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난산이었지만 하여간 끝내긴 끝냈다. 신나게 부채질해 주신 Z님과 y님과 S님께 바칩니다.
여전히 이 망상에 의한 막 나가는 은혼 SS 제 2탄. 정신 공격에 대한 방어율이 낮으신 분은 그냥 도망가시길 권장합니다. 다 읽으시고 눈 썩었다 불평하셔도 나는 몰라요우.
SIDE A-35. 한 번 더(もう一度)
동지도 아니고 친우라곤 입이 찢어져도 인정하기 싫고, 딱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악우인 게 양이 4인조. 과거 키바-에노키즈에 열광했듯이 (지금도 열광하지만) 긴상-즈라 콤비도 무진장 좋아한다. 커플링으로 무리해서 몰고 가면 당장에 본래의 맛이 개박살나 버리므로 암만 내가 동인녀라 해도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은 관계. 긴상-못상도 좀 비슷하고. 긴상-신짱은 좀 다르다. 백야차VS마왕의 목숨 건 혈투를 첨부한 감자칩 우정. 세상에, 우정이 있긴 있어?
하여간 그 악우 4인조 중에서 즈라와 못상은 구제가 불가능한 천연 보케고, 긴상은 귀찮아서 나 몰라라 할 테니 결국 쯧코미는 신짱뿐이라는 무서운 결론이 나왔다. 위가 망가져도 할 수 없지.
전에도 그랬지만 하코다테가 미칠듯이 발리고 있다. 그래, 가자. 가 보자고. 능력 되는 데까지 가 보자니까.
여담이지만 신(晋)이라는 굉장한(...) 애칭은 무라카미 겐조(村上元三)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에서 실례해왔다. 쿠사카, 이리에, 몬타는 물론이고 심지어 카츠라 씨까지 애용하고 있다는 모님의 증언. 그리고 이 책의 신사쿠는 상당히 신'스케'틱하다고 한다 OTL 츠루히메이치몬지의 모토네타는 우에스기 켄신의 애도 히메즈루이치몬치(姫鶴一文字). 코등이가 없는 거합도 중에선 가장 유명한 칼이라서 한 번 써먹어 봤다.
역시 괜히 언급해 본 오오무라 마스이치로(大村益一郎), 에노모토 나베지로(榎本鍋次郎), 오오토리 케이지(大鳥圭司), 야마다 이치노신(山田市之進). 언놈이 뭔지 전부 알아보신 당신은 상당한 막말 팬......일지도?
덤. 우연히도 막말 카테고리의 100번째 글이었다.
다카스기 신스케가 병에 걸려 은둔했다는 소문은 광속에 맞먹는 빠르기로 사방팔방에 퍼져나갔다.
소식을 전해들은 카츠라 코타로가 과거의 확집이고 노선의 차이고 나발이고 지랄이고 모조리 싹싹 쓸어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즉각 교토 일대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어느 암자에 짱박힌 녀석을 대에도까지 질질 끌고 온 것이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양이전쟁에서 질기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지인 오오무라 마스이치로의 아련한 눈길을 첨부한 회상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이미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베니자쿠라에 얽힌 대파란도 막부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기울인 사경전쟁도 <3일간의 지옥>으로 역사에 기록될 도바・후시미 전투도 애초에 쨉이 안 될 피와 살이 무더기로 터지는 혈투가 전개되어 저택의 절반이 초토화되고 애먼 자들의 새우등만 잇달아 터져나갔다고 했다.
필경 끝내줬을 구경을 놓치고 만 불운을 새삼 아쉬워하며, 사카타 긴토키는 언제 봐도 허연 푸대자루 같지만 기묘하게 유능하고 희한하게 싸나이스런 카츠라의 펫 - 엘리자베슨지 뭔지 - 이 안내하는 대로 신정부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옛 전우의 새로운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방의 주인은 없었으나 침대는 있었다. 복잡히 얽힌 전선과 용도가 짐작도 가지 않는 온갖 의료기기와, 그리고 침대의 주인도.
한시도 관저를 떠나지 못할만큼 일에 쫓기게 된 카츠라가 아예 통째로 집무실에 옮겨왔던 것이다.
