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Banishing from Heaven을 개설한 최대의 이유 중 하나는 읽자마자 버닝 반 심장통 반으로 쓰러지며 경배하였던 쯔우(つー, 사이트명 tarka) 님의 <"END of ME">를 나 혼자 읽고 죽을 수 없다는 백년 묵은 물귀신의 원념에서였다(...). 허나 능력 부족으로 일본어 본문의 애틋한 맛이 영 살질 않아 한동안 묵혀두려 했건만 그만 이제까지 머리 박고 고민했던 사실을 정곡으로 찔러주시는 리린 님의 알흠다운 일러스트에 불이 화라락 붙어 정열이 이끄는 대로 마구 저지르고 말았다. 평소에도 바닥 기는 질이 더 추락했다면 그건 리린 님 탓이다(야!!)
언제나처럼 배째고 등딸 각오만은 두둑하다. 문제가 되면 삭삭 지워버릴 예정임.
BGM은 Janne Da Arc의 <월광화(月光花)>를 추천한다.
...and less.
....정말, 10년 내내 죽지 못해 겨우 살았던 사람이었고,
언제나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 느꼈을 사람이었고,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납득은 못했고,
늘 제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을 테고,
그럼에도 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허나 또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없이 손놓고 죽어버린 이 남자를 어쩌면 좋나요... orz
통렬한 지적을 받고 가까스로 격정을 가라앉혔다. 그 모순을, 그 모든 것을 그 자신 역시 진작부터 이해하고 있었을 터였다. 오히려 그는 객관적인 단언으로 냉정하게 제재의 철퇴를 휘둘러 준 그 수려한 소년에게 깊이 감사해야 했다.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격분에 사로잡혔음에도 단지 그때까지 쌓아온 <인상>을 잃는 것으로 끝났다.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이름에서 파생되는 제 3자의 이해를 살짝 손상시키는 선에서 제동을 걸고(본인은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겠으나), 추악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본성을 백일하에 드러내 보이기 충분한 요소를 말 몇 마디로 제지해 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소년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은 아슬아슬하나마 여전히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코드 네임을 댈 수 있는 인간으로 남았다. 그러할 자격이 충분한, 테러리스트였다.
닐 디란디는 복수자다. 그 이전에는 무자비하고 일방적이며 잔학한 폭력 앞에 맞설 방도도 없이 방구석에 웅크려 흐느끼는 것이 고작인 일반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단지 본능을 따라 공포에 짓눌려 떨기만 하는 무지하고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닐 디란디는 철저하고 압도적인 약자였다. 약자란, 힘없고 평범한 인간이란 극단적인 억압에 저항은커녕 반발할 기력조차 갖지 못하는 가련한 생물이다. 닐 역시, 한 약자로서 몸을 옹송그리고 그늘에 숨어 숨도 옳게 쉬지 못하는 동물이 되었어야 했다. 그렇게 될 요소를 빠짐없이 갖춘 소년이었다.
그러나 닐 디란디라는 소년은 그대로 약자로 살고 약자로 죽기를 거부했다. 닐은 그 일방적이었던 학살을, 약자에게 주어진 최대한의 혜택마저 박탈해간 폭도들을 이를 갈며 저주했다. 어째서 죽였나, 어째서 빼앗아갔나. 네놈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의 자그마한 행복을 유린할 권리라도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나, 무엇 때문에 동생의 미래를 앗아갔나. 왜 내 인생을 망가뜨렸나, 단지 그런 이유로 부모님과 동생을 죽일 필요가 어디에 있었나. 어째서 나까지 죽이지 않았나, 무엇 때문에 살려두었나. 일개 소년에게 정도를 벗어난 힘을 안겨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런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었단 말인가. 그대로 약자로서 살 수 있었던 내가 지금은 네놈들을 겨냥한 스코프를 들여다보고 있다. 평범한 소년이었다면 네놈들의 머리를 날려버릴 힘을 무슨 재주로 손에 넣었겠는가. 네놈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네놈들이 자초한 결과다. 네놈들이 앗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범한 소년으로 살고 평범한 인간으로 죽을 수 있었건만. 닐 디란디는 그렇게 해서 복수자가 되었다.
