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는 언제나 영감을 제공하므로 뮤즈이심. 아멘.
지벨 님의 VERSUS를 읽고 감명에 부르르 떨다가 그예 나와 버린 KISARA판 아빠와 딸의 한 남자를 둘러싼 배틀 시티 편(....). 하야토와 아스카의 딸내미 마야가 등장하므로 관심 있으신 분은 먼저 지벨 님의 즐겁고 즐거운 SS MAMA와 VERSUS를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감당이 되지 않으시는 분은 이 선에서 잽싸게 달아나 주세요.
그리고 지벨 님, 고강하고 강력한 마야짱을 이딴 식으로 망쳐놔서 죄송합니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발심해서 죄송합니다;;;
SIDE B-35. 불타다(燃える)
큰 맘 먹고 앵스트로 가려던 중 대략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기세로 발심해서 휘떡 꺾었기 때문에 어정쩡한 개그와 어정쩡한 앵스트가 만나 이도 저도 아닌 물건이 되어 버렸다;;; 뭐, 늘 있는 일 아니냐고? 슬픈 말은 하지 말아요;;;
약간 부연하자면 카가 씨가 내빼는 바람에 하야토는 이미 한 번 거의 망가졌다. 한 번 산산조각나면 조각을 이어붙여도 금은 남듯이, 책임지고 수복했지만 인간적으로 뭔가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려서, 여러 가지로 문제투성이지만 뭐니뭐니해도 천연보케와 이지메 근성을 절반씩 대충 침 발라 쩔꺼떡 붙여놓은 듯한 저 상태가 제일 악랄;하다. 현재 그 덤태기를 죽어라 쓰고 있는 것은 귀엽고 귀여운 딸내미 마야짱. 저래봬도 전부 애정 표현 맞음(....). 딸은 하도 천연이지메에 진절머리나게 당하고 살아서 아빠한테 빽빽거리며 대들고 욕지거리가 입에 붙었지만 내심 인정받고 싶고 좀 다른 아빠들처럼 평범하게 굴어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함. 물론 애정 표현이 훠얼씬 정상적인 K모 씨를 어린 시절부터 열렬하게 좋아하고 동경했으므로 아빠에게 라이벌 의식도 만만찮다고 보면 대략 OK (웃음)
다음 번엔 마야짱 앵스트 버전 편이다! 반드시!! (불끈)
덤. 좀 깔짝대며 놀다보니 대체 뭔 스텝을 어서 잘못 밟았는지 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 포기하고 있는 살인적인 동안과 전지구적 재해급 천연 보케와 심각하게 왜곡된 딸사랑의 아빠 카자미 하야토 씨 - 정신적으로 문제가 매우; 많음 - 와 올해 열 여섯의 생생하고 파릇파릇한 천재 미소녀이자 아빠에게 라이벌 의식 버닝 파이어의 딸 카자미 마야 양 - 아빠는 피부를 해치는 스트레스의 최대 원인 - 과 문제아 2인조 카자미 부녀 틈새에 끼여 골은 지끈지끈 쑤시지만 그래도 미중년 가도는 착실히 밟고 있는 왠지 엄마 포지션의 카가 죠타로 씨 - 아빠 쪽과는 대략 20년 그렇고 저렇고 요런 사이, 딸의 열렬 공세는 식은땀 삐질대며 받아넘기는 중 - 의 괴상하고 수상하고 기이한 삼각관계 부모 자식 대하스토리가 살짜꿍 땡기고 있음.
(아스카는 어쨌냐 아스카는)
(답 : 제정신으로 감당 불가한 이 멍청한 삼각관계를 사각관계로 불리는 기력의 소모를 겪고 싶지 않아 진작에 빠졌습니다)
(어머니와 여성은 현명함)
───이 여자야!! 어디 가니!!!! ;;;;
카자미 마야.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올해 열 여섯. 두뇌도 미모도 몸매도 재력도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천재 미소녀 머신 디자이너.
혜택받은 자의 자신감이 온몸에서 철철 넘쳐흐르는 소녀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부친을 굽어보며 당당히 선언했다.
"아빠, 나 카가 씨랑 결혼할 거예요."
클래식한 신문에 고개를 박고 있던 그 아버지, 즉 카자미 하야토의 대답인즉슨 매우 간결했다.
