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사막에서는 물 한 방울도 귀중한 보고
Chapter 2.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뻘소리는 작작하고 그냥 건너라
Chapter 3. 무모함이 도를 넘으면 귀신도 질린대더라
Chapter 4. 남자의 헌팅 대사는 예나 지금이나 발전이 없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Chapter 6. 잠자는 공주는 원래 변태성욕자의 이야기라죠
Chapter 7. 애들은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자란다
Chapter 8. 참을성도 삼세 번까지
Chapter 9. 나쁜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터진다
Chapter 10.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데 정말이긴 한 거냐
Epilogue.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Chapter 5.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
"와아! 정말 네푸드를 건너셨단 말예요? 무려 열 아흐레만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에요. 대단해요, 록온!"
"응……칭찬은 고마운데, 좀 떨어져 줄 수 없을까……?"
양손을 더럭 움켜쥐고 콧등을 부비댈 기세로 얼굴을 바짝 붙인 알렐루야의 반짝반짝 눈빛 공격도 부담스럽고 세츠나가 화를 내며 뒤에서 함부로 꼬집어대는 옆구리도 아팠다.
록온 일행은 와디 람에 있는 호웨이타트의 여름 캠프에 와 있었다.
‡ ‡ ‡ ‡ ‡
소녀의 백드롭/스피닝 버드킥/저먼스플렉스의 아름다운 3단 콤보를 줄로 쳐맞고 속절없이 침몰했을 알렐루야는 10초 만에 발딱 퉁겨올라 더욱 쌩쌩하게 소녀의 머리끄댕이를 잡으러 달려들었고 소녀는 니킥으로 응전했다. 보고 싶었다 요년아! 네 이놈 E-0057! 언어면 행동면에서 청소년의 교육에 여러모로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개판 오분 전의 혈투였다.
세츠나의 눈을 가리는데도 한계는 있었고, 영국신사의 양심을 걸고 한 떨기 꽃같이 어여쁜 10대 소녀에게, 그게 혹 조랑말의 꼬랑지를 움켜쥐고 자이언트 스윙을 하는 소녀라 해도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는 차마 없었으므로, 록온은 대신 오차 범위 0.0001%의 초정밀 겨냥으로 알렐루야의 뒤통수에 묵직한 루거를 작렬시켰으며, 그 결과로 소녀에게는 굿잡 싸인을, 약 2분 가량 모래에 얼굴을 묻고 있다 온화한 표정과 소심만땅한 어조와 은색 눈을 되찾은 알렐루야에게는 자기소개와 감사 인사와 초청을 한 큐에 다 받았다.
살쾡이처럼 경계하는 세츠나를 어차피 우리에겐 호웨이타트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애써 다독여가며 록온이 초청을 수락하자, 알렐루야는 화악 밝아진 표정으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덩치는 산만한 게 너무나 순수하게 반가워하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마음이 살짝 따스해져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알렐루야는 들뜬 얼굴로 자아 마리, 우리도 돌아가자, 라며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소녀는 캬아악 발광하며 팔을 좌악 긁었다. 난 소마 필리스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록온은 후회했다.
‡ ‡ ‡ ‡ ‡
"아 맞다, 아까 그건 제가 아니라 제 두 번째 인격인 할렐루야예요. 전 이중인격이거든요."
"설정도 설명도 강인해!?"
‡ ‡ ‡ ‡ ‡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가 이끄는 북부 호웨이타트족은 유난히 앳된 소년소녀들이 많았고, 희한하게도 노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도 100파운드짜리 밀가루 부대 한둘쯤은 태연히 짊어지고 활보하는가 하면, 오드아이인 알렐루야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눈이 선명한 금색을 띠고 있었다. 땅거미가 짙어지는 하늘 밑에서 금색으로 번쩍이는 수백 수천의 눈동자는 죽도록 심장에 나빴다6).
감정 표현이 희박한 세츠나가 드물게도 이래서 오기 싫었다고 입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록온은 도저히 책망할 수가 없었다. 본인도 괜히 오지 않았나 자문하고 있던 참이다.