복수가 어느 틈엔가 형태를 바꾼 것은 닐 디란디가 록온 스트라토스, 즉 자신의 이름을 받았을 때였다. 복수의 과정에서 닐은 분명히 깨달았다. 이 일그러진 세계를, 세계 그 자체를 응징하지 않는 한 그의 내부에서 넘실거리는 증오와 분노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에는 닐 디란디라는 소년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압도적인 힘을 원했다. 자신의 평온한 미래를 산산조각 낸 그 힘을 되갚아줄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을 원했다. 세계를 혁신할 힘, 근본을 뒤흔들고 압도할 힘을 원했다. 닐 디란디는 바로 그때,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로 거듭났다. 모든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채 선택한, 피투성이의 길이었다.
입 속으로 그 소년의 말을 반추했다. 우리 역시 테러리스트다. 그렇다. 어차피 그들도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인간이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학살을 되풀이하는 폭도일 뿐이다. 알고 있다. 알면서 선택한 길이다. 앞날에 희망 따위는 시작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줄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알고 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다.
그 소년의 말에 격분한 것은 그의 내부에 도사린 복수자의, 닐 디란디의 감정이었다. 단지 일방적인 폭력을 저주하고 그 밖의 일은 배려할 생각조차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소년으로서의 부분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가 납득한, 어차피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복수자 닐 디란디는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닐 디란디는 말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다. 미숙한 소년답게 그 밖의 일은 고려해 볼 의사조차 없는 직선적인 증오에 불타는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 어린 진정성은 때때로 록온 스트라토스로서의 그마저도 뒤흔든다.
본디 <록온 스트라토스>는 <닐 디란디>에서 파생한 것이다. 무엇보다 록온 스트라토스 자신이, 그 이름은 기만에 불과함을 깨닫고 있었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세계의 변혁을 꾀하는 그 존재 역시 복수자의 줄기에서 뻗어나온 일개 가지일 따름이었다. 그의 줄기이자 뿌리는 복수자 닐 디란디였다. 변혁자이자 테러리스트인 존재라면 응당 허용할 일을 닐 디란디는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자기 자신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마감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관통시킬 이마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테러리스트인 록온 스트라토스를 복수자 닐 디란디는 결코 용서치 않는다. 몇이나 죽였는지 더는 기억도 못할 손으로, 최후에 당겨야 할 방아쇠만은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복수자 닐 디란디가 테러리스트 록온 스트라토스를 처형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닐 디란디는 복수자였다. 복수밖에 염두에 없는, 가엾은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록온 스트라토스로서의 그는 어떠한가.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록온 스트라토스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복수 하나에 모든 의지를 집중한 닐 디란디와는 달리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다른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는 여유마저 웬만큼 지닌 인간이었다. 때문에 록온 스트라토스로서의 자신은 안이하게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생존을 갈망하는 누군가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오로지 테러리스트와 맞섰을 때에만 그는 복수자 닐 디란디로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록온 스트라토스가 관여하고 말고의 여부에 상관없이 주변은, 세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그러진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비틀릴 수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그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렇게 아무 상관도 없이 스러져간 약자의 목숨에 대한 책임을 록온 스트라토스는 내던지지 않았다. 일방적이고 모순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가를 자신은 각오하고 있다. 이제 와서 몸을 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찍이 자신이, 닐 디란디가 품었던 만큼의 증오를 그에게 돌리는 자가 있다면 그 역시 허용하리라. 자신은 벌을 받고도 남을 행위를 무수히 저질렀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테러리스트였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때문에 책임을 내던지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자신에게는, <닐 디란디의 복수>와는 별도로 벌이 주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복수자 닐 디란디가 아닌 테러리스트 록온 스트라토스였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로서 그는 응분의 엄벌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한 인간으로서 록온 스트라토스는 스스로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을 벌로써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가 원치 않는 것이란, 곧 그의 근간이자 전부인 닐 디란디에 직결된 것이었다.
