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쌍 오로치에 관한 소식을 꽤 늦게 접했음. 돈에이 새끼들이 드뎌 미쳤구나 악악악악악악악악
노다메 칸타빌레 애니를 이제서야 봤다. 역시 토모 군의 목소리는 끔찍하게 좋다. 인간은 바보지만.
그 사이에 4만 히트 넘었다...!!! (경악)
누가 나한테 노타이 수트에 워커를 신고(짓밟는 덴 이게 짱이므로) 담배 꼬나문 도노 하나만 던져주세요. 어흐흐흐흑.
이걸 완성하기 전엔 절대로 업을 하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미친듯이 썼더니 분량은 두 배로 늘어난 대신 원래 의도했던 방향에서 삼천포의 방향으로 빠지고 말았다. 하여간 이젠 거의 습관이 된 듯한 무모+무식+무대포의 손오 버전 베르바라 시리즈 또 나갑니다.
쪽팔릴 양심이 조금은 있으므로 경고문은 걸겠음.
Alert! 다음 사항에서 하나라도 용납할 수 없으신 분은 Backward를 요망하겠음.
* '이번에도' 소패왕은 여자;입니다.
* 늘 그렇지만 주유의 취급이 아주 막 나갑니다. (팬 맞습니다;)
* 역사 왜곡을 해도 정도가 있습니다.
* 제목은 언제나 그렇듯이 적당주의.
* 결정적으로, 재미없습니다. (식은땀)
SIDE A-48. 반한 죄(惚れた弱み)
주유는 손책을 위해서라면 출산쯤은 기합으로 해낼 게 틀림없다는 어느 겨울날의 쓸데없는 발상에서 파생된 단편. (디테일을 보강해 주신 S의 뮤즈 지벨 님께 바칩니다) 처음엔 분명 썰렁 개그로 밀어붙일 작정으로 착수했는데 쓰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어정쩡해져 버렸다. 문재의 결핍은 노력으로 어찌 되는 일이 아니므로 대충 넘어가자.
손책이 주유를 너무 막 다루는 걸로 보이겠지만 이것도 애정 저것도 애정. 저건 근본이 못돼쳐먹어서 어쩔 수 없다.
남자 버전과 여자 버전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누가 뭐래도 유책이지만 후자는 볼 거 없이 책유라는 것. (....)
하여간 이걸로 질이야 어쨌건 간에 노르마는 클리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털푸덕.
덤 하나. 요즘 일각에서 꽤 화제가 되고 있는 모 중국 일러스트레이터(누군지 이름 좀 알자!!)의 삼국무장 여성화 일러스트의 손책 백부 버전을 괜시리 붙여 보는 S.
실은 이 아가씨 얼굴이 상당히 취향이어서 여성 버전 이미지 모델로 삼을까 고민도 좀 했는데 결국 포기했음.
그치만 가슴이 너무 크단 말이다!!! <-...
친우이자 형제, 동지이자 주군.
그리고 나의 아내.
손백부.
On the Forehead
".....분위기 잡아봤자 실은 내가 아내지만."
얼마 전에 거의 납치하다시피 나꿔채 온 태사자와 저게 연습이라면 실전은 얼마나 아비규환일지 상상조차 두려운 무시무시한 격전을 한바탕 치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돌아온 손책이, 수건을 들고 얌전히 시립해 있는 주유를 찌릿 노려보았다.
"뭔가 말했냐?"
"아니."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손책의 눈길이 무척 따가웠지만 주유는 수건을 내민 채로 참을성 있게 받아가기만을 기다렸다. 잠자코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손책은 친우 겸 아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욱 째려봐준 후, 여몽이 눈치껏 잽씨덕 길어놓은 우물물을 냅다 머리에 들이붓고 수건을 팩 나꿔채갔다.
새빨간 끈으로 대강 올려묶은 어중간한 길이의 은발이 물에 젖어 햇살을 반사하며 현기증이 일도록 눈부시게 반짝인다.
세월 따라 자연스럽게 노인이 머리에 이는 새하얀 색보다도 섬세하고 화려한 빛깔.
한인(漢人)에게는 보통 있을 수 없는 손책의 은색 머리칼은, 그를 한 번 보고 넘어갈 사람도 두 번 돌아보게 만들곤 한다. 고인이 된 부친 손파로(孫破虜=손견)의 머리가 햇빛 각도에 따라 금색으로 안 보이지도 않는 연갈색이었고 동생 손권은 제법 짙은 붉은색인 것까지 고려하면 어디선가 색목인의 피가 섞였는지도 모른다. 타지와의 교역이 활발한 강동에서는 그닥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은빛을 얹은 것은 머리칼뿐만이 아니다. 길다랗게 뻗은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모두 은색이다. 연중 햇볕이 쨍쨍하여 가무잡잡한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강동에서는 드물게 보는, 그러나 창백하거나 병적인 느낌과는 동떨어진 새하얀 피부마저 거들어 색소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얼굴에서, 은색 속눈썹에 촘촘히 둘러싸인 흑색에 가까운 청회색 눈동자는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그 밖에도 높고 이지적인 이마, 스스로의 존재감을 요란스레 과시하는 오똑한 콧날, 꽃잎이나 앵두는 빈말로라도 끌어댈 수 없으나 모양은 기차게 좋은 입술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분명 절세미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없지만 말이다.
자형과 백해는 여직도 술기운만 좀 거나하게 오를라치면 우리가 죽어라 분발해서 숨겼기 망정이지 아니었음 지금쯤 주군은 원술의 열 일곱 번째 측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둥 세상 참 험악하다는 둥 시끄럽기 짝이 없지만 주유는 회의적이었다. 첫째로 백부는 정 못 피하겠다 싶으면 전세를 뒤엎어 상대를 깔고 올라탈지언정 남 하는 대로 호락호락 이끌려갈 인간도 아니거니와, 둘째로 파리가 앉았다 좌악 미끄러질 천애절벽 가슴을 비롯해 쭉쭉하긴 한데 남정네들이 기뻐할 풍만함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직선적인 기럭지는 사내의 정욕을 부채질은커녕 깎아먹기 십상이고, 결정적으로 이 여잔 눈이 글러먹었다.
도도하거나 도전적이거나, 심지어는 독살맞은 눈이었다 해도 좋다. 보기 드문 천하절색에겐 양순함보다 서릿발같은 독기가 오히려 어울린다. 하지만 손책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건 맹수의 눈이다.
상대를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유린하고 굴복시키고 무릎 꿇리고 머리부터 씹어먹으려 하는 피에 굶주린 야수의 눈.
주가(周家)의 저택을 습격하려던 도적단의 일원을 붙들어 비수를 입안에 우겨넣고 비틀어 단번에 어금니를 뽑아버린 친우의, 흥분으로 한계까지 벌어진 동공과 미묘하게 치켜올라간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을 주유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눈은 고작 둘이지만 이는 서른 두 개지. 자, 이놈은 몇까지 버틸 수 있을까. 등골에 흐른 섬뜩한 전율은 진짜였다.
세상은 그녀를 소패왕이라 부른다. 결코 크지 않은 체구에서 폭력적으로 분출되는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압도적이기까지 한 존재감을 표현하기에 그 이상 알맞은 호칭도 없으리라. 흔히 말하는 여성미와는 빛과 그림자, 물과 기름 이상의 극과 극으로 동떨어진 그녀가 설령 누구님들 말마따나 선이 좀 더 부드러웠다 한들, 미녀라면 처녀와 남의 마누라와 과부와 여염집 아낙네와 창기를 가리지 않고 껄떡대다 오입질 한 번 비싸게 한 조조의 식지도 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유는 굳이 그 옆에 있기를 택했다.
"아까부터 뭘 미적지근한 눈으로 힐끔힐끔 보고 있어!!!"
과거를 좀 회상하고 있었더니, 다짜고짜 발등을 짓밟혔다. 너무한다.
내가 손백부다. 만나서 반가워.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최소 한 번은 자신의 운명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한다. 주유에게는 그게 12년 전이었다. 손을 내밀며 쾌활하게 웃는 손책과 처음으로 대면했던 그날 그는 어린 나이에도 앞날을 어렴풋하게 예감하였던 것이다. 이 소년이야말로 - 그때는 소년이라고만 여겼으므로 - 그 자신의 전부를 모두 내던져 마땅할 상대이리라고.
'알고 보니 손일문의 장남 아닌 장녀였더라'는 친우의 비밀을 우연히 안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여자 가슴 처음 보느냐고 통박부터 놓는 손책을 눈앞에 두고, 떨어진 턱이 올라오지 않는 경악 속에서도 주유는 분명히 느꼈다. 느꼈지만, 그때는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단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손견의 변사(變死), 별리(別離), 손책의 장강 도하, 3년만의 재회.
주(周)의 깃발을 확인하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탄환같이 덤벼든 손책의 이미 포옹도 아닌 몸통박치기를 용케도 안 넘어지고 받아내며 주유는 비로소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의 명운도 신명도 재능도 집안도 8년 전 이미 주군으로 선택했던 이 친우의 것이며, 그리고 같은 성(性)이 장벽이 되어 어떠한 신하도 주군에게 바치지 못했던 최후의 하나──반려의 자리 또한 그는 그녀에게 주어야 함을.
이성으로써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상, 진실을 알고 꽤나 곤혹스러웠던 그날 이후로 친우를 이성으로 보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유에게 있어 손백부는 항상 이성 이전에 단금지교의 막역지우였고, 그 이전에 미래의 군주였다. 다만 혼인관계를 맺으면 지금 이상으로 손책의 패업에 공헌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전투로 인해 말을 꺼낼 기회는 좀처럼 없었고, 유요를 몰아내고 한숨을 돌릴 무렵엔 원술로부터 단양태수 교대의 명이 내려와 주유는 숙부와 함께 일시나마 수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나루까지 전송을 나온 손책에게 언질이나마 하고 떠나려 했을 때,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선수를 쳤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엣... 하며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로 들어간 주유의 어깨를, 손책은 내가 네 속을 뻔히 알지, 란 얼굴로 후후후 웃으면서 토옥 짚었다.
─반드시 내 밑으로 돌아와라, 공근. 이야기는 그때 들어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동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사관시키고 싶어 안달복달을 하는 원술을 교묘하게 이리 치고 저리 빠지며 슬슬 빼다가 결국 여차직하면 강동으로 내빼기 딱 좋은 거소(居巢)의 현령으로 부임하기 직전, 모처럼만에 사형뻘이 되는 장간(蔣幹)과 잠시 얼굴을 마주했다.
