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자~알 쉬었으므로 복귀 복귀. 모에에 몸을 맡기고 사모해 마지 않는 키요란(きよらん) 님의 행복한 충동(幸福な衝動)에서 건져온 귀엽고도 귀여운 사나다테 단편 <불건전한 연애(不謹慎な恋)>를 보내드립니다.
배째고 등 딸 각오? 쿄고쿠도의 저주 7대분? 上等だあんた! そんなのいつでも準備してるに決まってらぁ!(逆切れ)
그보다 코쥬로의 검신에 六爪独眼竜右目生涯라고 새겨져 있다는데 정말일 것인가. 정말이겠지.
(어이 캡콤!!! ;;;;;)
...and less.
도노 러브에 이어 유키유키 모에가 발작한 계기가 된 단편 중의 하나. 와~이 드디어 완료했다~ >_< (무쟈게 힘들었음;;;;)
17년 평생 처음으로 저어기 오슈 필두에게 홀라당 빠져 정신을 못 챙기는 유키유키는 정말로 귀여움. 아 이 자식 뭘 먹고 자랐으면 이리 바보처럼 귀여울 수가 있는 거냣 (데굴데굴)
뭐 그 밖에도,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우다가 우연히 날려버린 도노의 안대를 강제로 뺏어 들고 「なぜに隠すのか。…かように美しいのに」라고 생각난 바를 정직하게 말해버렸다가 육조류로 두들겨 맞는 유키유키라던가,
그늘에 숨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뻐요 꺄아♥ 라는 요즘은 사춘기 소녀도 안 할 핑크빛 사고에 젖어 있다가 놀러오라는 편지를 받고 좋은 건 둘째치고 무시무시하게 동요해 심복의 바짓자락을 물고 늘어지며 어어어어어어어어떡하지 사, 사사사사스케!!!! 라고 울기 직전의 유키유키라던가,
장난끼가 발동한 마사무네 님이 좀 곤란하게 해주려고 무시했더니 정신없이 쩔쩔매다 결국엔 도노 무릎에 고개 박고 훌쩍훌쩍 울어버리는 유키유키라던가,
귀. 여. 워....!!
제군! 나는 귀여운 攻이 좋다!!! (헐떡헐떡)
마사무네 님도 유키유키의 그런 점에 약할 거라 생각함. 누구 맘대로? 내 마음대로.
◇ 불건전한 연애
오슈공방전 이후의 낌새라던가, 문제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보이는 반응의 변화라던가. 이런 저런 요소에서 불길한 예감이 풀풀 번져나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진짜로 적중해 버린 것 같다. 가능하면 좀 빗나가 주길 원했는데 말이지.
올해 열 일곱이 되는 우리 주인은, 무얼 잘못 먹었는지 암만 봐도 독안룡이라는 양반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다. 이게 뭐 인간적으로 반했다던가 끌렸다면 좀은 구원이 있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아직 허용 범위일 텐데. 그러나 절대로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완전히 연사(戀事)의 의미로 훌떡 빠져 있는 것이다. 유키무라 님 자신이 그걸 깨닫고 있는지의 여부는 좀 미묘하지만, 혹여 자각이 없다면 이대로 영원히 눈치 못채고 넘어가 주기만을 기도할 따름이야.
하지만 상대는 '그' 독안룡이라고? 다테 마사무네라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니까.
먼저 남자라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된다. (유키무라 님은 중도에는 흥미없다구)
애시당초 여자를 상대로 하는 연애조차 안중에 없고, 머릿속에 든 건 오로지 어르신과 다케다 일문의 부흥뿐이었던 사람이었는데. 살면서 꼬박 17년 연애질과는 담 쌓았던 사람이, 어쩌다 뜬금없이 사랑에 빠져서, 더구나 그 대상은 귀엽거나 아름다운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다 심지어 독안룡이란 골때리는 사내. 어디 찍을 사람이 없어 하필 그 친구냐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게 나로서는 당연한 노릇이다.
세상엔 예쁜 여자애가 얼마든지 있다고요. 우리 주인은 콩깍지를 떼놓고 봐도 얼굴도 성격도 괜찮으니까 인기도 많은데 말야. 꺄아꺄아 황색 비명을 지르는 여자애들의 숫자도 상당하다구. 그럴 마음도 없거니와 영 사람이 둔해빠져서, 저쪽이 암만 추파를 던져도 알아먹질 못해서 그렇지.
유키무라 님이 고를 마음만 먹으면, 귀여운 여자애도 요염한 누님도, 혹은 양쪽을 모두 다 갖춘 여자도 뜻한 대로 얻을 수 있겠구먼, 거기서 왜 하필이면 독안룡이야?
그치만 무지무진장 흉악한 사내라구. 독안룡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 오슈 필두 다테 마사무네.
오슈를 침공한 우리 다케다 군에게 선두에서 반격을 가해와, 고군분투는커녕 거의 혼자 힘으로 분투해서 (정확히는 날뛰고 또 날뛰어서) 결국엔 철수하게 만들었으니까.
전장에서의 독안룡은 무시무시했어. 풍문으로 듣던 독안룡 그대로였지. 공포를 망각해 버린 것 같은 모습은 광기마저 띠고 있어서, 전쟁만 아니라면 갈데없이 광인이겠거니 여겼을 정도야. 식은땀이 흐르는 광경이었지.
그야 뭐, 우리 주인도 오십보백보긴 해. 전장에서의 유키무라 님은 말 그대로 악귀 같거든. 나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리만큼 사나워서, 까닥 잘못하면 이쪽까지 뼛조각 하나 못 남고 불타버리니까.
