 완전히 수중에 넣는 건 실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므로, 이 무렵에 손책에게 대항하는 반란세력이라면 역시 엄백호와 조랑의 쌍대산맥이었지요. 양쪽이 따로따로 행동할 때에는 별반 위협이 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만, 손책이 강동을 찍어누른 시점부터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손책의 신속한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북방의 세력과, 엄백호와 조랑 등의 반란세력이 손을 잡고 나선 것이죠.
먼저, 단양에서 손책과 충돌한 원술을 살펴봅시다. 당시 원술은 서주(徐州)에 개입하려던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막 황제를 참칭하고 나서려던 시기라 내정면에서는 거의 엉망진창이 되어가던 중이었지요. 손책군과 정면으로 맞부딪힐 여유는 없었다고 봐도 좋습니다. 그래서 조랑에게 관직을 주는 한편 산월(山越)을 선동하여 내란을 획책했던 겁니다.
헌데 아무래도, 분규를 획책한 건 원술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진우(陳瑀 : 진등陳登의 사촌에 해당합니다. 본디는 양주자사揚州刺史였으나 원술에게 쫓겨 하비下邳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또한 오군태수(呉郡太守)를 자인하며 엄백호 등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 양주 탈환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이건 과연 진우의 독단이었까요? 기술을 믿는다면 진우는 무능한 부류에 가까우므로, 그 뒤에 진등이, 더욱 나아가서는 조조가 도사리고 있었던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이러한 반란세력은, 강동에 기반을 두는 이상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잠재적인 위협이었습니다. 훗날 조위와 촉한이 손오와 맞서 싸울 때에도, 정면 침공과 동시에 산월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반란을 선동하는 건 상투 수단이었거든요. 더구나 손책은 늦은 시간만큼을 만회하고자 단숨에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반란분자는 각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부친 손견에게서 손책에게로 유산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결과라고 봐도 좋습니다. 손책은 엄백호와 조랑의 토벌, 더 나아가 잠재적 반란분자의 일소에 착수했습니다.
조랑은 손책이 아직 무관(無官)이었던 시절에, 단양에서 모병한 수백의 병사를 궤멸한 전적이 있었죠. 손책은 스스로 조랑의 토벌에 나섭니다. 도중에 손책이 위기에 빠져, 정보와 단 둘이서 포위망을 뚫는 기막힌 일도 벌어지긴 했지만 (하여간 이런 점은 손견 파파랑 한 판이네요 ^^; 총대장이 병졸이랑 칼을 맞대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장소 이하 가신들이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을지 원;) 결국, 조랑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지요. 그런데 웬걸, 놀랍게도 손책은 조랑을 수하로 맞아들여 버립니다. 그때 손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 그대는 나를 습격하여, 내리친 칼날이 말안장에 박히기도 했었지만, 나는 나 자신의 대의를 위해 능력 있는 인재라면 누구든지 등용하고 있다. 과거 나와 적대하였으나 발탁된 자는 그대뿐만이 아닐세. (아마도 태사자를 말하는 거겠죠) 아무 걱정 말고 내 부하가 되도록." 손책은 그 자리에서 조랑의 포박을 풀고, 태사자와 더불어 군의 선두에 세워 개선하였다고 합니다. 막 토벌하고 온 적장이 바로 그 개선 퍼레이드의 선두에 서다니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노릇이지요. 이후로 조랑의 이름은 정사에서 사라지므로, 어딘가에서 전사했거나, 반역 기질을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반기를 들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그러나, 이걸 봐도 역시 손책의 인재등용은 조조를 상회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어 엄백호의 토벌에 앞서, 먼저 배후의 선동자인 진우부터 치기 위해 손책은 여범과 서일(徐逸 : 이 대목을 제외하면 더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입니다)을 파견합니다. 여범은 해서(海西)에서 진우군을 격파하고 4천 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뒤이은 엄백호 본인의 토벌에는 다시금 손책 자신이 나섭니다. 엄백호(틀림없이 본명은 아닙니다. 야쿠자가 가명을 쓰는 것과 비슷한 감각일까요?)는 동생 엄여(厳輿)를 사자로 파견해 화평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불행해도 이런 행위는 손책이 가장 짜증스러워 하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엄백호는 묘혈을 판 셈이 되어 버렸어요. 자 하여간 엄여가 손책의 진영으로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각본 첨부 손책 극장의 막이 오릅니다 (웃음)
손책『당신, 덩치는 크지만 체구에 걸맞지 않게 행동이 날래고 재빠르다면서?』
엄여『특히 칼을 보면 몸이 저절로 재빠르게 움직인답니다.』(←바보)
손책『헤에─.』
손책, 일순에 수극(手戟 : 태사자가 소지했던 무기와 똑같군요. 태사자에게 쓰는 법을 배운 걸까요?)을 뽑아 엄여에게 던진다.
엄여『으아아아아악!!!!!』
엄여, 미간에 수극이 꽂힌 채로 절명.
