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님의 오렌 모토나리와 유바리 마사무네에게 불타는 모에를 느끼고 그만 킬빌까지 다시 보아버린 리비도의 여자 S. 미친 여고생 컨셉은 좀 으으으음;;;이고 하단 속눈썹이 약간 걸리지만 기집애 이쁘긴 되게 이쁘거든. 쇠사슬을 빙빙 돌려대는 폼이 제법 근사하거든. 그리고 난 강한 미인에게 약하다. (왓핫핫)
근데 그러자면 브라이드는 누구냐. 설마 유키유키? (대폭소)
(실컷 싸우다 말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양손을 덥석 잡으면서 「惚れ申した!」라고 하는 거야? 그리곤 난데없이 피바다의 현장에서 나 잡아봐~라와 아하하 거기 서~가 펼쳐지는 건가? [실제로는 그렇게 산뜻한 상황이 아님. 절대로. 오히려 정조의 위기?] 그 꼴을 모토나리는 2층에서 식은땀 삐질 흘리며 바라보는 거고?) (데굴데굴데굴)
삼천포로 빠졌음. (헛기침)
하여간 오랜만에 귀환한 손포코 님의 손책전 Part 9. 이제 손책전도 앞으로 석 장 남았을 뿐이다. 속이 후련한지 섭섭한 건지... (먼 눈)
제 19장. 원술의 말로(袁術の末路)
내가 조조 님과 손책은 동류였을 거라고 주장하는 최대의 이유. 저 서장의 응수를 보고 있으면 쳐웃겨서 참을 수가 없음. 정말 한 번은 face to face로 만났어야 하는 건데...!!
자, 여기서 잠시 원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양군(丹陽郡)에서 손책과 무력 충돌을 일으킨 원술이었지만, 도저히 정면에서 맞붙을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표면상으로는 손책과 화해한 것처럼 되어 있었죠. 그러나, 여기서 원술은 사고를 칩니다. 그렇습니다. "난 황제다─불만 있는 놈 다 나와!!" 라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나선 겁니다. 이미 예전부터 원술은 독자적으로 태수와 주의 자사(刺史)를 임명하는 등 반역 행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뿐만이라면 아직 한왕조에 도사리고 앉은 역적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대의명분이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를 자칭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죠. 뭐 그 당시에 원술에게 천운이 있었다면 또 모릅니다만, 조조와 원소에게 패해 양주(揚州)로 도주해, 서주(徐州)를 강탈하려던 계획은 여포가 알아먹지 못할 방식으로 휴전을 알선했기 때문에 뭐가 뭔지 어안이벙벙해하는 틈에 좌절해, 하는 일 벌이는 일이 전부 뜻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야말로 명문 원일문의 정통 당주라는 자부심과 괴로운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현실도피를 꾀한 건 아닐까요? 어느 쪽이건, 손책에게는 원술과 절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또 빗나갑니다만(웃음), 이번에는 조조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죠. 조조는 헌제(献帝)를 비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원의 바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에 솔직히 만사형통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 못할 시기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원소가 착착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고, 서주에는 뭘 생각하고 사는지야 모르겠으나 괴물처럼 강한 여포가 있었지요. 유비는 일단 조조의 막하로 와 있었지만, 본디부터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 무렵에는 거기장군(車騎将軍) 동승(董承)과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더더욱 믿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장수(張繍)와 가후(賈詡)에게 뼈아픈 패배를 맛보고 난 터라 더 이상 적은 만들고 싶지 않은 게 정직한 본심이었어요. 그 와중에 어물어물하는 사이 손견의 아들이 강동을 홀랑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이런 놈과 싸움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여겨, 우선 손책을 회유하고 보는 게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어휴, 이제야 겨우 손책에게로 돌아왔네요(웃음). 손책은 여기서 원술과 절연하고 조조에게 협력하기로 합니다. 원술을 내치는 거야 당연하다 치고, 조조와 손을 잡으면 무슨 이득이 있었던 걸까요? 아시다시피 손책은 줄곧 역적으로 분류되는 원술과 행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임명된 한왕조의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있는 건 예전에 제수받은 회의교위(懐義校尉)라는 말단직 정도였지요. 다시 말해 손책 역시 한왕조에 대항하는 반역세력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손책이 강동을 제패해도 극단적으로는 조랑(祖朗)이나 엄백호(厳白虎) 등의 반란분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던 셈이에요. 최소한 손책에게는 정식 장군직과 걸맞는 지위가 필요했습니다. 아니,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강동에서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는 정식 관직이 있는 편이 훨씬 편리했습니다. 그 쪽이 강동으로 흘러들어온 청류파(清流派)의 인재를 등용하기도 쉽고 치안을 향상시키는 데도 유효했으니까요. 조조가 첫째도 둘째도 헌제 옹립을 목표했던 것도 그러한 이점을 중시했기 때문이었죠.