닐 디란디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닐 디란디의 갈망은 오직 하나, 최후로 남은 테러리스트 록온 스트라토스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 그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록온 스트라토스이자 닐 디란디인 그의, 의심할 여지 없는 그 자신의 의사였다. 그러나 책임을 포기하지 못하는 록온 스트라토스가 원한 형벌은, 스스로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록온 스트라토스는 살아야만 했다. 닐 디란디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고 꺼질 줄 모르는 원념에 짓눌리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했다. 애초에 닐 디란디에게는 복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복수 이외의 무엇에도 흥미를 갖지 않았다. 스스로의 목숨을 존중할 마음마저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야 했다. 자신의 근간이자 근원인 닐 디란디의 절실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록온 스트라토스로서 받아야 할 형벌이고 져야 할 책임이었다. 천상인으로서 새로이 첫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록온 스트라토스는 그 하나만은 가슴에 새겨두었다.
지금, 그 결의는 뿌리부터 뒤집히려 하고 있다.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자 경련하는 시야가 주위를 비추었다. 그들 천상인을 껴안은 성모의 품 안, 눈앞에는 세 명의 소년이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잔손이 많이 가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처음 대면한 이후 이날 이때까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기를 거부하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복수 외에는 안중에 없는 닐 디란디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록온 스트라토스는 해냈다. 온화한 인간답게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아끼고 돌보고 애정을 베풀었다. 모든 것은 록온 스트라토스의 온화한 성품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어쩌면, 그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다채롭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그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복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닐 디란디에게는 눈을 돌릴 기회조차 없었을, 가장 어린 소년이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록온 스트라토스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껍질 속에 그토록 완고히 틀어박혀 있던 소년은 지금, 미미하나마 틀림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전 냉정하게 제재의 철퇴를 휘둘러 주었던 수려한 소년 역시,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동요를 노출시키고 있다. 몰랐던 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소년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때 자신의 내부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었음을 록온 스트라토스는 부정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아이들의 옆자리에 머물며 성장을 지켜보고, 유년시절을 상실한 소년들이 그 나이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느리게나마 착실하게 인간미를 더해가는 소년들이, 아이답게 웃고 방황하고 그럼에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것은 평범한 삶을 명색으로나마 알고 있는 <자신>의 진심이 어린 기원이었다. 이 아이들을,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서 지켜보고 싶다. 록온 스트라토스의 그러한 소망은 지금, 복수마저도 초월하고 있다. 죽기를 원하는 닐 디란디의 갈구를, 살고 싶어하는 록온 스트라토스의 욕구가 압도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록온 스트라토스는 책임을 포기하지 못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테러리스트고 살인자였다.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학살자였다. 그 형벌은, 그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의 결의는 역전되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스스로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되는 일이다. 닐 디란디로서의 복수와, 록온 스트라토스에게 부과된 형벌. 단지 총알을 박아넣는 순간에 품을 감정이 정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아이들의 미래를 끝까지 지켜보고픈 소망이 답을 얻지 못한 채 끝나버릴 줄 깨닫고 있는 까닭이다. 건담 마이스터인 록온 스트라토스는 미션에 따르는 죽음을 긍정한다. 테러리스트인 록온 스트라토스는 형벌로서의 죽음을 긍정한다. 복수자인 닐 디란디 역시 증오의 완수로서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감된 후, 이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에 세 명의 소년이 비쳤다. 너나 할 것 없이 잔손이 많이 가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세 아이 모두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나이에 맞게, 아이답게 살아주려 하고 있다. 아아, 보고 싶었는걸. 무심코 중얼거리자, 무얼? 이란 반문이 세 가지 음성으로 한꺼번에 돌아와 그만 웃고 말았다. 하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고 하나는 기분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하나는 희미하게 눈을 치켜떴다. 이 아이들은 이렇게나 변하지 않았는가. 살고 싶다. 처음으로 살고 싶어하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실현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될 삶을 갈망하고 있다. 목구멍 안쪽이 두려움으로 설핏 떨리며 막연히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이 아이들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 테러리스트도 복수자도 아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지켜보고 싶었다.