"응, 잘해 봐."
한쪽의 아내이자 한쪽의 엄마인 닥터 스고 아스카는 이어질 참상을 예견하고 조용히 비싼 마이센 티컵 세트를 뒤로 빼돌렸다.
"캬악──────!!!!"
축척된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은 항시 옳은 법이라, 오늘도 어김없이 마야의 불끈 쥔 양주먹은 마호가니 탁자 중앙에 힘차게 내리꽂혔다. 콰르르르르르르. 벌벌 떨리는 폼을 보건대 이 탁자가 처참히 쪼개진 선진들의 뒤를 따르는 것도 아마 시간 문제이리라.
"이 어벙한 인간! 반응이 그게 다냐! 딸 가진 아버지로서 그 사람 네 아빠보다 연상이라던가 넌 너무 어리다던가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서두르지 말라던가, 최소한 그 사람 내 애인이니 감히 넘보지 말려무나 딸아라던가 etc etc etc! 무언가 더 할 말이 산더미잖아! 그런데 뭣이 어째, 잘해 봐!? 가진 자! 가진 자의 여유인 거냐! 빌어먹을! 지옥에나 가 버려─!!"
"......마야."
긴 머리칼을 휘어잡고 하늘을 우러러 온갖 오버액션을 주구장창 때리던 소녀는 한 톤 가라앉은 목소리에 꼭두새벽부터 약간 지나쳤나 싶어 조금은 움찔했다. 아무리 십육 평생 갖은 욕설과 개김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한들 부녀의 역학관계란 그리 쉽게는 역전되지 않는 법이다.
그제야 신문에서 머리를 든 하야토는 마야가 애꿎은 식탁을 마구 구타하는 동안 꿋꿋하게 잘도 사수한 커피잔을 가만히 내려놓고 마야와 나이 차이가 좀 있는 남매 사이라 우겨도 너끈히 통할, 질풍노도의 시기를 화끈히 겪고 있는 딸을 뒀다는 게 가히 범죄적인 동안의 미간에 설핏 주름을 잡으며 얼결에 방어 태세로 돌입한 딸에게 입을 열었다. 아주아주 곤란하다는 듯이.
"너 오늘 아침엔 유난히 시끄럽다."
바닥에 무너진 마야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어째서! 당신 같은 게 내 아빠인 거야!? 십수 년째 CF 챔피언 자릴 휘어잡고 있는 레이스계의 제왕인 거야! 뭔가 엄청 잘못됐어!! 세상은 눈이 삐었어! 이 세계는 썩었어! 그래, 혁명이 필요해! 세계를 혁명할 힘을─!"
"사람 일이 다 그렇지 뭐..."
"여기 보고 말햇─!!"
예전에도 재난급이었으나 이젠 삼십 수년을 완벽하게 갈고 닦여 우화등선의 경지로 입신한 SS 클래스 천연보케의 페이스에 또 말려들어 삼천포로 줄줄이 빠지고 있음을 천재의 머리로 제때 캐치한 마야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 치사한 말싸움으로 있는 기력 쪽쪽 뽑아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적어도 오늘만은. 나 카자미 마야는 지금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으므로.
".......훗."
"─마야?"
"후... 후후후후... 후후훗.... 항상 아빠 마음대로 될 줄 여기지 말아요? 오늘의 나는 평소의 내가 아니거든."
"....별로 달라진 덴 없어 보이는데..."
"닥쳐. 당신은 그냥 닥쳐!"
"아, 미안. 중간에 끊어서."
"흐, 흐음─하여간! 대체 카가 씨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빠처럼 대책없는 인간의 뭐가 좋은지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 취미 이해 못하겠지만, 운이 좋아서 용케 한 이십 년 그 사람 독점했다고 우쭐해하지 말아요 내가 그 취향 싹 바꿔놔준다! 근본이 스트레이트 노멀인 그 사람이 나같이 싱싱한 영계한테 혹하지 않을 리가 없어! 어차피 남자는 하반신의 생물인걸, 몸으로 밀어붙여서 한 번 기정 사실만 만들어 버리면 멀쩡한 처자를, 더구나 날 먹고 튈 만큼 뻔뻔하진 못한 사람이니까 만사가 OK! 탱탱한 젊음은 언제나 최대의 적수인 법이라고요. 이대로 방심하고 있다가 딸에게 애인 뺏기고 결혼식장에서 흐르는 세월의 무정함이나 탄식하시지! 오─호호호호호호호!!!"