그 자문은 식사 타임에 이르러 당사비 여섯 배로 맹렬해졌다. 호웨이타트족의 식사 규모에 대한 소문은 바람결에 주워듣긴 했으나, 바퀴벌레마냥 줄줄줄줄을 지어 접시를 끝도 없이 날라오는 시종의 행렬과 건너편에 앉은 놈이 보이지도 않는 음식의 산산산산산산산은 이미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미 낙타고기 30인분이 알렐루야의 위장으로 헛되이 사라졌으며, 록온은 속이 메슥거렸고 세츠나마저도 은은하게 창백했다.
한편 알렐루야의 말로는 마리 파파시 엘 카데르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소마 필리스 엘 페이르인 은발의 소녀는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물을 따르러 와서는 알렐루야의 목구멍에 전갈을 산 채로 쑤셔넣으려다 치맛자락을 걷고 달려온 시녀들에게 잡혀 도로 끌려갔다.
"한때는 마리도 제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말해줬어요."
남의 가정사 남의 가정사 남의 가정사 주문을 삼백만 번 외웠으나 그예 고양이도 때려잡는 호기심에 지고 만 록온이 빙빙 에둘러서 사연을 물어보자, 알렐루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다며 속사정을 기꺼이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젠 자꾸 자기가 소마 필리스라 주장하고, 제 이름도 불러주지 않아요. E-0057이라고만 하고……."
"저런."
"자는 사이에 눈썹을 죄 밀어버린 적도 있어요."
"쯧쯧."
"매일같이 물에 조금씩 독약을 타고."
"……엉?"
"녹슨 뻰찌로 어렵게 자란 제 슴가털을 다 뽑아버렸고."
"마, 많이 아팠겠……다?"
"목욕통 속에서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기도 하고."
"……."
"텐트에 불도 지르고……."
"……."
"달군 석쇠로 얼굴을 후려갈기고……."
"……."
알렐루야는 백짓장처럼 질린 록온의 손을 더럭 부여잡고 서럽게 징징 울었다.
"참 이상하죠 록온, 어째선지 마리가 더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증오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 ‡ ‡ ‡ ‡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신세타령을 보살의 마음으로 끝까지 다 받아준 보람이 있어 자리는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슬슬 때가 되었음을 가늠한 록온은 헛기침을 하고, 가장 중요한 본론에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 알렐루야?"
"물론이에요! 결혼식 날짜가 궁금하세요? 아니면,"
"어째서 터키군이 아카바에 주둔하도록 내버려두는 거지?"
좌중의 공기가 단박에 얼어붙었다.
새파랗게 굳어버린 알렐루야는 입술을 떨면서 힘겹게 내뱉었다.
"──호웨이타트는,"
록온은 긴장했다. 등 뒤에서 세츠나가 언제라도 뽑을 수 있게 시미타르의 자루를 조용히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알렐루야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엥겔 계수가 99예요."
썰렁한 모래바람 한 줄기가 텐트를 휘돌고 지나갔다.
먹은 것도 없이 사래가 들린 록온의 등을 세츠나가 사려 깊게 두드려주었다.
"……그, 그래서……터키가 지불하는 150기니를?"
"와아 록온, 굉장해요! 어떻게 액수까지 알고 계세요?"
감탄도 잠시일 뿐 알렐루야의 은회색 눈에는 눈물이 또다시 울망울망 차올랐다.
"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게 없인 도저히 부족을 부양할 수가……!!"
힝힝 울면서도 알렐루야의 손만은 입과 접시 사이를 토나올 것 같은 속도로 부지런히 왕복하고 있었다. 록온은 처절히 납득했다. 과연, 저 반의 반절의 식욕만 있어도 부족 하나 파산하긴 유도 아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야.
"저기, 사실 150기니로도 빠듯하지 않아?"
