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갈겨 쓰는 데 맛 들인 모양인 관리인, 오늘도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주의 사항부터 나갑니다.
* 대놓고 여성향입니다.
* 카가/하야토입니다.
* 정신없고 재미없고 삐리릭한 신도 없는 三無一體입니다. (....)
* 또(...) 술판 네타입니다.
* 시점은 SAGA 직후, SIN은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 안 망가지는 인간이 한 개도 없습니다.
* 카가 씨가 좀 헤타레;입니다.
* 괜히 열어보셨다가 눈 버리셔도 관리인은 책임 못 집니다.
그래도 열어보시겠다는 당신께선 내일의 용자.
"오우~사무라이 보이! 아니! 납치당한 프린세스!! 우승 축하해용!!"
"구데리안 씨~그 말만 벌써 다섯 번째예요. 아니 여섯 번짼가? 에이 모르겠다. 아하하하."
때는 2020년,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겁나게 파란만장했던 제 15회 사이버 포뮬러 월드 그랑프리가 그럭저럭 막을 내리고, 시상식도 무사히 끝난 후.
CF 톱 클래스 드라이버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말로는 카자미 하야토의 통산 세 번째 월드 챔프 획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 라지만 까놓고 말해 다 핑계고, 서킷 위에서는 잡아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는 라이벌이지만 일단 머신을 내렸다 하면 사이가 희한하리만치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은 현세대 톱 클래스들이 그저 오프시즌에 서로 얼굴 좀 보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이 본심에 가깝다.
그 증거로 이미 작살난 술만 대략 스무 상자고 하나같이 얼큰하게 술이 올라 있다.
"하지만 Me의 섬세한 가슴은 정말이지 Big Shock! 나이도 열 아홉이나 먹어서 Kidnapping을 당하다니 카자미~조심성이 부족해도 정도가 있지! 칫칫칫!"
"아핫, 제발 그만해 주세요~벌써 란돌에게 그 문제로 두 시간 내내 긁히고 오사무 형에게 세 시간 동안 잔소릴 들었다구요─아, 이거 맛있네요♥"
"그지그지? 술의 프로페셔널이기도 한 Me의 Choice는 역시 탁월! 자 한 잔 더! 그리고 앞으론 위험한 어른을 함부로 따라가면 못 씁니다!!"
"그러게 말예요, 진짜 나구모 사장을 왜 거기까지 따라갔는지 모르겠네~아하하하하하. ....딸꾹."
"잠깐 구데리안! 네놈 대체 카자미에게 뭘 먹이고 있는 거냐!!?"
"응? 꼬앙뜨로(Cointreau)를 약간,"
"40도짜리가 아니냐─────!!!!"
"쿠헉! 우씨, 해보자는 거냣!!"
"와아, 구데리안 씨, 하이넬 씨~싸우지 마시라니까요~딸꾹. ─앗 오렌지 맛♡"
...대충 이런 식으로 아수라장이었다.
한편,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잭 다니엘을 여유 있게 음미하고 있던 카가의 옆에는 새로 딴 털러모어 듀를 안은 신죠가 자리를 잡았다.
"아니나다를까 휴전이 30분을 못 가는군. 하이넬이고 구데리안이고."
"저 치들이야 저러고 살다 죽게 내버려 둬. 안 싸우면 안 싸우는 대로 몸살 나서 앓아누울걸."
"─하야토에게 안 가봐도 되는 거냐?"
"재미있게 잘 놀고 있는데 뭘. 내가 뭐 쟤 보호자도 아니고."
원래부터 천재적인 드라이빙 테크닉과는 정 반대로 일상 생활에선 뭔가 심하게 어설퍼서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진짜 큰일날 것 같은 강력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게 카자미 하야토라는 레이서이긴 하지만, 아주 대놓고 싸고 돌며 죽자사자 과보호해대는 장본인이 이제 와서 나 보호자 아니네라고 우겨도 설득력은 없다고 신죠는 생각했으나 입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대략 6년간 몸담았던 AOI에서 목 잘리고 스톡카에서 세상 경험 호되게 하더니 많이 현명해졌다.
".....나구모, 알파뉴로, 알자드, 필."
"응?"
"뭐 저 녀석도 이번 시즌엔 여러 가지로 골치 깨나 아팠고 말이지. 한동안 은단 맞은 병아리 모양 축 처져 있더니 그예 쌩쌩해졌구만. 하여튼 회복 속도 하난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보호자의 자세가 아니면 뭐냐고도 생각했지만 역시 입은 다물었다.
신죠는 신죠대로 꼭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 있잖냐 카가."
"응? 뭐냐?"
"..........에 또, 그러니까 그게........"
"하아?"
"그러니까, 저기.... 저 말야........."
"뭐야, 접속사만 남발하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제대로 말 안 하면 뭔 수로 알아듣냐 내가 점쟁이도 아닌데."
"...음... 그럼 묻겠는데..."
신죠는 너무나너무나 곤란해서 미칠 지경이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교코 씨를 덮쳤다며?"
"푸흡!!"
뿜었다.
"왓! 지저분하게!!"
"....뭐... 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 뭘 어쨌다고─!!? 교코 씨를!!? 내가!! 이게 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아직 장가도 못 간 총각 인생 망치고 싶어 환장했냐!!"
"그, 그렇지만 미키가 아스카 씨한테 들었다고... 글쎄, 오너가 술독에 빠져선 키스가 어쨌다는 둥 예의가 안 됐다는 둥 일생의 불찰이 어쨌다는 둥 죽일 놈 살릴 놈 온갖 육두문자를 남발하며 주정을 부리더라잖아....? 역시, 그런 무시무시...아니아니 엄청난 일을 저지를 만큼 뱃심이 두둑한 바보... 아니아니 용자는 오너 주변엔 너 하나밖에 없지 않나 해서.... 커헉. 카, 카가... 이것 좀 놓고....! 수, 숨을 쉴 수... 가.... 커헉."
