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와 재키.

보거나 혹은 죽거나 | 2006/03/26 20:36

뮤즈 지벨 님과 기가 막히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게 역효과였던지 '엠에센에서 망상을 불태운 뒤 만족하여 연성물을 생략'(리린 님 말씀)하는 제 16단계로 일거에 돌입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허걱 야 정신차려라 S, 50*2제는 완성시키고 하얗게 불타야 할 게 아니냐!!!
(실은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생각 못하는 어리고 가여운 회색 뇌세포가 넘쳐나는 네타를 감당 못하고 있음;)

하여간 어젯밤에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재클린 뒤 프레의 전기 영화 <힐러리와 재키Hilary and Jackie>를 보고야 말았음. 상당히 불순한 동기가 저변에 깔려 있긴 하지만 그건 대충 넘어가고, 실은 맛뵈기로 조금만 보고 자러 갈 생각이었는데 으하하하 아니나다를까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OTL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새벽 4시까지 붙어 앉아 끝까지 다 보고 부르륵 죽어버렸음.
한창 나이인 스물 여덟에 다중경화증이란 희귀병에 걸려 14년씩이나 지긋지긋하게 투병하다 42살에 요절한 세기의 천재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에 대해선 내가 굳이 책에서 긁어모은 짧은 지식 주절주절 떠들어대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알 테니 역시 패스하자. 힐러리와 재키가 얼마나 좋은 영화인지는 듀나 님이 천만 배쯤 더욱 잘 해설하고 있고.

어쨌든 이 영화는 거의 웬만한 공포 영화는 저리 가랄 수준이었다. 언니가 좋고 음악이 좋고 첼로가 좋아서 열정을 다 쏟았을 뿐인데, 하필 그녀가 세기의 천재였던 까닭에 그 넘쳐흐르는 재능이 어느 틈엔가 재키 자신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물 설고 낯설고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을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전전하면서 의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첼로 하나뿐이다. 첼로는 재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낼 수단이며 공적 사적 생활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첼로가 없으면 정.말.로.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고 그만큼 첼로가 재키의 정신에 거는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다. 다비도프 첼로와의 관계가 거의 사도매저키스틱하다더니 그녀는 첼로를 학대하고 첼로는 재키를 좀먹고 있다. 이쯤 되고 보면 음악에서 느끼는 기쁨 따위는 사치스러운 소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반부쯤의 재키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나는 첼로가 싫어요. 음악도 싫어요." 물론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첼로를 통해 바렌보임과 관계를 맺으면서 좀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가 싶더니 바로 그 순간에 병이 찾아든다. 차게 식은 손으로 다중경화증은 살며시 자신의 존재를 알리더니 곧 컵을 깨뜨리고 헛것이 보이고 활을 놓치고 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게 된다. 음악이 좋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첼로 없이는 살 수 없고 진짜로 사활 문제가 걸린 여자에게서 삶의 중추를 송두리째 빼앗아간 것이다. 미친듯이 머리카락을 나풀대며 연주를 계속하고 계속하고 계속하던 재키가 놓쳐버린 활이 바닥에 쿵- 떨어지는 장면은 진짜로 너무나 무서웠음.
하지만 그 좌절감을 표현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이 일반인은 감히 상상도 못할 민폐 행진인 건 천재의 숙명이려니. 솔직히 보다 보면 어쩌다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느냔 소리가 먼저 나오지만. 그래서 '서로 뜯어먹는 관계'인가.


영화를 본 뒤의 후유증 : 재클린 뒤 프레의 CD가 진심으로 갖고 싶어졌다.

원래 나는 사람 목소리를 선호하는 축이어서 연주곡은 별반 땡기지 않고 실은 프린세스 츄츄가 클래식 돌풍을 일으킬 때도 쪼금 시큰둥-했는데 왓슨이 재현하는 뒤 프레의 연주를 지켜보고 있자니 한 번 제대로 듣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 되었음. 실은 벌써 악마의 소굴 아마존에 주문 때려 버렸다 으하하하하하하하 orz



덤 하나. 에밀리 왓슨과 미란다 오토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일까?

덤 둘. 감각마비니 근육이완이니 소녀심을 자극하는(...) 네타로 열심히 떠들어댄 날 이 영화를 본 건 정신적으로 타격이 좀 컸다. 하여간 진짜 가이드로서는 왓다인 영화였음. 잘 써먹을지도 모른다.

덤 셋. .....근데 이거 조금은 자매백합물...일지도...? (어이)
아니, 농담이 아니라 재키의 세계의 또 하나의 구심점은 언니였다. 힐러리가 플루트를 그만두고 키퍼와 결혼한 그 순간부터 재키는 언니를 영영 잃어버렸고 그때부터 조금씩 무너져 갔던 건지도 모른다. 바렌보임과의 사랑도 결국엔 힐러리의 공백을 채워줄 수 없었던 것이리라. 날 이런 식으로 떠날 순 없어,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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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mic71 2006/03/26 20:45
재클린에 대해 알고 나서 가지고 있던 바렌보임 CD를 모조리 부숴버렸다는 과격파 분도 계시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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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ARA 2006/04/09 19:16
재클린 뒤 프레의 말년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래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세상에 아내 무덤에도 한 번 안 가봤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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