거 참, 미련하게도 살았다니까. 내 일이지만.
"END of ME"
08.02.27
"벌은 달게 받겠다" 는 말을 보완하려고 쓰기 시작했다가 7화...였나? 록온이 티에의 멱살을 잡았던 화요. 그쪽의 보완도 안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그 점까지 뭉뚱그려 새로 썼더니 대책없이 길어졌습니다. 이래봬도 많이 줄였는데 말예요... 히이익.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단순한 복수자로 되돌아간 록온은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될 거라고,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츠나랑 알렐이랑 티에가 귀엽고 귀여워져서 난처해 하라지요. 죽는 게 무서워지라지요.
닐 디란디는 복수자다. 그 이전에는 무자비하고 일방적이며 잔학한 폭력 앞에 맞설 방도도 없이 방구석에 웅크려 흐느끼는 것이 고작인 일반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단지 본능을 따라 공포에 짓눌려 떨기만 하는 무지하고 무력한 어린아이였다. 닐 디란디는 철저하고 압도적인 약자였다. 약자란, 힘없고 평범한 인간이란 극단적인 억압에 저항은커녕 반발할 기력조차 갖지 못하는 가련한 생물이다. 닐 역시, 한 약자로서 몸을 옹송그리고 그늘에 숨어 숨도 옳게 쉬지 못하는 동물이 되었어야 했다. 그렇게 될 요소를 빠짐없이 갖춘 소년이었다.
그러나 닐 디란디라는 소년은 그대로 약자로 살고 약자로 죽기를 거부했다. 닐은 그 일방적이었던 학살을, 약자에게 주어진 최대한의 혜택마저 박탈해간 폭도들을 이를 갈며 저주했다. 어째서 죽였나, 어째서 빼앗아갔나. 네놈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는 인간의 자그마한 행복을 유린할 권리라도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나, 무엇 때문에 동생의 미래를 앗아갔나. 왜 내 인생을 망가뜨렸나, 단지 그런 이유로 부모님과 동생을 죽일 필요가 어디에 있었나. 어째서 나까지 죽이지 않았나, 무엇 때문에 살려두었나. 일개 소년에게 정도를 벗어난 힘을 안겨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런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었단 말인가. 그대로 약자로서 살 수 있었던 내가 지금은 네놈들을 겨냥한 스코프를 들여다보고 있다. 평범한 소년이었다면 네놈들의 머리를 날려버릴 힘을 무슨 재주로 손에 넣었겠는가. 네놈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네놈들이 자초한 결과다. 네놈들이 앗아가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범한 소년으로 살고 평범한 인간으로 죽을 수 있었건만. 닐 디란디는 그렇게 해서 복수자가 되었다.
복수가 어느 틈엔가 형태를 바꾼 것은 닐 디란디가 록온 스트라토스, 즉 자신의 이름을 받았을 때였다. 복수의 과정에서 닐은 분명히 깨달았다. 이 일그러진 세계를, 세계 그 자체를 응징하지 않는 한 그의 내부에서 넘실거리는 증오와 분노는 결코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에는 닐 디란디라는 소년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압도적인 힘을 원했다. 자신의 평온한 미래를 산산조각 낸 그 힘을 되갚아줄 수 있는 무자비한 폭력을 원했다. 세계를 혁신할 힘, 근본을 뒤흔들고 압도할 힘을 원했다. 닐 디란디는 바로 그때,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로 거듭났다. 모든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채 선택한, 피투성이의 길이었다.
입 속으로 그 소년의 말을 반추했다. 우리 역시 테러리스트다. 그렇다. 어차피 그들도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인간이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학살을 되풀이하는 폭도일 뿐이다. 알고 있다. 알면서 선택한 길이다. 앞날에 희망 따위는 시작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줄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알고 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다.