주유를 마치 친동생처럼 귀애해 온 장간은 함께 중원으로 가자는 사형의 은근한 청을 뿌리치고 손백부를 택하는 사제의 고집엔 누가 널 말리겠냐며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말았으나, 그간 혼자만의 흉중에 묻어둔 생각을 시험삼아 조심스러이 비쳤을 때는 다짜고짜 눈을 부릅떴다. 미쳤느냐고, 주일문의 당주인 네가, 작심하고 손짓만 하면 세상 어느 고귀한 집안의 어느 콧대높은 경국지색도 기꺼이 발치에 몸을 내던질 네가, 어디 세상에 여자가 다 죽어서 근본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집구석의, 그것도 정숙한 미녀이기나 하면 내 말을 않는다, 필시 여포도 감당 못할 구제불능의 말괄량이를 주일문에 들이겠다고 하느냐, 아니 그 여자는 말괄량이 운운할 귀여운 수준을 까마득히 초월했다, 그건 괴물이고 악귀고 나찰이고 아수라고 하여간 요망한 존재다, 내 공근이 백부 백부 타령으로 밤낮을 샐 때 다 알아봤다 보나마나 그게 널 홀린 거다, 대단한 장수인 건 뭐 인정해도 좋으나 여태후의 전례를 잊었느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어쩌고저쩌고어쩌고저쩌고어쩌고저쩌고...
최종 결론은 어차피 공근 네가 하는 일이니 제멋대로 결정 다 내려놓고 언질만 주는 거겠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봐라 빌어먹을! 이었지만 대략 일각 사이에 손책과 상관해 쥐어짤 수 있는 험담이란 험담은 모조리 들은 것 같았다. 자익(子翼) 형은 다 좋은데 좀 많이 완고한 것이 옥의 티라고, 고분고분한 표정을 지은 채 주유는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타인인 장간이 이러할진대 집안이 뒤흔들리는 소동을 각오했지만, 정작 숙부 주상(周尙)과 모친 장(蔣)부인은 한숨만 쉬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쌍수들고 반대한들 그대가 눈썹 하나 까닥하겠느냐. 주일문의 당주는 그대인즉 알아서 하거라. 유(瑜) 네가 제발로 고생길을 택하겠다는데 일러 무삼하겠는고. 아, 예. 감사합니다(식은땀)
덤으로 노자경까지 달고 약 1년 반만에 강동땅을 다시 밟은 주유를 마중나온 사람은 이번에도 손책이었다. 지금쯤 머리 싸매고 정무에 열을 올려야 할 한 나라의 군주 되는 자가 변변한 호위도 없이 기껏 가신 하날 맞으러 여기까지 나온 것에 대해 주유는 속사포로 질타를 퍼부었지만, 손책의 전술의 천재다운 지극 효과적인 방어전 앞에 모든 말이 무위로 돌아갔다. 딱 한 마디. 얼굴이 풀려 있어, 주공근.
마음에 기꺼운 건 기꺼운 거니까 할 수 없다.
그날 밤은 주유의 귀환과 중랑장 제수를 축하한다는 구실로 부어라 마셔라의 연회였다. 대낮의 강자들이 모두 술에 절어 나가떨어진 한밤중, 소란의 와중에도 적절히 주량을 조절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발휘하여 알딸딸해지는 선에서 끝낸 주유는 얼큰하게 취했으나 뻗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 손책에게 옆구리를 쿡쿡 찔렸다. 사내놈들 땀냄새 때문에 질식하겠다. 어이 공근, 쪄죽기 전에 밤바람이나 쐬고 오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줄줄 끌려나가 문득 정신을 수습해 보니 이미 신발을 벗고 연못 안을 철벅철벅 걸어다니고 있는 중이었지만.
마치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들뜬 표정으로 물을 휘젓는 손책의 은빛 머리칼이 경쾌하게 찰랑이는 것을 살짝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난 열두 살 이후로 항상 주유 쪽이 손책보다 미묘하게 키가 크긴 했었지만 (그러잖아도 여자 얼굴이라 죽어라 구박을 당했거늘 정말이지 키마저 작았으면 백부에게 얼마나 갈굼당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쫙쫙 흐르는 주유였다) 열 일곱에 헤어져 스물에 다시 만난 친우는 놀랍게도 한 촌 가량 밑에 있었다. 순수히 재회를 기뻐하던 중 문제의 현실을 번개같이 깨달은 손책의 얼굴이 얼마나 극적으로 인간 안면근육의 한계를 실험했는진 손오 주군의 명예와 늘어지는 분량을 위해 숨기는 편이 낫겠지만, 하여간 주유는 부당하게도 완전군장의 발에 종아리뼈를 대차게 걷어차이는 고통을 어디까지나 우아한 태도로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 하고 싶었던 말이 뭐야?"
다소 감개에 빠지려던 찰나에 선제공격이 들어왔다. 정서라곤 없는 여자 같으니.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친우가 1년 반 동안 잊지 않아준 걸 냉큼 감사하고 후딱 잊어버리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줄은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주유는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역시 결심을 굳혔다 해도 이런 상황에선 절로 긴장하게 되는 법이다. 긴장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고도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응."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나와 혼인해 주지 않겠어?"
손책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니가 시집온다면야."
경악, 황당, 일소, 폭소 등등을 포함하여 대략 대여섯 가지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책과 설복 수단까지 빈틈없이 준비해 온 주유였지만 '시큰둥하게 <니가 시집온다면야>라고 대답한다' 라는 선택지는 목록에 있지도 않았다. 우수한 두뇌가 파업 선언을 때리고 회전을 중지한 나머지 한참을 꽝꽝 얼어붙어 있다가 기껏해야 나온 말이란 다음과 같았다.
".......데릴사위?"
"그 귓구멍은 장식품이냐? 네가 마누라라고, 마.누.라. 안사람. 아내. 본처. 정.실!"
"................내가 아내.......? 아니 저 말야, 백부, 그렇지만,"
"이놈 자식 보게."
손책이 정색을 하고 주유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누가 손일문의 당주야?"
"백부지."
"누가 네 주군이냐?"
"....백부야."
"결론 나왔네. 당연히 내가 바깥사람. 이제 좀 알겠냐? 꼭 머리 좋은 것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보통은 남자가 남편이고 여자가 아내라는 세간의 상식은 강동의 소패왕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그렇듯이 주유는 그저 재빨리 백기를 드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아무렴 어떠냐. 내조건 외조건 하는 일은 똑같은데. 알았어. 백부가 원하는 대로 할게.
손책은 목을 가르릉 울리는 고양이과 맹수와 흡사한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납득한 거냐. 좋아, 우리 집 마나님을 설득하는 사명도 이 김에 일임한다. 고양이처럼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진 눈이 달빛 밑에서 반짝거렸다. 어디 치워버릴 수도 없는 선머슴아를 평생 곁에 두고 살 각오가 단단히 서 계신 손일문의 큰어른을 설복해 보라구. 무사히 통과하면 그땐 당당하게 내 정실로 못 맞을 일도 없겠지.
어차피 지금도 백부의 마누라 소리는 듣고 있어. 주유는 홧김에 불퉁스럽게 쏘아붙였다. 손책은 허리를 잡고 폭소했다.
오랜만에 찾은 손씨 집안 식구들의 너무나도 열렬한 환대에서 겨우 살아남은 주유가 오늘의 진정한 방문 목적을 밝혔을 때 손권 이하 가족들은 입을 딱 벌렸고 난향(蘭香)은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 새파래진 얼굴로 뛰쳐나갔으며, 아니나다를까 오부인은 몹시 난색을 표했다. 그대의 제안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네. 허나 그 아이 백부는 그대도 주지하다시피 몸은 여자이되 마음은 여자가 아닐세. 저 아이는 돌아가신 문대 님의 성정을 그대로 이어받았어. 지금의 행적을 보게, 어디 한 남자의 아내라는 틀에 만족할 위인이던가. 그 애가 낭군을 힘써 받들고 모시며 자식을 보고 좋은 가정을 이루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내 딸이지만 중원의 명가 주일문의 안주인으로 어울릴 여자는 결코 아니라네. 공근이 우리 아이에게 언제나 신의와 충절을 지켜왔음은 누구나 아는 일,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겠네. 그러나 부디 무리는 말게. 자네는 책(策)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어. 어미인 나도 감히 바라지 못할 만큼의 일을 했네. 그대는 그 선머슴을 건져가는 것이 마치 그대의 소임이라도 되는 양 여기고 있는 모양이네만 그건 도를 넘은 의무감에 불과해. 그러지 말게. 더구나 자네는 이미 백부의 의제가 아니던가. 우리 모두 공근을 가족의 일원처럼 생각하고 있다네. 그럼에도 정 자네가 손씨 집안과 혈연을 맺고 싶다면 차라리 난향이는 어떻겠는가.
구구절절절절절 이어지는 설득 반 변명 반의 장광설을 참을성 있게 전부 듣고 난 주유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청혼의 이유를 늘어놓는 한편 손책이 주일문의 며느리가 아니라 자신이 손일문의 사위임을 분명히 했다. (이성이 있었으므로 차마 실은 제 쪽이 안사람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부인은 더더욱 경악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바위처럼 굳건히 버티는 주유를 꺾지는 못했다. 따님을 주십시오와 그러니까 둘째를 주겠대도의 치열한 설전이 대략 서너 식경 이어진 끝에, 오부인은 한숨처럼 탄식을 뱉으며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내들은 어찌하여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이리도 막무가내일꼬!
시모(媤母)인지 빙모(聘母)인지 쓰는 놈도 슬슬 헷갈리지만 하여간 정식으로 어머님이 되실 분에게 큰절을 올리고 퇴실해 보니, 막강한 관문 앞에 적어도 구혼한 남자를 혼자 내팽개치고 어딘가로 사라졌던 손책은 낭하의 난간에 걸터앉아 까닥거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주유를 발견한 손책이 손을 들어 반겼다.
"여어, 공근. 면상을 보아하니 마나님을 함락시킨 모양이구먼. 하긴 우리 집 대빵도 못 꺾은 그놈의 황소고집을 누가 막겠냐 싶다만."
"전부 내게 떠넘기고 뱃속이 편하기도 했겠군. 대체 어디 있었어?"
"실연의 상처로 숨죽여 우는 동생을 위로하는 것도 장자(長子)의 의무지."
"실연의 상처? 누가?"
"난향이 말고 달리 있냐."
"뭐!? 어느 틈에... 아니, 대체 어느 간덩이 큰 작자가 감히 난향을 찼다는 거야!?"
손책은 분개하는 주유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너 같은 둔탱이는 진작에 기정 사실을 만들어서 책임을 확 지워버려야 쓰는 건데 말이다. 그 녀석도 괜히 수줍은 척 꾸물대다 대어를 놓쳤지. 바보 같으니."
"....무슨 뜻이야?"
대답하는 대신, 손책은 씨익 웃으면서 주유의 명치께를 검지로 꾹 눌렀다. 잘 부탁해, 마눌님.