"뭐하러 왔냐, 썩은 동태눈깔."
"응, 긴상도 니가 얌전히 누워 병약 미소녀질이나 할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나이먹고 나서야 그나마 나아졌지만 기관지가 약해 뻑하면 열내고 툭하면 앓아눕던 어린 시절의 다카스기에게 약을 강제로 퍼먹이는 건 항상 카츠라의 몫이었다. 불량한 포즈로 길게 드러누워 스펙터클한 전투를 즐거이 감상하다 때 되면 체력도 딸리는 게 무슨 오기는 그리 투철한지 쉬지도 않고 생지랄을 떨어대는 다카스기를 칼집으로 때려눕히는 건 긴토키의 일이었다.
카츠라가 힘들게 끌고 와서 기껏 좋은 방에 넣고 좋은 의사 붙여줬더니 죄 마당에 내팽개치고 갖은 지X발X을 하며 이불 질질 끌고 햇빛도 안 드는 구석방으로 기어들어간 녀석을 과거의 역할 분담에 충실하게 문짝 때려부수고 끌어낸 사람은 분명 그였지만 설마 고걸 요날 요때까지 꽁하니 품었을 줄이야. 얘도 참 징그럽게 진득진득해서 못 써먹겠대니까. 아껴둔 푸딩을 카구라가 싹싹 긁어먹었다는 이유로 일주일은 족히 앵돌아져 있었던 제 쪼잔함은 깨끗이 망각하고 긴토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토야코로 받아낸 츠루히메이치몬지(鶴姫一文字)가 목줄기에서 따악 5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차르르 떨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신속의 발도. 귀병대 총독 다카스기 신스케의 명성을 확고하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여즉 건재해서, 조금 미묘한 심경이 되었다.
일말의 양보도 없는 칼과 칼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긴토키는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다카스기를 새삼 뜯어보았다.
사사오입해서 가까스로 170인 키와 한계점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체중 때문에 더욱 작고 가늘게만 뵈는 체구는 새하얀 침의에 감싸여 한결 미덥지 못했다. 본디 하얀 편이었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어서, 인간보다는 오히려 잘 만든 인형만 같았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인형이지만.
"물론 기대도 안 했지만 말야, 명색이 환자라면 환자답게 좀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녀석아. 환자란 자고로 침대에 곱게 양손 모으고 링겔 꽂고 누워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푸른 하늘을 내다보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동경하고 건강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한숨짓고 조기 창 밖의 시퍼런 상록수도 가리키면서 저 잎이 다 떨어지는 날엔 나도 간다는 둥 센티멘털한 대사도 좀 읊어가며 분위기를 막 깔아줘야 하는 법이라구! 손 닿는 근처에 날 시퍼렇게 선 일본도 같이 뒤숭숭한 물건을 둬도 안 되고 하물며 문병 온 사람 머리통에 대고 함부로 휘둘러야 쓰겠냐! 그저 잠이나 자고 체력이나 온존해서 병마에 맞서 싸우는 게 환자의 올바른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레 작문?"
"걱정 끄시지 긴토키. 너 하나 썰어줄 힘은 충분히 있다."
"우와앗! 밀렸어! 지금 긴상 분명히 밀렸어! 야 너 아픈 애 맞냐!?"
"──와 있었나. 오랜만이군, 긴토키."
이러다 애도(愛刀)를 진짜로 분질러먹지 싶어 위기감이 굼실굼실 피어오를 즈음에 기막힌 타이밍으로 카츠라가 등장해주었다.
의례적인 인삿말부터 던지고, 카츠라는 눈살을 가만히 찌푸리며 장남 캐릭터답게 명색 간이 병실에서 칼부림이나 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동생 두 놈을 근엄한 어조로 나무랐다.
"긴토키, 환자를 상대로 뭘 하고 있나. 어서 치워. 그리고 너도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로군. 절대안정만이 최선이라고 의사 선생도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신."
대강 20년을 넘기는 푹 썩은 인연이나 이날 이 순간만큼 안면 전체로 다채로운 감정 표현을 시전하는 다카스기를 일찍이 본 기억이 없었다.