"예, 예에……이번에 아기들이 생각보다 많이 태어나서 예산이 달랑달랑, 병시나 넌 짜져 있어!"
"와아 할렐루야."
형형한 금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알렐루야를 단숨에 밀쳐내고 튀어나온 할렐루야는 접시의 산을 폭풍우같이 휩쓸어버리고 6피트가 넘는 장신을 꼿꼿이 세웠다.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이 록온 스트라토스, 한 달에 150기니는 터키놈들의 자금 규모에 비하면 껌값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카바에 더 큰 보물상자가 있으니 그걸 가지러 같이 가지 않겠니, 하고 이 멍청한 샛기를 꼬드길 작정이었지! 띨띨한 알렐루야 놈은 미인계에 깜빡 속을지 몰라도 나님은 그렇겐 안돼!"
"어라라, 이거 들켜버렸네?"
록온은 혀를 내밀며 냐하핫 웃어보였다.
"미안미안, 날로 설득하려 했던 점은 사과할게. 요즘 하도 고생이 많아서 우리도 좀 편해보고 싶었지."
"누굴 속이려고 깝치고 지랄이야!"
"글쎄, 미안하다니까. ──그럼,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의 사자로서 할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에게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아카바 원정을 도와주지 않겠어?"
"헤에, 이 할렐루야 님더러 그 왕자놈의 개가 되라고?"
"터키에게 돈을 받고 터키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으면 이미 놈들의 개가 아닌가."
"닥쳐 하리스 꼬맹이."
할렐루야의 금색 눈과 세츠나의 적갈색 눈이 맞부딪혀 사납게 불꽃을 튀겼다. 록온은 한숨을 쉬며 칼이 칼집을 떠나기 전에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세츠나.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할렐루야, 우린 동맹을 제안하러 온 거라고. 확대 해석은 곤란해."
"뭘 위한 아카바 점령이냐? 좆같은 영국을 위해서?"
"아니, 아랍을 위해서."
"아랍, 헤에, 아랍이라! 호웨이타트, 하리스, 아질리, 베니 사하, 아게일은 들어봤어도 아랍이라! 그건 또 뭐하는 부족이래?"
"터키에게 목줄을 잡힌 노예의 부족이야."
"그럼 나님과는 상관없어. 내 부족은 호웨이타트 뿐이다."
"정말 상관없을까. 호웨이타트도 터키를 섬기고 있잖아?"
"섬긴다고!"
할렐루야는 바닥에 흩어진 접시를 난폭하게 걷어찼다. 록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할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 님한테, 말 다했냐!"
"보통은 돈을 받고 지시를 따르는 걸 섬긴다고 하거든."
"얼굴 반반한 형씨, 아가리 싸물어. 호웨이타트는 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죽고 사는 놈들이고 나 이외엔 누구도 섬기지 않아. 그래, 왜 우리가 터키 색히들이 아카바에서 활개치게 냅두냐고? 당연히 그 편이 재미있으니까다! 시시한 영국 찐따들이나 개좆노망난 사이드 할아범보다 터키 색히들이 더 자극적이니까! 내가 터키의 노예라고, 미친 새끼! 한 번만 더 주둥일 함부로 놀려봐. 생으로 아가릴 찢고 죽을 때까지 범해버릴 테다! ……알렐루야 이 등신 새꺄, 머릿속에서 징징대지 마! 넌 또 뭐가 좋다고 실실대고 쳐자빠졌어?"
마지막 문장은 피식피식 웃고 있는 록온을 향한 말이었다. 록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유쾌하게 웃으며 세츠나를 보았다.
"세츠나, 우리 처음부터 실수했다. 할렐루야는 돈 때문에 아카바로 가진 않을 거야."
"누굴 돈독 오른 노랭이로 보는 거냐, 앙?"
"파이살 왕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당연하지 샛갸."
"물론 터키를 골탕먹이고 싶어서도 아니고."
록온은 할렐루야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호웨이타트를 제 종으로 믿고 있는 터키군에게 한 방 먹이는 건 훨씬 재미있을 테니까."
