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은혼 빠질을 시작한 이래 나는 한 개 네로 울프 시리즈의 열렬한 빠순이로서 긴상이 아치 굿윈 역에 그야말로 최적이라 늘 확신했었다. 손 빠르고 몸 빠르고 입 빠르고 말빨 좋고 능력 만땅에 본의 아닌 어장관리의 달인에다 잘생기기까지 한(-_-) 총각. 자백하자면 긴상의 주절주절의 벽을 넘어야 할 땐 옆에다 네로 울프 미스터리 하나를 펴놓고 아치의 반 페이지는 그냥 넘어가는 장광설을 곁눈질하면서 눈 굴리기로 썼더랬지요.
이쯤 되면 패러렐 전문-_-인 내가 동할 만도 하거늘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크나큰 문제가. 아치는 상사와 허구헌날 치고받고 서로 틈만 나면 속을 복복 긁어대며 개싸가지스런 독설을 퍼부어대는 주제에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결국 딱 하나 울프뿐인 (아니 진짜다;) 진성 호모(....)란 말이죠. 심지어 이건 나만의 주장도 아니다. 영국 추리사가 줄리언 시몬스(남자다!)가 실제로 자기 저술에서 주장한 내용입니다. 글쎄 진짜라니까!!!
아무튼 2007~2008년 경 당시의 나는 긴히지 골수분자였고, 허나 아무리 골수분자기로서니 부장 주제에 네로 울프 해먹을 깜냥이 되겠는가효. 기실 부장에게는 10년 넘게 울프와 굿윈에게 어찌나 탈탈탈탈탈 털리고 볶였는지 그놈 둘이 사건 현장 반경 100미터 내에서 어슬렁거리고만 있어도 바로 히스테리 및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는 불쌍한 크레이머 경감이 딱이지 말입니다. 울프-굿윈 관계가 저리 굳건하고 모에하며 네로 울프 시리즈의 캐논이거늘 (아치는 심지어 '남자를 다발로 잡아먹은 팜므파탈이지만 내 앞에선 수줍은 한 떨기 소녀 되는 백만장자 캐미녀'라는 미연시 싸다구를 40번 왕복으로 후려칠 설정의 릴리 로원을 따놓고 울프와 부부 싸움이나 하고 있는 놈이다!) 뜽금없이 굿윈X크레이머 경감이란 캐마이너;를 할 수도 없는지라 - 솔까말 불가능한지라 - 즐거운 패러렐을 포기하고 묻어버린지 어언 2년, 은혼에 재연소를 시작한 내 성향은 다소 바뀌어 있었다.
예서 잠시 정리해 보면, 네로 울프는 (7분의 1톤에 달하는 몸집을 잠시 잊는다면) 성질 더럽고 신경질적이고 취향은 기괴복잡하고 까다롭고 드럽게 귀족적이며 사람을 턱짓으로 부려먹는 덴 아주 도가 텄고 필요 이상의 일은 절대 하고 싶어하지 않는 절정의 잉여에 세상이 다 내 발 밑으로 굴러와야 하는 줄 아는 진성 여왕캐입니다.
......예,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놈이 은혼에 딱 하나 있긴 있지요. 누군지 꼭 말로 해야 알겠습니까 왜 이래요 아마추어같이.
그래서, 손도 풀 겸 해봤다. ↓이렇게.
참고로 긴상 특유의 개드립을 추가하고 일부 대사를 약간 천박하게 어레인지한 걸 빼면 대사와 상황은 거의 원작 그대로입니다.
"난 니놈 새낄 알아, 사카타."
"저런, 한때 침대 속에서는 긴토키라고 불러주기도 했는데. 보석처럼 간직한 추억이야."
히지카타 군은 화장실에서 뭐가 나오다 만 것 같이 오묘한 표정을 짓고 침묵했는데 주먹과 발을 한꺼번에 휘두르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억누르는 티가 역력했다. 이를 앞뒤로 끼익끼익 갈아대는 소리가 담배를 꼬나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고, 분해서 씨근대는 숨소리와 역시 분해 죽으려 하는 어마어마한 저음이 그 뒤를 이었다.