긴토키는 전광석화의 스피드로 갈무리한 토야코를 벨트에 찔러넣고 있는 힘껏 귀를 틀어막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즈라────!!!!"
역시, 화끈하게 폭발했다.
물론 카츠라는 눈썹 한 올도 꿈쩍하지 않았다.
"즈라 아니다. 카츠라다. 어째서. 옛 생각이 나서 좋지 않은가. 그렇지 긴토키?"
"옳소 옳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과거의 영롱한 추억에 잠겨 보겠어. 아~아, 그때의 신짱★은 저어어어어엉말 러블리 큐트했는데에."
"음음. 선생님의 옷자락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기도 하고."
"넘어져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아마~?"
"코타로 형이라 부르며 내 뒤를 필사적으로 졸졸 따라다녔건만."
"가리고 못 먹고 남기는 건 또 오죽 많았어?"
"약 한 번 먹이려면 고생이 말도 못했었다."
"밤엔 절대 혼자선 측간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들었구."
"길도 자주 잃어서 어딜 가려면 항상 손을 잡아줘야 했지."
"축제 갔다가 앗차하는 사이에 떨어져버려서 너랑 나랑 얘 찾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박박 갈린다야."
"정은 또 깊어서 새끼고양이를 몰래 들여다 키운 일도 있었지."
"오, 기억난다 기억나. 쇠약해져선 얼마 못 가 죽지 않았냐?"
"구석에 숨어 울고 있는 이 녀석을 우리 둘이 찾아내 장례식을 거들었었지."
거기까지 주거니받거니하고, 긴토키와 카츠라는 동시에 여전히 다채로운 감정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다카스기를 돌아보았다.
"그랬는데...."
"....어쩌다 요런 눈매도 고약하고 성질도 드럽고 만사에 비딱한 불량으로 자라버렸냐. 엉아는 슬프다. 훌쩍훌쩍."
"시끄럿!! 따지고 보면 니들 때문이잖아!!!"
일단 옛일 한 번 들추기 시작하면 연하인 다카스기는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더구나 이 멤버라면 (사카모토를 더해도) 태클을 걸어줄 인재가 그밖에 없는 것이다.
양이전쟁을 겪으면서 편두통 얻고 덤으로 위장까지 호되게 망친 건 그런 사정도 좀 있었다.
"나 좀 조용히 뒈지게 내버려두지 못하겠냐!"
"꺄-앙, 몰라 몰라, 신짱이 화났쪄-"
"....오냐. 너 죽고 나 죽어보자 이 썩을 놈의 라면대가리. 이리 와라."
"어? 지금 라면대가리라고 했냐? 천연파마도 아니고 라면대가리라고 했냐? 이거 선전포고지? 한 판 해보자는 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니가 알지? 옳커니 받아주마. 덤벼."
"긴토키, 그쯤 해둬라! 신 너도다. 또 칼부림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환자된 자 절대안정, 절대안정, 오로지 절대안정만이 제일이라 하지 않았나! 단단히 이른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이런...!"
"닥쳐 카츠라! 자꾸 신 신 하지 말랬지!!"
"카츠라 아니다, 즈라다! ....앗 실수다, 카츠라 맞다. 하여간 신, 어서 칼을 내려놓고 도로 누워라! 어서!"
"....저 말이다, 내 보기엔 즈라 니가 제일 안정시키지 않고 있는뎁쇼....?"
나이 헛쳐먹은 3인조의 주접은 다카스기의 입가에서 주르륵 흘러넘친 검붉은 피가 침의와 요를 호러블한 얼룩으로 물들였을 때서야 겨우 끝을 보았다.
직후 카츠라가 어찌나 패닉에 빠졌는지 달려온 의사는 환자는 제쳐두고 보호자에게 진정제를 주사해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카츠라가 직접 배웅을 나왔다.
"즈라야."
"즈라 아니다. 카츠라다."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되는 항례적인 응수는 그냥 흘렸다.
"쟤, 오른쪽 눈도 갔지?"