할렐루야의 얼굴이 단박에 와드득 구겨졌다. 정곡을 찔렀음을 즐거이 만끽하며, 록온은 여세를 몰아 쐐기를 박았다.
"할렐루야는 즐거운 걸 좋아하니까, 기꺼이 아카바로 가겠지. 안 그래?"
지독하게 박정한 입술을 들썩이며 뭔가 반박할 말을 모색했으나, 그래봤자 어차피 속세의 때가 덜 탄 열 아홉 청년은 스물 넷의 지저분한 어른을 당할 수 없는 고로 할렐루야는 현명하게 반격을 포기하고 실실 쪼개는 허여멀건한 낯짝을 향해 텐트가 떠나가라 포효하였다.
"니놈 새끼 에미는 전갈이랑 붙어먹었냐!"
"고마워. 최고의 찬사야."
"록온, 그건 내 대사다."
‡ ‡ ‡ ‡ ‡
하리스-호웨이타트 연합군은 아카바의 배후까지 무사히 진군했다.
가심이 무심코 호웨이타트족의 빵을 먹어버려 한때는 공동 전선이 와해되고 다 된 판이 엎어질 위기에 몰렸으나, 좋은 핑계도 생긴 김에 걍 2차전으로 돌입부터 하고 보려는 세츠나와 할렐루야 틈새에 록온이 필사적으로 난입해 우선 버둥바둥 반항하는 세츠나를 반짝 안아올려 옆으로 치워버린 후 자기가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 않은 부외자임을 주장하며 저 친구는 내가 직접 네푸드에서 건져왔으니 목숨도 내 거고 다 내 책임이고 고로 내가 보상하겠다 빡빡 우겨서 가까스로 무마할 수 있었다.
동맹 와해에 비하면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얼굴의 할렐루야가 록온의 턱을 슥 들어올리고 보상으로 대라면 댈, 까지 내뱉었다가 총알같이 튀어나온 소마의 파일 드라이버를 정통으로 맞고 침묵한 일은 하찮은 부차적 사건에 불과했다. 록온이 치워버린 김에 세츠나를 내내 포옥 껴안고 있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시미타르가 할렐루야의 머리통에 꽂힐 뻔한 것에 비하면야.
필자의 특기가 아닌 상세한 전투 묘사 따위는 전부 생략하고, 아카바 기습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미스 스메라기에게 사흘들이 날치기로 배워온 전술 예측이 뒷발질로 쥐잡기나마 그럭저럭 맞아떨어져 록온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다만 딱 한 가지, 호웨이타트 파워가 예상치를 좀 심하게 오버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토, 토, 토, 통신 설비가아아아아아악!!!?"
관청 청사는 흔적도 없었다.
‡ ‡ ‡ ‡ ‡
시나이 사막을 건너 카이로로 가겠다는 록온의 선언에 대한 세츠나의 응수는, 전력을 다해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덱데굴 구르는 록온에게 아이는 절대영도의 냉기를 품은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푸드 한 번 넘어보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나."
"어……어쩔 수 없잖아! 통신 설비는 다 박살났고, 이만한 성과가 있으니 총 더 내놓으라 웃대가리들을 긁을 사람 이 자리에 나밖에 더 있어! 금고에 하필 채권밖에 없어서 할렐루야가 대박 삐졌으니 호웨이타트 친구들에게 금도 몇 상자 갖다줘야 하고, 빵도 보상해야 하고, 간 김에 우유도 공수해 와야 하고."
"……우유?"
"아 미안, 이쪽 얘기야."
록온은 세츠나의 작지만 굳은살이 촘촘히 박힌 전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쥐었다.
"열흘 내로 돌아올게. 꼭이야."
"……."
"세─츠─나, 내가 약속을 어긴 적 있어?"
어차피 세상의 누구도 이 정신나간 사내를 못 말릴 줄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세츠나는, 청록색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기어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네 녀석 고집엔 이제 신물이 난다."