아무래도 신죠가 축적된 경험을 통해 현명해졌을 가능성은 영원히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봉인해야 할 것 같다.
"바보냐 넌─!! 그 잘난 머린 폼으로 달고 다니지 이 인간아! 만에 하나 아니 구골에 하나 내가 홱까닥 돌아서 일쳤다고 해도 교코 씨한테 그런 짓 저지르고 목숨 부지할 리가 없잖냐!! ....헉, 나도 모르게 상상해 버렸다! 우와아 온 몸에 소소소소소소름이..... 젠장 난 아직 살고 싶다구─! 멀쩡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보다 너 이 자식, 대체 날 뭘로 본 거야!? 멀쩡한 총각한테 누명을 씌워도 유분수잖아! 야 듣고 있냐 신,"
쨍그랑.
신죠의 목을 거머쥐고 앞뒤로 죽어라고 짤짤짤짤 쉐이크하던 카가는 술잔이 박살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고, 백짓장처럼 질려 충격을 차마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 하야토의 눈길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등골에 아까의 결코 본의가 아닌 상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절대영도의 냉기가 흘렀다.
커다란 갈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르기 시작한다.
24살 청년의 튼튼무쌍한 심장이 뚝 멎는 소리를 들었다.
신죠는 꽃밭 너머에서 여섯 살 때 키웠던 애견 포치가 발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어, 어이어이 기다려 하야토! 오해다!!"
"쿠헉!"
어쩐지 기세좋게 돌아서는 와중에 신죠의 턱에 스트레이트 강펀치를 날린 듯한 느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면 진다.
아무튼 털퍽 주저앉아 도저히 위로를 할 수 없을 만큼 서럽게 흐느끼는 하야토 앞에서 무조건 석고대죄부터 결행. 하야토에 관한 한 '울리기 전에 사과한다'가 신경에 조건반사로 박혀 버린 남자의 슬픈 습성이었다.
"너... 너무해요 카가 씨. 저하고는 어차피 불장난이었단 건가요? 그래요 전 어차피 여자도 아니고 귀엽지도 않은걸요─!! 이해해요... 이해하지만... 역시 잔인해!! 으흐흑흑─!!!"
"나 아냐 나 아냐 나 아냐 나 아냐~오해야! 교코 씨랑은 아무 일도 없었어, 당최 뭐가 있을 리가 없잖냐! 헉, 야 그만 울어 하야토! ─랄까 불장난이고 나발이고 아직 암것도 못 해봤는데!! 우와와와,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가 다 잘못했다! 제발 뚝 그쳐, 응? 내가 잘못했다니까─!"
"후에에에에에에엥~~~!!!!"
"하야토~ 제발 울지 말라니까~!"
구데리안 이 자식, 대체 뭘 얼마나 퍼먹인 거냐─! 우씨 니들 나중에 다 죽었어!! 그나마 들어간 술기운도 다 날라간 카가는 마음속으로 머리를 쥐어뜯다 움찔했다.
"카~가~~~네 이놈~~~~~~~!!"
"으악, 역시 나왔다!!"
본인만 인정 안 하는 카자미 하야토 과보호 협회 회장이자 그 실체는 초초초 바보 아빠(...) 스고 오사무가 마치 좀비처럼 흐느적대며 몸을 곧추세우는 광경은 호러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카가 본인은 과보호 협회 부회장이자 실세라던가 한다) 오마나 세상에, 손에 식칼 대신 전기톱만 들려주면 너끈히 제이슨으로도 통하겠는걸 후하하하하하.
엣 식칼?
"예전부터 네놈의 그 경박한 생활 태도에 대해선 언젠가 따끔히 한 마디 해 주려 벼르고 있었다만, 하야토를 봐서 애써 잠자코 있어주었더니 그예 이런 사단이 생겼구나! 그러게 진작 유치원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더냐 하야토! 부모님이 탐탁찮게 생각하는 아이와는 놀아서는 안 됩니다! 인생 경험 풍부한 어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거늘,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너의 몹쓸 버릇이라고 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러나 그건 그거 이건 이거, 감히 우리 집 앨 갖고 놀다 헌신짝처럼 버린 이상은 결코 용서 못한다...! 천벌────!!!"
"헉! 스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옵!!!!!"
아니나다를까 오사무 전용 브레이크 에델리 부쯔홀츠가 목숨 걸고 몸을 던져 등에 엉겨붙었다.
"스고, 살인은 안 돼 살인은! 어서 식칼을 내려놔!!"
"이거 놔 부쯔홀츠! 저놈을 죽이고 나도 죽겠어! 지하에 계신 아저씨께 목숨으로 사죄하겠네! 에잇에잇!!"
"자네, '스고 오사무와 블리드 카가 동반자살!?' 이란 웃지 못할 헤드라인으로 온 신문을 장식당하고 싶은 겐가─!!"
바둥바둥버둥버둥, 자식 사랑에 불타는 민폐 아버지(...)와 고생을 덤태기로 쓰는 그 친구의 아우성과 실갱이가 천장을 들썩이는 동안, 정말로 갖고나 놀아봤으면 이리 억울하진 않겠다고 생각하던 카가는 극한까지 단련된 반사신경이 명하는 대로 잽씨덕 오른쪽으로 90도 회피했고 바로 다음 찰나에 바닥재는 쿠쾅 두동강으로 쪼개졌다.
".............치잇."
"앗, 지금! 지금 혀 찼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기냐 너!!"
교본에 실려도 손색없을 완벽한 동작으로 바닥재를 단번에 내리찍은 북구계 정통파 왕자님, 그 이름도 거창한 칼 리히터 폰 란돌은 심히 우아하게 바닥에 꽂힌 일본도(어째선지 진검)를 뽑고 역시 우아하고도 쿨한 미소를 훗 띄웠다.
"미안하게 됐군. 손이 미끄러졌다."
녹색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아 예에예에 헤이헤이. 빙상 위의 백조도 맥을 못 출 미려한 슬라이딩이시구먼요."