딸내미의 드높고도 의기양양한 홍소(洪笑)가 가라앉기를 차분히 기다린 후 하야토는 소박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잘해보라고 했잖아?"
"가진 자의 여유 AGAIN이냐! 젠장, 죽어버려!!"
아까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악악대는 딸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긴다.
"그러고 보니까 마야."
"뭐!"
"아까부터 무지 신경 쓰였는데."
"뭘!"
"가진 자의 여유라니 뭐가?"
".........당신 지금 약올리자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뭐냐고."
"제기랄! 세상이 다 아는 끈적질척웃흥에헷♡한 애인 사이잖아!!!"
"누가 누구랑?"
"아빠랑 카가 씨가!!!!"
"........하아.....?"
".............아빠, 뭐예요 그 얼굴은."
딸이야 뭐라건 말건 심각하고 심각하니 심각해서 한층 심각한 얼굴로 열심히 고민의 늪을 홀로 진지하게 유영하던 카자미 하야토 씨는 아내가 필사적으로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 기를 쓰며 남편을 외면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아스카에게 화살을 돌렸다.
"저 말야 아스카, 나랑 카가 씨 그런 사이였어?"
"나한테 묻지 마!"
훠이훠이 저리 가라 저리 가 사인까지 첨부하며 완강하게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
"여봐요 아빠, 전세계에 아주 우린 특별한 사입니다요~라고 선전 때리고 다닌 주제에 이제 와서 뭔 소리야 당신."
"아 미안, 그치만 한 번도 그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세간에선 나랑 카가 씨를 그렇게 보는 건가. 응응."
"그럼 뭐라고 볼 줄 알았는데!"
"─어, 잠깐 기다려 봐."
"응?"
"나랑 애인 사이인 걸로 되어 있는데 마야랑 결혼하면......"
100퍼센트 퓨어를 자랑하는 벌레 한 마리도 상처 못 입힐 순진무쌍한 얼굴로 아빠란 인간이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거 혹시, 카가 씨 부녀덮밥?"
"──죽엇 인간아! 그냥 접시물에 코 박고 죽어버려어어어어엇!!!!"
접시물에 박아봤자 너무 얕아서 죽기도 어렵지 않을까나 어쩌고 중얼거리는 구제불능의 천연에게 마야는 둘쨋손가락을 기세좋게 처억 내뻗었다.
"아빠가 뭐라건 난 꼭, 꼭~꼭 카가 씨랑 결혼할 거야! 말리지 마!!"
아빠가 뭘 알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사람이야말로 내 운명의 상대라고 확신해 왔었으니까.
당신이, 대체 뭘 알겠어.
언제나 내 속 긁기에만 정신이 팔린 당신이 내 마음을 알 리가 있어!
튼튼한 떡갈나무 문을 요란한 몸짓으로 콰당 열어젖히고 나가려는 소녀를 아빠의 왠지 정도 이상으로 다정한 목소리가 불러세워서, 악다구니나 한 번 더해주려 바람을 일으키며 홱 돌아섰다 마야는 후회했다. 안 보는 편이 정신건강에 백만 배 이로웠다.
정말로 분하고 분하고 또 분하여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웬만한 사람의 뼈를 진탕 녹이고 보는 이의 뇌리에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돌봐주겠니! T.T' 라는 마음을 절로 불러일으킨다는 (질기지만 혹자는 영업용 미소라고도 하는) 그 전설적인 선량하고 선량한 뽀샤시 필터의 미소를 한정없이 흩뿌리며, 그녀의 아버지는 감히 서른 몇이라 인정하기조차 두려운 애교 있는 폼새로 말했다.
"그 사람, 35-24-36의 글래머러스한 흑발 미녀가 취향이라더라."
뒤이어 고개를 15도 가량 살포시 갸웃하며 너어어어어무나 귀엽고 러블리;하게 덧붙인다.
"많~이 애써야겠구나, 26-23-27의 갈색 머리 딸아."
