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새로 미친 짓을 시작하려면 그간 벌여놓고 수습 안 하고 나 몰라라 내팽개친 일부터 끝내야겠다는 A형스러운 의무감이 발동하였다. 고로 꼬박 3년간(.....) 내팽개쳐둔 주유전 해설이 드디어 돌아왔습니다. 제다이의 귀환 아닌 주공근의 귀환. 아 뭐 남편님 잃은 청승과부(오타 아님) 주공근이 시커먼 옷 뒤비쓰고 청승맞게 복상한 기간이라 생각해 주십셔.
....돌이켜 보건대 미친 놈한테 팔자 저당잡혀 보답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그래도 지가 좋다고 뒤치닥꺼리만 하다 지 인생 말아쳐먹는 놈이라니 내 취향도 참 거기서 거기요 수맥 따라 지맥 따라 쌍쌍이 끼리끼리 노는구먼요. 어딘가의 주접 떠는 양이지사가 눈앞을 어른거리더라고는 절대로 말 못합니다. 아니 근데 모토네타인 카츠라 코고로부터가 이미....(후략)
제 10장. 친우를 떠나보낸 후(友亡き後)
한 마디로 '내 새끼 책임지고 잘 키워라 앙?' 인 거죠(.......). 우리 새끼조차도 아님(.........).
손책의 뒤를 이어 손권이 손오의 새로운 동량으로 등극합니다. 그러나 손책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을 상실한 손오정권의 동요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반란과 이반이 끊일 줄을 몰랐지요.
그런 와중에 주유는 병력을 이끌고 장례식에 달려와 그대로 오에 머무르며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장사(長史)의 장소와 더불어 모든 업무를 총괄하였다고 주유전은 전합니다.
주유는 일련의 여강(廬江)・예장(豫章)토벌전에서 중호군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중호군은 수도방어군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원정주력부대로서의 의미가 강했죠. 여기서 굳이 <중호군으로서>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다시 말해 이번의 중호군은 본래의 의미를 띤 정식 <본거지방어군>이었던 셈이에요. 주유는 뼛속까지 군속이었던 만큼 내정업무를 총괄했으리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만에 하나 총괄했다손 쳐도 그 경우엔 문관으로서 상응하는 역직을 얻었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기술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즉 손권 취임 시에 내정을 도맡은 사람은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주유는 어떤 입장에서 손권을 지탱했을까요?
이 시기에 강동을 뜨려고 했던 인물들의 명단에는 노숙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주유는 노숙을 설득해 손권을 배알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일 노숙이 처음 계획대로 북으로 가 버렸더라면 손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겠지요.
강표전을 보면, 조조는 202년에 손권의 아들을 인질로 내놓으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손권에게 인질은 어불성설이라 진언하여 저지한 사람도 주유였어요. 강표전의 기술은 전반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지고, 이 일화도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202년이라면 손권의 장남 손등(孫登)은 이미 태어난 후였고, 손보(孫輔)가 반란을 일으키질 않나 우번과 태사자가 조조가 보낸 러브레터를 받질 않나 이래저래 시끄러울 무렵이었으므로, 인질 요구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밖에도, 좀 더 나중의 기술이긴 하지만, 당시의 손권은 일개 장군에 불과해 신하와 주군 사이에 그다지 차이가 없는 지경이었지만, 주유가 솔선하여 정중하게 예를 표했으므로 다른 신하들도 그를 따랐다고 합니다. 군주로서의 절대적 우위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당시의 손권을 위해, 주유가 군신의 선을 명확하게 그어준 셈이 됩니다. 이와 같이 군사 및 내정과는 별개의 시점에서 주유는 손권을 보필했던 것이죠.