참고로 말하자면 란돌은 2년 전 엔트리한 이후로 카자미 하야토 과보호 협회의 No. 3로 부상해 있다. 이쪽도 아니라고 우겨대는 건 본인뿐이다. (그리고 모르는 건 하야토뿐이다)
"나는 세계검도대회 주니어 부문 챔피언이기도 해서 말이지."
"들어, 사람 말."
"문득 보아하니 마침 여기에 일본도가 한 자루 있더군."
"세상 어느 연회장 바닥에 무라마사가 굴러다니냐."
"오랜만에 천 년 역사를 세계에 자랑하는 일본도의 예리함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지 뭔가."
"그러니까 사람 말 좀 들으라구!"
"진정한 명인의 솜씨가 빚어낸 작품은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다고 하지."
"범죄야 왕자님."
"그런 이유로."
"뭐가 그런 이윤데."
"──시험에 기꺼이 협력해 주겠다니 아주 고맙군 그래!!!"
"아뇨 사양하겠습니닷──!!!"
"왜 도망가는 거냐!!"
"인간의 생존본능에 물어봐!"
"거기 서─!!"
"너라면 서겠냐─!!"
여담이지만 그 사이 여전히 서럽게서럽게 울어대는 하야토는 구데리안이 재롱 떨며 달래고 있었다.
카자미 하야토는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길고 심하게 잘빠진 의문의 까만 물체를 꼬옥 끌어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야토는 잠이 덜 깬 멍한 머리로, 손을 들어 이제까지 베개 대용으로도 사용한 모양인 문제의 물체를 폭폭 찔러보았다.
꾸욱꾸욱. 꾸욱꾸욱.
분석. 부드럽진 않다. 오히려 딱딱한 편. 그렇지만 묘한 탄력이 있다. 누르는 손끝을 기세좋게 튕겨낸다.
.....재미있다.
"──언제까지 남 다릴 갖고 장난칠 거냐, 어이?"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적절히 녹아든 - 희미하게나마 웃음기도 실린 듯한 -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누운 채로 고개를 다소 무리하게 비틀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올려다본 하야토의 눈이, 물컵을 간간이 홀짝이는 카가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카가 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자긴 뭘 잘 자. 새벽 3시다, 새벽 3시!"
"근데 전 왜 이러고 있는 거죠?"
"니가 엉겨붙었잖아!"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현재의 그들은 다리 뻗고 앉은 카가의 무릎 사이에 파고든 하야토가 한쪽 다리를 베개 삼아 느긋이 뒹굴고 있는, 쉽게 말하면 남자의 로망 무릎베개요 - 여기서 하야토는 실제로 베는 건 넓적다리며 무릎은 베봤자 아프기만 할 뿐인데 어째서 세상은 이것을 무릎베개라고 지칭하는지에 관해 대략 1초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 각도에 따라선 아아주 문란한 광경(...)으로 안 보이지도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깨를 슬쩍 감싸 안은 팔이 따스했다.
"......이거, 뭔가 했더니 카가 씨 다리였구나아.... 어쩐지 익숙하더라고요...."
"임마, 다 좋은데 턱 끝으로 부비적대진 말앗, 턱 끝으론!!"
하야토는 온 몸의 힘을 쭈욱 빼고 즉석 베개에 매달리듯이 치대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위에서 성대한 불평이 논브레스로 쏟아지지만 정작 비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입으론 뭔 말을 해도 역시 상냥하다니까─하야토는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꼭꼭 눌러삼키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꼴이 된 연회장 내부를 죽 둘러보았다. 초저녁의 강자들은 모두 꿈길 위. 그 와중에도 헤어캡을 쓰고 담요를 덮고 단정하게 똑바로 누워서 자고 있는 하이넬이 미소를 자아낸다. 하이넬의 위에 엎어져 있는 헐벗은 커다란 엉덩이는... 성조기 무늬도 화려한 트렁크를 맨정신으로 입을 사람은 지인 중에는 딱 하나밖에 없다. 아침이 되면 보나마나 또 한 번 피바람이 불겠지. 소파에 파묻혀 다리를 꼰 채로 우아하게 눈을 붙이고 있는 란돌은 과연 답다고 해야 할까. 그마저도 그림이 된다.
".....근데요 카가 씨."
"아?"
"오사무 형이 식칼을 쥐고 있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모르는 게 약이래더라."
"뭔가 저 움켜쥔 손에서 무시무시한 집념이 느껴,"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실수로 바퀴벌레 절반을 씹어버렸을 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처절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에, 하야토는 더 이상 추궁하기를 포기했다.
"그보다 너 말이다, 너."
"예?"
"서~얼마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는 싸구려 변명은 안 하리라 믿는다~?"
"아... 아하하하하하? 무무무슨 말씀이세요?"
"뭐~어가 불장난이냐! 지가 무슨 몸 버린 처녀라고 울고 불고 생난리를 떨고, 사람을 난데없이 인간말종 만들어도 유분수지! 너 때문에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는지 알기나 아냐!?"
"아야야얏! 귀! 귀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져! 고작 이 정도로 내 섬세한 마음에 패인 골의 백분지 일에나마 미칠 성 싶냐!!"
그렇지만 정작 아빠와 왕자님께 썰기와 다지기를 당할 뻔한 고역은 묻어두는 시점에서 인간이 됐다고 해야 할지 그저 하야토에겐 물러터졌을 뿐이라고 해야 할지.
하긴 나중에 가서 틀림없이 90%쯤은 진심이었던 란돌의 화려한 칼질을 막아준 사람도 결국 하야토긴 했다. 카가 씨 그만 괴롭히라며 울고 불고 하는 데는 왕자님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지, 아쉬운 얼굴로 혀를 치잇 찼을지언정 (너무나도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일본도를 거둬들여 준 덕분에 그럭저럭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뭐 그 직후에 하야토가 무릎베개를 해 주지 않으면 또 울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바람에 또 여러 가지로 사단이 있었지만 그 부분은 정말로 기억이 홀랑 날아간 모양이겠다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와아~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치만... 그치만 그땐 정말 쇼크였단 말예요~술 좀 들어가서 알딸딸하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그런데 카가 씨가 교코 씨랑 그랬..다고 하니까 그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 같아서...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었다구요. 사실 무슨 소릴 지껄였는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변명이 아니라 진짜예요~!!"