장소가 펄펄 날뛰고 옛 손견 군단 사천왕이 저 새파란 것이 결국 우리 작은 주인을 채갔다는 원한 서린 눈길로 주유를 야리는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원체 손오가 좀 '재밌으면 만사장땡'의 마음가짐으로 성립하는 동네인지라 혼례식은 예상보다는 훠얼씬 온건하고 무사하게 치러졌다. 오부인이 손견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후로 장래의 딸을 위해 곱게곱게 간직해 두었으나(그리고 오부인 자신도 그 모친에게 물려받았다는) 근 25년간 임자를 못 만나 - 다들 포기했던 손책은 그렇다 치고, 난향은 꾸물대다 의중의 상대를 놓쳤고 초제는 독전파요 아현은 아직 너무 어리다 - 장롱 속에만 처박혔다 겨우 햇빛을 본 빨갛고 검은 화려한 신부복과 머리장식을 네 쪽이 더 여자 얼굴이라는 같잖은 이유로 주유에게 강제로 밀어붙인 손책이 검고 붉은 신랑복을 나꿔채 유유히 사라졌다 혼례식 직전에야 어슬렁어슬렁 되돌아온 일쯤이야 예측 가능한 매우 하찮은 사건에 불과했다.
실은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신혼부부의 첫날밤이라면 당연지사 따라오는 '그 일'.
이 괴상망측한 한 쌍이 두근두근설레이는 초야(初夜)를 어떻게 치를지 예상하고 모두의 얼굴이 단숨에 시퍼렇게 질렸다. 동정은 아슬아슬하게 탈피했을진대 금지옥엽장중보옥으로 자란 양가(良家)의 도련님답게 다소 결벽증이 있는 주유가 사랑놀음과는 인연이 먼 줄은 주지의 사실이고 (누구누구 때문에 청루에 드나들 시간도 변변히 없었다고도 한다) 하도 막가는 사람이라 잊고 있었으나 생각해 보니 그들의 주군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처녀였다. 처.녀.
근사치 동정과 처녀의 첫날밤. 실로 최악이 아닌가. 부들부들. 부들부들.
손견 군단 사천왕 중에서도 시어머니 기질과 딸바보 정신이 제일로 투철한 정보가 추측되는 사태로 인해 입에 거품을 물고 술기운이고 지랄이고 싹 다 날아간 가신들이 빗금 좍좍 간 얼굴로 부디 무리하지는 말아달라, 오늘만 날이 아니다, 좀 느긋이 간다고 뭐랄 사람 아무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다 어쩌고저쩌고 새신랑과 새색시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질 제, 가장 덜덜 떨어야 할 주유는 의외로 평온했다. 애초에 이성으로 보고 혼인하지도 않았으니 굳이 오늘밤 일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여자로서의 자각이라곤 없는 친우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여 손책이 원한다면 그때 뜸들여가며 천천히 진행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는데.
....따먹혔다. 폭력적으로, 신속하게, 정확무비하게.
정을 통한 상대일지라도 마음의 준비가 전무한 상황에서 '그 일'을 왁작왁작 치러버리면 다 끝난 후 여자들이 이불에 파묻혀 짐승...! 너무해 책임져!! 라며 흑흑 느껴 우는 이유를 주유는 온 몸으로 처절히 체험했다. 가능하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더 부당한 현실은,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식의 지극 상투적인 위로조차 없이 물 한 잔 마시는 정도의 노동밖에 안 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후딱 돌아누워 잠을 청하려던 손책이, 딱 2초 후 벌떡 일어나 주유에게 노골적으로 살의가 담긴 발차기를 날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임신하면 책임질 거냐!!!!"
자업자득, 자초한 일이지만 이건 정말로 부당했다.
"생각해 봤는데, 공근."
둥근 해가 산 언저리에서 슬몃 고개를 내밀 무렵, 밑바닥까지 다 빨려먹히고도 평소의 슬픈 습관대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보니, 손책은 침의 하나만 덜렁 걸친 채 다리를 내팽개친 칠칠치 못한 폼으로, 그러나 매우매우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미 일어나 앉아 있었다.
몸에 밴 군신간의 예절에 따라 얼결에 단정히 정좌하고 만 주유에게 죄는 없다.
손책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 그대로 심각하고 진중하게 말했다.
"애는 역시 니가 낳아라."
공간이 빠직 얼어붙었다.
설마 나더러 열 달이나 뱃속에 애를 넣고 있으란 말은 안 하겠지? 못해! 죽어도 못해! 아니, 무거운 몸은 뭐 드물게도 평생분의 인내심을 몽땅 동원해 어찌저찌 참는다 치더라도, 산통은 안돼. 무리야 무리! 난 아픈 건 질색이라고! 사람을 몸밖으로 밀어내는 고통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독화살을 열 대 맞고 말지! 역시 요즘 시대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아내의 소임이잖냐? 응, 결정봤다. 잘해 봐, 공근. 생긴 애는 전부 주일문에 줄 테니까 노력해서 좋은 애 만들라구. 내 후계자는 어차피 중모고. 아, 여기에 대해선 이의 없지? 뭐, 암만 그래도 남자는 애를 낳을 수 없다고? 주군 명령이다. 기합 넣어. 근성을 보이란 말이다! 유언실행의 악마가 들고 차도 인간에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말이 많다. 내가 까라면 닥치고 무조건 까.
"횡포다────────!!!!!!"
남들은 알콩달콩할 신혼 겨우 이틀째에 주유는 벌써 25년은 부대낀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새파래졌다 시뻘개졌다 빗금 그었다 눈을 뒤집었다 혼자서 바쁘게 뭐하는 거냐. 봐서 질리진 않지만."
".......잠시, 파란만장한 과거를 좀."
"사람을 옆에 두고 보글보글 회상에 잠기지 말란 말이다."
손책에게 핀잔을 당해도 곱씹을 건덕지를 산더미같이 안겨준 장본인에게만은 한 소리 듣고 싶지 않다는 게 주유의 솔직한 본심이었다.
두 사람의 혼인생활은 그럭저럭 깨지지 않고 석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엄하게도 주군과 군사가 언제 파경을 맞을지, 정확히는 주유가 언제 삼십육계주위상책을 놓을지 내기판을 벌이고 두근두근 주시하는 무장들에겐 조금 안된 일이지만, 주유에게는 손책이 먼저 절연을 선언하기 전에는 도망갈 의사가 전무했다. 손책의 파천황 기질과 맥락없는 돌발행동과 가학성 초기증상에 무한접근한 악동의 마음가짐에 짤짤이 시달리는 거야 12년 전부터 계속 그랬으니 새삼스럽지도 않고, 유일하게 근 정신적 외상이 될 뻔했던 '그 일'은 다행히 한두 번 해보고 그다지 재미를 발견 못한 손책이 급격히 흥미를 잃어준 덕에 밤이 무서워지는 최악의 결과만은 회피하였다. 작금도 마음의 상처라면 상처지만 말이다.
여전히 흠뻑 젖은 머리칼을 부비적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사저에 향하는 손책의 뒤를 반 발짝 떨어져서 조용히 따라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안사람의 귀감이었다.
앞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던 손책이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중얼거렸다.
"와우, 냄새 죽이는데. 복숭아인가?"
"...어떻게 아는 거야....?"
이 거리에서 그걸 탐지하는 코는 이미 인간의 후각이 아니지만, 괜히 소패왕이 아닌지라 걍 대충 넘어가고, 주유로서도 아마도 시비(侍婢)들이 제철을 맞은 과일을 썩둑썩둑 썰어 내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짐작은 충분히 갔다. 앗싸라비야하며 발걸음이 사뿐사뿐 날아가는 남편님과는 반대로 걸음이 오히려 점차 느려지는 주유를 손책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굼벵이 걸음이야? 복숭아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
"아니... 그게... 어쩐지, 이상하게 식지가 영 조용해서,"
"하아!?"
양가의 도련님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품위 있게, 결코 음식물과 이재를 탐하지 않으나 유별나게 복숭아 앞에선 죽고 못 사는 주유를 너무나도 잘 아는 만큼 손책이 배경에 얘가 뭘 잘못 먹고 헛소리냐를 둥둥 띄우고 째려보아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은 어쨌거나 사실인 것이다. 얼마 전,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큼지막한 복숭아를 가지에서 똑 따서 맛나게 먹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왠지 신 것이 유독 땡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거 참 말하기도 뭣한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람들도 아니건만.
뒤통수에 땀방울을 가득 매달고 외면하는 주유를 한참 의심 한가득의 눈초리로 족히 1분간 태워죽일 듯이 노려보던 손책이 마침내 어깨를 으쓱하며 안광을 거두고 발걸음을 도로 떼어놓았다. 네가 싫다는데 내가 뭐라고 토를 달겠냐? 내심 좀 안도하고 그 뒤를 다시금 서둘러 쫓아가려는데, 손책 왈.
"─하지만 간식으로 복숭아라니 누군지 마음씀씀이 좋은걸. 저녁엔 전어구이나 부탁해 볼까♪"
전어?
희번덕거리는 생선눈알이 뇌리에 떠오른 순간에 위액이 확 역류했다.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태우며 치받치는 감각에 어찔하여 양무릎을 꺾었다.
"공근!?"
와아, 내 살다 보니 백부가 경악하는 걸 볼 때도 다 있구나. 거기서 주유의 생각은 뚝 끊겼다.
이래봬도 타고난 군인이자 만년건강체인 중랑장 주유가 머리 싸매고 누워버렸다는 소식은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정말로 근심하여 병문안을 와 주는 사람 3 대 심심하던 참에 뒷담화꺼리가 생겨 얼싸 좋다고 놀러오는 놈들 7의 비율로 침실이 시끌시끌한 가운데, 짠 듯이 하나같이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다면서 "이것은 흡사..." 까지 말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꿀꺽 삼켜버린 의원 넷이 모조리 엉덩이를 걷어채여 쫓겨난 후, 이마에 빠직빠직 힘줄이 돋은 손책이 폭발하기 직전에 요행히도 우번이 당대의 명의 화타를 모셔오자는 몹시 훌륭한 발상에 착안하였다. 더더욱 요행히도, 역마살 꼈기로 유명한 화타 선생은 그날따라 소박한 거처에 용케 붙어 있었고, 원인불명의 병이란 말에 두말없이 흔쾌히 수레에 몸을 실었다.
신의(神醫)쯤 되고 보면 평범한 의원과는 착안점이 다른지, 방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정작 다 죽어가는 주유는 흘끗 쳐다보았을 뿐 어째 툴툴대는 손책을 반강제로 끌어앉혀 맥을 짚은 백발 성성한 노인은 인자히도 웃으며 말했다.
"회임입니다."
".......에?"
"회임입니다."