손책은 원술을 비난하는 서장을 보내 본격적으로 절연합니다. 그를 전후해서, 조조는 자신의 조카딸과 손책의 동생인 손광(孫匡)을 혼인시켰고, 또한 손책도 손분(孫賁)의 딸을 조장(曹章)에게 출가시켰죠. 뒤이어 동생 손권과 손익(孫翊)에게도 관직을 제수한 조조는 더욱 크게 나옵니다. (웃음)
『그대의 부친 손견도 훌륭하였고, 그 아들 손책도 열심히 잘 하고 있으니 (거짓말 마라 ^^;) 기도위(騎都尉)・오정후(鳥程侯)・회계태수(會稽太守)의 직을 내리겠노라. 그 대신이라긴 좀 뭐하지만, 역적 원술을 분발해서 밟아주세요.』
그에 대한 손책의 답변도 장난 아니게 뻔뻔합니다. ^^;
『제가 원술한테서 받은 관직이 가짜였다니 전혀 몰랐지 뭡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거짓말!! ^^;) 이제까지 역적한테 가담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요. 눈물이 다 쏟아집니다. 그리고 뭐, 분발한다고 해봤자, 곽거병(霍去病)이 18살에 공을 세운 것에 비하면 저야 벌써 스물 넷이고, 하나도 대단치 않아요. (조조 속을 긁는 거냐?) 원술은 세상에 둘도 없을 역적이니까, 힘내서 쓰러뜨릴게요. 앗 하지만 기왕이면 기도위가 아니라, 장군직 주시면 안될까나요~』
외교문서란 건 다 이런 식인가요? (웃음) 손책은 이후로도 질기게 버텨서,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장굉을 허도(許都)로 파견하기도 해서, 결국에는 토역장군(討逆将軍)과 오후(呉侯)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조조는 조조대로, 사자 자격으로 방문한 장굉을 붙들어두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요. 이 점에서, 긁어낼 수 있는 건 몽땅 다 긁어내자는 양측의 이악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정말 재미있어요(웃음). 과연 시대를 주름잡은 영걸들. 짠돌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을 원술도 상대가 안 됩니다.
다만 조조와 손책의 협조 노선은 어디까지나 저 나름대로의 사정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전략적인 가치는 거의 제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관계였지요.
하여간 처량하게 된 건 원술이었습니다. 원술은 조조, 여포, 손책 등에게 신나게 두들겨맞고, 마침내는 "원술이 이 무슨 꼴이냐!!" 라 절규하며 피를 한 말이나 토하고 죽어 버립니다. 한때는 원소와 더불어 천하를 다투었던 원술은 이렇게도 비참한 말로를 맞았습니다.