카츠라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예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무자비한 정확함으로 경동맥을 향해 날아왔던 칼날이 미묘하게 각도가 어긋났을 따름이었다.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은 지긋지긋하게 칼을 맞댄 사이였다.
"얼마래?"
"길어도 석 달이다. ...그 전에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 그래."
그렇다면 아마도 이게 마지막. 조금 덜 놀릴 걸 그랬다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끊긴 대화를 이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카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긴토키."
"아~?"
"──북쪽으로 갈 생각이냐?"
20여 년 사귐의 위력을 이럴 때 새삼 절감한다.
즈라 주제에 예리하게 놀지 말라구. 긴토키는 속으로 매우 실례되는 악담을 씨부렁거렸다.
"너도 이미 알 일이지만, 곤도가 참수된 지금 그 남자는 신정부 최대의 공적(公敵)이다. 동지들의 울분도 원한도, 에노모토보다 오오토리보다 오로지 그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즈라."
"야마다에 이르러선 반드시 제 손으로 목을 따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어. 제아무리 너라 해도, 구하는 건 도저히 무리다."
"이봐, 즈라."
"긴토키, 역시 지금이라도,"
"난 센다이 명물 마사무네 파르펠 먹으러 가는 거야."
구하겠다던가, 어떻게든 데리고 돌아오겠다던가,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애시당초 떠올리지도 않았다. 단지 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잠자리에서 구르다 일어나도 똑바르기만 한 찰랑찰랑한 까만 머리칼도, 미련하도록 곧고 고집스러운 등도, 제복의 옷깃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목덜미도, 담배가 떠날 줄을 모르는 입술도 허구헌날 동공이 활짝 열려 있는 푸르스름한 기가 감도는 눈도, 토나오도록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화질 구리구리한 영상으로도 단박에 알아볼 정도로 못 자고 못 먹은 티가 역력했던 창백한 얼굴까지, 모든 게 그저 미치도록 눈에 밟혔을 뿐이었다.
카츠라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의 뭣 같은 고집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에도로 돌아올 마음이 있긴 있나?"
"글쎄. 어디로 가건 살아 있으면 또 보지 않겠냐."
─생사도 모른 채 헤어져 에도에서 재회했듯이.
"흥, 괜히 나대다 목이나 잃지 말아라."
긴토키는 손을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들은 카츠라 코타로가 과거의 확집이고 노선의 차이고 나발이고 지랄이고 모조리 싹싹 쓸어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즉각 교토 일대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어느 암자에 짱박힌 녀석을 대에도까지 질질 끌고 온 것이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양이전쟁에서 질기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동지인 오오무라 마스이치로의 아련한 눈길을 첨부한 회상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이미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베니자쿠라에 얽힌 대파란도 막부의 명운을 결정적으로 기울인 사경전쟁도 <3일간의 지옥>으로 역사에 기록될 도바・후시미 전투도 애초에 쨉이 안 될 피와 살이 무더기로 터지는 혈투가 전개되어 저택의 절반이 초토화되고 애먼 자들의 새우등만 잇달아 터져나갔다고 했다.
필경 끝내줬을 구경을 놓치고 만 불운을 새삼 아쉬워하며, 사카타 긴토키는 언제 봐도 허연 푸대자루 같지만 기묘하게 유능하고 희한하게 싸나이스런 카츠라의 펫 - 엘리자베슨지 뭔지 - 이 안내하는 대로 신정부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옛 전우의 새로운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방의 주인은 없었으나 침대는 있었다. 복잡히 얽힌 전선과 용도가 짐작도 가지 않는 온갖 의료기기와, 그리고 침대의 주인도.
한시도 관저를 떠나지 못할만큼 일에 쫓기게 된 카츠라가 아예 통째로 집무실에 옮겨왔던 것이다.
"뭐하러 왔냐, 썩은 동태눈깔."
"응, 긴상도 니가 얌전히 누워 병약 미소녀질이나 할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나이먹고 나서야 그나마 나아졌지만 기관지가 약해 뻑하면 열내고 툭하면 앓아눕던 어린 시절의 다카스기에게 약을 강제로 퍼먹이는 건 항상 카츠라의 몫이었다. 불량한 포즈로 길게 드러누워 스펙터클한 전투를 즐거이 감상하다 때 되면 체력도 딸리는 게 무슨 오기는 그리 투철한지 쉬지도 않고 생지랄을 떨어대는 다카스기를 칼집으로 때려눕히는 건 긴토키의 일이었다.