정말 화나셨어요? 어쩌지어쩌지어쩌지라고 똑똑히 쓰인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카가를 올려다본다.
확실히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결코.
하지만.
"─어이 카자미 하야토."
"예?"
"너 임마, 눈이 글썽글썽해선 속눈썹을 애처롭게 떨면서 올려다보면 대강은 그냥 넘어갈 줄로 생각하고 있지 않냐?"
"...................윽."
"....이 꼬맹이가 어디서 쓸데없는 잔머리만 배워와선. 확 범해 버린다."
"치... 얼마든지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 울어버릴 거니까."
"..............또냐...!"
"후후훗, 옛날부터 카가 씬 제 눈물에 약했었죠~. 써먹을 수 있는 건 뭐든지 유용하게 써먹으라고 가르쳐 주신 건 카가 씨예요?"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치는 건방진 청소년의 머리를 휘어잡아 헤드록을 가했다.
"아야야야야야야야야야! 폭력 반대! 폭력 반대!"
"시끄럿! 이게 나이 좀 먹었다고 이젠 아주 대놓고 개긴다. 연장자는 모시고 공경하라는 유치원의 훌륭한 가르침은 엇다 버렸냐?! 아아!?"
"뭐 어때서 그러세요! 제 쪽은 허구헌날 당하고 사는데, 하나쯤은 반격 수단이 있어서 나쁠 건.... 아야얏! 진짜 아파요!"
"뭔 소리야, 당하고 사는 건 나다 나!"
".....접니다."
"나야."
"저라고요!"
"나라니까!"
"저.예.요!"
"크아~안 귀여워 안 귀여워 안 귀여워! 그나마 옛날엔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순순하더니 뭘 잘못 주워먹고 요렇게 귀염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이 된 거냐!!"
"안 귀여운 게 당연하죠! 지금 제 나이가 몇인데!"
"............"
"............"
서로 캬아캬아대며 치뜨고 정면으로 노려보던 양측의 눈에서 갑자기 독기가 좌르륵 빠진다.
"....관둘까."
"예... 뭔가 굉장히 불모하네요...."
"보나마나 날 밝으면 2차다 뭐다 해서 또 들썩일 게 뻔한데, 잠이나 자 두자."
"푸훗, 그렇겠네요. ....아 참, 불편하시죠? 비킬까요?"
"헤에~니가 언제부터 내 생각을 그렇게 해줬냐아~?"
"앗 너무해 카가 씨! 예, 아무 말 말고 비킬 걸 그랬네요!"
툴툴대며 몸을 일으키려는 하야토의 머리를 낭창한 팔이 내리눌러서 원래의 자리에 도로 처박는다.
"─내 참, 됐으니까 그대로 있으라구."
"............치, 솔직하지 못하긴........."
"뭐라고 했냐?"
"아~뇨, 아무것도! 안녕히 주무.... 아."
"???"
뭔가 재미있는 장난을 생각해낸 듯, 생기 감도는 눈을 반짝이며 기세좋게 상반신을 일으킨 하야토는 퀘스천 마크를 동동 떠올리고 있는 카가의 가슴께에 머리를 톡 기댔다. 돌발적인 행동에 어안이벙벙해져 한순간 말을 잃은 청년에게 고개를 돌려 생글 웃어보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는 도로 머리를 푹 파묻어 나 자겠소의 태세로 들어가 버린다. 심장 소리, 기분 좋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어, 어이, 야 하야토....!"
─너 임마, 이 자세가 얼마나 고역인지 알기나 하냐?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악담을 도로 꿀꺽 삼켰다.
이 녀석을 알게 된지 올해로 5년, 딱히 긴 세월은 아니지만 말기 천연에게 뭐가 먹히고 뭐는 안 먹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다. 도로 삼킨 악담은 십에 팔구 후자.
그래, 선을 넘어버리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같지만 소중하고 소중해서 결국 손 한 번 못 대고 마는 심리를 네가 어떻게 알겠냐.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잘 자라 인석아."
보복인 셈치고 양팔에 힘을 있는 한껏 주어 꽈악 끌어안았다. 우겍, 하는 짤막한 숨넘어가는 비명은 단호히 무시.
평소부터 어린애 체온이라고 줄창 놀림받는 상대의 온기는 정말로 따스해서, 여태껏 어딘가로 내빼 있었던 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선, 넘어도 되는데."
그래서, 팔 밑에서 새어나온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결국 듣지 못했다.
일단은 후기. (그러니까 SS 주제에 뭔 놈의...)
1. 여왕님의 술주정과 카가 씨에 대한 의혹은 SAGA 6편 차회 예고의 네타. 그리고 울고 불고 생난리치는 하야토와 힉겁해서 난리법석을 떠는 카가 씨는 예전에도 포스팅한 킹 오브 닭짓 띠질천국 짝댓질무쌍 염장질의 진수 닭살커플지옥(...) ANIMATE CASSETTE COLLECTION ROUND 1에서 파생된 것.
2. 요즘의 나는 强攻 블리드 카가를 눈 뜨고 볼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OTL 오피셜에서 저렇게 대놓고 (하야토 한정) 헤타레인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애정도는 세 배로 올랐음. 역시 난 인성에 문제 있는 망가진 남자 아니면 불타지 않는 여자인 걸까.... 우와 정말 싫다;)
3. 영혼 레벨로 구속되어 있고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주제에 정작 상대가 정말 진전을 보길 원하는지 확신이 없어 결국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불모한 인간들, 그것이 S의 카가/하야토. 구원이 없어도 정도가 있다 OTL
(HOPE는 정말로 왕자님 뿐인가....;;;)
(아니 근데 이거 좀 발랄하자고 쓴 거였는데!? orz)
"오우~사무라이 보이! 아니! 납치당한 프린세스!! 우승 축하해용!!"