때문에 우리 주인과 독안룡 형씨가 격돌했을 때는 진짜로 장관이었다.
지금이니까 장관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구경거리고 나발이고 없었다. 주위의 피해는 이미 지옥의 아비규환이었기 때문에. 적군 아군 가림없이 무차별로 말려들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두 사람 다 상대 말곤 보이지도 않았던 모양이니까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처참한 비명이 진동하는 전장에서, 장본인들은 대박 즐거워 보였지만 말이야.
우리 주인은 아주 작정하고 죽일 생각이었고, 독안룡 형씨도 마찬가지였겠지. 양쪽이 다 섬뜩했어. ……제일 문제는, 서로 목숨을 걸고 맞붙는 상황에 무진장 즐거워 보였다는 거였지만, 하여간.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의 일기토는 결말을 보지 못했다. 물러날 때를 놓치지 않고 다케다 군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안심했다.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 셈이지만, 침공한 쪽이 철수했다는 걸 고려하면(정확한 판단이라고는 생각해) 일단은 패전으로 분류해야겠지. 그리 되면 우리 주인은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미숙한 자신에게 분통에 분통을 터뜨리다 반성이나 단련으로 직선 돌격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만은 그게 없었다.
패전한데다 독안룡과의 승부도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는데도 의외로 유키무라 님은 상쾌한 얼굴이었다. 독안룡의 육조(六爪)가 남긴 상처를 때때로 들여다보면서도, 분하다거나 성난다거나, 그런 감정은 조금도 없고. 뭐라 해야 하지, 그래, 무언가 다른 일에 사고를 빼앗긴 듯한 느낌이었어.
그걸 알고 나서, 어쩐지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더군.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어쩐지'였지만.
오슈공방전 이후 한동안 유키무라 님은 아주 넋을 놓고 살았어. 능동적인 우리 주인으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지. 처음에는 암만 유키무라 님이라도 피로가 쌓였겠거니, 굳이 그렇게만 생각하려 했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불길한 예감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어. 거의 다 아물어가는 상처자국을 보고 무언가 사색하는 얼굴이 되어선, 정원에 눈길을 던지면서 조그맣게 한숨을 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예감은 아마도 확신으로 변했던 건지 몰라. 하지만 그다지 베거리를 칠 속셈은 아니었어. 오히려 내 예감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바랬기 때문이었지. 불안요소는 후딱 제거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이롭잖아.
그래서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유키무라 님에게 물어보았다. 참 맞다, 독안룡 형씨한테 당한 상처는 어떻게 됐어요? 라고.
그랬더니 유키무라 님은 아주 잠깐 어안이벙벙했다가, 으음, 이젠 괜찮네, 라고 대답했다. 굉장히 보통이었다. 물어본 내 쪽이 맥이 다 빠지리만치 평범한 반응이었다. 독안룡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말문이 막히던가 얼굴이 빨개진다던가, 그런 반응을 상상했던 나는 감이 빗나간 데 놀라고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빗나갔어. 뭐야, 내 육감도 믿을 만한 게 못 되네, 라고. 조금 씁쓸하게 웃기까지 했다구.
실은 완전히 헛다리 짚었는 줄 누가 알았겠어.
유키무라 님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거고.
나는 그런 주인에게 홀라당 속아 멋대로 안심했을 뿐이었던 거고.
정세의 흐름에 따라 카이는 오슈와 동맹을 맺게 되어서, 다케다의 사자로 유키무라 님이 오슈에, 그래, 예의 다테 마사무네에게로 파견되었지. 필연적으로 나도 수행원으로 동행하게 됐고. 시노비인데도 숨지는 않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정장까지 갖추고 말야.
우리 주인은 다케다의 사자로 지명되었을 때도, 다테 일문의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도, 별반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독안룡과 정면 충돌한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다 보니, 중요한 사명을 짊어졌다는 것 이외의 이유로도 다소 긴장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묘한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는데, 말이야!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와 대면해, 바로 근처에서 얼굴을 마주한 찰나에 무언가 상황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거야.
갑주를 휘감지 않은 독안룡 형씨는 당시와는 그야말로 180도 딴판이었다.
옅은 노란색의 단정한 기모노를 차려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부터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더라니까. 그야 유키무라 님도 평상시와 전투 시가 따로 노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전쟁 때를 동(動)이라 한다면(狂이나 凶이 더욱 딱이겠지만 당장은 넘어가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정(靜)이고, 덧붙이자면 동작 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일일이 우아하기 짝이 없겠지.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우리 주인이 우아하지 못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지극히 세련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에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알아먹지 못할 괴상한 말을 외쳐대면서 사정없이 칼을 휘둘러대는 광경밖에 보지 못했던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그치만, 그게 이거라고? 사람이 바뀌었다 해도 믿겠네. 누구야 이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서, 독안룡 형씨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거기서 나는 깨닫고 말았다. 아니, 가까스로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우아한 건 동작이랑 몸짓뿐만이 아니었지 뭐겠어.
옛날 병으로 잃었다던 오른눈을 감싼 멋대가리 없는 안대를 감안하고 보아도 섬세하게 정돈된 얼굴이었다.
남은 왼쪽 눈은 위로 살짝 치켜올라가 날카로운 눈빛에 독기를 한층 더해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인이라 하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을 조형이었다. 설령 남자라 해도 말이지.
전장에서는 분명 거창한 투구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얼굴을 주시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뭐라 해야 할지, 의외라면 의외. 체격도 우리 주인보다 다소 가늘어서, 어쩌다가 전장에선 괴물로 다 보였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성대하게 한숨을 토해내고 싶어진 내 바로 앞에서, 유키무라 님이 그때 무얼 어찌 생각했을지 염두에 두기를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독안룡 형씨에게 그만 시선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탓이었어.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어.