카츠라가 힘들게 끌고 와서 기껏 좋은 방에 넣고 좋은 의사 붙여줬더니 죄 마당에 내팽개치고 갖은 지X발X을 하며 이불 질질 끌고 햇빛도 안 드는 구석방으로 기어들어간 녀석을 과거의 역할 분담에 충실하게 문짝 때려부수고 끌어낸 사람은 분명 그였지만 설마 고걸 요날 요때까지 꽁하니 품었을 줄이야. 얘도 참 징그럽게 진득진득해서 못 써먹겠대니까. 아껴둔 푸딩을 카구라가 싹싹 긁어먹었다는 이유로 일주일은 족히 앵돌아져 있었던 제 쪼잔함은 깨끗이 망각하고 긴토키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토야코로 받아낸 츠루히메이치몬지(鶴姫一文字)가 목줄기에서 따악 5센티미터 떨어진 곳에서 차르르 떨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신속의 발도. 귀병대 총독 다카스기 신스케의 명성을 확고하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여즉 건재해서, 조금 미묘한 심경이 되었다.
일말의 양보도 없는 칼과 칼의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긴토키는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다카스기를 새삼 뜯어보았다.
사사오입해서 가까스로 170인 키와 한계점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체중 때문에 더욱 작고 가늘게만 뵈는 체구는 새하얀 침의에 감싸여 한결 미덥지 못했다. 본디 하얀 편이었던 얼굴에는 핏기라고는 없어서, 인간보다는 오히려 잘 만든 인형만 같았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인형이지만.
"물론 기대도 안 했지만 말야, 명색이 환자라면 환자답게 좀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녀석아. 환자란 자고로 침대에 곱게 양손 모으고 링겔 꽂고 누워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푸른 하늘을 내다보고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를 동경하고 건강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한숨짓고 조기 창 밖의 시퍼런 상록수도 가리키면서 저 잎이 다 떨어지는 날엔 나도 간다는 둥 센티멘털한 대사도 좀 읊어가며 분위기를 막 깔아줘야 하는 법이라구! 손 닿는 근처에 날 시퍼렇게 선 일본도 같이 뒤숭숭한 물건을 둬도 안 되고 하물며 문병 온 사람 머리통에 대고 함부로 휘둘러야 쓰겠냐! 그저 잠이나 자고 체력이나 온존해서 병마에 맞서 싸우는 게 환자의 올바른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레 작문?"
"걱정 끄시지 긴토키. 너 하나 썰어줄 힘은 충분히 있다."
"우와앗! 밀렸어! 지금 긴상 분명히 밀렸어! 야 너 아픈 애 맞냐!?"
"──와 있었나. 오랜만이군, 긴토키."
이러다 애도(愛刀)를 진짜로 분질러먹지 싶어 위기감이 굼실굼실 피어오를 즈음에 기막힌 타이밍으로 카츠라가 등장해주었다.
의례적인 인삿말부터 던지고, 카츠라는 눈살을 가만히 찌푸리며 장남 캐릭터답게 명색 간이 병실에서 칼부림이나 하고 있는 철딱서니 없는 동생 두 놈을 근엄한 어조로 나무랐다.
"긴토키, 환자를 상대로 뭘 하고 있나. 어서 치워. 그리고 너도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로군. 절대안정만이 최선이라고 의사 선생도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신."
대강 20년을 넘기는 푹 썩은 인연이나 이날 이 순간만큼 안면 전체로 다채로운 감정 표현을 시전하는 다카스기를 일찍이 본 기억이 없었다.
긴토키는 전광석화의 스피드로 갈무리한 토야코를 벨트에 찔러넣고 있는 힘껏 귀를 틀어막았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즈라────!!!!"
역시, 화끈하게 폭발했다.
물론 카츠라는 눈썹 한 올도 꿈쩍하지 않았다.