(주) 강표전의 기술을 믿는다면, 손권은 중신들에게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던 문제를 모친 오부인과 주유에게만은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는 뜻이므로, 주유만은 여타 신하들과는 일선을 긋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부인의 <주유는 내 자식과 마찬가지>라는 말 역시 손일문과 주일문 간의 혈연관계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는 말 그대로 중호군으로서의 역할, 즉 군부의 통괄이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주유, 정보, 여범 웃대가리 3인조의 역직은, 정보가 단양도위(丹楊都尉), 여범이 도독(都督, 이 경우 도독은 장군의 보좌관을 의미합니다)으로, 중호군인 주유가 최고사령관에 해당했습니다. 군부의 기강을 다스리고 총괄하는 역할은 아마도 주유의 몫이었겠지요. 연의는 손책이 <내정은 장소에게, 외정은 주유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 초기 손권정권의 구도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습니다. 주유와 장소. 이 두 사람이야말로 손권 취임 당시의 손오를 지탱한 버팀목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유는 병력을 이끌고 장례식에 달려와 그대로 오에 머무르며 중호군(中護軍)으로서 장사(長史)의 장소와 더불어 모든 업무를 총괄하였다고 주유전은 전합니다.
주유는 일련의 여강(廬江)・예장(豫章)토벌전에서 중호군으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중호군은 수도방어군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원정주력부대로서의 의미가 강했죠. 여기서 굳이 <중호군으로서>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다시 말해 이번의 중호군은 본래의 의미를 띤 정식 <본거지방어군>이었던 셈이에요. 주유는 뼛속까지 군속이었던 만큼 내정업무를 총괄했으리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만에 하나 총괄했다손 쳐도 그 경우엔 문관으로서 상응하는 역직을 얻었어야 하겠지만 그러한 기술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즉 손권 취임 시에 내정을 도맡은 사람은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주유는 어떤 입장에서 손권을 지탱했을까요?
이 시기에 강동을 뜨려고 했던 인물들의 명단에는 노숙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주유는 노숙을 설득해 손권을 배알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일 노숙이 처음 계획대로 북으로 가 버렸더라면 손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입었겠지요.
강표전을 보면, 조조는 202년에 손권의 아들을 인질로 내놓으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손권에게 인질은 어불성설이라 진언하여 저지한 사람도 주유였어요. 강표전의 기술은 전반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지고, 이 일화도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202년이라면 손권의 장남 손등(孫登)은 이미 태어난 후였고, 손보(孫輔)가 반란을 일으키질 않나 우번과 태사자가 조조가 보낸 러브레터를 받질 않나 이래저래 시끄러울 무렵이었으므로, 인질 요구도 있을 법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밖에도, 좀 더 나중의 기술이긴 하지만, 당시의 손권은 일개 장군에 불과해 신하와 주군 사이에 그다지 차이가 없는 지경이었지만, 주유가 솔선하여 정중하게 예를 표했으므로 다른 신하들도 그를 따랐다고 합니다. 군주로서의 절대적 우위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당시의 손권을 위해, 주유가 군신의 선을 명확하게 그어준 셈이 됩니다. 이와 같이 군사 및 내정과는 별개의 시점에서 주유는 손권을 보필했던 것이죠.
(주) 강표전의 기술을 믿는다면, 손권은 중신들에게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던 문제를 모친 오부인과 주유에게만은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는 뜻이므로, 주유만은 여타 신하들과는 일선을 긋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부인의 <주유는 내 자식과 마찬가지>라는 말 역시 손일문과 주일문 간의 혈연관계를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는 말 그대로 중호군으로서의 역할, 즉 군부의 통괄이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주유, 정보, 여범 웃대가리 3인조의 역직은, 정보가 단양도위(丹楊都尉), 여범이 도독(都督, 이 경우 도독은 장군의 보좌관을 의미합니다)으로, 중호군인 주유가 최고사령관에 해당했습니다. 군부의 기강을 다스리고 총괄하는 역할은 아마도 주유의 몫이었겠지요. 연의는 손책이 <내정은 장소에게, 외정은 주유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 초기 손권정권의 구도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습니다. 주유와 장소. 이 두 사람이야말로 손권 취임 당시의 손오를 지탱한 버팀목이었다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내 새끼 책임지고 잘 키워라 앙?' 인 거죠(.......). 우리 새끼조차도 아님(.........).