손책의 첫 반응은, 빙글 돌아 기진해서 뻗어 있는 명색 아내를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손권, 장소, 장굉, 여범, 노숙 등등이 달려들어 허겁지겁 주유를 사정거리에서 치운 사이, 태사자로도 부족해서 진무, 동습, 주태, 장흠, 여몽 등등등 나이 젊은 무투파란 무투파를 총동원해서야 수극을 휘어잡고 저걸 척살하겠다 길길이 날뛰는 손책을 가까스로 찍어누를 수 있었다. 내 분명히 애는 네가 낳으라고 했다! 감히 주군 말을 거역해!!!? 야 이것들아 말로 할 때 못 놓지!!!? 주군 명령이어도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한 거야! 전횡에도 정도가 있지! 머리가 징징 울리는 와중에도 대담하게 반항을 시도한 주유는 실은 억울함보다도 중신들의 동정 담뿍 어린 눈길을 도시 배겨낼 수 없었다거나 한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지만 부군이 ("아니, 부군은 난데요.") 겪고 있는 헛구역질은 틀림없는 입덧이며, 그 입덧을 비롯한 임신의 징후와 증상은 모두 부군에게 ("부군은 나라니까요.") 이전된 것으로 보이며, 추측컨대 틀림없이 산통도 부군의 몫이리라 ("그러니까 안사람은 쟤래도!!") 여겨진다는 화타의 차분한 설명을 들은 후에야 손책은 피의 보복을 포기했다. 뭐 그렇다면야 봐줘야죠. 주군 명을 거역한 건 여전히 괘씸하지만 이번만은 화원화 선생의 흰 수염을 봐서 용서한다. 분발해서 견뎌라, 공근?
일곱 달 후에 닥칠 사람 잡는다는 산통에 대한 불안보다 사방에서 꽂히는 연민의 시선이 따끔따끔 쑤셔서 더욱 괴로운 주유였다.
세월아 네월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모친을 비롯한 가족 전부와 중신 일동이 빌다시피 결사적으로 매달려 손책의 여릉진압전 최전선 출장만은 가까스로 저지했으나, 애가 들어섰다면서 무슨 조화로 신체 변화가 전혀 없으니 술을 동이째로 푸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길 뜯고 어디 서역국 황제 기분으로 반란분자의 목을 뎅겅뎅겅 치고 시녀;들과 시시덕거리는 등 고래로부터 의원이란 의원들이 줄창 주장해 온 음식도 가려먹고 험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는 임산부의 규칙을 모조리 위반하면서 살아도 말릴 방도가 없었다. 이러다 모친과 부친 어느 쪽인가를 닮은 신수 훤한 아이는커녕 삼두육비의 괴물이나 고깃덩이가 기어나와도 그러려니 하자는 암묵의 약속이 만연한 가운데, 주유는 우울증/빈혈/구토/메스꺼움/피로/어지럼증/근육통/무거운 몸 기타 등등 보통 초산의 여성이 겪어야 할 온갖 하찮은 증상에 아픈 건 싫으시다는 남편님을 대신해 죽어라 시달리고 있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지 않다.
일은 작전회의 도중에 터졌다.
"크, 크윽.....!!!?"
"주태수!?"
온 것이다.
진통주기가.
그리고 산파는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으르렁크르렁 비밀서약을 요구하는 무장들의 험악한 얼굴에 혼이 다 빠져 기다시피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빈틈없이 지키는 산실로 들어갔을 때, 앞으로 천 년을 살아도 잊을 수 없을 광경을 보았노라고.
편하게도 퍼지르고 앉아 까르륵 웃는 예쁘장한 시녀 하난 무릎에 앉히고 둘은 양옆에 끼고 멋대로 주물럭대는 출산당사자와, 바로 옆의 침대에서 혀 깨물지 말라고 물려놓은 천을 구멍이 뻥 뚫리고 피가 배도록 악물고 주기적으로 덤벼드는 무시무시한 통증을 이겨내려 용을 쓰고 있는 그 남편의 모습을. ("내가 남편이라니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오늘도 세죽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런데 이럴 때 힘 줘! 힘 주라구! 는 대체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
임신 초기, 유난히 예민해진 주유가 제발 몸 좀 아껴달라고 근 울다시피 사정하면 응해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의 혼백까지 잡아찢는 격렬한 독설의 응수로 우울증만 더욱 악화시켰던 몹쓸 남편님은 진통 개시 후 열두 시간을 넘어갔을 무렵부터 슬슬 인내심 상실의 징조를 드러내었다. 그래도 양심이 털 끄트머리만큼은 남아 있었던지 밀린 정무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처리하면서 네 시간은 더 버텼지만, 결국 그래봤자여서 마침내는 붓을 한 손으로 우득 꺾고 애먼 침상에 함부로 발길질을 해대며 도저히 지면에 공개할 수 없는 갖은 욕지거리를 다 퍼붓기 시작했다.
"젠장, 진짜 언제까지 질질 끌 거냐! 나올 기미도 안 보이잖아! 기합 넣고 단전에 힘 주고 빨랑 못 끝내지!! 니가 그러고도 사내냐───!!! 이 (Pi────────) 같으니! (Pi────)고 (Pi────────)서 (Pi────────)기 전에 근성 보여! 보이란 말이다!!! (Pi───)! (Pi──────)!!! (Pi────)(Pi──────)!!!!"
"아이구머니나!! 애가 놀라 거꾸로 서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산파도 진짜 산모가 누군지 슬슬 헷갈리는 모양이나, 어쨌건 통증으로 정신이 가물가물 혼미한 와중에 주유는 이미 제구실을 못하게 된 천 대신 이불을 자근자근 씹으며 속으로만 '백부 이 자식,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씹고 있지 않았어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겠지만.
그래서 그가 구제불능이라는 것이다.
초산의 경우 난산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하물며 자기 몸에서 직접 내보내지도 않을 바에야 힘의 강약 조절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노릇이어서, 날뛰기에도 질린 손책이 잠잠해지고 그로부터도 두 시간을 더 끌고 나서야 주유는 가까스로 맡은 바 소임을 달성했다.
".....아, 나왔다."
한없이 태평한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고막이 떨어져라 목청껏 울어대는 아기의 산성을 뒤로 하고 사고의 끈을 던져버렸다.
주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았자 얼룩무늬를 전부 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눈만 말똥말똥해질 뿐이지만 돌아눕기엔 전신이 지끈지끈 쑤시고 아파서 움직이기조차 싫었다. 실로 열 달만에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한가 하면 허탈하기도 하고, 무언가 소중한 것이 쑤욱 빠져나가 버린 듯한 느낌에 울컥 치받쳐서 왁 울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사나이 생전 눈물은 세 번으로 족하다는 말 따위 싹 다 무시해 버리고 목놓아 통곡이나 해 버리고픈 충동을 거역하기가 힘들다. 여자들은 이런 대사를 어떻게 몇 번씩이나 치르는 걸까.
새삼 세상의 모친들이 모두 위대해 보이고, 특히 다섯이나 낳아 모두 잘 키운 오부인은 여신과도 맞먹는 숭고한 존재만 같다.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머리 바로 두 치 위에서 손책의 얼굴이 불쑥 출현했을 때는 그야말로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여어, 살아 있었냐 공근."
"....할 말이 고작 그것뿐이야?"
넘어가려던 숨을 강제로 다시 붙들어 온 주유가 나지막하게 반박했다. 내심 같아선 좀 더 아우성을 쳐줘도 속이 시원찮았지만 떠들 기운은 애초에 없었다.
손책은 씩 웃고 침상에 털푸덕 걸터앉았다.
"아직 못 봤지? 너 닮은 딸이더라."
"태어난지 하루도 안 된 아기가 날 닮고 자시고 할 일도 없을 텐데."
"머리카락하고 눈."
"....응?"
"둘 다 검은색."
".....아아."
조금 유감이라는 생각은 했다.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칼처럼 은색이었더라면, 훨씬.
등을 쭉 펴면서 손책은 들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미인 탐지기를 걸고 맹세하는데 이제 자라면 백에 백 천하절색이 될 거다. 내기해도 좋아. 걸래?"
"....사양하겠어."
"웃, 재미없긴. ─아 젠장, 역시 널 이교(二喬)라던가, 하여간 그런 경국지색에게 장가들였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아빠와 엄마를 반반씩 닮은 절세미녀가 태어나면 내 후궁으로,"
"백─부─!"
"농담이다 임마. 정색하지 말어."
재미있어 죽겠다고 낄낄대는 손책의 옆얼굴을 보는 사이에, 무언가, 뱃속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마냥 불편해지며 억울한 듯 분한 듯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손오의 주군이자 강동의 소패왕, 애초에 평범과는 담을 쌓은 여자인 줄은 뼈저리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게 최선의 길이라 여겼기에 진작부터 많은 것에 대한 기대를 접고 시작한 혼인생활이다. 남들과 같이 보통의 행복한 가정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어차피 백부에게서 따뜻한 말마디는 기대하지도 않았어!"
내뱉고 나서 즉시 후회했다. 아니 이런 굴러들어온 호박을 봤나! 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 표정의 심술궂음이라니.
크으으윽;;; 신음하며 제 입을 꿰매버리고픈 심정에 사로잡힌 주유에게 초롱초롱한 눈의 손책이 덮쳐들었다.
"헤에... 나한테 위로받고 싶었어? 여보 고생이 많았소라던가 해주길 바란 거야? 그런 거야? 응? 주~공~근~?"
"잘못했습니다. 부디 못 들은 걸로 치부하고 조용히 떠나주십시오."
"호오호오, 그랬군. 그런 거였군. 너랑 나 사이에 뭘 첫날 밤의 새색시마냥 수줍음을 탔냐, 진작 말했으면 좋았잖아, 이 부끄럼쟁이-"
"내 말 좀 들어주겠어!!?"
항의를 듣는 둥 마는 둥 손책은 엿차, 하면서 침상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그럼, 애쓴 사람에게 포상을 내려볼까?"
"뭐....!!"
눈앞으로 은빛 폭포수가 흐드러지게 쏟아지면서 주유의 항의도 사고도 함께 멎었다.
이마에 따뜻한 것이 살짝 닿는다.
그게 입술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몸을 떼어낸 손책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후훗 웃었을 때였다.
"수고했어."
비단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아내도 기껏 이마에 입맞춤 하나로 고생을 깡그리 잊어버릴 만큼 싸구려가 아니라던가, 지금 수고했어 한 마디로 다 때워먹을 심산이냐 그건 대체 어디의 노랭이냐던가, 자린고비도 최소한 공치사는 아까워하지 않는다던가, 모양새는 좀 이래도 우리는 엄연히 부부고 치를 일도 다 치렀는데 까짓 입술 이마에 댔다고 효과가 있을 줄 아느냐던가, 내가 여성 편력은 화려하지 않아도 그쯤에 흐늘흐늘 녹을 만큼 녹록하진 않다던가, 하여간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간다거나,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으나 의사에 반하여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말라붙은 목에서는 쉬어빠진 소리 한 개 나와주지 않았다.
이마를 짚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주유를 향해서, 손책은 사양하는 일없이 마음껏 웃어주었다.