이야기가 또 빗나갑니다만(웃음), 이번에는 조조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죠. 조조는 헌제(献帝)를 비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중원의 바로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에 솔직히 만사형통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 못할 시기였습니다. 북쪽에서는 원소가 착착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고, 서주에는 뭘 생각하고 사는지야 모르겠으나 괴물처럼 강한 여포가 있었지요. 유비는 일단 조조의 막하로 와 있었지만, 본디부터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사람도 아니거니와 이 무렵에는 거기장군(車騎将軍) 동승(董承)과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더더욱 믿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장수(張繍)와 가후(賈詡)에게 뼈아픈 패배를 맛보고 난 터라 더 이상 적은 만들고 싶지 않은 게 정직한 본심이었어요. 그 와중에 어물어물하는 사이 손견의 아들이 강동을 홀랑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이런 놈과 싸움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여겨, 우선 손책을 회유하고 보는 게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어휴, 이제야 겨우 손책에게로 돌아왔네요(웃음). 손책은 여기서 원술과 절연하고 조조에게 협력하기로 합니다. 원술을 내치는 거야 당연하다 치고, 조조와 손을 잡으면 무슨 이득이 있었던 걸까요? 아시다시피 손책은 줄곧 역적으로 분류되는 원술과 행동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임명된 한왕조의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있는 건 예전에 제수받은 회의교위(懐義校尉)라는 말단직 정도였지요. 다시 말해 손책 역시 한왕조에 대항하는 반역세력이었다는 얘깁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손책이 강동을 제패해도 극단적으로는 조랑(祖朗)이나 엄백호(厳白虎) 등의 반란분자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던 셈이에요. 최소한 손책에게는 정식 장군직과 걸맞는 지위가 필요했습니다. 아니,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강동에서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는 정식 관직이 있는 편이 훨씬 편리했습니다. 그 쪽이 강동으로 흘러들어온 청류파(清流派)의 인재를 등용하기도 쉽고 치안을 향상시키는 데도 유효했으니까요. 조조가 첫째도 둘째도 헌제 옹립을 목표했던 것도 그러한 이점을 중시했기 때문이었죠.
손책은 원술을 비난하는 서장을 보내 본격적으로 절연합니다. 그를 전후해서, 조조는 자신의 조카딸과 손책의 동생인 손광(孫匡)을 혼인시켰고, 또한 손책도 손분(孫賁)의 딸을 조장(曹章)에게 출가시켰죠. 뒤이어 동생 손권과 손익(孫翊)에게도 관직을 제수한 조조는 더욱 크게 나옵니다. (웃음)
『그대의 부친 손견도 훌륭하였고, 그 아들 손책도 열심히 잘 하고 있으니 (거짓말 마라 ^^;) 기도위(騎都尉)・오정후(鳥程侯)・회계태수(會稽太守)의 직을 내리겠노라. 그 대신이라긴 좀 뭐하지만, 역적 원술을 분발해서 밟아주세요.』
그에 대한 손책의 답변도 장난 아니게 뻔뻔합니다. ^^;
『제가 원술한테서 받은 관직이 가짜였다니 전혀 몰랐지 뭡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요. (거짓말!! ^^;) 이제까지 역적한테 가담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요. 눈물이 다 쏟아집니다. 그리고 뭐, 분발한다고 해봤자, 곽거병(霍去病)이 18살에 공을 세운 것에 비하면 저야 벌써 스물 넷이고, 하나도 대단치 않아요. (조조 속을 긁는 거냐?) 원술은 세상에 둘도 없을 역적이니까, 힘내서 쓰러뜨릴게요. 앗 하지만 기왕이면 기도위가 아니라, 장군직 주시면 안될까나요~』
외교문서란 건 다 이런 식인가요? (웃음) 손책은 이후로도 질기게 버텨서,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장굉을 허도(許都)로 파견하기도 해서, 결국에는 토역장군(討逆将軍)과 오후(呉侯)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조조는 조조대로, 사자 자격으로 방문한 장굉을 붙들어두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지요. 이 점에서, 긁어낼 수 있는 건 몽땅 다 긁어내자는 양측의 이악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서 정말 재미있어요(웃음). 과연 시대를 주름잡은 영걸들. 짠돌이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을 원술도 상대가 안 됩니다.