"난 니놈을 안다고." 히지카타 군은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인간 하나가 니놈한테 전혀 들키지 않고 파티장에서 감쪽같이 내빼?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아니 얘가 애먼 긴상을 잡네. 난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내 품안에서 사람 숨이 넘어가는 판이었고, 다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구. 아무리 긴상이 유능하고 훌륭해도 그 와중에 뭔 수로 애들 동향을 일일이 헤아리리? 아주 내가 범인 도주에 종범 노릇했다고 생트집 걸고 넘어지지 그러슈?"
"생트집 잡는 건 니놈이다! 지문을 안 남기려는 꿍심을 품지 않았는데 실내에서 굳이 장갑을 낄 이유가 뭔진 몰라도, 지금 당장은 누가 산타클로스가 범인이라디?! 근데 돌아가는 꼴을 볼작시니 암만 잘 봐주려 해도 이건 니놈이 산타클로스가 누군지 알고 말려들게 하지 않으려 도주를 방조하고도 모자라 이젠 행방을 수사하는 경찰 뒷다리까지 물고 늘어지는 판이잖아! 아니란 거냐!?"
"와아 끔찍해. 내가 나한테 조언을 구했다면 발벗고 뜯어말렸겠수."
"입 좀 닥쳐!!" 히지카타 군이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산타클로스의 정첼 알지?"
"설마요."
"니놈이나 다카스기가 산타클로스랑 무슨 관계가 있지?"
"무슨 말씀이실까아. 긴상은 도통 모르겠어요오."
"젠장, 셋 셀 동안에 냅다 꽁지 말고 꺼져 백발. 곧 출두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아."
"케츠노 아나운서가 보우하사 오늘밤이 아니기만 빈다. 긴상은 일이랑 결혼한 누구누구랑 달라서 잠도 자고 밥도 먹어야 하거든." 나는 문을 열었다. "내 주소는 알지?" 내가 눈더미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히지카타 군은 시동을 걸고 쏜살같이 떠났다. 아이고 꽁하니 귀엽기도 하지.
(Christmas Party 中)
"그 사람들 여기 안 사는데요."
"야 이 육실할 천연 파마 새꺄!" 히지카타 군이 매우 무례하게 포효했다. 이 앤 지금 당장 칼슘부터 섭취해야 한다. "문 냅다 열어!!"
"못해. 경첩이 부러졌어. 럴수 럴수 이럴 수가 방금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꺄아아아 살려줘요──사람 먹는 괴물 집에 갇혔어요──."
"헛소리 나발대지 말고 열어! 그놈들이 여기 있는지 다 알아!"
"어머나 무슨 말을. 세상엔 오오구시 군이 모르는 일이 더 많습니다요. 인생 선배인 이 오빠 말을 콱 믿으라니까? 들어오고 싶거든 영장부터 내놔 봐. 없어? 세상에 영장도 없이 선량한 민간인을 권력으로 위협해서 사유지를 침범하려 했단 말야? 그러고도 니들이 민중의 지팡이 경찰입니까? 하긴 지금 판사들은 전부 점심이나 먹자고 나가고 없,"
"니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생각한다면,"
"난 생각 안 해. 그런 골치아픈 일은 다카스기가 합니다. 긴상이 가진 건 불합리한 폭력뿐이에요. 이렇게 말이지,"
나는 히지카타 군의 면전에서 문을 쾅 쳐닫고 여섯 개의 최신 도어록을 전부 주르륵 잠가버린 다음, 부엌으로 가서 뒷문도 봉하고 즈라에게 손도 대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서야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카스기는 말을 끊고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내 자리에 도로 앉았다.
"세 명의 성난 사람들이 왔더라. 보나마나 영장 받아갖고 다시 올 겁니다. 지치지도 않는다니까 걔네들은."
"누구였냐."
"오오구시 군하고, 소이치로 군하고, 에 또, 그 대머리."
"히지카타에 오키타에 하라다인가. 핫!" 다카스기는 심술궂게 웃었다. "초인종 끊어버려."
"끊었어."
"뒷문도 잠가."
"잠갔어."
"착하군."