형식을 답습한 딱딱한 인사를 교환하고 한숨 좀 돌렸을 무렵에, 오슈의 영주인 독안룡 형씨가 직접 말을 걸어왔다. 무섭게 예의를 차린 좀 전의 정중한 어조가 아니라, 좋게 말하자면 매우 편한 말투.
「어이 이봐들, 저쪽에 술상 차려놨으니까, 한 잔씩 걸치고 가」
무례하다면 무례하겠지만, 뭐 어때.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려보고, 결국엔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좋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우리 주인을 봤더니, 유키무라 님은 허공에 떠 있었다. 허공에 뜬 수준을 넘어서서 독안룡 형씨의 얼굴을 골똘히 응시한 채로 미동조차 않겠지. 어라, 어라, 이거, 일난 거 아냐? 싶어져 우리 주인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찰나에, 독안룡 형씨가 먼저 반응했다.
「……아아? 뭐야. 뭘 꼬나보고 있어?」
좀 전까지의 격식 차린 어조는 환상이었나 싶어지나 내 입장에서는 아아주 독안룡 형씨다워서 기쁘기까지 한 말을 험악하게 내뱉었다. 하긴 유키무라 님의 눈은 진지함으로 콸콸 넘쳐흐르고 있었고, 그 진지함이 도를 지나쳐 본인은 모르겠지만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가서, 옆에서 보면 꼭 싸움을 거는 꼴이긴 했어.
하지만 아니야. 아마도 절대 아니야.
아뇨, 저 말이죠, 그건요, 꼬나보는 게 아니라, 넋을 잃은 거라고요. 당신한테.
당연하지만 도저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 나는 단지 우리 주인과 독안룡 형씨를 번갈아가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주로 독안룡 형씨에게서 불온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키무라 님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도 독안룡 형씨에게 못박힌 채였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팔꿈치로 유키무라 님을 부단히 찔러봤지만 바위를 두들겨도 이보다는 반응이 있겠지 싶더라. 진짜 중증이다! 좌절하려는 찰나에 드디어 유키무라 님이 움직였다.
정확히는 입을 열었다.
「다, 다테 공……」
더듬거리는 건 고사하고 완전히 잠겨버린 목소리.
독안룡 형씨는 유키무라 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얼굴이 해볼 테냐 이 자식아, 라는 표정으로 만만이다. 역시 근본은 호전적인가 봐. 아니, 지금 그딴 거나 생각할 때냐. 어쩌지, 우리 주인이 이상해졌어. 목소리는 뒤집어졌고, 얼굴은 새빨개. 삶은 문어처럼 시뻘개. 눈동자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우와, 이거 진짜로 일났다. 몇 번째일지도 모를 일났다 일났다를 연발하면서, 나는 우선 우리 주인의 행동부터 저지하려고 했어. 본능적으로.
정말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니까.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유키무라 님은 내가 말리기 전에 다시 입을 열어버렸다. 제지할 틈조차 없었다. 그런 기세였다.
「소, 소관, 사나다 겐지로 유키무라라 합니다! 앞으로도……잘 부탁드리겠소!!!!」
어째서 이 마당에 새삼 다시 자기 소개? 내 기가 막히건 코가 막히건 우리 주인은 매우 기운찬 인사와 더불어 너무나도 기세좋게 머리를 숙였다.
「………………」
침묵이 흘렀다. 보아하니 독안룡 형씨는 어이를 상실하고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죠. 나도 이리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기는 막혔지만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사실이야. 우리 주인이 대체 뭘 저지를까 싶어 등골이 다 서늘했다구. 직선적이 지나쳐 다소 단락적이기까지 한 사람이니까, 혹여 불 붙은 감정 그대로 독안룡 형씨에게 돌격하지 않을까, 그랬다간 틀림없이 여섯 조각으로 썰릴 텐데 으아아악, 이라던가. 다행히도 유키무라 님의 행동은 생각보다 훨씬 정상적이었다. 초점은 어긋났지만.
내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이, 독안룡 형씨도 제정신을 되찾고 유키무라 님에게 그,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의외로 예의 바른 사람이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별 이상한 놈도 다 보겠다고 한 마디 중얼거렸다. 호전적인 공기는 이미 깨끗이 지워졌다. 유키무라 님의 반응이 너무 엉뚱해서 독기가 쏙 빠져버린 거겠지. 내가 다시금 정말 잘됐다고 하늘에 감사드린 건 뭐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하여간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금 독촉을 받고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준비한 술상을 지금의 유키무라 님이 거절할 리가 없겠거니 했더니 아니나다를까였다. 본인은 태연함을 가장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입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걸 어쩌겠어?
「……뭐가 그렇게 좋아서 히죽대는 거냐?」
예상대로 독안룡 형씨가 대놓고 지적하고 나서자, 유키무라 님은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그, 그렇습니까? 하고 허둥대며 반문했다. ……어쩐지 보는 내가 다 쪽팔려 죽을 것 같다. 제발 부탁이니까 유키무라 님, 조금쯤은 숨기려고 노력해 봐요. 많이는 안 바래. 요만큼이라도 좋으니 당신의 연심(恋心)을 감춰달라구 나 살리는 셈 치고.
물론 나의 혼의 절규가 우리 주인에게 전해질 리도 없어서, 앞으로의 사태를 예상하고 지끈지끈 쑤시는 관자놀이를 눌렀을 때, 일이 터졌다.