다만 조조와 손책의 협조 노선은 어디까지나 저 나름대로의 사정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전략적인 가치는 거의 제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관계였지요.
하여간 처량하게 된 건 원술이었습니다. 원술은 조조, 여포, 손책 등에게 신나게 두들겨맞고, 마침내는 "원술이 이 무슨 꼴이냐!!" 라 절규하며 피를 한 말이나 토하고 죽어 버립니다. 한때는 원소와 더불어 천하를 다투었던 원술은 이렇게도 비참한 말로를 맞았습니다.
내가 조조 님과 손책은 동류였을 거라고 주장하는 최대의 이유. 저 서장의 응수를 보고 있으면 쳐웃겨서 참을 수가 없음. 정말 한 번은 face to face로 만났어야 하는 건데...!!
제 20장. 서새산의 전투(西塞山の戦い)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10년만 더 살아줬어도 (한숨) 스물 다섯에 저 정도로 노련했으니 나이 더 먹었으면 대체 어떤 괴물이 됐을지 궁금해 죽겠다.
자칭 황제 원술은, 가히 언덕을 굴러내려가는 기세로 쇠퇴하여, 결국에는 울분 속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누가 원술의 잔존세력을 흡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지요. 물론 손책은 원술을 쓰러뜨리고 그 세력을 수중에 넣으려 공격태세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만, 원술군은 여포와 조조의 공격을 받아 괴멸합니다. 그 직후 원술이 분사하는 바람에 원술의 처자와 잔존세력은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劉勲)을 의지하게 됩니다. 유훈은 본디 원술의 막하였던 모양이에요.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는 누가 유훈의 병사를 손에 넣을지가 관건이 되었습니다. 조조는 이미 유훈에게 촉수를 뻗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조 휘하의 유엽(劉曄)이 자신의 병사를 유훈에게 의탁했기 때문이지요. 기술에 따르면, 유엽은 스스로 병사를 갖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유훈에게 병사를 주는 것으로 빚을 지워, 조조에게 복속하게 하려 했다는 추측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실제로도 그 직후에 유엽은 조조에게로 달아납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원술의 군세는 여전히 대단하여, 잔존병력을 손에 넣은 유훈은 일거에 대군을 갖게 됩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훈은 조조에게 복속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손책은 눈 뻔히 뜨고 대군을 조조에게 주어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요. 슬슬 손책의 유훈 타도 계획이 막을 올립니다.
손책은 선물과 함께 사자를 파견하여 겸손한 태도로 친분을 맺을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는 "예장군(豫章軍)의 상료(上繚)에서 종교 세력이 난립하여 대응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 협력하여 토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만약 토벌하면 종교 세력의 병력도 흡수할 수 있답니다" 고 꼬드깁니다. 뭐랄까,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 해야 하나요. 원술의 병력을 쉽사리 손에 넣은 유훈에게 이것은 참으로 군침 도는 이야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침을 삼킬 만한 건덕지도 없었어요. 위기감을 느낀 유엽의 충고에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상료는 좁고 작은 곳이나 천연의 요새를 갖추었으므로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네. (자칫 잘못하면 반격을 당할 수도 있어. 화흠華歆마저도 토벌하지 못하고 내버려두었을 정도란 말일세) 만약 그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손책이 급습을 가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적에게 꺾이고도 돌아갈 자리마저 잃을지 모르는 일이야." 유엽은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훈은 충고를 듣지 않고 떨쳐 일어나 상료 토벌에 나서지요.