제 11장. 공백의 시기(空白の時)
아 그야 서방님이 가셨는데 청승과부(오타 아님)가 무슨 기운이 나서 호호호깔깔깔하겠(퍽!)
주유는 206년에 손유(孫瑜)의 감시역 자격으로 함께 마보요새(麻保屯, 산월의 거점)를 쳤습니다. 마보요새는 이전 태사자전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죠. 장소는 강하(江夏)였습니다. 다시 말해 손권전에 등장하는 206년의 황조(黄祖)토벌작전인 셈이에요. 마보 토벌 후 주유는 궁정(宮亭, 예장군)에 주둔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부터 주유의 주둔지는 파양호(鄱陽湖) 근처가 되었습니다. 황조가 부장 등룡(鄧龍)을 앞세워 시상(柴桑)에 침입하자, 주유는 이들을 괴멸하고 등룡을 산 채로 사로잡아 오로 송환했다고 합니다. 당시 주유의 주된 역할은 황조에게 대응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무렵 손권은 내부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중점을 두어 외정 자체가 극히 적기도 했지만, 분각을 다투다시피 몰아치던 손책 시절을 상기해 보면, 이때의 주유는 마치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가 된 것 같습니다. 외정이 적다고는 해도 이술(李術)의 난을 평정해야 했고, 황조토벌군도 여러 차례 움직였을 터입니다. 헌데 주유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만일 주유가 정채를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손책 사후 수년에 걸친 이때이리라 봅니다. 203년 황조토벌전에 주유가 참가하지 않았을 확률은 낮은데, 이때는 감녕 한 사람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꽤나 한심하기 그지 없는 패전을 맛보았습니다. 아울러 손권이 갓 취임했을 때 터진 반란 진압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정보였겠죠. 당시의 군부 웃대가리 3인조 중에서 <단양・오・회계의 역적을 토벌하였다>는 기술이 남아 있는 이는 정보뿐이고, 주유도 여범도 아무런 언급이 없어요. 중앙에서 군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손 쳐도 주유의 움직임은 매우 둔해보입니다.
(주) 황조토벌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황조는 유표의 강하 방면 사령관으로, 손오가 형주 방면으로 세력을 넓히려면 반드시 때려잡아야 하는 상대였습니다. 때문에 손책의 황조토벌을 시작으로, 손권전에도 몇 번이고 도하하여 황조를 공격했다고 언급됩니다.
● 199년의 손책이 주도한 황조토벌 ○ (사이沙羨에서 황조군 격퇴)
● 203년의 손권이 주도한 황조토벌 ● (감녕이 능조를 베어 패퇴)
● 206년의 황조토벌 △ (민중을 포로로 하여 귀환. 아마도 손유와 주유가 마보요새를 쳤다는 기술이 여기 해당합니다)
● 207년의 황조토벌 ○ (성을 함락했다는 언급 있음)
그러나, 네 번의 황조토벌전 중 어느 전투도 승부와는 상관없이 손오가 강하로 세력을 뻗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적벽대전 당시의 최전선은 변함없이 시상이었죠. 특히 207년의 황조토벌전에서는 성을 함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하를 병합하려는 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아 필자를 의아하게 합니다.
손책의 예장평정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한 군을 병합할 의도가 있을 경우 태수를 쫓아낸 후, 유력한 부장을 두어 치안 회복과 방어에 절치부심할 필요가 있어요. 예장에서는 그러한 조치를 취했지만, 강하는 어찌된 일인지, 강하의 무슨 현에 누가 배속되었고 태수로 누구를 남겼다는 기술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성을 함락시킨 다음 전군이 귀환해 버린 겁니다. 당연히 병합될 리가 없지요.