(Cordially Invited to Meet Death 中)
나는 시신의 머리통에서 대략 20센티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서 녀석을 기다렸다.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고, 녀석이 나타났다. 사무실로 들어온 다카스기는 나나 즈라가 아니면 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희미하게 움찔하고 멈춰섰다. 하나뿐인 녹색 눈이 이이지마 사나에를 쳐다보고, 나를 째려보고, 지옥 바닥을 쳐달리는 무시무시하게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었다. "……갔다더니?"
"응, 갔어. 봐, 완전히 갔잖아."
"지금 장난하냐?"
"장난이라뇨 불경하게스리." 나는 옆으로 비켜섰다. "보시는 바대로야."
다카스기는 이쪽으로 다가와 대략 4초 가량 시체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는, 나와 이이지마를 비켜 제 책상 건너편의 그놈 체격의 한 두 배쯤 되는 맞춤형 안락의자에 푹 파묻히더니 잠시 동안 심호흡을 하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니놈이 3층으로 올라올 때만 해도 살아 있었대며."
"응, 저 의자에 앉아 있었어." 나는 의자를 가리켰다. "혼자였고. 같이 온 사람은 없었어. 문이야 당연히 잠겨 있었지. 즈라는 허연 거적떼기랑 물건 사러 나갔고 말야. 내가 발견했을 땐 옆으로 누워 있었어. 숨결을 확인하려고 똑바로 눕혀서 저래. 물론 넥타이부터 잘라내고. 그래놓고 의사한테 전화를 했는데──."
하얀 얼굴이 무슨 신문지처럼 와드드득 구겨지는 광경은 나름 장관이었다.
"뭔 넥타이?"
"니가 어젯밤에 책상 위에 내팽개쳐둔 넥타이. 글쎄 그게 목에 칭칭 감겼더라지 뭡니까. 아마 먼저 저 문진으로 뒤통수를 때렸지 싶어요." 나는 문진도 가리켰다. "얼굴을 보건대 숨통을 끊은 건 넥타이가 맞을 거야. 일단 내가 끊어내긴 했다만──."
"지금, 감히, 저 여자가, 내 넥타이에, 목이 졸려 죽었다고, 주장할 셈이냐?"
"긴상은 주장하지 않습니다. 서술할 뿐입니다. 슬립매듭으로 꽉 조르고 목에 한 번 더 감아서 세로매듭으로 마무리했더라고." 나는 양탄자 위에 떨어진 넥타이를 집어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보라구. 이번엔 감히 주장하겠는데 이놈만 여기 없었어도 범인은 뭔가 손수건이라던가 딴 물건을 써야 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꾸물대지 말고 좀만 더 빨리 내려왔으면──."
"닥쳐."
"넵."
"이게 다 누구 때문이냐, 응?"
"어이어이, 그저 만만한 게 조수라고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기요. 그야 긴상이 어젯밤 여러모로 분발한 건 인정하는데, 아무리 신짱한테 홀딱 반한 의뢰인이 졸라 비싼 놈으로 선물했기로 새삼스럽게 집안에서 까만 넥타이는 왜 하냔 말야. 하얀 피부랑 새까만 천의 조화가 얼마나 보는 사람 싱숭생숭한지 너는 슬슬 좀 깨달읍시다. 아, 자기 손목이 얼마나 먹음직스럽고 묶기 좋게 보이는지도 이제 그만 알아줬으면 굉장히 고맙겠고요. 게다가 넌 여기저기가 다 자그만해서 얼굴 절반이 손 안에 쏙 들어가지 말입니다. 너같은 게 사무실 한가운데 오도카니 앉아 있음 누구라도 침입한 괴한이라던가 원한을 품은 누군가한테 이런 저런 야하고 무엄한 짓을 당하는 AV 시추에이션으로 롤 플레잉 한 번 해보고 싶어지지 않겠어? 기왕 하는 김에 묶는다던가 눈을 가린다던가 책상 위에서 한다던가 이런 저런 옵션도 끼워보고 싶지 않겠어? 난 절대 나쁘지 않아요. 긴상의 본능에 불 댕긴 니가 나쁩니다. 이래봬도 걸핏하면 앓아눕는 병약한 온실 속 공주님 신짱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소프트코어로 많이 참아주고 있는데, 지도 좋다고 울고 불고 난리쳤으면서 꼭 유치찬란하게 넥타일 책상 위에 내동댕이치고 나 삐졌소 시위를 해야겠───."