"아 너무해."
"──열흘이다. 다녀와라."
"응."
"제가,"
알렐루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얼레? 알렐루야 있었냐?"
"응……칭찬은 고마운데, 좀 떨어져 줄 수 없을까……?"
양손을 더럭 움켜쥐고 콧등을 부비댈 기세로 얼굴을 바짝 붙인 알렐루야의 반짝반짝 눈빛 공격도 부담스럽고 세츠나가 화를 내며 뒤에서 함부로 꼬집어대는 옆구리도 아팠다.
록온 일행은 와디 람에 있는 호웨이타트의 여름 캠프에 와 있었다.
소녀의 백드롭/스피닝 버드킥/저먼스플렉스의 아름다운 3단 콤보를 줄로 쳐맞고 속절없이 침몰했을 알렐루야는 10초 만에 발딱 퉁겨올라 더욱 쌩쌩하게 소녀의 머리끄댕이를 잡으러 달려들었고 소녀는 니킥으로 응전했다. 보고 싶었다 요년아! 네 이놈 E-0057! 언어면 행동면에서 청소년의 교육에 여러모로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개판 오분 전의 혈투였다.
세츠나의 눈을 가리는데도 한계는 있었고, 영국신사의 양심을 걸고 한 떨기 꽃같이 어여쁜 10대 소녀에게, 그게 혹 조랑말의 꼬랑지를 움켜쥐고 자이언트 스윙을 하는 소녀라 해도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는 차마 없었으므로, 록온은 대신 오차 범위 0.0001%의 초정밀 겨냥으로 알렐루야의 뒤통수에 묵직한 루거를 작렬시켰으며, 그 결과로 소녀에게는 굿잡 싸인을, 약 2분 가량 모래에 얼굴을 묻고 있다 온화한 표정과 소심만땅한 어조와 은색 눈을 되찾은 알렐루야에게는 자기소개와 감사 인사와 초청을 한 큐에 다 받았다.
살쾡이처럼 경계하는 세츠나를 어차피 우리에겐 호웨이타트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애써 다독여가며 록온이 초청을 수락하자, 알렐루야는 화악 밝아진 표정으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덩치는 산만한 게 너무나 순수하게 반가워하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마음이 살짝 따스해져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알렐루야는 들뜬 얼굴로 자아 마리, 우리도 돌아가자, 라며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소녀는 캬아악 발광하며 팔을 좌악 긁었다. 난 소마 필리스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록온은 후회했다.
"아 맞다, 아까 그건 제가 아니라 제 두 번째 인격인 할렐루야예요. 전 이중인격이거든요."
"설정도 설명도 강인해!?"
알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가 이끄는 북부 호웨이타트족은 유난히 앳된 소년소녀들이 많았고, 희한하게도 노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불과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도 100파운드짜리 밀가루 부대 한둘쯤은 태연히 짊어지고 활보하는가 하면, 오드아이인 알렐루야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눈이 선명한 금색을 띠고 있었다. 땅거미가 짙어지는 하늘 밑에서 금색으로 번쩍이는 수백 수천의 눈동자는 죽도록 심장에 나빴다6).
감정 표현이 희박한 세츠나가 드물게도 이래서 오기 싫었다고 입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록온은 도저히 책망할 수가 없었다. 본인도 괜히 오지 않았나 자문하고 있던 참이다.
그 자문은 식사 타임에 이르러 당사비 여섯 배로 맹렬해졌다. 호웨이타트족의 식사 규모에 대한 소문은 바람결에 주워듣긴 했으나, 바퀴벌레마냥 줄줄줄줄을 지어 접시를 끝도 없이 날라오는 시종의 행렬과 건너편에 앉은 놈이 보이지도 않는 음식의 산산산산산산산은 이미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이미 낙타고기 30인분이 알렐루야의 위장으로 헛되이 사라졌으며, 록온은 속이 메슥거렸고 세츠나마저도 은은하게 창백했다.