손책『뭐야, 못하잖아. (풋)』
<차회예고> 손책의 일격에 허무히 쓰러진 엄여!! 공포로 전율하는 엄백호에게 손책은 내뱉는다. 엄백호, 넌 이미 죽어 있다.
더 할 말도 없습니다 (웃음) 손책은 세기말 히어로라도 되는 걸까요.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 결국, 엄백호는 두려움에 떨다 깊은 산중으로 도주하고 맙니다.
이어서 손책은 잠재적인 반란분자의 일소로 눈을 돌렸습니다. 오정(鳥程)의 도적떼, 추타(鄒他)・전동(銭銅)과 가흥(嘉興)의 도적, 왕성(王晟) 등 지방의 반란분자를 척결하고, 내친 김에 손책에게 충의를 맹세하지 않는 지방의 유력자와 종교 세력의 근절에도 착수합니다. 그 중에 옛 오군태수인 허공(許貢)도 끼여 있었습니다. 허공은 조정(즉 조조)에게 『손책은 과거의 항우(項羽)와도 같은 자로, 이대로 지방에 두면 후에 반드시 재앙의 불씨가 되오리다. 중앙의 관직을 제수하여 도읍에 묶어 두는 것이 현명할 줄로 아뢰오』라는 편지를 보낸 죄로 손책에게 살해당했지요. 실제로 허공이 그런 제안을 했는지의 여부는 좀 미묘하긴 합니다. 허공이라는 반란분자를 껴안고 있어서 손책에게 유리할 건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요. 한편 손책이 탄압한 종교세력 중에는 우길(干吉)과 같은 자들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손책의 반란세력 소탕은 상당히 잔혹했던 모양으로, 왕성을 처치했을 때는 그 일족을 깡그리 몰살시켜 오부인(呉夫人 : 손책의 모친)에게 그렇게까지 하여야 했느냐며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손책이 반란분자를 사정없이 밟은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강동은 한 왕실의 권위조차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벽지였습니다. 손책이 강동을 제압했다고는 하지만, 빈틈을 조금만 보여도 금세 반란이 일어날 건 불 보듯 빤했지요. 아마도 손책은 '날 거역하면 이런 꼴이 된다? 그래도 좋냐?' 는 식으로 본보기를 보이려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훗날 손책의 앞길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지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내가 날조 설정에서 소패왕이 열세 살 때 식인 호랑이를 때려잡았다고(....) 주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이 저 모양이니 원... (한숨)
하지만 태사자에게 수극 사용 방법을 배웠다는 발상은 동인녀의 입장에서 아주 훌륭하다. 굿! (인생을 리비도로 사는 여자 같으니;)
하여간 조조 님 역시 멀리 갈 거 없이 바람 피우는 사이에 쓰디쓴 맛을 보여준 장수와 가후를 등용한 전적이 있으신 걸 생각하면 역시 손포코 님은 빼도 박도 못할 손책의 골수 팬이라는 기정 사실만 재확인하게 됨. 남자가 남자한테 반하면 약도 없다더니? 당신도 소패왕의 카리스마 빔 희생자십니까앗;;;
내 경우 인재등용법(이라고 쓰고 꼬심의 기술이라고 읽는다;)이고 뭐고를 떠나서, 바로 위의 제 17장에서도 그렇고 나중에 조조 님과 서로의 속을 복복 긁어가며 각자 알겨낼 수 있는 건 다 알겨내고 있는 꼴을 보자면(...) 조조 님과 손책이 같은 간웅 계열이라는 심증이 팍팍 든다. 필시 얼굴 대 얼굴로 마주했으면 순식간에 손발이 착착 맞아 내롱네롱하는 사이가 되던가 동족혐오의 피바람이 몰아치던가 둘 중의 하나. 덤으로 후자일 가능성이 약 99.98퍼센트. (그리고 으르렁대며 분개하는 주군들 옆에서 퍽퍽 깎이는 위벽을 부여잡고 잘 듣는 위장약 정보를 교환하는 주유와 돈형 [爆])
존경하고 존경해 마지 않아 언제나 그늘에 숨어 스토킹;하고 있는 모님께서 조조 님을 당당하고 잔인하며 경박한 얼굴 밑에 원대한 야망을 감춘 교활한 용에, 그리고 큰형님을 인자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품을 가진 용에 비유하신 적이 있는데 너무나 적확한 비유에 군침을 줄줄 흘리며 동의하는 한편 그럼 과연 손씨 집안은 어떨지 나름대로 통박 좀 굴려 본 적이 있음. 손권의 경우 필시 느릿하고 차분한 모양새 뒤에 노련함과 교묘함을 숨긴 3년간 침묵하지만 한 번 떨쳐 일어나면 하늘을 뒤덮을 용일 것이다. 그럼 손책은?
피에 굶주려 미쳐 날뛰는 광룡(狂龍)이리라 생각함.
그 점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자세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