"즈라 아니다. 카츠라다. 어째서. 옛 생각이 나서 좋지 않은가. 그렇지 긴토키?"
"옳소 옳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과거의 영롱한 추억에 잠겨 보겠어. 아~아, 그때의 신짱★은 저어어어어엉말 러블리 큐트했는데에."
"음음. 선생님의 옷자락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기도 하고."
"넘어져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 아마~?"
"코타로 형이라 부르며 내 뒤를 필사적으로 졸졸 따라다녔건만."
"가리고 못 먹고 남기는 건 또 오죽 많았어?"
"약 한 번 먹이려면 고생이 말도 못했었다."
"밤엔 절대 혼자선 측간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 들었구."
"길도 자주 잃어서 어딜 가려면 항상 손을 잡아줘야 했지."
"축제 갔다가 앗차하는 사이에 떨어져버려서 너랑 나랑 얘 찾자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거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박박 갈린다야."
"정은 또 깊어서 새끼고양이를 몰래 들여다 키운 일도 있었지."
"오, 기억난다 기억나. 쇠약해져선 얼마 못 가 죽지 않았냐?"
"구석에 숨어 울고 있는 이 녀석을 우리 둘이 찾아내 장례식을 거들었었지."
거기까지 주거니받거니하고, 긴토키와 카츠라는 동시에 여전히 다채로운 감정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다카스기를 돌아보았다.
"그랬는데...."
"....어쩌다 요런 눈매도 고약하고 성질도 드럽고 만사에 비딱한 불량으로 자라버렸냐. 엉아는 슬프다. 훌쩍훌쩍."
"시끄럿!! 따지고 보면 니들 때문이잖아!!!"
일단 옛일 한 번 들추기 시작하면 연하인 다카스기는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더구나 이 멤버라면 (사카모토를 더해도) 태클을 걸어줄 인재가 그밖에 없는 것이다.
양이전쟁을 겪으면서 편두통 얻고 덤으로 위장까지 호되게 망친 건 그런 사정도 좀 있었다.
"나 좀 조용히 뒈지게 내버려두지 못하겠냐!"
"꺄-앙, 몰라 몰라, 신짱이 화났쪄-"
"....오냐. 너 죽고 나 죽어보자 이 썩을 놈의 라면대가리. 이리 와라."
"어? 지금 라면대가리라고 했냐? 천연파마도 아니고 라면대가리라고 했냐? 이거 선전포고지? 한 판 해보자는 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니가 알지? 옳커니 받아주마. 덤벼."
"긴토키, 그쯤 해둬라! 신 너도다. 또 칼부림으로 일을 해결하려고...! 환자된 자 절대안정, 절대안정, 오로지 절대안정만이 제일이라 하지 않았나! 단단히 이른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이런...!"
"닥쳐 카츠라! 자꾸 신 신 하지 말랬지!!"
"카츠라 아니다, 즈라다! ....앗 실수다, 카츠라 맞다. 하여간 신, 어서 칼을 내려놓고 도로 누워라! 어서!"
"....저 말이다, 내 보기엔 즈라 니가 제일 안정시키지 않고 있는뎁쇼....?"
나이 헛쳐먹은 3인조의 주접은 다카스기의 입가에서 주르륵 흘러넘친 검붉은 피가 침의와 요를 호러블한 얼룩으로 물들였을 때서야 겨우 끝을 보았다.
직후 카츠라가 어찌나 패닉에 빠졌는지 달려온 의사는 환자는 제쳐두고 보호자에게 진정제를 주사해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는 카츠라가 직접 배웅을 나왔다.
"즈라야."
"즈라 아니다. 카츠라다."
질리지도 않고 되풀이되는 항례적인 응수는 그냥 흘렸다.
"쟤, 오른쪽 눈도 갔지?"
카츠라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예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무자비한 정확함으로 경동맥을 향해 날아왔던 칼날이 미묘하게 각도가 어긋났을 따름이었다.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은 지긋지긋하게 칼을 맞댄 사이였다.
"얼마래?"
"길어도 석 달이다. ...그 전에 끝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 그래."
그렇다면 아마도 이게 마지막. 조금 덜 놀릴 걸 그랬다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끊긴 대화를 이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때, 카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긴토키."