이성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닌 여자. 그리고 주유에게는 이성 이전에 막역지우, 막역지우 이전에 일생을 바친 주군. 혼인관계를 맺었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군신 관계의 연장이었다.
그런데 할 일도 다 했건만 어째서 사소한 접촉 하나로 심장이 이렇게나 뛰는 건지, 진짜 이유는 영원히 모르는 편이 나으리라.
그리고 나의 아내.
손백부.
".....분위기 잡아봤자 실은 내가 아내지만."
얼마 전에 거의 납치하다시피 나꿔채 온 태사자와 저게 연습이라면 실전은 얼마나 아비규환일지 상상조차 두려운 무시무시한 격전을 한바탕 치르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돌아온 손책이, 수건을 들고 얌전히 시립해 있는 주유를 찌릿 노려보았다.
"뭔가 말했냐?"
"아니."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손책의 눈길이 무척 따가웠지만 주유는 수건을 내민 채로 참을성 있게 받아가기만을 기다렸다. 잠자코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지 손책은 친우 겸 아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욱 째려봐준 후, 여몽이 눈치껏 잽씨덕 길어놓은 우물물을 냅다 머리에 들이붓고 수건을 팩 나꿔채갔다.
새빨간 끈으로 대강 올려묶은 어중간한 길이의 은발이 물에 젖어 햇살을 반사하며 현기증이 일도록 눈부시게 반짝인다.
세월 따라 자연스럽게 노인이 머리에 이는 새하얀 색보다도 섬세하고 화려한 빛깔.
한인(漢人)에게는 보통 있을 수 없는 손책의 은색 머리칼은, 그를 한 번 보고 넘어갈 사람도 두 번 돌아보게 만들곤 한다. 고인이 된 부친 손파로(孫破虜=손견)의 머리가 햇빛 각도에 따라 금색으로 안 보이지도 않는 연갈색이었고 동생 손권은 제법 짙은 붉은색인 것까지 고려하면 어디선가 색목인의 피가 섞였는지도 모른다. 타지와의 교역이 활발한 강동에서는 그닥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은빛을 얹은 것은 머리칼뿐만이 아니다. 길다랗게 뻗은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모두 은색이다. 연중 햇볕이 쨍쨍하여 가무잡잡한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강동에서는 드물게 보는, 그러나 창백하거나 병적인 느낌과는 동떨어진 새하얀 피부마저 거들어 색소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얼굴에서, 은색 속눈썹에 촘촘히 둘러싸인 흑색에 가까운 청회색 눈동자는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그 밖에도 높고 이지적인 이마, 스스로의 존재감을 요란스레 과시하는 오똑한 콧날, 꽃잎이나 앵두는 빈말로라도 끌어댈 수 없으나 모양은 기차게 좋은 입술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분명 절세미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없지만 말이다.
자형과 백해는 여직도 술기운만 좀 거나하게 오를라치면 우리가 죽어라 분발해서 숨겼기 망정이지 아니었음 지금쯤 주군은 원술의 열 일곱 번째 측실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둥 세상 참 험악하다는 둥 시끄럽기 짝이 없지만 주유는 회의적이었다. 첫째로 백부는 정 못 피하겠다 싶으면 전세를 뒤엎어 상대를 깔고 올라탈지언정 남 하는 대로 호락호락 이끌려갈 인간도 아니거니와, 둘째로 파리가 앉았다 좌악 미끄러질 천애절벽 가슴을 비롯해 쭉쭉하긴 한데 남정네들이 기뻐할 풍만함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직선적인 기럭지는 사내의 정욕을 부채질은커녕 깎아먹기 십상이고, 결정적으로 이 여잔 눈이 글러먹었다.
도도하거나 도전적이거나, 심지어는 독살맞은 눈이었다 해도 좋다. 보기 드문 천하절색에겐 양순함보다 서릿발같은 독기가 오히려 어울린다. 하지만 손책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건 맹수의 눈이다.
상대를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유린하고 굴복시키고 무릎 꿇리고 머리부터 씹어먹으려 하는 피에 굶주린 야수의 눈.
주가(周家)의 저택을 습격하려던 도적단의 일원을 붙들어 비수를 입안에 우겨넣고 비틀어 단번에 어금니를 뽑아버린 친우의, 흥분으로 한계까지 벌어진 동공과 미묘하게 치켜올라간 입술에서 새어나온 말을 주유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눈은 고작 둘이지만 이는 서른 두 개지. 자, 이놈은 몇까지 버틸 수 있을까. 등골에 흐른 섬뜩한 전율은 진짜였다.
세상은 그녀를 소패왕이라 부른다. 결코 크지 않은 체구에서 폭력적으로 분출되는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압도적이기까지 한 존재감을 표현하기에 그 이상 알맞은 호칭도 없으리라. 흔히 말하는 여성미와는 빛과 그림자, 물과 기름 이상의 극과 극으로 동떨어진 그녀가 설령 누구님들 말마따나 선이 좀 더 부드러웠다 한들, 미녀라면 처녀와 남의 마누라와 과부와 여염집 아낙네와 창기를 가리지 않고 껄떡대다 오입질 한 번 비싸게 한 조조의 식지도 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유는 굳이 그 옆에 있기를 택했다.
"아까부터 뭘 미적지근한 눈으로 힐끔힐끔 보고 있어!!!"
과거를 좀 회상하고 있었더니, 다짜고짜 발등을 짓밟혔다. 너무한다.
내가 손백부다. 만나서 반가워.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최소 한 번은 자신의 운명과 맞닥뜨리게 된다고 한다. 주유에게는 그게 12년 전이었다. 손을 내밀며 쾌활하게 웃는 손책과 처음으로 대면했던 그날 그는 어린 나이에도 앞날을 어렴풋하게 예감하였던 것이다. 이 소년이야말로 - 그때는 소년이라고만 여겼으므로 - 그 자신의 전부를 모두 내던져 마땅할 상대이리라고.
'알고 보니 손일문의 장남 아닌 장녀였더라'는 친우의 비밀을 우연히 안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여자 가슴 처음 보느냐고 통박부터 놓는 손책을 눈앞에 두고, 떨어진 턱이 올라오지 않는 경악 속에서도 주유는 분명히 느꼈다. 느꼈지만, 그때는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단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손견의 변사(變死), 별리(別離), 손책의 장강 도하, 3년만의 재회.
주(周)의 깃발을 확인하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탄환같이 덤벼든 손책의 이미 포옹도 아닌 몸통박치기를 용케도 안 넘어지고 받아내며 주유는 비로소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그의 명운도 신명도 재능도 집안도 8년 전 이미 주군으로 선택했던 이 친우의 것이며, 그리고 같은 성(性)이 장벽이 되어 어떠한 신하도 주군에게 바치지 못했던 최후의 하나──반려의 자리 또한 그는 그녀에게 주어야 함을.
이성으로써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상, 진실을 알고 꽤나 곤혹스러웠던 그날 이후로 친우를 이성으로 보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주유에게 있어 손백부는 항상 이성 이전에 단금지교의 막역지우였고, 그 이전에 미래의 군주였다. 다만 혼인관계를 맺으면 지금 이상으로 손책의 패업에 공헌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전투로 인해 말을 꺼낼 기회는 좀처럼 없었고, 유요를 몰아내고 한숨을 돌릴 무렵엔 원술로부터 단양태수 교대의 명이 내려와 주유는 숙부와 함께 일시나마 수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나루까지 전송을 나온 손책에게 언질이나마 하고 떠나려 했을 때,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선수를 쳤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엣... 하며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로 들어간 주유의 어깨를, 손책은 내가 네 속을 뻔히 알지, 란 얼굴로 후후후 웃으면서 토옥 짚었다.
─반드시 내 밑으로 돌아와라, 공근. 이야기는 그때 들어주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동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사관시키고 싶어 안달복달을 하는 원술을 교묘하게 이리 치고 저리 빠지며 슬슬 빼다가 결국 여차직하면 강동으로 내빼기 딱 좋은 거소(居巢)의 현령으로 부임하기 직전, 모처럼만에 사형뻘이 되는 장간(蔣幹)과 잠시 얼굴을 마주했다.
주유를 마치 친동생처럼 귀애해 온 장간은 함께 중원으로 가자는 사형의 은근한 청을 뿌리치고 손백부를 택하는 사제의 고집엔 누가 널 말리겠냐며 고개만 절레절레 젓고 말았으나, 그간 혼자만의 흉중에 묻어둔 생각을 시험삼아 조심스러이 비쳤을 때는 다짜고짜 눈을 부릅떴다. 미쳤느냐고, 주일문의 당주인 네가, 작심하고 손짓만 하면 세상 어느 고귀한 집안의 어느 콧대높은 경국지색도 기꺼이 발치에 몸을 내던질 네가, 어디 세상에 여자가 다 죽어서 근본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집구석의, 그것도 정숙한 미녀이기나 하면 내 말을 않는다, 필시 여포도 감당 못할 구제불능의 말괄량이를 주일문에 들이겠다고 하느냐, 아니 그 여자는 말괄량이 운운할 귀여운 수준을 까마득히 초월했다, 그건 괴물이고 악귀고 나찰이고 아수라고 하여간 요망한 존재다, 내 공근이 백부 백부 타령으로 밤낮을 샐 때 다 알아봤다 보나마나 그게 널 홀린 거다, 대단한 장수인 건 뭐 인정해도 좋으나 여태후의 전례를 잊었느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어쩌고저쩌고어쩌고저쩌고어쩌고저쩌고...
최종 결론은 어차피 공근 네가 하는 일이니 제멋대로 결정 다 내려놓고 언질만 주는 거겠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봐라 빌어먹을! 이었지만 대략 일각 사이에 손책과 상관해 쥐어짤 수 있는 험담이란 험담은 모조리 들은 것 같았다. 자익(子翼) 형은 다 좋은데 좀 많이 완고한 것이 옥의 티라고, 고분고분한 표정을 지은 채 주유는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타인인 장간이 이러할진대 집안이 뒤흔들리는 소동을 각오했지만, 정작 숙부 주상(周尙)과 모친 장(蔣)부인은 한숨만 쉬었을 뿐이었다. 우리가 쌍수들고 반대한들 그대가 눈썹 하나 까닥하겠느냐. 주일문의 당주는 그대인즉 알아서 하거라. 유(瑜) 네가 제발로 고생길을 택하겠다는데 일러 무삼하겠는고. 아, 예. 감사합니다(식은땀)
덤으로 노자경까지 달고 약 1년 반만에 강동땅을 다시 밟은 주유를 마중나온 사람은 이번에도 손책이었다. 지금쯤 머리 싸매고 정무에 열을 올려야 할 한 나라의 군주 되는 자가 변변한 호위도 없이 기껏 가신 하날 맞으러 여기까지 나온 것에 대해 주유는 속사포로 질타를 퍼부었지만, 손책의 전술의 천재다운 지극 효과적인 방어전 앞에 모든 말이 무위로 돌아갔다. 딱 한 마디. 얼굴이 풀려 있어, 주공근.