손책의 강점은 막강한 정면돌파력에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이러한 계략과 전술에도 능수능란했다는 것입니다. 부친 손견이 잘 훈련된 병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돌파하는 부류의 강자였던 데 비해, 손책의 힘은 약간 그 질을 달리합니다. 당시 손책 휘하의 병사는 대부분이 강동에서 모집한 신병으로, 훈련을 통해 정예병으로 키울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는 손책의 통솔력과 전략, 전술이 있었기 때문에 손책군은 패배를 몰랐던 것이지요. 물론 장소, 장굉, 주유 등 그늘에서 손책을 지탱한 인물들의 능력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하여간 유훈이 상료로 향했다는 전갈을 받기가 무섭게 손책은 급행하여 유훈의 거점인 환성(皖城)을 공격합니다. 주인이 없는 환성은 쉽사리 함락되어, 손책은 여기서 원술의 잔병은 물론 기예꾼과 악대 등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한편, 원술의 처자를 보호하여 오군(呉郡)으로 데려가지요. 이때의 유산은 훗날 손권의 대에서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손권의 이름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때의 환성 공격이야말로 손권의 첫 출진이었습니다. 당시 17세. 어쩌면 이때 훗날의 원부인(원술의 딸)을 점찍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봄을 맞은 건 손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환성에서 손책과 주유는 절세의 미녀로 명망이 높은 교공(喬公)의 두 딸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교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원술 휘하에 교유喬蕤라는 무장이 있었던 걸 기억하시는지. 혹시 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손책은 언니 대교(大喬)를, 주유는 동생 소교(小喬)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 거... 부럽다고 해야 할지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할지 (웃음) 대체 어떤 경위로 손책이 대교와, 주유가 소교와 혼인하게 됐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옵니다.
손책은 이술(李術 : 서남徐南 출신으로, 아마도 손책군의 무장은 아닙니다. 서남의 사인士人이거나 유훈 휘하에 있다가 손책에게 투항한 무장일 수도 있지만, 어째서 손책이 여범, 주유, 황개 등 자군의 무장 중 적절한 자를 지명하지 않고 이술을 선택한 건지는 수수께끼입니다. 혹시 조조와의 미묘한 관계 상, 손책의 수하란 게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장수는 임명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 후에, 이술은 조조가 파견한 양주자사揚州刺史 엄상厳象을 살해합니다. 설마 싶습니다만 처음부터 엄상을 제거하기 위한 요원이었을까요?)을 노강태수로 임명하여 환성의 수비를 맡긴 후, 즉시 군을 돌려 유훈을 추격합니다. 손책은 환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유훈이 다급히 되돌아올 것을 예측해 진작부터 손분(孫賁)과 손보(孫輔) 형제를 팽택(彭沢)에 매복시키고 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말머리를 돌려 돌아온 유훈은 손분과 손보에게 패배하지요. 진퇴양난에 빠진 유훈은 서새산에 포진하고 황조(黄祖)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황조는 아들 황사(黄射)를 서새산에 원군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손책이 서새산에서 유훈을 박살낸 다음이었습니다. 유훈은 처절하게 깨지고 겨우 수백 기만으로 조조를 바라고 달아나지요.
이리하여 손책은 유훈을 제거하고 장강(長江) 이북의 여강도 수중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장군(豫章郡)에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죠. 예장에 도사린 반란세력의 진압, 그리고 부친 손견의 원수 황조의 토벌이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원술의 군세는 여전히 대단하여, 잔존병력을 손에 넣은 유훈은 일거에 대군을 갖게 됩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유훈은 조조에게 복속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손책은 눈 뻔히 뜨고 대군을 조조에게 주어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요. 슬슬 손책의 유훈 타도 계획이 막을 올립니다.