"구데리안 씨~그 말만 벌써 다섯 번째예요. 아니 여섯 번짼가? 에이 모르겠다. 아하하하."
때는 2020년, 늘 그렇지만 이번에도 겁나게 파란만장했던 제 15회 사이버 포뮬러 월드 그랑프리가 그럭저럭 막을 내리고, 시상식도 무사히 끝난 후.
CF 톱 클래스 드라이버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말로는 카자미 하야토의 통산 세 번째 월드 챔프 획득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 라지만 까놓고 말해 다 핑계고, 서킷 위에서는 잡아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는 라이벌이지만 일단 머신을 내렸다 하면 사이가 희한하리만치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은 현세대 톱 클래스들이 그저 오프시즌에 서로 얼굴 좀 보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이 본심에 가깝다.
그 증거로 이미 작살난 술만 대략 스무 상자고 하나같이 얼큰하게 술이 올라 있다.
"하지만 Me의 섬세한 가슴은 정말이지 Big Shock! 나이도 열 아홉이나 먹어서 Kidnapping을 당하다니 카자미~조심성이 부족해도 정도가 있지! 칫칫칫!"
"아핫, 제발 그만해 주세요~벌써 란돌에게 그 문제로 두 시간 내내 긁히고 오사무 형에게 세 시간 동안 잔소릴 들었다구요─아, 이거 맛있네요♥"
"그지그지? 술의 프로페셔널이기도 한 Me의 Choice는 역시 탁월! 자 한 잔 더! 그리고 앞으론 위험한 어른을 함부로 따라가면 못 씁니다!!"
"그러게 말예요, 진짜 나구모 사장을 왜 거기까지 따라갔는지 모르겠네~아하하하하하. ....딸꾹."
"잠깐 구데리안! 네놈 대체 카자미에게 뭘 먹이고 있는 거냐!!?"
"응? 꼬앙뜨로(Cointreau)를 약간,"
"40도짜리가 아니냐─────!!!!"
"쿠헉! 우씨, 해보자는 거냣!!"
"와아, 구데리안 씨, 하이넬 씨~싸우지 마시라니까요~딸꾹. ─앗 오렌지 맛♡"
...대충 이런 식으로 아수라장이었다.
한편,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잭 다니엘을 여유 있게 음미하고 있던 카가의 옆에는 새로 딴 털러모어 듀를 안은 신죠가 자리를 잡았다.
"아니나다를까 휴전이 30분을 못 가는군. 하이넬이고 구데리안이고."
"저 치들이야 저러고 살다 죽게 내버려 둬. 안 싸우면 안 싸우는 대로 몸살 나서 앓아누울걸."
"─하야토에게 안 가봐도 되는 거냐?"
"재미있게 잘 놀고 있는데 뭘. 내가 뭐 쟤 보호자도 아니고."
원래부터 천재적인 드라이빙 테크닉과는 정 반대로 일상 생활에선 뭔가 심하게 어설퍼서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진짜 큰일날 것 같은 강력한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게 카자미 하야토라는 레이서이긴 하지만, 아주 대놓고 싸고 돌며 죽자사자 과보호해대는 장본인이 이제 와서 나 보호자 아니네라고 우겨도 설득력은 없다고 신죠는 생각했으나 입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대략 6년간 몸담았던 AOI에서 목 잘리고 스톡카에서 세상 경험 호되게 하더니 많이 현명해졌다.
".....나구모, 알파뉴로, 알자드, 필."
"응?"
"뭐 저 녀석도 이번 시즌엔 여러 가지로 골치 깨나 아팠고 말이지. 한동안 은단 맞은 병아리 모양 축 처져 있더니 그예 쌩쌩해졌구만. 하여튼 회복 속도 하난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보호자의 자세가 아니면 뭐냐고도 생각했지만 역시 입은 다물었다.
신죠는 신죠대로 꼭 물어보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저 있잖냐 카가."
"응? 뭐냐?"
"..........에 또, 그러니까 그게........"
"하아?"
"그러니까, 저기.... 저 말야........."
"뭐야, 접속사만 남발하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제대로 말 안 하면 뭔 수로 알아듣냐 내가 점쟁이도 아닌데."
"...음... 그럼 묻겠는데..."
신죠는 너무나너무나 곤란해서 미칠 지경이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 교코 씨를 덮쳤다며?"
"푸흡!!"
뿜었다.
"왓! 지저분하게!!"
"....뭐... 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뭐...... 뭘 어쨌다고─!!? 교코 씨를!!? 내가!! 이게 웬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아직 장가도 못 간 총각 인생 망치고 싶어 환장했냐!!"
"그, 그렇지만 미키가 아스카 씨한테 들었다고... 글쎄, 오너가 술독에 빠져선 키스가 어쨌다는 둥 예의가 안 됐다는 둥 일생의 불찰이 어쨌다는 둥 죽일 놈 살릴 놈 온갖 육두문자를 남발하며 주정을 부리더라잖아....? 역시, 그런 무시무시...아니아니 엄청난 일을 저지를 만큼 뱃심이 두둑한 바보... 아니아니 용자는 오너 주변엔 너 하나밖에 없지 않나 해서.... 커헉. 카, 카가... 이것 좀 놓고....! 수, 숨을 쉴 수... 가.... 커헉."
아무래도 신죠가 축적된 경험을 통해 현명해졌을 가능성은 영원히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봉인해야 할 것 같다.
"바보냐 넌─!! 그 잘난 머린 폼으로 달고 다니지 이 인간아! 만에 하나 아니 구골에 하나 내가 홱까닥 돌아서 일쳤다고 해도 교코 씨한테 그런 짓 저지르고 목숨 부지할 리가 없잖냐!! ....헉, 나도 모르게 상상해 버렸다! 우와아 온 몸에 소소소소소소름이..... 젠장 난 아직 살고 싶다구─! 멀쩡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그보다 너 이 자식, 대체 날 뭘로 본 거야!? 멀쩡한 총각한테 누명을 씌워도 유분수잖아! 야 듣고 있냐 신,"
쨍그랑.