마음에 기꺼운 건 기꺼운 거니까 할 수 없다.
그날 밤은 주유의 귀환과 중랑장 제수를 축하한다는 구실로 부어라 마셔라의 연회였다. 대낮의 강자들이 모두 술에 절어 나가떨어진 한밤중, 소란의 와중에도 적절히 주량을 조절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발휘하여 알딸딸해지는 선에서 끝낸 주유는 얼큰하게 취했으나 뻗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 손책에게 옆구리를 쿡쿡 찔렸다. 사내놈들 땀냄새 때문에 질식하겠다. 어이 공근, 쪄죽기 전에 밤바람이나 쐬고 오자.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줄줄 끌려나가 문득 정신을 수습해 보니 이미 신발을 벗고 연못 안을 철벅철벅 걸어다니고 있는 중이었지만.
마치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들뜬 표정으로 물을 휘젓는 손책의 은빛 머리칼이 경쾌하게 찰랑이는 것을 살짝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난 열두 살 이후로 항상 주유 쪽이 손책보다 미묘하게 키가 크긴 했었지만 (그러잖아도 여자 얼굴이라 죽어라 구박을 당했거늘 정말이지 키마저 작았으면 백부에게 얼마나 갈굼당했을지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쫙쫙 흐르는 주유였다) 열 일곱에 헤어져 스물에 다시 만난 친우는 놀랍게도 한 촌 가량 밑에 있었다. 순수히 재회를 기뻐하던 중 문제의 현실을 번개같이 깨달은 손책의 얼굴이 얼마나 극적으로 인간 안면근육의 한계를 실험했는진 손오 주군의 명예와 늘어지는 분량을 위해 숨기는 편이 낫겠지만, 하여간 주유는 부당하게도 완전군장의 발에 종아리뼈를 대차게 걷어차이는 고통을 어디까지나 우아한 태도로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 하고 싶었던 말이 뭐야?"
다소 감개에 빠지려던 찰나에 선제공격이 들어왔다. 정서라곤 없는 여자 같으니.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친우가 1년 반 동안 잊지 않아준 걸 냉큼 감사하고 후딱 잊어버리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운 줄은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주유는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역시 결심을 굳혔다 해도 이런 상황에선 절로 긴장하게 되는 법이다. 긴장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고도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응."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나와 혼인해 주지 않겠어?"
손책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니가 시집온다면야."
경악, 황당, 일소, 폭소 등등을 포함하여 대략 대여섯 가지의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책과 설복 수단까지 빈틈없이 준비해 온 주유였지만 '시큰둥하게 <니가 시집온다면야>라고 대답한다' 라는 선택지는 목록에 있지도 않았다. 우수한 두뇌가 파업 선언을 때리고 회전을 중지한 나머지 한참을 꽝꽝 얼어붙어 있다가 기껏해야 나온 말이란 다음과 같았다.
".......데릴사위?"
"그 귓구멍은 장식품이냐? 네가 마누라라고, 마.누.라. 안사람. 아내. 본처. 정.실!"
"................내가 아내.......? 아니 저 말야, 백부, 그렇지만,"
"이놈 자식 보게."
손책이 정색을 하고 주유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누가 손일문의 당주야?"
"백부지."
"누가 네 주군이냐?"
"....백부야."
"결론 나왔네. 당연히 내가 바깥사람. 이제 좀 알겠냐? 꼭 머리 좋은 것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보통은 남자가 남편이고 여자가 아내라는 세간의 상식은 강동의 소패왕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그렇듯이 주유는 그저 재빨리 백기를 드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아무렴 어떠냐. 내조건 외조건 하는 일은 똑같은데. 알았어. 백부가 원하는 대로 할게.
손책은 목을 가르릉 울리는 고양이과 맹수와 흡사한 소리를 내서 웃었다. 납득한 거냐. 좋아, 우리 집 마나님을 설득하는 사명도 이 김에 일임한다. 고양이처럼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진 눈이 달빛 밑에서 반짝거렸다. 어디 치워버릴 수도 없는 선머슴아를 평생 곁에 두고 살 각오가 단단히 서 계신 손일문의 큰어른을 설복해 보라구. 무사히 통과하면 그땐 당당하게 내 정실로 못 맞을 일도 없겠지.
어차피 지금도 백부의 마누라 소리는 듣고 있어. 주유는 홧김에 불퉁스럽게 쏘아붙였다. 손책은 허리를 잡고 폭소했다.
오랜만에 찾은 손씨 집안 식구들의 너무나도 열렬한 환대에서 겨우 살아남은 주유가 오늘의 진정한 방문 목적을 밝혔을 때 손권 이하 가족들은 입을 딱 벌렸고 난향(蘭香)은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 새파래진 얼굴로 뛰쳐나갔으며, 아니나다를까 오부인은 몹시 난색을 표했다. 그대의 제안은 매우 기쁘게 생각하네. 허나 그 아이 백부는 그대도 주지하다시피 몸은 여자이되 마음은 여자가 아닐세. 저 아이는 돌아가신 문대 님의 성정을 그대로 이어받았어. 지금의 행적을 보게, 어디 한 남자의 아내라는 틀에 만족할 위인이던가. 그 애가 낭군을 힘써 받들고 모시며 자식을 보고 좋은 가정을 이루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내 딸이지만 중원의 명가 주일문의 안주인으로 어울릴 여자는 결코 아니라네. 공근이 우리 아이에게 언제나 신의와 충절을 지켜왔음은 누구나 아는 일,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겠네. 그러나 부디 무리는 말게. 자네는 책(策)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어. 어미인 나도 감히 바라지 못할 만큼의 일을 했네. 그대는 그 선머슴을 건져가는 것이 마치 그대의 소임이라도 되는 양 여기고 있는 모양이네만 그건 도를 넘은 의무감에 불과해. 그러지 말게. 더구나 자네는 이미 백부의 의제가 아니던가. 우리 모두 공근을 가족의 일원처럼 생각하고 있다네. 그럼에도 정 자네가 손씨 집안과 혈연을 맺고 싶다면 차라리 난향이는 어떻겠는가.
구구절절절절절 이어지는 설득 반 변명 반의 장광설을 참을성 있게 전부 듣고 난 주유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청혼의 이유를 늘어놓는 한편 손책이 주일문의 며느리가 아니라 자신이 손일문의 사위임을 분명히 했다. (이성이 있었으므로 차마 실은 제 쪽이 안사람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부인은 더더욱 경악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바위처럼 굳건히 버티는 주유를 꺾지는 못했다. 따님을 주십시오와 그러니까 둘째를 주겠대도의 치열한 설전이 대략 서너 식경 이어진 끝에, 오부인은 한숨처럼 탄식을 뱉으며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내들은 어찌하여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이리도 막무가내일꼬!
시모(媤母)인지 빙모(聘母)인지 쓰는 놈도 슬슬 헷갈리지만 하여간 정식으로 어머님이 되실 분에게 큰절을 올리고 퇴실해 보니, 막강한 관문 앞에 적어도 구혼한 남자를 혼자 내팽개치고 어딘가로 사라졌던 손책은 낭하의 난간에 걸터앉아 까닥거리고 있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주유를 발견한 손책이 손을 들어 반겼다.
"여어, 공근. 면상을 보아하니 마나님을 함락시킨 모양이구먼. 하긴 우리 집 대빵도 못 꺾은 그놈의 황소고집을 누가 막겠냐 싶다만."
"전부 내게 떠넘기고 뱃속이 편하기도 했겠군. 대체 어디 있었어?"
"실연의 상처로 숨죽여 우는 동생을 위로하는 것도 장자(長子)의 의무지."
"실연의 상처? 누가?"
"난향이 말고 달리 있냐."
"뭐!? 어느 틈에... 아니, 대체 어느 간덩이 큰 작자가 감히 난향을 찼다는 거야!?"
손책은 분개하는 주유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너 같은 둔탱이는 진작에 기정 사실을 만들어서 책임을 확 지워버려야 쓰는 건데 말이다. 그 녀석도 괜히 수줍은 척 꾸물대다 대어를 놓쳤지. 바보 같으니."
"....무슨 뜻이야?"
대답하는 대신, 손책은 씨익 웃으면서 주유의 명치께를 검지로 꾹 눌렀다. 잘 부탁해, 마눌님.
장소가 펄펄 날뛰고 옛 손견 군단 사천왕이 저 새파란 것이 결국 우리 작은 주인을 채갔다는 원한 서린 눈길로 주유를 야리는 사소한(?)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원체 손오가 좀 '재밌으면 만사장땡'의 마음가짐으로 성립하는 동네인지라 혼례식은 예상보다는 훠얼씬 온건하고 무사하게 치러졌다. 오부인이 손견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후로 장래의 딸을 위해 곱게곱게 간직해 두었으나(그리고 오부인 자신도 그 모친에게 물려받았다는) 근 25년간 임자를 못 만나 - 다들 포기했던 손책은 그렇다 치고, 난향은 꾸물대다 의중의 상대를 놓쳤고 초제는 독전파요 아현은 아직 너무 어리다 - 장롱 속에만 처박혔다 겨우 햇빛을 본 빨갛고 검은 화려한 신부복과 머리장식을 네 쪽이 더 여자 얼굴이라는 같잖은 이유로 주유에게 강제로 밀어붙인 손책이 검고 붉은 신랑복을 나꿔채 유유히 사라졌다 혼례식 직전에야 어슬렁어슬렁 되돌아온 일쯤이야 예측 가능한 매우 하찮은 사건에 불과했다.
실은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신혼부부의 첫날밤이라면 당연지사 따라오는 '그 일'.
이 괴상망측한 한 쌍이 두근두근설레이는 초야(初夜)를 어떻게 치를지 예상하고 모두의 얼굴이 단숨에 시퍼렇게 질렸다. 동정은 아슬아슬하게 탈피했을진대 금지옥엽장중보옥으로 자란 양가(良家)의 도련님답게 다소 결벽증이 있는 주유가 사랑놀음과는 인연이 먼 줄은 주지의 사실이고 (누구누구 때문에 청루에 드나들 시간도 변변히 없었다고도 한다) 하도 막가는 사람이라 잊고 있었으나 생각해 보니 그들의 주군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처녀였다. 처.녀.
근사치 동정과 처녀의 첫날밤. 실로 최악이 아닌가. 부들부들. 부들부들.