한편 알렐루야의 말로는 마리 파파시 엘 카데르고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소마 필리스 엘 페이르인 은발의 소녀는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물을 따르러 와서는 알렐루야의 목구멍에 전갈을 산 채로 쑤셔넣으려다 치맛자락을 걷고 달려온 시녀들에게 잡혀 도로 끌려갔다.
"한때는 마리도 제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고 말해줬어요."
남의 가정사 남의 가정사 남의 가정사 주문을 삼백만 번 외웠으나 그예 고양이도 때려잡는 호기심에 지고 만 록온이 빙빙 에둘러서 사연을 물어보자, 알렐루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다며 속사정을 기꺼이 털어놓았다.
"그런데 이젠 자꾸 자기가 소마 필리스라 주장하고, 제 이름도 불러주지 않아요. E-0057이라고만 하고……."
"저런."
"자는 사이에 눈썹을 죄 밀어버린 적도 있어요."
"쯧쯧."
"매일같이 물에 조금씩 독약을 타고."
"……엉?"
"녹슨 뻰찌로 어렵게 자란 제 슴가털을 다 뽑아버렸고."
"마, 많이 아팠겠……다?"
"목욕통 속에서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기도 하고."
"……."
"텐트에 불도 지르고……."
"……."
"달군 석쇠로 얼굴을 후려갈기고……."
"……."
알렐루야는 백짓장처럼 질린 록온의 손을 더럭 부여잡고 서럽게 징징 울었다.
"참 이상하죠 록온, 어째선지 마리가 더는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증오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신세타령을 보살의 마음으로 끝까지 다 받아준 보람이 있어 자리는 한결 화기애애해졌다. 슬슬 때가 되었음을 가늠한 록온은 헛기침을 하고, 가장 중요한 본론에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 알렐루야?"
"물론이에요! 결혼식 날짜가 궁금하세요? 아니면,"
"어째서 터키군이 아카바에 주둔하도록 내버려두는 거지?"
좌중의 공기가 단박에 얼어붙었다.
새파랗게 굳어버린 알렐루야는 입술을 떨면서 힘겹게 내뱉었다.
"──호웨이타트는,"
록온은 긴장했다. 등 뒤에서 세츠나가 언제라도 뽑을 수 있게 시미타르의 자루를 조용히 움켜쥐는 게 느껴졌다.
알렐루야는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엥겔 계수가 99예요."
썰렁한 모래바람 한 줄기가 텐트를 휘돌고 지나갔다.
먹은 것도 없이 사래가 들린 록온의 등을 세츠나가 사려 깊게 두드려주었다.
"……그, 그래서……터키가 지불하는 150기니를?"
"와아 록온, 굉장해요! 어떻게 액수까지 알고 계세요?"
감탄도 잠시일 뿐 알렐루야의 은회색 눈에는 눈물이 또다시 울망울망 차올랐다.
"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게 없인 도저히 부족을 부양할 수가……!!"
힝힝 울면서도 알렐루야의 손만은 입과 접시 사이를 토나올 것 같은 속도로 부지런히 왕복하고 있었다. 록온은 처절히 납득했다. 과연, 저 반의 반절의 식욕만 있어도 부족 하나 파산하긴 유도 아니겠다 싶었다.
──그렇다면야.
"저기, 사실 150기니로도 빠듯하지 않아?"
"예, 예에……이번에 아기들이 생각보다 많이 태어나서 예산이 달랑달랑, 병시나 넌 짜져 있어!"
"와아 할렐루야."
형형한 금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알렐루야를 단숨에 밀쳐내고 튀어나온 할렐루야는 접시의 산을 폭풍우같이 휩쓸어버리고 6피트가 넘는 장신을 꼿꼿이 세웠다.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야이 록온 스트라토스, 한 달에 150기니는 터키놈들의 자금 규모에 비하면 껌값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카바에 더 큰 보물상자가 있으니 그걸 가지러 같이 가지 않겠니, 하고 이 멍청한 샛기를 꼬드길 작정이었지! 띨띨한 알렐루야 놈은 미인계에 깜빡 속을지 몰라도 나님은 그렇겐 안돼!"