손책은 선물과 함께 사자를 파견하여 겸손한 태도로 친분을 맺을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는 "예장군(豫章軍)의 상료(上繚)에서 종교 세력이 난립하여 대응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함께 협력하여 토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만약 토벌하면 종교 세력의 병력도 흡수할 수 있답니다" 고 꼬드깁니다. 뭐랄까,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 해야 하나요. 원술의 병력을 쉽사리 손에 넣은 유훈에게 이것은 참으로 군침 도는 이야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침을 삼킬 만한 건덕지도 없었어요. 위기감을 느낀 유엽의 충고에 모든 것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상료는 좁고 작은 곳이나 천연의 요새를 갖추었으므로 쉽사리 함락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네. (자칫 잘못하면 반격을 당할 수도 있어. 화흠華歆마저도 토벌하지 못하고 내버려두었을 정도란 말일세) 만약 그대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손책이 급습을 가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적에게 꺾이고도 돌아갈 자리마저 잃을지 모르는 일이야." 유엽은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훈은 충고를 듣지 않고 떨쳐 일어나 상료 토벌에 나서지요.
손책의 강점은 막강한 정면돌파력에도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이러한 계략과 전술에도 능수능란했다는 것입니다. 부친 손견이 잘 훈련된 병사를 이끌고 정면에서 돌파하는 부류의 강자였던 데 비해, 손책의 힘은 약간 그 질을 달리합니다. 당시 손책 휘하의 병사는 대부분이 강동에서 모집한 신병으로, 훈련을 통해 정예병으로 키울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는 손책의 통솔력과 전략, 전술이 있었기 때문에 손책군은 패배를 몰랐던 것이지요. 물론 장소, 장굉, 주유 등 그늘에서 손책을 지탱한 인물들의 능력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하여간 유훈이 상료로 향했다는 전갈을 받기가 무섭게 손책은 급행하여 유훈의 거점인 환성(皖城)을 공격합니다. 주인이 없는 환성은 쉽사리 함락되어, 손책은 여기서 원술의 잔병은 물론 기예꾼과 악대 등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한편, 원술의 처자를 보호하여 오군(呉郡)으로 데려가지요. 이때의 유산은 훗날 손권의 대에서 크게 공헌하게 됩니다. 손권의 이름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때의 환성 공격이야말로 손권의 첫 출진이었습니다. 당시 17세. 어쩌면 이때 훗날의 원부인(원술의 딸)을 점찍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봄을 맞은 건 손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환성에서 손책과 주유는 절세의 미녀로 명망이 높은 교공(喬公)의 두 딸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교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원술 휘하에 교유喬蕤라는 무장이 있었던 걸 기억하시는지. 혹시 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손책은 언니 대교(大喬)를, 주유는 동생 소교(小喬)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 거... 부럽다고 해야 할지 사이가 좋다고 해야 할지 (웃음) 대체 어떤 경위로 손책이 대교와, 주유가 소교와 혼인하게 됐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옵니다.
손책은 이술(李術 : 서남徐南 출신으로, 아마도 손책군의 무장은 아닙니다. 서남의 사인士人이거나 유훈 휘하에 있다가 손책에게 투항한 무장일 수도 있지만, 어째서 손책이 여범, 주유, 황개 등 자군의 무장 중 적절한 자를 지명하지 않고 이술을 선택한 건지는 수수께끼입니다. 혹시 조조와의 미묘한 관계 상, 손책의 수하란 게 너무나도 빤히 보이는 장수는 임명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이 후에, 이술은 조조가 파견한 양주자사揚州刺史 엄상厳象을 살해합니다. 설마 싶습니다만 처음부터 엄상을 제거하기 위한 요원이었을까요?)을 노강태수로 임명하여 환성의 수비를 맡긴 후, 즉시 군을 돌려 유훈을 추격합니다. 손책은 환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유훈이 다급히 되돌아올 것을 예측해 진작부터 손분(孫賁)과 손보(孫輔) 형제를 팽택(彭沢)에 매복시키고 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말머리를 돌려 돌아온 유훈은 손분과 손보에게 패배하지요. 진퇴양난에 빠진 유훈은 서새산에 포진하고 황조(黄祖)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황조는 아들 황사(黄射)를 서새산에 원군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손책이 서새산에서 유훈을 박살낸 다음이었습니다. 유훈은 처절하게 깨지고 겨우 수백 기만으로 조조를 바라고 달아나지요.