신죠의 목을 거머쥐고 앞뒤로 죽어라고 짤짤짤짤 쉐이크하던 카가는 술잔이 박살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고, 백짓장처럼 질려 충격을 차마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 하야토의 눈길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등골에 아까의 결코 본의가 아닌 상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절대영도의 냉기가 흘렀다.
커다란 갈색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르기 시작한다.
24살 청년의 튼튼무쌍한 심장이 뚝 멎는 소리를 들었다.
신죠는 꽃밭 너머에서 여섯 살 때 키웠던 애견 포치가 발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어, 어이어이 기다려 하야토! 오해다!!"
"쿠헉!"
어쩐지 기세좋게 돌아서는 와중에 신죠의 턱에 스트레이트 강펀치를 날린 듯한 느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면 진다.
아무튼 털퍽 주저앉아 도저히 위로를 할 수 없을 만큼 서럽게 흐느끼는 하야토 앞에서 무조건 석고대죄부터 결행. 하야토에 관한 한 '울리기 전에 사과한다'가 신경에 조건반사로 박혀 버린 남자의 슬픈 습성이었다.
"너... 너무해요 카가 씨. 저하고는 어차피 불장난이었단 건가요? 그래요 전 어차피 여자도 아니고 귀엽지도 않은걸요─!! 이해해요... 이해하지만... 역시 잔인해!! 으흐흑흑─!!!"
"나 아냐 나 아냐 나 아냐 나 아냐~오해야! 교코 씨랑은 아무 일도 없었어, 당최 뭐가 있을 리가 없잖냐! 헉, 야 그만 울어 하야토! ─랄까 불장난이고 나발이고 아직 암것도 못 해봤는데!! 우와와와, 뭔진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가 다 잘못했다! 제발 뚝 그쳐, 응? 내가 잘못했다니까─!"
"후에에에에에에엥~~~!!!!"
"하야토~ 제발 울지 말라니까~!"
구데리안 이 자식, 대체 뭘 얼마나 퍼먹인 거냐─! 우씨 니들 나중에 다 죽었어!! 그나마 들어간 술기운도 다 날라간 카가는 마음속으로 머리를 쥐어뜯다 움찔했다.
"카~가~~~네 이놈~~~~~~~!!"
"으악, 역시 나왔다!!"
본인만 인정 안 하는 카자미 하야토 과보호 협회 회장이자 그 실체는 초초초 바보 아빠(...) 스고 오사무가 마치 좀비처럼 흐느적대며 몸을 곧추세우는 광경은 호러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카가 본인은 과보호 협회 부회장이자 실세라던가 한다) 오마나 세상에, 손에 식칼 대신 전기톱만 들려주면 너끈히 제이슨으로도 통하겠는걸 후하하하하하.
엣 식칼?
"예전부터 네놈의 그 경박한 생활 태도에 대해선 언젠가 따끔히 한 마디 해 주려 벼르고 있었다만, 하야토를 봐서 애써 잠자코 있어주었더니 그예 이런 사단이 생겼구나! 그러게 진작 유치원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더냐 하야토! 부모님이 탐탁찮게 생각하는 아이와는 놀아서는 안 됩니다! 인생 경험 풍부한 어른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거늘,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너의 몹쓸 버릇이라고 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러나 그건 그거 이건 이거, 감히 우리 집 앨 갖고 놀다 헌신짝처럼 버린 이상은 결코 용서 못한다...! 천벌────!!!"
"헉! 스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옵!!!!!"
아니나다를까 오사무 전용 브레이크 에델리 부쯔홀츠가 목숨 걸고 몸을 던져 등에 엉겨붙었다.
"스고, 살인은 안 돼 살인은! 어서 식칼을 내려놔!!"
"이거 놔 부쯔홀츠! 저놈을 죽이고 나도 죽겠어! 지하에 계신 아저씨께 목숨으로 사죄하겠네! 에잇에잇!!"
"자네, '스고 오사무와 블리드 카가 동반자살!?' 이란 웃지 못할 헤드라인으로 온 신문을 장식당하고 싶은 겐가─!!"
바둥바둥버둥버둥, 자식 사랑에 불타는 민폐 아버지(...)와 고생을 덤태기로 쓰는 그 친구의 아우성과 실갱이가 천장을 들썩이는 동안, 정말로 갖고나 놀아봤으면 이리 억울하진 않겠다고 생각하던 카가는 극한까지 단련된 반사신경이 명하는 대로 잽씨덕 오른쪽으로 90도 회피했고 바로 다음 찰나에 바닥재는 쿠쾅 두동강으로 쪼개졌다.
".............치잇."
"앗, 지금! 지금 혀 찼지!! 노골적으로 아쉬워하기냐 너!!"
교본에 실려도 손색없을 완벽한 동작으로 바닥재를 단번에 내리찍은 북구계 정통파 왕자님, 그 이름도 거창한 칼 리히터 폰 란돌은 심히 우아하게 바닥에 꽂힌 일본도(어째선지 진검)를 뽑고 역시 우아하고도 쿨한 미소를 훗 띄웠다.
"미안하게 됐군. 손이 미끄러졌다."
녹색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아 예에예에 헤이헤이. 빙상 위의 백조도 맥을 못 출 미려한 슬라이딩이시구먼요."
참고로 말하자면 란돌은 2년 전 엔트리한 이후로 카자미 하야토 과보호 협회의 No. 3로 부상해 있다. 이쪽도 아니라고 우겨대는 건 본인뿐이다. (그리고 모르는 건 하야토뿐이다)
"나는 세계검도대회 주니어 부문 챔피언이기도 해서 말이지."
"들어, 사람 말."
"문득 보아하니 마침 여기에 일본도가 한 자루 있더군."
