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對極).

불타는 전국의 밤 | 2006/10/04 11:29

이하, 지벨 님의 포스팅을 읽고 피를 한 바가지 토한 후 벌떡 일어나서 예전에 쓰다 치워둔 글을 창고에서 끄집어내 제정신이 아닌 머리로 미친듯이 갈겨쓴 잡문. 이래서 당신이 저의 뮤즈 님이신 겁니다. 아 정말 메신저는 언제 부활하시나요오오오오오오 T.T
논리의 비약과 중언부언에 대해선 아무런 쯧코미도 받지 않겠음. 폭주글이 다 그렇지 뭐;


사실을 자백하자면 실제의 다테 마사무네와 사나다 유키무라는 이렇다 할 만한 접점이란 게 없다. 뭐 교토 후시미(伏見)의 사나다 저택이 다테 일문의 저택과 이웃이었다던가(..) 유키무라와 1대 코쥬로(카게쯔나)가 지인이었다던가 2대 코쥬로(시게나가)의 측실이 유키무라의 셋째 딸이라던가 뒷이야기는 많고 모님 왈 일반인과 시작부터 스케일이 다른 센다이 사나다 일문(...)에 이르러선 썩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지만 하여간 다 치워놓고 생전에는 오사카 성 공방전 중 혼다(誉田) 전투에서 사나다 대가 다테의 철포기마부대를 격퇴했다, 뭐 그 정도인 줄로 알고 있음. (유키유키 주제에, 라고 내심 크르렁댔다는 건 절대 비밀이다;;; 그 유키가 아니라고 이 인간아...;)

그런데, 내가 전국물이란 전국물은 몽땅 들입다 파댄 것도 아니고 최근에 발가락 끝만 살짝 담궈본 주제이니 단언은 불가능하지만, 어째 접점이 뒷구멍으로만 있는 것치곤 이상하게 전국시대를 굴리는 창작자들은 이 둘을 어떻게든 얽어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한 마디로 사나다가 나오면 다테가 등장하고 다테가 졸랑대면 사나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어째서;
다 필요없으니까 골치아픈 건 절로 쭈우욱 밀어두고 세간의 전국 소재 3대 게임만 봐도 일목요연함. 政宗「殿」가 뜬금없이 政宗「様」가 되어 정신을 반 놓고 구경하던 나를 경악시키고 일종의 상호 리스펙트 관계를 보여주더만 종국엔 유키무라가 마사무네 님의 운명의 기로에 선 옴므파탈(....)이 되어버린 (오사카 공방전 무비의 유키무라가 오죽 가련하면 세상에선 마사무네 님의 눈에 필터가 끼였다고들 수군댑디다;) 전국무쌍 2는 아직 귀여운 수준이며, 프로모션 무비에서 이유도 없이 사정도 없이 사나다와 다테의 일기토를 내보내더니 유키무라가 도노의 스토커로 화하여(...) 다테 마사무네 편을 플레이하던 전국의 동인녀들을 이젠 사나다 따위 보고 싶지도 않다며 울부짖게 하였던 천하인도 만만치 않고, 아예 다테 마사무네와 사나다 유키무라를 더블 주인공으로 내세워 때아닌 필생의 라이벌 딱지까지 쩔꺼덕 붙여줘 버린 BASARA에 이르러선 더 할 말도 없다. 내가 왜 이 지경이 됐는데 -_-

이유는 간단하다. 이 두 사람이, 니네들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이냐고 캐묻고 싶어지는 완벽한 대극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약간 얘기가 좀 빗나가지만, 최후의 창홍일기토가 어떻게 결말이 날진 사나다테-다테사나 동인녀들의 끝없는 입담거리고 그쪽 계열에서 한 번도 안 다뤄보고 넘어간 사람은 거의 전무한데, 동인계에서의 선택지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랄까 원래 넷밖에 없잖아 선택지!!