이리하여 손책은 유훈을 제거하고 장강(長江) 이북의 여강도 수중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장군(豫章郡)에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죠. 예장에 도사린 반란세력의 진압, 그리고 부친 손견의 원수 황조의 토벌이었습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10년만 더 살아줬어도 (한숨) 스물 다섯에 저 정도로 노련했으니 나이 더 먹었으면 대체 어떤 괴물이 됐을지 궁금해 죽겠다.
제 21장. 싸움의 종언(戦いの終焉)
어쩌면 삼국시대의 판도 전체가 뒤집혔을지 모를 허도진격계획.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황조(黄祖)는 유표군의 양주(揚州) 방면 사령관이었습니다. 하구(夏口)에 부임한 이후,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유표의 휘하였지만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군사권을 쥐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황조의 역할은 파고들 틈새만 생기면 양주를 침공하여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지요. 손책은 예장(豫章)까지 온 김에, 황조를 토벌하고 차후의 근심을 덜기 위하여 사선(沙羨)으로 진군합니다. 이를 안 황조는 유표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유표는 유호(劉虎 : 유표의 조카)와 한희(韓稀 : 남양南陽 출신의 무장)가 이끄는 장모(長矛)부대를 파견하였습니다.
황조가 제대로 맞서 싸울 의사가 있었는지는 사실상 의문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손책이요, 이 기회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으로 눈은 벌개졌지, 부하의 면면도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유훈의 원군으로 파견했던 아들 황사(黄射)는 결국 시간에 대지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 도망온 참이었습니다. 사기의 측면에서도 너무나 불리했어요. 위기감을 느꼈던지, 황조는 원군으로 파견된 유호와 한희를 선봉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후방에서 동향을 살핍니다. 이리하여 새벽에 개시된 전투는 순식간에 손책군의 압도적 우세로 흘러, 이미 오전 9시 경 선봉의 유호와 한희는 베이고 황조군은 패주합니다.
손책의 심정 같아서는 부친의 원수인 황조를 철저히 두들겨잡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손책에게는 그보다 앞서 해야만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장의 평정입니다. 먼저 우번을 예장태수 화흠(華歆)에게로 파견하여 투항을 권유합니다. 화흠으로서도 손책이 이미 한왕실의 정식 장군이자 태수가 된 이상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 순순히 투항 권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장은 그것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군이 아니었어요. 워낙 광대한 나머지 각지에 여전히 반란분자가 점재해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 예장 남부의 여릉(廬陵)에서는 동지(僮芝)가 여릉태수를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손책은 예장을 둘로 쪼개 손분(孫賁)을 예장태수로, 손보(孫輔)를 여릉태수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주유를 원호로 두어 동지를 토벌할 기회를 엿보게 하지요. 손분과 손보는 동지가 병석에 누웠다는 정보를 잡아, 주유와 더불어 단숨에 동지를 공격해 일망타진합니다. 뒤이어 예장에 산재한 종교 세력과 산월(山越)을 억누르기 위해, 한당(韓当)・장흠(蒋欽)・주태(周泰) 등을 정세가 불안정한 현의 현령으로 파견하고, 여범을 파양(鄱陽)에, 주유를 파구(巴丘)로 보내 반란 세력을 진압시켰습니다.
또한 유표를 견제하고자 태사자를 예장군 서부의 도위(都尉)로 임명하지요. 유표군의 유반(劉盤 : 유표의 조카)는 그때까지 수 차례 예장에 침공을 시도했지만, 태사자가 도위가 된 후로 수비가 견고해져 더 이상 찔러볼 수 없게 됩니다. 회계군에서는 반란 진압의 전문가인 하제(賀斉)가 반란분자를 완전히 제압했고, 단양(丹陽)과 오군(呉郡)도 황개, 정보, 주치 등이 나무랄 데 없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손책의 강동・강남 제압은 완성을 보았습니다.