"미싱으로 박아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새꺄."
"넵."
"정말 못 참겠군."
"넵 대장님."
"난 이거 인정 못한다."
"그건 아니죠 대장님. 물론 이놈의 넥타이 확 태워버리고 히지카타 군한테 범인이 뭘 썼든 간에 하여간 그놈은 이이지마 씨가 완전히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수해 간 게 틀림없다고 보고할 수도──."
"닥쳐."
(중략)
노트북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 금고 문을 한 번 흔들어 보고, 홀로 가서 앞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 체인을 걸고, 한 층을 올라가 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즈라가 굳건한 마호가니 문에 고개를 처박고 걸레처럼 꾸겨져 있었다. 어둑어둑한 복도에 쓰잘데없이 길기만 긴 머리카락이 우수수 흩어진 꼴이 숫제 바닥을 머리로 쓸어대는 사다코 꼬락서니였다. 이놈이 여기 있겠거니 예상하고 올라왔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솔직한 마음으로 까놓고 말해 남만다부를 외치며 여기가 몇 층이건 말건 힘차게 창문을 깨고 바깥으로 몸부터 날렸을 게다. 우야든동 꼴을 보면 볼수록 차마 손으로 흔들어볼 용기는 나지 않아서 발끝으로 찔렀다. 꾸욱꾸욱.
"야 임마 즈라야,"
"즈라 아니라 카츠라다."
내가 뒷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즈라가 용수철 달린 좀비마냥 뭉클 솟아올랐다. 넌 깜짝상자냣!
"이 일을 어쩌면 좋나 긴토키. 신이 문을 걸어잠그고 열어주지를 않는다네. 하루에 두 끼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저녁마저 굶다니 이게 될 말이며 심지어 한 시간 전에 날 좀 내버려두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천식이 도질 기미마저 보이질 않는가. 기껏 나아가던 폐도 도로아미타불이 될지 모르네. 이러다 신이 크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어찌 지하의 아저씨 아주머니께 얼굴을 들 수 있겠나. 아이고 우리 애가아아아아아아아아"
종국에는 제풀에 패닉에 빠져 온 집이 다 떠나가라 꺼이꺼이 통곡을 해대는 즈라에게서 쟁반을 뺏고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뭔 수를 써서라도 먹일 테니까 가서 잠이나 자라. 좋은 꿈 꾸든 말든 그건 니가 알아서 하고."
친절한 긴상의 제안에 돌아온 대답이라곤 참으로 무정하게도 계단 아래로 길게 꼬리를 끄는 우어어어어어어어 비명뿐이었다. 나는 예의상 문을 세 번 두드리고, 안에서 새어나오는 그르렁 반 신음 반의 항의를 무시하고 어째서인지 있는 마스터키로 문을 따고 들어갔다. 다카스기는 신경질적인 표정에 핏발이 선 눈으로 책을 움켜쥐고 안락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여미기도 귀찮았는지 칠칠치 못하게 반쯤 풀린 셔츠 밑으로 창백한 속살이 훤히 보이길래 문을 도로 닫으면서 한 마디 해주었다. "불평 한 마디 하는데 꼭 하반신에 뭐 박힌 것 같은 소리를 내야겠습니까. 긴상 서는 줄 알았다."
그랬더니 곧장 책이 날아왔다. 참고로 두께가 6cm에 달하는 하드커버였다. 죽일 셈이냐.
(Eeny Meeny Murder Mo 中)
"야 그만 좀 웃기셔." 나는 다카스기 쪽으로 빙글 돌아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검사의 질문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검사는 지극히 모욕적이고 뻔뻔스럽고 무례하며 우스꽝스러운 전제에 기초하여 본 변호사가 언놈에게 떨려날 수도 있다는 말 같지도 않은 가정을 내놓는 것으로 그치기는커녕 본인이 애시당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지도 않았던 자리에서 떨려났다고 박박 우겨대고 있습니다."
"이의를 인정합니다." 다카스기의 입끝이 아주아주 살짝 들려올라갔다. "다시 질문하십시오, 히지카타 검사."
"닥쳐 이 새디스트 새끼들아!"