1. 마사무네 님이 살아남는다.
2. 유키유키가 살아남는다.
3. 둘 다 살아남는다.
4. 둘 다 죽는다.

4번이 많은 건 소녀의 꿈으로 이해하고(...) 2번이 많은 건 내가 사나다테 사이트만 미친듯이 돈 까닭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1번을 강력하게 추진함.
이건 내가 도노 팬이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의 마사무네 님은 어떤 상황 어떤 궁지에서도 끈덕지게 살아남은 사람이기 때문임. 도요토미에게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개기고도 살아남았고(심지어는 총애까지 받았음. 그거 총애 맞다. 딴 놈 같았으면 태합한테 그따구로 개긴 순간에 모가지가 날아도 백 번은 날았다;) 도요토미가 저물고 도쿠가와가 새로운 패자로 부상했을 때도 그 수많은 전국 무장들 중에서 끝까지 혼자 살아남아 3대에 걸쳐 신뢰와 총애를 받고 뒤에 느지막히 들어온 주제에 도쿠가와 제일의 중신으로 부상했으니 실로 목숨줄은 고래심줄보다도 질기다 하겠다. 이와는 달리 사나다 유키무라는 내가 엄청 즐겨쓰는 표현을 백한 번째로 빌자면 '전국시대 최후의 무대에서 마치 벚꽃이 지듯 극적으로 져 버린' 무장이므로, 그야말로 절정의 순간에 화려하게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니까 답은 1번.

다테 마사무네는 이것저것 다 때려치고 그냥 확 죽고 싶어도 도저히 죽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도노는 무수한 희생과 눈물과 피 위에서 다테 일문의 정점에 군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건 전국 시대 어느 다이묘도 치러야 했던 홍역이었겠지만 20년이나 늦게 지방 촌구석에서 태어났으면서 쓸데없이 너무 잘나게 타고난 죄로 유독 잃고 희생해야 하는 게 많았다. 아버지는 유괴범들과 함께 사살했고 동생은 직접 베었고 어머니와는 진작부터 틀어졌고 예의 독살 사건과 연루해서 애처 메고히메 눈에서도 어지간히 피눈물을 뽑아야 했다고 들었다. 그 애처가 처음으로 안겨준 이로하히메는 첫 남편이자 마지막 남편인 타다테루(忠輝 : 이에야스의 여섯 번째 아들)의 입지가 위험해지자 강제로 이혼시켜야만 했다던가. 그 중에서도 최대의 키워드는 아버지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다테 마사무네>를 보면, 마사무네 님은 이름은 까먹었지만(...) 뭔가 어마어마한 고승의 환생이라 해서 태어나기도 전부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가업을 상속한 것이 불과 열 아홉 살 때였음을 상기하면 부친 테루무네가 얼마나 도노를 아끼고 장래를 기대했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장남에 대한 애착과 기대가 컸기 때문에야말로 누가 뭐라 들고 일어나고 누가 척안을 걸고 넘어져도 마사무네 님을 후계자로 밀 수 있었으리라. 나는 테루무네 씨가 요시쯔구에게 유괴되었을 때 아들을 향해 주저없이 발포하라고 부르짖었으리라 믿는다. 마사무네 님은 그토록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어주었던 아버지의 피를 뒤집어썼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노는 이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게 됐다. 양 어깨에 수많은 가신과 백성들과 데려오지 못한 시체들이 모두 올라앉은 건 어느 영주나 마찬가지이나 마사무네 님의 발 밑에는 아버지의 주검이 있다. (그리고 역시 희생된 동생의 목과 어머니의 저주가 있다) 이 사람은 하타케야마 요시쯔구의 사건이 터진 바로 그 순간에,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무슨 대가를 치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테 일문을 존속시켜야 할 의무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만 것이다. 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하지 않았던 죄로, 죽으나 사나 사람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된 저어기 어딘가의 빈한한 거미 총각과 마찬가지임. 그게 존재 가치고 의의이기 때문에 도망가려 해도 갈 수가 없고 함부로 목숨을 내걸기도 불가능하다. 이를 갈면서도 코쥬로의 말을 좇아 히데요시에게 무릎을 꿇었고 뒤로 별 소리를 다 들어가면서 결국 이에야스와 손을 잡은 건 그런 까닭이리라. 한 마디로 어딘가 전국무쌍 2의 인의 트리오처럼 뱃속 편하게 충의와 신념만 따라갈 형편은 애초에 꿈도 꾸질 못한다. (거기 나오에 카네쯔구 씨, 당신 나랑 면담 좀 하지 않으련? -_-)
즉 잃은 게 너무나 많아서 그 잃은 것의 무게만큼 필사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