직후 길고 긴 복도 끝까지 꼬리를 끈 6개 국어의 다채로운 매도폭언욕설의 퍼레이드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 갖은 욕지거리의 메아리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탁자 위에 퍽 엎어져 파르르 떨리는 어깨로 참고 참았던 웃음을 와르르 터뜨리며 내 딸이지만 재미있어 죽겠다는 둥 이 맛에 딸 키운다는 둥 나 죽는다고 끅끅대는 못돼처먹은 아빠와 한숨을 쉬며 그러려니 하는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카자미 마야 양의 건전한 정신을 위해 역시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이 옳으리라.
따~라라라라라라라~따~라라~따라라라라라~라~라라~.
철컥.
"예, 카자미 하야토입니다. 무슨 용건이시죠 카가 죠타로 씨."
『니 딸 좀 말려봐라.』
"무립니다."
『빨라!』
"사실은 사실이죠. 자력으로 어떻게든 하세요."
『도움 안 되는 놈.』
"설마 제 딸이 싫다느니 그딴 천벌 받을 소린 안 하시겠죠~?"
『딸 바보 같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다며 부비부비대던 분께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요."
『.....안 귀여울 리가 있겠냐. 그 녀석, 딴 건 몰라도 눈은 꼭 그 나이 때의 너 판박이더구만.』
"그거 마야한테는 감추시는 게 나을 걸요. 식음 전폐하고 드러누울지도 몰라요."
『──너 말야, 대체 딸을 어떻게 키웠길래 애가 네 이름만 나올라치면 바르르 떨며 아빠 따위 정말 싫어!!! 를 외치는 거냐?』
"좀 너무 놀렸는지도 모른다고 반성은 하고 있어요."
『성격 진짜 개차반 됐구먼.』
"이게 본성일 걸요?"
『자랑이다.』
"별 말씀을. 누구누구 씨 덕분이지요."
『안 닥칠래.』
"뭐, 분발해서 열심히 도망다녀 주세요. 부녀덮밥을 원치 않으신다면 말이죠."
『이런 정말로 도움 안 되는 놈.』
"기본적으로 신뢰하거든요."
『고마워서 아주 눈물이 솟는구먼.』
"그야 전 카가 씨가 사위 되어도 딱히 손해볼 건 없지만요. 아하하하하하하!!!"
『죽고 싶냐!! 이 자식, 진짜로 마야짱 확 나꿔채 가 버릴까 보다!』
"하세요 하세요. 나 안 말려."
『말려!! 딸이잖아!』
"마야는 좋아서 입이 찢어질 텐데 왜요. 딸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도 아버지가 할 일입니다. 슬프긴 하지만 잘 살아주세요. 훌쩍훌쩍."
『.....크윽.』
"참 카가 씨, 그거 아세요?"
『아?』
"마야가 그러는데, 세간 일반에서 카가 씨랑 전 엄청 뜨끈뜨끈한 애인 사이로 보인대나 봐요. 아하하하하."
『......하아?』
"재미있지 않나요? ....우리 사인, 한 번도 그렇게 상냥했던 적이 없는데."
오히려 한 번은 처참하게 박살났었던 관계였다.
파편을 그러모아 수복하는 데는 끔찍하도록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렇다고 녀석이 서서히 말라붙어 가는 꼴은 차마 두고볼 수 없어서. 수복한다 해도 이미 새겨진 상흔은 결코 지워지지 않지만─그래도 차라리 망가지는 쪽을 택했다. 3년 떨어져 보고 진절머리가 나도록 깨달은 것은, 죽건 살건 이 손은 놓을 수 없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너, 엉뚱한 생각하지 마라.』
힘주어 못을 박자, 화면 속의, 열 여섯 살 싱싱한 소녀의 안구 용적과 맞먹는 수준의 커다란 눈이 둥그래졌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월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경이롭다 못해 한 번 해부 좀 해 봤으면 속이 시원할 예전 그대로의 얼굴이 풋, 웃는다.
".....안 해요."
『웨딩드레스 입은 딸도 보고, 손 잡고 버진 로드 데려가서 사위 될 놈한테 넘겨줘야 할 거 아냐.』
"카가 씨한테 넘겨주는 건?"
『당연히 안 되지 임마. 너 하나만도 버거워 죽겠다. 네놈 딸까진 책임 못 져. 무리 무리.』
".....하여간... 도망치려면 마음 독하게 먹고 끝까지 내뺐어야죠. 카가 씨는 이상한 데서 마음 약해서 못 쓴다니까...."