그 소년의 말에 격분한 것은 그의 내부에 도사린 복수자의, 닐 디란디의 감정이었다. 단지 일방적인 폭력을 저주하고 그 밖의 일은 배려할 생각조차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소년으로서의 부분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가 납득한, 어차피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복수자 닐 디란디는 납득하려 하지 않았다. 닐 디란디는 말 그대로 복수의 화신이다. 미숙한 소년답게 그 밖의 일은 고려해 볼 의사조차 없는 직선적인 증오에 불타는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 어린 진정성은 때때로 록온 스트라토스로서의 그마저도 뒤흔든다.
본디 <록온 스트라토스>는 <닐 디란디>에서 파생한 것이다. 무엇보다 록온 스트라토스 자신이, 그 이름은 기만에 불과함을 깨닫고 있었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세계의 변혁을 꾀하는 그 존재 역시 복수자의 줄기에서 뻗어나온 일개 가지일 따름이었다. 그의 줄기이자 뿌리는 복수자 닐 디란디였다. 변혁자이자 테러리스트인 존재라면 응당 허용할 일을 닐 디란디는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자기 자신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것이 마감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관통시킬 이마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테러리스트인 록온 스트라토스를 복수자 닐 디란디는 결코 용서치 않는다. 몇이나 죽였는지 더는 기억도 못할 손으로, 최후에 당겨야 할 방아쇠만은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복수자 닐 디란디가 테러리스트 록온 스트라토스를 처형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닐 디란디는 복수자였다. 복수밖에 염두에 없는, 가엾은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록온 스트라토스로서의 그는 어떠한가.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록온 스트라토스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복수 하나에 모든 의지를 집중한 닐 디란디와는 달리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다른 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는 여유마저 웬만큼 지닌 인간이었다. 때문에 록온 스트라토스로서의 자신은 안이하게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지 않았다. 살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생존을 갈망하는 누군가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오로지 테러리스트와 맞섰을 때에만 그는 복수자 닐 디란디로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록온 스트라토스가 관여하고 말고의 여부에 상관없이 주변은, 세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그러진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비틀릴 수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그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렇게 아무 상관도 없이 스러져간 약자의 목숨에 대한 책임을 록온 스트라토스는 내던지지 않았다. 일방적이고 모순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가를 자신은 각오하고 있다. 이제 와서 몸을 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찍이 자신이, 닐 디란디가 품었던 만큼의 증오를 그에게 돌리는 자가 있다면 그 역시 허용하리라. 자신은 벌을 받고도 남을 행위를 무수히 저질렀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테러리스트였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때문에 책임을 내던지려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자신에게는, <닐 디란디의 복수>와는 별도로 벌이 주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복수자 닐 디란디가 아닌 테러리스트 록온 스트라토스였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로서 그는 응분의 엄벌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한 인간으로서 록온 스트라토스는 스스로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을 벌로써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가 원치 않는 것이란, 곧 그의 근간이자 전부인 닐 디란디에 직결된 것이었다.
닐 디란디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닐 디란디의 갈망은 오직 하나, 최후로 남은 테러리스트 록온 스트라토스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 그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록온 스트라토스이자 닐 디란디인 그의, 의심할 여지 없는 그 자신의 의사였다. 그러나 책임을 포기하지 못하는 록온 스트라토스가 원한 형벌은, 스스로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록온 스트라토스는 살아야만 했다. 닐 디란디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고 꺼질 줄 모르는 원념에 짓눌리고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했다. 애초에 닐 디란디에게는 복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복수 이외의 무엇에도 흥미를 갖지 않았다. 스스로의 목숨을 존중할 마음마저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야 했다. 자신의 근간이자 근원인 닐 디란디의 절실한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최후까지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록온 스트라토스로서 받아야 할 형벌이고 져야 할 책임이었다. 천상인으로서 새로이 첫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록온 스트라토스는 그 하나만은 가슴에 새겨두었다.