그 무렵 중원에서도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지요. 유주(幽州)・기주(冀州)・청주(青州)・병주(并州)의 4개 주를 지배하는 거대세력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를 개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조조는 관도(官渡)에 필사의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원소와 조조의 싸움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손책은 이미 강동과 강남의 지배권을 다진 상태였고, 더구나 조조와의 사이에 버티고 있었던 원술은 이미 없었지요. 손책은 강동에서 천하로 비상하고자,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許都) 강습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황조가 제대로 맞서 싸울 의사가 있었는지는 사실상 의문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상대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손책이요, 이 기회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생각으로 눈은 벌개졌지, 부하의 면면도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유훈의 원군으로 파견했던 아들 황사(黄射)는 결국 시간에 대지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 도망온 참이었습니다. 사기의 측면에서도 너무나 불리했어요. 위기감을 느꼈던지, 황조는 원군으로 파견된 유호와 한희를 선봉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후방에서 동향을 살핍니다. 이리하여 새벽에 개시된 전투는 순식간에 손책군의 압도적 우세로 흘러, 이미 오전 9시 경 선봉의 유호와 한희는 베이고 황조군은 패주합니다.
손책의 심정 같아서는 부친의 원수인 황조를 철저히 두들겨잡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손책에게는 그보다 앞서 해야만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장의 평정입니다. 먼저 우번을 예장태수 화흠(華歆)에게로 파견하여 투항을 권유합니다. 화흠으로서도 손책이 이미 한왕실의 정식 장군이자 태수가 된 이상 저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 순순히 투항 권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장은 그것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군이 아니었어요. 워낙 광대한 나머지 각지에 여전히 반란분자가 점재해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 예장 남부의 여릉(廬陵)에서는 동지(僮芝)가 여릉태수를 자칭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손책은 예장을 둘로 쪼개 손분(孫賁)을 예장태수로, 손보(孫輔)를 여릉태수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주유를 원호로 두어 동지를 토벌할 기회를 엿보게 하지요. 손분과 손보는 동지가 병석에 누웠다는 정보를 잡아, 주유와 더불어 단숨에 동지를 공격해 일망타진합니다. 뒤이어 예장에 산재한 종교 세력과 산월(山越)을 억누르기 위해, 한당(韓当)・장흠(蒋欽)・주태(周泰) 등을 정세가 불안정한 현의 현령으로 파견하고, 여범을 파양(鄱陽)에, 주유를 파구(巴丘)로 보내 반란 세력을 진압시켰습니다.
또한 유표를 견제하고자 태사자를 예장군 서부의 도위(都尉)로 임명하지요. 유표군의 유반(劉盤 : 유표의 조카)는 그때까지 수 차례 예장에 침공을 시도했지만, 태사자가 도위가 된 후로 수비가 견고해져 더 이상 찔러볼 수 없게 됩니다. 회계군에서는 반란 진압의 전문가인 하제(賀斉)가 반란분자를 완전히 제압했고, 단양(丹陽)과 오군(呉郡)도 황개, 정보, 주치 등이 나무랄 데 없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비로소 손책의 강동・강남 제압은 완성을 보았습니다.
그 무렵 중원에서도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지요. 유주(幽州)・기주(冀州)・청주(青州)・병주(并州)의 4개 주를 지배하는 거대세력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를 개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조조는 관도(官渡)에 필사의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원소와 조조의 싸움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손책은 이미 강동과 강남의 지배권을 다진 상태였고, 더구나 조조와의 사이에 버티고 있었던 원술은 이미 없었지요. 손책은 강동에서 천하로 비상하고자,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許都) 강습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삼국시대의 판도 전체가 뒤집혔을지 모를 허도진격계획.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