동요한 탓인지 아니면 긴장해서 꽁꽁 얼어붙은 탓인지 어쨌는지, 하여간 여태껏 단 한 번도 심각한 자리에서 발이 꼬이는 추태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랬건만 나와 독안룡 형씨의 바로 눈앞에서, 유키무라 님은 발을 삐끗해 10점 만점의 완벽한 동작으로 넘어졌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분투도 허망하게, 털푸덕 쓰러진 것이다.
―――독안룡 형씨 바로 위로.
「…………………………」
아니, 그야 노리고 한 짓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우리 주인은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고, 넘어지는 찰나에 대견하게도 독안룡 형씨를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분발했는걸) 그래도 이렇게 시의적절할 수가.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나.
「며, 면목 없소이다……!!」
독안룡 형씨 위에 엎어진 우리 주인은, 겉으로 드러난 부위란 부위는 모두 시뻘겋게 물들어선, 허둥지둥 비켜나려고 애를 썼지만 발에 쥐가 나 버려서 뜻대로도 안 되고.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 유키무라 님의 심중이 대충 짐작 간 나는 합장해주고 싶어졌지만, 다음 찰나에 그게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얏……」
가느다란 신음소리에 나는 새파랗게 질려서, 독안룡 형씨가 칼을 뽑기 전에 우선 유키무라 님부터 치우고 봐야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독안룡 형씨가 움직였다.
당황해서 면목이 없다고 열심히 열심히 되풀이하는 유키무라 님에게 손을 뻗어서, 목을 움켜쥐고 흔드나 했더니 전혀 아니었다.
이게 웬일이니. 독안룡 형씨는 그대로 유키무라 님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던 것이다!!!
「뭐야 그게!」
비명을 질러버린 내게 죄는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저마다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는지 소리쳐도 응답은 없었다. 내 말은 귀에 들어가지도 않은 게지. 독안룡 형씨가 뭔 생각으로 저 짓에 나섰는진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거, 우리 주인, 큰일날 거라구. 당장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멍하니 독안룡 형씨가 토닥여 주는 대로 머리를 내맡기고 있지만.
그만해, 제발 그만해요, 더 이상 우리 주인한테 불을 지피지 말아 줘! 마음속의 절규는 역시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직접 목소리를 내어 의문을 토로하였다.
「……저어……독안룡 형씨, 뭘 하고 계십니까?」
칼 안 뽑아? 아니, 그야 뽑아도 골치아프지만, 이 상황에서 왜 머리를 쓰다듬는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독안룡 형씨는 얼핏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이 사람, 왜 자기가 토닥거려 놓고 자기가 내가 왜 이랬지? 하는 표정이 되어 있는데. 이 사람 혹시 천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자 소용없어. 묻고 싶은 건 나라구요. 근 애걸하는 내 시선을 뭘로 해석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했는지, 독안룡 형씨는 상념의 바다에 풍덩 뛰어든 모양이었다. 위에 유키무라 님을 태운 채로. 그리고 한 박자 후에.
「아하……그런가. 이 녀석, 예전에 키웠던 개랑 닮았어」
이제야 납득 간다는 만족스러운 태도로 혼잣말 하지 말아줘요.
정말 그래? 아니 설령 진짜라고 해도, 이래도 되는 거야? 그걸로 납득해도 돼? 그래도 되는 거야, 오슈 필두? 당신 실은 천연이지?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은 유키무라 님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더니, 우리 주인은 여전히 망연자실, 좀 전과 같은 자세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독안룡 형씨의 돌발 행동으로 이미 비킬 기력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비킬 마음이 사라졌는지. 어느 쪽이냐.
있죠 유키무라 님, 개래요. 옛날 키우던 개랑 닮았대, 당신.
―――이라고 해봤자, 지금 상황에 뭔들 들리겠느냐마는.
「……………………」
알았다. 유키무라 님도 대책없지만 독안룡 형씨도 만만찮아. 옛 애완견을 닮았건 안 닮았건, 이 상황에 그 대응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두들겨패서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편이 차라리 정신 건강엔 이로웠어. 당신 위에 올라탄 그거, 요전까지 적장이었던 사람이라고? 서로 죽고 죽였던 상대라고? ……거기서 나는 문득 유키무라 님을 떠올렸다.
우리 주인은 그런 상대에게 홀딱 반해버린 인간이었다.
「……에, 에─또……」
그런가. 닮은 건가, 두 사람. 의심할 여지 없이. 우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거 말예요 유키무라 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어이구 참 잘됐네요 유키무라 님(국어책 낭독).
힘없이 중얼대는 내 눈앞에서, 독안룡 형씨와 유키무라 님은 아직도 들러붙어 있었다.
일련의 사건에 뼛속까지 지친 나는, 이후는 젊은 사람들끼리 느긋하게 잘해보라고, 무례를 각오하고 먼저 토끼기로 작심했다. 에라이 아무렴 어떠냐, 니들 맘대로 놀아보쇼.
스윽 몸을 일으킨 나를 독안룡 형씨가 반사적으로 바라보았다.
있잖아요 오슈 필두. 유키무라 님은 이제껏 연애질과는 담 쌓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는 아니거든. 순진하지도 않고. 지금은 완전히 사랑에 폭 빠진 남자겠다, 상황은 차려놓은 밥상이겠다, 홀랑 먹혀도 난 책임 못 져요.
단정한 얼굴을 향해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만 단숨에 늘어놓고.
어이 시노비, 이놈 치우는 거 거들어! 아직 무엇 하나 눈치채지 못한 목소리를 깨끗이 씹고, 나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증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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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4.
17세×19세라니 이 얼마나 군침도는 설정인가!! 새삼 기쁨을 곱씹으며 충동을 그대로 쏟아부었습니다.