어쩌면 강하토벌은 완전히 방어적 측면에서의 토벌전이 아니었을까요? 즉 병합이 아니라 예장을 집적거리지 못하게 세력을 꺾어놓는 것이 목적인 토벌전이 아니었나 합니다. 공격적이기 짝이 없는 손책의 황조토벌전에서조차 예장을 병합하려 사전준비를 착착 진행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당시의 손오는 아직 강하까지 손을 뻗을 여력이 없었거나, 토로장군(討虜将軍)에 불과한 직책으로는 정식 자사(刺史)인 유표가 통치하는 형주까지 찔러보기가 뭐했는지도 모릅니다. 전부 억측이지만요.
207년의 황조토벌전에서 주유는 전부대독(前部大督, 선봉부대의 사령관)으로 종군했습니다. 이때 선봉부대에는 여몽, 능통, 동습 등이 참가했지요. 주유는 이들을 통솔해 승리를 거둡니다.
이 무렵 손권은 내부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중점을 두어 외정 자체가 극히 적기도 했지만, 분각을 다투다시피 몰아치던 손책 시절을 상기해 보면, 이때의 주유는 마치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가 된 것 같습니다. 외정이 적다고는 해도 이술(李術)의 난을 평정해야 했고, 황조토벌군도 여러 차례 움직였을 터입니다. 헌데 주유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요. 만일 주유가 정채를 잃었던 시기가 있었다면, 손책 사후 수년에 걸친 이때이리라 봅니다. 203년 황조토벌전에 주유가 참가하지 않았을 확률은 낮은데, 이때는 감녕 한 사람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꽤나 한심하기 그지 없는 패전을 맛보았습니다. 아울러 손권이 갓 취임했을 때 터진 반란 진압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정보였겠죠. 당시의 군부 웃대가리 3인조 중에서 <단양・오・회계의 역적을 토벌하였다>는 기술이 남아 있는 이는 정보뿐이고, 주유도 여범도 아무런 언급이 없어요. 중앙에서 군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손 쳐도 주유의 움직임은 매우 둔해보입니다.
(주) 황조토벌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황조는 유표의 강하 방면 사령관으로, 손오가 형주 방면으로 세력을 넓히려면 반드시 때려잡아야 하는 상대였습니다. 때문에 손책의 황조토벌을 시작으로, 손권전에도 몇 번이고 도하하여 황조를 공격했다고 언급됩니다.
● 199년의 손책이 주도한 황조토벌 ○ (사이沙羨에서 황조군 격퇴)
● 203년의 손권이 주도한 황조토벌 ● (감녕이 능조를 베어 패퇴)
● 206년의 황조토벌 △ (민중을 포로로 하여 귀환. 아마도 손유와 주유가 마보요새를 쳤다는 기술이 여기 해당합니다)
● 207년의 황조토벌 ○ (성을 함락했다는 언급 있음)
그러나, 네 번의 황조토벌전 중 어느 전투도 승부와는 상관없이 손오가 강하로 세력을 뻗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적벽대전 당시의 최전선은 변함없이 시상이었죠. 특히 207년의 황조토벌전에서는 성을 함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하를 병합하려는 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아 필자를 의아하게 합니다.
손책의 예장평정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한 군을 병합할 의도가 있을 경우 태수를 쫓아낸 후, 유력한 부장을 두어 치안 회복과 방어에 절치부심할 필요가 있어요. 예장에서는 그러한 조치를 취했지만, 강하는 어찌된 일인지, 강하의 무슨 현에 누가 배속되었고 태수로 누구를 남겼다는 기술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성을 함락시킨 다음 전군이 귀환해 버린 겁니다. 당연히 병합될 리가 없지요.