"어라라, 이거 들켜버렸네?"
록온은 혀를 내밀며 냐하핫 웃어보였다.
"미안미안, 날로 설득하려 했던 점은 사과할게. 요즘 하도 고생이 많아서 우리도 좀 편해보고 싶었지."
"누굴 속이려고 깝치고 지랄이야!"
"글쎄, 미안하다니까. ──그럼, 파이살 티에리아 이븐 후세인 왕자의 사자로서 할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에게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아카바 원정을 도와주지 않겠어?"
"헤에, 이 할렐루야 님더러 그 왕자놈의 개가 되라고?"
"터키에게 돈을 받고 터키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으면 이미 놈들의 개가 아닌가."
"닥쳐 하리스 꼬맹이."
할렐루야의 금색 눈과 세츠나의 적갈색 눈이 맞부딪혀 사납게 불꽃을 튀겼다. 록온은 한숨을 쉬며 칼이 칼집을 떠나기 전에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 자, 세츠나.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할렐루야, 우린 동맹을 제안하러 온 거라고. 확대 해석은 곤란해."
"뭘 위한 아카바 점령이냐? 좆같은 영국을 위해서?"
"아니, 아랍을 위해서."
"아랍, 헤에, 아랍이라! 호웨이타트, 하리스, 아질리, 베니 사하, 아게일은 들어봤어도 아랍이라! 그건 또 뭐하는 부족이래?"
"터키에게 목줄을 잡힌 노예의 부족이야."
"그럼 나님과는 상관없어. 내 부족은 호웨이타트 뿐이다."
"정말 상관없을까. 호웨이타트도 터키를 섬기고 있잖아?"
"섬긴다고!"
할렐루야는 바닥에 흩어진 접시를 난폭하게 걷어찼다. 록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할렐루야 아우다 아부 타이 님한테, 말 다했냐!"
"보통은 돈을 받고 지시를 따르는 걸 섬긴다고 하거든."
"얼굴 반반한 형씨, 아가리 싸물어. 호웨이타트는 나님의 즐거움을 위해 죽고 사는 놈들이고 나 이외엔 누구도 섬기지 않아. 그래, 왜 우리가 터키 색히들이 아카바에서 활개치게 냅두냐고? 당연히 그 편이 재미있으니까다! 시시한 영국 찐따들이나 개좆노망난 사이드 할아범보다 터키 색히들이 더 자극적이니까! 내가 터키의 노예라고, 미친 새끼! 한 번만 더 주둥일 함부로 놀려봐. 생으로 아가릴 찢고 죽을 때까지 범해버릴 테다! ……알렐루야 이 등신 새꺄, 머릿속에서 징징대지 마! 넌 또 뭐가 좋다고 실실대고 쳐자빠졌어?"
마지막 문장은 피식피식 웃고 있는 록온을 향한 말이었다. 록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유쾌하게 웃으며 세츠나를 보았다.
"세츠나, 우리 처음부터 실수했다. 할렐루야는 돈 때문에 아카바로 가진 않을 거야."
"누굴 돈독 오른 노랭이로 보는 거냐, 앙?"
"파이살 왕자를 위해서도 아니고."
"당연하지 샛갸."
"물론 터키를 골탕먹이고 싶어서도 아니고."
록온은 할렐루야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호웨이타트를 제 종으로 믿고 있는 터키군에게 한 방 먹이는 건 훨씬 재미있을 테니까."
할렐루야의 얼굴이 단박에 와드득 구겨졌다. 정곡을 찔렀음을 즐거이 만끽하며, 록온은 여세를 몰아 쐐기를 박았다.
"할렐루야는 즐거운 걸 좋아하니까, 기꺼이 아카바로 가겠지. 안 그래?"