(이야기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요!! ;;)
도중에 사스케→마사무네가 되면 좀 좋을지도.. 하고 생각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사나다테 러브!?
오슈공방전 이후의 낌새라던가, 문제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보이는 반응의 변화라던가. 이런 저런 요소에서 불길한 예감이 풀풀 번져나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진짜로 적중해 버린 것 같다. 가능하면 좀 빗나가 주길 원했는데 말이지.
올해 열 일곱이 되는 우리 주인은, 무얼 잘못 먹었는지 암만 봐도 독안룡이라는 양반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다. 이게 뭐 인간적으로 반했다던가 끌렸다면 좀은 구원이 있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아직 허용 범위일 텐데. 그러나 절대로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완전히 연사(戀事)의 의미로 훌떡 빠져 있는 것이다. 유키무라 님 자신이 그걸 깨닫고 있는지의 여부는 좀 미묘하지만, 혹여 자각이 없다면 이대로 영원히 눈치 못채고 넘어가 주기만을 기도할 따름이야.
하지만 상대는 '그' 독안룡이라고? 다테 마사무네라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니까.
먼저 남자라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된다. (유키무라 님은 중도에는 흥미없다구)
애시당초 여자를 상대로 하는 연애조차 안중에 없고, 머릿속에 든 건 오로지 어르신과 다케다 일문의 부흥뿐이었던 사람이었는데. 살면서 꼬박 17년 연애질과는 담 쌓았던 사람이, 어쩌다 뜬금없이 사랑에 빠져서, 더구나 그 대상은 귀엽거나 아름다운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다 심지어 독안룡이란 골때리는 사내. 어디 찍을 사람이 없어 하필 그 친구냐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게 나로서는 당연한 노릇이다.
세상엔 예쁜 여자애가 얼마든지 있다고요. 우리 주인은 콩깍지를 떼놓고 봐도 얼굴도 성격도 괜찮으니까 인기도 많은데 말야. 꺄아꺄아 황색 비명을 지르는 여자애들의 숫자도 상당하다구. 그럴 마음도 없거니와 영 사람이 둔해빠져서, 저쪽이 암만 추파를 던져도 알아먹질 못해서 그렇지.
유키무라 님이 고를 마음만 먹으면, 귀여운 여자애도 요염한 누님도, 혹은 양쪽을 모두 다 갖춘 여자도 뜻한 대로 얻을 수 있겠구먼, 거기서 왜 하필이면 독안룡이야?
그치만 무지무진장 흉악한 사내라구. 독안룡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 오슈 필두 다테 마사무네.
오슈를 침공한 우리 다케다 군에게 선두에서 반격을 가해와, 고군분투는커녕 거의 혼자 힘으로 분투해서 (정확히는 날뛰고 또 날뛰어서) 결국엔 철수하게 만들었으니까.
전장에서의 독안룡은 무시무시했어. 풍문으로 듣던 독안룡 그대로였지. 공포를 망각해 버린 것 같은 모습은 광기마저 띠고 있어서, 전쟁만 아니라면 갈데없이 광인이겠거니 여겼을 정도야. 식은땀이 흐르는 광경이었지.
그야 뭐, 우리 주인도 오십보백보긴 해. 전장에서의 유키무라 님은 말 그대로 악귀 같거든. 나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리만큼 사나워서, 까닥 잘못하면 이쪽까지 뼛조각 하나 못 남고 불타버리니까.
때문에 우리 주인과 독안룡 형씨가 격돌했을 때는 진짜로 장관이었다.
지금이니까 장관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구경거리고 나발이고 없었다. 주위의 피해는 이미 지옥의 아비규환이었기 때문에. 적군 아군 가림없이 무차별로 말려들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두 사람 다 상대 말곤 보이지도 않았던 모양이니까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처참한 비명이 진동하는 전장에서, 장본인들은 대박 즐거워 보였지만 말이야.
우리 주인은 아주 작정하고 죽일 생각이었고, 독안룡 형씨도 마찬가지였겠지. 양쪽이 다 섬뜩했어. ……제일 문제는, 서로 목숨을 걸고 맞붙는 상황에 무진장 즐거워 보였다는 거였지만, 하여간.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사람의 일기토는 결말을 보지 못했다. 물러날 때를 놓치지 않고 다케다 군이 철수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안심했다.
전투는 무승부로 끝난 셈이지만, 침공한 쪽이 철수했다는 걸 고려하면(정확한 판단이라고는 생각해) 일단은 패전으로 분류해야겠지. 그리 되면 우리 주인은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미숙한 자신에게 분통에 분통을 터뜨리다 반성이나 단련으로 직선 돌격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만은 그게 없었다.
패전한데다 독안룡과의 승부도 어정쩡하게 끝나버렸는데도 의외로 유키무라 님은 상쾌한 얼굴이었다. 독안룡의 육조(六爪)가 남긴 상처를 때때로 들여다보면서도, 분하다거나 성난다거나, 그런 감정은 조금도 없고. 뭐라 해야 하지, 그래, 무언가 다른 일에 사고를 빼앗긴 듯한 느낌이었어.
그걸 알고 나서, 어쩐지 일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더군.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어쩐지'였지만.
오슈공방전 이후 한동안 유키무라 님은 아주 넋을 놓고 살았어. 능동적인 우리 주인으로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었지. 처음에는 암만 유키무라 님이라도 피로가 쌓였겠거니, 굳이 그렇게만 생각하려 했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불길한 예감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어. 거의 다 아물어가는 상처자국을 보고 무언가 사색하는 얼굴이 되어선, 정원에 눈길을 던지면서 조그맣게 한숨을 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예감은 아마도 확신으로 변했던 건지 몰라. 하지만 그다지 베거리를 칠 속셈은 아니었어. 오히려 내 예감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바랬기 때문이었지. 불안요소는 후딱 제거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도 이롭잖아.