『시끄럽다. 이왕이면 새삼 반했다고 해.』
"아 예에 예. ─그럼 더더욱 최선을 다해 회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제 딸이라서 말이죠. 고집 세고 끈질기기론 저랑 거의 맞먹거든요."
『...좀 말리라니까.』
"무리라니까요."
혜택받은 자의 자신감이 온몸에서 철철 넘쳐흐르는 소녀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부친을 굽어보며 당당히 선언했다.
"아빠, 나 카가 씨랑 결혼할 거예요."
클래식한 신문에 고개를 박고 있던 그 아버지, 즉 카자미 하야토의 대답인즉슨 매우 간결했다.
"응, 잘해 봐."
한쪽의 아내이자 한쪽의 엄마인 닥터 스고 아스카는 이어질 참상을 예견하고 조용히 비싼 마이센 티컵 세트를 뒤로 빼돌렸다.
"캬악──────!!!!"
축척된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은 항시 옳은 법이라, 오늘도 어김없이 마야의 불끈 쥔 양주먹은 마호가니 탁자 중앙에 힘차게 내리꽂혔다. 콰르르르르르르. 벌벌 떨리는 폼을 보건대 이 탁자가 처참히 쪼개진 선진들의 뒤를 따르는 것도 아마 시간 문제이리라.
"이 어벙한 인간! 반응이 그게 다냐! 딸 가진 아버지로서 그 사람 네 아빠보다 연상이라던가 넌 너무 어리다던가 앞으로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서두르지 말라던가, 최소한 그 사람 내 애인이니 감히 넘보지 말려무나 딸아라던가 etc etc etc! 무언가 더 할 말이 산더미잖아! 그런데 뭣이 어째, 잘해 봐!? 가진 자! 가진 자의 여유인 거냐! 빌어먹을! 지옥에나 가 버려─!!"
"......마야."
긴 머리칼을 휘어잡고 하늘을 우러러 온갖 오버액션을 주구장창 때리던 소녀는 한 톤 가라앉은 목소리에 꼭두새벽부터 약간 지나쳤나 싶어 조금은 움찔했다. 아무리 십육 평생 갖은 욕설과 개김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한들 부녀의 역학관계란 그리 쉽게는 역전되지 않는 법이다.
그제야 신문에서 머리를 든 하야토는 마야가 애꿎은 식탁을 마구 구타하는 동안 꿋꿋하게 잘도 사수한 커피잔을 가만히 내려놓고 마야와 나이 차이가 좀 있는 남매 사이라 우겨도 너끈히 통할, 질풍노도의 시기를 화끈히 겪고 있는 딸을 뒀다는 게 가히 범죄적인 동안의 미간에 설핏 주름을 잡으며 얼결에 방어 태세로 돌입한 딸에게 입을 열었다. 아주아주 곤란하다는 듯이.
"너 오늘 아침엔 유난히 시끄럽다."
바닥에 무너진 마야가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좀 많이 걸렸다.
"어째서! 당신 같은 게 내 아빠인 거야!? 십수 년째 CF 챔피언 자릴 휘어잡고 있는 레이스계의 제왕인 거야! 뭔가 엄청 잘못됐어!! 세상은 눈이 삐었어! 이 세계는 썩었어! 그래, 혁명이 필요해! 세계를 혁명할 힘을─!"
"사람 일이 다 그렇지 뭐..."
"여기 보고 말햇─!!"
예전에도 재난급이었으나 이젠 삼십 수년을 완벽하게 갈고 닦여 우화등선의 경지로 입신한 SS 클래스 천연보케의 페이스에 또 말려들어 삼천포로 줄줄이 빠지고 있음을 천재의 머리로 제때 캐치한 마야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래, 치사한 말싸움으로 있는 기력 쪽쪽 뽑아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적어도 오늘만은. 나 카자미 마야는 지금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으므로.
".......훗."
"─마야?"
"후... 후후후후... 후후훗.... 항상 아빠 마음대로 될 줄 여기지 말아요? 오늘의 나는 평소의 내가 아니거든."
"....별로 달라진 덴 없어 보이는데..."
"닥쳐. 당신은 그냥 닥쳐!"
"아, 미안. 중간에 끊어서."