지금, 그 결의는 뿌리부터 뒤집히려 하고 있다. 떨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자 경련하는 시야가 주위를 비추었다. 그들 천상인을 껴안은 성모의 품 안, 눈앞에는 세 명의 소년이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잔손이 많이 가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처음 대면한 이후 이날 이때까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기를 거부하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들이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온화한 인간이었다. 복수 외에는 안중에 없는 닐 디란디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록온 스트라토스는 해냈다. 온화한 인간답게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아끼고 돌보고 애정을 베풀었다. 모든 것은 록온 스트라토스의 온화한 성품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어쩌면, 그게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다채롭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그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복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닐 디란디에게는 눈을 돌릴 기회조차 없었을, 가장 어린 소년이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록온 스트라토스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무너졌다. 껍질 속에 그토록 완고히 틀어박혀 있던 소년은 지금, 미미하나마 틀림없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전 냉정하게 제재의 철퇴를 휘둘러 주었던 수려한 소년 역시,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동요를 노출시키고 있다. 몰랐던 것을 조금씩 배워가는 소년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때 자신의 내부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었음을 록온 스트라토스는 부정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아이들의 옆자리에 머물며 성장을 지켜보고, 유년시절을 상실한 소년들이 그 나이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느리게나마 착실하게 인간미를 더해가는 소년들이, 아이답게 웃고 방황하고 그럼에도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것은 평범한 삶을 명색으로나마 알고 있는 <자신>의 진심이 어린 기원이었다. 이 아이들을,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서 지켜보고 싶다. 록온 스트라토스의 그러한 소망은 지금, 복수마저도 초월하고 있다. 죽기를 원하는 닐 디란디의 갈구를, 살고 싶어하는 록온 스트라토스의 욕구가 압도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록온 스트라토스는 책임을 포기하지 못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테러리스트고 살인자였다.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학살자였다. 그 형벌은, 그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의 결의는 역전되었다.
결론은 간단했다. 스스로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되는 일이다. 닐 디란디로서의 복수와, 록온 스트라토스에게 부과된 형벌. 단지 총알을 박아넣는 순간에 품을 감정이 정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아이들의 미래를 끝까지 지켜보고픈 소망이 답을 얻지 못한 채 끝나버릴 줄 깨닫고 있는 까닭이다. 건담 마이스터인 록온 스트라토스는 미션에 따르는 죽음을 긍정한다. 테러리스트인 록온 스트라토스는 형벌로서의 죽음을 긍정한다. 복수자인 닐 디란디 역시 증오의 완수로서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마감된 후, 이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에 세 명의 소년이 비쳤다. 너나 할 것 없이 잔손이 많이 가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세 아이 모두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나이에 맞게, 아이답게 살아주려 하고 있다. 아아, 보고 싶었는걸. 무심코 중얼거리자, 무얼? 이란 반문이 세 가지 음성으로 한꺼번에 돌아와 그만 웃고 말았다. 하나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고 하나는 기분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하나는 희미하게 눈을 치켜떴다. 이 아이들은 이렇게나 변하지 않았는가. 살고 싶다. 처음으로 살고 싶어하고 있다. 한 인간으로서, 실현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될 삶을 갈망하고 있다. 목구멍 안쪽이 두려움으로 설핏 떨리며 막연히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할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이 아이들의 미래를 보고 싶었다. 테러리스트도 복수자도 아닌, 평범한 한 인간으로서, 지켜보고 싶었다.
거 참, 미련하게도 살았다니까. 내 일이지만.
"END of ME"
08.02.27
"벌은 달게 받겠다" 는 말을 보완하려고 쓰기 시작했다가 7화...였나? 록온이 티에의 멱살을 잡았던 화요. 그쪽의 보완도 안 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그 점까지 뭉뚱그려 새로 썼더니 대책없이 길어졌습니다. 이래봬도 많이 줄였는데 말예요... 히이익.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단순한 복수자로 되돌아간 록온은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될 거라고,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츠나랑 알렐이랑 티에가 귀엽고 귀여워져서 난처해 하라지요. 죽는 게 무서워지라지요.
....정말, 10년 내내 죽지 못해 겨우 살았던 사람이었고,
언제나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 느꼈을 사람이었고,
테러리스트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납득은 못했고,
늘 제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을 테고,
그럼에도 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허나 또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없이 손놓고 죽어버린 이 남자를 어쩌면 좋나요...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