히지카타 군은 핏대 세우고 고함지르다 하마터면 양탄자에 다이빙할 뻔한 담배를 가까스로 구해냈다. 그 와중에도 내게 나름 서릿발 같아 보이기는 하는 눈길을 똑바로 못박고 있었지만. 꺄아 긴상 두근거려요.
"순순히 부는 게 신상에 이롭다 백발. 우린 그 여자의 진술서도 확보했어. 츠네모토가 한 주 전에 여기 왔을 때 뭐가 오고갔지?"
"옥수수 말고 뭐가 있겠수. 그 친구가 나한테 줬는데."
"거 개그 한 번 유쾌해서 눈물난다야? 그거 말고!"
"어디 보자." 나는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음, 벨이 울렸고, 내가 나가서 문을 열고 맞아들였지. 농장에선 어떻냐고 물었더니, 상자를 건네주면서 이러더라. 그대로 인용할게. '고마워 죽겠네요. 지옥처럼 덥고 물집도 잡혔어요.' 상자를 받고 시골의 근간을 이루는 일인데 까짓 물집 좀 생기면 어떻냐고 위로했더만 냉수 마시고 속 차리램서 가 버리대. 그래서 문을 닫고 부엌으로 상자를 날라갔지."
"그래서?"
"그게 단뎁쇼. 뭘 기대하는겨? 설마 오오구시 군, 뭔가 화끈한 얘길 바라는 거야? 어머머 싫어라. 요령이라곤 없어갖고 요즘 미스 오른손과 고독한 연애를 즐길 시간조차 없기로서니 이런 데서 깊은 욕구불만을 해소하려고 하면 못 쓰지 말입니다. 마루야마 군은 여자도 아니고 내 취향도 전혀 아니라구요 미쳤다고 썸씽이 생기겠니. 그치만 오오구시 군 귀여우니까 정 밤이 외로워 몸이 비비 꼬이면 이 긴상 한 몸 불살라 봉사할 수도──."
"츠네모토다! 닥쳐! 정말로 닥쳐!"
히지카타 군은 한참 씨근덕거리다 마침내 진정하고 씹어뱉었다.
"새삼 옷 입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1분 주마. 칫솔 챙겨 당장 튀어와."
"여봐요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손을 벌려보였다. "착한 어린이는 슬슬 잘 시간이라고. 미사키가 조서에 뭐라 써서 냈는진 모르지만 하여튼 내가 걔랑 접선해서 말 맞추기 전에 나를 좀 족쳐보고 싶은 거 아뇨. 나 여기 잘 있잖아. 힘들게 시내까지 데려가려 하지 말고 걍 예서 물어보지?"
"1분 다 지났다. 벌떡 일어나."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시러. 나한텐 앵돌아질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 한 번 써볼란다. 어디 한 번 잘해보셔."
"내가 못할 줄 아냐? 사카타 긴토키, 네놈을 주요증인으로 체포한다. 냉큼 일어낫!"
"피이, 영장도 없으면서. 그치만 불쌍하고 히스테릭한 오오구시 군을 괴롭히는 건 선량한 일반시민의 도리가 아닙지요." 나는 다카스기를 보았다. "내 얼굴이 그립거든 야베 군한테 연락 좀 넣어주련?"
"쿠사카다 병신아. 요만큼도 그립지는 않지만 노동력은 필요하니 그러지." 다카스기는 차갑게 대꾸하고 히지카타 군에게 시선을 던졌다. "니가 상당히 자주 입만 나불대는 어느 천연파마보다 제법 쓸만한 줄은 내가 제일 알지만, 니 녀석의 대책없는 멍청함엔 가끔 벌린 입이 안 다물어진다. 이 얼간이 하나 잡아가는데 오죽 정신이 팔렸으면 사람 골머리를 썩이는 중차대한 문제를 싸그리 잊어버릴 수가 있냐." 녀석은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옥수수를 가리켰다. "대체 누가 이딴 옥수수를 딴 거야? 쳇!"
"지금 사람이 죽었거든!? 옥수수 따위 아무래도 좋거든!? 그거 전적으로 니 일이거든!?!" 히지카타 군은 인내심을 잃고 콧김을 뿜으며 버럭거렸다. "뭘 실실 쪼개고 자빠졌냐 백발! 썩 발이나 놀려!"