"흐, 흐음─하여간! 대체 카가 씨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빠처럼 대책없는 인간의 뭐가 좋은지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 취미 이해 못하겠지만, 운이 좋아서 용케 한 이십 년 그 사람 독점했다고 우쭐해하지 말아요 내가 그 취향 싹 바꿔놔준다! 근본이 스트레이트 노멀인 그 사람이 나같이 싱싱한 영계한테 혹하지 않을 리가 없어! 어차피 남자는 하반신의 생물인걸, 몸으로 밀어붙여서 한 번 기정 사실만 만들어 버리면 멀쩡한 처자를, 더구나 날 먹고 튈 만큼 뻔뻔하진 못한 사람이니까 만사가 OK! 탱탱한 젊음은 언제나 최대의 적수인 법이라고요. 이대로 방심하고 있다가 딸에게 애인 뺏기고 결혼식장에서 흐르는 세월의 무정함이나 탄식하시지! 오─호호호호호호호!!!"
딸내미의 드높고도 의기양양한 홍소(洪笑)가 가라앉기를 차분히 기다린 후 하야토는 소박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잘해보라고 했잖아?"
"가진 자의 여유 AGAIN이냐! 젠장, 죽어버려!!"
아까운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악악대는 딸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긴다.
"그러고 보니까 마야."
"뭐!"
"아까부터 무지 신경 쓰였는데."
"뭘!"
"가진 자의 여유라니 뭐가?"
".........당신 지금 약올리자는 거야,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뭐냐고."
"제기랄! 세상이 다 아는 끈적질척웃흥에헷♡한 애인 사이잖아!!!"
"누가 누구랑?"
"아빠랑 카가 씨가!!!!"
"........하아.....?"
".............아빠, 뭐예요 그 얼굴은."
딸이야 뭐라건 말건 심각하고 심각하니 심각해서 한층 심각한 얼굴로 열심히 고민의 늪을 홀로 진지하게 유영하던 카자미 하야토 씨는 아내가 필사적으로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 기를 쓰며 남편을 외면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아스카에게 화살을 돌렸다.
"저 말야 아스카, 나랑 카가 씨 그런 사이였어?"
"나한테 묻지 마!"
훠이훠이 저리 가라 저리 가 사인까지 첨부하며 완강하게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
"여봐요 아빠, 전세계에 아주 우린 특별한 사입니다요~라고 선전 때리고 다닌 주제에 이제 와서 뭔 소리야 당신."
"아 미안, 그치만 한 번도 그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세간에선 나랑 카가 씨를 그렇게 보는 건가. 응응."
"그럼 뭐라고 볼 줄 알았는데!"
"─어, 잠깐 기다려 봐."
"응?"
"나랑 애인 사이인 걸로 되어 있는데 마야랑 결혼하면......"
100퍼센트 퓨어를 자랑하는 벌레 한 마리도 상처 못 입힐 순진무쌍한 얼굴로 아빠란 인간이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거 혹시, 카가 씨 부녀덮밥?"
"──죽엇 인간아! 그냥 접시물에 코 박고 죽어버려어어어어엇!!!!"
접시물에 박아봤자 너무 얕아서 죽기도 어렵지 않을까나 어쩌고 중얼거리는 구제불능의 천연에게 마야는 둘쨋손가락을 기세좋게 처억 내뻗었다.
"아빠가 뭐라건 난 꼭, 꼭~꼭 카가 씨랑 결혼할 거야! 말리지 마!!"
아빠가 뭘 알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사람이야말로 내 운명의 상대라고 확신해 왔었으니까.
당신이, 대체 뭘 알겠어.
언제나 내 속 긁기에만 정신이 팔린 당신이 내 마음을 알 리가 있어!
튼튼한 떡갈나무 문을 요란한 몸짓으로 콰당 열어젖히고 나가려는 소녀를 아빠의 왠지 정도 이상으로 다정한 목소리가 불러세워서, 악다구니나 한 번 더해주려 바람을 일으키며 홱 돌아섰다 마야는 후회했다. 안 보는 편이 정신건강에 백만 배 이로웠다.
정말로 분하고 분하고 또 분하여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웬만한 사람의 뼈를 진탕 녹이고 보는 이의 뇌리에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널 돌봐주겠니! T.T' 라는 마음을 절로 불러일으킨다는 (질기지만 혹자는 영업용 미소라고도 하는) 그 전설적인 선량하고 선량한 뽀샤시 필터의 미소를 한정없이 흩뿌리며, 그녀의 아버지는 감히 서른 몇이라 인정하기조차 두려운 애교 있는 폼새로 말했다.