어쩌면 강하토벌은 완전히 방어적 측면에서의 토벌전이 아니었을까요? 즉 병합이 아니라 예장을 집적거리지 못하게 세력을 꺾어놓는 것이 목적인 토벌전이 아니었나 합니다. 공격적이기 짝이 없는 손책의 황조토벌전에서조차 예장을 병합하려 사전준비를 착착 진행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당시의 손오는 아직 강하까지 손을 뻗을 여력이 없었거나, 토로장군(討虜将軍)에 불과한 직책으로는 정식 자사(刺史)인 유표가 통치하는 형주까지 찔러보기가 뭐했는지도 모릅니다. 전부 억측이지만요.
207년의 황조토벌전에서 주유는 전부대독(前部大督, 선봉부대의 사령관)으로 종군했습니다. 이때 선봉부대에는 여몽, 능통, 동습 등이 참가했지요. 주유는 이들을 통솔해 승리를 거둡니다.
아 그야 서방님이 가셨는데 청승과부(오타 아님)가 무슨 기운이 나서 호호호깔깔깔하겠(퍽!)
제 12장. 재능의 종류(才能の種)
내가 주공근을 노력형 수재로 자꾸 몰아가는 것도 그래서라죠. 아니 그리고 솔직히 그 편이 더 재미있....어험어험.
그나저나 어떻게든 베스트 콤비를 강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당신은 걸핏하면 아무 데서나 카이사르 님을 우선 들먹이고 보는 시오노 여사입니까? (.....)
드디어 격동의 208년이 찾아왔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손권전의 <형주 소동>에서부터 이어지는 적벽대전 파트를 참고해 주세요. 여기에서는 주유의 뒤를 따라가보고자 합니다.
조조는 208년 정월부터 현무호(玄武湖)를 만들어 수군 훈련을 개시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남방제패를 위한 밑준비였고, 토벌대상인 손권・유표 진영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여겼을 테지요. 당연하게도 주유는 만약을 대비해 수군 훈련에 들어갑니다. 장소는 파양호(鄱陽湖)였습니다. 주유뿐만 아니라 정보와 여범을 비롯한 군부의 통솔자 전원이 그 자리에 집결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손권은 관청을 오에 두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되면 시상(柴桑)에 관헌들을 집결해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207년 황조토벌전 후에 강하에 머무는 대신 바로 귀환한 건 조조의 동향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조조가 형주토벌군을 움직인 것은 7월. 8월에는 유표가 죽고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지요. 형주의 여론은 투항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후 유비와 노숙이 어떻게 싸바싸바했는지는 손권전의 <노숙의 폭주>를 읽어주시길. 주유전의 기술은 시상회의로 건너뜁니다. (손권전의 <시상회의> 참조) 시상회의는 이미 여러 사이트에서 상세히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유의 승산분석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 조조군이 80만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중원병 15만에 형주병 7만을 더한 정도이다.
● 중원병 15만은 이미 오랜 행군에 지칠대로 지쳐 있고, 형주병은 완전히 조조에게 복속하지 않았다.
● 하물며 중원 출신은 수전에 익숙치 않으므로, 만전을 기하고 있어도 승산이 있다.
● 나아가 조조는 마초와 한수라는 우환도 끌어안고 있다.
● 현재는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풀이 없으며, 그 상태로 강변지대에 들어서면 반드시 역병이 창궐한다.
적벽대전 승리의 원인은 전부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테지요. 수전에 익숙치 못한 중원병이 긴 여정 끝에 강변지대로 온 탓에 역병이 발생했고, 조조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를 미리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병법의 상식 같지만, 당시의 정황을 냉정하게 분석해 중신들을 납득시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주유는 해냈습니다.