손견 군단 사천왕 중에서도 시어머니 기질과 딸바보 정신이 제일로 투철한 정보가 추측되는 사태로 인해 입에 거품을 물고 술기운이고 지랄이고 싹 다 날아간 가신들이 빗금 좍좍 간 얼굴로 부디 무리하지는 말아달라, 오늘만 날이 아니다, 좀 느긋이 간다고 뭐랄 사람 아무도 없으며 죽지도 않는다 어쩌고저쩌고 새신랑과 새색시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질 제, 가장 덜덜 떨어야 할 주유는 의외로 평온했다. 애초에 이성으로 보고 혼인하지도 않았으니 굳이 오늘밤 일을 벌어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여자로서의 자각이라곤 없는 친우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여 손책이 원한다면 그때 뜸들여가며 천천히 진행하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는데.
....따먹혔다. 폭력적으로, 신속하게, 정확무비하게.
정을 통한 상대일지라도 마음의 준비가 전무한 상황에서 '그 일'을 왁작왁작 치러버리면 다 끝난 후 여자들이 이불에 파묻혀 짐승...! 너무해 책임져!! 라며 흑흑 느껴 우는 이유를 주유는 온 몸으로 처절히 체험했다. 가능하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더 부당한 현실은,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식의 지극 상투적인 위로조차 없이 물 한 잔 마시는 정도의 노동밖에 안 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후딱 돌아누워 잠을 청하려던 손책이, 딱 2초 후 벌떡 일어나 주유에게 노골적으로 살의가 담긴 발차기를 날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임신하면 책임질 거냐!!!!"
자업자득, 자초한 일이지만 이건 정말로 부당했다.
"생각해 봤는데, 공근."
둥근 해가 산 언저리에서 슬몃 고개를 내밀 무렵, 밑바닥까지 다 빨려먹히고도 평소의 슬픈 습관대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보니, 손책은 침의 하나만 덜렁 걸친 채 다리를 내팽개친 칠칠치 못한 폼으로, 그러나 매우매우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이미 일어나 앉아 있었다.
몸에 밴 군신간의 예절에 따라 얼결에 단정히 정좌하고 만 주유에게 죄는 없다.
손책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 그대로 심각하고 진중하게 말했다.
"애는 역시 니가 낳아라."
공간이 빠직 얼어붙었다.
설마 나더러 열 달이나 뱃속에 애를 넣고 있으란 말은 안 하겠지? 못해! 죽어도 못해! 아니, 무거운 몸은 뭐 드물게도 평생분의 인내심을 몽땅 동원해 어찌저찌 참는다 치더라도, 산통은 안돼. 무리야 무리! 난 아픈 건 질색이라고! 사람을 몸밖으로 밀어내는 고통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독화살을 열 대 맞고 말지! 역시 요즘 시대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아내의 소임이잖냐? 응, 결정봤다. 잘해 봐, 공근. 생긴 애는 전부 주일문에 줄 테니까 노력해서 좋은 애 만들라구. 내 후계자는 어차피 중모고. 아, 여기에 대해선 이의 없지? 뭐, 암만 그래도 남자는 애를 낳을 수 없다고? 주군 명령이다. 기합 넣어. 근성을 보이란 말이다! 유언실행의 악마가 들고 차도 인간에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말이 많다. 내가 까라면 닥치고 무조건 까.
"횡포다────────!!!!!!"
남들은 알콩달콩할 신혼 겨우 이틀째에 주유는 벌써 25년은 부대낀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아까부터 새파래졌다 시뻘개졌다 빗금 그었다 눈을 뒤집었다 혼자서 바쁘게 뭐하는 거냐. 봐서 질리진 않지만."
".......잠시, 파란만장한 과거를 좀."
"사람을 옆에 두고 보글보글 회상에 잠기지 말란 말이다."
손책에게 핀잔을 당해도 곱씹을 건덕지를 산더미같이 안겨준 장본인에게만은 한 소리 듣고 싶지 않다는 게 주유의 솔직한 본심이었다.
두 사람의 혼인생활은 그럭저럭 깨지지 않고 석 달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무엄하게도 주군과 군사가 언제 파경을 맞을지, 정확히는 주유가 언제 삼십육계주위상책을 놓을지 내기판을 벌이고 두근두근 주시하는 무장들에겐 조금 안된 일이지만, 주유에게는 손책이 먼저 절연을 선언하기 전에는 도망갈 의사가 전무했다. 손책의 파천황 기질과 맥락없는 돌발행동과 가학성 초기증상에 무한접근한 악동의 마음가짐에 짤짤이 시달리는 거야 12년 전부터 계속 그랬으니 새삼스럽지도 않고, 유일하게 근 정신적 외상이 될 뻔했던 '그 일'은 다행히 한두 번 해보고 그다지 재미를 발견 못한 손책이 급격히 흥미를 잃어준 덕에 밤이 무서워지는 최악의 결과만은 회피하였다. 작금도 마음의 상처라면 상처지만 말이다.
여전히 흠뻑 젖은 머리칼을 부비적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사저에 향하는 손책의 뒤를 반 발짝 떨어져서 조용히 따라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안사람의 귀감이었다.
앞서서 휘적휘적 걸어가던 손책이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중얼거렸다.
"와우, 냄새 죽이는데. 복숭아인가?"
"...어떻게 아는 거야....?"
이 거리에서 그걸 탐지하는 코는 이미 인간의 후각이 아니지만, 괜히 소패왕이 아닌지라 걍 대충 넘어가고, 주유로서도 아마도 시비(侍婢)들이 제철을 맞은 과일을 썩둑썩둑 썰어 내놓고 기다리고 있을 거란 짐작은 충분히 갔다. 앗싸라비야하며 발걸음이 사뿐사뿐 날아가는 남편님과는 반대로 걸음이 오히려 점차 느려지는 주유를 손책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굼벵이 걸음이야? 복숭아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
"아니... 그게... 어쩐지, 이상하게 식지가 영 조용해서,"
"하아!?"
양가의 도련님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품위 있게, 결코 음식물과 이재를 탐하지 않으나 유별나게 복숭아 앞에선 죽고 못 사는 주유를 너무나도 잘 아는 만큼 손책이 배경에 얘가 뭘 잘못 먹고 헛소리냐를 둥둥 띄우고 째려보아도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은 어쨌거나 사실인 것이다. 얼마 전,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큼지막한 복숭아를 가지에서 똑 따서 맛나게 먹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왠지 신 것이 유독 땡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거 참 말하기도 뭣한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람들도 아니건만.
뒤통수에 땀방울을 가득 매달고 외면하는 주유를 한참 의심 한가득의 눈초리로 족히 1분간 태워죽일 듯이 노려보던 손책이 마침내 어깨를 으쓱하며 안광을 거두고 발걸음을 도로 떼어놓았다. 네가 싫다는데 내가 뭐라고 토를 달겠냐? 내심 좀 안도하고 그 뒤를 다시금 서둘러 쫓아가려는데, 손책 왈.
"─하지만 간식으로 복숭아라니 누군지 마음씀씀이 좋은걸. 저녁엔 전어구이나 부탁해 볼까♪"
전어?
희번덕거리는 생선눈알이 뇌리에 떠오른 순간에 위액이 확 역류했다.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태우며 치받치는 감각에 어찔하여 양무릎을 꺾었다.
"공근!?"
와아, 내 살다 보니 백부가 경악하는 걸 볼 때도 다 있구나. 거기서 주유의 생각은 뚝 끊겼다.
이래봬도 타고난 군인이자 만년건강체인 중랑장 주유가 머리 싸매고 누워버렸다는 소식은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정말로 근심하여 병문안을 와 주는 사람 3 대 심심하던 참에 뒷담화꺼리가 생겨 얼싸 좋다고 놀러오는 놈들 7의 비율로 침실이 시끌시끌한 가운데, 짠 듯이 하나같이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다면서 "이것은 흡사..." 까지 말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꿀꺽 삼켜버린 의원 넷이 모조리 엉덩이를 걷어채여 쫓겨난 후, 이마에 빠직빠직 힘줄이 돋은 손책이 폭발하기 직전에 요행히도 우번이 당대의 명의 화타를 모셔오자는 몹시 훌륭한 발상에 착안하였다. 더더욱 요행히도, 역마살 꼈기로 유명한 화타 선생은 그날따라 소박한 거처에 용케 붙어 있었고, 원인불명의 병이란 말에 두말없이 흔쾌히 수레에 몸을 실었다.
신의(神醫)쯤 되고 보면 평범한 의원과는 착안점이 다른지, 방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정작 다 죽어가는 주유는 흘끗 쳐다보았을 뿐 어째 툴툴대는 손책을 반강제로 끌어앉혀 맥을 짚은 백발 성성한 노인은 인자히도 웃으며 말했다.
"회임입니다."
".......에?"
"회임입니다."
손책의 첫 반응은, 빙글 돌아 기진해서 뻗어 있는 명색 아내를 이단옆차기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손권, 장소, 장굉, 여범, 노숙 등등이 달려들어 허겁지겁 주유를 사정거리에서 치운 사이, 태사자로도 부족해서 진무, 동습, 주태, 장흠, 여몽 등등등 나이 젊은 무투파란 무투파를 총동원해서야 수극을 휘어잡고 저걸 척살하겠다 길길이 날뛰는 손책을 가까스로 찍어누를 수 있었다. 내 분명히 애는 네가 낳으라고 했다! 감히 주군 말을 거역해!!!? 야 이것들아 말로 할 때 못 놓지!!!? 주군 명령이어도 불가능한 일은 불가능한 거야! 전횡에도 정도가 있지! 머리가 징징 울리는 와중에도 대담하게 반항을 시도한 주유는 실은 억울함보다도 중신들의 동정 담뿍 어린 눈길을 도시 배겨낼 수 없었다거나 한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지만 부군이 ("아니, 부군은 난데요.") 겪고 있는 헛구역질은 틀림없는 입덧이며, 그 입덧을 비롯한 임신의 징후와 증상은 모두 부군에게 ("부군은 나라니까요.") 이전된 것으로 보이며, 추측컨대 틀림없이 산통도 부군의 몫이리라 ("그러니까 안사람은 쟤래도!!") 여겨진다는 화타의 차분한 설명을 들은 후에야 손책은 피의 보복을 포기했다. 뭐 그렇다면야 봐줘야죠. 주군 명을 거역한 건 여전히 괘씸하지만 이번만은 화원화 선생의 흰 수염을 봐서 용서한다. 분발해서 견뎌라, 공근?
일곱 달 후에 닥칠 사람 잡는다는 산통에 대한 불안보다 사방에서 꽂히는 연민의 시선이 따끔따끔 쑤셔서 더욱 괴로운 주유였다.