그래서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유키무라 님에게 물어보았다. 참 맞다, 독안룡 형씨한테 당한 상처는 어떻게 됐어요? 라고.
그랬더니 유키무라 님은 아주 잠깐 어안이벙벙했다가, 으음, 이젠 괜찮네, 라고 대답했다. 굉장히 보통이었다. 물어본 내 쪽이 맥이 다 빠지리만치 평범한 반응이었다. 독안룡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말문이 막히던가 얼굴이 빨개진다던가, 그런 반응을 상상했던 나는 감이 빗나간 데 놀라고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다행이다. 빗나갔어. 뭐야, 내 육감도 믿을 만한 게 못 되네, 라고. 조금 씁쓸하게 웃기까지 했다구.
실은 완전히 헛다리 짚었는 줄 누가 알았겠어.
유키무라 님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거고.
나는 그런 주인에게 홀라당 속아 멋대로 안심했을 뿐이었던 거고.
정세의 흐름에 따라 카이는 오슈와 동맹을 맺게 되어서, 다케다의 사자로 유키무라 님이 오슈에, 그래, 예의 다테 마사무네에게로 파견되었지. 필연적으로 나도 수행원으로 동행하게 됐고. 시노비인데도 숨지는 않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정장까지 갖추고 말야.
우리 주인은 다케다의 사자로 지명되었을 때도, 다테 일문의 저택에 발을 들였을 때도, 별반 이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독안룡과 정면 충돌한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다 보니, 중요한 사명을 짊어졌다는 것 이외의 이유로도 다소 긴장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묘한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는데, 말이야!
독안룡 다테 마사무네와 대면해, 바로 근처에서 얼굴을 마주한 찰나에 무언가 상황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거야.
갑주를 휘감지 않은 독안룡 형씨는 당시와는 그야말로 180도 딴판이었다.
옅은 노란색의 단정한 기모노를 차려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부터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더라니까. 그야 유키무라 님도 평상시와 전투 시가 따로 노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전쟁 때를 동(動)이라 한다면(狂이나 凶이 더욱 딱이겠지만 당장은 넘어가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정(靜)이고, 덧붙이자면 동작 하나 몸짓 하나하나가 일일이 우아하기 짝이 없겠지.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우리 주인이 우아하지 못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지만,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래,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지극히 세련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에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알아먹지 못할 괴상한 말을 외쳐대면서 사정없이 칼을 휘둘러대는 광경밖에 보지 못했던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그치만, 그게 이거라고? 사람이 바뀌었다 해도 믿겠네. 누구야 이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서, 독안룡 형씨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거기서 나는 깨닫고 말았다. 아니, 가까스로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우아한 건 동작이랑 몸짓뿐만이 아니었지 뭐겠어.
옛날 병으로 잃었다던 오른눈을 감싼 멋대가리 없는 안대를 감안하고 보아도 섬세하게 정돈된 얼굴이었다.
남은 왼쪽 눈은 위로 살짝 치켜올라가 날카로운 눈빛에 독기를 한층 더해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인이라 하기에 한 점 부족함이 없을 조형이었다. 설령 남자라 해도 말이지.
전장에서는 분명 거창한 투구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얼굴을 주시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뭐라 해야 할지, 의외라면 의외. 체격도 우리 주인보다 다소 가늘어서, 어쩌다가 전장에선 괴물로 다 보였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성대하게 한숨을 토해내고 싶어진 내 바로 앞에서, 유키무라 님이 그때 무얼 어찌 생각했을지 염두에 두기를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독안룡 형씨에게 그만 시선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탓이었어.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어.
형식을 답습한 딱딱한 인사를 교환하고 한숨 좀 돌렸을 무렵에, 오슈의 영주인 독안룡 형씨가 직접 말을 걸어왔다. 무섭게 예의를 차린 좀 전의 정중한 어조가 아니라, 좋게 말하자면 매우 편한 말투.
「어이 이봐들, 저쪽에 술상 차려놨으니까, 한 잔씩 걸치고 가」
무례하다면 무례하겠지만, 뭐 어때.
여러 가지로 머리를 굴려보고, 결국엔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좋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우리 주인을 봤더니, 유키무라 님은 허공에 떠 있었다. 허공에 뜬 수준을 넘어서서 독안룡 형씨의 얼굴을 골똘히 응시한 채로 미동조차 않겠지. 어라, 어라, 이거, 일난 거 아냐? 싶어져 우리 주인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찰나에, 독안룡 형씨가 먼저 반응했다.
「……아아? 뭐야. 뭘 꼬나보고 있어?」
좀 전까지의 격식 차린 어조는 환상이었나 싶어지나 내 입장에서는 아아주 독안룡 형씨다워서 기쁘기까지 한 말을 험악하게 내뱉었다. 하긴 유키무라 님의 눈은 진지함으로 콸콸 넘쳐흐르고 있었고, 그 진지함이 도를 지나쳐 본인은 모르겠지만 눈꼬리가 살짝 치켜올라가서, 옆에서 보면 꼭 싸움을 거는 꼴이긴 했어.
하지만 아니야. 아마도 절대 아니야.
아뇨, 저 말이죠, 그건요, 꼬나보는 게 아니라, 넋을 잃은 거라고요. 당신한테.