속단이라면 변명할 말은 한 개도 없지만 반대로 사나다 유키무라는 스스로의 신념 말고는 짊어져야 할 게 없었던 사람이라 생각한다. 알다시피 그의 진짜 휘(諱)는 노부시게(信繁). 다케다 노부시게의 사람됨에 감명을 받아 차남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고 하면 참 듣기는 좋고 사나다 일문이라고 유키(幸) 돌림자로 도배질이 된 건 아니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형님 사이에서 혼자 붕 떠 있는 그를 보면 친모의 신분이 너무 비천해 장남 인정을 못 받았다는 설이 납득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10대 시절은 줄곧 인질 생활이었고 원복 이후로는 노부유키의 카게무샤(影武者)로써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형님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아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다는 말을 들으면 심증이 더더욱 굳어진다. 좀 심하게 말해 사나다 일문에게 있어 유키무라는 일종의 쓸모 많은 장기말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바보변태 유키유키가 하도 강렬해서 까먹기 쉽지만 사나다 일문은 원래 군사 가계고 사나다 유키무라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지장(智將)이다. 그런 사람이 도요토미는 침몰하는 배요 시대의 흐름은 이미 이에야스에게 향했음을 어찌 몰랐겠는가. 그런데도 그 침몰하는 배를 최후의 최후까지 붙들고 같이 가라앉았다. 아버지 마사유키는 오사카 성 공방전보다 3년 전에 사망했고 사나다 일문을 계승했고 번영시켜야 할 책임을 진 장남 노부유키는 이제 새 시대의 패자로 군림할 이에야스의 밑에 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을 처자는 은근슬쩍 장래가 기대되는 다테 가문에 전부 떠넘겨 버렸다. (생각해 보면 참 희한한 이야기다. 노부유키가 이에야스에게 출사한 거야 그렇다 쳐도 왜 하필 세키가하라에서 함께 했던 우에스기도 시마즈도 아닌, 한편이었던 적이 거의 없고 도쿠가와의 중진으로 부상하고 있는 다테 가문이었을지) 그가 끝까지 소위 신념이란 걸 관철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제반 사정도 있었으리라 본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릴 문제는 모두 그의 손을 떠났으니 더 이상 미련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도요토미 측이 제아무리 벼랑 끝에 몰려 있었던들 도쿠가와 본진 돌격은 제정신으로 생각해낼 수 있는 작전이 아니다. 그것도 무려 세 번씩이나.
즉 가진 게 없어서 묶여야 할 것도 없는 사람.

언젠가도 말했지만 다테 마사무네와 사나다 유키무라는 같은 1567년 생이다. 나이가 같은 전국시대 최후의 살아남은 무장과 전국시대 최후에 스러진 무장. 치사해도 이 악물고 살아야 하는 사람과 언제든지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사람. 굳이 창홍 레테르 붙여줄 필요도 없이 그들은 이미 존재 자체가 대극임. 그야말로 역사 로망. 누가 짠 거냐.