"그 사람, 35-24-36의 글래머러스한 흑발 미녀가 취향이라더라."
뒤이어 고개를 15도 가량 살포시 갸웃하며 너어어어어무나 귀엽고 러블리;하게 덧붙인다.
"많~이 애써야겠구나, 26-23-27의 갈색 머리 딸아."
직후 길고 긴 복도 끝까지 꼬리를 끈 6개 국어의 다채로운 매도폭언욕설의 퍼레이드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 갖은 욕지거리의 메아리와 함께 맹렬한 기세로 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탁자 위에 퍽 엎어져 파르르 떨리는 어깨로 참고 참았던 웃음을 와르르 터뜨리며 내 딸이지만 재미있어 죽겠다는 둥 이 맛에 딸 키운다는 둥 나 죽는다고 끅끅대는 못돼처먹은 아빠와 한숨을 쉬며 그러려니 하는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은 카자미 마야 양의 건전한 정신을 위해 역시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이 옳으리라.
따~라라라라라라라~따~라라~따라라라라라~라~라라~.
철컥.
"예, 카자미 하야토입니다. 무슨 용건이시죠 카가 죠타로 씨."
『니 딸 좀 말려봐라.』
"무립니다."
『빨라!』
"사실은 사실이죠. 자력으로 어떻게든 하세요."
『도움 안 되는 놈.』
"설마 제 딸이 싫다느니 그딴 천벌 받을 소린 안 하시겠죠~?"
『딸 바보 같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겠다며 부비부비대던 분께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요."
『.....안 귀여울 리가 있겠냐. 그 녀석, 딴 건 몰라도 눈은 꼭 그 나이 때의 너 판박이더구만.』
"그거 마야한테는 감추시는 게 나을 걸요. 식음 전폐하고 드러누울지도 몰라요."
『──너 말야, 대체 딸을 어떻게 키웠길래 애가 네 이름만 나올라치면 바르르 떨며 아빠 따위 정말 싫어!!! 를 외치는 거냐?』
"좀 너무 놀렸는지도 모른다고 반성은 하고 있어요."
『성격 진짜 개차반 됐구먼.』
"이게 본성일 걸요?"
『자랑이다.』
"별 말씀을. 누구누구 씨 덕분이지요."
『안 닥칠래.』
"뭐, 분발해서 열심히 도망다녀 주세요. 부녀덮밥을 원치 않으신다면 말이죠."
『이런 정말로 도움 안 되는 놈.』
"기본적으로 신뢰하거든요."
『고마워서 아주 눈물이 솟는구먼.』
"그야 전 카가 씨가 사위 되어도 딱히 손해볼 건 없지만요. 아하하하하하하!!!"
『죽고 싶냐!! 이 자식, 진짜로 마야짱 확 나꿔채 가 버릴까 보다!』
"하세요 하세요. 나 안 말려."
『말려!! 딸이잖아!』
"마야는 좋아서 입이 찢어질 텐데 왜요. 딸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도 아버지가 할 일입니다. 슬프긴 하지만 잘 살아주세요. 훌쩍훌쩍."
『.....크윽.』
"참 카가 씨, 그거 아세요?"
『아?』
"마야가 그러는데, 세간 일반에서 카가 씨랑 전 엄청 뜨끈뜨끈한 애인 사이로 보인대나 봐요. 아하하하하."
『......하아?』
"재미있지 않나요? ....우리 사인, 한 번도 그렇게 상냥했던 적이 없는데."
오히려 한 번은 처참하게 박살났었던 관계였다.
파편을 그러모아 수복하는 데는 끔찍하도록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렇다고 녀석이 서서히 말라붙어 가는 꼴은 차마 두고볼 수 없어서. 수복한다 해도 이미 새겨진 상흔은 결코 지워지지 않지만─그래도 차라리 망가지는 쪽을 택했다. 3년 떨어져 보고 진절머리가 나도록 깨달은 것은, 죽건 살건 이 손은 놓을 수 없다는 너무나 간단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너, 엉뚱한 생각하지 마라.』
힘주어 못을 박자, 화면 속의, 열 여섯 살 싱싱한 소녀의 안구 용적과 맞먹는 수준의 커다란 눈이 둥그래졌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월의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경이롭다 못해 한 번 해부 좀 해 봤으면 속이 시원할 예전 그대로의 얼굴이 풋, 웃는다.