흔히 군사적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라 합니다. 분명 손견이나 손책은 천부의 재능에 가까웠어요. 손견은 어쨌거나 부대간 충돌전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고, 손책은 병사 운용에 있어 가히 천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유의 재능은 다소 종류가 다릅니다. 주유의 전략을 지탱하는 근거는 정보였어요. 역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무리 높아봤자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주유는 이미 조조군 내부에서 역병이 돌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보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더구나 주유는 조조군의 실제 병력과 구성을 깡그리 파악하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인 항전론으로는 도저히 바꾸지 못했던 회의의 흐름을 주유는 일거에 돌려놓았습니다. 손책과 주유의 태그가 실로 이상적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재능의 종류가 완전히 달랐으니 서로의 약점도 보완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 시상회의는 철저히 항전한다는 결론과 함께 매듭지어졌습니다. 주유는 3만의 병사와 시상에서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목적지는 하구(夏口)였습니다.
조조는 208년 정월부터 현무호(玄武湖)를 만들어 수군 훈련을 개시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게 남방제패를 위한 밑준비였고, 토벌대상인 손권・유표 진영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여겼을 테지요. 당연하게도 주유는 만약을 대비해 수군 훈련에 들어갑니다. 장소는 파양호(鄱陽湖)였습니다. 주유뿐만 아니라 정보와 여범을 비롯한 군부의 통솔자 전원이 그 자리에 집결하지 않았을까요. 당시의 손권은 관청을 오에 두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되면 시상(柴桑)에 관헌들을 집결해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207년 황조토벌전 후에 강하에 머무는 대신 바로 귀환한 건 조조의 동향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조조가 형주토벌군을 움직인 것은 7월. 8월에는 유표가 죽고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지요. 형주의 여론은 투항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후 유비와 노숙이 어떻게 싸바싸바했는지는 손권전의 <노숙의 폭주>를 읽어주시길. 주유전의 기술은 시상회의로 건너뜁니다. (손권전의 <시상회의> 참조) 시상회의는 이미 여러 사이트에서 상세히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주유의 승산분석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 조조군이 80만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중원병 15만에 형주병 7만을 더한 정도이다.
● 중원병 15만은 이미 오랜 행군에 지칠대로 지쳐 있고, 형주병은 완전히 조조에게 복속하지 않았다.
● 하물며 중원 출신은 수전에 익숙치 않으므로, 만전을 기하고 있어도 승산이 있다.
● 나아가 조조는 마초와 한수라는 우환도 끌어안고 있다.
● 현재는 겨울이라 말에게 먹일 풀이 없으며, 그 상태로 강변지대에 들어서면 반드시 역병이 창궐한다.
적벽대전 승리의 원인은 전부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테지요. 수전에 익숙치 못한 중원병이 긴 여정 끝에 강변지대로 온 탓에 역병이 발생했고, 조조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를 미리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병법의 상식 같지만, 당시의 정황을 냉정하게 분석해 중신들을 납득시키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주유는 해냈습니다.
흔히 군사적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라 합니다. 분명 손견이나 손책은 천부의 재능에 가까웠어요. 손견은 어쨌거나 부대간 충돌전에서 압도적 우세를 보였고, 손책은 병사 운용에 있어 가히 천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유의 재능은 다소 종류가 다릅니다. 주유의 전략을 지탱하는 근거는 정보였어요. 역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무리 높아봤자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주유는 이미 조조군 내부에서 역병이 돌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보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더구나 주유는 조조군의 실제 병력과 구성을 깡그리 파악하고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인 항전론으로는 도저히 바꾸지 못했던 회의의 흐름을 주유는 일거에 돌려놓았습니다. 손책과 주유의 태그가 실로 이상적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재능의 종류가 완전히 달랐으니 서로의 약점도 보완할 수 있었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 시상회의는 철저히 항전한다는 결론과 함께 매듭지어졌습니다. 주유는 3만의 병사와 시상에서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목적지는 하구(夏口)였습니다.
내가 주공근을 노력형 수재로 자꾸 몰아가는 것도 그래서라죠. 아니 그리고 솔직히 그 편이 더 재미있....어험어험.
그나저나 어떻게든 베스트 콤비를 강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는 당신은 걸핏하면 아무 데서나 카이사르 님을 우선 들먹이고 보는 시오노 여사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