지독하게 박정한 입술을 들썩이며 뭔가 반박할 말을 모색했으나, 그래봤자 어차피 속세의 때가 덜 탄 열 아홉 청년은 스물 넷의 지저분한 어른을 당할 수 없는 고로 할렐루야는 현명하게 반격을 포기하고 실실 쪼개는 허여멀건한 낯짝을 향해 텐트가 떠나가라 포효하였다.
"니놈 새끼 에미는 전갈이랑 붙어먹었냐!"
"고마워. 최고의 찬사야."
"록온, 그건 내 대사다."
하리스-호웨이타트 연합군은 아카바의 배후까지 무사히 진군했다.
가심이 무심코 호웨이타트족의 빵을 먹어버려 한때는 공동 전선이 와해되고 다 된 판이 엎어질 위기에 몰렸으나, 좋은 핑계도 생긴 김에 걍 2차전으로 돌입부터 하고 보려는 세츠나와 할렐루야 틈새에 록온이 필사적으로 난입해 우선 버둥바둥 반항하는 세츠나를 반짝 안아올려 옆으로 치워버린 후 자기가 어느 부족에도 속하지 않은 부외자임을 주장하며 저 친구는 내가 직접 네푸드에서 건져왔으니 목숨도 내 거고 다 내 책임이고 고로 내가 보상하겠다 빡빡 우겨서 가까스로 무마할 수 있었다.
동맹 와해에 비하면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얼굴의 할렐루야가 록온의 턱을 슥 들어올리고 보상으로 대라면 댈, 까지 내뱉었다가 총알같이 튀어나온 소마의 파일 드라이버를 정통으로 맞고 침묵한 일은 하찮은 부차적 사건에 불과했다. 록온이 치워버린 김에 세츠나를 내내 포옥 껴안고 있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시미타르가 할렐루야의 머리통에 꽂힐 뻔한 것에 비하면야.
필자의 특기가 아닌 상세한 전투 묘사 따위는 전부 생략하고, 아카바 기습전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미스 스메라기에게 사흘들이 날치기로 배워온 전술 예측이 뒷발질로 쥐잡기나마 그럭저럭 맞아떨어져 록온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다만 딱 한 가지, 호웨이타트 파워가 예상치를 좀 심하게 오버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토, 토, 토, 통신 설비가아아아아아악!!!?"
관청 청사는 흔적도 없었다.
시나이 사막을 건너 카이로로 가겠다는 록온의 선언에 대한 세츠나의 응수는, 전력을 다해 정강이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덱데굴 구르는 록온에게 아이는 절대영도의 냉기를 품은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푸드 한 번 넘어보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나."
"어……어쩔 수 없잖아! 통신 설비는 다 박살났고, 이만한 성과가 있으니 총 더 내놓으라 웃대가리들을 긁을 사람 이 자리에 나밖에 더 있어! 금고에 하필 채권밖에 없어서 할렐루야가 대박 삐졌으니 호웨이타트 친구들에게 금도 몇 상자 갖다줘야 하고, 빵도 보상해야 하고, 간 김에 우유도 공수해 와야 하고."
"……우유?"
"아 미안, 이쪽 얘기야."
록온은 세츠나의 작지만 굳은살이 촘촘히 박힌 전사의 손을 조심스럽게 더듬어 쥐었다.
"열흘 내로 돌아올게. 꼭이야."
"……."
"세─츠─나, 내가 약속을 어긴 적 있어?"
어차피 세상의 누구도 이 정신나간 사내를 못 말릴 줄 이미 뼈저리게 체험한 세츠나는, 청록색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기어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네 녀석 고집엔 이제 신물이 난다."
"아 너무해."
"──열흘이다. 다녀와라."
"응."
"제가,"
알렐루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같이 갈게요!"
"……얼레? 알렐루야 있었냐?"
6어디에선가 집단 탈주했다는 설과, 악마를 숭배하고 크나큰 힘을 얻는 대가로 열 아홉을 넘은 부족민을 죄 도살해 제물로 바친다는 설이 있지만 어느 쪽도 입증되지는 않고 있다.