".....안 해요."
『웨딩드레스 입은 딸도 보고, 손 잡고 버진 로드 데려가서 사위 될 놈한테 넘겨줘야 할 거 아냐.』
"카가 씨한테 넘겨주는 건?"
『당연히 안 되지 임마. 너 하나만도 버거워 죽겠다. 네놈 딸까진 책임 못 져. 무리 무리.』
".....하여간... 도망치려면 마음 독하게 먹고 끝까지 내뺐어야죠. 카가 씨는 이상한 데서 마음 약해서 못 쓴다니까...."
『시끄럽다. 이왕이면 새삼 반했다고 해.』
"아 예에 예. ─그럼 더더욱 최선을 다해 회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제 딸이라서 말이죠. 고집 세고 끈질기기론 저랑 거의 맞먹거든요."
『...좀 말리라니까.』
"무리라니까요."
큰 맘 먹고 앵스트로 가려던 중 대략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기세로 발심해서 휘떡 꺾었기 때문에 어정쩡한 개그와 어정쩡한 앵스트가 만나 이도 저도 아닌 물건이 되어 버렸다;;; 뭐, 늘 있는 일 아니냐고? 슬픈 말은 하지 말아요;;;
약간 부연하자면 카가 씨가 내빼는 바람에 하야토는 이미 한 번 거의 망가졌다. 한 번 산산조각나면 조각을 이어붙여도 금은 남듯이, 책임지고 수복했지만 인간적으로 뭔가 돌이킬 수 없이 엉망이 되어버려서, 여러 가지로 문제투성이지만 뭐니뭐니해도 천연보케와 이지메 근성을 절반씩 대충 침 발라 쩔꺼떡 붙여놓은 듯한 저 상태가 제일 악랄;하다. 현재 그 덤태기를 죽어라 쓰고 있는 것은 귀엽고 귀여운 딸내미 마야짱. 저래봬도 전부 애정 표현 맞음(....). 딸은 하도 천연이지메에 진절머리나게 당하고 살아서 아빠한테 빽빽거리며 대들고 욕지거리가 입에 붙었지만 내심 인정받고 싶고 좀 다른 아빠들처럼 평범하게 굴어주면 좋겠다고도 생각함. 물론 애정 표현이 훠얼씬 정상적인 K모 씨를 어린 시절부터 열렬하게 좋아하고 동경했으므로 아빠에게 라이벌 의식도 만만찮다고 보면 대략 OK (웃음)
다음 번엔 마야짱 앵스트 버전 편이다! 반드시!! (불끈)
덤. 좀 깔짝대며 놀다보니 대체 뭔 스텝을 어서 잘못 밟았는지 여러 가지 의미로 인간 포기하고 있는 살인적인 동안과 전지구적 재해급 천연 보케와 심각하게 왜곡된 딸사랑의 아빠 카자미 하야토 씨 - 정신적으로 문제가 매우; 많음 - 와 올해 열 여섯의 생생하고 파릇파릇한 천재 미소녀이자 아빠에게 라이벌 의식 버닝 파이어의 딸 카자미 마야 양 - 아빠는 피부를 해치는 스트레스의 최대 원인 - 과 문제아 2인조 카자미 부녀 틈새에 끼여 골은 지끈지끈 쑤시지만 그래도 미중년 가도는 착실히 밟고 있는 왠지 엄마 포지션의 카가 죠타로 씨 - 아빠 쪽과는 대략 20년 그렇고 저렇고 요런 사이, 딸의 열렬 공세는 식은땀 삐질대며 받아넘기는 중 - 의 괴상하고 수상하고 기이한 삼각관계 부모 자식 대하스토리가 살짜꿍 땡기고 있음.
(아스카는 어쨌냐 아스카는)
(답 : 제정신으로 감당 불가한 이 멍청한 삼각관계를 사각관계로 불리는 기력의 소모를 겪고 싶지 않아 진작에 빠졌습니다)
(어머니와 여성은 현명함)
───이 여자야!! 어디 가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