"아~?"
"──북쪽으로 갈 생각이냐?"
20여 년 사귐의 위력을 이럴 때 새삼 절감한다.
즈라 주제에 예리하게 놀지 말라구. 긴토키는 속으로 매우 실례되는 악담을 씨부렁거렸다.
"너도 이미 알 일이지만, 곤도가 참수된 지금 그 남자는 신정부 최대의 공적(公敵)이다. 동지들의 울분도 원한도, 에노모토보다 오오토리보다 오로지 그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즈라."
"야마다에 이르러선 반드시 제 손으로 목을 따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어. 제아무리 너라 해도, 구하는 건 도저히 무리다."
"이봐, 즈라."
"긴토키, 역시 지금이라도,"
"난 센다이 명물 마사무네 파르펠 먹으러 가는 거야."
구하겠다던가, 어떻게든 데리고 돌아오겠다던가,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애시당초 떠올리지도 않았다. 단지 보고 싶어졌을 뿐이다.
잠자리에서 구르다 일어나도 똑바르기만 한 찰랑찰랑한 까만 머리칼도, 미련하도록 곧고 고집스러운 등도, 제복의 옷깃 사이로 살짝 엿보이는 목덜미도, 담배가 떠날 줄을 모르는 입술도 허구헌날 동공이 활짝 열려 있는 푸르스름한 기가 감도는 눈도, 토나오도록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화질 구리구리한 영상으로도 단박에 알아볼 정도로 못 자고 못 먹은 티가 역력했던 창백한 얼굴까지, 모든 게 그저 미치도록 눈에 밟혔을 뿐이었다.
카츠라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놈의 뭣 같은 고집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에도로 돌아올 마음이 있긴 있나?"
"글쎄. 어디로 가건 살아 있으면 또 보지 않겠냐."
─생사도 모른 채 헤어져 에도에서 재회했듯이.
"흥, 괜히 나대다 목이나 잃지 말아라."
긴토키는 손을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동지도 아니고 친우라곤 입이 찢어져도 인정하기 싫고, 딱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악우인 게 양이 4인조. 과거 키바-에노키즈에 열광했듯이 (지금도 열광하지만) 긴상-즈라 콤비도 무진장 좋아한다. 커플링으로 무리해서 몰고 가면 당장에 본래의 맛이 개박살나 버리므로 암만 내가 동인녀라 해도 결코 건드리고 싶지 않은 관계. 긴상-못상도 좀 비슷하고. 긴상-신짱은 좀 다르다. 백야차VS마왕의 목숨 건 혈투를 첨부한 감자칩 우정. 세상에, 우정이 있긴 있어?
하여간 그 악우 4인조 중에서 즈라와 못상은 구제가 불가능한 천연 보케고, 긴상은 귀찮아서 나 몰라라 할 테니 결국 쯧코미는 신짱뿐이라는 무서운 결론이 나왔다. 위가 망가져도 할 수 없지.
전에도 그랬지만 하코다테가 미칠듯이 발리고 있다. 그래, 가자. 가 보자고. 능력 되는 데까지 가 보자니까.
여담이지만 신(晋)이라는 굉장한(...) 애칭은 무라카미 겐조(村上元三)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에서 실례해왔다. 쿠사카, 이리에, 몬타는 물론이고 심지어 카츠라 씨까지 애용하고 있다는 모님의 증언. 그리고 이 책의 신사쿠는 상당히 신'스케'틱하다고 한다 OTL 츠루히메이치몬지의 모토네타는 우에스기 켄신의 애도 히메즈루이치몬치(姫鶴一文字). 코등이가 없는 거합도 중에선 가장 유명한 칼이라서 한 번 써먹어 봤다.
역시 괜히 언급해 본 오오무라 마스이치로(大村益一郎), 에노모토 나베지로(榎本鍋次郎), 오오토리 케이지(大鳥圭司), 야마다 이치노신(山田市之進). 언놈이 뭔지 전부 알아보신 당신은 상당한 막말 팬......일지도?
덤. 우연히도 막말 카테고리의 100번째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