"세상 어느 연회장 바닥에 무라마사가 굴러다니냐."
"오랜만에 천 년 역사를 세계에 자랑하는 일본도의 예리함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지 뭔가."
"그러니까 사람 말 좀 들으라구!"
"진정한 명인의 솜씨가 빚어낸 작품은 사람을 베어도 피가 묻지 않는다고 하지."
"범죄야 왕자님."
"그런 이유로."
"뭐가 그런 이윤데."
"──시험에 기꺼이 협력해 주겠다니 아주 고맙군 그래!!!"
"아뇨 사양하겠습니닷──!!!"
"왜 도망가는 거냐!!"
"인간의 생존본능에 물어봐!"
"거기 서─!!"
"너라면 서겠냐─!!"
여담이지만 그 사이 여전히 서럽게서럽게 울어대는 하야토는 구데리안이 재롱 떨며 달래고 있었다.
카자미 하야토는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길고 심하게 잘빠진 의문의 까만 물체를 꼬옥 끌어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야토는 잠이 덜 깬 멍한 머리로, 손을 들어 이제까지 베개 대용으로도 사용한 모양인 문제의 물체를 폭폭 찔러보았다.
꾸욱꾸욱. 꾸욱꾸욱.
분석. 부드럽진 않다. 오히려 딱딱한 편. 그렇지만 묘한 탄력이 있다. 누르는 손끝을 기세좋게 튕겨낸다.
.....재미있다.
"──언제까지 남 다릴 갖고 장난칠 거냐, 어이?"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적절히 녹아든 - 희미하게나마 웃음기도 실린 듯한 -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누운 채로 고개를 다소 무리하게 비틀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올려다본 하야토의 눈이, 물컵을 간간이 홀짝이는 카가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카가 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잘 자긴 뭘 잘 자. 새벽 3시다, 새벽 3시!"
"근데 전 왜 이러고 있는 거죠?"
"니가 엉겨붙었잖아!"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현재의 그들은 다리 뻗고 앉은 카가의 무릎 사이에 파고든 하야토가 한쪽 다리를 베개 삼아 느긋이 뒹굴고 있는, 쉽게 말하면 남자의 로망 무릎베개요 - 여기서 하야토는 실제로 베는 건 넓적다리며 무릎은 베봤자 아프기만 할 뿐인데 어째서 세상은 이것을 무릎베개라고 지칭하는지에 관해 대략 1초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 각도에 따라선 아아주 문란한 광경(...)으로 안 보이지도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깨를 슬쩍 감싸 안은 팔이 따스했다.
"......이거, 뭔가 했더니 카가 씨 다리였구나아.... 어쩐지 익숙하더라고요...."
"임마, 다 좋은데 턱 끝으로 부비적대진 말앗, 턱 끝으론!!"
하야토는 온 몸의 힘을 쭈욱 빼고 즉석 베개에 매달리듯이 치대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위에서 성대한 불평이 논브레스로 쏟아지지만 정작 비키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입으론 뭔 말을 해도 역시 상냥하다니까─하야토는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꼭꼭 눌러삼키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꼴이 된 연회장 내부를 죽 둘러보았다. 초저녁의 강자들은 모두 꿈길 위. 그 와중에도 헤어캡을 쓰고 담요를 덮고 단정하게 똑바로 누워서 자고 있는 하이넬이 미소를 자아낸다. 하이넬의 위에 엎어져 있는 헐벗은 커다란 엉덩이는... 성조기 무늬도 화려한 트렁크를 맨정신으로 입을 사람은 지인 중에는 딱 하나밖에 없다. 아침이 되면 보나마나 또 한 번 피바람이 불겠지. 소파에 파묻혀 다리를 꼰 채로 우아하게 눈을 붙이고 있는 란돌은 과연 답다고 해야 할까. 그마저도 그림이 된다.
".....근데요 카가 씨."
"아?"
"오사무 형이 식칼을 쥐고 있는데.... 무슨 일 있었나요?"
".....모르는 게 약이래더라."
"뭔가 저 움켜쥔 손에서 무시무시한 집념이 느껴,"
".....그러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실수로 바퀴벌레 절반을 씹어버렸을 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처절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에, 하야토는 더 이상 추궁하기를 포기했다.
"그보다 너 말이다, 너."
"예?"
"서~얼마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는 싸구려 변명은 안 하리라 믿는다~?"
"아... 아하하하하하? 무무무슨 말씀이세요?"
"뭐~어가 불장난이냐! 지가 무슨 몸 버린 처녀라고 울고 불고 생난리를 떨고, 사람을 난데없이 인간말종 만들어도 유분수지! 너 때문에 시선이 얼마나 따가웠는지 알기나 아냐!?"
"아야야얏! 귀! 귀 떨어지겠어요!"
"안 떨어져! 고작 이 정도로 내 섬세한 마음에 패인 골의 백분지 일에나마 미칠 성 싶냐!!"
그렇지만 정작 아빠와 왕자님께 썰기와 다지기를 당할 뻔한 고역은 묻어두는 시점에서 인간이 됐다고 해야 할지 그저 하야토에겐 물러터졌을 뿐이라고 해야 할지.
하긴 나중에 가서 틀림없이 90%쯤은 진심이었던 란돌의 화려한 칼질을 막아준 사람도 결국 하야토긴 했다. 카가 씨 그만 괴롭히라며 울고 불고 하는 데는 왕자님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지, 아쉬운 얼굴로 혀를 치잇 찼을지언정 (너무나도 진심으로 아쉬운 얼굴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일본도를 거둬들여 준 덕분에 그럭저럭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뭐 그 직후에 하야토가 무릎베개를 해 주지 않으면 또 울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바람에 또 여러 가지로 사단이 있었지만 그 부분은 정말로 기억이 홀랑 날아간 모양이겠다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와아~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치만... 그치만 그땐 정말 쇼크였단 말예요~술 좀 들어가서 알딸딸하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그런데 카가 씨가 교코 씨랑 그랬..다고 하니까 그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것 같아서... 솔직히 제정신이 아니었다구요. 사실 무슨 소릴 지껄였는진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변명이 아니라 진짜예요~!!"