당연하지만 도저히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 나는 단지 우리 주인과 독안룡 형씨를 번갈아가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주로 독안룡 형씨에게서 불온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키무라 님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도 독안룡 형씨에게 못박힌 채였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팔꿈치로 유키무라 님을 부단히 찔러봤지만 바위를 두들겨도 이보다는 반응이 있겠지 싶더라. 진짜 중증이다! 좌절하려는 찰나에 드디어 유키무라 님이 움직였다.
정확히는 입을 열었다.
「다, 다테 공……」
더듬거리는 건 고사하고 완전히 잠겨버린 목소리.
독안룡 형씨는 유키무라 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얼굴이 해볼 테냐 이 자식아, 라는 표정으로 만만이다. 역시 근본은 호전적인가 봐. 아니, 지금 그딴 거나 생각할 때냐. 어쩌지, 우리 주인이 이상해졌어. 목소리는 뒤집어졌고, 얼굴은 새빨개. 삶은 문어처럼 시뻘개. 눈동자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우와, 이거 진짜로 일났다. 몇 번째일지도 모를 일났다 일났다를 연발하면서, 나는 우선 우리 주인의 행동부터 저지하려고 했어. 본능적으로.
정말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니까.
남의 타는 속도 모르고 유키무라 님은 내가 말리기 전에 다시 입을 열어버렸다. 제지할 틈조차 없었다. 그런 기세였다.
「소, 소관, 사나다 겐지로 유키무라라 합니다! 앞으로도……잘 부탁드리겠소!!!!」
어째서 이 마당에 새삼 다시 자기 소개? 내 기가 막히건 코가 막히건 우리 주인은 매우 기운찬 인사와 더불어 너무나도 기세좋게 머리를 숙였다.
「………………」
침묵이 흘렀다. 보아하니 독안룡 형씨는 어이를 상실하고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죠. 나도 이리 흘러갈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기는 막혔지만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사실이야. 우리 주인이 대체 뭘 저지를까 싶어 등골이 다 서늘했다구. 직선적이 지나쳐 다소 단락적이기까지 한 사람이니까, 혹여 불 붙은 감정 그대로 독안룡 형씨에게 돌격하지 않을까, 그랬다간 틀림없이 여섯 조각으로 썰릴 텐데 으아아악, 이라던가. 다행히도 유키무라 님의 행동은 생각보다 훨씬 정상적이었다. 초점은 어긋났지만.
내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는 사이, 독안룡 형씨도 제정신을 되찾고 유키무라 님에게 그,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의외로 예의 바른 사람이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별 이상한 놈도 다 보겠다고 한 마디 중얼거렸다. 호전적인 공기는 이미 깨끗이 지워졌다. 유키무라 님의 반응이 너무 엉뚱해서 독기가 쏙 빠져버린 거겠지. 내가 다시금 정말 잘됐다고 하늘에 감사드린 건 뭐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하여간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금 독촉을 받고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준비한 술상을 지금의 유키무라 님이 거절할 리가 없겠거니 했더니 아니나다를까였다. 본인은 태연함을 가장했다고 믿는 모양이지만, 입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걸 어쩌겠어?
「……뭐가 그렇게 좋아서 히죽대는 거냐?」
예상대로 독안룡 형씨가 대놓고 지적하고 나서자, 유키무라 님은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그, 그렇습니까? 하고 허둥대며 반문했다. ……어쩐지 보는 내가 다 쪽팔려 죽을 것 같다. 제발 부탁이니까 유키무라 님, 조금쯤은 숨기려고 노력해 봐요. 많이는 안 바래. 요만큼이라도 좋으니 당신의 연심(恋心)을 감춰달라구 나 살리는 셈 치고.
물론 나의 혼의 절규가 우리 주인에게 전해질 리도 없어서, 앞으로의 사태를 예상하고 지끈지끈 쑤시는 관자놀이를 눌렀을 때, 일이 터졌다.
동요한 탓인지 아니면 긴장해서 꽁꽁 얼어붙은 탓인지 어쨌는지, 하여간 여태껏 단 한 번도 심각한 자리에서 발이 꼬이는 추태를 보인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그랬건만 나와 독안룡 형씨의 바로 눈앞에서, 유키무라 님은 발을 삐끗해 10점 만점의 완벽한 동작으로 넘어졌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분투도 허망하게, 털푸덕 쓰러진 것이다.
―――독안룡 형씨 바로 위로.
「…………………………」
아니, 그야 노리고 한 짓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우리 주인은 거기까지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고, 넘어지는 찰나에 대견하게도 독안룡 형씨를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분발했는걸) 그래도 이렇게 시의적절할 수가.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나.
「며, 면목 없소이다……!!」
독안룡 형씨 위에 엎어진 우리 주인은, 겉으로 드러난 부위란 부위는 모두 시뻘겋게 물들어선, 허둥지둥 비켜나려고 애를 썼지만 발에 쥐가 나 버려서 뜻대로도 안 되고.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져 버린 유키무라 님의 심중이 대충 짐작 간 나는 합장해주고 싶어졌지만, 다음 찰나에 그게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얏……」
가느다란 신음소리에 나는 새파랗게 질려서, 독안룡 형씨가 칼을 뽑기 전에 우선 유키무라 님부터 치우고 봐야겠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독안룡 형씨가 움직였다.
당황해서 면목이 없다고 열심히 열심히 되풀이하는 유키무라 님에게 손을 뻗어서, 목을 움켜쥐고 흔드나 했더니 전혀 아니었다.
이게 웬일이니. 독안룡 형씨는 그대로 유키무라 님의 머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던 것이다!!!
「뭐야 그게!」
비명을 질러버린 내게 죄는 없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저마다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는지 소리쳐도 응답은 없었다. 내 말은 귀에 들어가지도 않은 게지. 독안룡 형씨가 뭔 생각으로 저 짓에 나섰는진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거, 우리 주인, 큰일날 거라구. 당장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멍하니 독안룡 형씨가 토닥여 주는 대로 머리를 내맡기고 있지만.
