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을 얻겠답시고 <흑룡의 관>을 재독하다 웬만큼 전후 사정 아는 터에 그러잖아도 여러모로 상한 속이 두 배로 시커멓게 타들어갔으므로 (부장니이이이임 ㅠㅠ) 다 집어던지고 홧김에 아마노 쯔키코(天野月子)의 화관(花冠)을 듣다 문득 떠오른 이미지를 되는 대로 갈겨썼다. 문재를 기대하시면 매우 슬픕니다.
은혼은 긴히지 페스티벌 동란편이건만 나는 이게 웬 삽질인겨... OTL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은 눈길 닿는 지평선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세잎 클로버로 뒤덮여 있었다.
사막의 민족에게는 낯설기만 한 풍요로운 녹색의 대지를 다소 곤혹스리 둘러보던 중 문득 눈길이 머문 낯익은 뒷모습, 세잎 클로버에 파묻혀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어깨에 살짝 닿는 곱슬진 갈색 머리를 세츠나는 숨을 삼키며 응시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여기가 아니야."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발길을 가로막았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세츠나."
크지는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못을 박았다.
"─아니면,"
하얀 얼굴이 어깨 너머로 세츠나를 돌아보았다.
"그만두고 싶어?"
선명한 비취색 눈동자에는 책망의 빛도 비난하는 기색도 없었다. 단지 기묘하게 무표정할 따름이었다.
세츠나는 짧게 숨을 들이쉬고, 토해내고,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남자는 그제야 잔잔하게 웃었다.
세츠나가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침대에 들어가려 했을 때, 정크푸드로 대강 때우다 들켰을 때, 엑시아에 몇 시간이고 줄창 매달려 있었을 때 말을 듣지 않고 사고를 쳤을 때 다쳤을 때, 시끌시끌한 설교를 한바탕 늘어놓은 다음에는 별 수 없는 녀석이라 툴툴대며 반드시 보여주던, 어딘가 난처한 듯한 미소였다.
툭툭 털고 일어나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10cm 남짓하게 밑인 세츠나의 머리를 그럼에도 익숙하게 다독이는 장갑 너머의 손은 변함없이 따뜻했다.
살아 있을 때처럼.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인터페이스가 희미한 불빛만을 발하는 어두운 콕핏 속에서 눈을 떴다.
주황색 구체의 부산스런 합성음이 기체를 굳이 내리기엔 너무나 짧았던 대기 시간의 종료를 알리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손을 쥐었다 펴고, 컨디션을 간단히 체크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세츠나는 거의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록온."
짧지만은 않았던 지난 세월 심장에 묻어둔 이름을 소리를 내어 뇌까렸다.
친근한 울림으로 언뜻 서늘해진 가슴 한 켠은 애써 외면하지 않았다.
알고 있어.
한순간도 잊지 않았어.
──약속은 지킬 거야.
세츠나는 수천 수만 번도 더 잡았던 조종간을 다시 한 번 힘주어 그러쥐었다.
"세츠나 F. 세이에이, 엑시아 더블오, 출격한다."
엑시아는 녹색 입자를 흩뿌리며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나름 21화 백일몽의 역버전.
사실 '~출격한다' 는 형님 대사라는 거(....).
[SS] 화관(花冠).
Banishing from Heaven | 2008/04/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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