세월아 네월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모친을 비롯한 가족 전부와 중신 일동이 빌다시피 결사적으로 매달려 손책의 여릉진압전 최전선 출장만은 가까스로 저지했으나, 애가 들어섰다면서 무슨 조화로 신체 변화가 전혀 없으니 술을 동이째로 푸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길 뜯고 어디 서역국 황제 기분으로 반란분자의 목을 뎅겅뎅겅 치고 시녀;들과 시시덕거리는 등 고래로부터 의원이란 의원들이 줄창 주장해 온 음식도 가려먹고 험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는 임산부의 규칙을 모조리 위반하면서 살아도 말릴 방도가 없었다. 이러다 모친과 부친 어느 쪽인가를 닮은 신수 훤한 아이는커녕 삼두육비의 괴물이나 고깃덩이가 기어나와도 그러려니 하자는 암묵의 약속이 만연한 가운데, 주유는 우울증/빈혈/구토/메스꺼움/피로/어지럼증/근육통/무거운 몸 기타 등등 보통 초산의 여성이 겪어야 할 온갖 하찮은 증상에 아픈 건 싫으시다는 남편님을 대신해 죽어라 시달리고 있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지 않다.
일은 작전회의 도중에 터졌다.
"크, 크윽.....!!!?"
"주태수!?"
온 것이다.
진통주기가.
그리고 산파는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으르렁크르렁 비밀서약을 요구하는 무장들의 험악한 얼굴에 혼이 다 빠져 기다시피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빈틈없이 지키는 산실로 들어갔을 때, 앞으로 천 년을 살아도 잊을 수 없을 광경을 보았노라고.
편하게도 퍼지르고 앉아 까르륵 웃는 예쁘장한 시녀 하난 무릎에 앉히고 둘은 양옆에 끼고 멋대로 주물럭대는 출산당사자와, 바로 옆의 침대에서 혀 깨물지 말라고 물려놓은 천을 구멍이 뻥 뚫리고 피가 배도록 악물고 주기적으로 덤벼드는 무시무시한 통증을 이겨내려 용을 쓰고 있는 그 남편의 모습을. ("내가 남편이라니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오늘도 세죽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런데 이럴 때 힘 줘! 힘 주라구! 는 대체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
임신 초기, 유난히 예민해진 주유가 제발 몸 좀 아껴달라고 근 울다시피 사정하면 응해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의 혼백까지 잡아찢는 격렬한 독설의 응수로 우울증만 더욱 악화시켰던 몹쓸 남편님은 진통 개시 후 열두 시간을 넘어갔을 무렵부터 슬슬 인내심 상실의 징조를 드러내었다. 그래도 양심이 털 끄트머리만큼은 남아 있었던지 밀린 정무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처리하면서 네 시간은 더 버텼지만, 결국 그래봤자여서 마침내는 붓을 한 손으로 우득 꺾고 애먼 침상에 함부로 발길질을 해대며 도저히 지면에 공개할 수 없는 갖은 욕지거리를 다 퍼붓기 시작했다.
"젠장, 진짜 언제까지 질질 끌 거냐! 나올 기미도 안 보이잖아! 기합 넣고 단전에 힘 주고 빨랑 못 끝내지!! 니가 그러고도 사내냐───!!! 이 (Pi────────) 같으니! (Pi────)고 (Pi────────)서 (Pi────────)기 전에 근성 보여! 보이란 말이다!!! (Pi───)! (Pi──────)!!! (Pi────)(Pi──────)!!!!"
"아이구머니나!! 애가 놀라 거꾸로 서면 어쩌려고 이러시오!!"
산파도 진짜 산모가 누군지 슬슬 헷갈리는 모양이나, 어쨌건 통증으로 정신이 가물가물 혼미한 와중에 주유는 이미 제구실을 못하게 된 천 대신 이불을 자근자근 씹으며 속으로만 '백부 이 자식,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라며 절규하고 있었다. 씹고 있지 않았어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겠지만.
그래서 그가 구제불능이라는 것이다.
초산의 경우 난산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하물며 자기 몸에서 직접 내보내지도 않을 바에야 힘의 강약 조절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한 노릇이어서, 날뛰기에도 질린 손책이 잠잠해지고 그로부터도 두 시간을 더 끌고 나서야 주유는 가까스로 맡은 바 소임을 달성했다.
".....아, 나왔다."
한없이 태평한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고막이 떨어져라 목청껏 울어대는 아기의 산성을 뒤로 하고 사고의 끈을 던져버렸다.
주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올려다보았자 얼룩무늬를 전부 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눈만 말똥말똥해질 뿐이지만 돌아눕기엔 전신이 지끈지끈 쑤시고 아파서 움직이기조차 싫었다. 실로 열 달만에 무거운 짐을 벗었다는 생각에 속이 시원한가 하면 허탈하기도 하고, 무언가 소중한 것이 쑤욱 빠져나가 버린 듯한 느낌에 울컥 치받쳐서 왁 울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심경은 복잡하기만 했다. 사나이 생전 눈물은 세 번으로 족하다는 말 따위 싹 다 무시해 버리고 목놓아 통곡이나 해 버리고픈 충동을 거역하기가 힘들다. 여자들은 이런 대사를 어떻게 몇 번씩이나 치르는 걸까.
새삼 세상의 모친들이 모두 위대해 보이고, 특히 다섯이나 낳아 모두 잘 키운 오부인은 여신과도 맞먹는 숭고한 존재만 같다.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머리 바로 두 치 위에서 손책의 얼굴이 불쑥 출현했을 때는 그야말로 심장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여어, 살아 있었냐 공근."
"....할 말이 고작 그것뿐이야?"
넘어가려던 숨을 강제로 다시 붙들어 온 주유가 나지막하게 반박했다. 내심 같아선 좀 더 아우성을 쳐줘도 속이 시원찮았지만 떠들 기운은 애초에 없었다.
손책은 씩 웃고 침상에 털푸덕 걸터앉았다.
"아직 못 봤지? 너 닮은 딸이더라."
"태어난지 하루도 안 된 아기가 날 닮고 자시고 할 일도 없을 텐데."
"머리카락하고 눈."
"....응?"
"둘 다 검은색."
".....아아."
조금 유감이라는 생각은 했다.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칼처럼 은색이었더라면, 훨씬.
등을 쭉 펴면서 손책은 들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미인 탐지기를 걸고 맹세하는데 이제 자라면 백에 백 천하절색이 될 거다. 내기해도 좋아. 걸래?"
"....사양하겠어."
"웃, 재미없긴. ─아 젠장, 역시 널 이교(二喬)라던가, 하여간 그런 경국지색에게 장가들였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아빠와 엄마를 반반씩 닮은 절세미녀가 태어나면 내 후궁으로,"
"백─부─!"
"농담이다 임마. 정색하지 말어."
재미있어 죽겠다고 낄낄대는 손책의 옆얼굴을 보는 사이에, 무언가, 뱃속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마냥 불편해지며 억울한 듯 분한 듯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손오의 주군이자 강동의 소패왕, 애초에 평범과는 담을 쌓은 여자인 줄은 뼈저리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게 최선의 길이라 여겼기에 진작부터 많은 것에 대한 기대를 접고 시작한 혼인생활이다. 남들과 같이 보통의 행복한 가정을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어차피 백부에게서 따뜻한 말마디는 기대하지도 않았어!"
내뱉고 나서 즉시 후회했다. 아니 이런 굴러들어온 호박을 봤나! 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그 표정의 심술궂음이라니.
크으으윽;;; 신음하며 제 입을 꿰매버리고픈 심정에 사로잡힌 주유에게 초롱초롱한 눈의 손책이 덮쳐들었다.
"헤에... 나한테 위로받고 싶었어? 여보 고생이 많았소라던가 해주길 바란 거야? 그런 거야? 응? 주~공~근~?"
"잘못했습니다. 부디 못 들은 걸로 치부하고 조용히 떠나주십시오."
"호오호오, 그랬군. 그런 거였군. 너랑 나 사이에 뭘 첫날 밤의 새색시마냥 수줍음을 탔냐, 진작 말했으면 좋았잖아, 이 부끄럼쟁이-"
"내 말 좀 들어주겠어!!?"
항의를 듣는 둥 마는 둥 손책은 엿차, 하면서 침상에 한쪽 무릎을 올렸다.
"그럼, 애쓴 사람에게 포상을 내려볼까?"
"뭐....!!"
눈앞으로 은빛 폭포수가 흐드러지게 쏟아지면서 주유의 항의도 사고도 함께 멎었다.
이마에 따뜻한 것이 살짝 닿는다.
그게 입술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몸을 떼어낸 손책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후훗 웃었을 때였다.
"수고했어."
비단 나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아내도 기껏 이마에 입맞춤 하나로 고생을 깡그리 잊어버릴 만큼 싸구려가 아니라던가, 지금 수고했어 한 마디로 다 때워먹을 심산이냐 그건 대체 어디의 노랭이냐던가, 자린고비도 최소한 공치사는 아까워하지 않는다던가, 모양새는 좀 이래도 우리는 엄연히 부부고 치를 일도 다 치렀는데 까짓 입술 이마에 댔다고 효과가 있을 줄 아느냐던가, 내가 여성 편력은 화려하지 않아도 그쯤에 흐늘흐늘 녹을 만큼 녹록하진 않다던가, 하여간 이번엔 그냥 못 넘어간다거나,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으나 의사에 반하여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말라붙은 목에서는 쉬어빠진 소리 한 개 나와주지 않았다.
이마를 짚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주유를 향해서, 손책은 사양하는 일없이 마음껏 웃어주었다.
이성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닌 여자. 그리고 주유에게는 이성 이전에 막역지우, 막역지우 이전에 일생을 바친 주군. 혼인관계를 맺었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군신 관계의 연장이었다.
그런데 할 일도 다 했건만 어째서 사소한 접촉 하나로 심장이 이렇게나 뛰는 건지, 진짜 이유는 영원히 모르는 편이 나으리라.
주유는 손책을 위해서라면 출산쯤은 기합으로 해낼 게 틀림없다는 어느 겨울날의 쓸데없는 발상에서 파생된 단편. (디테일을 보강해 주신 S의 뮤즈 지벨 님께 바칩니다) 처음엔 분명 썰렁 개그로 밀어붙일 작정으로 착수했는데 쓰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어정쩡해져 버렸다. 문재의 결핍은 노력으로 어찌 되는 일이 아니므로 대충 넘어가자.
손책이 주유를 너무 막 다루는 걸로 보이겠지만 이것도 애정 저것도 애정. 저건 근본이 못돼쳐먹어서 어쩔 수 없다.
남자 버전과 여자 버전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누가 뭐래도 유책이지만 후자는 볼 거 없이 책유라는 것. (....)
하여간 이걸로 질이야 어쨌건 간에 노르마는 클리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털푸덕.
덤 하나. 요즘 일각에서 꽤 화제가 되고 있는 모 중국 일러스트레이터(누군지 이름 좀 알자!!)의 삼국무장 여성화 일러스트의 손책 백부 버전을 괜시리 붙여 보는 S.
실은 이 아가씨 얼굴이 상당히 취향이어서 여성 버전 이미지 모델로 삼을까 고민도 좀 했는데 결국 포기했음.
그치만 가슴이 너무 크단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