(Murder is Corny 中)
여전히 쓸데없이 길다; 기왕 저지른 김에 걍 같이 해본 인물 설정.
사카타 긴토키 (아치 굿윈)
다카스기 신스케의 비서 겸 조수 겸 행동대장 겸 딱갈이 겸 잡역부 겸 기록계 겸 내레이터 겸 소꿉친구 겸 오빠 1 겸 섹스 파트너(....). 시키기만 하면 뭐든지 잘하는 요로즈야 긴상입니다. 어? 변호사 자격증도 있지만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사실상 무용지물. 뭐 가끔 고문변호사 노릇도 하긴 한다. 입 빠르고 몸 빠르고 손 빠르고 오지랖의 넓이가 일본 열도쯤은 너끈히 뒤덮는 본격 어장관리의 달인. 기본 장착된 '내-설득력-있는-설교를-들어라' 기능으로 남녀노소 가림없이 무자비하게 베어넘기는 주제에 전혀 본의가 아니라는 점이 짜증난다. 헐레벌레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은근히 엄마친구아들 알파메일이고 심지어 미형이다. 매우 짜증난다. 쉴새없이 나불나불 수다 떠는 주제에 진짜 중요한 말은 한 마디도 안 한다. 실은 할 줄 모른다. 더더욱 짜증난다. 신스케와는 할 짓 다 했고 현재진행형으로 하고 있고 뭔가 애증과 집착이 들끓는 것 같은데 바깥에서는 우리는 매우 청순한 관계요 뭔가 하면 근친상간이라는 날구라를 치고 다닌다. 둘이 잔다는 걸 즈라가 아는 날엔 맞아죽기 때문이다. 긴토키만. 하지만 히지카타 군도 예뻐서 좋아합니다. 양다리라뇨 그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다카스기 신스케 (네로 울프)
대략 법 두세 개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어마어마한 자산가의 금지옥엽 외동아들. 기어올라오는 놈은 무차별 포격으로 떨구는 탑 위의 흉포한 히메사마 겸 여왕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천재 피아니스트에 시인 소질도 만땅했지만 폐도 약하고 위도 문제 많고 천식 기미도 있고 빈혈도 심하고 눈 하나도 안 보이고 아무튼 건강이 너무 개차반이라 은둔하고 인류 문명의 빛나는 유산이나 열씨미 향유하는 꼴잉여한 삶을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탐정 비스끄리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 점에서는 파일로 반스. 본인은 졸라 불만이다. 어떻게든 그쪽 일을 안 하려 발버둥치는데 즈라가 눈물 흘리며 기뻐하는데다 날로 추종자가 늘어만 간다. 뭔가 행동부대도 둘이나 붙었다. 어째 건강도 나아지고 있다. 솔까말 이놈 건강은 안 먹고 안 자고 담배를 굴뚝처럼 피워대지만 않아도 진작에 나아졌다. 요즘은 그냥 포기하고 경찰이나 갈군다. 어차피 몸으로 뛰는 건 긴토키가 다 알아서 한다. 미성년자일 때 재산 상속 + 병약 + 쓸데없게스리 한계점을 넘어 비등하는 에로 페로몬이 삼중으로 겹친 탓에 날파리들이 많이 붙어 인간불신이 위험 수준이다. 취향도 입맛도 성격도 취미도 미칠듯이 까다롭다. 대략 두 달에 한 번 꼴로 이혼병(離魂病)이 도진다. 말 그대로 혼이 몸에서 빠져나간다. 즈라에게 엉겨붙어 부엌에서 살지 않으면 침실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다. 긴토키는 후자를 좋아한다. 뭘 해도 입으로만 짜증내지 밀어내진 않거든. 응?