정말 화나셨어요? 어쩌지어쩌지어쩌지라고 똑똑히 쓰인 커다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카가를 올려다본다.
확실히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었다. 결코.
하지만.
"─어이 카자미 하야토."
"예?"
"너 임마, 눈이 글썽글썽해선 속눈썹을 애처롭게 떨면서 올려다보면 대강은 그냥 넘어갈 줄로 생각하고 있지 않냐?"
"...................윽."
"....이 꼬맹이가 어디서 쓸데없는 잔머리만 배워와선. 확 범해 버린다."
"치... 얼마든지 좋으실 대로 하세요? ─저, 울어버릴 거니까."
"..............또냐...!"
"후후훗, 옛날부터 카가 씬 제 눈물에 약했었죠~. 써먹을 수 있는 건 뭐든지 유용하게 써먹으라고 가르쳐 주신 건 카가 씨예요?"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치는 건방진 청소년의 머리를 휘어잡아 헤드록을 가했다.
"아야야야야야야야야야! 폭력 반대! 폭력 반대!"
"시끄럿! 이게 나이 좀 먹었다고 이젠 아주 대놓고 개긴다. 연장자는 모시고 공경하라는 유치원의 훌륭한 가르침은 엇다 버렸냐?! 아아!?"
"뭐 어때서 그러세요! 제 쪽은 허구헌날 당하고 사는데, 하나쯤은 반격 수단이 있어서 나쁠 건.... 아야얏! 진짜 아파요!"
"뭔 소리야, 당하고 사는 건 나다 나!"
".....접니다."
"나야."
"저라고요!"
"나라니까!"
"저.예.요!"
"크아~안 귀여워 안 귀여워 안 귀여워! 그나마 옛날엔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하고 순순하더니 뭘 잘못 주워먹고 요렇게 귀염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이 된 거냐!!"
"안 귀여운 게 당연하죠! 지금 제 나이가 몇인데!"
"............"
"............"
서로 캬아캬아대며 치뜨고 정면으로 노려보던 양측의 눈에서 갑자기 독기가 좌르륵 빠진다.
"....관둘까."
"예... 뭔가 굉장히 불모하네요...."
"보나마나 날 밝으면 2차다 뭐다 해서 또 들썩일 게 뻔한데, 잠이나 자 두자."
"푸훗, 그렇겠네요. ....아 참, 불편하시죠? 비킬까요?"
"헤에~니가 언제부터 내 생각을 그렇게 해줬냐아~?"
"앗 너무해 카가 씨! 예, 아무 말 말고 비킬 걸 그랬네요!"
툴툴대며 몸을 일으키려는 하야토의 머리를 낭창한 팔이 내리눌러서 원래의 자리에 도로 처박는다.
"─내 참, 됐으니까 그대로 있으라구."
"............치, 솔직하지 못하긴........."
"뭐라고 했냐?"
"아~뇨, 아무것도! 안녕히 주무.... 아."
"???"
뭔가 재미있는 장난을 생각해낸 듯, 생기 감도는 눈을 반짝이며 기세좋게 상반신을 일으킨 하야토는 퀘스천 마크를 동동 떠올리고 있는 카가의 가슴께에 머리를 톡 기댔다. 돌발적인 행동에 어안이벙벙해져 한순간 말을 잃은 청년에게 고개를 돌려 생글 웃어보인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는 도로 머리를 푹 파묻어 나 자겠소의 태세로 들어가 버린다. 심장 소리, 기분 좋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어, 어이, 야 하야토....!"
─너 임마, 이 자세가 얼마나 고역인지 알기나 하냐?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악담을 도로 꿀꺽 삼켰다.
이 녀석을 알게 된지 올해로 5년, 딱히 긴 세월은 아니지만 말기 천연에게 뭐가 먹히고 뭐는 안 먹히는지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다. 도로 삼킨 악담은 십에 팔구 후자.
그래, 선을 넘어버리고 싶은 생각이야 굴뚝같지만 소중하고 소중해서 결국 손 한 번 못 대고 마는 심리를 네가 어떻게 알겠냐. 어른인 내가 참아야지.
"잘 자라 인석아."
보복인 셈치고 양팔에 힘을 있는 한껏 주어 꽈악 끌어안았다. 우겍, 하는 짤막한 숨넘어가는 비명은 단호히 무시.
평소부터 어린애 체온이라고 줄창 놀림받는 상대의 온기는 정말로 따스해서, 여태껏 어딘가로 내빼 있었던 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선, 넘어도 되는데."
그래서, 팔 밑에서 새어나온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결국 듣지 못했다.
일단은 후기. (그러니까 SS 주제에 뭔 놈의...)
1. 여왕님의 술주정과 카가 씨에 대한 의혹은 SAGA 6편 차회 예고의 네타. 그리고 울고 불고 생난리치는 하야토와 힉겁해서 난리법석을 떠는 카가 씨는 예전에도 포스팅한 킹 오브 닭짓 띠질천국 짝댓질무쌍 염장질의 진수 닭살커플지옥(...) ANIMATE CASSETTE COLLECTION ROUND 1에서 파생된 것.
2. 요즘의 나는 强攻 블리드 카가를 눈 뜨고 볼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OTL 오피셜에서 저렇게 대놓고 (하야토 한정) 헤타레인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애정도는 세 배로 올랐음. 역시 난 인성에 문제 있는 망가진 남자 아니면 불타지 않는 여자인 걸까.... 우와 정말 싫다;)
3. 영혼 레벨로 구속되어 있고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주제에 정작 상대가 정말 진전을 보길 원하는지 확신이 없어 결국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불모한 인간들, 그것이 S의 카가/하야토. 구원이 없어도 정도가 있다 OTL
(HOPE는 정말로 왕자님 뿐인가....;;;)
(아니 근데 이거 좀 발랄하자고 쓴 거였는데!?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