정곡을 퍽 찌른 지벨 님의 말씀마따나 BASARA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용하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등에 짊어진 것을 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고, 편해지자고 죽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발을 질질 끌면서 그래도 살아남는 사람과 자기 자신 외에 지탱해야 할 것은 충의 하나뿐인 어디까지고 가벼운 발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의 차이'. 아무리 BASARA의 존재 의의가 바보 네타 게임이라 할지언정 이게 바로 다테 마사무네와 사나다 유키무라의 이름을 단 자들이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인 셈이다. 아 이런 데서만 사실(史實)에 충실해도 아주 곤란한데;;; (주종을 사랑하시는 분이 창홍의 로망까지 그렇게 잘 이해하시면... 나쁩니다)

그런데 이러다 진짜 사나다 유키무라 팬(유키유키 말고;)이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 난 평지풍파를 이기고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타입에도 약하지만 이런 일종의 자기파멸형에도 약하단 말야... orz 혹시 이케나미 쇼타로의 사나다 태평기 읽어봐야 합니까!? 열두 권이란 말이에요!!!? ;;;


덤 하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인상적인 팬픽에서 다케다와 다테가 천하를 놓고 최종적으로 격돌하게 되었을 때 사스케에게 이겨도 져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출진하는 유키무라는 정말로 짠했다. 패배하면 당연히 죽는 거고, 이기면 그 시점에서 신겐 공의 비원을 이루었으므로 유키무라는 홀가분하게 뒤돌아보는 일 없이 함께 황천으로 떠나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사무네 님은 같이 죽어주겠다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할 수 없는 분임. 져서 목이 떨어졌으면 모르되 살아남았으면 책임져야 할 게 너무나 많으니까. 내가 사나다테라서가 아니라 설령 다테사나라도 저건 오로지 유키무라만이 그가 사나다 유키무라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 아아 비련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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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 2006/10/04 21:53
팔다리가 잘리면 이빨로 땅을 찍어서라도 기어나가야 하는 사람이 마사무네님이었군요. 처절하네요, 증오 마저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될 수밖에 없는, 자기 것이지만 자기 것일 수 없는 목숨이라는 거.
그렇담 이런 캐릭터는 모두 다테 마사무네님 패러디?(어이)

너무나 황송한 말씀이오나 참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들판에서 핏물 속에 집어넣어 굴려보고 싶은 사람이네요 쿨럭쿨럭쿨럭쿨럭쿨럭(피 한말 뿜고 죽어버리기) 피와 비를 뒤집어쓰고 광기에 가득 찬 얼굴로 적을 베어넘기는 모습이 너무 어울릴 것 같아서 모에심 동합니다 드흡-_ㅠ(어이어이 어디가냐 인간아)

아, 리스트 피아노곡집 드디어! 보냈습니다!!>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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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10/11 21:25
그 모에심 그대로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진지) 마사무네 님은 아주 좋습니다! 인생 전부가 네타이신 분입니다! 함께 불타주십시오! >_<

리스트 피아노곡집은 지금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지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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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라 2006/10/06 02:25
하지만 저는, 가진게 없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부분에 자기 파멸적인 부분이 있는 - 사람도 죽이게 취향인걸요.

그런 의미에서 KISARA님의 사나다 유키무라 인물상은 무지막지 모에했습니다.
그렇죠. 머리 좋은 사람이니 자신의 존재가 아들도 동생도 아닌 "쓸모 많은 장기말'이란건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은근히 채념하고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니 그래서 더더욱 자신을 굽히지 않고 벗꽃처럼 져 간 사람에게 모에!!!
(<- 일본사 지식 전무합니다. 여기저기서 긁어온 네타로 제 멋대로 만들어낸 인물상.;;;)

아니....그래도 저는 바보변태 유키유키 모에만으로 족합니다.
거기까지 빠지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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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10/11 21:27
그으러어니이까아, 모에하셨으면 냉큼 포기하고 이쪽으로 오시라니까요. 바보변태 유키유키는 물론 죽어라고 귀엽지만 진짜 사나다 유키무라는 그 사람대로 또 무지하게 재미있단 말입니다! 함께 일본사를 파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이 이 물귀신 누구를 또 구렁텅이에 끌어들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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