카츠라 "즈라" 코타로 (프리츠 브레너)
다카스기 신스케의 주치의 겸 집사 겸 요리사 겸 가정부 겸 보모 겸 소꿉친구 겸 오빠 2 겸 엄마(....). 신스케와는 갓난아기 시절부터 부대낀 질긴 인연이자 이웃사촌. 그래서인지 어쨌는지, 도대체 어디서 뭘 잘못 주워먹었는지 신스케를 제 막내'여'동생 내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어여쁜 딸내미로 착각하고 산다. 유명한 병원의 스카웃 제의도 전부 파작하고 자청해서 다카스기 가로 굴러들어와 순전히 자의로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결혼은커녕 여자도 제대로 사귀어보지 않은 인간이 주부 겸 엄마 근성이 쩐다. 이놈이 유부녀 모에인 건 어쩌면.... 어흠어흠. 신스케는 즈라가 뭔가 떠먹이려 달려들면 귀찮아 싫어 저리 가 있는 대로 짜증내면서 다 받아먹는다. 긴토키를 좀 많이 신뢰하는 나머지 친구와 동생이 자는 줄은 아직도 모른다. 의사 주제에 걸핏하면 패닉에 빠지고 그 강도에 따라 호칭이 '다카스기' → '신스케' → '신'으로 바뀐다. 실은 요리는 엘리자베스가 한다.
엘리자베스 (시오도어 호스트먼 / 때로 솔 팬저)
즈라가 귀애해마지 않는 애완동물이자 신스케의 난초 컬렉션을 책임지는 전속 정원사. 요리의 달인이기도 하다. 남들은 즈라가 요리하는 줄 안다(즈라는 썰면 반찬이고 끓이면 국인 걸로 생각한다). 생김새는 허연 푸대자루나 거적떼기 같은 게 싸나이답다. 만렙이다. 똘똘하다. 아마도 이 집에서 제일 쓸모있다. 필요할 때는 유능한 조사원으로 변신한다. 긴토키도 내가 본 중에서 가장 추적과 정보 캐기에 능란한 조사원이라 평가했다. 전직 FBI였다는 것 같다. 엉?
히지카타 토시로 (크레이머 경감)
도쿄경시청의 경감. 나름 유능하고 별명도 '귀신 경감'인데 실은 중간관리직 특화형이고 영락없는 엄마 체질에다 어쩐지 만만해서 무능하니 사람만 좋은 스토커 고릴라 상사와 말 안 들어쳐먹는 멍청한 부하들에게 아래위로 치여 삶이 고달프다. 항상 불만에 쩐 얼굴로 담배를 물고 있다. 꿈도 희망도 사생활도 없고 위안은 마요네즈와 담배뿐인 서글픈 인생. 병딱 기질이 너무 투철한 나머지 얘만 보면 서로 허구헌날 물고 뜯고 험담하기 바쁜 긴토키와 신스케가 순식간에 태그를 짜서 인정사정없이 갈구고 긁고 밟아댄다. 기회가 되면 카츠라도 가세한다. 심지어는 부하인 오키타도 가담한다. 특히 두 놈에게 얼마나 졸렸는지 사건 현장 반경 50미터 내에 긴토키나 신스케의 흔적만 보이면 근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두 놈 다 감옥에 쳐넣는 것이 꿈이지만 이루어질 날은 요원해 보인다. 사실 1: 이미 긴토키에게 홀랑 잡혀먹혔다. 사실 2: 긴토키에게 홀딱 반해 있다. 본인 빼고 다 안다.
오키타 소고 (펄리 스테빈스 경위)
도쿄경시청 소속. 원작에서는 주로 울프가 크레이머 경감을 긁어대고 아치는 스테빈스 경위를 놀려먹지만 여기서는 그런 거 없☆다. 히지카타 갈궈 말려죽이기를 인생의 보람으로 여기는 상큼한 새디스트 호청년. 음? 할 때는 하며 매우 잘 한다. 하지만 에피소드 하나가 거의 끝나가고 범인을 체포하게 될 때까지 손놓고 하지 않는다. 실력은 필요 시에만 발휘하면 된다가 모토. 강자를 존중하므로 위의 일당들에게 나름 존경의 념을 품고 있다. 하지만 경감이 어딘가의 백발에게 마구 휘둘리는 건 왠지 못마땅하다. 그 이유는 본인도 모르므로 아무튼 히지카타만 갈군다.
릴리 로원의 역할은 타에 씨와 삿짱이 대강 분담하면 되겠고(미 미안합니다 언니들;), 울프 도당은 카무이/아부토를 비롯한 귀병대/하루사메에 적절히 분배하면 오케이. 좋았어 중요 배역은 다 정해졌다!
그런고로 앞으로도 자주 이 짓을 하겠습니다. 훗훗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