그만해, 제발 그만해요, 더 이상 우리 주인한테 불을 지피지 말아 줘! 마음속의 절규는 역시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직접 목소리를 내어 의문을 토로하였다.
「……저어……독안룡 형씨, 뭘 하고 계십니까?」
칼 안 뽑아? 아니, 그야 뽑아도 골치아프지만, 이 상황에서 왜 머리를 쓰다듬는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독안룡 형씨는 얼핏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이 사람, 왜 자기가 토닥거려 놓고 자기가 내가 왜 이랬지? 하는 표정이 되어 있는데. 이 사람 혹시 천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자 소용없어. 묻고 싶은 건 나라구요. 근 애걸하는 내 시선을 뭘로 해석했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도 안 했는지, 독안룡 형씨는 상념의 바다에 풍덩 뛰어든 모양이었다. 위에 유키무라 님을 태운 채로. 그리고 한 박자 후에.
「아하……그런가. 이 녀석, 예전에 키웠던 개랑 닮았어」
이제야 납득 간다는 만족스러운 태도로 혼잣말 하지 말아줘요.
정말 그래? 아니 설령 진짜라고 해도, 이래도 되는 거야? 그걸로 납득해도 돼? 그래도 되는 거야, 오슈 필두? 당신 실은 천연이지?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은 유키무라 님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더니, 우리 주인은 여전히 망연자실, 좀 전과 같은 자세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독안룡 형씨의 돌발 행동으로 이미 비킬 기력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비킬 마음이 사라졌는지. 어느 쪽이냐.
있죠 유키무라 님, 개래요. 옛날 키우던 개랑 닮았대, 당신.
―――이라고 해봤자, 지금 상황에 뭔들 들리겠느냐마는.
「……………………」
알았다. 유키무라 님도 대책없지만 독안룡 형씨도 만만찮아. 옛 애완견을 닮았건 안 닮았건, 이 상황에 그 대응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두들겨패서 바깥으로 집어던지는 편이 차라리 정신 건강엔 이로웠어. 당신 위에 올라탄 그거, 요전까지 적장이었던 사람이라고? 서로 죽고 죽였던 상대라고? ……거기서 나는 문득 유키무라 님을 떠올렸다.
우리 주인은 그런 상대에게 홀딱 반해버린 인간이었다.
「……에, 에─또……」
그런가. 닮은 건가, 두 사람. 의심할 여지 없이. 우선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거 말예요 유키무라 님,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어이구 참 잘됐네요 유키무라 님(국어책 낭독).
힘없이 중얼대는 내 눈앞에서, 독안룡 형씨와 유키무라 님은 아직도 들러붙어 있었다.
일련의 사건에 뼛속까지 지친 나는, 이후는 젊은 사람들끼리 느긋하게 잘해보라고, 무례를 각오하고 먼저 토끼기로 작심했다. 에라이 아무렴 어떠냐, 니들 맘대로 놀아보쇼.
스윽 몸을 일으킨 나를 독안룡 형씨가 반사적으로 바라보았다.
있잖아요 오슈 필두. 유키무라 님은 이제껏 연애질과는 담 쌓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어린애는 아니거든. 순진하지도 않고. 지금은 완전히 사랑에 폭 빠진 남자겠다, 상황은 차려놓은 밥상이겠다, 홀랑 먹혀도 난 책임 못 져요.
단정한 얼굴을 향해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만 단숨에 늘어놓고.
어이 시노비, 이놈 치우는 거 거들어! 아직 무엇 하나 눈치채지 못한 목소리를 깨끗이 씹고, 나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증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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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4.
17세×19세라니 이 얼마나 군침도는 설정인가!! 새삼 기쁨을 곱씹으며 충동을 그대로 쏟아부었습니다.
(이야기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요!! ;;)
도중에 사스케→마사무네가 되면 좀 좋을지도.. 하고 생각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사나다테 러브!?
도노 러브에 이어 유키유키 모에가 발작한 계기가 된 단편 중의 하나. 와~이 드디어 완료했다~ >_< (무쟈게 힘들었음;;;;)
17년 평생 처음으로 저어기 오슈 필두에게 홀라당 빠져 정신을 못 챙기는 유키유키는 정말로 귀여움. 아 이 자식 뭘 먹고 자랐으면 이리 바보처럼 귀여울 수가 있는 거냣 (데굴데굴)
뭐 그 밖에도,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우다가 우연히 날려버린 도노의 안대를 강제로 뺏어 들고 「なぜに隠すのか。…かように美しいのに」라고 생각난 바를 정직하게 말해버렸다가 육조류로 두들겨 맞는 유키유키라던가,
그늘에 숨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뻐요 꺄아♥ 라는 요즘은 사춘기 소녀도 안 할 핑크빛 사고에 젖어 있다가 놀러오라는 편지를 받고 좋은 건 둘째치고 무시무시하게 동요해 심복의 바짓자락을 물고 늘어지며 어어어어어어어어떡하지 사, 사사사사스케!!!! 라고 울기 직전의 유키유키라던가,
장난끼가 발동한 마사무네 님이 좀 곤란하게 해주려고 무시했더니 정신없이 쩔쩔매다 결국엔 도노 무릎에 고개 박고 훌쩍훌쩍 울어버리는 유키유키라던가,
귀. 여. 워....!!
제군! 나는 귀여운 攻이 좋다!!! (헐떡헐떡)
마사무네 님도 유키유키의 그런 점에 약할 거라 생각함. 누구 맘대로? 내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